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 잉크 주식회사
- 이중원
새초롬한 잎사귀에 햇살이 내리쬐어도
버스가 남기고 간 잿빛의 연기만이
망막에 재고가 남은 유일한 색채일까
발 아래 선이 있고 내 뒤로 줄이 있다
느려지는 발자국을 억지로 잡아끌어
통근의 컨베이어에 실려가는 유리병
모래알 흐르듯이 부서지는 빛줄기가
정류장 팻말 옆의 풀 허리에 한껏 고여
메마른 마개 틈새에 떨어지는 오전 10시
빵, 하는 경적음에 뜬 눈이 부시도록
생생하게 흔들리는 푸릇한 잡초들만,
염가에 세일 중인 창공, 한없이 싱그럽다
-2016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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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저녁 영주시조 문우들의 정기모임에서 신춘당선 작품 두 편을 같이 읽었습니다
공통된 의견이 제목과 주제 그리고 각 수의 표현이 선명하게 합치되지 않는다는 것이었어요
쉽게 읽히지만 뒷맛이 개운하여 또 읽고 싶은 작품이 좋은 시조인데...
그래서 심사평을 다시 한번 새겨 읽습니다
오래된 형식으로 어떻게 오늘의 시를 열어갈까. 기대와 설렘으로 거듭 읽었다.
시조에 입혀온 선입견이나 관념적 답습에 그친 낡은 모사(模寫)와,
작년 응모작을 살짝 고쳐 낸 것들부터 내려놓았다.
새로움을 향한 도전으로 께름한 데다 습작의 양이 등단 후 생존에도 큰 바탕이기 때문이다.
당선작으로 이중원씨의 ‘파란 잉크 주식회사’를 올린다.
끝까지 겨룬 응모자는 언어를 다루는 솜씨나 대상을 파고드는 시선이 예각적인 조우리씨,
참신한 어법으로 진술과 이미지의 명도를 높인 김상규씨였다.
서정적 여운을 형식의 미덕으로 삼을 줄 아는 정영희씨,
재기로 정형의 다른 면모를 보여준 조선의씨도 다시 읽게 했다.
서희정·이태수·이예연씨 등 이십 대가 펼쳐낸 상상력과 발랄한 문법에서도
새로운 시조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었다.
이중원씨의 독창적 세계 개진은 그중 단연 돋보였다.
‘파란 잉크 주식회사’는 언어에 촉수를 달고 탐사하듯 세밀한 감각의 깊이로 잡아 엮는
묘사와 진술이 긴밀한 조화가 압권이다.
현실의 다면을 꿰는 독법으로 발생시키는 낯선 미감의 어조 속에 유지하는 정형성도 견고하다.
제목 ‘파란’이 촉발하는 원인에 대한 다양한 상상 또한
작품 전편에 이상한 생기와 냉기를 부여한다....
색다른 어법과 고른 수준과 능숙한 형식 운용 등으로 미루어볼 때,
정형 구조를 확장할 신인 탄생으로 기대된다.
당선을 축하한다. 더 놀라운 ‘파란’을 열어가기 바란다
- 시조시인 정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