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0년 6월 1일 월요일 교회의 어머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
제1독서 : 창세 3,9–15,20
복 음 : 요한 19,25-34
그때에
25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그분의 어머니와 이모,
클레오파스의 아내 마리아와 마리아 막달레나가 서 있었다.
26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 선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27 이어서 그 제자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하고 말씀하셨다.
그때부터 그 제자가 그분을 자기 집에 모셨다.
28 그 뒤에 이미 모든 일이 다 이루어졌음을 아신 예수님께서는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시려고 “목마르다.”하고 말씀하셨다.
29 거기에는 신 포도주가 가득 담긴 그릇이 놓여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듬뿍 적신 해면을 우슬초 가지에 꽂아
예수님의 입에 갖다 대었다.
30 예수님께서는 신 포도주를 드신 다음에 말씀 하셨다.
“다 이루어졌다.”
이어서 고개를 숙이시며 숨을 거두셨다.
31 그날은 준비일이었고 이튿날 안식일은 큰 축일이었으므로,
유다인들은 안식일에 시신이 십자가에 매달려 있지 않게 하려고,
십자가에 못 박힌 이들의 다리를 부러뜨리고 시신을 치우게 하라고
빌라도에게 요청하였다.
32 그리하여 군사들이 가서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첫 째 사람과 또 다른 사람의 다리를 부러뜨렸다.
33 예수님께 가서는 이미 숨지신 것을 보고 다리를 부러뜨리는 대신,
34 군사 하나가 창으로 그분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러자 곧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
교회의 어머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오늘은 6월 예수성심성월 첫날이자 교회의 어머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입니다.
원래 6월1일은 성 유스티노 순교자 기념미사를 봉헌하지만
2018년 부터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뜻에 따라 성령 강림 대축일 다음날 월요일은
“사목자, 수도자, 신자들 안에 교회의 모성애와 진정한 마리아 신심의 성장을 증진하기 위하여”
교회의 어머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미사를 봉헌합니다.
교회의 어머니인 복되신 동정 마리아입니다.
복되신 동정 마리아를 닮아갈수록 교회는 더욱 모성적이 됨으로
비로소 어머니인 교회가 되어 갑니다. 어머니 없는 집안은 얼마나 썰렁한지요.
가톨릭 교회가, 수도원이 어머니 품같이 아늑하고 푸근하게 느껴지는 것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을 닮아 모성애를 잘 드러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신자들이 바로 교회입니다.
착한 신자들을 통해서도 교회의 어머니인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빛나는 모성애를 느낍니다.
매월 1회 수도원은 성전 안에 있는 봉헌함을 열어
수도형제들이 함께 모인 휴게실 안에서 봉헌금을 헤아립니다.
수도원의 생계에 큰 보탬이 되는 봉헌함의 봉헌금입니다.
그동안 코로나 사태로 몇 달 만에 처음으로 봉헌함을 여는 것입니다.
“아, 이게 교회의 가난한 모습이구나!”
수도형제들이 많아 보이지 않는 봉헌금을 헤아리는 장면에서
순간 수도공동체의 거룩한 가난, 자랑스런 가난이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대부분 신자들이 할 수 있는 한 정성을 다해 봉헌금을 바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마침 봉헌금 두 봉투에 소박한 글귀에 마음이 따뜻해짐을 느꼈습니다.
“평화를 빕니다. 다음엔 두둑히 넣을게요.”
“잘 쉬고 갑니다. 그리고 피정비가 적어서 죄송합니다.”
바로 이 마음이 교회를, 수도원을 아끼는 어머니의 마음입니다.
교회인 신자들의 마음은 그대로 복되신 동정 마리아 어머니의 마음을 반영합니다.
신자들이 얼마나 사랑하는 여기 요셉수도원인지요!
그대로 복되신 동정 마리아 어머니의 참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수도원이요 교회임을 깨닫습니다.
또 가톨릭 신자들이 대부분 착하고 인내심 깊은 것은
바로 교회의 어머니인 성모 마리아를 닮았기 때문임을 깨닫습니다.
이런 신자들에 대한 고마움이 더욱 성모님을 닮아 날로 모성애 깊어지는 수도원이 되게 합니다.
사실 많은 분들이 어머니의 품을 찾듯이 고향집 같은 수도원을 찾습니다.
마땅히 수도원은, 교회는 이래야 할 것입니다.
2018년 처음 이 축일을 지낼 때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강론은 지금 읽어도 참 좋은 깨우침이 됩니다.
“복음 안에서 마리아는 항상 ‘부인’이나 ‘요셉의 미망인’이 아니라, ‘예수님의 어머니’로 불렸습니다.
잉태 예고 장면에서부터 마지막까지 성경의 모든 부분은 마리아의 모성애를 강조합니다.
교회는 우선 교회를 뜻하는 단어인 교회나 신부가 여성형이기에 여성적입니다.
그리고 자녀를 출산하는 어머니입니다.
교회는 신부이자 어머니입니다. 교회의 여성적인 차원을 깨달아야 합니다.
여성적인 차원이 없을 때 교회는 정체성을 잃게 되고
단순히 하나의 자선단체나 친목회, 축구팀 같은 무엇이 되고 맙니다.
여성적인 교회만이 풍요의 태도를 지닐 수 있습니다.
이런 여성적인 차원을 망각할 때 남성적인 교회가 되고, 슬프게도 사랑도 할 수 없고
출산도 할 수 없는 외로움 속에서 살아가는 노총각들의 교회가 되고 맙니다.
교회는 여성 없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교회는 여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여성의 태도는 마리아에게서 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원하셨습니다. 온유함과 겸손은 어머니의 강한 자질입니다.
교회는 사랑의 길을 걸어가는 어머니입니다.
침묵할 줄 알고, 연민 가득한 눈길로, 조용하게 어루만져 주는,
수많은 지혜의 언어를 구사할 줄 압니다.
또한 사랑이 넘치며, 웃음을 머금고, 따뜻한 애정과 부드러운 온유의 사람으로서
어머니의 길을 걸어가는 교회입니다.”
내용이 좋아서 많이 인용했습니다.
날로 노화되어 불임不任의 노총각 같은 교회는 아닌지 살펴보게 합니다.
오늘 복음의 장면도 인상적입니다.
십자가의 예수님 아래 한쪽에 성모 마리아가 계시고
한쪽에 애제자 요한이 있으며 바로 교회를 상징하는 장면입니다.
십자가의 예수님이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교회요
교회의 어머니인 성모님과 신자들을 상징하는 애제자 요한입니다. 예수님 친히 말씀하십니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비단 애제자 요한뿐 아니라 믿는 이들 모두가 교회의 어머니이신
성모 마리아의 아들 딸이라는 말씀입니다. 바로 여기가 믿는 이들 우리 모두의 삶의 자리입니다.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그때부터 그 제자는 마리아 어머니를 집에 모셨다 합니다.
비단 애제자 요한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의 어머니,
바로 교회의 어머니가 되시는 성모 마리아를 모시고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목마르다.”, “다 이루어졌다.”
아드님의 죽음을 그대로 목격하신 피에타의 성모님 모습이야 말로
아들 예수님과 같이 케노시스, 비움의 절정에 도달했음을 봅니다.
그대로 하느님의 사랑에 까지 이른 연민 가득한 어머니 성모님을
우리 교회의 어머니로 모시고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자비로운 사랑도 마리아 어머님의 모성애를 닮았기 때문임을 깨닫습니다.
창세기의 참으로 미숙했던 하와의 실패를 결정적으로 만회한 우리의 사랑하올 어머니 마리아입니다.
창세기 마지막 말마디는 성모 마리아를 통해 온전히 실현되었음을 깨닫습니다.
‘사람은 자기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 하였다. 그가 살아 있는 모든 것의 어머니가 되었기 때문이다.’
교회의 어머니이심은 물론 진짜 살아 있는 모든 것의 어머니가 되신 성모 마리아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부터는 5월 성모성월에 이은 6월 예수성심성월의 시작입니다.
마음의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성심의 사랑도 교회의 어머니이신 성모 마리아로부터 유래됨을 봅니다.
감사송의 고백처럼, 나그넷길을 걷는 우리 교회를 어머니의 사랑으로 보살피시어,
천상 고향으로 들어가도록 자비로이 지켜 주시는 우리 교회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이십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교회의 어머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를 닮아
모성애 풍부한 온유하고 겸손한 사랑의 삶을 살아가게 하십니다.
“주님을 낳으신 행복한 동정녀, 복되신 교회의 어머니,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우리를 길러 주소서.” 아멘.
조명연 마태오 신부
제 어깨 위에는 자그마한 흉터 하나가 자리잡혀 있습니다.
아마 제 또래를 비롯한 많은 사람의 어깨 위에는 이런 흉터 하나씩은 있을 것입니다.
초등학교 1학년 땐가 2학년 땐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그 당시 맞았던 불주사 자국입니다.
결핵 예방으로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이 이 주사를 맞았습니다.
예전에 우리나라가 가난해서 일회용 주사기를 사용할 수가 없어서,
유리 주삿바늘을 알코올 불에 소독해서 주사를 놓은 것입니다.
당시 저에게 이 불주사는 엄청난 공포로 다가왔었습니다.
그냥 주사 맞는 것도 무서운데, 주삿바늘을 불에 달구어서
어깨에 놓는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웠겠습니까?
몇몇 아이는 주사를 맞기 전에 울기도 했습니다. 저 역시 정말로 울고 싶었고 도망치고 싶었습니다.
먼저 주사를 맞고 자기 자리로 돌아가는 친한 친구가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하나도 안 아파!”라고 큰 소리로 말합니다. 이 친구의 말에 용기가 생겼습니다.
‘얘도 괜찮다고 하는데 내가 못 맞을까?’라는 마음이 생긴 것이지요.
이렇게 다른 사람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 커다란 용기를 얻을 수 있는 우리입니다.
이 점을 우리 주님께서도 너무나 잘 알고 계셨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혀 계십니다.
이제 곧 죽음이 임박한 상태이지요. 더구나 제자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베드로마저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이제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은 공포에 싸입니다.
스승을 배신했다는 죄책감과 더불어, 자신 역시 스승처럼 죽음으로 내몰리지 않겠냐는 공포입니다.
그런 두려움을 알고 계신 주님께서는 당신도 커다란 고통 속에 있으면서도,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어머니에게 말씀하십니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당신은 죽으니, 요한을 아들로 삼아서 살라는 말씀이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도 어머니의 아들입니다.”라고 하셨겠지요.
주님께서는 우리 안에 사시듯 요한 안에 사시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님의 이 말씀은 사실상 당신 자신을 가리키신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에게는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머니에 대해 보살핌을 맡긴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곧 제자들을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어머니 하면 생각나는 것은 ‘사랑’입니다. 그 사랑을 제자에게 전해주신 것입니다.
즉, 교회의 어머니로 공적으로 선포되었습니다.
이 말씀으로 어머니도 또 제자들도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을 사는 우리 역시 힘을 얻습니다.
우리의 어머니이신 성모님과 함께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요한 19,26)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이제 우리는 성령강림대축일을 끝으로 부활시기를 마치고, 다시 연중시기를 맞이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2018년2월 11일 루르드 성모 발현 축일(160주년)에
성령강림 대축일 다음날인 월요일을 '교회의 어머니 동정 마리아 기념일'로 제정하셨습니다.
교회의 창립일인 성령강림대축일 다음날 거행되는 이 기념일은 매우 의미가 깊습니다.
새롭게 탄생된 첫 교회를 어머니의 보호 아래 맡기셨기 때문입니다.
이 보호의 원천은 오늘 <복음>에서 보여주고 있듯이,
마리아와 우리를 어머니와 아들의 관계로 만들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곧 예수님의 명으로 마리아는 믿는 이들의 공동체인 교회의 어머니가 되십니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요한 19,26)
이를 교황청 경신성사성 장관 로베르 사라 추기경은
“교회의 어머니이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 교령”을 반포하면서,
“성모님께서 당신 아드님의 사랑의 유언을 받아들이시고 교회의 자애로우신 어머니가 되셨다.”고
선언하십니다. 곧 성모님을 “예수님의 어머니이자 교회의 어머니”로 선언합니다.
그리고 이 “교령”에서는 성모님께서 교회의 어머니 되심을 이렇게 밝히십니다.
“참으로, 십자가 밑에 서 계신 마리아는 당신 아들이 남기신 사랑의 유언을 받아들이셨으며,
모든 이들을 영원한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는 아들딸로, 사랑하는 제자로 각각 맞아들이셨다.
그리하여 그녀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맡기신 영이 있는 교회의 자애로운 어머니가 되셨다.
결국 그리스도께서는 사랑하는 제자 안에서,
모든 제자들을 당신이 사랑하시는 어머니를 향한 자녀로 선택하셨고,
어머니를 제자들에게 맡겨 그들이 자식 된 도리로 어머니를 모실 수 있게 하셨다.”
실제로 성모님께서는 성령 강림 이후 탄생한 교회를 어머니로서 돌보셨습니다.
다락방에서 사도들과 기도하시고,
오실 성령을 기다리며 이미 당신의 사명을 시작하셨습니다(사도 1,14―2,4 참조).
프란체스코 교종께서는 바로 여기서 마리아의 영적 모성이 드러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사실, ‘교회의 어머니’라는 마리아의 호칭은 이미 교부시대 때부터 사용되었는데,
성 아우구스티노는 “그리스도 지체들의 어머니”라고 하였고,
성 레오 대교종은 “교회의 지체들의 어머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를 바오로 6세 교종께서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 「인류의 빛」을 반포(1964년)하시면서, 성모님께 이 호칭을 부여하셨습니다.
오늘의 <독서>는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가 들었던 <창세기>의 하와 이야기와
또 하나의 독서는 <사도행전 1,12-14절>인데, 그 의미는 같습니다.
<창세기> 독서는
“하와가 살아 있는 모든 것의 어머니가 되었기 때문이다.”(창세 3,20)고 말하고 있습니다.
말 그대로 모든 이의 어머니, 교회의 어머니라는 말입니다.
<사도행전> 독서는
“그들은 모두, 여러 여자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그분의 형제들과 함께
한마음으로 기도에 전념하였다.”(행전 1,14).
그리고 이는 십자가에서 사랑하는 제자에게 아들을 맡기신
오늘 <복음>의 내용과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오늘 <복음>의 전반부는 성모님께서 예수님의 처참해진 모습을
애끓는 마음으로 지켜보는 장면과 예수님께서 모친 마리아를 사도 요한에게 부탁하시는 장면입니다.
아들의 죽음과 함께 서 계시는 성모님의 이 광경은
인간적인 고통과 신앙적인 굳셈이 함께 연출되면서,
그지없이 비통하고 비장하면서도 동시에 경건한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곧 예수님의 십자가가 예수님의 고통과 믿음을 동시에 드러나고 있듯이,
십자가 밑에 서 계시는 성모님의 모습에서도 성모님의 고통과 믿음이 동시에 드러납니다.
그리하여 성모님께서는 그리스도의 고통과 죽음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시면서
예수님의 공통과 믿음에 완전한 일치를 이루시고, 하느님의 구원계획에 깊이 참여하십니다.
그토록, 성모님께서 하느님에 대한 신뢰로 십자가 아래에 서 계십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십자가의 죽음이 실패요 패배로 보이지만,
어머니께서는 그 속에서도 승리를 보고 계십니다.
‘피앗’의 응답으로 서 있는 것이며, 아들의 죽음 앞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으시고,
믿음으로 꿋꿋이 서 계십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고통 받으시고 화해를 이루시며,
동시에 성모님께서는 십자가 밑에서 고통을 받으시며 화해를 이루십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구원계획에 깊이 참여하시며, 아버지의 뜻의 완성에 협조하십니다.
사실, 오늘도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 서 계시는 성모님을 만납니다.
우리도 언제나 믿음으로 서 있어야 할 일입니다.
불신과 불목을 떨치고 신뢰로 서 있어야 할 일입니다,
서로를 믿고 신뢰하는 일, 그만큼 위대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신비 안에서 살아가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신뢰와 의탁입니다. 십자가 아래에서도 꿋꿋이 서 있는 믿음입니다.
그것은 고통 속에서도 그분의 현존에서 사랑을 배우는 일입니다.
곧 성모님과 함께 그리스도의 신비를 사는 것입니다.
“말씀을 따르신 성모님”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요,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으신” 그 믿음을 따라 살아가는 일입니다.
그리하여 우리에게도 복된 일이 벌어집니다.
바로 우리의 어머니요 교회의 어머니 되신 일이 벌어집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는 그분의 어머니께서 서 계셨습니다.”(요한 19,25)
어머니!
당신과 함께 십자가 밑에 있게 하소서.
당신과 함께 아들의 남은 고통 받게 하소서
당신과 함께 믿고 응답하게 하소서.
십자가 밑이 저의 자리가 되게 하소서. 아멘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요한 19, 27)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예수님을 부르는
유월의 뜨거운
첫 시작입니다.
교회는
어머니와 자식의 관계처럼
서로를 향해
뜨겁게 서 있습니다.
어머니의 삶
하나가
우리 삶을 헤집으며
아프게 들어옵니다.
우리를
하느님께로
안내합니다.
우리 모두를
너무 사랑하여
교회의 어머니가 되셨습니다.
죽음보다
더 강한 사랑이
분명 있습니다.
어머니의 기도를
먹고 사는
우리들 여정입니다.
교회는
어머니같이
우리를 자라게 합니다.
교회와 어머니는
우리를 위한
최고의 선물입니다.
신앙의 삶은
어머니를 닮아
끝끝내 포기 않는
가시덩굴의 삶입니다.
십자가에서
모두 만나게 되는
교회의 어머니십니다.
신앙의 힘은
십자가를
견디어 낸
어머니의 힘입니다.
어머니는 아버지 사랑의 징표다.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은 성모 마리아께서 교회의 어머니가 되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공식적으로 성모 마리아를 ‘교회의 어머니’라고 칭한 것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 헌장’을 통해서이지만,
성모님을 교회의 어머니로 믿어온 것은 교회의 오랜 전통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상에서 성모 마리아와 요한 사도를 모자 관계로 맺어주십니다.
사도 요한은 그리스도의 피로 새로 태어난 교회를 상징하는 인물입니다.
그러니 성모 마리아는 교회의 어머니가 되시는 것입니다.
유학 때 마리아론 시험에 이 문제가 나왔었습니다.
교수님이 “성모 마리아가 너의 어머니인 것이 왜 중요하냐?”라고 물으셨을 때, 저는 엉겁결에
“십자가상에서 고통 받으시는 예수님께서 말 한마디 하기도 힘들어하시면서
저희에게 성모님을 어머니로 맡기셨는데, 그것이 어떻게 중요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십자가에 매달려 절대로 중요하지 않은 말은 하실 수 없으십니다.”라고 대답했던 기억이 납니다.
왜 어머니인 것이 중요한지는 잘 모르겠고 십자가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중요하다는 것만 말씀드릴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다행히 그래도 좋은 점수를 받았습니다.
이제 그것에 대한 보충 대답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물론 이것도 정답은 될 수 없겠지만, 지금 만약 그런 문제를 다시 물으면
“어머니는 아버지의 사랑의 징표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하겠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관계는 아버지는 어머니께 끊임없이 무언가를 가져다 바치고
어머니는 그것에 만족해하지 못하는 모습이었습니다.
한 번은 신문지에 3백만 원이나 하는 돈뭉치를 가져오신 적이 있습니다.
땅을 팔아서 어머니에게 돈을 가져오신 것입니다.
그때 어머니가 처음으로 만족해하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러면서도 빚을 갚고 나면 남을 것이 별로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아버지는 농사일을 접으시고 주유소에서 일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때 주유소에서 매출에 비례하여 월급을 주었습니다.
한 번은 20여만 원밖에 안 되는 돈 봉투를 어머니에게 주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머니는 이것 가지고 어떻게 한 달을 사느냐며 하소연을 하셨습니다.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항상 부족한 돈만 가져다주셨습니다. 그러면서 미안해하셨습니다.
그다음에 아버지는 막일하시며 평생 어머니에게 돈을 가져다주셨습니다.
지금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지 4년이 넘었습니다. 이제 어머니만 볼 수 있습니다.
어머니를 볼 때 어머니만 보일까요? 아닙니다. 아버지도 보입니다.
어머니에게 그렇게 돈을 가져다 바치셨던 아버지가 안 보일 수가 없습니다.
아버지가 자녀들을 위해 어머니에게 모든 것을 가져다 바친 기억이 어머니 속에 있는 것입니다.
어머니는 그것으로 힘겹게 저희를 양육하셨습니다.
만약 두 분 중 한 분만 안 계셨어도 저희는 지금의 모습으로 성장할 수 없었다는 것을 잘 압니다.
저는 젊은 부부가 이혼하고 자녀들을 아버지가 양육하게 되었을 때,
그 아버지가 어쩔 수 없이 자녀들을 보육원에 맡겨야 했던 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다.
도저히 어린 아이들을 키우며 돈을 벌러 나갈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모든 것을 내어주어야 하고
어머니는 아버지가 할 수 없는 일을 자녀들을 위해 해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교회에 성모 마리아를 어머니로 내어주신 이유는
당신의 피로 자녀들을 돌보아야 하는 어머니가 당신 자녀들을 위해 필요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머니인 성모 마리아를 보며 교회의 머리요, 아버지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봅니다.
제가 신학교에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고민할 때
제가 다니던 성당 성모님이 진짜 성모님의 모습으로 변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때는 겨울이었고 시간은 새벽이었고 저는 술을 많이 마신 상태였습니다.
그때 저를 불러주시는 것이면 나타나서 표징을 보여 달라고 예수님께 청할 때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성모 마리아를 보내주셨습니다.
물론 그때 술을 마신 상태였기 때문에 저의 착각이라고 믿고 내려오기는 했습니다.
그렇지만 만약 그때 예수님께서 나타나셨다면 무척 부담스럽고 도망가고 싶었을 것입니다.
마리아상이 진짜 사람처럼 보이는 것도 겁이 나서 머리를 들 수 없었는데
예수님이 나타났다면 더 무서워서 제가 돌이 되어버렸을 것입니다.
부드러운 어머니를 보내주시며 그 안에서 당신의 사랑을 발견하라고 그러셨던 것 같습니다.
성모님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우리 교회를 위해 성령님을 중개하시는 어머니가 계십니다.
성모 마리아의 청에 예수님은 어쩔 수 없이 기적을 해주셔야 했습니다.
저는 성모님을 보면 어머니를 보는 것 같고 예수님을 보면 아버지를 보는 것 같습니다.
자녀를 위해 청하는 성모님 앞에서 예수님은 항상 미안한 마음으로 당신 피까지 다 부어 주십니다.
그런 어머니를 둔 교회는 얼마나 행복합니까?
성모님 덕분으로 우리는 언제나 죄를 용서받는 고해성사를 할 수도 있고,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실 수 있습니다.
성모 마리아께서 어머니로서 중개하고 계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성모 마리아는 아버지이신 예수님의 사랑을 품고 있는 우리의 어머니이십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요양원에 계시는 어머니는 언제나 저를 위해서 기도하십니다.
미국으로 오기 전 어머니께 인사를 드렸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잘 다녀오라고 하시면서 격려해 주셨습니다.
자식은 부모님의 사랑을 받으며, 부모님을 닮게 됩니다.
아버님은 성격이 강인하셨고, 판단력이 좋으셨지만 건강한 체질은 아니셨습니다.
어머니는 성격이 온유하셨고 건강한 체질이셨습니다.
돌아보니 저는 아버님의 체질을 닮았고, 어머니의 성격을 닮았습니다.
제가 강하지 않기에 도움을 많이 받을 수 있었습니다.
건강한 체질이 아니기에 늘 조심하였고, 아직까지는 건강에 큰 문제없이 잘 지내고 있습니다.
아버님의 성격과 어머님의 체질을 닮았으면 하는 생각도 했지만
지금은 저의 성격과 저의 체질에 만족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본당 신부가 되고나서 어머니께서 3년을 같이 지냈습니다.
주방을 도와줄 사람을 구할 수 있는 여건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는 기쁜 마음으로 사제관에서 지내셨습니다.
아버님께서도 3년 동안 혼자 계시는 것을 참아 주셨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어머니께도 감사한 일이지만 아버님께 정말 감사할 일입니다.
어머니는 레지오 활동도 하시고, 대모도 해 주시면서 신자들과 잘 지내셨습니다.
아버님도 가끔 오시면 ‘어르신 복사’ 연습시켜 주시고, 어르신들과 장기도 두시면서 잘 지내셨습니다.
제가 3년 동안 잘 지낼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께서 함께 지냈기 때문입니다.
아버님께서 지혜를 빌려 주셨기 때문입니다.
아버님의 말씀을 듣고 담벼락 넘어 뻗어있던 은행나무 가지를 잘랐습니다.
태풍에 가지가 부러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버님의 말씀을 듣고 수녀원 마당에 꽃을 심었더니 수녀님들이 좋아하였습니다.
어머니는 가끔 제게 부탁을 하셨습니다.
대녀가 많은 어머니는 돌봐줄 일도 많았습니다.
대녀의 딸이 혼배성사를 받아야 하는데 주례를 부탁하기도 했습니다.
어머니의 청이기에 별 일 없으면 혼배 주례를 해 주었습니다.
대녀의 아들이 병원에 입원했는데 병자성사를 부탁하기도 했습니다.
역시 어머니의 청이기에 별 일 없으면 다녀왔습니다.
어머니의 부탁을 좀 더 많이 도와 드리지 못한 것이 아쉽습니다.
어머니의 부탁은 사제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성모님께서도 같은 마음으로 예수님께 부탁하셨다고 생각합니다.
혼인 잔치에 포도주가 떨어졌고, 성모님은 그 사실을 아셨습니다.
성모님은 누구보다 예수님의 능력을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성모님의 부탁을 기쁨 마음으로 들어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성모님의 따뜻한 마음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교회의 어머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기념일입니다.
오늘 복음은 성모님께서 교회의 어머니가 되신 이유를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모님께 사랑하는 제자를 부탁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람이 이제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교회는 사도로부터 이어온다고 우리는 신앙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사도들의 어머니인 성모님은 교회의 어머니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하는 제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분이 이제 당신의 어머니입니다.”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서 성모님을 교회의 어머니로 공경하고 있습니다.
성모님은 따뜻한 모성으로 우리들의 청을 예수님께 전구해 주십니다.
“주님을 낳으신 행복한 동정녀,
복되신 교회의 어머니,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우리를 길러 주시네.
주님께서 영광스럽게 오시는 그날까지 나그네 길을 걷는 교회를
어머니의 사랑으로 보살피시어 하늘의 고향으로 들어가도록 자비로이 지켜 주시나이다.”
한모금 / 수도자매일복음묵상
교회의 어머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
오늘은 '교회의 어머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 이다.
성모님을 '교회의 어머니'라고 칭하는 것은?
아담이 하와를 통해 타락한 인류를 낳았다면
예수님은 마리아를 통해 새로운 인류인 교회를 탄생시켰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십자가 아래에 당신 어머니 마리아와 그 곁에 서 있는 제자를 보시고
어머니 마리아에게는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라고 하시고,
제자에게는 "이분이 네 어머니이시다." 라고 하셨다.
예수님이 어머니를 "여인" 이라고 지칭하는 것은 이상하다.
어머니에게 사용하는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용어는 상징성이 있다고 본다.
요한 복음 시작(2장)과 끝부분(19장)에 즉 두 번이나 예수님이 마리아를 "여인" 이라고 칭한다.
카나 혼인잔치에서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에수님께 잔치집에 "포도주가 없다."고 알렸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머니에게
"여인이시여,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
라고 대답하신다.
요한 복음사가는 2,1-12 & 19, 26 이하에서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님의 제자들과 함께 있음을 강조한다.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당신의 제자로서 이루어진 공동체의 대표로서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요한 2, 5)라는 가르침을 주고 있는
교회라는 것이다.
마리아는 교회를 향해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고 하며
교회 공동체가 예수님을 따르도록 인도하신다.
교회의 어머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여!
주님이 시키는 대로 무엇이나 할 수 있는 용기와
나로 가득 찬 이기적인 교만을 내려놓을 수 있는 겸손을 주소서.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