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제1독서
<지혜서의 말씀 18,6-9>
해방의 날
6 밤이 저희 조상들에게는 벌써 예고되었으니 그들이 어떠한 맹세들을 믿어야 하는지 확실히 알고 용기를 가지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7 그리하여 당신의 백성은 의인들의 구원과 원수들의 파멸을 기대하였습니다.
8 과연 당신께서는 저희의 적들을 처벌하신 그 방법으로 저희를 당신께 부르시고 영광스럽게 해 주셨습니다.
9 선인들의 거룩한 자녀들은 몰래 희생 제물을 바치고 한마음으로 하느님의 법에 동의하였습니다.
그 법은 거룩한 이들이 모든 것을 다 같이, 성공도 위험도 함께 나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에 벌써 조상들의 찬미가들을 불렀습니다.
▥ 제2독서
<히브리서의 말씀 11,1-2.8-19>
형제 여러분,
1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보증이며 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확증입니다.
2 사실 옛사람들은 믿음으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8 믿음으로써, 아브라함은 장차 상속 재산으로 받을 곳을 향하여 떠나라는 부르심을 받고 그대로 순종하였습니다.
그는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떠난 것입니다.
9 믿음으로써, 그는 같은 약속의 공동 상속자인 이사악과 야곱과 함께 천막을 치고 머무르면서, 약속받은 땅인데도 남의 땅인 것처럼 이방인으로 살았습니다.
10 하느님께서 설계자이시며 건축가로서 튼튼한 기초를 갖추어 주신 도성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11 믿음으로써, 사라는 아이를 가지지 못하는 여인인 데다 나이까지 지났는데도 임신할 능력을 얻었습니다.
약속해 주신 분을 성실하신 분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12 그리하여 한 사람에게서, 그것도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사람에게서 하늘의 별처럼 수가 많고 바닷가의 모래처럼 셀 수 없는 후손이 태어났습니다.
13 이들은 모두 믿음 속에 죽어 갔습니다.
약속된 것을 받지는 못하였지만 멀리서 그것을 보고 반겼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은 이 세상에서 이방인이며 나그네일 따름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14 그들은 이렇게 말함으로써 자기들이 본향을 찾고 있음을 분명히 드러냈습니다.
15 만일 그들이 떠나온 곳을 생각하고 있었다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을 것입니다.
16 그러나 실상 그들은 더 나은 곳, 바로 하늘 본향을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하느님이라고 불리시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 그들에게 도성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17 믿음으로써,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이사악을 바쳤습니다.
약속을 받은 아브라함이 외아들을 바치려고 하였습니다.
18 그 외아들을 두고 하느님께서는 일찍이, “이사악을 통하여 후손들이 너의 이름을 물려받을 것이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19 아브라함은 하느님께서 죽은 사람까지 일으키실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이사악을 하나의 상징으로 돌려받은 것입니다.
✠ 복음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 12,32-48>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32 “너희들 작은 양 떼야,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그 나라를 너희에게 기꺼이 주기로 하셨다.
33 너희는 가진 것을 팔아 자선을 베풀어라.
너희 자신을 위하여 해지지 않는 돈주머니와 축나지 않는 보물을 하늘에 마련하여라.
거기에는 도둑이 다가가지도 못하고 좀이 쏠지도 못한다.
34 사실 너희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도 있다.
35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36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
37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38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
39 이것을 명심하여라.
도둑이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40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
41 베드로가, “주님, 이 비유를 저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아니면 다른 모든 사람에게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하고 물었다.
42 그러자 주님께서 이르셨다.
“주인이 자기 집 종들을 맡겨 제때에 정해진 양식을 내주게 할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는 어떻게 하는 사람이겠느냐?
43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
44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주인은 자기의 모든 재산을 그에게 맡길 것이다.
45 그러나 만일 그 종이 마음속으로 ‘주인이 늦게 오는구나.’ 하고 생각하며, 하인들과 하녀들을 때리고 또 먹고 마시며 술에 취하기 시작하면,
46 예상하지 못한 날, 짐작하지 못한 시간에 그 종의 주인이 와서, 그를 처단하여 불충실한 자들과 같은 운명을 겪게 할 것이다.
47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그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이다.
48 그러나 주인의 뜻을 모르고서 매 맞을 짓을 한 종은 적게 맞을 것이다.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있는 종들!”>
오늘 복음은 제자들에 대한 교육 장면인데, 크게 두 장면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곧 자선으로 하늘에 보물을 쌓아 하느님의 왕국에 들어갈 준비를 하라는 장면(루카 32-34)과 게으름과 자만에 빠지지 말고 주님의 오심을 깨어 기다려야 한다는 장면(35-48)입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주님의 재림과 관련한 세 가지 비유, 곧 '주인을 기다리는 종의 비유'(35-38), '도적의 비유'(39-40), '청지기의 비유'(42-48)가 소개됩니다.
먼저 '주인을 기다리는 종의 비유' 입니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있는 종들!”
(루카 12,37)
이 말씀은 '깨어있음'의 의미는 무엇인지를 알려줍니다.
곧 그것은 단지 잠들지 않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만은 아니라, '기다리는 사람'임을 말해줍니다.
잠들지 않고 있다고 해서 누구나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주인이 돌아오면 문을 '곧바로 열어 주려고' 뜨거운 열망으로 기다리는 사람이 '깨어있는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곧 사랑의 열망으로 임을 그리워하는 것이 깨어 있음이요, 임을 희망하는 것이 깨어 있음이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이 기다림, 이 희망은 이미 축복입니다.
그 안에 이미 임을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임을 지향하여 있는 까닭입니다.
바로 그 지향 안에서 깨어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결국 '깨어 있음'은 지향, 곧 임의 뜻 안에 깨어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깨어 있음'의 표시를 오늘 복음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놓고 있어라.”
(루카 12,35)
'허리에 띠를 매고'라는 말은 과월절 음식을 어떻게 먹여야 하는지에 대하여 하느님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주신 말씀을 연상케 합니다.
곧 “그것을 먹을 때는 허리에 띠를 매고 발에는 신을 신고 손에는 지팡이를 잡고 서둘러 먹어야 한다.”(탈출 12,11)는 말씀을 떠올려 줍니다.
곧 깨어 있음은 마치 출애굽의 긴장을 갖추는 것과 같다는 말씀입니다.
한편 '등불을 켜놓고 있어라' 합니다.
‘등불’은 정신과 마음이 깨어 있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곧 님을 향한 기다림, 곧 지향을 켜놓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실 우리는 이미 깨어 있는 이들인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안에 이미 등불을 지니고 있는 까닭입니다.
그것은 임께서 우리 안에서 빛을 밝히고 계신 까닭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깨어 있을 수 있음'은 깨어 계시는 임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까닭입니다.
아니 그렇게 임께서 우리에게 시중들고 있는 까닭입니다.
이토록 임께선 이 순간에도 우리를 휩싸고 돕니다.
우리 안에 현존하시며 나와 더불어 활동하십니다.
그래서 당신은 '깨어나라' 하지 않으시고, '깨어 있어라' 하십니다.
이어서 들려주는 '도적의 비유'(39-40)도 '깨어 있음'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깨어 있음, 곧 하느님 나라에 대한 고대와 기다림은 ‘행복’과 동시에 선언됩니다.
그러니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루카 12,40)라는 말씀은 어떤 위협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에게 밀려올 그 빛에 기쁘게 마음을 활짝 열어 놓으라는 촉구의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청지기'에 비유하십니다.
이 역시 '깨어 있음'의 의미를 일깨워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청지기'에게 충실함과 슬기로움을 동시에 요구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물으십니다.
“주인이 자기 집 종들을 맡겨 제대에 정해진 양식을 내주게 할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는 어떻게 하는 사람이냐?”
(루카 12,42)
이는 제자들에게 자신의 종들이 아니라 주인의 종들이 맡겨졌다는 말씀입니다.
바로 그들을 돌보는 일이 주인을 섬기는 일이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주인의 뜻을 아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곧 그 맡겨진 이들을 돌보는 일은 그들을 다루는 기술이나 요령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인의 뜻에 따라 정해진 양식을 내어줄 수 있는 데'(루카 12,42) 있기 때문입니다.
곧 주인의 뜻을 아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주인의 뜻을 아는 지혜는 솔로몬에게서 보듯이, '듣는 마음'에서 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곧 지혜는 먼저 귀 기울여 듣는 이에게 주어지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주인의 뜻을 아는 슬기로움'을 '주인의 뜻에 따라 사는 충실함'과 함께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그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이다.”
(루카 12,47)
그렇습니다.
사실 우리 역시 예수님의 제자로서 주님으로부터 맡겨진 사명을 받은 청지기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충실함과 슬기로움으로 맡겨진 이들을 돌보아야 하는 사명을 받은 이들입니다.
다름 아닌 주님께서 맡겨준 형제들에게 주님의 뜻에 따라 자신을 양식으로 내어주는 일, 그것이 곧 주님께 대한 충실함과 슬기로움이 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을 새겨 들어 봅니다.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
(루카 12,48)
<오늘의 말 · 샘 기도>
“행복하여라. ~ 깨어있는 종들!”
(루카 12,37)
주님!
깨어 있게 하소서!
단지 잠들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임을 기다리게 하소서!
그 기다림은 이미 축복입니다.
그리워하는 임을 이미 품고 있는 까닭입니다.
기다리기만 한 것이 아니라 열망을 품고 그리워하게 하소서!
그리움 속, 임이 나를 이미 품고 있는 까닭입니다.
오늘, 임이 날 그리워하는 희망 안에 제가 깨어 있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황송한 사랑에 황송한 행복의 관계>
많은 분이 제가 하는 여기 밥상에 대해서 알고 계시고, 많은 분이 실제로 여기 밥상을 이용해주셨습니다.
이 밥상은 생일이나 축일 등 중요한 날에 제가 육신의 식탁도 차려드리고 영적인 식탁인 미사도 드려드리는 개념인데, 제가 이것을 하기로 마음먹은 것은 오래 전이고 오늘 복음에서 영감을 얻었습니다.
오늘 루카 복음에만 나오는 주인과 종의 얘기는 주인을 깨어 기다린 종에게 주인이 손수 식탁을 차려주시고 시중을 드신다는 얘깁니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있는 종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다른 복음에서는 아무리 일을 힘들게 했을지라도 주인은 종에게 쉬라고 하지 않고 주인을 위해 식탁을 차리라고 할 것이고 그리고 그렇게 함이 당연하다고 말합니다.
사실 이것이 보통의 주인과 종의 관계인데, 오늘 주님께서는 그 반대로 하신다니 실제로 이렇게 되면 종은 너무도 행복하고 다른 한편 너무도 황송할 것입니다.
그래서 저희 여기 밥상도 이런 황송한 행복을 누리는 분도 있지만 너무 부담스럽고 편치 않아 이용하지 못하겠다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주인과 종의 이런 행복한 관계가 우리와 주님 사이에 맺어져야 하고, 우리는 주님의 이런 황송한 사랑에 황송한 행복을 누릴 줄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복음적인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복음적인 관계가 우리 사이에도 이루어져야 하고 그래서 오늘 복음의 주님은 행복한 집사에 대해 이렇게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주인이 자기 집 종들을 맡겨 제때에 정해진 양식을 내주게 할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는 어떻게 하는 사람이겠느냐?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
집사도 주인에게는 종이지만, 주인 대신 종들을 관리하는 종입니다.
그러니 주인에게는 밑에 있지만, 종들에게는 위에 있는 존재입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종에게 상을 차려주시고 시중을 든다는 것은 주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며 너희도 서로 발을 주라고 하신 것처럼 집사인 우리도 서로 상을 차려주고 시중들라는 말씀이고,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지혜롭고 충성스러우며 그렇게 할 때 행복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중요한 것은 내가 어떤 정체성, 집사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느냐인데, 부끄럽게도 저는 집사건 종이건 종의 정체성을 거부했었습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하느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하느님을 주님으로 부르는 순간 저는 그분의 종이 되기 때문이고, 마리아처럼 주님의 종이오니 당신 뜻대로 되라고 해야 하기 때문이었지요.
그러다가 삼십을 넘어 사십을 향해 가며 주님이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고, 나의 뜻보다는 하느님 뜻을 이루려는 마음을 먹고 노력하게는 되었습니다.
그런데 노력한다는 것은 그렇게 하지 못하니 노력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이제 저는 하느님 뜻을 거스를 생각은 없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여전히 내 뜻대로 하려고 하기에 하느님 뜻을 거스르고, 내 맘대로 하려고 하거나 내 맘에 들기를 바라기에 이웃에게 함부로 합니다.
어제도 선교협동조합 월례회 미사를 하고 미사 참석자들과 식사를 즐겁게 했는데, 주방에 들어가니 주방 도구들이 어지러웠고 그래서 순간 화까지 나지는 않았지만 저의 정신이 어지럽고 짜증 비슷한 것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미사 때 기껏 충성스럽고 슬기로운 집사에 대해 강론하고는 내 맘에 들지 않는 것 때문에 주변에 감정 폭력을 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불충한 종처럼 술 취해 이웃을 때리는 물리적 폭력을 가하지는 않지만 화나 짜증 같은 감정 폭력은 가하곤 하는데, 이게 다 자기 뜻대로 하려 하거나 자기 뜻대로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지요.
공자가 오십에 하늘의 뜻을 알고, 육십에 그 하늘의 뜻에 순응하게 되며, 칠십에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법에 어긋남이 없게 돼야 한다고 하였고, 프란치스코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어야 한다고 했는데, 육십을 넘어 칠십을 향해 가는 제가 언제 그리고 어떻게 하면 이렇게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가 될 수 있을지 한탄하며 뉘우치는 오늘 새벽입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허리에 띠를 매고>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은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는 큰 사랑입니다.
주인이 오히려 종에게 시중을 드는 역설적인 모습으로 다가오는 사랑입니다.
이 시간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물 수 있는 은총이 함께하기를 바랍니다.
이태리 밀라노의 대성당에는 문이 셋이 있는데, 첫째 문은 아치로 되어 있고 “모든 즐거움은 잠깐이다”라는 글이 새겨져 있습니다.
둘째 문은 십자가형으로 되어있는데, “모든 고통도 잠깐이다.”라는 글이 새겨져 있고, 셋째 문에는 “오직 중요한 것은 영원한 것이다.”라고 새겨져 있습니다.
즐거움도 잠깐이고 고통도 잠깐인데, 중요한 것은 영원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로 부름을 받았고, 세례를 통하여 초자연적인 생명으로 새로 태어나 하느님의 은혜와 축복의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모든 죄의 용서를 받은 것이고, 영원한 생명, 곧 하느님의 나라를 상속받을 수 있는 자격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여기서부터 영원한 생명을 잘 가꾸고 지켜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깨어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은혜가 아무리 풍요롭다 해도 담을 수 있는 그릇이 준비되지 않는다면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루카 12,35)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허리에 띠를 맨다는 것은 어떤 것을 시작하기 전에 몸을 살핀다는 것입니다.
중동 사람들의 옷을 보면 통으로 짠 긴 옷입니다.
평상시에는 띠를 매지 않습니다.
그러나 무슨 일을 제대로 하려고 한다면 띠를 매고 몸을 단정하게 합니다.
거추장스러운 것은 정리합니다.
마찬가지로 영적으로 띠를 맨다는 것은 우리 신앙 상태를 다시 추스르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믿음은 한순간에 일시적으로 성장하는 것도 아니고, 한순간의 마음을 가지고 영생을 얻는 것도 아닙니다.
따라서 열정적인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매일 매일 기도하며 우리의 일상생활 안에서 준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매일이 은총의 기회입니다.
준비된 삶에 대해 사도 바오로는 에페소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하느님의 무기로 완전한 무장을 갖추십시오. 그리하여 진리로 허리에 띠를 두르고 의로움의 갑옷을 입고 굳건히 서십시오.”(에페 6,14-15) 하고 말하였습니다.
“진리로 허리에 띠를 두르라!”
우리가 신앙을 추스르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바로 ‘진리로 허리에 띠를 두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진리는 곧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17장17절에는 “이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입니다.”라고 적혀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디모테오 후서 3장 16절에서 “성경은 전부 하느님의 영감으로 쓰인 것으로, 가르치고 꾸짖고 바로잡고 의롭게 살도록 교육하는 데에 유익합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말씀에 자신을 비추어 성찰하는 삶이 준비된 삶입니다.
우리가 매일 거울을 보고 몸단장을 하듯이 하느님의 말씀에 나를 비추어 보고 그에 걸맞은 삶을 다져가야 합니다.
우리 마음을, 영혼을 비추는 거울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따라서 말씀에 비추어 잘못된 것이 있으면 고쳐야 합니다.
주님께서 ‘용서하라!’ 하였으면 용서해야 합니다.
‘사랑하라’ 하였으면 사랑해야 합니다.
‘선한 일을 행하라’. ‘자선을 베풀어라.’ 하였으면 선을 행하고 자선을 베푸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말씀대로 실천하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거울을 보고 얼굴에 흉한 것이 묻은 것을 알았는데 그냥 다니십니까?
아니잖습니까?
그렇다면 주님의 말씀에 마음을 비추어 고칠 것은 고쳐야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으로 무장된 사람은 다른 어떤 이론이나 유혹에도 당당히 물리칠 수 있는 힘과 능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상황 앞에서도 당황하지 않고 분명하게 ‘예’ 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 하게 됩니다.
그러나 준비되지 않은 사람은 우왕좌왕 흔들리고 맙니다.
말씀대로 행하기를 주저합니다.
그렇게 하면 불이익이 올 것 같은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야고보 사도는 말하였습니다.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사실 누가 말씀을 듣기만 하고 실행하지 않으면, 그는 거울에 자기 얼굴 모습을 비춰보는 사람과 같습니다.
자신을 비추어 보고서 물러가면, 어떻게 생겼었는지 곧 잊어버립니다.
그러나 완전한 법, 곧 자유의 법을 들여다보고 거기에 머물면, 듣고서 잊어버리는 사람이 아니라 실천에 옮겨 실행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한 사람은 자기의 그 실행으로 행복해질 것입니다.”
(야고 1,22-25)
그러므로 여러분은 말씀을 듣고 그대로 행함으로써 행복한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또한 등불을 켜 놓고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등불을 지속적으로 켜 놓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하죠?
예, 기름이 필요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그 기름 역할을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기름은 바로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신앙이 불타오르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느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마음을 채워야 합니다.
“사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
(히브 4,12)
많은 분이 영적인 체험을 하고 차원 높은 신앙생활을 하길 원하면서도 정작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고 말씀을 듣는 데에는 소홀합니다.
그러나 말씀을 듣지 않고는 결코 지속적인 열심을 갖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기름이 없으면 불이 꺼집니다.
마찬가지로 말씀으로 함께하지 않으면 신앙이 쉽게 흔들리고 결국 무너집니다.
그러므로 말씀과 함께할 수 있는 기회를 자주 만들기를 바랍니다.
교우 여러분, 말씀을 들으십시오!
말씀 안에 모든 답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바라는 지혜와 명예와 성공, 부와 영원한 생명의 길이 거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영원에로 가는 길에서 겪는 아픔의 위로와 힘이 말씀 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통하여 위로와 기쁨, 평화와 영생 기쁨을 누리기를 바랍니다.
오늘 말씀 중에도 큰 희망을 주는 말씀은 ‘깨어 있는 종들에게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 깨어 준비하는 사람에게 천국에서 그만한 환대를 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마지막 날 주님 앞에 나갔을 때 세상의 삶에서 뿌린 대로 거두게 될 것입니다.
아름답고 행복한 내일은 착실하게 준비한 사람에게만 찾아온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주인이 밖에 나가 아직 오지 않았다면 종은 마땅히 주인을 기다려야 합니다.
그러나 혹 주인이 더디 오려니 생각하고 나태하게 지냈다면 그는 주인으로부터 인정을 받을 수 없는 법입니다.
그러니 종은 주인이 언제 오든 깨어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준비한다는 것은 깨어 있는 것이요, 깨어 있다는 것은 곧 준비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더 많은 것을 받게 될 것입니다.
주인의 눈에 들었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여러분은 모두 빛의 자녀이며 낮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밤이나 어둠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다른 사람들처럼 잠들지 말고, 맑은 정신으로 깨어 있도록 합시다.”
(1테살 5,5-6)
세상에 한 가지 확실한 것과 한 가지 불확실 한 것이 있는데, 확실한 것은 누구나 죽는다는 사실이요, 불확실한 것은 그 죽는 날이 언제인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깨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에게도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심판의 주님께서 오신다면 어떤 모습으로 서 있을까 돌아봐야 하겠습니다.
사람의 아들이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오신다는 것이 긴장하게 하지만 지금 내가 이렇게 살아있다는 것은 준비할 기회를 얻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막다른 골목에서 후회하지 말고 기회를 만들어 사랑을 실천하고, 용서와 화해를 미루지 않기 바랍니다.
이웃을 위한 희생을 감당하며 자선을 베푸는 일, 이 모든 것이 천상에 보화를 쌓는 일이니만큼 생각으로 머물지 않고 행동으로 옮겨야 하겠습니다.
아무쪼록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는 가운데 행복한 하시기 바랍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원장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사랑이란? 상대의 보석함이 되어주는 것>
'금쪽같은 내새끼' 93회에서 오은영 박사는 엄마에게 묻습니다.
“어머니는 금쪽이가 미우세요?”
금쪽이는 14세 딸입니다.
엄마와는 대화하지 않고 어려워합니다.
하지만 온라인 채팅 중독입니다.
온라인상에서 만난 남자친구가 가출하라고 해서 가출한 적도 있습니다.
다행히 신고하여 돌아오기는 하였습니다.
금쪽이는 극단적인 생각도 자주 합니다.
엄마와 남동생은 행복한 것 같고 자신만 외톨이가 된 것 같습니다.
친구와 이야기하는 도중 자신은 죽어도 엄마와 남동생은 슬퍼할 것 같지 않다고 말합니다.
왜 엄마에 대한 신뢰를 잃었을까요?
엄마는 딸을 앉혀놓고 대화 좀 하자고 합니다.
하지만 그 대화가 너무 일방적입니다.
야단치는 것에 머뭅니다.
딸은 말합니다.
“엄마만 힘들어?”
엄마는 딸에게 섭섭합니다.
자기가 얼마나 힘든지 알아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몇 년 전에 남편이 사고로 돌아갔기 때문입니다.
그 아픈 마음을 딸은 몰라주는 것입니다.
돌아가신 아빠에게는 편지를 써도 자신에게는 무심한 딸에게 섭섭한 감정을 숨기지 못합니다.
남동생도 자신에게만 잘해주는 엄마가 마냥 좋지만은 않습니다.
잘 기억이 나지 않는 아버지의 사진을 보며 엄마와 누나 사이가 좋게 해 달라고 눈물을 흘리며 말합니다.
왜 세 명 모두 돌아가신 아빠를 다 좋아할까요?
아빠는 그들의 속마음을 들어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엄마는 자기 말만 합니다.
그리고 아빠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면 말을 막아버립니다.
눈물이 나올 것 같아서입니다.
그러나 자녀들은 엄마와 아빠의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흔히 사랑을 주는 것만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너무 일방적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먼저 하느님께서 주시기로 하셨다고 하십니다.
“너희들 작은 양 떼야,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그 나라를 너희에게 기꺼이 주기로 하셨다.”
(루카 12,32)
그러고 나서 우리도 내어놓을 줄 아는 사람으로 만드십니다.
“너희는 가진 것을 팔아 자선을 베풀어라.”
(루카 12,33)
이렇게 내어놓고 또 내어놓게 하는 삶을 예수님은 ‘깨어있음’이라 하십니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루카 12,37)
그리고 특별히 더 내어주어야 하는 주님 제자들에게는 더 내어놓아야 한다고 명하십니다.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
(루카 12,48)
이렇게 예수님의 말씀 안에는 주는 것과 요구하는 것이 균형 있게 공존합니다.
무작정 주는 것만을 사랑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자선을 베풀라고 할 때는 나 자신을 상대의 것을 넣기 위한 공간으로 만들기 위해 비우는 것으로 여겨야 합니다.
내 안에 자신의 것이 들어있지 않으면 그 사람은 나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보석함이 있습니다.
그러나 내 보석이 들어있는 보석함이 가장 사랑스러워 보입니다.
사랑은 내 보석을 상대의 보석함에, 상대의 보석을 내 보석함에 옮겨 담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은 상대가 좋아서가 아니라 상대가 내 보석을 받아주었기 때문에 좋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좋아하게 만드는 것이 자선의 목적입니다.
하느님은 에덴동산을 주시고 가만 있지 않으셨습니다.
아담과 하와도 당신을 위해 소중하다고 여기는 선악과를 바치기를 원하셨고, 서로 협력하여 동물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일을 시키셨습니다.
그만큼 노력이 많이 들어간 곳이 될 때 에덴동산에 대한 애착도 더 커지는 것입니다.
태국 광고 중 말을 못 하는 아버지와 사춘기 딸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언어장애인 아버지를 둔 딸은 친구들에게 놀림을 당해 학교에 가지 않습니다.
그러자 아버지가 딸을 나무랍니다.
딸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는 아버지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딸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나중에 딸은 자살을 시도하고 아버지는 자기 피를 딸에게 줍니다.
이것이 자선입니다.
자선의 결과는 어떨까요?
딸은 깨어나서 잠들어 있는 아버지의 손을 꼭 잡습니다.
아버지가 딸의 소중한 것을 맡을 수 있는 그릇이 된 것입니다.
딸은 자기 손을 맡아 놓은 아버지를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자신의 소중한 보석함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 수원교구 영성관장 / 수원가톨릭대 교수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마라나 타!>
1) ‘언제’ 돌아올지 결정하는 것은 주인의 권한입니다.
그리고 주인에게는 그 시간을 종에게 미리 알려줄 의무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재림도 그와 같습니다.
이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당신과 신앙인의 관계를 ‘주인과 종의 관계’로 표현하신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일 것입니다.
실제로는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는 ‘주인과 종의 관계’가 아니라 ‘벗’이고(요한 15,15), ‘형제’입니다(요한 20,17).
“그 시간을 미리 알려주면 좋지 않은가?
왜 알려주지 않는 것일까?”
예수님께서는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신다.”(마르 13,32)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시간을 결정하는 것은 아버지 하느님만의 권한입니다.
(이 말씀에서 ‘모른다’는 ‘말할 수 없다’로 해석됩니다.)
그 날과 그 시간을 미리 알려주지 않는 것은 ‘알곡’과 ‘쭉정이’를 구분하기 위해서이고(루카 3,17), 인간이 자신의 자유의지로 회개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2) 예수님을 기다리는 신앙인의 마음은 벌을 받을까봐 무서워하는 마음이 아니라, 사랑하는 연인을 빨리 보고 싶어 하는 마음이어야 합니다.
“암사슴이 시냇물을 그리워하듯, 하느님, 제 영혼이 당신을 이토록 그리워합니다.
제 영혼이 하느님을, 제 생명의 하느님을 목말라 합니다.
그 하느님의 얼굴을 언제나 가서 뵈올 수 있겠습니까?”
(시편 42,2-3)
보기 싫은 주인을 기다리는 것과 보고 싶은 연인을 기다리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입니다.
사랑하는 연인을 기다리는 것과 같은 그 심정을 바오로 사도는 “마라나 타!” 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1코린 16,22).
‘마라나 타!’는 “저희의 주님, 오십시오.!” 라는 뜻입니다.
간절하게 보고 싶어 하니까 빨리 오시라고 청하는 말입니다.
3) 오시는 주님을 깨어서 기다리는 일은 ‘사랑’입니다.
(억지로 수행하는 의무가 아닙니다.)
사랑하니까 기다리고, 사랑을 실천하면서 기다립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여기에 적용할 수도 있습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도와주고 보살펴주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모습은 주님을 사랑해서 ‘깨어 있는’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보았으면서도 그냥 가버린 사제와 레위인은 ‘깨어 있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들은 사랑 없이 의무감만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고, 그래서 그들의 신앙생활은 신앙생활이라고 말할 수 없는 생활입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은 주님이 보고 계신다는 것을 의식하지 않고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고, 사제와 레위인은 누가 보지 않으면 아무것도 안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눈에는 주님이 보이지 않으니, 주님께서 다 보고 계신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합니다.
어쩌면 사제와 레위인도 누군가가 보고 있으면 사랑을 실천할 것입니다.
실제로 그렇다면 그것은 그냥 ‘위선’입니다.
4) ‘사랑으로’ 기다리는 사람의 경우에 기다림은 그 자체로 기쁨이고, 행복입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으면 기다림은 ‘고역’이 될 뿐입니다.
사랑으로 기다리는 사람은 신앙인으로서 해야 하는 일들을, ‘정성’을 다 쏟아서 합니다.
바로 그것이 ‘깨어 있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는 사람은 그 일들을 대충 형식적으로 하거나 안 합니다.
신앙생활은 ‘내가 살기 위해서’ 하는 생활, 즉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내가’ 하는 생활입니다.
만일에 자기를 위한 일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주님을 위한 일이라고만 생각한다면, 그래서 억지로 한다면, 신앙생활에 사랑도 없고, 기쁨도 없고, 정성도 없습니다.
그것은 정말로 아무것도 아닌 일입니다.
“이것을 명심하여라.
도둑이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
(루카 12,39-40)
이 말씀은 세 가지를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1. 주님의 재림과 심판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2. 그 날과 그 시간은 모른다.
3. 대비는 ‘지금’ 해야 한다.
여기서 “도둑이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이라는 말씀은 뜻으로는 “도둑이 몇 시에 오는지는 몰라도 틀림없이 온다는 것을 집주인이 알고 있으면”입니다.
이 말씀은 주님께서 ‘도둑처럼’ 오신다는 뜻이 아니고 ‘갑자기’ 오신다는 뜻입니다.
재림하시는 주님은 우리에게서 무엇인가를 빼앗거나 훔치려고 오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에게 ‘구원의 은총’을 주려고 오시는 분입니다.
준비를 잘한 사람은 그 은총을 풍성하게 받을 것이고, 반대로, 준비를 안 한 사람은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는 것은 모든 것을 잃는 것과 같습니다.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 라는 말씀은 “그 날과 그 시간이 ‘생각하지도 않은 때’가 되지 않도록 너희는 평소에 준비를 잘해야 한다.” 라는 뜻입니다.
평소에 준비를 잘하고 있는 사람은 주님께서 갑자기 오시더라도 전혀 당황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사람은 재림이 너무 이르다고 항의하거나, 아니면 너무 늦다고 항의합니다.
‘생각하지도 않은 때’ 라는 말은 회개와 신앙생활은 바로 ‘지금’ 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지금’이라는 시간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총의 시간’입니다.
- 전주교구 금암동성당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믿음의 삶은 이제부터다 - 선택, 훈련, 습관>
어제 오늘 강론 자료를 읽으며 충격을 받았고 정신이 번쩍 났습니다.
8월15일! 성모승천대축일이자 광복절을 앞둔 나라 현실의 엄중함을 지적한 글이었습니다.
또 어제는 품절된 책을 수소문해 수도형제가 도서관에서 빌려다 줬습니다.
이미 고인이 된, 오랫동안 고대 총장을 역임했으며 독립운동에다 평생 꼿꼿이 선비로 살았던 시대의 스승 김준엽 선생의 <장정長征>이란 5권의 자서전입니다.
역사의식도, 민족의식도, 공동체의식도 희박해져 속물이 되어가는 현대인들에게 큰 깨우침이 되는 글이었습니다.
사람은 떠나도 정신은 영원히 살아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배경에 읽은 강론 자료입니다.
“선진국에 진입했다는 대한민국이다.
국내총생산이 1.58조 달러로 세계 10위, 군사력은 6위, 국방비 480억 달러로 8위, 호주 이상의 강대국이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경쟁력을 가진 나라 10개국 중에서도 단연 선두권이다.
다방면에서 퇴조하고 있는 일본도 비교 대상이 못된다.
그러나 속을 들여다 보면 심각한 일이 한 둘이 아니다.
1. 식량자급률이 겨우 25% 수준인데 그나마 석유로 짓는 농사이고, 쌀을 제외한 실제 자급률은 5%도 안된다.
자주국방 못잖게 식량자급도 중요하다.
자급률을 70% 이상 끌어 올려야 남의 눈치 안보고 할 말 하면서 살 수 있다.
지금은 음식쓰레기가 넘쳐나고 있지만 하루 아침에 배곯는 딱한 처지가 될 수도 있다.
2. 대한민국의 최대 리스크는 전쟁위협이다.
북한 핵무기를 비난하지만 남한 핵발전소들도 그에 못잖게 위협적이다.
남쪽의 발전소 24기 중 어느 한 곳이라도 폭격당하면 전쟁에서 이기도 지기고에 상관없이 이땅은 아수라장이 되고 만다.
그러므로 전쟁은 절대금물이다.
3. 문제는 끝이 없이 이어진다.
출산률은 최저, 자살률은 최고다.
물은 사 마셔야 하고, 젊은이들은 결혼은 커녕 연애조차 하지 않는다.
정작 기괴하고 끔찍한 것은 위험해도 위험한줄 모르고 그냥 산다는 것이다.
기후위기와 같은 인류의 멸절 위기에 대해서도 반응하지 않는다.”
(빛두레:제1570호.2022.8.7.연중 제19주일)
이어 결론이 좋았습니다.
결국은 그래도 사람이 희망이라는 이야기였습니다.
사람이 없다 탓하지 말고 “너와 내가 있도다” 하는 기백으로 오늘을 경축하고 책임을 나누자는 것이었습니다.
성모승천대축일을 앞두고 우리 서로 어머니의 마음, 성모성심을 키우고 나누자는 결론이었습니다.
사람이 희망이지만 궁극의 희망은 하느님입니다.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하느님 앞에서 하느님의 자녀답게 믿음을 새로이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분위기는 전부 종말론적입니다.
초대교회는 종말의 분위기에서 깨어 준비하며 종말론적 분위기에서 살 것을 촉구했습니다.
정말 멀리 갈 것 없습니다.
좀 적게 쓰고, 적게 먹어야 하겠습니다.
생각없이, 의식없이, 영혼없이 사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너무 쓰레기가, 버리는 것이, 많습니다.
오늘 화답송이 우리의 분발을 촉구합니다.
“행복하여라, 주님이 당신 소유로 뽑으신 백성이여!”
주님께 선택된 백성답게,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심기일전 새롭게 시작하자는 것입니다.
제가 고백성사 때 늘 강조하는 바도 이렇습니다.
“됐습니다.
하느님은 회개한 이들의 과거는 묻지 않습니다.
오늘 지금부터의 삶이 중요합니다.
지금까지 지켜주시고 인도하신 하느님께 감사하며 오늘부터 잘 살자는 것입니다.
사실 지금까지 잘 살았어도 나머지 끝까지 잘 살다가 잘 죽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니 믿음의 삶은 이제부터라는 것입니다.
아니 늘 이제부터라는 자각으로, 늘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늘 강조하는 바, 선택과 훈련, 습관화입니다.
첫째, “두려워하지 마라.”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참으로 하느님 중심의 믿음의 삶만이 두려움에 대한 답이 됩니다.
언젠가 일간신문 1쪽을 장식한 큰 글귀를 잊지 못합니다.
“진짜로 무서운 것은 귀신이 아니다.
불안한 눈빛을 지닌 인간이다.”
두려움과 불안이 정말 무서운 적이요, 이에 대한 궁극의 처방은 하느님입니다.
“너희들 작은 양떼야,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그 나라를 너희에게 기꺼이 주기로 하셨다.”
양떼는 하느님의 백성을 가르치는 고전적 표상이며 우리 제자들의 공동체에 해당됩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바로 이 권고 말씀을 선택하여 훈련하여 습관화하는 믿음의 삶이 되기 바랍니다.
둘째, “보물을 하늘에 쌓아라.”
자선 활동에 힘쓰는 것이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삶입니다.
내 지상의 땅에 보물을 쌓을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위하여 해지지 않는 돈주머니와 축나지 않는 보물을 하늘에 쌓는 것입니다.
바로 거기 하늘에는 도둑이 다가가지도 못하고 좀이 쓸지도 못합니다.
사실 우리 보물이 있는 곳에 우리 마음도 있습니다.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삶일 때 우리 마음은 하늘이 되고 온갖 탐욕에서 벗어나 참자유롭고 참부유하고 참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니 하늘에 보물을 쌓는 자비행의 삶을 의식적으로 선택하고 훈련하여 습관화하는 믿음의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셋째, “깨어 있어라.”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깨어 있는 삶입니다.
희망의 주님을 믿고 기다리기에 깨어 있을 수 있습니다.
지극한 인내와 기다림의 믿음은 바로 희망의 주님이 있기에 가능합니다.
이집트 탈출에 성공한 당신 백성의 파스카의 밤을 기억하며 깨어 살 것을 촉구하는 지혜서의 저자입니다.
“해방의 날, 밤이 저희 조상들에게는 벌써 예고 되었으니 어떠한 맹세들을 믿어야 하는지 확실히 알고, 용기를 가지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과연 당신께서는 저희의 적들을 처벌하신 그 방법으로, 저희를 당신께 부르시고 영광스럽게 해주셨습니다.”
그러니 여전히 우리를 부르시고 영광스럽게 하시는 주님을 믿으며 깨어 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도 강조하는 바 깨어 있는 삶입니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놓고 있어라.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
유비무환입니다.
주님의 도래일 수도, 뜻밖의 사고일 수도, 죽음일 수도, 반가운 이의 방문일 수도 있으니 늘 깨어 준비하고 있으라는 것입니다.
깨어 있음의 선택이요 훈련이요 습관화가 믿음의 삶에 얼마나 결정적인지 깨닫습니다.
넷째, “책임을 다하는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으로 살라.”
막연히 깨어 있는 게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 삶의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책임을 다하며 제대로 사는 슬기롭고 충실한 종으로 사는 것입니다.
착해서 구원받는 게 아니라 책임을 다하는 유능함과 성실함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착하고 무능하고 무책임한 것보다는 좀 악해도 책임을 다하는 유능함이 좋습니다.
“누가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이겠느냐?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
내가 참으로 말한다.
주인은 자기의 모든 재산을 그에게 맡길 것이다.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
하느님 앞에서 자기를 아는 사람이 지혜롭고 겸손한 사람입니다.
분별의 지혜를 발휘하여 슬기롭고 충실히 살 수 있습니다.
태만하게 불충실하게 책임을 망각하고 사는 일이 얼마나 위태하고 어리석은 일인지 깨닫습니다.
똑같이 선물로 주어진 하루하루의 시간을 어떻게 선용하고 활용하여 주어진 책임을 다하느냐에 구원이 달렸습니다.
역시 책임을 다하는 슬기롭고 충실한 삶을 선택하고 훈련하며 습관화하는 믿음의 삶일 때 구원이겠습니다.
믿음의 삶은 이제부터입니다.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보증이며, 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확증입니다.
사실 옛 신앙의 선배들은 믿음으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오늘 제2독서 히브리서는 아브라함을 비롯한 온통 믿음으로써 산 분들의 찬양입니다.
다음 히브리서의 고백이 장엄합니다.
“이들은 모두 믿음 속에 죽어 갔습니다.
약속된 것을 받지는 못하였지만 멀리서 그것을 보고 반겼습니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이방인이며 나그네일 따름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실상 그들은 더 나은 곳, 바로 하늘 본향을 갈망하고 잇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하느님이라고 불리시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 그들에게 도성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고향에서 하늘 본향을 그리워하며(homesick at home)' 믿음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믿음의 삶은 이제부터입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1. 두려워하지 않고, 2. 하늘에 보물을 쌓으며, 3. 깨어. 4. 충실히 책임을 다하며 슬기롭고 충실히 믿음의 삶을 선택하고 훈련하며 습관화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이렇게 살도록 도와 주십니다.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1988년 군대를 제대하고 본당에서 학생들에게 예비자 교리를 가르쳤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즐거운 추억입니다.
학생들의 똘망똘망한 눈이 기억납니다.
신이 난 저는 교리를 시작하기 전에 기타를 가지고 학생들과 노래를 불렀습니다.
앨범에는 세례를 받은 학생들과 찍은 사진이 있습니다.
34년 전이니 그 학생들도 이제는 누군가의 아빠와 엄마가 되었을 것입니다.
당시 고3이었던 학생이 증권회사에 취직을 했습니다.
선생님인 저에게 첫 월급을 타면 저녁을 사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약속 시간을 정했고 5시에 음악다방에서 만나기로 했습니다.
저는 그 약속을 잊고 친구들과 함께 천마산엘 갔습니다.
천마산에서 내려오면서 약속이 생각났습니다.
부랴부랴 기차를 타고, 버스를 타고 약속장소로 갔지만 4시간이나 지난 후였습니다.
학생은 다방에서 4시간을 기다려 주었습니다.
제가 꼭 올 것이라고 믿었다고 합니다.
저를 믿고 기다려준 학생에게 미안함 마음도 있었고, 고마운 마음도 있었습니다.
저는 누군가를 믿으면서 오랜 시간 기다리지 못하였습니다.
짜증을 낸 적도 많았고, 조금 기다리다가 돌아오곤 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이야기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을 믿고 75세가 넘은 나이였지만 정든 땅을 떠나 낯선 곳으로 갔습니다.
75세라면 타향으로 갔다가도 고향으로 돌아올 나이입니다.
75세라면 하던 일도 정리하고 노후를 즐길 나이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느님을 믿었고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새로운 곳으로 떠났습니다.
신앙은 현실에 안주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하던 일을 정리하고 노후를 즐겁게 보내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하느님의 뜻이라면 도전과 위험을 감수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하느님의 뜻이라면 편안함과 안락함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외아들 이사악을 하느님의 제단에 바치려고 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 선물로 주셨으니 하느님께서 원하시면 기꺼이 제물로 바치겠다고 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뜻이라면 정든 고향까지 기꺼이 떠날 수 있었기에, 하느님의 뜻이라면 100세의 나이에 얻었던 사랑하는 아들까지 기꺼이 제물로 바칠 수 있었기에, 우리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릅니다.
저는 현실에 안주하려고 한 적이 많았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보다는 제 것을 지키려고 한 적이 많았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신앙인들이 지녀야 할 삶의 태도와 자세를 말씀하십니다.
첫째는 가진 것을 기쁜 마음으로 나누는 것입니다.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이 더 쉽다고 하셨습니다.
재물에 대한 욕망과 욕심은 우리를 하느님과 멀어지게 한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고 싶어 하는 청년에게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청년은 슬퍼하면서 예수님을 떠나갔습니다.
가진 것이 많았고, 그것을 포기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강도당한 사람을 치료해 주고, 여관에 데려가 준 사마리아 사람을 이야기하셨습니다.
그리고 율법학자에게 물었습니다.
"누가 강도당한 사람의 이웃이 되어 주었느냐?"
레위와 사제는 강도당한 사람을 외면하였습니다.
율법학자는 강도당한 사람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에게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장 가난한 사람에게, 가장 헐벗은 사람에게, 가장 아픈 사람에게, 이방인에게, 감옥에 갇힌 이들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들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 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 사람들 가운데에 하느님께서 계시다고 하셨습니다.
나의 시간, 나의 재물, 나의 능력을 이웃들에게 기꺼이 나눌 수 있다면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늘 깨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열 처녀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신랑이 올 때를 대비해서 등잔에 기름을 채운 처녀들은 혼인잔치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랑이 언제 올지 모른다며 등잔에 기름을 채우지 못한 처녀들은 신랑이 왔을 때 혼인잔치에 들어가지 못하였습니다.
기름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깨어 있는 사람일까요?
해야 할 일을 깨닫고, 깨달은 것을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해야 할 일을 알려주셨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병자를 고쳐주는 것입니다.
마귀를 쫓아내는 것입니다.
복음의 기쁨이 나를 변화시켰다면, 변화된 내가 이웃의 아픔에 함께 한다면, 세상의 것을 추구하기보다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고 있다면, 우리는 해야 할 바를 깨닫고, 깨달은 것을 실천하는 참된 신앙인입니다.
“너희는 가진 것을 팔아 이웃에게 자선을 베풀어라.
너희 자신을 위하여 해지지 않는 돈주머니와 축나지 않는 보물을 하늘에 마련하여라.
사실 너희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이 있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자기 삶은 아주 평범하고, 특별한 일은 평범한 우리 삶에서 일어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실제로 매일 똑같은 일이 반복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정말로 그럴까요?
어느 형제님도 자기에는 아주 평범한 일만 계속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몸이 좋지 않아서 병원에 갔더니 큰 병원에 가라는 것입니다.
큰 걱정과 함께 대학병원에 가서 검사했는데, 심각한 암이고 수술하기 힘들 수도 있다는 충격적인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이 분야의 권위자라는 소리를 듣는 의사 선생님을 만나서 수술받았고, 수술이 잘 끝나 회복 중에 계십니다.
몇 달 동안 계속된 특별한 일로 인해 형제님은 평범한 일상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를 깨닫게 되었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평범한 일상을 살 때 건강에 더 신경 쓰지 않았던 것을 후회하십니다.
허리 디스크로 고생했던 친구가 있습니다.
디스크 수술 이후 허리 코어 운동으로 많이 좋아졌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요즘도 열심히 운동하느냐고 묻자, “아프지 않으니까 운동을 안 하게 돼.”라고 말합니다.
평상시 운동해야 아프지 않을 텐데, 세상일 때문에 시간이 없어서 운동하지 않으니 또 아프고 다시 후회하게 된다고 합니다.
평범한 일상에 무엇을 해야 할까요?
자신을 행복하게 할 것을 준비하는 시간을 보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늘 준비하지 않아서 후회하게 됩니다.
주님의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계속해서 뒤로 미루면서 주님의 일을 하지 않으면 마지막 순간에 큰 후회를 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마음을 어디에 둘 것인가가 명백해져야 한다고 하십니다.
우리의 보화가 있는 곳에 마음도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하느님 나라와 그 의를 추구하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뜻에 맞춰 사는 사람이 주님을 기다리며 깨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허리에 띠를 매는 것은 사람들이 길을 떠날 때, 일할 때, 또는 식탁이나 예식에 참석할 때 준비하고 있는 옷매무새를 표현합니다.
그리고 등불은 어두움을 밝히는 도구로 깨어 기다리고 있는 것을 상징합니다.
이렇게 잘 준비하는 충실하고 현명한 종이 될 것을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주인이 돌아왔을 때, 떠날 때 맡긴 직무에 대하여 충실하게 그리고 현명하게 일 처리를 했느냐에 대한 점검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이 세상의 것에 있으면 어떻게 될까요?
커다란 후회를 남겨서는 안 됩니다.
마지막 날, 가장 큰 기쁨으로 주님과 만날 수 있어야 합니다.
- 인천교구 갑곶성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