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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列國志 제102회
초장왕(楚莊王)의 군대는 상당한 손실을 입고 황호(皇滸)까지 후퇴하여 하채하였다. 투월초(鬥越椒)가 쏜 화살을 가져와 보니, 그 길이가 보통 화살보다 반이나 더 길고, 학의 깃을 달았으며 화살촉은 표범의 이빨로 되어 있는데, 굉장히 날카로웠다. 그걸 본 사람들은 혀를 내두르며 놀라지 않는 자가 없었다.
밤중에 장왕이 영채를 순찰하다가 들으니, 군졸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이런 말을 주고받고 있었다.
“투영윤의 신전(神箭)은 정말로 두렵다! 우리가 이기기 어려울 거야.”
장왕은 한 사람을 시켜 진중에 거짓말을 퍼뜨리게 하였다.
“옛날 선군 문왕(文王) 때 융만(戎蠻)이 화살을 아주 날카롭게 만든다는 말을 듣고 사람을 보내 물었더니, 융만이 화살 두 대를 바쳤다. 그 화살 이름을 투골풍(透骨風)이라 하는데, 태묘에 간직해 둔 것을 투월초가 훔친 것이다. 그런데 오늘 투월초가 그 화살 두 대를 다 쏘았으니, 이제는 염려할 필요가 없다. 내일은 반드시 투월초를 깨뜨릴 것이다.”
병사들은 그제야 안심하였다. 장왕은 또 이렇게 명하였다.
“수(隨)나라까지 후퇴하여, 한수(漢水) 동쪽의 여러 나라들을 모두 일으켜 투씨를 토벌하겠다.”
이 명을 듣고, 소종(蘇從)이 여러 장수들에게 말했다.
“강적이 앞에 있는데, 우리가 후퇴하면 저들이 반드시 추격해 올 것이오. 왕께서는 실책하고 있는 것이오.”
공자 측(側)이 말했다.
“이는 왕께서 거짓으로 하신 말씀이오. 우리가 들어가 보면, 반드시 다른 처분이 있을 것이오.”
소종과 공자 측이 공자 영제(嬰齊)와 함께 밤중에 장왕을 찾아가자, 장왕이 말했다.
“투월초의 세력이 예리하니, 계책으로 이겨야지 힘으로 대적해서는 안 되겠소.”
장왕은 공자 측과 영제에게 매복의 계책을 일러 주었다. 두 장수는 계책을 받고 물러갔다.
다음 날 새벽 닭 울음소리가 들리자, 장왕은 대군을 거느리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투월초는 즉시 추격을 시작했다. 장왕의 군대는 쏜살같이 달아나 이미 경릉(竟陵)을 지나 북으로 가고 있었다.
투월초는 하루 밤낮 동안 2백여 리를 진군하여 청하교(清河橋)에 이르렀다. 그때 장왕의 군대는 다리 북쪽에서 아침밥을 짓고 있다가, 추격병이 달려오는 것을 보고 솥이며 그릇을 모두 내던지고 또 달아나기 시작했다. 투월초가 명을 내렸다.
“楚王을 사로잡은 다음, 아침밥을 먹기로 한다.”
지칠 대로 지친 투월초의 병사들은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어쩔 수 없이 또 추격하여, 장왕의 후대인 반왕(潘尪)의 군대를 따라잡았다. 반왕은 병거 위에 서서 투월초에게 말했다.
“그대의 뜻이 왕이 되는데 있다면, 어째서 빨리 추격하지 않으시오?”
투월초는 그 말이 호의에서 나온 말인 줄 알고, 반왕을 버리고 60여 리를 또 전진하여, 청산(青山)에 당도하여 楚軍 장수 웅부기(熊負羈)를 만났다. 투월초가 웅부기에게 물었다.
“楚王은 어디 있는가?”
웅부기가 말했다.
“왕은 아직 이곳에 도착하지 않았소.”
투월초는 문득 의심이 들어 웅부기에게 말했다.
“그대가 나를 도와 왕을 사로잡아 준다면, 내가 나라를 얻은 후 그대와 함께 나라를 다스리겠소.”
웅부기가 말했다.
“영윤의 병사들을 보니, 모두 배고프고 지친 것 같습니다. 배불리 먹고 난 다음에 싸우는 것이 좋겠습니다.”
투월초는 그 말을 옳게 여기고, 병거를 세워놓고 밥을 짓게 하였다. 밥이 채 익기도 전에 공자 측과 공자 영제가 양쪽에서 군사를 휘몰고 쇄도해 왔다. 투월초의 병사들은 더 이상 싸울 힘이 없어 남쪽으로 달아나 청하교에 이르렀다. 그러나 다리는 이미 끊어진 뒤였다. 장왕이 달아나는 척하고 다리 옆에 숨었다가, 투월초가 지나간 다음 다리를 끊어 귀로를 차단한 것이었다.
투월초는 크게 놀라, 물의 깊이를 재어 보고 도하할 계책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때 한 발의 포성이 울리더니, 楚軍이 저쪽 강 언덕에 나타났다. 대장 악백(樂伯)이 앞에 나와 크게 소리쳤다.
“투월초는 속히 말에서 내려 결박을 받아라!”
투월초는 크게 노하여 강 건너편을 향하여 활을 쏘라고 명하였다.
악백의 군중에 활을 잘 쏘는 양유기(養繇基)라는 한 장교가 있었다. 그의 활솜씨는 백발백중(百發百中)이어서, 백보(百步) 밖에서 나뭇잎 위에 놓인 이[虱]를 맞힌 적도 있었다. 군중에서는 그를 신전(神箭) 양숙(養叔)이라 불렀다. 양유기가 악백에게 청하였다.
“투월초와 활로 겨루어 보게 해주십시오.”
악백이 허락하자, 양유기는 언덕에 서서 크게 소리쳤다.
“강이 이처럼 넓은데, 화살이 어찌 다다르겠습니까? 듣건대 영윤이 활을 잘 쏜다고 하니, 나하고 우열을 가려봄이 어떻겠습니까? 각기 다리 끝에 서서 화살 세 대씩을 쏘아 사생을 결단해 봅시다!”
투월초가 물었다.
“너는 누구냐?”
“나는 악백 장군의 부하 소장(小將) 양유기입니다!”
투월초는 그가 무명임을 알고 우습게 여겼다.
“네가 나와 활을 겨루어 보겠다면, 내가 먼저 세 대를 쏘겠다!”
“세 대가 아니라 백 대를 쏜다고 해도 두려워할 내가 아닙니다. 화살을 피한다면 호걸이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양편 군사는 뒤로 물러서고, 두 사람은 강을 사이에 두고 남북으로 마주섰다. 투월초는 단번에 양유기의 머리를 꿰뚫어 강물 속에 쳐 넣으려고, 활을 힘껏 잡아당겨 첫 번째 화살을 날렸다. 하지만 누가 알았으랴! ‘서두르는 자는 성공하지 못하고, 성공하는 자는 서두르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양유기가 날아오는 화살을 보고 활을 들어 내리치자, 화살은 힘없이 강물 속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양유기가 소리쳤다.
“좀 더 힘 있게 쏘아 보시오!”
투월초는 두 번째 화살을 시위에 메겨 신중하게 쏘았다. 화살은 바람을 가르며 날았다. 양유기가 고개를 살짝 숙이자, 화살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 버렸다. 투월초가 소리쳤다.
“네 입으로 피하지 않겠다고 하고선 고개를 숙여 화살을 피하다니, 너는 대장부가 아니다!”
양유기가 대답했다.
“영윤에게는 아직 화살이 한 대 남아 있지 않습니까? 내 이번에는 피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만약 이번에 영윤이 맞히지 못하면 다음은 내가 쏘겠습니다!”
투월초는 생각했다.
“네 놈이 피하지 않는다면, 이번에야말로 머리통을 꿰뚫어 버리고 말겠다.”
투월초는 세 번째 화살을 날렸다. 양유기는 꼿꼿하게 서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군사들은 일제히 함성을 질렀다. 그런데 보라! 양유기는 화살을 맞고서도 그대로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양유기는 화살이 막 얼굴에 꽂히려는 찰나 입을 벌리고 이빨로 화살촉을 꽉 물어 버린 것이었다. 투월초는 당황하였다. 하지만 대장부가 이미 약속한 이상 신의를 저버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투월초가 소리쳤다.
“이제 네가 쏠 차례다! 하지만 세 대로써 나를 맞히지 못하면, 다시 내가 쏘겠다!”
양유기는 웃으며 말했다.
“세 대까지도 필요 없소! 내 단 한 대로 영윤의 숨통을 끊어 주겠소. 이제 영윤의 목숨은 내 손에 달렸소!”
“잔소리 말고 쏘기나 해라!”
양유기는 화살 한 대를 시위에 걸어 기합소리와 함께 투월초를 향해 쏘았다. 그러나 실은 시위만 당겼다가 놓았을 뿐, 화살을 날리지는 않았다. 투월초는 시위 소리를 듣고 화살이 날아오는 줄 알고 몸을 돌려 피했다. 양유기가 말했다.
“화살은 아직 내 손에 있소! 피하면 호걸이 아니라 했는데, 어찌 몸을 돌려 피하시오!”
“잔꾀 부리지 말고 얼른 쏴라!”
양유기는 이번에도 시위만 당겼다 놓았다. 투월초가 또 몸을 돌려 피하는 순간, 양유기는 진짜로 화살을 날렸다. 투월초는 화살이 날아오는 것을 미처 보지 못했다. 피할 여유도 없이 화살은 투월초의 머리를 꿰뚫고 말았다. 참으로 가련한 일이었다. 몇 년 동안 초나라 영윤을 지냈던 투월초가, 오늘 소장 양유기의 화살 한 대에 죽고 말았다.
염선(髯仙)이 시를 읊었다.
人生知足最為良 족함을 아는 것이 인생의 최고 미덕인 것을
令尹貪心又想王 영윤이 되고서도 또 다시 왕위를 탐했도다.
神箭將軍聊試技 신전(神箭) 장군의 화살 한 대에
越椒已在隔橋亡 투월초는 다리 건너편에서 죽고 말았도다.
투씨의 군사들은 배고프고 지친데다 대장이 죽는 것을 보고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나기 시작했다. 공자 측과 공자 영제가 일제히 추격하여 마구 죽였다. 시체는 산을 이루고 피는 강물을 붉게 물들였다. 사로잡힌 병사들은 모두 참형을 당하였다.
투월초의 아들 투분황(鬥賁皇)은 晉나라로 달아났다. 晉侯는 그를 대부로 삼아 묘(苗) 땅을 식읍으로 주었다. 이때부터 투분황은 묘분황(苗賁皇)이라 불리게 되었다.
장왕은 영도(郢都)로 개선하여 투씨 일족을 몰살하였다. 그때 투반(鬥班)의 아들 투극황(鬥克黃)은 잠윤(箴尹) 벼슬을 하고 있었는데, 장왕의 명을 받들어 제나라와 秦나라에 사신으로 가 있었다.
[제92회에, 투월초가 초목왕에게 투반을 참소하여 죽이게 하였고, 목왕은 투월초를 영윤에, 위가를 사마에, 투극황을 잠윤에 임명하였다.]
투극황은 제나라에서 돌아오다가 송나라에 이르러 투월초의 반란 소식을 들었다. 곁에 있던 사람들이 투극황에게 말했다.
“돌아가서는 안 됩니다.”
투극황이 말했다.
“임금은 하늘이다. 천명을 어찌 어기리오!”
투극황은 영도로 돌아와 장왕에게 복명하고 나서, 스스로 사구(司寇)를 찾아가 구금을 청했다.
“나의 조부 자문(子文)께서는 일찍이 투월초가 반역할 상(相)이어서 언젠가 반드시 멸족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소. 그래서 임종 시에 나의 부친께 타국으로 도피하라고 말씀하셨는데, 부친께서는 대대로 입어 온 초나라의 은혜를 저버릴 수 없어 차마 타국으로 떠나지 못하셨소. 그러다가 마침내 투월초에게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오늘에야 조부의 말씀이 옳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불행히도 역신(逆臣)의 일족이 되고, 선조의 교훈을 거역한 자손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제 나는 죽어 마땅한 몸이니, 어찌 감히 형벌을 피하겠습니까?”
투극황의 말을 전해들은 장왕은 찬탄하였다.
“자문은 참으로 신인(神人)이로다! 그가 초나라를 다스린 공이 크거늘, 어찌 그 자손의 대를 끊을 수 있겠는가!”
장왕은 투극황을 사면했다.
“투극황은 죽기를 각오하고 형벌을 피하지 않았으니, 과연 충신이로다.”
장왕은 투극황을 복직시키고 그의 이름을 투생(鬪生)으로 고쳐 주었다. 즉 마땅히 죽어야 할 사람이 다시 살아났다는 의미였다.
장왕은 양유기의 공로를 높이 사, 후한 상을 내림과 동시에 친위군 대장으로 임명하고 차우(車右)로 삼았다. 장왕은 영윤 자리에 마땅한 인물을 찾지 못하다가, 심(沈) 땅의 장관인 우구(虞邱)가 현명하다는 것을 듣고 그에게 정사를 맡겼다.
초장왕은 점대(漸臺) 위에서 크게 잔치를 베풀어 백관을 초청했다. 그리고 비빈(妃嬪)들도 잔치에 참석시켰다. 장왕이 말했다.
“과인이 음악을 듣지 않은 지가 6년이 되었소. 이제 역적들은 모두 토벌되고 나라 안이 안정되었으니, 오늘은 경들과 더불어 마음껏 즐기고자 하오.”
이 날의 잔치는 태평연(太平宴)이라 명명되었고, 모든 대소 관원들이 마음껏 즐기게 되었다. 음식이 마련되고 음악이 울리는 가운데 해가 서산으로 넘어갈 때까지 흥은 계속되었다. 장왕은 촛불을 밝히게 하고 계속 즐겼다.
장왕은 총애하는 허희(許姬) 강씨(姜氏)에게 분부하여, 자리를 돌면서 대부들에게 술을 한 잔씩 따르도록 하였다. 허희가 대부들에게 술을 따르며 자리를 돌고 있을 때였다. 홀연 일진광풍(一陣狂風)이 불어 닥치더니 일시에 모든 촛불을 꺼뜨려 버렸다.
내시들이 미처 촛불을 다시 밝히기 전, 어두운 틈을 타서 어떤 자가 허희의 소매를 은근히 끌어당겼다. 깜짝 놀란 허희는 왼손으로 소매를 떨치면서 오른손으로는 그 자의 관끈을 끊었다. 그 자는 놀라서 손을 놓았다. 허희는 관끈을 손에 쥐고 얼른 장왕에게 달려가 귀에 대고 속삭였다.
“첩이 대왕의 명을 받들어 백관에게 술을 따르고 있는데, 어떤 자가 무례하게도 촛불이 꺼진 틈을 타서 첩의 소매를 끌어당겼습니다. 첩이 그의 관끈을 끊어 왔으니, 대왕께서는 불을 밝히시고 그를 찾아내십시오.”
장왕은 황급히 명을 내렸다.
“촛불을 켜지 마라! 오늘의 잔치는 과인이 여러 경들과 더불어 취하도록 마시면서 함께 즐기고자 함이었노라. 여러 경들은 모두 관끈을 끊어 버리고 통쾌하게 마시도록 하라. 만약 관끈을 끊지 않는 자가 있다면, 이는 즐겁지 않은 것으로 알겠노라.”
백관이 모두 관끈을 끊은 다음 촛불을 밝히니, 결국 누가 소매를 끌어당겼는지 알 길이 없게 되었다.
잔치 자리가 파하고 궁으로 돌아온 뒤, 허희가 장왕에게 말했다.
“첩이 듣건대, 남녀 간에는 서로 예의를 지켜야 한다고 했습니다. 하물며 君臣 간에는 더더구나 말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오늘 대왕께서 첩으로 하여금 신하들에게 술을 따르게 한 것은, 공경하는 예를 보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첩의 소매를 끌어당긴 자를 밝히지 않으셨으니, 무엇으로 상하의 예를 엄숙히 하고 남녀의 구별을 바르게 하겠습니까?”
장왕은 웃으며 말했다.
“이는 아녀자가 알 바 아니오. 예로부터 君臣 간에 향연을 베풀 때는, 석 잔을 넘지 않는 것이 예의였소. 또 낮에만 마시고 밤에는 마시지 않아야 하오. 그런데 오늘 과인은 촛불까지 밝히면서 취하도록 마셨소. 술이 취하면 광기를 보이는 것이 인지상정(人之常情)이오. 만약 그를 밝혀 죄를 준다면, 그것으로 부인의 절개는 드러날지 모르나 국사(國士)의 마음을 상하게 할 것이며, 모든 신하들의 즐거운 기분을 망쳐 버리게 될 것이니, 그것은 과인의 뜻에 어긋나게 되는 것이오.”
허희는 탄복하였다. 후세 사람들은 이 연회를 ‘절영회(絶纓會)’라 불렀다.
[‘절영회’는 ‘관끈을 끊은 연회’라는 뜻으로, 남의 잘못을 관대하게 용서해 주거나 남을 어려운 일에서 구해주면 반드시 보답이 따르는 것을 비유하는 말로 사용된다.]
염옹(髯翁)이 시를 읊었다.
暗中牽袂醉中情 어둠 속에서 소매를 끌었으니 취중의 정이었건만
玉手如風已絕纓 옥수(玉手)는 바람처럼 관끈을 끊었도다.
盡說君王江海量 군왕의 하해(河海) 같은 도량을 어찌 말로 다하랴.
畜魚水忌十分清 물고기를 기를 때는 물이 너무 맑지 않도록 해야 하리라.
어느 날, 초장왕이 우구와 더불어 정사를 논하다가, 밤이 이슥해서야 궁으로 돌아왔다. 부인 번희(樊姬)가 물었다.
[제99회에, 소종이 간했을 때 장왕은 내조를 잘한 번희를 부인으로 삼았다.]
“조정에 오늘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렇게 늦으셨습니까?”
장왕이 말했다.
“과인이 우구와 더불어 정사를 논하다 보니, 그만 늦은 줄을 몰랐소.”
“우구는 어떤 사람입니까?”
“초나라의 현인이오.”
“첩이 보건대, 우구는 현인이 못 되는 것 같습니다.”
“그대는 어째서 우구가 현인이 아니라는 것이오?”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것은, 아내가 남편을 섬기는 것과 같습니다. 첩은 중궁(中宮)의 자리에 있으면서, 궁중에 미녀가 있으면 왕께 바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우구는 왕과 밤늦게까지 정사를 논하면서도, 아직까지 한 사람의 현인도 천거했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무릇 한 사람의 지혜에는 한계가 있는 법이며, 초나라의 선비는 무궁합니다. 우구는 한 사람의 지혜로 무궁한 선비를 가리고 있으니, 어찌 현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장왕은 그 말을 옳게 여겼다.
다음 날, 장왕은 우구에게 번희의 말을 그대로 전했다. 우구가 말했다.
“신의 지혜는 부인에게 미치지 못하겠습니다. 당장 인재를 찾아보겠습니다.”
우구는 여러 신하들에게 물어 보고 다녔다. 투생이 말했다.
[투생은 투반의 아들 투극황이다. 앞서 장왕이 이름을 고쳐 주었다.]
“위가(蒍賈)의 아들 위오(蒍敖)가 현명합니다. 그는 투월초의 난을 피하여 지금 몽택(夢澤)에 은거하고 있는데, 그야말로 장상지재(將相之材)입니다.”
[제101회에, 투월초가 반란을 일으켜 위가를 죽였을 때 위오는 모친을 모시고 몽택으로 피신하였다. ‘장상지재’는 장수나 재상이 될 만한 인재를 말한다.]
우구에게서 그 말을 전해들은 장왕이 말했다.
“백영(伯嬴; 위가)은 지혜로운 사람이니, 그의 아들도 반드시 비범할 것이오. 그대의 말이 아니었더라면, 내 깜빡 잊을 뻔했도다.”
장왕은 즉시 우구에게 명하여, 투생을 대동하고 몽택으로 가서 위오를 데려오라고 하였다.
한편, 위오의 字는 손숙(孫叔)인데, 사람들은 그를 손숙오(孫叔敖)라고 불렀다. 그는 투월초의 난을 피해 어머니를 모시고 몽택에서 살고 있었는데, 스스로 농사를 지어 먹고 살았다.
어느 날, 손숙오는 호미를 메고 밭으로 가다가 양두사(兩頭蛇)를 보았다. 손숙오는 깜짝 놀라 혼자 말했다.
“내 듣건대, 양두사는 상서롭지 못한 짐승으로서, 이를 본 자는 반드시 죽는다고 했다. 내가 이제 죽겠구나!”
손숙오는 한편으로 또 이렇게 생각했다.
“이 뱀을 그냥 놔두면, 혹 다른 사람이 또 보게 되어 죽게 될는지 모른다. 차라리 나 혼자 당하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손숙오는 호미를 휘둘러 양두사를 쳐 죽이고 밭두둑에 묻었다. 그리고는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를 보고 눈물을 흘렸다. 그 어머니가 까닭을 묻자, 손숙오가 말했다.
“양두사를 본 자는 반드시 죽는다고 했는데, 오늘 소자가 그걸 보았습니다. 이제 더 이상 어머니를 봉양할 수 없게 되어, 이렇게 우는 것입니다.”
“그 뱀은 지금 어디 있느냐?”
“소자는 다른 사람이 또 보게 될까 염려하여, 죽여서 묻었습니다.”
“사람이 착한 일만을 생각하면, 하늘이 반드시 돕는 법이다. 네가 양두사를 보고서 다른 사람에게 화가 미칠까 두려워하여 그걸 죽여서 묻었으니, 그것은 착한 일이다. 착한 일을 생각만 한 것이 아니라 착한 일을 실제로 행한 것이니, 너는 죽지 않을 것이다. 장차 반드시 복이 있을 것이다.”
과연 며칠이 지나지 않아, 우구가 장왕의 명을 받들고 왔다. 손숙오의 어머니가 웃으며 말했다.
“이는 바로 네가 양두사를 죽여 묻은 데 대한 보답이니라.”
손숙오는 어머니를 모시고 우구를 따라 영도로 갔다.
장왕은 손숙오를 만나 얘기를 나눠 본 후, 크게 기뻐하였다.
“초나라의 어떤 신하도 경에게는 비할 수 없으리라.”
장왕이 그날로 당장 손숙오를 영윤으로 삼으려 하자, 손숙오는 사양하며 말했다.
“신은 밭을 갈다 온 자인데, 갑자기 정사를 맡으면 어떻게 사람들을 복종시킬 수 있겠습니까? 대부들의 뒤에나 서게 해 주십시오.”
장왕이 말했다.
“과인은 경을 알고 있으니, 경은 사양하지 마시오.”
손숙오는 재삼 사양하다가, 마침내 명을 받들어 영윤이 되었다. 그는 초나라의 제도, 군법 등을 모두 재정비하였다.
병참부대를 군우(軍右)와 군좌(軍左)로 나누어, 군우는 병거나 병기 등 전투 준비를 담당하고 군좌는 막사 등 숙영 준비를 담당하게 하였다. 전군(前軍)은 깃발을 앞세우고 나아가 적의 유무를 살핀다는 뜻으로 ‘모려무(茅慮無)’라고 했고, 중군은 권모(權謀)가 모두 거기서 나온다는 뜻으로 ‘중권(中權)’이라고 했다. 후군은 ‘후경(後勁)’이라 했는데, 강한 병사를 뒤에 두어 싸울 때는 기병(奇兵)으로 사용하고 후퇴할 때는 뒤를 끊는 임무를 맡았기 때문이다.
왕의 친위대는 이광(二廣)으로 나누었는데, 1광은 병거 15승에 각 병거마다 보졸 백 명이 따르고 후위에 25명의 유병(遊兵)을 두었다. 우광은 자정부터 정오까지, 좌광은 정오부터 자정까지 경비하게 하였다. 매일 닭이 울 무렵에 우광이 말을 타고 순시를 시작하고, 정오가 되면 좌광이 임무를 교대하여 황혼이 되면 그치게 하였다. 내궁에서도 좌우반을 나누어 순찰을 돌면서 뜻밖의 변란에 대비하게 하였다.
우구를 중군대장, 공자 영제를 좌군대장, 공자 측을 우군대장, 양유기를 우광대장, 굴탕(屈蕩)을 좌광대장으로 임명하였다. 계절마다 군대를 소집하여 검열함으로써 평상시에도 군기를 잃지 않게 하고 백성이 동요하지 않도록 하였다.
또 각처에 수리(水利) 시설을 갖추어 모든 전답에 물을 댈 수 있게 하였다. 백성은 모두 손속오를 칭송하였다. 초나라의 여러 신하들은 처음에는 장왕이 손숙오에게 갑자기 중임을 맡기자 심중으로 불복하였으나, 손숙오의 행정이 모두 조리에 맞는 것을 보자 찬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초나라가 드디어 현신을 얻었으니, 이는 자문(子文)이 다시 나타난 것이나 다름없다!”
그때 정목공(鄭穆公) 난(蘭)이 훙거하고, 세자 이(夷)가 즉위하였으니 그가 정영공(鄭靈公)이다. 그때 공자 송(宋)과 공자 귀생(歸生)이 정권을 잡고 있었는데, 여전히 晉과 楚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면서 어느 쪽을 섬길지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초장왕은 손숙오와 정나라를 정벌할 일을 상의하고 있었는데, 홀연 정영공이 공자 귀생에게 시해 당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장왕이 말했다.
“내가 정나라를 정벌할 명분이 생겼다!”
첫댓글 초장왕 절영지연(絶纓之宴)이 여기서 나오는구먼,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얻는 것이 없고,
생각하기만 하도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
(學而不思卽罔 思而不學卽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