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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성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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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徙家忘妻
(집을 옮기며 아내를 잊어버린다. 精神이 나간 사람처럼 所重한 것을 잊어버린다는 말이다. 卽 매우 重要한 일을 놓쳐버리는 것을 比喩)
● 孔子家語 賢君篇 에.
中國 春秋時代 魯나라의 王 哀公 (在位 BC 494∼BC 468)은
'移徙를 할 境遇 아내를 잊어버리는 (徙家忘妻)' 사람도 있다고 한 孔子 (BC 552∼BC 479)의 말처럼 그만큼 얼빠진 사람이 있는지 孔子에게 물어보았다.
그래서 孔子는 "夏王朝의 마지막 王인 桀王과 殷나라 最後의 王인 紂王 (BC 1154∼BC 1111)은 暴惡한 政治를 한 임금의 典型으로 淫蕩한 짓을 함부로 하고 不道德하였으며 百姓들의 生活과 國家의 重大한 일을 돌보지 않고 惡毒한 行爲를 일삼았다.
百姓들을 抑壓하였으며 賢臣들의 諫言을 듣지 않고 그들을 追放하였다.
暴君이었던 桀王과 紂王은 繼續 惡行을 저질러 나라를 亡치고 나라와 百姓, 自己 自身도 잊어버렸다"라고 對答했다.
🍎 死孔明能 走生仲達
(죽은 孔明이 산 仲達을 逃亡하게 했다)
蜀나라에 諸葛孔明이 있다면, 魏나라에는 司馬懿가 있었다.
그들은 軍師로서 뛰어난 智略을 지닌者들이었다.
司馬懿의 字가 仲達이다. 司馬懿도 뛰어났지만, 諸葛孔明에게는 相對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늘 戰爭에서 敗하고 물러나기만 했다. 그렇기에 司馬懿는 諸葛孔明에 對하여 늘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司馬懿 仲達도 天文을 아는 者 이기에, 天氣로서 諸葛孔明이 죽을 걸 알았다.
그래서 孔明이 죽으면 戰爭을 벌일려고 모든 準備를 갖추었다.
天氣로 孔明이 죽었음을 알아낸 仲達이 後退의 길에 서있는 蜀을 攻擊했다.
그런데 仲達의 軍士가 攻擊하는 가운데, 저 멀리 蜀나라 陣營에서 孔明이 四輪車에 앉아 指揮하며 달려나오는 것이 아닌가, 이에 氣怯을 한 司馬懿는 앞뒤도 재보지 않고 自身의 軍士陣營으로 逃走하였다.
魏 나라 軍士들은 仲達을 보면서 그만 鎭靜하라고 하고, 仲達은 自身의 머리가 있는냐고 물어보았다. 蜀 나라는 이를 契機로 安全하게 後退하였고, 몇日 後 仲達은 孔明이 죽었고 自身이 본 것은
孔明이 死前에 計策으로 만든 木人이라는것은 알고 歎息했다.
以後 蜀에서는 "죽은 孔明이 산 仲達을 逃亡치게 했다(死孔明能 走生仲達)는 말이 생겼다.
여기서 由來된 말이 死孔明能 走生仲達이다.
● 三國志 에.
🍎 舍己從人 , 舍己从人
(自己를 버리고 남을 따르다. 自身의 以前 行爲를 버리고 다른 사람의 착한 行實을 따르는 것을 말한다)
禹의 德을 想考하여 이르되
“文明을 四海에 펴시고 帝를 이으시다”. 禹가 舜에게 말하였다.
“임금의 자리에 서는 사람은 그 임금됨을 어렵게 여기지 않으면 안 되며, 臣下된 者는 그 臣下됨을 어렵게 생각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政事는 잘 다스려지고 百姓들은 德을 崇尙하기에 힘쓸 것입니다.”
「그러자 舜임금이 말했다.
“그렇소. 眞實로 그렇게 하면 좋은 말이 숨겨질 리가 없고, 어진 이가 草野에 묻혀 지내지 않게 되어 온 나라가 다 平安하게 될 것이오. 여러 사람에게 議論하여 나를 버리고 남을 좇으며, 依支할 곳 없는 이를 虐待하지 않고 困窮한 이들을 내버려 두지 않는 일들은 오직 임금된 사람만이 할 일이라 할 수 있는 것이오.”
(帝曰, 兪. 允若玆, 嘉言罔攸伏, 野無遺賢, 萬邦咸寧. 稽於衆, 舍己從人, 不虐無告, 不廢困窮, 惟帝時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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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는 《書經 大禹謨》에 나온다. ‘舍己從人’은 孟子의 말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孟子가 말했다. “子路는 사람들이 그에게 잘못이 있다고 일러 주면 기뻐하였고, 禹임금은 옳은 말을 들으면 절을 하였다. 偉大한 舜임금께서는 더 훌륭하셨으니, 남과 더불어 善을 行했다. 自己를 버리고 남을 따르며, 남에게서 取하여 善을 行하기를 즐겼다. 農事짓고 질그릇을 굽고 고기 잡는 일에서부터 帝王이 되기까지 남에게서 取하지 않은 것이 없다. 남에게서 取하여 善을 行하는 것, 이것이 남과 더불어 善을 行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君子에게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善을 行하는 것보다 더 重要한 일은 없다.”
(孟子曰, 子路, 人告之以有過則喜, 禹聞善言則拜. 大舜有大焉, 善與人同. 舍己從人, 樂取於人以爲善. 自耕稼陶漁以至爲帝, 無非取於人者. 取諸人以爲善, 是與人爲善者也. 故君子莫大乎與人爲善.)」
● 孟子 公孫丑上에.
이 成語는 우리나라의 典籍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李滉 先生이 말했다. “能히 自身을 버리고서 남을 좇지 못하는 것은 學者의 큰 病이라. 天下의 義理는 끝이 없으니 어찌 可히 自己만 옳고 다른 사람은 그르다고 하리오. 사람의 質問이 있으면 얕고 가까운 말이라도 반드시 마음에 두고서 조금 있다가 이를 對答하고, 묻는 말에 바로 應對하지 말지니라.
”(先生曰, 不能舍己從人, 學者之大病. 天下之義理無窮, 豈可是己而非人. 人有質問, 則淺近說, 必留意, 少間而答之, 未嘗應聲而對.) ● 退溪集에.
🍎 駟馬難追
(말이란 한 番 뱉으면 駟馬가 따라갈 수 없을 程度로 빠른 것이니, 입操心을 하라는 뜻이다)
【類似語】
● 駟不及舌~네 마리 말이 끄는 수레도 혀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말로 所聞은 빨리 퍼지니 말을 삼가하라는 뜻.
● 言飛千里~발 없는 말이 千 里 간다는 뜻.
● 耳屬于垣~담에도 귀가 달려 있으니 말을 삼가라는 뜻.
● 牆有耳~담墻에 귀가 있다는 말로, 말을 操心하라는 뜻.
● 五燈會 古尊宿語錄에
中國 俗談에 '한 마디의 말이라도 한 番 입을 떠나면 네 匹의 말이 끄는 수레로도 쫓기 어렵다 (一言旣出, 駟馬難追)라는 말이 있다.
'駟馬'는 말 네 匹이 끄는 수레로써 엄청나게 빠른 것을 比喩한다.
'駟馬難追'는 이런 駟馬가 따라갈 수 없을 程度(難追)로 빠른 것이니, '입操心을 하라'는 뜻이다.
駟馬難追는 五燈會元, 古尊宿語錄, 琵琶記, 醒世恒言, 增廣賢文 等에 引用되어 널리 膾炙하는 成語이다.
韓國 俗談에도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고 하여, 말操心, 입操心을 警戒하고 있다. 잘못 쓴 글은 지우면 그만이지만 말이란 한 番 내뱉으면 주어 담을 수 없으니 함부로 말하지 말라는 뜻이다.
明心寶鑑에도 '입과 혀는 禍와 근심을 불러들이는 門이고, 몸을 亡치는 도끼와 같다(口舌者禍患之門 滅身之斧也)' 라느니, '입은 사람을 傷하게 하는 도끼요, 말은 혀를 베는 칼이 될 것이니, 입을 다물고 혀를 감추면, 몸이 便安하고 어디에 있든지 安穩할 것이다.
(口是傷人斧 言是割舌刀 閉口深藏舌 安身處處牢)'라 하여, 亦是 늘 말操心을 해야 한다고 强調하고 있다.
※牢는 여기서는 韻字上 本音인 '로'로 읽어야 하고, 뜻은 '便安하고 조용하다' '安穩하다'
한 便, 鄧析子를 典據로 말하는 이도 있는데
(鄧柝子說:一言而非,駟馬難追;一言而急,駟馬不能及.)
事實은 表現이 조금 다르다. 鄧析子에는 '一聲而非,駟馬勿追。一言而急,駟馬不及.'로 되어 있다.
🍎 四端七情
(四端은 人間의 本性에서 우러나오는 마음씨, 卽 先天的 · 道德的 能力을 말하며, 七情은 人間의 本性이 事物을 接하면서 表現되는 人間의 自然的인 感情을 말한다)
「남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어짊의 실마리라 하고, 부끄러워하는 마음을 義로움의 실마리라 하며, 辭讓하는 마음을 禮의 실마리라 하고, 옳고 그름을 가리는 마음을 智慧의 실마리라 한다.
(惻隱之心, 仁之端也. 羞惡之心, 義之端也. 辭讓之心, 禮之端也. 是非之心, 智之端也.)」
이 말은 《孟子 公孫丑 上》에 나오는데, 여기에서 ‘四端’이 由來했다. ‘七情’은 《禮記》에서 찾아볼 수 있다.
「무엇을 일러 사람의 感情이라고 하는가. 기뻐하고(喜), 怒여워하며(怒), 슬퍼하고(哀), 두려워하며(懼), 사랑하고(愛), 미워하며(惡), 하고자 하는 마음(欲)을 말한다. 이 일곱 가지는 배우지 않아도 저절로 하게 된다.
(何謂人情. 喜怒哀懼愛惡欲, 七者不學而能.)」
● 禮記 禮運에.
四端은 仁 · 義 · 禮 · 智의 德目과 關聯된 倫理的 範疇에 屬하고, 七情은 人間의 感情을 總稱하는 人性論의 範疇에 屬한 것으로, 元來는 서로 다른 脈絡에서 使用되던 말이었다. 그러다가 宋나라 때 性理學이 일어나면서부터, 이 두 槪念은 各各 人間 心性이 發現되는 過程에서 道德的 性格을 띠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을 나타내는 相反되는 意味를 가지는 것으로 認識되어 對照의 槪念으로 쓰이게 되었다. 곧, 性理學에서는 하늘의 理致와 사람의 心性이 一致한다고 하는 天人合一의 命題 아래 宇宙 自然의 生成과 變化를 說明하기 爲한 理論的 바탕으로 理氣論을 發達시켰고, 다시 이를 根據로 하여 人間 心性의 發生 過程과 그 作用을 探究함으로써 人間의 道德的 實踐의 哲學的 根據를 解明하고자 하였는데, 이 過程에서 四端七情의 問題가 自然스럽게 浮刻되었다.
四端七情論은 中國에서는 그다지 比重 있게 다루어지지 않았지만, 朝鮮에서는 四端과 七情의 發生 過程을 二氣論的으로 解明하는 問題가 重要한 關心事로 떠올라 大規模 論爭으로 展開되었다. 이 論爭은 李滉과 奇大升 사이에서 처음 發生하였고, 나중에 李珥와 成渾 사이에서 다시 論議됨으로써 새로운 局面으로 展開되었다. 이 過程에서 主된 爭點이 되었던 것은 四端이 理에 屬하는가 아니면 氣에 屬하는가 하는 問題와, 理가 果然 發動할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두 가지 問題였다. 16世紀 末에 發生하였던 이 論爭은 當代의 著名한 性理學者들에 依해 主導되었을 뿐 아니라, 以後 學界 全體의 問題로 擴大되어 19世紀 末에서 20世紀 初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性理學者가 이 問題를 다루었을 程度로 朝鮮 儒敎의 發展 過程에 큰 影響을 미쳤다.
🍎 四面楚歌
(四面이 敵兵으로 둘러쌓인 境遇나 無援孤立된 境遇)
秦나라(BC 221~BC 206)末葉 政治가 腐敗해 民生苦가 날로 深刻해 지자 뛰어난 人物들이 곳곳에서 出現했다. 有名 人物로는 劉邦, 項羽, 吳廣, 陳勝 等이다.
秦의 滅亡 뒤엔 漢王인 劉邦 (BC247~BC195)과 楚覇王인 項羽 (BC232~BC202)의 勢力만이 가장 컸고 서로 天下 覇權을 노렸기에 끊임없는 楚漢相爭 時代가 열렸다.
進退를 거듭하던 戰爭은 漢高祖 5年에 이르러 劉邦의 勢力이 優位를 占하고 項羽 部隊를 垓下로 몰아 包圍했다.
8年間 70如回 싸움을 치룬 楚覇王 項羽는 威風이 無雙한 젊은 將帥였으나 이때만은 劉邦의 數十萬 大軍에 겹겹이 包圍된 身世였다.
(韓信30萬, 劉邦20萬. 黥布와 劉賈의 7萬, 彭越의 3萬 等 60萬 大軍 : 項羽의 10萬 軍士의 싸움)
劉邦은 敵軍을 얕잡아 强攻策을 쓰는 代身에 張良과 陳平의 計策을 받아들여 心理戰으로 兵士들에게 밤마다 楚나라의 노래를 부르게 했다. 軍糧米마저 끊긴 가운데 項羽의 兵士들의 士氣는 끝없이 墜落해 脫營兵이 增加하고 戰意를 喪失해 갔다. 項羽도 楚나라 땅이 이리도 빨리 占領되다니 하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項王軍壁垓下, 兵少食盡, 漢軍及諸侯兵圍之數量, 夜聞漢軍四面皆楚歌, 項王乃大驚曰, 漢皆已得楚乎, 是何楚人多也)
一世英雄인 그도 戰意가 꺾기어 술로 괴로움을 달랬다. 傾國之色의 愛妾 虞姬를 옆에두고 義憤을 卽興詩로 슬피 노래한다.
"力拔山氣蓋世도 끝이 났구나. 駿馬도 멈추었다. 어찌할꼬! 虞 美人이여! 아! 虞 美人이여! 이를 어찌한담!"
帳幕은 슬픔에 쌓이고, 愛妾도 答歌로 "이미 勝北는 끝나고 四面엔 楚歌이거늘 어찌 苟且히 살길 바라리오. 將軍과 함께하리다"
項羽는 暫時 생각에 잠겼다. 8千의 軍士를 이끌고 江東에서 西쪽으로 건널때는 士氣도 衝天하여 곧장 天下를 휘어잡고도 남을만 하였는데 只今 이게 무슨 꼴이람... 悲憤慷慨하며 三枝槍을 비껴들고 800如 軍士를 指揮해 밤새 激戰을 벌이며 包圍網을 뚫고 南으로 逃亡쳤다. 그러나 捲土重來를 抛棄하고 끝내 和縣 烏江浦에서 自決하고 말았다.
🍎 斯文亂賊 , 斯文乱贼
(儒敎를 어지럽히는 盜賊. 敎理에 어긋나는 言動으로 儒敎를 어지럽히는 사람을 이르는 말이다)
「孔子가 匡땅에서 危殆로운 處地에 빠졌을 때 말하였다. “文王이 이미 돌아가셨지만, 그가 남긴 文化가 나에게 있지 않겠는가? 萬一 하늘이 將次 이 文化를 없애려 하셨다면 뒤에 죽은 사람이 이 文化에 參與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하늘이 이 文化를 없애려 하지 않으셨으니 匡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하겠는가?”
(子畏於匡, 曰, 文王旣沒, 文不在玆乎. 天之將喪斯文也, 後死者不得與於斯文也. 天之未喪斯文也, 匡人其如予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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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는 《論語 子罕》에 나온다. 孔子가 弟子들과 함께 匡 地域을 지날 때 사람들이 孔子를 陽虎로 誤認하고 害치려고 했다. 孔子는 이런 危機 속에서도 文王과 周公이 남긴 學問과 思想을 自身이 이어받아 天命이 自己에게 있으므로 決코 危險에 빠지지 않을 것이라고 確信했는데, 여기에서 ‘斯文’이 由來했다.
‘亂賊’은 叛亂을 일으키는 臣下와 父母에게 悖逆한 子息이란 뜻의 ‘亂臣賊子’를 말한다.
宋나라 때 나타난 朱子學, 性理學이 高麗 末에 韓半島에 傳來되어 朝鮮의 建國理念이 된 後, 朱子學은 朝鮮의 文化, 思想, 政治 等 社會 全般을 支配하게 되었다. 當時 明나라 때에 大陸에서는 朱子學의 지나친 哲理主義에 反對하여 知行合一을 强調하는 陽明學이 登場했다. 이 陽明學이 朝鮮에 들어와 當時 江華島에 流配되어 있던 一部 沒落한 宗親들에게 받아들여져 江華學派가 形成되었고, 그들의 學風은 朱子學에 挑戰하는 새로운 學問으로 浮上하게 된다. 性理學者들은 이런 陽明學者들을 儒學을 어지럽히는 무리들로 規定했는데, 여기에서 ‘斯文亂賊’이 由來했다. 이 말은 中國에서는 使用되지 않고 우리나라에서만 使用된다.
🍎 四分五裂
(넷으로 나뉘고 다섯으로 찢어지다. 意見이나 地域이 여러 갈래로 갈기갈기 갈라지거나 勢力이 여러 갈래로 찢어져 弱化되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戰國時代 中期, 秦나라의 勢力이 漸次로 커지면서 나머지 여섯 나라를 壓迫하기 始作하자, 이에 두려움을 느꼈던 나머지 여섯 나라는 秦나라에 對抗하기 爲해 相互 間에 外交的인 同盟 關係를 맺으려는 움직임이 있었고, 이를 主導한 것이 바로 合從策을 主張했던 蘇秦이었다. 蘇秦은 六國을 돌면서 遊說를 하고 다녔는데, 그 中 魏나라의 哀王에게는 다음과 같은 理由를 들어 合縱을 主張하였다.
“魏나라는 그다지 넓지도 않고, 兵士도 30萬밖에 되지 않습니다. 또한 地勢도 便便하여 四方에서 諸侯들이 쳐들어오면 이를 막을 만한 山이나 要塞도 없는, 그야말로 戰爭터라 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東쪽에는 齊나라, 南쪽에는 楚나라, 北쪽에는 趙나라, 西쪽에는 韓나라가 있어 虎視眈眈 魏나라를 노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魏나라가 南쪽으로 楚나라와 聯合하고 齊나라와는 聯合하지 않으면 齊나라가 東쪽을 치고, 東쪽으로 齊나라와 聯合하고 趙나라와는 聯合하지 않으면 趙나라가 北쪽을 치며, 韓나라와 聯合하지 않으면 韓나라가 西쪽을 치고, 楚나라와 親하지 않으면 楚나라가 南쪽을 攻擊할 것입니다. 이것을 바로 ‘四分五裂의 道’라고 하는 것입니다.
(魏南與楚而不與齊, 齊攻其東. 東與齊而不與趙, 則趙攻其北. 不合於韓, 是韓攻其西. 不親於楚, 則楚攻其南. 此所謂四分五裂之道也.)」”
《戰國策 魏策》에 나온다. 《戰國策》은 前漢 時代 劉向이 編纂한 것으로, 周나라의 元王부터 秦나라의 始皇帝에 이르기까지 여러 人事들의 策謀와 辨論을 國家別로 모은 冊이다.
蘇秦은 여섯 나라를 돌면서 各國이 處한 狀況과 王들의 性格을 完全히 把握한 것을 바탕으로 論理的으로 遊說를 進行하여 結局 六國을 合縱으로 하나로 묶는 데 成功했다. 蘇秦의 合縱策으로 六國이 聯合하게 되자 秦나라는 무려 15年 동안 函谷關 밖으로 나가지를 못했다.
‘四分五裂’은 春秋時代에 使用했던 軍士戰術 中의 하나로, 여러 記錄에 나온다.
● 六韜 奇兵에 → 넷으로 나뉘고 다섯으로 찢긴 것은 圓을 치고 네모를 부수었기 때문이다. (四分五裂者, 所以擊圓破方也)
● 史記 張儀列傳에 → 天下가 四分五裂되었다. (天下四分五裂)
● 三國志 · 魏志 司馬朗傳에 → 四分五裂이 되어 戰爭을 하는 땅이 되었다.(乃四分五裂, 戰爭之地)
● 北史 周法尙傳에 → 마침내 防備가 없어지니 四分五裂되었다. (卒有不虞, 四分五裂)
🍎 駟不及舌 , 驷不及舌
(네 마리 말이 끄는 수레도 사람의 혀에는 미치지 못한다. 한 番 내뱉은 말은 되돌릴 수 없으므로 말을 할 때는 愼重하게 해야 한다는 것을 比喩)
「衛나라 大夫 棘子成이 말했다. “君子는 質樸하기만 하면 된다. 文彩가 있으면 무엇하겠는가?” 子貢이 말했다. “안타깝도다. 그대가 이런 式으로 君子를 말하는 것이 퍼져 나가면 네 마리 말이 모는 수레로도 따라가기 어려울 것이오. 文彩(敎養)가 바로 質朴(根本) 함이고 質朴함이 바로 文彩라고 말하는 것은, 털을 다 뽑아 버린 호랑이나 豹범의 가죽이 털을 다 뽑아 버린 개나 羊의 가죽과 같다는 것이오.”
(棘子成曰, 君子質而已矣. 何以文爲. 子貢曰, 惜乎. 夫子之說君子也, 駟不及舌. 文猶質也, 質猶文也, 虎豹之鞟, 猶犬羊之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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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는 《論語 顔淵》에 나온다. 말은 한 番 하면 다시 주워 담을 수 없으므로 말을 할 때에는 愼重하게 생각하라는 뜻이다. ‘駟不及舌’은 ‘駟馬難追’라고도 하는데, 이는 元來 ‘한마디의 말이라도 한 番 입을 떠나면 네 匹의 말이 끄는 수레로도 쫓기 어렵다.(一言旣出, 駟馬難追.)’는 말에서 나왔다.
🍎 邪不犯正
(바르지 못하고 妖邪스러운 것은 바른 것을 犯하지 못함. 곧, 正義는 반드시 이긴다는 뜻)
唐나라 때의 隋唐嘉話는 劉餗이라는 사람이 編纂한 一種의 逸話集이라고 할 수 있는데, 여기서 由來된 것으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唐나라 貞觀 (唐 太宗의 年號) 年間에 西域에서 어떤 중이 왔는데, 呪術로 사람을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있다고 하였다. 太宗이 날랜 騎兵 가운데서 建壯하고 勇敢한 者를 뽑아서 試驗해 보게 하였는 바, 말과 같이 죽기도 하고, 말대로 살아나기도 하였다.
太宗이 太常卿 傅奕에게 이런 事情을 말하자, 傅奕이 말하였다.
"이는 邪異한 術法입니다. 臣이 듣건대 邪惡한 것은 올바른 것을 侵犯할 수 없다고 하오니, 臣에게 呪術을 걸게 하오면 決코 通하지 않을 것이옵니다."
이에 太宗이 중을 불러 傅奕에게 呪術을 걸게 하였는데, 傅奕은 그것을 對하고도 처음부터 아무런 느낌이 없는 것 같았다. 아주 짧은 時間이 흐르고, 그 중이 갑자기 스스로 넘어졌는데, 마치 무엇에 얻어맞은 것 같았으며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였다고 한다.
🍎 似而非
(겉으로는 그럴듯하지만 實際로는 그렇지 않다. 元語는 ‘옳은 것 같은데 틀리다.’라는 뜻의 ‘似是而非’다)
孟子와 그의 弟子인 萬章의 對話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孔子가 말했다. “나는 겉으로는 비슷하나 實際로는 그렇지 않은 것을 미워한다. 강아지풀을 미워하는 것은 그것이 穀食의 싹을 混亂시킬까 두려워서이고, 妄靈됨을 미워하는 것은 그것이 正義를 混亂시킬까 두려워서이고, 말 많은 것을 미워하는 것은 그것이 믿음을 混亂시킬까 두려워서이고, 鄭나라의 淫亂한 音樂을 미워하는 理由는 雅樂을 더럽힐까 두려워서이고, 보라색을 미워하는 것은 그것이 붉은색을 混亂시킬까 두려워서이고, 鄕原을 미워하는 것은 그들이 德을 混亂시킬까 두려워서이다. 君子는 常道로 돌아갈 뿐이다. 常道가 바로잡히면 庶民들도 또한 感化되어 일어날 것이고, 庶民들이 모두 感化되어서 일어날 것 같으면 邪慝한 것이 없어질 것이다.”
(孔子曰, 惡似而非者. 惡莠, 恐其亂苗也. 惡佞, 恐其亂義也. 惡利口, 恐其亂信也. 惡鄭聲, 恐其亂樂也. 惡紫, 恐其亂朱也. 惡鄕原, 恐其亂德也. 君子反經而已矣. 經正, 則庶民興, 庶民興, 斯無邪慝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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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는 《孟子 盡心 下》에 나온다. 鄕原이란 마을에서 마음이 厚하고 틀림없는 사람으로 行勢하지만 實際로는 世俗과 迎合하는 僞善者를 말한다.
🍎 蛇足 (畵蛇添足)
(뱀을 그리면서 발 까지 그렸다는 故事에서 由來한 말로 쓸대없는 군더더기)
楚나라의 懷王6年. 楚나라에서 令尹(楚의 官名으로 宰相) 昭陽에게 軍士를 주어 魏나라를 치게했다.
그는 魏를 친 後 齊나라를 攻擊하려 했다.
齊나라엔 마침 秦나라 使臣인 陳軫이 와 있었는데. 齊나라 王이 크게 걱정을하며 對備策을 묻자 그는 戰爭을 事前에 막아주겠다고 다짐한 後 昭陽의 陣營을 찾아가 談判을 지었다.
"貴國의 法에는 敵軍을 擊破하고 敵將을 꺾으면 어떤 報恩이 따름니까?"
"令尹입니다"
"그렇습니다. 將軍께선 이미 最高官職인 令尹이 아니십니까? 魏를 擊破하고 敵將을 벤 功만도 큰데 어찌 또 齊까지 치려하시는지를 모르겠습니다. 勝利를 하시면 몰라도, 그렇치 아니하다면 名譽도, 목숨까지도 危殆롭고 또한 숱한 非難을 받을 것입니다. 어떻던 國力이 弱化되면 虎視眈眈 機會를 노리는 漢나라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음에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옛날 어떤 사람이 下人들에게 酒煎子에 술을 내리자, 下人들이 한 사람이 먹기에 足한 量이라 누구든 뱀을 먼저 그린 사람이 마시기로 하고선 땅에 뱀을 그렸는데, 가장 먼저 그린 者가 酒煎子을 잡고 보니 남들은 아직도 未完成인지라 自身은 발 까지 보태 그려도 되리라 해서 畵蛇添足을 하고 酒煎子를 다시 잡자 다음 畵蛇를 完成 시킨 者가 이를 빼앗으며, 世上에 蛇足이 어딨어? 라는 말에 뒤늦은 어리석을 嘆했다' 합니다. 將軍께서는 戰意를 거두시고 齊에 恩澤을 내리신다면 외려 稱頌을 받으실 것입니다. 이는 잃을것이 없는 術입니다".
이를 받아드린 昭陽이 軍士를 거두어 떠났다.
'史記' '楚世家' 等에 실려있고 蛇足의 由來라 한다.
(楚有祀者, 賜其舍人卮酒, 舍人相謂曰, 數人飮之不足, 一人飮之有餘, 謂畵地爲蛇, 先成者飮酒, 一人蛇先成, 引酒且飮之, 乃左手持卮, 右手畵蛇曰, 我能爲之足, 未成, 一人之蛇成奪取卮曰, 蛇固無足, 子安能爲之足, 遂飮其酒, 爲蛇足者, 終亡其酒)
🍎 私淑
(直接 가르침을 받진 않았으나 맘 속으로 그를 本받아 배우거나 따름)
一世代를 30年이라면 5世代는 150年으로 君子나 小人의 끼친 恩澤도 5世代면 끝난다고 한다.
孟子 (BC372~289BC)는 孔子 (BC551~BC479)보다 107年 뒤의 사람이나 孔子가 끼친 德을 思慕하여 그의 弟者가 아니였어도 그를 標本으로 삼아 自己의 人格을 修養함에 힘썼고 여러사람에 私淑토록 했다.
(君子之澤, 五世而斬, 小人之澤, 五世而斬, 予未得爲孔子徒也, 予私淑諸人
🍎 死灰復燃 , 死灰复燃
(사그라진 재에 다시 불이 붙다. 잃었던 勢力을 다시 찾거나 어려움에 處했던 사람이 이를 克復하고 다시 일어남을 比喩)
「漢나라 文帝의 둘째 아들인 梁나라 孝王의 臣下 韓安國이 法을 어겨 監獄에 갇혔는데, 蒙縣의 獄吏 田甲이 韓安國을 侮辱하자 韓安國이 말했다. “다 타 버린 재에서도 다시 불길이 살아나지 않는가?” 그러자 田甲이 말했다. “다시 불이 타오르면 거기에다 오줌을 싸겠다.” 얼마 後에 梁나라의 內史 자리가 비었다. 漢나라에서 使者를 보내 韓安國을 梁나라의 內史에 除授하자, 韓安國은 罪人의 몸에서 2,000石의 俸祿을 받는 高官이 되었다. 田甲은 달아나 버렸다. 그러자 韓安國이 말했다. “田甲아, 돌아와 職責을 지키지 않으면 너의 집안을 滅族해 버리겠다.” 田甲이 웃옷을 벗고 謝罪하자, 韓安國은 웃으면서 “오줌을 누어 보라구. 너 같은 것들을 굳이 다스릴 것까지야 있겠느냐.”고 말하고는 田甲을 厚待해 주었다.
(其後安國坐法抵罪, 蒙獄吏田甲辱安國. 安國曰, 死灰獨不復然乎. 田甲曰, 然卽溺之. 居無何, 梁內史缺, 漢使使者拜安國爲梁內史, 起徒中爲二千石. 田甲亡走. 安國曰, 甲不就官, 我滅而宗. 甲因肉袒謝. 安國笑曰, 可溺矣. 公等足與治乎. 卒善遇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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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는 《史記 韓長孺列傳》에 나오는데, 韓安國의 말에서 ‘死灰復燃’이 由來되었다.
🍎 山戰水戰 , 山战水战
(山에서 싸우고, 물에서 싸우다. 온갖 苦生과 試鍊을 겪어 經驗이 많은 것을 比喩)
「무릇 敵과 싸울 때는 山林에 있든 平地에 있든 반드시 높은 언덕을 차지함으로써 有利한 地形에 依支하여야 치기에 有利하고, 敵을 쳐들어가기에 有利하여 싸워 이길 수가 있다. 兵法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山에서 싸울 때는 높은 곳에 있는 敵을 攻擊하지 말라.”
(凡與敵戰, 或居山林, 或在平陸, 須居高阜, 恃於形勢, 順於擊刺, 便於奔衝, 以戰則勝. 法曰, 山陵之戰, 不仰其高.)」
● 劉基의 百戰奇略 山戰에.
「무릇 敵과 싸울 때는 或은 江 언덕 가에 陣을 치고 或은 물 위에 배를 停泊 시키는데, 이를 모두 水戰이라고 한다. 물에 가까운 언덕에서 싸울 때는 반드시 물에서 若干 멀리 떨어져야 하는데, 이는 한便으로는 敵이 渡河를 하도록 誘引하는 것이고 한便으로는 敵이 疑心을 하지 않도록 하기 爲함이다. 반드시 敵과 싸우려 한다면 물 가까이에서 敵을 맞이하지 말라. 敵이 渡河를 하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萬若 敵과 싸우지 않겠다면 언덕에 依支하여 敵을 막아 敵이 渡河를 하지 못하도록 만들어라. 萬若 敵이 軍士를 이끌고 渡河하여 攻擊하면 물가에서 敵이 折半쯤 건너기를 기다렸다가 攻擊하면 利로울 것이다. 兵法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半쯤 건넜을 때 攻擊하라.”
(凡與敵戰, 或岸邊爲陣, 或水上泊舟, 皆爲之水戰. 若近水爲戰, 須去水稍遠, 一則誘敵使渡, 一則示敵無疑. 我欲必戰, 勿近水迎敵, 恐其不得渡. 我欲不戰, 則拒水阻之, 使敵不能濟. 若敵率兵渡水來戰, 可於水邊伺其半濟而擊之, 則利. 法曰, 涉水半渡可擊.)」
● 劉基 百戰奇略 水戰에.
元來 ‘山戰水戰’은 이처럼 戰術的인 測面에서 나왔지만, 나중에는 모든 風波를 다 겪거나 經驗이 豊富한 것을 比喩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劉基의 《百戰奇略》은 歷代의 兵法書를 參考하여 100가지의 戰爭을 收錄한 兵書이다.
🍎 殺身成仁 , 杀身成仁
(몸을 죽여 仁을 이루다. 옳은 일을 爲해 목숨을 버리는 것을 말한다)
「孔子가 말했다. “뜻있는 선비와 어진 사람은 살기 爲하여 仁을 해치는 일이 없고, 오히려 自身의 목숨을 바쳐 仁을 行할 뿐이다.”
(子曰, 志士仁人, 無求生以害仁, 有殺身以成仁.)」
● 論語 衛靈公에.
‘志士’는 道德과 義理에 뜻을 둔 사람을 말하고, ‘仁人’은 어진 德性을 갖춘 사람을 말한다. 하지만 이런 사람을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에, 孔子도 ‘殺身成仁’을 接近하기 어려운 以上으로 보았던지 〈衛靈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百姓들의 仁에 對한 必要는 물과 불보다 切實하다. 물과 불을 건드리고 죽는 사람은 내가 보았지만, 仁을 實踐하면서 죽는 사람은 보지 못했다.
(子曰, 民之於仁也, 甚於水火. 水火, 吾見蹈而死者矣. 未見蹈仁而死者.)
🍎 三顧草廬 , 三顾草庐
(草家를 세 番 돌아보다. 有能한 人才를 맞아들이기 爲하여 참을性 있게 努力하는 것을 比喩)
後漢 末葉, 劉備는 關羽, 張飛와 義兄弟를 맺고 漢室의 復興을 爲해 軍士를 일으켰다. 하지만 能力을 發揮할 機會를 잡지 못하고 여기저기 轉輾하며 歲月을 虛送하다가 마지막에는 荊州刺史 劉表에게 몸을 맡기는 身世가 되었다. 有能한 參謀의 必要性을 切感한 劉備는 여러 사람들을 通해 南陽에 隱居하는 諸葛亮의 存在를 알게 되었고, 關羽, 張飛와 함께 禮物을 싣고 襄陽에 있는 그의 草家를 세 番이나 訪問한 끝에 그를 軍師로 모실 수가 있었다. 이때 諸葛亮은 27歲, 劉備는 47歲였다.
이렇게 劉備가 諸葛亮을 세 番 訪問한 것을 이르러 ‘三顧草廬’, 或은 ‘三顧茅廬’라고 하는데, 實際로 이 말은 諸葛亮이 첫 番째 北伐을 나서기 前, 後周 劉禪에게 바친 出師表에서 찾아볼 수 있다.
「臣下 亮은 말씀드립니다. 先帝의 創業이 半도 끝나지 않아 中途에 돌아가시고, 只今 天下는 셋으로 나뉘어 益州는 疲弊하니 이는 眞實로 存屬하느냐 亡하느냐의 危機의 때입니다. 그러나 옆에서 모시는 臣下들이 안에서 게으르지 아니하고, 忠義의 軍士들이 밖에서 自身의 몸을 돌보지 않는 것은 모두 先帝의 特別한 待遇를 追念하여 陛下에게 그에 對한 報答을 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陛下의 聖스러운 귀를 여시어(臣下들의 忠諫을 받아들이시어) 先帝의 遺德을 밝히시고 뜻있는 선비들의 氣槪를 펼쳐 주는 것이 眞實로 마땅합니다. 亡靈되이 스스로 변변치 못하다고 여기거나, 義에 符合하지 않은 것을 끌어들이거나 比喩하여 忠諫의 길을 막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宮中과 府中은 모두 한 몸이 되는 것이니 功 있는 者를 올리고, 罪를 罰하며, 善한 것은 稱讚하고, 惡한 것을 버림에 다름이 있어서는 아니 됩니다. 萬若 奸邪한 짓을 하거나 過誤를 犯하거나, 忠誠과 善行을 한 者가 있으면 官吏에 부쳐 그 刑罰과 賞을 論하여 陛下의 公平하고 밝은 理致를 밝히는 것이 마땅합니다. 私的인 일에 치우쳐 안과 밖에 法을 달리해서는 안 됩니다.
侍中, 侍郞인 郭攸之, 費褘, 董允 等, 이들은 모두 善良하고 誠實하고, 뜻과 생각이 忠誠스럽고 純粹합니다. 이런 까닭에 先帝께서 拔擢하시어 陛下에게 남겨 주신 것입니다.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宮中의 일은 일의 크고 작음 없이 모두 그들에게 咨問하신 後에 施行하면 반드시 不足한 點을 補充하고 넓게 더하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將軍 向寵은 性品과 行實이 善하고 變함없으며, 軍事 業務에 밝고 能通하여, 옛날 試驗 삼아 써 보고 先帝께서 能力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까닭에 모두의 議論이 寵을 指揮官으로 薦擧한 것입니다.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軍營의 일은 일의 크고 작음 없이 모두 그에게 咨問하시면 部隊가 和睦하게 되고 優秀한 사람과 좀 못한 사람이 各各 쓰이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어진 臣下를 가까이하고 小人을 멀리한 것, 이것이 先漢이 興하고 隆盛했던 까닭입니다. 小人을 가까이하고 어진 臣下를 멀리한 것, 이것이 後漢이 기울고 시들었던 까닭입니다. 先帝께서 계실 때, 每番 臣과 더불어 이 일을 論하면서 桓帝와 靈帝를 歎息하고 痛恨해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侍中, 尙書, 長史, 參軍, 이들은 모두 곧고 眞實된 죽음으로 節操를 지키는 臣下들입니다. 願컨대 陛下께서 이들과 親하게 하고 이들을 信賴하시면, 漢나라 王室의 隆盛함은 날을 세면서 기다릴 수 있을 것입니다. 臣은 本來 平民으로 몸소 南陽에서 耕作을 하면서 亂世에 苟且히 姓名을 保全하면서 諸侯들에게 이름이 널리 알려져 顯達하기를 求하지 아니하였는데, 先帝께서 臣을 낮고 賤하다 여기시지 아니하시고 猥濫되이 스스로 몸을 굽히어 臣의 草家집으로 세 番 찾아오시어 臣에게 當世의 일을 咨問하셨습니다. 이로 因해 感激하여 드디어 先帝를 爲해 熱心히 뛰어다닐 것을 許諾했던 것입니다.
後에 敗北를 當하여 軍隊가 敗한 狀況에서 任務를 받고, 危急하고 어려운 가운데 命을 받들어 只今까지 21年이 지났습니다. 先帝께서는 臣이 삼가고 愼重함을 아신 까닭에 돌아가심에 臨해 臣에게 大事를 付託하셨습니다. 命을 받은 以來, 이른 아침과 늦은 밤으로 근심하며, 付託하신 것이 效果가 나타나지 않아 先帝의 밝음을 傷하게 할까 봐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러므로 5月에 瀘를 건너 不毛地에 깊이 들어갔습니다. 只今 南方이 이미 平定되어 兵甲이(軍費가) 이미 充分하므로, 三軍을 거느리고 北으로 中原을 平定해야 할 때를 當해, 魯鈍한 能力을 다해 奸邪하고 凶惡한 무리들을 물리치고 除去하여 漢나라 王室을 復興시키고 옛 首都로 돌아가기를 願합니다. 이것이 臣이 先帝에게 報答하고 陛下의 職分에 忠誠을 하는 바입니다.
損益을 斟酌하고 나아가 忠言을 다하는 것은 攸之, 褘, 允의 任務입니다. 陛下께서 臣에게 敵을 討伐하고 漢室을 復興시키는 效力을(任務를) 맡기기를 願합니다. 效力이 나지 않으면 臣의 罪를 다스리시어 先帝의 英靈에 告하소서. 萬若 德을 曾進시키는 말이 없다면 攸之, 褘, 允 等의 怠慢이니 그 허물을 밝히시옵소서. 陛下께서도 스스로 꾀하시어 善한 道理를 묻고 꾀하시고, 좋은 말을 살펴 받아들여 先帝의 遺詔를 깊이 좇으소서. 臣은 받은 恩惠에 感激을 이기지 못하여 只今 멀리 떠남에 있어 表를 쓰면서 눈물이 흘러 말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臣亮言. 先帝創業未半而中道崩殂, 今天下三分, 益州疲弊. 此誠危急存亡之秋也. 然侍衛之臣不懈於內, 忠志之士忘身於外者, 蓋追先帝之殊遇, 欲報之於陛下也. 誠宜開張聖聽, 以光先帝遺德, 恢弘志士之氣. 不宜妄自菲薄, 引喩失義, 以塞忠諫之路也. 宮中府中, 俱爲一体. 陟罰臧否, 不宜異同. 若有作奸犯科及爲忠善者, 宜付有司論其刑賞, 以昭陛下平明之理. 不宜偏私, 使內外異法也. 侍中侍郎郭攸之, 費褘, 董允等, 此皆良實, 志慮忠純. 是以先帝簡拔以遺陛下. 愚以爲宮中之事, 事無大小, 悉以咨之, 然後施行, 必能裨補闕漏, 有所廣益. 將軍向寵, 性行淑均, 曉暢軍事, 試用於昔日, 先帝稱之曰能. 是以衆議擧寵爲督. 愚以爲營中之事, 悉以咨之, 必能使行陣和睦, 優劣得所. 親賢臣, 遠小人, 此先漢所以興隆也. 親小人, 遠賢臣, 此後漢所以傾頹也. 先帝在時, 每與臣論此事, 未嘗不嘆息痛恨於桓靈也. 侍中, 尙書, 長史, 參軍, 此悉貞良死節之臣. 願陛下親之信之, 則漢室之隆, 可計日而待也. 臣本布衣, 躬耕於南陽, 苟全性命於亂世, 不求聞達於諸侯. 先帝不以臣卑鄙, 猥自枉屈, 三顧臣於草廬之中, 諮臣以當世之事. 由是感激, 遂許先帝以驅馳. 後値傾覆, 受任於敗軍之際, 奉命於危難之間, 爾來二十有一年矣. 先帝知臣勤愼, 故臨崩寄臣以大事也. 受命以來, 夙夜憂嘆, 恐托付不效, 以傷先帝之明. 故五月渡瀘, 深入不毛. 今南方已定, 兵甲已足, 當奬率三軍, 北定中原, 庶竭駑鈍, 攘除奸凶, 興復漢室, 還於舊都. 此臣所以報先帝而忠陛下之職分也. 至於斟酌損益, 進盡忠言, 則攸之, 褘, 允之任也. 願陛下托臣以討賊興復之效, 不效, 則治臣之罪, 以告先帝之靈. 若無興德之言, 則責攸之, 褘, 允等之慢, 以彰其咎. 陛下亦宜自謀, 以咨諏善道, 察納雅言, 深追先帝遺詔. 臣不勝受恩感激. 今當遠離, 臨表涕零, 不知所言.)
🍎 三年不飛又不鳴 , 三年不飞又不鸣
(3年 동안 날지도 않고 울지도 않는다. 뒷날 雄飛할 機會를 기다리고 있는 것을 比喩)
「楚나라 莊王이 卽位 3年이 되도록 令을 내리지 않고 밤낮으로 즐기기만 했다. 그러고는 나라 사람들에게 令을 내렸다. “敢히 寡人에게 諫하는 者는 死刑에 處할 것이오.”
伍擧가 (죽음을 覺悟하고) 諫言을 하기 爲해 들어갔다. 莊王은 왼쪽에 鄭姬를, 오른쪽에 越女를 품고 鐘과 북(鼓) 사이에 앉아 있었다. 伍擧가 말했다. “殿下, 臣이 수수께끼를 하나 내겠습니다. 언덕 위에 새가 한 마리 있사온데, 3年 동안 날지도 않고 울지도 않습니다. 이 새는 무슨 새겠습니까?” 莊王이 對答했다. “3年이나 날지 않았으니 날면 將次 하늘까지 차고 오를 것이오. 3年이나 울지 않았으니 한 番 울면 世上 사람들을 놀라게 할 것이오. 伍擧는 물러가 있으시오. 내 알고 있소.”
몇 달이 지났으나 莊王의 亂行은 더욱 甚해졌다. 그러자 大夫 蘇從이 (죽음을 覺悟하고) 直諫했다. 莊王이 말했다. “卿은 내 令을 듣지 못했소?” “죽음으로써 君主를 밝게 하는 것이 臣이 願하는 바입니다.” 莊王은 그날부터 酒色을 멀리하고 國政에 全念하여 誅殺한 者가 數百 名이고 進人(들인)者가 數百 名이었다. 그리고 伍擧와 蘇從에게 政事를 맡겼다. 나라 사람들이 크게 기뻐했다. 그리고 그해에 庸나라를 滅亡시켰다.
(莊王卽位三年, 不出號令, 日夜爲樂, 令國中曰, 有敢諫者死無赦. 伍擧入諫, 莊王左抱鄭姬, 右抱越女, 坐鐘鼓之間. 伍擧曰, 願有進隱. 曰, 有鳥在於阜, 三年不蜚不鳴, 是何鳥也. 莊王曰, 三年不蜚, 蜚將衝天. 三年不鳴, 鳴將驚人. 擧退矣. 吾知之矣. 居數月, 淫益甚. 大夫蘇從乃入諫. 王曰, 若不聞令乎. 對曰, 殺身以明君, 臣之願也. 於是罷淫樂, 聽政, 所誅者數百人, 所進者數百人, 任伍擧蘇從以政. 國人大悅. 是歲滅庸.)」
이 이야기는 《史記 楚世家》와 《呂氏春秋 審應覽》에 나오는데, 伍擧가 莊王에게 한 말에서 ‘三年不飛又不鳴’이 由來했다. 莊王이 3年 동안 淫樂에 빠져 酒色을 가까이했던 것은 忠臣과 姦臣을 選別하기 爲한 事前 工作이었던 것이다.
이와 거의 비슷한 이야기를 《史記 滑稽列傳》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여기에서는 楚莊王보다 約 250年 後의 사람인 齊威王 때 淳于髡이 威王에게 한 말로 記錄되어 있다.(一鳴驚人)
🍎 三房荀彧
曹操가 懇切히 賢士를 찾는다고 하자, 泰山의 老僧이 그에게 緋緞 주머니를 하나 주면서 말했다.「누구든 當身을 指目해 辱을 하는 사람이 있거든, 當身은 이 緋緞 주머니를 열어본 뒤 그를 찾아가십시오.」
曹操가 許昌에 到着하자, 同生 曹仁이 每日 兵士를 거느리고 나가서 盜賊질을 하며 百姓들을 괴롭혔다. 사흘이 지나자, 四大門에는 大門마다 榜文이 나붙었는데, 그 內容은 이러했다.
• 曹操到許昌, 百姓遭了殃
(曹操가 許昌에 이르렀으니, 百姓들은 災殃을 만났구나)
그 아래에는 「許昌 荀彧」이라는 이름이 남겨져 있었다. 曹操는 이 事實을 알고 火가 나서 이를 악물었다. 그는 처음에 곧바로 荀彧을 붙잡아오려 했으나, 갑자기 老僧의 말이 생각나서 緋緞 주머니를 열어 보니, 안에는 한 行의 文章이 적혀 있었다.
• 許昌荀彧, 才過子房
(許昌에 살고 있는 荀彧은, 才주가 張子房을 凌可하네)
曹操는 크게 기뻐하며 曹仁에게 그를 請해 오라고 命했다. 元來 荀彧은 曹操가 才주 있는 사람이라는 所聞을 듣고 依託하려는 뜻을 가지고 있었으나, 먼저 넌지시 榜文을 한 張 써 붙여 그를 試驗해 본 것이었다.
荀彧은 曹仁이 自身을 데리러 온 것을 알고 일부러 門을 열지 않았다. 曹仁이 돌아가 報告하자, 曹操는 반드시 親히 나서야 한다는 事實을 깨달았다. 그는 동짓달 내린 큰 눈을 무릅쓰고 聚奎街에 있는 荀彧의 邸宅으로 찾아갔으나, 大門에는 자물쇠가 채워져 있고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鬚髥에 얼음이 얼 때까지 기다리다가 그 자리를 떠났다. 그 다음 날 또 갔으나, 執事가 主人은 許田으로 사냥을 갔다고 했다. 세 番째는 荀彧이 祖上의 墓에서 伐草를 하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는 禮를 갖추어 찾아갔다.
墓地에 到着하자, 스물 몇 살쯤 되어 보이는 한 靑年이 한창 孫子兵法을 熱心히 읽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曹操가 그 옆으로 가서 섰지만, 荀彧은 고개도 한 番 들지 않았다. 갑자기 한 차례 바람이 불더니, 荀彧의 손에 있던 冊이 바람에 날려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曹操가 急히 몸을 굽혀 주워 올린 뒤, 恭遜하게 바치며 말했다.
"荀公, 曹操가 問安 여쭙니다."
荀彧이 말했다.
"저는 普通 百姓인데, 先生께서 어찌 問安을 여쭙니까?"
曹操가 다시 말했다.
"荀公은 子房의 才주와 子牙의 智謀를 갖추고 있으니, 제가 함께 大事를 圖謀하려고 모시러 왔습니다."
"當身은 제가 當身을 辱하는 것이 두렵지 않습니까?"
曹操가 웃음을 띄며 말했다.
"辱하는 데에 一理가 있다면 많이 辱할수록 좋지요."
荀彧은 辭讓을 하며 발이 아파서 걸을 수가 없다고 하자, 曹操는 곧장 앞으로 가서 荀彧을 부축해 말에 오르게 했다. 이때부터 荀彧은 曹操의 謀士가 되어 數많은 策略들을 내 놓았다.
🍎 三十六計 , 三十六计
(서른여섯 番째 計策. 더 以上 해볼 方法이 없는 困難한 狀況에 處했을 때는 卽時 避하는 것이 가장 좋은 方法이라는 것을 比喩하는 말이다. ‘三十六計, 走爲上’, 卽 서른여섯 番째 計策, 달아나는 것이 上策이다. 의 준말이다)
南北朝時代 南朝의 宋나라 將軍 蕭道成은 部將 王敬則을 시켜 暴君인 後廢帝 劉煜을 殺害하고 劉準(順帝)을 皇帝로 세운 다음, 順帝에게 禪讓을 받는 形式으로 帝位에 오르고 國名을 齊라고 했는데, 그가 바로 齊나라 高帝이다. 高帝 蕭道成은 在位 3年 만에 죽었는데, 臨終 때 子孫들에게 피비린내 나는 骨肉相殘이 되풀이된 宋나라의 滅亡을 거울삼아 서로 和睦하고 協助하여 宋나라의 歷史를 되풀이하지 말 것을 遺言으로 남겼다. 太子 蕭蹟이 蕭道成의 뒤를 이었는데, 그가 武帝이다. 그리고 蕭昭業과 蕭昭文이 그 뒤를 이었다가, 武帝 蕭道成의 四寸인 蕭鸞이 다시 뒤를 이었는데, 그가 바로 明帝이다.
明帝는 皇帝에 卽位한 以後 反亂과 報復이 두려워 武帝의 아들 17名, 兄弟 12名, 그리고 여러 名의 孫子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 그러자 開國功臣인 會稽 太守 王敬則이 生命의 危脅을 느껴 反亂을 일으켰다. 王敬則은 軍士 1萬을 이끌고 首都 健康을 向해 進擊했는데, 明帝의 虐政에 不滿을 품은 農民들이 中途에 可勢하여 軍士가 10萬으로 불어났다.
「當時 明帝는 病이 危篤한 狀態였는데, 王敬則이 倉卒之間에 東쪽에서 들고일어나자 朝廷이 모두 두려워 했다. 明帝의 둘째 아들 蕭寶卷은 東宮에서 叛亂 鎭壓을 論議하면서 사람을 시켜 지붕에 올라 살펴보게 했는데, 征虜亭에 불이 붙은 것을 보고 王敬則이 이르렀다고 말하자 蕭寶卷은 急히 行裝을 꾸려 逃亡갈 準備를 했다. 누군가가 王敬則에게 이를 報告하자 王敬則이 말했다. “그들 父子에게 뾰족한 手가 있을 수 없겠지. 檀公의 서른여섯 가지 計策 가운데 逃亡이 最高의 計策이라 했거늘, 너희 父子는 서둘러 逃亡하는 게 좋겠지.” 王敬則이 처음 攻擊해 올 때는 그 勢가 아주 대단했으나 며칠 만에 敗하고 말았는데, 이때 王敬則은 70如 歲였다. (是時上疾已篤, 敬則倉卒東起, 朝廷震懼. 東昏侯在東宮議欲叛, 使人上屋望, 見征虜亭失火, 謂敬則至, 急裝欲走. 有告敬則者, 敬則曰, 檀公三十六策, 走爲上計. 汝父子唯應急走耳. 敬則之來, 聲勢甚盛, 裁少日而敗, 時年七十餘.)」
《南史 王敬則傳》에 나오는데, 여기에서 ‘三十六計’라는 말이 처음 言及되었다. 王敬則이 말한 ‘檀公’은 南北朝 宋 武帝의 開國功臣 檀道濟를 말한다.
武帝가 죽자 그 뒤를 이은 文帝는 檀道濟를 征南大將軍으로 封했다. 檀道濟는 北魏와의 戰鬪에서 무려 30如 차례를 連戰連勝했다. 그런데 한 番은 宋나라 軍隊가 歷城 一帶까지 쳐들어갔다가 軍糧이 不足하게 되었다. 檀道濟는 退却을 決定했다. 北魏의 軍隊는 宋나라 軍隊의 事情을 把握하기 爲해 密偵을 派遣하여 宋軍의 陣營을 偵察했다. 檀道濟는 軍糧을 配給하는 척하며 일부러 食糧을 땅에 흘렸다. 北魏는 宋나라 軍隊가 軍糧이 넉넉한 것으로 생각하고 敢히 攻擊하지 못하고 防備만 했다. 檀道濟는 그 틈을 타 無事히 撤收했다. 훗날 사람들은 그가 計策이 많았음에도 不拘하고 結局 敗走하였다고 비웃었다.
蕭寶卷은 明帝 騷亂의 둘째 아들로, 明帝가 죽은 後, 16歲의 나이에 그 뒤를 이어 南齊의 여섯 番째 皇帝가 되었다. 蕭寶卷은 暴惡하고 紊亂한 生活을 했는데 502年 雍州刺史 蕭衍이 軍士를 이끌고 南京을 攻略하여 暴惡한 皇帝 蕭寶卷을 죽이고 蕭寶卷의 同生 蕭寶融, (在位 501∼502)을 세운 後, 그로부터 禪讓을 받아 帝位에 오르고 國號를 梁이라 했다. 이이가 바로 梁의 開祖인 武帝, (在位 502∼549)이다. 蕭衍은 蕭寶卷을 東昏侯로 追封했다.
● 歷史 · 文化 資料 上 三十六計
‘三十六計’란 말이 처음 言及된 것은 《南齊書》의 (王敬則傳)이다. 그러다가 明末淸初에 한 無名學者가 이 口傳된 內容들을 가지고 《三十六計秘本兵法》이라는 冊으로 엮었는데, 이것이 筆寫本으로 傳承되다가 1941年 陝西省 咸陽市 彬縣에서 發見되어 비로소 書籍으로 出版되기 始作했다. 勿論, 檀道濟가 말한 ‘三十六計’와 《三十六計秘本兵法》의 36計가 直接的인 聯關性이 있는지 與否는 밝혀지지 않았으며, 檀道濟의 三十六計가 어떤 內容인지도 밝혀지지 않았다. 36計는 古代 中國의 軍士 古典 中에서 戰略 戰術의 하나로, 속임수에 强調點을 두었다는 點에서 좀 異色的인 것이다. 大部分의 다른 兵書들은 接戰 時의 策略에 關한 것들인데, 이런 類形의 冊들과는 달리 三十六計는 戰略的 目的을 達成하기 爲한 속임수의 使用, 때에 따라서는 挾雜, 避身 方法 等에 焦點을 맞추고 있다. 이런 까닭에 그 題目이 《三十六計秘本兵法》인 것이다. 이 冊은 36個의 戰略을 여섯 個의 章으로 分類하고 있다. 1∼3章의 18個 戰略은 狀況이 優勢할 때 이를 活用하여 利得을 얻고자 使用하는 戰略이고, 4∼6章의 18個 戰略은 狀況이 劣勢일 때 劣勢에서 벗어나 損失을 最小化하고자 하는 戰略이다.
🍎 三十六計 (36가지 計策)
第 1 章 (勝戰計) : 我軍이 勝利할 수 있는 條件이 充分히 具備되었을 때 取하는 作戰이다. (1 ~ 6)
1. 瞞天過海 : 隱密하게 來日을 圖謀하라.
2. 圍魏救趙 : 正面攻擊보다 迂廻하라.
3. 借刀殺人 : 直接 나서는 것은 初步者의 方法이다.
4. 以逸待勞 : 때가 올 때까지 기다려라.
5. 趁火打劫 : 機會가 왔을 때는 벌떼처럼 攻擊하라.
6. 聲東擊西 : 相對方의 注意를 다른 곳으로 誘導하라.
第 2 章 (敵戰計) : 我軍과 敵軍의 勢力이 비슷할 때 奇妙한 計略으로 敵軍을 迷惑시켜 勝利를 이끄는 作戰이다.
(7 ~ 12)
7. 無中生有 : 없어도 있는 것처럼 보여라.
8. 暗渡陳倉 : 虛僞 情報를 漏洩하여 逆으로 利用하라.
9. 隔岸觀火 : 相對方에 內紛이 일어나면 觀望하라.
10. 笑裏藏刀 : 秘藏의 武器는 웃음으로 감추어라.
11. 李代桃僵 : 작은 損失로 決定的인 勝利를 誘導하라.
12. 順手牽羊 : 아무리 작은 利得이라도 默過하지 말라.
第 3 章 (攻戰計) : 自身을 알고 敵을 안 다음 計策을 謀議하여 敵을 攻擊하는 戰略이다. (13 ~ 18)
13. 打草驚蛇 : 相對方의 本心을 드러내도록 하라.
14. 借屍還魂 : 對策없는 冒險은 避하라.
15. 調虎離山 : 어려운 相對는 끌어내라.
16. 欲擒故縱 : 相對方의 마음을 잡아라.
17. 抛磚引玉 : 작은 미끼로 큰 利得을 圖謀하라.
18. 擒賊擒王 : 勝負는 最後의 一刻까지
第 4 章 (混戰計) : 敵이 混亂한 渦中을 틈타 勝機를 잡는 戰略이다.
(19 ~ 24)
19. 釜底抽薪 : 힘으로 안되면 相對方의 김을 빼라.
20. 混水摸漁 : 混亂을 일으켜 決定打를 加하라.
21. 金蟬脫殼 : 陣營을 그대로 두고 主力을 딴곳으로.
22. 關門捉賊 : 弱한 敵을 包圍 攻擊하라.
23. 遠交近攻 : 가까운 敵부터 相對하라.
24. 假道伐虢 : 弱한 相對는 名分만으로 取할 수 있다.
第 5 章 (倂戰計) : 狀況의 推移에 따라 언제든지 敵이 될 수 있는 友軍을 背叛, 利用하는 戰略이다. (25 ~30)
25. 偸梁換柱 : 故意로 敗하게 하여 自身의 勢力으로 吸收한다.
26. 指桑罵槐 : 迂廻的인 方法으로 怯을 주어라.
27. 假痴不癲 : 어리석은 行動으로 相對를 安心시켜라.
28. 上屋抽梯 : 나무에 오르게 하고 사다리를 치운다.
29. 樹上開花 : 虛張聖勢. 虛風도 때에 따라서는 큰 힘이 된다.
30. 反客爲主 : 구르는 돌이 박힌 돌을 뽑아낸다.
第 6 章 (敗戰計) : 狀況이 가장 不利한 境遇 劣勢를 優勢로 바꾸어 敗北를 勝利로 이끄는 戰略이다.(31 ~ 36)
31. 美人計 : 美貌를 兼備한 女人을 앞세워 眩惑시키고 判斷 未熟으로 誘導.
32. 空城計 : 徹底히 비워 둠으로써 敵을 두렵게 하라.
33. 反間計 : 敵의 諜者를 逆으로 利用하라.
34. 苦肉計 : 죽는것 보다 팔 하나 없는 것이 낫다.
35. 連環計 : 相對方의 足鎖를 채우고 攻擊하라.
36. 走爲上 : 如意치 않으면 避하라.
🍎 三十六計策
★ 第 1 章 (勝戰의 計)
1. 第 1 計 ~ 瞞天過海 (하늘을 欺瞞하고 바다를 건너간다)
● 太史慈는 每日 아침마다 城에서 나와 敵이 보는 앞에서 悠悠히 활쏘는 演習을 하고는 다시 城안으로 되돌아가는 일을 反復했다.
처음엔 이를 警戒하던 敵軍의 偵察兵들도 每日 反復되풀이되는 太史慈의 모습에 나중에는 無心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平素처럼 城에서 활을 들고 나온 太史慈는 갑자기 잽싸게 말을 타고 달려 敵陣을 빠져 나간 것이다.
2. 第 2 計 ~ 圍魏救趙 (强한 敵을 分散시켜 처부수다)
● 戰國時代에 魏나라 大軍에게 攻擊을 받아 都邑인 邯鄲을 包圍當한 趙나라는 이웃의 齊나라에게 救援을 要請했다.
齊나라 將帥 田忌가 急히 邯鄲을 進擊하려 들자, 齊나라의 軍士인 孫臏이 다음과 같이 提案하였다.
"魏나라 軍士와의 正面勝負는 우리 쪽에 不利합니다. 이런 때는 守備가 相對的으로 허술한 魏나라의 首都를 攻擊합시다. 그러면 魏나라는 邯鄲의 包圍를 풀어버리고 서둘러 撤收할 것입니다.
그때를 노려서 攻擊하면 어떻겠습니까?"
結局 齊나라는 大勝을 거두었고 아울러 趙나라도 救하게 되었다.
3. 第 3 計 ~ 借刀殺人 (칼을 빌려서 殺人 한다)
● 相對를 攻擊할 때 자기가 直接 攻擊하지 않고 다른 相對의 힘을 가지고 攻擊하는 戰法이다. 싸우지 않고 이긴다는 元理에 立脚한 中國人다운 戰略이라고 할 수 있다.
4. 第 4 計 ~ 以逸待勞
● '逸'이란 餘裕있는 狀態이며 '勞'는 疲勞한 狀態로, 相對에 對해 餘裕를 가지고 守備에 臨하여 相對가 지치기를 기다리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기다린다는 것이 하늘에 運을 맡긴다는 意味는 아니다.
敵에게 攻擊의 틈을 주지 않으면서 戰列을 가다듬고 準備를 단단히 하며 기다려야 한다.
5. 第 5 計 ~ 趁火打劫 (불난 틈을 利用하여 盜賊질 한다)
● 이는 第4計 와는 反對인 攻擊作戰이다. 攻擊을 할 것이냐, 守備를 할 것이냐 하는 判斷은 敵의 情勢에 따라 달라진다. 卽 敵의 勢力이 强할 때는 그들이 지치도록 기다려야 하며,
敵의 힘이 弱化되었을 때는 기다림없이 單숨에 攻擊을 하는 것이 이 計略의 要點이다. 다시말해, 相對의 弱點을 發見하면 遲滯없이 攻擊하여 相對를 無力하게 만드는 것이다.
6. 第 6 計 ~ 聲東擊西 (東쪽을 向해 소리치고 西쪽을 攻擊한다)
● 西쪽을 攻擊하기 爲해 敵의 兵力을 分散시켜 힘을 弱化시키는 策略으로,
예부터 이 戰法이 利用되어 왔다. 그러나 잘못 使用하면 오히려 敵으로부터
큰 被害를 받을 수 있으므로 特히 愼重해야 한다. 相對의 指揮 系統을 混亂시키는 것이 이 策略을 成功시키는 秘訣이다.
★ 第 2 章 (敵戰의 計)
7. 第 7 計 ~ 無中生有 (아무도 모르게 지나간다)
● 唐나라 安祿山이 叛亂을 일으켜 雍丘城이 包圍를 當했다. 이때 城內에 張巡이라는 將帥가 城을 지키고 있었다.
화살이 다 떨어지고 城이 陷落黨하기 一步直前이었을 때, 張巡은 한 가지 計策을 생각해냈다. 그는 部下들을 시켜 千 個의 허수아비에 軍服을 입혀 眞짜 兵士인 양 꾸몄다.
이어서 허수아비 千 個를 밧줄처럼 새끼줄에 달아 캄캄한 밤中 城 밖으로 내려 보냈다.
이것을 본 敵軍은 眞짜 兵士인 줄 알고 수없이 화살을 쏘아댔다.
張巡의 計略에 完全히 말려든 것이다.
張巡은 人形에 꽂힌 數萬 個의 화살을 敵에게 내보이며 自身의 計略을 誇示했다. 그러나 이 計略은 다음 作戰의 前奏曲에 不過했다.
張巡은 이番에는 볏집 人形 代身에 眞짜 兵士들을 城 밖으로 내려보냈다.
前에 한 番 속은 敵軍의 兵士들은 이番에는 속지 않으려고 한 個의 화살도 쏘지 않았다. 城 밖으로 내려간 兵士들은 叛亂軍을 急襲하여 크게 무찔러 버렸다.
속임수를 利用하여 相對方을 混亂시킨 後, 逆으로 放心한 틈을 노린것이다.
虛와 實을 巧妙히 엇바꾸어 敵을 混亂에 빠뜨리고 쳐부는 策略이다.
8. 第 8 計 ~ 暗渡陳倉 (아무도 모르게 陳倉을 건너간다)
● 劉邦의 部下였던 名將 韓信이 關中을 쳐들어 갈 때 正面에서 攻擊하는 척하다가 몰래 陳倉이라는 城을 攻擊한 事實에서 由來한다. 이 發想은 第6計인 聲東擊西와 비슷하다.
世界 歷史上 最大의 作戰인 1944年 6月, 노르망디(Normandie) 上陸作戰이 바로 이 境遇이다. 聯合軍 側은 일찍이 노르망디를 上陸 目標로 定했으나,
作戰上 獨逸軍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칼레 上陸을 거짓으로 流布하고 그쪽으로 繼續 爆擊을 加하여 上陸이 臨迫한 것처럼 僞裝했다.
獨逸軍은 칼레가 補給이나 作戰遂行 面에서 上陸地로 가장 有力하다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이러한 僞裝戰術에 넘어가고 말았다.
結局 聯合軍은 이러한 虛点을 노려 노르망디에 上陸, 勝利를 이끌어냈다.
9. 第 9 計 ~ 隔岸觀火 (기슭을 사이에 두고 불을 쳐다본다)
● 여기서 불이란 內紛을 意味한다. 卽 집안싸움을 일으키라는 말이다.
內紛狀態에 있는 相對를 奇襲하면 오히려 敵이 團結하게 되어 거꾸로 我軍이 損害를 보게 된다. 그러므로 어느 程度 時間을 가지고 敵의 自滅을 기다리는 것이 좋다. '幸運은 자면서 기다려라'는 俗談이 있다. 이 또한 '隔岸觀火'의 策略이다.
10. 第 10 計 ~ 笑裏藏刀 (가슴에 匕首를 숨기도 겉으로는 상냥하게 相對方을 對하는 戰略이다.)
● 宋나라 曹瑋에 關한 逸話로 어느 날 戰場에서 曹瑋는 自己 쪽 兵士들이 敵軍 쪽으로 逃亡쳤다는 報告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動搖함이 없이 빙그레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걱정말게, 그들은 모두 내가 指示한 대로 行動한 것뿐일세" 이 이야기를 들은
敵軍은 逃亡쳐 온 兵士들을 疑心하여 모조리 목을 베었다고 한다. 이것이 逃亡兵을 없애기 爲한 高度의 '笑裏藏刀'의 한 例이다.
11. 第 11 計 ~ 李代桃僵 (작은 損害를 보는 代身 큰 勝利를 爭取하는 戰略)
● 戰爭이든 事業이든 어느 程度의 損失은 따르게 마련이다. 問題는 그 損失이 將來의 利益과 어떻게 結付되어 있느냐에 달려 있다. 작은 損害에 執着하면 오히려 損失은 커지게 마련이다.
이에 對해 孫子兵法을 쓴 孫武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智慧로운 사람은 利益과 損失의 兩面을 생각한다. 그렇게 하면 일을 順調롭게 處理할 수 있다. 비록 損失을 입었다 할지라도 賢明한 사람은 損失로 因한 뒤의 利益을 생각한다.
그렇게 하면 걱정할 것이 없게 된다.」
12. 第 12 計 ~ 順手牽羊 (손에 잡히는 데로 取한다)
● 쉽게 손에 들어오는 利益이라면 念慮하지 말고 取하되, 그러나 確實한 目標가 세워져 있고 狀況에 따라 柔軟하게 對處하는 것이 必要하다.
高度成長 時代라면 모르지만 低成長 時代에서는 조그만 利益이라도 着實히
쌓아나가는 '順手牽羊'의 姿勢가 무엇보다도 重要하다.
★ 第 3 章 (攻戰의 計)
13. 第 13 計 ~ 打草驚蛇 (풀을 막대기로 쳐서 뱀을 놀라게 한다)
● 相對의 動靜을 살펴보는 策略 이다. 아울러 풀을 쳐서 뱀을 誘引 한다는 意味도 있다. 卽 巨物을 잡기 爲해서 周邊의 조무래기부터 차례로 잡아들여 確實한 證據를 만들어 가는 作戰이다.
14. 第 14 計 ~ 借屍還魂 (屍體에 힘입어 魂을 돌아오게 한다)
● 世上에서 價値없다고 버려진 것들을 다시 利用하에 價値있는 것으로 만든다. 例를들면 三國志의 曹操는 權謀術數에 아주 能한 사람으로 不遇한 處地에 있던 허수아비 皇帝를 自身의 本거지로 맞아들여 勢力 擴大 手段으로 利用하였다.
15. 第 15 計 ~ 調虎離山 (山中의 호랑이를 山에서 떠나게 하는 策略)
● 山속에선 범이 무섭지만 莫上 平地에 내려오면 훨씬 處置하기에 容易한 法이다. 이처럼 要塞에 버티고 있는 敵도 밖으로 誘引하면 치기 쉽다는 것이다.
16. 第 16 計 ~ 欲擒故縱 (窮地에 몰리면 쥐도 고양이를 문다)
● 退路를 完全히 封鎖하면 相對方은 죽기를 무릅쓰고 反擊한다.
故로 외려 退路를 조금 열어주면 敵은 勢力이 弱해져 쉽게 處置할수 있게 된다. 完全히 잡기 爲해서는 暫時동안 내버려 둔다는 意味다.
ㅅ ~ 8 (2 ~2)
17. 第 17 計 ~ 抛磚引玉 (벽돌을 던져서 구슬을 얻는다)
● 미끼를 던져서 相對를 誘惑하는 計略이다. 이 作戰의 成功 與否는 미끼같지 않은 미끼를 使用해야 한다는 것이다.
反對로 相對方 쪽에서 볼 때는 미끼에 걸리지 않도록 冷情한 判斷力을 해야한다.
荀子도 '利로움만 보고 그 害로움을 돌보지 않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말했는데,
當場 目前의 利益보다는 그 裏面에 숨겨진 損害를 생각할 만큼 마음의
餘裕를 恒常 지니고 있어야만 한다.
18. 第 18 計 ~ 擒賊擒王 (盜賊을 사로잡으려면 우두머리를 잡아라)
● 相對方의 中樞를 攻擊하여 敵의 中心을 壞滅시키는 戰略이다. 모든 事物은 必히 弱點이 있기 마련, 그러니 그 弱点을 利用하면 交涉이나 說得이 意外로 쉽게 이루어질 수 있다.
★ 第 4 章 (混戰의 計)
19. 第 19 計 ~ 釜底抽薪 (가마솥의 長斫을 치우는 策略이다)
● 具體的으로 보면 敵의 補給을 遮斷하는 것, 敵의 士氣를 꺾는 것으로,
三國時代 魏나라 曹操는 官渡 戰鬪에서 袁紹의 大軍과 싸운 일이 있었다.
그런데 劣勢에 몰렸던 曹操가 袁紹의 補給基地를 밤에 몰래 襲擊하는 바람에 大勝하였고, 이 氣勢를 몰아 單숨에 中國 北部를 支配하는 實力者로 登場하였다.
20. 第 20 計 ~ 混水摸漁 (물을 휘둘러서 고기를 찾아낸다)
● 敵의 內部와 指揮本部를 混亂시켜 戰力을 弱化시킨 다음 我軍이 願하는 方向으로 戰勢를 이끌게 된다.
1944年 12月 히틀러는 프랑스 國境 아르텐느 언덕에서 數十 萬 兵士와
2千 臺의 戰車로 最後의 總反擊을 可했다. 그때 그는 英語에 能通한 兵士들 2千 名을 뽑아 美軍服裝을 입혀 美國 後方에 浸透시켰다. 이러한 攪亂作戰은 그대로 適中되어 美軍의 指揮本部를 混亂케 하였다.
비록 主力軍의 進出이 막힌 탓으로 作戰은 成功하지 못했지만, 이는 典型的인 '混水摸漁'作戰 이었다.
21. 第 21 計 ~ 金蟬脫殼 (매미가 남몰래 허물을 벗고 날아가는 모습)
● 겉으로는 陣地 構築을 强化하며 끝까지 戰鬪 姿勢를 보이면서 相對가 움직이지 못하는 틈을 利用하여 隱密히 主力部隊를 移動시키는 戰略이다.
22. 第 22 計 ~ 關門捉賊 (門을 닫아 버리고 盜賊을 잡는다)
● 앞의 16計(欲擒故縱)와는 正反對의 策略이다. 얼핏 보면 矛盾된 策略 같지만 힘이 弱한 敵은 包圍해서 殲滅하라는
註釋이 있듯이 狀況에 따라 强하게 또는 弱하게 가려서 判斷하여 實行하라는 뜻으로 解釋된다. 例를 들어 相對의 兵力이 後에 큰 禍根이 될 憂慮가 있을 境遇에는 '關門捉賊'의 計略이 必要하다.
要컨대 相對가 弱할 땐 人情事情없이 徹底하게 殲滅하라는 것이다.
23. 第 23 計 ~ 遠交近攻 (멀리 있는 나라와는 손잡고 가까이 있는 나라는 攻擊하라는 뜻)
● 諸國이 서로 對立 恒爭하고 있는 狀況에서는 언제나 有效한 策略으로 여겼다. 理由는 遠征에는 德보다 失이 많기 때문이다. 遠國과 同盟하여 近國을 攻擊하는 策略은 近에서 遠으로 攻擊키 爲한 漸次的 勢力을 擴張함에 있다.
24. 第 24 計 ~ 假道伐虢 (길을 빌려 虢나라를 친다)
● 小國의 어려움을 틈타 이를 征伐하는 策略이다. 例로 虢은 春秋時代의 한 小國이다. 大國인 秦이 小國 虞나라에게 길을 빌려 虢나라를 滅하고 歸路에 虞나라마저 滅亡시킨 事實에서 由來되었다.
★ 第 5 章 (倂戰의 計)
25. 第 25 計 ~ 偸梁換柱 (대들보를 훔치고 기둥을 바꾼다)
● 秦始皇帝는 '遠交近攻'의 戰略으로 近國 부터 차례로 侵攻한 後 마지막 齊나라를 滅亡시킬 때 齊나라의 臣下 后勝을 비롯해 많은 이들을 買收하였기에 戰爭도 始作 前에 齊나라를 허수아비로 만들어 버렸다. 이러한 戰略을 말한다.
26. 第 26 計 ~ 指桑罵槐 (뽕나무를 가리키면서 회화나무를 꾸짖는다)
● 迂廻的이고 間接的인 方法으로 相對를 批判하는 것이다.
이는 三十六計 戰略 中에서 近親 國家나 部下를 다루는 方法으로 많이 섰다.
近親國에 對하여 正面으로 批判을 加하거나 部下를 面前에서 辱하면 背叛 當할 危險이 있어 相對가 알아차릴 만하게 다른 사람을 間接的으로
꾸짖으면 더욱 效果的이라는 말이다.
27. 第 27 計 ~ 假痴不癲 (잘 떠들면서 輕擧妄動한 行動 보다는 바보인 양 行動을 삼가는 便이 낫다)
● 心的으로 緻密한 計算을 하면서도 外的으론 감춤이다. 結局 이는 바보같이 行動하면서 相對의 放心을 誘導하는 策略이다. 뛰어난 指導者는 自己의 才能을 誇示하지 않는다.
老子는 '指導者는 智謀를 깊숙이 감추고 있기 때문에 겉으로 보면 바보같이 보인다. 이것이 指導者의 理想的인 모습이다.'라고 말했다.
이처럼 指導者의 모습을 하나의 策略으로 使用하는 것을 말한다.
28. 第 28 計 ~ 上屋抽梯 (지붕위에 올려놓고 사다리를 치운다)
● '허술하게 보여 적을 끌어들인 後 先後發 部隊의 허리를 짤라 包圍 殲滅하는 策略이다. 强한 相對를 誘引할 때는 이 手法으로, 相對를 誘引함에는 智慧와 달콤한 미끼와 周到綿密한 準備가 없으면 成功하지 못한다.
29. 第 29 計 ~ 樹上開花 (나무 위에 꽃을 피운다)
● 깃발이나 槍 ,劍 ,鼓 ,꾕과리 等으로 이쪽의 兵力이 많은 것처럼 꾸미는 策略이다. 敵은 勿論이고 同盟國 들에게도 信賴感을 주기 때문에 主導權을 잡기 爲한 手段으로 兵力이 小數이거나 弱勢일 때 자주 使用되는 手法이다.
30. 第 30 界 ~ 反客爲主 (손님의 立場으로부터 차츰 主人의 자리를 차지하는 策略이다)
● 이러한 策略을 成功시키려면 차근차근 段階를 밟아서 한 걸음씩 實行하지 않으면 안 된다.
燥急하게 설침은 失敗하기 十常八九다.
★ 第 6 章 (敗戰의 計)
31. 第 31 計 ~ 美人計 (勢力이 强한 敵將의 마음을 美人을 利用해 巧妙히 꾀어내는 手法이다)
● 萬一 相對가 英特한 사람이면 計策을 세워 意欲을 喪失케 한다.
將軍과 部下들의 意欲을 꺾으면 相對는 저절로 破壞된다. 이 策略의 核心은 相對의 마음을 딴 곳으로 돌리는 데 있다.
相對의 마음을 빼앗으려면 絶世佳人이라야 可能하다.
32. 第 32 計 ~ 空成計 (城을 비우는 策略)
● 三國志에 諸葛孔明이 '空城計'를 利用하여 司馬仲達의 大軍을 退却시킨 場面이 나온다. 이 이야기는 仲達의 大軍이 攻擊해 왔을 때 孔明은 城門을 모두 열어 놓고 自身은 道士 차림으로 樓閣에 올라 閑暇롭게 거문고를 타면서 敵軍이 오길 기다렸다.
이것을 본 仲達은 '저 꾀많은 孔明이 어딘가에 伏兵을 숨겨놓았을 것이
틀림없다'고 判斷해 軍士를 撤收시켰다.
일부러 無防備 狀態인 양 보여 敵의 判斷을 흐리게 하는 戰略인데, 29計인 '樹上開花'와는 反對 心理를 利用한다.
敵에게 露出되면 돌이킬 수 없이 목숨을 犧牲시키는 計策 中의 計策이다.
그렇기 때문에 相對도 얼떨결에 그 術策에 넘어가고 만다.
33. 第 33 計 ~ 反間計 (敵의 諜者를 逆利用하는 策略이다)
● 相對方 諜者에게 逆情報를 흘려서 相對를 混亂케하는 手法으로 두 가지 方法이 있다. 하나는 諜者를 買收하거나, 다른 하나는 모른척 故意로 거짓情報를 흘리는 方法이다.
어느 方法을 選擇하든지 힘들이지 않고는 勝利를 거둘 수 없다.
34. 第 34 計 ~ 苦肉計 (自己 몸을 傷處내는 策略)
● 三國志에 赤壁大戰은 너무도 有名 하다.
曹操와 周瑜의 對決에서 周瑜가 쓴 戰略으로 大將 黃蓋와 秘密裏 苦肉策을 쓰기로 謀議하고 黃蓋는 周瑜와 사이가 나쁜 것처럼 所聞을 냈고, 作戰會議에서 黃蓋가 降伏을 强하게 主張하다 大怒한 周瑜의 命으로 棍杖 一百대를 맞고 살점이 터지는 等 큰 傷處를 입었다. 그는 治療를 받던 中 어느날 夜陰을 틈타 曹操에게 歸順하였다. 黃蓋는 周瑜와 約束한데로 風向이 바뀌는 날에 먼저 曹操의 戰鬪艦隊에 불을 질렀다. 이를 信號로 周瑜의 軍士들이 火攻을 퍼붓자 曹操의 軍士는 큰 混亂에 빠졌고 曹操는 겨우 목숨만 건져 逃亡가는 慘敗를 當했다.
여기서 黃蓋가 曹操를 감쪽같이 속이기 爲해 自己 몸을 傷處내는 策略이 바로 '苦肉計'이다.
이와 같은 策略은 옛날부터 戰爭 中에 使用된 적이 많았고, 그 中에는 妻子며 寵愛하는 臣下를 犧牲시킨 例도 가끔 있을 만큼 勝負에 對한 執念이 대단했다.
35.第 35 計 ~ 連環計이다.
● 赤壁大戰에서 曹操가 大敗한 理由는 魏나라의 배들이 쇠사슬 고리에 連結되어 있어 自由롭게 움직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策略은 蜀나라의 軍師 龐統이 생각해 낸 것인데 먼저 敵의 起動을 制壓한 後, 第2, 3의 計略을 驅使하여 强한 敵을 擊破하는 策略이다.
이는 한 番의 勝利를 넘어 두 가지 以上의 策略을 混合하여 敵을 滅하는 것이다.
36. 第 36 計 ~ 走爲上 (도망가는 것을 上策으로 삼는다)
● 이는 '三十六計 줄行廊이 第一이다.'는 말을 낳은 最終 計略이다. 兵法에서는 狀況에 따라서 일부러 後退하는 것도 不辭한다고 나와 있는데 이 또한 兵法의 鐵則이다.
孫子에도 '兵力이 劣勢이면 물러나고, 勝算이 없으면 싸우지 않는다'고 쓰여져 있다. 사람이 죽으면 勝利도 敗北도 없는 것이다. 不利할 때 一旦 退却하면 戰力을 補完하여 다시 싸울 수 있기 때문에,
그런 意味에서 보면 勇氣있게 後退할 줄 아는 사람이야말로 참다운 勇氣를지닌 指導者라고 할 수 있겠다.
🍎 三餘讀書 , 三余读书
(冊을 읽기에 좋은 세 가지 餘暇. 餘裕 있는 時間을 잘 活用하여 讀書하는 것을 말한다)
董遇는 後漢 末 사람으로 가난한 生活을 하면서도 工夫에 熱中하여 黃門侍廊 벼슬에 올라 獻帝의 글工夫 相對가 되었다. 한때는 丞相이었던 曹操의 疑心을 받아 寒職으로 쫓겨난 적도 있었지만, 魏나라 明帝 때에는 侍中, 大司農 等의 벼슬에까지 올랐다. 그는 老子와 左傳에 注를 달았는데, 特히 左傳에 對한 그의 註釋은 唐나라 時代까지 幅넓게 읽혔다고 한다. 董遇의 名聲이 높아지자 많은 사람이 그에게 글을 배우겠다고 몰려들었다. 하지만 그는 선뜻 가르치려고 하지 않고 “마땅히 먼저 百 番을 읽어야 한다. 百 番 읽으면 그 뜻이 저절로 드러난다.”고 말했다.
「董遇를 좇아 배우려는 者가 힘들게 사느라 冊 읽을 겨를이 없다고 하자, 董遇는 “세 가지 餘暇만 있으면 冊을 充分히 읽을 수 있다.”고 對答했다. 어떤 사람이 세 가지 여가의 뜻을 묻자 董遇가 對答했다. “겨울은 한 해의 餘暇이고, 밤은 하루의 餘暇이고, 내리는 비는 한때의 餘暇이다.”
(從學者云, 苦渴無日. 遇言, 當以三餘. 或問三餘之意. 遇言, 冬者歲之餘, 夜者日之餘, 陰雨者時之餘也.)」
ㅡ다음
이 이야기는 《三國志 · 魏書 王肅傳》에 《魏略》을 引用한 裵松之 注에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