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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8월 9일 연중 제18주간 수요일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5,21-28
그때에 21 예수님께서 티로와 시돈 지방으로 물러가셨다.
22 그런데 그 고장에서 어떤 가나안 부인이 나와,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제 딸이 호되게 마귀가 들렸습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
23 예수님께서는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다. 제자들이 다가와 말하였다.
“저 여자를 돌려보내십시오. 우리 뒤에서 소리 지르고 있습니다.”
24 그제야 예수님께서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25 그러나 그 여자는 예수님께 와 엎드려 절하며,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26 예수님께서는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 하고 말씀하셨다.
27 그러자 그 여자가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28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바로 그 시간에 그 여자의 딸이 나았다.
주님의 눈길을 따라서
나는 어려서 사람들하고 크게 싸워본 적도 없고, 친구들과 때리며 맞고 싸워본 적도 없습니다. 누가 큰 소리만 나면 겁을 먹었고, 지금도 목소리가 크게 소리 지르는 사람을 만나면 꼼짝을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계시지 않고 동생들이 학교에서 잘못했다고 선생님이나 누가 부르면 무척 죄송스러워서 할 말을 잃고 가슴이 두근거리고 그랬습니다. 그러면서 내 아이들이나, 내 동생들이나, 내 제자들이 무슨 일을 잘못하거나, 야단맞을 일을 하였다면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상대방이 나보다 어리고, 내가 잘못한 것이 하나도 없어도 체면이나 염치를 불구하고 엎드려 용서를 청하였습니다. 그렇게 무조건 용서를 청하는 것을 가족들은 무척 싫어하였습니다. 그런데 내 마음은 그게 아니었습니다. 정말 내 탓으로 그렇게 된 것으로 여겨집니다.
어려서 할머니나 어른들은 “나라가 잘 살고 태평성대를 누리는 것은 모두 임금의 덕이고, 나라가 잘못되고 기근이 발생하고, 전쟁이 끊어지지 않는 것은 임금이 부덕한 탓인 것이다. 또한 집안의 모든 일이 잘되고 못되는 것은 순전히 그 가장의 책임이다. 너는 이 집안의 가장이니 모든 책임이 네게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하고 말씀하시곤 하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 사상이 아주 철두철미하게 박혀져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요즈음에는 나의 그런 사고방식이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피해의식과 자학증세가 나를 더 어렵게 하고, 심리적인 피해망상에 빠져 우울증을 걸리게 하고, 다른 사람들까지도 피곤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왜 제자들이나 다른 사람들이 잘못한 것까지도 내가 용서를 청하기까지 해야 할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우습게 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찍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집안을 맡아야 하는 내게는 가족들의 잘못이 무조건 내 잘못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살아계시면 그런 일이 있어도 대수롭지 않을 것이지만 계시지 않기 때문에 ‘애비 없는 자식’이라는 말을 듣고 싶지도 않았고, 또 아버지가 계시지 않아서 꼭 그렇게 된 것과 같은 생각이 나를 괴롭혔습니다. 제자들이 잘못해도 교장선생님이나 학장님이나 총장님께 ‘선생님이 버릇없이 키웠거나 잘못 가르쳐서 그런 제자가 나왔다는 말’을 누군가는 들을 것이고 그렇게 잘못 키운 것이 꼭 내 탓으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지금도 집안에서 어머니가 무슨 일을 잘못했다고 걱정을 하시면 그건 순전히 내가 집안을 잘못 다스려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는 일 모두가 내게 귀결되니까 나는 언제나 잘못된 일은 전부 내 탓으로 생긴 것처럼 생각되어서 많이 용서를 청하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잘못하는 것과 아픈 것은 차원이 전혀 다르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어머니가 편찮으셔서 병원에 들어가셨는데 왜 그렇게 잘못한 것이 새록새록 생각이 나는지 미칠 지경이었습니다. 아내가 급성폐렴으로 병원에 입원하였는데 모든 것이 전부 내 탓으로 여겨지고, 내가 아프게 한 것처럼 느껴지고, 내가 잘못해서 그렇게 큰 고통을 겪게 하였다는 자책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아비의 그 성격을 잘 알아서인지 병원에 얼씬도 못하게 하고, 병실에서 웃고 떠들어 기분을 밝게 하느라고 애를 쓰는 모습을 보면서 괜히 눈물도 흘리고 그랬답니다. 그리고 의사선생님 가운만 입었어도 무조건 절이 저절로 되고, 약을 가지고 병실에 들어오는 간호사도 고맙고 천사와 같이 느껴지고, 내 삶의 교만함을 없애주는 것을 느끼게 되었답니다. 나도 그러하건대 내가 아팠을 때 어머니의 마음은 어땠겠는지 짐작도 할 수 없습니다. 어머니는 당신이 죽고 아들을 살리고 싶어 하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 매일 그렇게 비셨을 것입니다. “주님! 보잘것없는 이 어미를 데려가시고 네 자식을 살려주소서. 제 자식을 살릴 수 있다면 주님, 제가 대신 죽을 수 있는 은총을 베풀어 주소서.”
오늘 복음에서는 딸이 아파 예수님을 찾아온 가나안지방의 여인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여인은 이스라엘 백성도 아니고 귀족의 출신도 아니며, 부자도 아니고, 남편에게 사랑받는 여인도 아닌 것 같습니다. 마귀 들린 딸을 두었다고 모든 사람들에게 구박을 받으며, 그 딸 때문에 정말 죽고 싶은 마음이 가득할 것입니다. 그리고 고칠 수 있는 희망도 없어서 완전히 절망상태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모든 희망을 걸고 근처에 오신 예수님을 찾아 나섰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근처에도 갈 수 없었으니 큰 소리로 염치불구하고 구해달라고 주님께 통사정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의 사정을 잘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여인의 믿음도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그 여인의 입을 통해서 신앙의 고백을 듣고 싶으셨고, 제자들에게 그 여인의 믿음을 통해서 이루실 당신의 계획을 알게 하고 싶으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자녀들에게 줄 빵을 강아지에게 줄 수 없다고 냉정하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자식을 살리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 찬 여인에게는 주님의 억지 말씀과 모든 체면과 영광을 뛰어넘는 진실한 사랑의 믿음이 있었습니다.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도 제 딸을 살리실 수 있다고 믿습니다. 주님, 그냥 한 말씀만 하십시오. 자비의 주님!’
내가 그 동안 사람들에게 가족을 대신해서, 제자들을 대신해서 용서를 청한 것은 체면 때문이었습니다. 아비나 가장이나 선생은 그래야 한다는 체면과 교만 때문이었습니다. 진실한 사랑으로 그렇게 한 것은 아니었다는 마음이 들어갑니다. 그 것은 일종의 허례였고, 가식이었고, 체면이었고, 거짓으로 용서를 청한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가나안 여인의 딸을 구하려는 그 간절한 기도에 비견한다면 아주 부끄러운 소행이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들은 탐스러운 땅을 업신여겼다(시편 106〔105〕,24).>
▥ 민수기의 말씀입니다. 13,1-2.25―14,1.26-30.34-35
그 무렵 주님께서 파란 광야에 있는 1 모세에게 이르셨다.
2 “사람들을 보내어, 내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주는
가나안 땅을 정찰하게 하여라. 각 지파에서 모두 수장을 한 사람씩 보내야 한다.”
25 그들은 사십 일 만에 그 땅을 정찰하고 돌아왔다.
26 그들은 파란 광야 카데스로 모세와 아론과 이스라엘 자손들의 온 공동체에게 왔다.
그들은 모세와 아론과 온 공동체에게 그 땅의 과일을 보여 주면서 보고하였다.
27 그들은 모세에게 이렇게 이야기하였다. “우리를 보내신 그 땅으로 가 보았습니다.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곳이었습니다. 이것이 그곳 과일입니다.
28 그러나 그 땅에 사는 백성은 힘세고, 성읍들은 거창한 성채로 되어 있습니다.
더군다나 우리는 그곳에서 아낙의 후손들도 보았습니다.
29 아말렉족은 네겝 땅에 살고, 히타이트족과 여부스족과 아모리족은 산악 지방에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나안족은 바닷가와 요르단 강 가에 살고 있습니다.”
30 칼렙이 모세 앞에서 백성을 진정시키면서 말하였다.
“어서 올라가 그 땅을 차지합시다. 우리는 반드시 해낼 수 있습니다.”
31 그러나 그와 함께 올라갔다 온 사람들은, “우리는 그 백성에게로 쳐 올라가지 못합니다.
그들은 우리보다 강합니다.” 하면서,
32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자기들이 정찰한 땅에 대하여 나쁜 소문을 퍼뜨렸다.
“우리가 가로지르며 정찰한 그 땅은 주민들을 삼켜 버리는 땅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 땅에서 본 백성은 모두 키 큰 사람뿐이다.
33 우리는 또 그곳에서 나필족을 보았다. 아낙의 자손들은 바로 이 나필족에서 나온 것이다.
우리 눈에도 우리 자신이 메뚜기 같았지만, 그들의 눈에도 그랬을 것이다.”
14,1 온 공동체가 소리 높여 아우성쳤다. 백성이 밤새도록 통곡하였다.
26 주님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셨다.
27 “이 악한 공동체가 언제까지 나에게 투덜거릴 것인가?
이스라엘 자손들이 나에게 투덜거리는 소리를 나는 들었다.
28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여라. ‘주님의 말이다. 내가 살아 있는 한,
너희가 내 귀에 대고 한 말에 따라, 내가 반드시 너희에게 그대로 해 주겠다.
29 바로 이 광야에서 너희는 시체가 되어 쓰러질 것이다.
너희 가운데 스무 살 이상이 되어, 있는 대로 모두 사열을 받은 자들, 곧 나에게 투덜댄 자들은 모두,
30 여푼네의 아들 칼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만 빼고, 내가 너희에게 주어 살게 하겠다고 손을 들어 맹세한
그 땅으로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34 너희가 저 땅을 정찰한 사십 일, 그 날수대로, 하루를 일 년으로 쳐서, 너희는 사십 년 동안 그 죗값을 져야 한다. 그제야 너희는 나를 멀리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게 될 것이다.’
35 나 주님이 말한다. 나를 거슬러 모여든 이 악한 공동체 전체에게 나는 기어이 이렇게 하고야 말겠다.
바로 이 광야에서 그들은 최후를 맞을 것이다. 이곳에서 그들은 죽을 것이다.”
축일8월 9일 성녀 데레사 베네딕타(십자가의) (Teresa Benedicta of the Cross)
신분 : 수녀, 철학자, 순교자
활동 연도 : 1891-1942년
같은 이름 : 베네딕다, 베네딕따, 분다, 에디트 슈타인, 테레사, 테레시아
1891년 10월 12일 독일 동북부 지역의 브레슬라우(Breslau)의 전통 유대인 가정에서 11번째 아이로 태어난 성녀 에디트 슈타인(Edith Stein)은 두 살 때 목재상을 하던 아버지 지그프리트(Siegfried Stein)를 일사병으로 여의고, 열심한 유대인이었던 어머니 아우구스트(Auguste Stein Courant)에 의해 양육되었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집안에서 거행되는 유대교 전통 예식을 보며 자랐고, 유달리 고집스럽고 사색과 독서를 좋아하는 학구적인 성격의 아이였다. 11세 때 숙부의 갑작스런 죽음을 경험하면서 삶의 궁극적인 의미에 대해, 그리고 유대인들이 믿고 있는 하느님의 존재에 대해 의심을 품기 시작하였다. 또 가족과 친지들의 형식적인 유대교 의식과 기도에 실망하여 더 이상 참석하지 않기로 결단을 내리기도 하였다.
그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11년까지는 브레슬라우에서, 그리고 1913년부터는 괴팅겐(Gottingen) 대학으로 옮겨 심리학, 철학, 역사학, 독일어학 등을 공부하였다. 다양한 학문을 공부하던 중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잠시 간호사로 활동하기도 했던 그녀는 1916년 프라이부르크(Freiburg)에서 후설(Edmund Husserl)의 지도로 박사학위를 받고 그의 개인조교가 되었다. 그 후 독자적인 연구 활동을 하며 교수 취임 논문을 제출하고 후설이 직접 추천서까지 작성해 주었으나, 당시 독일 학계에서 여성이 교수로 재직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였기 때문에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 후 브레슬라우로 돌아와 계속 철학 연구 논문들을 집필하던 중 1921년 여름 같은 괴팅겐 학파 친구인 콘라트 마르티우스와 그녀의 남편이 경영하던 농장에 머무르게 되었다. 친구 부부가 외출한 어느 날 서재에서 우연히 손에 잡힌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의 생애”를 읽고, 그녀는 자신이 오랫동안 실존적으로 회의하고 있었던 신이 그녀를 사랑해 왔으며, 그녀가 전 인격으로 그 사랑에 응답하기를 기다려 왔음을 깊이 깨닫게 되었다. 이러한 하느님 체험 후 그녀는 평화를 얻었고, 이듬해 1월 1일 테레사 베네딕타(Teresia Benedicta)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세례를 받음과 동시에 성녀 테레사 베네딕타는 카르멜 수도원에 입회할 의지를 확고히 하였으나, 어머니의 반대와 지도신부의 만류로 이를 연기하였다. 그 대신 지도신부의 제안으로 1931년까지 슈파이어(Speyer)에 있는 성 막달레나 수도원 교사 양성 학교와 도미니코 수녀회의 여학교에서 독일어와 역사를 가르쳤다. 그리고 점차 후설의 관념론적인 철학 노선을 떠나 그리스도교 철학의 실재론적인 사상을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계속 왕성한 교육 및 학문 활동을 하던 그녀는 발처 아빠스로부터 카르멜 수도원 입회를 허락받고 어머니와 힘겨운 이별을 나눈 뒤 1933년 10월 14일 쾰른의 카르멜 수도원에 입회하면서 수도명을 십자가의 테레사 베네딕타(Teresia Benedicta a Cruce)로 정하였다. 입회한 후에도 수도원 원장의 적극적인 학문 지원에 힘입어 지속적인 연구와 저술활동을 할 수 있었다.
1936년 9월 14일 첫서원을 하였으나, 바로 그 해 어머니가 사망하였다. 그녀는 마지막까지 어머니가 지녀왔던 유대교 신앙을 존중해 주었다. 1938년 4월 21일 종신서원을 하였다. 그러나 나치의 유대인에 대한 위협은 날로 심해져 갔고, 성녀 테레사 베네딕타는 이를 피하기 위해 수도원의 주선으로 비밀리에 그녀의 언니 로사(Rosa)와 함께 네덜란드의 에히트(Echt) 카르멜 수도원으로 옮겼다. 이곳에서 그녀는 십자가의 성 요한(Joannes) 탄생 400주년을 기념하는 저서 “십자가의 학문”을 발표하였다.
그런데 이때 네덜란드의 주교들이 독일의 반유대주의를 비난하였고, 이에 화가 난 히틀러는 모든 비아리안계 가톨릭 신자들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로 인해 1942년 8월 2일 언니 로사와 함께 게슈타포에게 체포된 그녀는 많은 유대인 그리스도교 신자들과 함께 아메르스포르트(Amersfoort) 수용소를 거쳐 베스터보르크(Westerbork)로 끌려갔다. 그리고 그 해 8월 7일 이들 중 987명이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해되었는데, 두 자매는 이틀 후인 8월 9일 가스실에서 살해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녀가 사망한 지 20년 만인 1962년 1월 4일 쾰른의 대주교 프링스(Josef Frings) 추기경은 그녀의 시복을 위한 소송을 제기하였고, 1980년에는 독일 주교회의를 거쳐 로마에서 시복절차를 위한 공식적인 청원이 이루어졌다. 그 후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가 독일을 방문한 1987년 5월 1일 쾰른 대성당에서 순교자로 시복되었고, 1998년 10월 11일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같은 교황에 의해 시성되었다. 시성식에서 그녀를 “이스라엘의 탁월한 딸이자 전세계를 위한 성인으로서 교회의 충실한 딸”이라고 칭송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이듬해 10월 1일 자의교서를 통해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Catharina)와 스웨덴의 성녀 비르지타(Birgitta)와 함께 그녀를 유럽 대륙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하였다.
오늘 축일을 맞은 데레사 베네딕타(십자가의) 자매들에게 주님의 축복이 가득하시길 기도합니다.
야고보 아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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