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8월 1일 화요일 성 알폰소 마리아 데 리구오리 주교 학자 기념일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태우듯이,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3,36-43
그때에 36 예수님께서 군중을 떠나 집으로 가셨다. 그러자 제자들이 그분께 다가와,
“밭의 가라지 비유를 저희에게 설명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37 예수님께서 이렇게 이르셨다.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사람의 아들이고,
38 밭은 세상이다. 그리고 좋은 씨는 하늘 나라의 자녀들이고 가라지들은 악한 자의 자녀들이며,
39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악마다. 그리고 수확 때는 세상 종말이고 일꾼들은 천사들이다.
40 그러므로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태우듯이,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41 사람의 아들이 자기 천사들을 보낼 터인데, 그들은 그의 나라에서 남을 죄짓게 하는 모든 자들과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을 거두어, 42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43 그때에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보잘것없는 것 때문에 귀한 생명을 버리게 되는 일이 많았습니다.
어려서부터 성경 속의 ‘가라지’가 참으로 궁금해서 여기 저기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교회에서는 이 가라지를 여러 가지로 말하고 있지요. 특별히 국어사전에 <볏과의 한 해 살이 풀. 줄기와 잎은 조와 비슷하고 이삭은 강아지풀과 비슷하다. 밭에서 자란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나라 교회에서는 사람들에게 논에 나는 ‘피’ 혹은 ‘깜부기’라고 설명합니다. 가라지는 도대체 곡식으로는 양식이 될 수 없고, 밭의 영양분조차 다 빼앗아 먹어서 벼나 곡식이 자라는데 해가 될 뿐만 아니라 아주 번식력이 뛰어나 논이나 밭에 가라지가 있으면 그해 농사는 모두 망치게 됩니다. 이처럼 가라지는 곡식에게 해롭기 때문에 씨 뿌리는 사람이 뿌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깜부기는 일종의 전염병 같은데 이삭이 패고 익어가는 벼, 보리, 밀 이삭이 갑자기 썩어서 새까맣게 되는데 이 깜부기의 홀씨가 곡식에 묻기만 해도 그 곡식 낱알을 이듬해에 심으면 모두 깜부기가 됩니다. 그래서 농부는 씨를 뿌리기 전에 먼저 정성을 들여 소독을 합니다. 큰 항아리에 곡식을 넣고, 10%-15%정도의 소금물에 하루 정도 담가두면 깜부기의 홀씨가 없어져 그 해의 농사에 지장이 없게 합니다. 그런데 이 '피'나 '강아지풀'은 정말 어쩔 수가 없어서 일일이 뽑아주거나 알맹이가 여물기 전에 잘라서 불에 태워야만 합니다.
나의 인생을 가만히 살펴보면 가라지로 살았음을 느낍니다. 하느님의 자녀로 산다고 항상 생각하고 살았지만 악마의 유혹에 물들어 내 주변의 사람들에게 잘한 것이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내 기준에 따라서 다른 사람들이 살기를 바랐고, 그래서 마음에 상처를 주고, 내 주장과 내 생각으로 다른 사람들을 통제하고 다스리려고 하였지요. 그래서 세상 사는데 정신이 팔려서 삶의 진정한 가치를 깨닫지 못하고 살았다는 것을 이제야 느끼고 알게 되었답니다.
이솝 우화에 원숭이를 잘 키운 사람이 있었지요. 이 원숭이는 주인의 말을 너무 잘 들어서 웬만한 일은 전부 원숭이에게 시켰는데 어느 여름날에 주인은 낮잠을 자고 싶었고, 콧물이 흐르기 때문에 원숭이에게 몰려드는 파리를 쫓으라고 부탁했습니다. 원숭이는 주인의 곁에서 아주 정성을 다해서 파리를 쫓게 되었는데 근 한 시간이 넘게 파리를 쫓다가 보니 원숭이는 팔과 다리가 아프기 시작해서 슬슬 꾀가 나서 원숭이는 결심합니다. ‘이 파리들을 모두 죽이리라.’ 원래 팔 힘이 워낙 강한 원숭이는 마당에서 주워온 아주 큰 바위 돌을 힘껏 들어 올려 머리위로 치켜들고 있다가 주인의 몸에 파리가 가장 많이 몰려들었을 때 힘껏 내려쳤습니다. 주인을 괴롭히는 파리를 잡으려다가 그만 주인을 해치게 된 것입니다.
우리도 세상을 살면서 정말 어리석어서 파리 같이 보잘것없는 것 때문에 귀한 생명을 버리게 되는 일이 많습니다. 정말 아주 작은 깜부기의 홀씨 같은 악마의 유혹과 세상의 유혹으로 일생을 망칠 수가 있지요. 조금씩 좀먹어 들어오는 가라지가 귀중한 하느님의 양분을 가로채고, 햇볕 같은 은총을 가로막고, 삶에 지치고 힘들어서 자포자기(自暴自棄)하여 살곤 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도 죄 짓게 하고 옳지 않은 삶으로 몰고 가서 가라지처럼 불에 태워져 버릴 후회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전쟁을 하거나 다른 사람들을 선동하여 잘못 인도하거나, 이혼을 하고 급기야 자살하는 사람들, 또 자기가 하는 일에 끌어들여 손해를 끼치는 사람들, 혹은 신앙을 잘못 인도하는 사람들로 우리가 불에 태워지는 사람이 되어서야 되겠습니까?
<주님께서는 모세와 얼굴을 마주하여 말씀하시곤 하였다.>
▥ 탈출기의 말씀입니다. 33,7-11; 34,5ㄴ-9.28
그 무렵 7 모세는 천막을 챙겨 진영 밖으로 나가 진영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그것을 치곤 하였다.
모세는 그것을 만남의 천막이라 불렀다. 주님을 찾을 일이 생기면, 누구든지 진영 밖에 있는 만남의 천막으로 갔다.
8 모세가 천막으로 갈 때면, 온 백성은 일어나 저마다 자기 천막 어귀에 서서,
모세가 천막으로 들어갈 때까지 그 뒤를 지켜보았다.
9 모세가 천막으로 들어가면, 구름 기둥이 내려와 천막 어귀에 머무르고, 주님께서 모세와 말씀을 나누셨다.
10 구름 기둥이 천막 어귀에 머무르는 것을 보면, 온 백성은 일어나 저마다 자기 천막 어귀에서 경배하였다.
11 주님께서는 마치 사람이 자기 친구에게 말하듯, 모세와 얼굴을 마주하여 말씀하시곤 하였다.
모세가 진영으로 돌아온 뒤에도, 그의 젊은 시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천막 안을 떠나지 않았다.
34,5 주님께서 모세와 함께 서시어, ‘야훼’라는 이름을 선포하셨다.
6 주님께서는 모세 앞을 지나가며 선포하셨다. “주님은, 주님은 자비하고 너그러운 하느님이다.
분노에 더디고 자애와 진실이 충만하며
7 천대에 이르기까지 자애를 베풀고 죄악과 악행과 잘못을 용서한다.
그러나 벌하지 않은 채 내버려 두지 않고 조상들의 죄악을 아들 손자들을 거쳐 삼 대 사 대까지 벌한다.”
8 모세는 얼른 땅에 무릎을 꿇어 경배하며 9 아뢰었다.
“주님, 제가 정녕 당신 눈에 든다면, 주님께서 저희와 함께 가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 백성이 목이 뻣뻣하기는 하지만, 저희 죄악과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 저희를 당신 소유로 삼아 주시기를 바랍니다.”
28 모세는 그곳에서 주님과 함께 밤낮으로 사십 일을 지내면서, 빵도 먹지 않고 물도 마시지 않았다.
그는 계약의 말씀, 곧 십계명을 판에 기록하였다.
축일8월 1일 성 알폰소 마리아 데 리구오리 (Alphonsus Mary de Liguori)
신분 : 설립자, 주교, 교회학자
활동 연도 : 1696-1787년
같은 이름 : 알폰수스, 알퐁소, 알퐁수스
성 알폰수스 마리아 데 리구오리(Alfonsus Maria de Liguori, 또는 알폰소 마리아 데 리구오리)는 1696년 9월 27일 이탈리아의 나폴리(Napoli) 근교 마리아넬라(Marianella)에서 주세페(Giuseppe de Liguori)와 안나 카발리에리(Anna Cavalieri) 사이의 7남매 중 맏이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나폴리의 유서 깊은 귀족 가문이었다. 아버지 주세페는 나폴리 공국의 해군이었으며 어머니는 트로야(Troja)의 카발리에리 주교의 동생으로 신앙심 깊은 사람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총명하였던 성 알폰수스는 불과 16세 나이로 나폴리 대학교에서 법학 박사학위를 받아 변호사가 되었다. 그 후 몇 년 동안 변호사로 일하면서 결코 패소하지 않는 변호사로 널리 알려졌다. 1723년 토스카나(Toscana) 대공과 어떤 공작 사이에 큰 돈이 걸린 소송이 벌어졌는데, 이 소송에 참여했던 성 알폰수스는 어떤 중요한 문서를 잘못 해석하고 서명한 사실로 패소하였다.
이 사건으로 그는 변호사로서의 자격이 상실되었다고 스스로 생각하였다. 새로운 진로를 모색하며 기도하던 중 1723년 8월 28일 불치병 환자들을 위한 병원을 찾아갔다가 신비체험을 하였다. 그래서 성 알폰수스는 사제가 되기로 결심하고 오라토리오회에 입회하여 1726년 12월 21일 사제 서품을 받았다. 그는 2년 정도 나폴리 근방을 돌며 선교사로 봉직하였고, 1729년에는 나폴리의 중국 신학원에서 활동했다.
1730년 친구인 토마스 팔코이아(Thomas Falcoia)가 스칼라(Scala) 지방에 있는 카스텔라마레 교구의 주교가 되자, 성 알폰수스는 그곳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는 스칼라에서 수녀들의 피정을 지도할 때 마리아 첼레스테 수녀를 만났고, 새로운 수도회에 대한 그녀의 환시를 확신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팔코이아 주교가 로마(Roma)에서 경험한 환시와 일치하였다. 그래서 1731년 마리아 첼레스테 수녀가 환시에서 받은 규칙을 따라 여자 구속주회를 설립하였다. 그리고 다음해 스칼라로 이주하여 팔코이아 주교, 파가노 신부와 다른 몇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남자 구속주회(Redemptoris)를 설립하였다.
이 회는 공동생활을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고 주님의 말씀 전파를 주된 목적으로 하는 성직 수도회였다. 본부는 스칼라 수녀회의 숙박소를 이용하였으며 명예원장으로 팔코이아 주교를 모셨다. 그런데 초창기에 중대한 알력이 일어나 마리아 첼레스테 수녀가 떠나가서 포치아에 따로 수도원을 설립하고, 또 1733년에는 쿠르시오(Curtius)라는 수도자 한 명만 남고 모든 회원들이 다른 회를 설립하여 떠났다.
하지만 성 알폰수스는 흔들리지 않고 회를 지키면서 다른 회원들을 맞아 1734년에 빌라 데글리 스키아비에서 두 번째 창립을 맞이하였다. 그는 모든 난관을 극복하고 수도회를 발전시켜 나갔다. 마침내 구속주회는 1749년 2월 25일 교황 베네딕투스 14세(Benedictus XIV)로부터 인가를 받았으며, 같은 해에 열린 총회에서 수도회 종신 총장으로 선출되었다. 다음 해에 여자 구속주회도 교황으로부터 승인을 받았다. 그런데 왕권주의를 내세워 수도회들을 적대시하던 왕과 타누치(Tanucci) 후작 때문에 나폴리 왕국의 인가를 받지 못하였다. 1752년 왕은 교황령과 시칠리아(Sicilia)만을 사목 활동 영역으로 한정한다는 조건으로 인가를 해주었다.
이 기간 동안 성 알폰수스는 인근 지역을 다니면서 설교 사도직을 열렬히 수행하였으며 저술 활동에도 매진하였다. 그러던 중 교황 클레멘스 13세(Clemens XIII)는 1762년 6월 20일 산타 아가타 데이 고티(Santa Agata dei Goti)라는 나폴리의 한 작은 교구장 주교로 알폰수스를 임명하였다. 그는 이 교구를 돌보는 13년 동안 성직자, 수도원 그리고 전 교구의 혁신을 계획하였으며,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자선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런 열정적 활동으로 중병을 얻었고, 또 죽을 때까지 괴롭혀온 류머티즘으로 마비될 때도 많았기 때문에 1776년 교황 비오 6세(Pius VI)의 허락을 받고 주교직을 사임하였다. 주교직을 사임한 후에도 그는 구속주회의 정립과 운영을 위해 주력하였다. 하지만 나폴리 왕국의 당국자들 때문에 많은 괴로움을 겪었다.
예수회가 박해를 받은 이후 구속주회도 위험에 처하자, 성 알폰수스는 중개자를 내세워 당국자들과 협상을 벌였다. 그러나 왕이 승인한 규칙과 교황 베네딕투스 14세가 수도회를 인가한 교서 사이에는 많은 차이가 있었으므로 늘 갈등의 소지를 안고 있었다. 교회와 나폴리 왕국 사이의 갈등 상황에서 교황령 외의 지역에 있던 공동체들이 성 알폰수스의 관할권을 벗어나게 됨으로써 회는 두 계열로 분열되었다. 성 알폰수스는 둘로 분열된 수도회가 다시 합쳐지는 것을 보지 못하고 1787년 8월 1일 살레르노(Salerno)에서 선종하였다.
구속주회는 성 알폰수스가 선종한 직후 다시 하나로 재건되어 발전하였다. 성 알폰수스는 윤리, 신학, 수학에 관한 놀라운 저서들을 남겼다. 특히 그의 윤리신학은 얀세니즘(Jansenism)과 반성직주의를 극복하면서 올바른 윤리관을 정립한 저서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그의 신심서에서 가장 돋보이는 책은 “마리아의 영광”이다. 그는 1816년 9월 15일 교황 비오 7세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으며, 1871년 교회학자로 선포되었다. 그 후 1839년 5월 26일 교황 그레고리우스 16세(Gregorius XVI)에 의해 시성되었으며, 1950년 4월 26일 교황 비오 12세에 의해 고해사제들과 윤리 신학자들의 수호성인으로 선언되었다.
오늘 축일을 맞은 알폰소 마리아 데 리구오리 형제들에게 주님의 축복이 가득하시길 기도합니다.
야고보 아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