간단하게 맥락만 짚었는데도 인류 보완 계획이 수행자와 절차에 따라 벌써 총 다섯 가지로 나뉘고 있다.
최대한 단순하게 설명하고자 노력을 해도 정리하기가 쉽지 않은 작업인데, 이 개념이 에반게리온 팬들
의 머리를 얼마나 괴롭혔을까, 알 만 하다.
시작하기 전에 잠깐 재미로 밝히자면 보완 계획 : 제레 타입 B인 타브리스를 이용한 서드 임팩트
발발은 제레의 입장에서도 매우 즉흥적인 대안이었지만, 그것은 제작자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인 모양이
었다.
애니메이션의 제작 방식이라 하면 콘티와 그것을 바탕으로 한 기획서,기획서를 바탕으로 한 각본과 최종 결과물의 순서가 있는데, 나기사 카오루라는 소년은 기획서 단계까지만 해도 사도가 아니었고,
다만 그가 데리고 온 고양이가 사도라는 설정이었다.
(본래 22화로 배정될 예정이었던, ‘고양이와 전학생’이란 에피소드가 있었다고 한다.)

아무튼 다시 본론으로 회귀하여, 앞서 언급한 대로 사도를 통한 서드 임팩트는 모두가 막아야 하는
시나리오였음에도 불구하고, 제레가 카오루라는 카드를 꺼낸 이유는 무엇일까?
나기사 카오루는 제레가 아담을 활용하여 인공으로 제작한 사도로, 카오루=아담의 영혼을 담은 그릇
이라고 이해해도 크게 어긋남이 없다.(카오루라는 ‘그릇’이 어떤 것인지는 차후 얘기하도록 하자.)
즉, 사도이기 이전에 카오루는 아담 그 자체이기도 하기 때문에, 제레의 의지를 아담에게 표현해
그로 하여금 임팩트를 일으키게 한다면, 제레 입장에서는 인류의 속죄가 가능할 거란 판단이었다.

겐도우 "우리들에게 남겨진 시간은 얼마 없다.
하지만, 우리의 소망을 막는 롱기누스의 창도 이제 없다.
이제 얼마 안 있으면 마지막 사도가 나타날 것이다."

"그것을 없애면 소망이 이루어져.
이제 금방이야, 유이."
물론 이러한 속죄 방식은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자멸한다는 기본 취지에 다소 어긋나는 터라 제레
입장에서도 이 루트 B가 아주 훌륭한 시나리오는 아니었다.
하지만 말했듯이 이것은 순전히 겐도우가 멋대로 롱기누스의 창을 달 너머로 날리는 바람에 생긴 일
이었으며, 결국 루트 B는 제레의 현실과의 타협의 결과라 볼 수 있겠다.
자, 여기서 타브리스를 네르프 본부로 보내고 난 뒤, 제레 노인들이 하는 소리를 듣고 가자.

후유츠키 "설마, 제레가 직접 보낼 줄이야!"

겐도우 "노인들은 예정에서 한 단계 서두를 셈이다. 우리들의 손으로."

"인간은 어리석음을 잊고 똑같은 과오를 되풀이 한다."
"스스로 속죄를 하지 않으면 인간은 바뀌지 않아."

"아담이나 사도의 힘은 빌리지 않는다."
"우리의 손으로 미래를 바꿀 수밖에 없어."
이것은 리뉴얼 TV판 24화에 타브리스가 터미널 도그마로 하강하면서 나오는 제레의 대사이다.
사실 대부분의 시청자는 이 상황에서 카오루가 사도라는 것만 얼핏 아는 상태이기 때문에, 제레가
피프스 칠드런이라는 명목으로 카오루를 네르프로 보내는 상황 자체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노릇
이다.
그래서 얼핏 보면 제레의 뜻 모를 대사가 굉장히 있어 보이는 내용인 것 같지만, 사실 가만히 보면 모두
겐도우의 처사에 대한 불만이란 걸 알 수 있다.
특히 ‘아담이나 사도의 힘은 빌리지 않는다.’라는 대사를 보자.
제레 역시 이 경우, 엄밀히 말하면 인공이기는 해도 타브리스라는 사도를 이용하여 임팩트를 노리고
있기 때문에 저런 대사를 날릴 자격 요건이 충분한 것 같지 않지만,
저것은 손에 쥔 아담을 통해 릴리스와 융합하려는 겐도우에 대한 질투 섞인 비난인 것이다.
‘우리는 겐도우처럼 치사하게 굴지 않아. 우리 손으로 사도를 보내 쿨하게 직접 속죄할 거야.’라는 뜻이다.
어쨌든 제레가 네르프에 사도를 임팩트 발발 목적으로 보낸다는 건 네르프 입장에서도 예상치 못했던
것이고, ‘겐도우 너, 네 맘대로 그렇게 했지? 어디 한 번 당해 봐라!’라는 제레의 작전은 어느 정도는 성공
했다.
물론, 그 타브리스가 서드 임팩트의 기로 앞에서 어떤 선택을 했는지는, 다들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바로 리린인 신지에게 그 결정권을 넘기는 것이었다.

카오루 "너는 죽어야 할 존재가 아니야.
너희들에게는, 미래가 필요해."

"너와 만날 수 있어서 기뻤어."
재밌지 않은가.
보완을 바라던 세 명의 어른-유이, 겐도우, 킬의 바람은 결국 마지막의 마지막에 각각 소년인 신지,
릴리스인 레이, 아담인 카오루에게 거절을 당했다.
특히나, 카오루가 태어나서 보고 관찰했던 리린은 머리에 죽을 궁리만 가득한 제레의 노인들일 뿐
이었다.
산다는 것에 대해 제레와는 전혀 다른 시각을 보이는 ‘살고 있는 인간’ 신지를 만난 카오루가,
인류의 미래를 선택할 권리가 있다면 그것은 차라리 이 소년에게 있겠구나, 하고 직감했던
것이다.

결국 루트 B도 실패!
자유 의지의 천사라는 이름 그대로 타브리스는 (신지의 의지가 개입된)자멸을 택하고,
속 좁은 제레의 노인들은 타브리스의 이런 선택을 ‘배신’이라고 칭했다.
아무튼 결국 제레는 인류 보완의 또 다른 루트를 모색해야 했다.
그것이 바로 루트 C이자, 실제로 엔드 오브 에바에서 발현된 서드 임팩트와 매우 가까운 형태의
것이었다.
바로 초호기를 이용한 서드 임팩트이다.

S2 기관의 섭취. 이것을 계기로 초호기는 신에 가까운 존재가 되었다.
초호기를 이용한 서드 임팩트가 가능하게 된 것은 릴리스 베이스인 초호기가 생명의 열매인
S2 기관을 흡수(19화에서 생명의 열매를 가진 사도를 먹어 치웠다.)하여 신의 형상에 아주 가까이
다가간 상태였기 때문이다. 즉, 지혜와 생명의 열매를 동시에 가진 ‘신’에게 의탁하면 원하는 방향으로
인류 보완을 이룰 수 있다는 의미이다.(하나 뿐인 롱기누스의 창을 겐도우가 자신 있게 우주 밖으로
던진 것도 이 때문이리라.)
다만, 초호기를 다루는 것이 이카리 겐도우 사령관인 만큼, 제레에게는 목적 달성을 위해 선행해야 할
과제가 있었다.

속죄 의식을 위한 양산기도 진작에 준비 완료!
신이 된 초호기에 의탁하는 서드 임팩트는 마침 겐도우의 보완 계획과도 일치하는 부분이었다.
다만 문제는, 제레의 입장에선 겐도우의 의지가 그것(만들어진 신)에 개입되면 안 된다는 조건이
필요했으며, 제레는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네르프 파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
그저 제레는 겐도우를 포함한 네르프 사람들은 다 몰살하되, 에반게리온만 챙겨서 본래 하려던
의식을 수행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 갈등 관계가 현실로 드러난 것이 바로 문제의 극장판,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이었다.
[에반게리온] 8. 인류 보완 계획 : 서드 임팩트 총정리/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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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 엄디저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