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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백만명의 목숨을 구한 유신헌법과 박정희 대통령
32년 동안 묻혔던 비밀과 70년대 반공정권 연구
1960년4.19로 이승만 '반공정권'이 무너지자 혁신계 좌익들은 환호하며 살판이 났었죠. 그런데 4.19로 등장한 장면(張勉) 정권이 반공법과 데모규제법을 제정하려고 하자 좌익들이 들고 일어난 것이죠. '너도 이승만처럼 독재를 할려고 하느냐?'
좌익들은 밤낮 횃불시위를 하며 장면 정권에 대항했습니다. 힘도 없고 결단력도 없었던 장면 정권은 시위대에 끌려다니며 결국 아무것도 못하는 무정부 정권 비슷하게 된 거예요. 이런 상태에서는 남한은 공산당에 먹히는 것이 99%도 아니고 100%입니다. 그 때 박정희 장군이 5.16과 함께 나타난 겁니다.
박정희 의장은 1961년7월 즉시 반공법을 제정하고 좌익들을 척결했어요. 그리고 박정희 의장은 항일 독립운동가들에 대해 훈포장을 수여했습니다. 안중근,유관순,김좌진,윤봉길,김구 등이 1962년에 독립유공자로 훈포장을 받았습니다. 그분들이 건국 이후 처음으로 훈포장을 받은 겁니다.
이렇게 우리 역사가 흘러온 겁니다. 5.16이 없었다면 우리나라 남한의 역사는 존재할수 없습니다. 공산화된 월남,캄보디아 등 동남아 역사를 보면 압니다.
70년대 유신 시절은 기적(miracle)의 시대..안보와 경제 둘다.
오늘은..침략자 영웅이 아니라 '공산당을 막아낸 영웅, 자유체제를 지킨 영웅, 평화를 수호한 영웅'에 대해 알아볼까 합니다.
'자유체제를 지킨 영웅'이란 뛰어난 용기와 지혜로 공산당을 막아내고 난세를 극복하여 국가와 '대다수 국민'을 살린 지도자를 말합니다. 그러한 영웅이 집권할 때 소수 반대파는 억압을 당하게 됩니다. 지혜가 부족한 사람들과 반역자(종북좌파)들은 억압을 당하죠.
반면 독재자란..김일성처럼 남침전쟁을 일으켜 2백만명을 죽게 만들고 장장 48년을 집권하며 수백만 국민들을 학살하고 대다수 국민들을 못살게 만드는 인간이죠. 독재자 치하에서 소수 아부파는 영화를 누리게 됩니다.
군사학의 귀재인 박대통령은 산업 전략적 두뇌도 뛰어났는데...좁은 땅에 인구는 많고 자원은 없는 한국..자본도 기술도 없었던 한국은 상공업과 서비스 산업 발전으로 살길을 찾아야 한다고 박대통령은 생각했던 것이죠. 당시에는 농업에 종사하는 농업인구가 8~90%.
60년대에 월남보다 못살던 한국은 박대통령의 웅대한 전략 즉 산업발전 청사진을 바탕으로 유신 시절에 놀라운 산업구조 변신을 하여...꿈에 그리던 선진국형 산업구조 즉 중공업,철강,조선,전자,화학,자동차,반도체 등으로 이루어진 산업구조를 갖게 됩니다.
1970년 당시에는 북한의 국력이 남한보다 강했기 때문에..경제발전으로 국력을 신장시키는 것이 남북 대결에서 승리하는 길이었고 공산당을 막는 길이었습니다. (1970년 당시 남한의 1인당 국민소득은 230불)
가난한 나라는 공산주의에 대한 면역력이 약하여, 당시 공산주의는 가난한 나라에서 유행병처럼 번져갔고 남한도 그런 환경에 처해 있었습니다. 때문에 박대통령은 더욱 경제발전에 매달렸던 것이죠.
만일 박대통령의 지도력이 없었다면 남한 사회는 겉잡을수 없이 혼란을 거듭하다가 월남처럼 공산화의 길로 갔을 것입니다. 당시의 이런 상황을 이해하는 사람이 드물어요. 그래서 그들은 '경제발전만 하면 뭐하냐?'라고 말하며 헛된 소리를 하는 것이죠.
아래에서는 경제의 측면보다는 국방의 측면을 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박대통령의 70년대 정치가 어떻게.. 절체절명의 국가안보 위기에 처한 당시의 한국을 구했는지 알아보고자 합니다.
박대통령 당시..가난한 나라의 '성공한 지도자들은 모두 장기 집권'
손학규는 싱가폴 리콴유(이광요) 수상을 존경한다고 말했죠. 리콴유는 30년 집권을 했습니다. 싱가폴 역사의 특성으로 인하여 리콴유는 처음에는 공산당과 연합해서 정권을 잡았지만 정권을 잡은 후에는 공산당을 몰아내는데 앞장섰죠. 이렇게 당시 아시아는 공산당이 유행했습니다.
박대통령 시절에 가난한 아시아 국가들은 대부분 장기집권을 했습니다. 박대통령은 18년 집권을 했고, 자유중국 장개석은 25년 집권을 했고, 인도네시아 수하르토는 32년 집권을 했습니다.
또한 대만은 1950년부터 1987년까지 계엄령이 무려 38년간 지속된 나라입니다. 공산당을 막기 위해 그렇게 한 것이죠. 공산당은 칼을 갖고 덤비는데 붓을 갖고 공산당을 막을수는 없었기 때문이죠. 공산권이 붕괴되는 1987년까지 38년간 계엄령 상태를 유지했던 나라가 대만(자유중국)입니다.
당시 가난한 아시아 국가들 중에서 경제발전에 성공한 나라는 한국,대만,싱가폴입니다. 청렴하고 유능한 지도자가 장기집권을 하며 강한 반공정책을 쓴 나라는 공산화되지 않고 경제발전에 성공했던 것입니다. 왜 그럴까?
1975년 불가리아 공산당 의장과 회담한 김일성의 비밀 외교문서를 보면 당시 김일성은 한반도 문제를 언급할 때마다 '남한의 민주화'를 수시로 언급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1975년 김일성은 왜 그토록 강하게 '남한의 민주화'를 주장한 것일까?
자유체제 국가는 체제의 속성상 국민들을 통제하기 힘들고 그래서 공산당간첩과 암살범이 활동하기 좋은 것입니다. 자유체제 국가는 민주화될수록 더욱 그런 경향이 나타납니다. 즉 김일성은 그것을 노린 것이지요. 남한이 월남처럼 되기를 바란 것이지요. 그 다음 수순은 공산화입니다.
이런 공산당의 전략을 알아차리고 강한 반공헌법 체제로 공산당을 막은 사람이 장개석 대통령과 박정희 대통령 등..공산당을 막아낸 영웅들입니다. 그분들은 당시에는 비록 일부 반대파의 비판을 받을지라도 후세 역사의 판단에 맡기며 황소처럼 반공애국의 길을 걸어갔던 것입니다.
유물론을 믿은 공산당의 학살 역사
1917년부터 시작하여 1991년까지 74년동안 지구의 절반을 차지하며 위세를 떨쳤던 공산당. 그러나 1991년 공산주의 종주국 소련은 공산주의 포기 선언을 합니다. 공산주의 종주국 소련이 '세계 공산화' 목표를 버린 것이지요.
공산권에서 1985년부터 개혁파 즉 공산당(극좌파)의 잘못을 인정하고 반성하는 등소평,고르바초프 등이 등장하여 개혁을 하면서 공산권 붕괴조짐이 나타나더니 급기야 공산주의를 포기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이전 공산당들은 공산주의가 옳다고 철석같이 믿고 무수한 인명을 학살했습니다. 수백만명 내지 수천만명을 무차별 학살하였습니다. 스탈린, 모택동, 김일성 등이 그들입니다.
중국의 모택동은 1976년까지 30년 집권을 했는데, 그가 집권하던 시절 중국에서는 1천만명이 학살되었고 4천만명이 굶어죽었습니다. '공산주의'의 모순 때문입니다. 스탈린 또한 2천만명을 학살하였습니다.
그 한 예를 뉴스에서 보시죠. "지난 70년대 캄보디아 공산화 이후 이념과 계급의 이름으로 자기 국민 170만명을 학살한 킬링필드 전범들이 30여년만에 법정에 섰습니다. sbs뉴스 최종편집 : 2011-06-28 "
중국,소련 공산당의 학살
출처..네이버 지식백과
20세기의 전사자는 19세기까지의 누적 전사자보다 많다. 그리고 정치적인 경쟁으로 국내 사회에서 정부가 학살을 실행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20세기만 보아도 소련은 특히 스탈린 시대에 '몇천만명'이라는 학살을 감행하였다.
중국에서는 1950년대와 1960년대에 대량학살을 실행하여 합치면 역시 '몇천만명'이라는 학살의 기록을 남기고 있다. 1970년대 후반 캄보디아의 크메르 루즈 정부는 인구가 수백만 명일 때에 100만 명 이상을 학살하였다.
공산당에 대항하는 '강한 반공정권'의 등장과 당시 국민들의 환영(지지,welcome)
이러한 극악한 공산당과 맞서 싸우던 시절, 가난한 아시아 자유체제 국가의 국민들은 스스로 살기 위해 반공정권을 반겼고 그에 더하여 지도자가 똑똑하면 장기집권을 국민들이 용인했던 것입니다. 1975년 유신헌법 재신임 투표 75% 찬성 (당시 투표율 80% )
5~60년대에 우리보다 훨씬 잘살았고 우리가 선진국으로 우러러보았던 필리핀...당시 필리핀은 서구적 민주선거로 대통령을 4번이나 교체 선출하여 민주주의 선진국으로 칭송을 받았었지요. 그런 필리핀이 지금 어떻게 되었습니까? 경제발전을 했습니까?
또 한 예를 들어보죠. 냉전기 시절 월남, 태국 등에서는 군사정변이 많이 발생했죠. 태국에서는 17번의 군사정변이 발생했습니다. 왜 그랬는지 태국의 역사를 살펴봅시다.
1973년 12월 국왕은 학생·시민의 반정부 시위로 사임한 '타놈'의 뒤를 이어 '산야'를 총리로 임명하였다. 산야 정권은 새로운 헌법을 제정하고 총선거를 실시하는 한편 언론검열의 철폐, 농지개혁법의 제정 등 의욕적인 정책을 실시하였으나 좌우파(左右派)의 대립, 빈발하는 파업 등으로 국민적 통합을 이루지 못한 채 1975년 2월 반정부 폭동으로 물러났다.
그 후 '쿠크리트'와 '세니'의 민간 내각이 성립되었으나 석유파동 후의 경제정세 악화, 인도차이나의 공산화에 따른 위기의식 고조 등으로 정치정세의 불안이 계속되었다. 1976년 10월에는 군부가 '타놈'의 귀국을 반대하는 학생시위를 제압한 데 이어, 민간정부를 뒤엎고 '타닌'을 총리로 하는 새 내각을 발족시켰다. [출처] 두산백과
이렇게 당시 가난한 아시아 나라들은 어느 나라 할 것 없이 서구적(西歐的) 민주주의를 실시할 환경이 아니었습니다. 남북으로 분단된 한국은 더했죠. 친공(용공)과 반공 즉 좌우 대립, 공산당간첩들의 개입과 책동, 가난, 민주정치 경험 부족 등으로 당시 가난한 아시아 국가들은 끊임없는 사회불안에 시달렸던 것입니다.
70년대 유신헌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북한 공산당의 대남전략 변화를 이해해야 합니다. 북한의 대남전략이 시대적으로 어떻게 변화하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50년대 북한의 대남전략
6.25전쟁으로 인한 잿더미를 복구하기 위해 북한의 대남 책동은 다소 소강상태를 보임. 다만 남한 내의 자생적 공산주의자들과 일부 남파 간첩들이 활동함.
*60년대 북한의 대남전략(61. 6 - 70. 12 )
폭력혁명 추진기
4대 군사노선(62. 12) 및 3대 혁명역량 강화노선(64. 2) 등 폭력혁명 노선을 채택하고.. 청와대 기습사건(68. 1)..통혁당 간첩사건(68.6)..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68. 10).. 현충문 폭파사건(70. 6) 등의 무력도발을 감행.
참고: 북한의 4대 군사노선이란?..① 전인민의 무장화 ② 전국토의 요새화 ③ 전군(全軍)의 간부화 ④ 장비의 현대화
이렇게 북한은 6.25전쟁으로 인한 전후 복구가 마무리되자 60년대 후반부터 특수부대 출신 무장공비들을 대규모로 남파하여 남한 사회를 혼란시키기 시작합니다. 당시 북한은 남한보다 잘살았고 또한 공산주의 국가인 중국(中共), 소련(러시아연합) 등을 등에 업고 있어서 기세가 등등했습니다.
70년대 북한의 대남전략(71. 1 - 83.10)
폭력혁명 및 2차 남침전쟁 추진기
베트남 공산당의 땅굴 전술을 비밀리에 도입한 김일성은 1971년부터 3개의 남침땅굴을 은밀히 굴착하며 남침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는데, 드디어 박대통령 저격(74년8월), 중국 방문(75년4월) 등으로 남침 전쟁 추진을 본격화하였던 것입니다.
1975년 김일성... 남침전쟁 결심
월남이 공산화되는 등 베트남, 캄보디아 전쟁이 절정에 달했던 1975년 봄, 김일성은 남침전쟁을 결심하고 중국을 방문하여 중국의 지원을 요청했음이 최근(2012년) 드러남. 연합뉴스 2012-05-16 보도.
70년대 북한은 남북회담(72년 7.4공동성명)을 하는 등 겉으로는 위장평화 공세를 펼치며 한편으로 남침땅굴 굴착...제1땅굴(74년), 제2땅굴(75년), 제3땅굴(78년)...박정희대통령 저격(74. 8)...김일성의 중국 방문(75.4) 등으로 북한은 한반도 적화야욕에 광분했던 것입니다. (2차 인혁당 사건도 1974년 발생)
이렇게 70년대 북한은 3개의 남침땅굴을 굴착했는데 비슷한 시기에 박대통령을 저격하여 기습 남침을 노리고 있었습니다. 북한 공산당의 이런 비밀스런 남침 전략을 누가 알수 있겠는가?
70년대 한반도 정세에 대한 당시 정치인들의 견해 차이
60년대 후반에 들어 무장공비 침투가 본격화되자 박대통령은 1968년 향토예비군을 창설하였습니다.북한의 대남전략 변화를 감지한 박대통령은 즉시 국가안보에 필요한 조치를 강구한 것입니다.
60년대 중반부터 월남전에 참전하여 고전하고 있던 미국은 1969년 닉슨독트린을 발표하여 '아시아인의 평화는 아시아 스스로 지키라'는 메시지를 던집니다. 닉슨독트린은 가난한 우리에게 청천벽력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또한 미국은 1971년 주한미군 7사단 철수를 강행하여 박대통령을 화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1971년 신민당 김대중 후보는 향토예비군 폐지를 주장했습니다. 북한의 남침위협을 잘 아는 군사학 전문가인 박대통령에게 이것은 충격이었죠. 박대통령은 나라의 안보가 심히 걱정되었던 것입니다.
박대통령은 김정렴 비서실장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대통령 선거유세에 수십만이 몰립니다. 북한간첩이 몰래 야당 후보를 테러하고 정권이 했다고 유언비어를 퍼뜨리면 나라는 어찌 될까요. 내란이 일어나지는 않을까요?"
군사학 전문가인 박대통령의 입장과 민간정치인 김대중의 입장은 이렇게 달랐던 것입니다. 한반도 정세를 보는 시각이 달랐기 때문에 두 사람은 의견의 불일치가 생겼던 것이지요.
70년대 남한의 지도자로 적합한 사람은 누구였을까?
박대통령의 장기집권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생각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즉 70년대에 박대통령 외에 누가 집권을 했어도 북한 공산당을 막을수 있었다는 생각 말입니다. 과연 그럴까?
군대도 안간 양김씨가 집권했다면 당시에 북한 공산당을 막을수 있었을까? 김종필씨가 집권했다면 공산당을 막을수 있었을까? 김종필은 중령 출신이라 그래도 좀 낫지만, 박대통령에 비하면 군사학 분야에서 한참 뒤떨어집니다.
박대통령은 한국 해방이후 지금까지 군사학 응용 분야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특출한 인물이었습니다. 무려 3곳의 육군사관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고 여러 전쟁을 두루 경험하였으며 사단장 지위에 오른 그 분을 따라갈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것을 잘 모릅니다.
70년대에 박대통령이 어떻게 북한 공산당을 막아냈는지 그것을 사람들이 잘 모른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1991년 공산권이 망하고 그 이후부터 소위 민주팔이 세력이 집권을 하면서 박대통령의 장점과 공로를 감추었기 때문입니다. 그 이후 무려 20년동안 그들은 박대통령을 음해 폄훼하였던 것입니다.
1972년에 유신헌법을 만들지 않고, 당시 여당인 공화당이 다른 대선후보를 선출하여 밀었다면 1975년4월에 대통령 직선제 헌법으로 8대 대통령 선거를 했겠지요. 그런데 1975년4월은 월남이 공산화된 시기라는 점입니다. 묘한 기분이 들지 않나요? 남한과 쌍둥이처럼 닮은 나라였던 월남의 공산화.
그런데, 1975년은 북한이 남침을 노린 시기였다는 것입니다. 남한이 북한의 남침땅굴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1975년에 분명 전쟁이 발생했을 것입니다. 북한은 1975년까지 모든 남침땅굴을 완성하도록 지시한 상태였고, 1975년4월 김일성은 남침을 결심하고 중국을 방문했던 것입니다.
'서구적(西歐的) 민주정치'는 어떤 상황에서도 항상 옳을까?
한번 생각해 보세요. 현재 남한의 1인당 국민소득은 2만불에 이르렀고 또한 공산권이 망하여 안보위협이 크게 감소한 상황인데도 지금 우리가 대선을 한번 치룰려면 나라가 흔들흔들 합니다. 총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정도로 '서구적 자유민주 정치'는 국력을 낭비하는 측면이 많고 나라를 안보 위기에 빠트릴 가능성이 높은 정치라는 것입니다. 지난 4.11 총선을 보세요. 정부 여당을 향한 야당의 온갖 악선전 즉 거짓 선전선동이 범람했었죠.
공산권이 망하여 안보위협이 크게 감소하였고 또한 남한의 경제 발전으로 우리 국력이 이렇게 튼튼한데도 우리가 총선,대선 한번 치룰려면 나라가 휘청휘청 합니다. 그 정도로 자유민주 정치는 안보 위기를 불러오기 쉽고 국력을 낭비하는 측면이 많다는 것입니다.
자유체제 국가에서는..선거 기간이 아닌 경우에도 반정부 세력들은 집회 결사의 자유를 이용하여 나라를 무정부 상태로 만들기도 합니다. 집회가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한 것이라면 문제 없지만, 그게 아니고 단지 국정운영을 방해하고 반공정책을 방해하고 대한민국을 엎어버리기 위한 것이라면 문제가 심각합니다.
그리고 서구적 자유민주 정치가 실시되면 용공좌파 성향의 정치인들이 대거 정계로 진출할수 있기 때문에 사회는 더욱 혼란에 봉착하게 되는 것입니다. 좌파정권 아래에서는 북한을 탈출하여 남한에 들어온 귀순자들이 오히려 냉대를 당하는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지난 특정 정권 시절에 우리가 그런 상황을 이미 목격하지 않았습니까? 남한으로 귀순한 황장엽씨도 냉대를 받았고 칼기 사건의 김현희씨도 냉대 탄압을 받았었지요. 친북좌파 정권 아래에서는 남한으로 귀순한 귀순자들이 눈에 가시 취급을 받는 것이지요.
그런데 만약 우리가 1975년 우리의 1인당 국민소득이 겨우 '5백달러'이던 시절에 그리고 공산권이 지구의 절반을 차지하던 시절에 우리가 서구적 민주주의를 했다면 나라가 어떻게 되었을까? 공산당을 막을수 있었을까? 경제발전을 할수 있었을까?
1975년은 북한이 노린 남침 시기
1974년11월에는 북한의 제1 남침땅굴이 발견되었고, 1975년3월에는 제2 남침땅굴이 발견되었습니다. 1974년4월 반정부 사건인 민청학련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육영수 여사는 1974년8월 친북간첩의 권총 저격을 받고 돌아가셨습니다. 1975년4월에는 월남이 공산화되었죠.
김일성은 남침전쟁을 결심하고 1975년4월 중국을 방문하여 중국의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이렇게 1974년~1975년은 북한의 대남 책동이 최고조에 이르렀던 시기이고 한반도에 전쟁의 기운이 무르익던 시절이었습니다.
이런 시기에 만일 우리가 1975년4월 직선제로 대통령 선거를 했다면 우리 사회가 온전했을까? 1974년부터 박대통령은 퇴임을 앞둔 레임덕 신세였을 것이고, 공화당은 박대통령을 이을 대권후보 선출이다 뭐다 하여 내분이 생겼을 것이고, 이렇게 사회가 어수선한 상태에서 남침땅굴을 발견할수 있을까?
월남은 남침땅굴이 대통령궁 근처에까지 들어와 있었는데도 끝내 그것을 알아내지 못했죠. 망한 후에 그것을 알았습니다. 월남 군인들이 남침땅굴을 발견하지 못한 것은 간첩들의 책동으로 월남 사회가 어수선하여 군인들도 얼이 빠진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2007년 한나라당을 보세요. 당내 경선 때문에 내분이 생길뻔 했지 않습니까? 서구적 민주주의는 이렇게 분란이 많이 발생하는 제도라는 것입니다. 즉 서구적 민주주의를 무리없이 실시하려면 나라의 경제적 수준이 높아야 하고 국력이 강해야 하고 나라가 처한 안보적 위험이 낮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박대통령은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 대통령 직선제 선거로 당선되어 1975년까지 임기가 보장된 상태였지만, 나머지 임기를 버리고 1972년에 다시 유신헌법으로 당선되어 직무를 시작했던 것입니다. 유신헌법 당시 대통령 임기는 6년.
그리하여 박대통령은 1972년부터 1978년까지 선거 없이 안정적으로 국정을 수행할수 있었던 것입니다. 북한이 남침을 노린 1975년 그 위험했던 시기에 우리는 대통령 선거(선거전쟁) 없이 보내면서 대통령과 여당은 국정을 안정적으로 수행할수 있었고 또한 반공역량을 강화할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나라를 지킨 것입니다.
박대통령은 선견지명 능력이 뛰어났던 인물이었죠. 그래서 박대통령은 다가오는 위기를 예감하고 1972년 유신헌법을 제정하였고 그 결과 남한은 1974년11월 북한의 남침 땅굴을 발견하여 1975년 공산화 위기를 넘길수 있었던 것입니다.
북한의 귀신같은 남침땅굴 작전
땅굴작전은 이른바 김일성의 '9·25교시'에 의하여 1971년 9월 25일..대남공작 총책이던 김중린(金仲麟)과 북한군 총참모장 오진우(吳振宇) 등에게 "속전속결 전법을 도입하여 기습전을 감행할 수 있게 하라."는 명령이 떨어진 데서 개시되었다. (위 사실은 백과사전에 나오는 사실임.)
북한의 각 군단별로 땅굴작전이 수행되었고, 이러한 작전은 1972년 이후 남북대화가 진행되는 동안에도 암암리에 추진되었습니다. (위 사실은 백과사전에 나오는 사실임.)
북한은 1971년부터 은밀하게 남침땅굴을 파고 있었지만 1974년10월까지 남한은 북한의 남침땅굴에 대해 모르고 있었습니다. 한국군은 1974년11월에 가까스로 남침땅굴(제1땅굴)을 발견하게 됩니다.
만일 70년대 정권이 탈북자(귀순자)를 냉대하는 용공좌파 정권이었다면?
1974년 당시 상황은 이렇습니다. 남파간첩으로 침투하기도 했던 북한 노동당 요원 김부성은 남침땅굴 작업에 참여하기도 했는데, 1974년9월 김부성은 남한으로 귀순하여 남침땅굴에 관한 정보를 우리 측에 제공합니다. 당시 김부성은 이렇게 말했죠. "남한은 경제발전으로 북한보다 더 잘살고 인간적인 사회라는 것을 깨닫고 귀순했다".
박대통령은 즉시 군관민 합동조사팀을 구성하도록 하여 남침땅굴을 발견하도록 지시합니다. 박대통령은 군사학 전술학의 전문가 답게 사태의 위급성을 느끼고 즉시 긴급 조치를 취하였던 것입니다.그리하여 1974년11월 제1남침땅굴을 발견합니다.
이런 것을 보면 역시 당시 박대통령의 지도력이 대단했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만일 당시 남한이 월남처럼 '용공좌파 친북좌파'에게 침투당한 혼란한 사회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하기만 해도 아찔합니다.
당시 월남은...언론계,학계,종교계,노동계,야당,시민단체,정부기관,군부,공안기관에까지 좌익간첩이 침투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방해로 인하여 반공정책이 겉돌았던 것입니다. 그런 상태에서는 귀순자가 제공하는 남침땅굴에 관한 정보는 묵살되는 것이죠.
그런데 박대통령 집권 시기의 남한은 월남과 달랐습니다. 국군과 국민들은 총력안보 멸공 정신으로 똘똘 뭉쳐 있었고, 박대통령은 군부,정부조직,공안기관 등을 확실하게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좌익들은 정부조직, 군부, 공안기관에 침투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런 나라였기에 남한은 공산당을 막을수 있었던 것입니다. 당시 박정희 정부는 공무원,장교 등에 대해 철저한 신원조회 실시.
1974년 남한이 남침땅굴을 빨리 발견한 이유
북한 노동당 요원이며 땅굴 기술자인 김부성이 남한으로 귀순하여 남침땅굴에 관한 정보를 우리에게 제공한 것이 1974년9월입니다. 그런데 북한은 1975년을 남침 시기로 잡고 있었습니다. 당시 남한은 남침땅굴을 빨리 발견해야 하는 절박한 상황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러나..1974년10월 그 당시에 남한에 있는 그 누구도 북한의 남침목표시기(1975년)를 모르고 있었습니다. 다만 박대통령은 남침땅굴 정보를 듣고 직감적으로 사태의 심각성을 느낀 것이지요.박대통령은 1974년 긴급조치를 발표하여 북한의 남침에 대비하였습니다.
박대통령의 민첩한 조치 덕분으로 남한은 1974년11월15일 제1호 남침땅굴을 가까스로 발견합니다. 기적같은 일입니다. 군기와 기강이 나태한 월남의 군대 같았으면 어림도 없는 일입니다. 당시 남한의 군인들은 멸공정신으로 잘 무장되어 있었고 공산당의 침투전술에 관해 잘 교육받고 있었기 때문에 남침땅굴을 빨리 발견할수 있었던 것입니다.
1974년11월 제1호 남침땅굴 발견 상황은 이렇습니다. 전방의 병사들이 군사분계선 남측지역을 순찰하다가 지표의 공기 구멍에서 증기가 새어나오는 것을 우연히 발견하고 "온천이 나오나 보다"고 농담을 하고 그냥 지나치려는 것을..당시 선임하사가 뭔가 수상하다고 여겨 굴토작업을 시작합니다. 이렇게 발견한 것이 제1땅굴입니다.
정말 아슬아슬한 순간이었습니다. 이런 말이 있죠. '순간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한다'.당시 남침땅굴 발견 순간이 그런 순간이었다는 것입니다. 군기와 기강이 나태한 군대 같았으면 남침땅굴을 발견하는 것은 어림도 없는 일입니다.
1975년3월 제2호 땅굴을 발견한 것도 정신무장이 잘된 침착한 어느 병사의 행동 때문인데, 즉 그는 "지하에서 들릴듯 말듯한 폭약 소리가 들렸다"고 보고했던 것입니다. 경계 근무를 하는 병사의 철통안보 정신이 밑바탕이 되어 남침땅굴을 빨리 발견할수 있었던 것입니다.
70년대 우리나라는 박대통령의 지도력 덕분에 총력안보 정신으로 똘똘 뭉쳐 있었고, 군관민은 일체가 되어 일사분란하게 움직였으며, 군인들은 멸공 정신으로 잘 무장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70년대에 공산당을 막아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난세(亂世)의 영웅이 보여주는 지도력인 것입니다.
60년대 후반부터 북한의 남침책동이 본격화되자 박대통령은 유신헌법을 만들어 일사분란한 국정운영 체제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대만이 38년동안 계엄령 상태를 유지한 것이 이제 이해 되시겠지요? 대만은 공산권이 붕괴되는 1987년까지 38년동안 계엄령 상태를 유지했습니다.
군기와 기강이 세계 최강이라 평가받던 남한의 70년대 유신 국군도 가까스로 남침땅굴을 발견했는데...만일 당시 남한이 평범한 국가였다면 그게(남침땅굴 발견) 가능했을까? 70년대 당시 베트남 공산당 공비들도 미군은 우습게 보았지만 한국군이 나타나면 벌벌 떨었죠.
월남은 공산간첩을 잡아내지 못했고 남침땅굴을 발견하지 못해서 결국 망했는데...만일 당시 남한의 정치 사회가 월남과 같았다면 공산간첩의 책동을 막아낼수 있었을까? 그리고 한국군의 군기와 기강이 나태하였다면 북한의 남침땅굴을 찾아낼수 있었을까?
남침땅굴의 가공할 위력
북한은 모든 남침땅굴에 대해 1975년10월까지 완공을 하도록 명령한 상태였습니다. 즉 북한은 1975년을 남침의 최적 시기로 잡고 행동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은 다음 내용에도 나타나는데, 즉 남침을 결심한 김일성은 1975년4월 중국을 방문하여 중국에 지원을 요청했기 때문입니다. 여러 정황으로 보아 김일성은 1975년을 남침의 최적 시기로 잡았던 것이 분명합니다.
남침땅굴은 시간당 3만명의 무장 병력이 이동할수 있는 지하 통로입니다. 1974년11월에 이런 남침 땅굴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나라가 어떻게 되었겠는가? 후방에 갑자기 나타난 북한 인민군 군대로 인해 서울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을 것입니다.
대통령이 현명한 지도력을 발휘하지 못하여 월남의 국내 정치는 혼란으로 치달았고, 월남 사회는 공산간첩들의 천국이 되었으며...월남 대통령 선거에서 2위를 했던 야당 당수 '쭝딘주'는 공산간첩이었음이 공산화후 드러남.
이념적으로 썩은 '말기 월남 사회'
월남에 침투한 공산간첩들은 자생적 공산주의자들 및 언론계 좌익들과 협력하여 월남의 민주화를 주장하며 끊임없이 반정부운동을 했고, 그런 활동이 월남 국민들의 반공정신을 약화시켰던 것입니다. 1975년 당시 월남의 마지막 대통령 티우 대통령은 8년동안 집권하고 있던 상태였슴.
미국,한국 등 우방국들에게 월남은 도저히 가망이 없는 진흙 수렁으로 인식되어...미군, 한국군이 월남에서 철수하였던 것입니다. 미군이 철수하기 전에 공산당과 체결한 평화조약은 종이조각에 불과했죠. 이후 월남은 망했죠. (호주, 뉴질랜드, 태국 등도 월남전에 참전.)
공산당이 망하는 1991년 이전에 즉 냉전기 시절에 남한에 만일 다음과 같은 정권들이 등장했다면..즉 제2공화국 장면(張勉) 정권, 양김 정권, 노무현 정권 등과 같은 정권이 계속 집권했다면, 남한은 어떻게 되었을까? 분명 월남처럼 공산화되었을 것입니다.
월남은 공산화되어 자유시민 3백만명이 학살당했죠. 이는 당시 월남 인구의 30%인데, 70년대 당시 남한 인구의 기준으로 보면 8백만이 학살당한 것입니다. 당시 월남의 민주투사 '짠후탄'도 월남 공산화후 공산당에 의해 처형당했죠.
난세(亂世)의 영웅이 국민과 함께 만든 유신헌법
70년대 한국은 기적처럼 공산당을 막아냈습니다 .이것이 바로 난세(亂世)의 영웅이 보여주는 지도력인 것입니다. 이런 성과의 밑바탕이 된 것은 일사분란한 국정운영과 '강한 반공정책'을 가능케한 유신헌법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1991년 공산권이 붕괴되어 지금은 공산당이 대부분 다 망했지만 70년대 당시에는 지구촌 절반이 공산권 국가였고 또한 남한은 1970년 1인당 국민소득이 230불에 불과했던 찢어지게 가난한 나라였습니다. 그렇게 국력이 약한 상태에서 평범한 정치체제로 공산당을 막아낼수 있을까?
가난한 나라에 공산주의가 유행병처럼 번지는 것이 당시의 세태였습니다. 가난한 나라는 공산주의에 대한 면역성이 약하기 때문에 특히 조심해야 했던 것입니다. '평등하게 다 잘사는 제도가 공산주의'라고 선전하였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 선전에 넘어갔습니다.
대만(자유중국)은 국민대회헌법 즉 대통령 간선제 헌법인 국민대회헌법(유신헌법)으로 무려 45년간 통치한 나라입니다. 또한 대만은 공산권이 붕괴되기 시작하는 1987년까지 38년간 계엄령 상태를 유지했습니다.
70년대 남한은 '대만'보다는 좀 느슨한(헐렁한) 안보정책 즉 유신헌법으로 공산당을 막고 있었습니다. 남한의 국가 안보가 그토록 위험한 상황이었는데도 박대통령은 가능한한 민주정치의 골격을 유지코자 했던 것입니다.
70년대 남한은 북한 공산당의 남침야욕과 남침땅굴, 동남아 3국의 공산화, 미국의 갈팡질팡 국방 정책으로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해 있었으며, 이러한 상태에서 찢어지게 가난하였던 남한은..이제 남한 혼자의 힘으로라도 살아남아야 했으므로 불가피하게 유신헌법을 택하였던 것입니다.
1950년 김일성의 6.25 남침으로 2백만명이 죽는 비극을 겪었던 한국 국민들은 이제 다시는 공산당의 남침을 허용하면 안된다는 생각에 국가안보의 영웅 박대통령의 정책에 적극 협조했던 것입니다. 1975년 유신헌법 재신임 국민투표에서 75% 찬성. (당시 투표율은 80%)
결론으로 붙이는 글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Toynbee)는 '도전과 응전'으로 역사를 설명했습니다. 70년대 당시 한국이 공산당의 도전을 막아낸 응전의 성공으로 대한민국은 인명의 희생을 최소로 줄이면서 발전을 거듭할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영웅도 천명이 다하면 인생을 마치는 것이 법칙이니...로마의 영웅 '시이저'는 양아들(부루투스) 일당의 칼에 찔려 죽었고, 마하트마 간디, 링컨 대통령 등도 총맞아 죽었던 것입니다.
그런 형태의 죽음은 개인의 운명에 관한 것이지 유신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란 것입니다. 대만의 장개석은 25년동안 집권했는데, 집권기간 내내 계엄령 상태를 유지하며 국민대회헌법 즉 유신헌법으로 집권했는데 왜 88세에 편안히 죽었습니까?
장개석보다 수만배 더 심한 독재를 하며 수백만명을 학살한 김일성은 왜 피살당하는 죽음을 피하였던 것일까요? 그 이유는 북한체제는 공산주의 특성 즉 감시통제 속박체제이기 때문에 그렇고 또 김일성이 반대파 6백만명을 학살하여 반대파가 모두 사라졌기 때문에 그렇기도 합니다.
하지만, 김일성처럼 그렇게 살면 안됩니다. 박대통령처럼 자신이 죽더라도 국민을 살리고 죽어야 영혼이 보답을 받습니다. 정치를 잘못한 사람들은 죽기 전에 반성해야 합니다.
공산당을 막아내 자유체제를 지킨 지도자가 박대통령입니다. 고리대금,도박,사치,게으름, 허례허식을 몰아낸 지도자가 박대통령입니다. 우리민족의 한(恨)..춘궁기 보릿고개..5천년 가난을 몰아낸 지도자가 박정희 대통령입니다.
10.26 당시 군의관이었던 정규형 대위는 다음과 같이 증언했습니다. "당시 대통령이 차고 있던 시계는 평범한 제품이었고, 넥타이핀의 멕기가 벗겨져 있었으며, 혁대도 해져있어 대통령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어린 시절 굶주림을 경험했던 박대통령은 근면 검소 정신이 몸에 밴 대통령이었습니다. 사단장 시절에도 박대통령은 너무 청렴하여 가난했습니다. 10.26당시 시해 현장에서 발견된 시바스리갈 양주는 초청받은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박대통령은 막걸리를 좋아했습니다.
박대통령은 조국(祖國) 대한민국과 국민들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운명적으로 '조국을 위해 목숨을 버리고 하늘에 산화한 넋'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제 물질적으로 풍요해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정신문명의 발달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박대통령 시절에는 자살자가 거의 없었는데 지금은 자살이 너무 많습니다. 인생의 목적을 모르고 방황하는 영혼들이 너무 많습니다.
우리가 한민족(韓民族)의 마지막 목표 즉 밝고 맑은 무궁화처럼..밝고 맑은 영혼을 소유한 사람들의 사회 즉 고도의 정신문명을 꽃피우지 못한다면, 한민족(韓民族)의 웅대한 대(大) 역사(歷史)의 서사시(敍事詩)는 미완성으로 끝나게 될 것입니다.
보충 자료
대만의 국민대회헌법(유신헌법)과 유신통치 45년
반공 자유체제 국가였던 자유중국(대만)은 국민대회헌법 즉 대통령 간선제 헌법인 유신헌법으로 45년간 통치된 나라입니다. 그 기간은 1950년부터 1994년까지 입니다.
또한 대만은 1950년부터 1987년까지 계엄령이 무려 38년간 지속된 나라입니다. 공산당을 막기 위해 그렇게 한 것이죠. 공산당은 칼을 갖고 덤비는데 붓을 갖고 공산당을 막을수는 없었기 때문이죠. 1991년 공산권이 붕괴된후 대만은 헌법을 서구적 민주정치 체제로 바꾸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80년대말과 90년대초 상황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1985~1987년은 중공(중국), 쏘련(러시아 연합) 등 공산권 국가들이 붕괴되기 시작하는 시기라는 점입니다.공산당의 잘못을 인정하는 개혁파 즉 중국의 등소평, 소련의 고르바초프 등장으로 공산권은 변하기 시작하죠.
우리나라의 정치가 서구적 민주주의에 좀더 접근하는 시기가 바로 이 시점이라는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1987년 한국은 1인당 국민소득이 3천불에 달하였는데, 그런 경제력과 공산당의 위협 감소를 바탕으로 한국은 1987년 헌법을 대통령 직선제로 바꾸고 노태우 정부를 출범시킵니다.
소석 이철승 선생의 유신 평가.
70년대에 야당 당수를 하며 민주정치가로 이름을 날렸던 이철승 선생. 반공 항일 우파 성향이 강한 이철승 선생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죠.
"내가 유신헌법에 대해 심하게 반대하지 않은 것은 당시 월남의 패망(공산화)을 보면서 남의 일로 여길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일부 법조인들의 옹졸한 사고방식
70년대 유신헌법에 위헌요소가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나는 그 사람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공산당을 막아내지 못하면 나라가 망하여 '자유민주체제 헌법' 자체가 없어지는데...공산당 치하에서 '자유민주 헌법'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공산당 치하가 되면 '자유민주 헌법' 조항은 휴지통 속으로 들어가는데...
70년대 남한이 공산화되었다면 당시의 민주투사들과 법조인들은 대부분 다 처형되었거나 아오지 탄광으로 끌려갔을 것입니다. (월남처럼 말이죠) 그런 사람들은 박대통령에게 감사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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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종북빨갱이가 득세하고 대한민국을 부정하는 세력이 창궐한 지금 현상황에서 특단의 정치가 나와야한다
현재 남한은 이념적으로 너무 썩었어요. 언론도 썩었고..전교조는 더 문제고. 언론은 70년대 당시의 안보 상황을 국민들에게 알리지 않죠.
우리나라 역사상 전쟁과 피를 흘리지 않고서 통일이 된 경우는 흔하지 않읍니다!
강한 국력과 강력한 정치력이 있어야 통일과정에서 피해를 최소화 할수 있다고 봅니다.
통일되기 전까지는 좌파,빨갱이들의 움직임에 관심을 두어야 우리의 피해를 최소화 할수 있다고 봅니다.
왜 이런글들이 박사모카페에만 있어야 하나요? 아고라나 모든이들이 볼수있는 방법은 없을까요?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언제든지 퍼 가셔도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