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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6장
45 그리고 나서 곧 주께서 제자들을 재촉하여 배에 타게 하시되, 먼저 벳새다로 가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그 동안 주께서는 무리를 흩어 보내시더라.
46 그들을 보내신 후, 주께서는 따로 기도하러 산으로 가시더라.
47 저녁이 되니 배는 바다 가운데 있으나, 주께서는 육지에 홀로 계시더라.
48 그때 바람이 거슬러 불므로 주께서는 제자들이 노 젓느라 애쓰는 것을 보시고 밤 사경쯤 되어 바다 위를 걸어 제자들에게로 와서 그들을 지나쳐 가려고 하시더라.
49 그러나 그들은 바다 위로 걸어오는 그를 보고 유령인가 생각하여 소리지르니
50 이는 그들이 모두 주를 보고 불안해 함이더라. 그때 주께서 곧 그들과 말씀을 나누셨는데, 말씀하시기를 “기운을 내라. 나니 두려워 말라.”고 하시고
51 그들에게로 가서 배에 오르시니 바람이 그치더라. 그러자 그들은 속으로 너무 놀라서 기이히 여기더라.
52 그들이 빵의 기적도 이해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그들의 마음이 완악해진 연고니라.
무리가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들을 수거하자 땅거미가 졌다. 예수께서는 배편으로 제자들을 갈릴리 서편 벳세다 해변으로 먼저 보내셨다(눅 9:100 주석을 해당 주석서에서 보라). 주께서는 제자들 뒤에 남아 "기도하러 산으로" 가셨다(46절).
우리가 보고 있는 이 본문에는 그리스도의 재림 예언이 함축되어 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기적적으로 양식을 공급받고 나서 48절에서는 주께서 돌아오신다. "산"은 모형적으로 문자적 산, 즉 천상의 시온산이다(히 12:22-24). 현재 주께서는 저 위에서 그의 제자들, 곧 지상에 있는 그리스도의 몸(롬 8:34)을 위해 기도하고 계시며 대환란 때는 유대인들을 위해 기도하실 것이다(히 7:25).
앞서 1:16-17에서 설명했듯이 주께서 재림하실 때 그는 하늘들 위에 있는 물층을 통과해서 내려오실 것이다. 현재 제자들은 "바다 가운데"(47절) 있다. 이것은 우리 성도들이 창공 아래의 물과 위의 물 사이에 놓여 있는 상황을 모형적으로 보여준다.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 때 홍해를 건넌 것도 그것의 모형이다(고전 10:1-2).
여러분은 왜 대부분의 성경 지도들이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이 바다를 건넌 지점을 홍해 대신 "갈대 바다"에 적용하는지 아는가? 그렇게 하는 자는 자신이 알든 모르든 피의 대속을 부정하고 있는 것이며 마귀의 인도를 받고 있는 것이다.
우리를 위한 피의 대속을 이루신 다음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피로(피를 갖고 들어가신 게 아니라 피를 통해)"(히 9:12) "하늘"의 "실물" "성소"(히 9:24)에 들어가 계시다. 주께서 깊음을 통과하실 때 알파 드라코니스 별자리 북쪽에 있던 깊음은 하나님의 영원한 피로 붉게 물들었는데 그 피는 십자가 사건 이전에 주의 몸 안에 흐르던 피였으며(행 20:28) 그래서 깊음은 홍해가 된 것이다. 모세가 이집트에서 물을 피로 바꾼 사건과 대환란 중 나타난 모세가 다시 그런 이적을 행하는 것은 우주적 홍해의 그림자이다(계 8:8, 16:3-4). 그리스도께서 베푸신 첫 번째 공개적 기적이 물을 피로 바꾸신 것이 그 이유 때문인데 그 사건도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예표한다(요 2:1-11). 따라서 이 계시를 유월절 어린양과 적용하면 양을 죽여서 그 피를 문의 "양쪽 기둥"에 뿌릴 뿐 아니라 "문 위"에도 뿌리는 이유가 설명된다. 따라서 지구상에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은 문자적으로 "보혈 아래" 놓여 있는 것이다. 또한 여러분에게 그리스도의 보혈을 영적으로 적용하면 그것은 여러분이 영원하신 하나님의 실제적인 피(계 1:5)로 씻겨진 그의 지체라는(고전 12:13; 엡 5:30) 것을 입증한다.
더 자세한 연구를 필요로 하면 히브리서 주석서의 9:11-14 주석을 참고하라.
48절: "그때 바람이 거슬러 불므로 주께서는 제자들이 노 젓느라 애쓰는 것을 보시고." 그러므로 여러분이 "바다 가운데" 같은 이 세상에 있을 때 크리스찬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위해 "애쓰고" 있다면 그것은 좋다. 여기서 "toil"(애쓰다)이라는 단어는 "고된 육체 노동"을 가리키는 말이다. 바울은 "labour"(수고)라는 단어를 선호했다(고전 15:58; 고후 5:9).
더 나아가 제자들의 수고는 전투를 치르는 것과 같았다: "바람이 거슬러 불므로." 그래서 바울은 자신의 "동역자"를 "전우"(빌 2:25)라고도 불렀다. 구식 크리스찬들은 "전투하는 교회"(the Church Militant)라는 표현을 쓰곤 했는데 그것은 지상에 있는 그리스도의 몸이 세상과 육신, 그리고 마귀와 싸우고 있기 때문에 붙인 표현이다. 또한 그들은 "승리한 교회"(the Church Triumphant)라는 표현도 썼는데 그것은 지상 사역을 끝내고 하늘에서 휴식하는 성도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밤 사경쯤 되어 바다 위를 걸어 제자들에게로 와서", 이것은 재림의 시점을 계시한 부분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재림을 어떤 사람이 자기 종들에게 과업을 남겨두고 "자기 집을 떠나 멀리 여행"하는 것에 비유하셨다(13:34). 그리스도께서 남겨두신 종들에게 시키신 일들은 이러하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그 집주인이 언제 올는지, 저녁일는지[첫째 경점], 밤중일는지[둘째 경점], 닭이 울 때일는지[셋째 경점], 아니면 아침일는지[넷째 경점]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라"(막 13:35).
동일 본문인 눅 12:38에서는 이 문제를 매우 명확하게 다루고 있다:
"또 주인이 제이경이나 제삼경에 올지라도 그렇게 하고 있는 종들을 보리니 그런 종들은 복이 있도다."
이것은 의심의 여지 없이 그리스도의 재림을 다루는 문맥이다.
"그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너희가 생각지 않은 시간에 인자가 오리라.”고 하시더라"(눅 12:40).
그렇다면 본문 막 6:48에서는 주님이 오실 "경점"이 어느 경점인지를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밤 사경"에 주께서 오실 것이다. 막 13:35에 따르면 그것은 "아침" 경점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아침 해가 뜨는 것으로 비유된다. 말 4:2에서 주의 날에 대해 말씀하기 시작하고(말 4:1) 2절에서는 "그러나 내 이름을 두려워하는 너희에게는 의의 태양이 그의 날개에 치유를 가지고 솟아오르리니"라고 말씀한다. 베드로가 그리스도의 재림의 모형인(막 9:1) 변형산 사건을 설명할 때 그는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벧후 1:19)라고 말한다. 여러분은 같은 내용을 삼하 23:4; 사 60:1-2, 19-20; 호 6:3; 시 19:4-5, 89:36; 그리고 마 13:43에서 찾을 수 있다.
그렇다면 비유적으로 교회 시대는 밤에 해당하는 것이다. 여러분이 재림의 시점을 알고 싶다면 경점들에 관한 성경의 일곱 체계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정의내리신 의미대로 추적하면 되는데 그러면 여러분은 재림의 시점에 대한 많은 힌트를 얻을 것이다. 앞서 2:27-28을 주석하면서 나는 안식일이 천년왕국의 안식에 대한 모형이라고 설명했었다. 따라서 벧후 3:8에서 천년왕국을 정의내린 대로 여러분이 창세기 1장부터(B.C. 4004) 6,000년을 계산하면 그때가 나온다. 그렇게 계산하면 대략 A.D. 2000년대 초가 천년왕국의 시작이 된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는 서기 2000년에 재림하지 않으셨는데, 이 대목에서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역사의 일부 연수들을 계산하지 않으신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욥 3:6). 그 점에 대한 예를 찾고자 하면 마 1장으로 가 보라. 마 1:8에서 성령께서는 왕들의 계보에서 세 왕의 세대를 누락시키셨는데 이는 그 유다 왕들이 아합의 죄를 받아들여 배교했기 때문이다(마태복음 주석서를 보라).
결국 사도행전 2장에서 교회의 휴거까지 걸리는 기간은 밤의 경점들에 비유될 수 있다(요 9:ㅣ4-5 참고. 살전 5:10). 밤의 경점들은 넷으로 나뉘는데 각 경점은 세 시간씩이다(막 13:35 참고. 요 11:9). 아침 경점은 새벽 세 시에서 여섯 시까지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는 시대는 시계의 초침이 새벽 여섯 시에 거의 근접한 때이다. 이제 여러분은 좌석 벨트를 채우고 테이블을 위로 접은 다음 이륙에 대비하여 잘 앉아 있어야 한다!
4:8로 돌아와서: "그들을 지나쳐 가려고 하시더라." 이 설명이 얼마나 차분한 투로 되어 있는지 보라. 4:35-41에서처럼 예수께서는 태풍을 신경쓰지 않으셨다. 주께서는 제자들을 먼저 호수 "건너편"으로 보내셨고 그들이 도착할 때 해변에서 만날 수 있는 속도로 바다를 걸어가셨다.
예수께서 이와 비슷하게 행동하신 사례가 있는데 그것은 주의 부활 때였다. 눅 24장에서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를 만나셨는데 주께서는 자신의 정체를 그들에게 감추셨다.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고난과 영광에 대해 구약 성경 공부를 시키신 이후에 주께서는 "그는 더 가실 것같이 하시더라"(눅 24:28). 주께서는 그 제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얼마나 갈급한지, 또 그들이 주님과 교제를 더 갖기를 원하는지 확인하고자 하셨다.
본문 막 6:48에서 예수께서는 자신이 제자들의 배를 지나쳐 바다 위를 걸어가시는 모습을 굳이 감추려 하지 않으신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왜 제자들이 주를 배 안으로 맞아들이는 반응을 주께서 기대하지 않으셨는지 궁금할 것이다.
가장 칠흑 같이 어둔 밤, 풍랑이 이는 바다에서 제자들은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가시는 것을 보았고 그래서 그들이 유령을 보았다고 생각한 것도(49절) 무리가 아니었다. 그들은 공포로 인해(50절) 부르짖었다(49절).
다시 한번, 제자들이 보인 이 반응이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그들이 보고 나타낸 반응과 얼마나 유사한지 보라(앞서 주석을 보라). 눅 24장에서 예수께서 다락방에서 그들에게 보이셨을 때 그들은 "놀라고 무서워" 했으며"불안해" 하였는데 이는 그들이 "어떤 영을 보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눅 24:37-38). 주께서는 여인들 앞에 나타나셨을 때 그들에게 "두려워 말라"(마 28:10)고 말씀하셨다.
이 장면은 주의 재림과 밀접한 상관이 있다.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그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것인데(행 1:11) 주께서는 먼저 자기 몸의 지체들을 하늘 본향으로 데려가실 것이고(살전 4:16-17) 그 다음 영광 가운데 오셔서 마귀를 쫓아내신 후 지상 왕국을 수립하실 것이다(계 19:11-21; 슼 14:1-4).
51절 주석에 관해서 우리는 4:39-41에서 다뤘으니 그곳을 보라. 막 4장에서보다 본문의 상황에서 제자들이 더 놀란 이유는 예수께서 심지어 제자들과 한 배에 계시지도 않았던 데 있다. 주께서는 폭풍우를 잠잠케 하셨을 뿐 아니라 물 위를 손쉽게 걸어오신 것이다. 여러분은 이 일이 엄청난 사건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은사주의 사기꾼들이 아무리 요 14:12을 인용하고 주장한다 할지라도 그들 가운데 이런 일을 감히 시도하는 자는 한 명도 없다.
52절은 경악할 정도로 이해가 되지 않는 내용이다. 제자들은 이 모든 기적들을 본 후 "속으로 너무 놀라서 기이히"(51절) 여겼다. 그들은 예수께서 문둥병자와 절름발이를 고치시는 것, 마귀로 가득한 남자들을 구원해 주신 것, 자연계를 다스리는 권능을 보여주신 것, 그리고 죽은 소녀를 살리신 것과 "허공"으로부터 음식을 창조하시는 장면을 이제 막 보았다. 여러분을 그 제자들의 자리에 대입시켜 놓고 생각해 보라. 예수께서 그 다섯 덩이의 빵과 두 마리의 물고기를 열두 제자들에게 나눠주셨을 때 그들은 기다리는 줄의 맨 앞 사람에게 충분히 나눠주기도 전에 음식이 떨어졌어야 맞다. 어떻게 그런 기적이 가능했는가? 광야에서 2백 만명의 유대인들을 40년 동안 매일같이 먹이신 그 분께서 빵과 조리된 생선을 창조하셔서 초여름의 이른 저녁 10,000-15,000명의 사람들을 먹이신 것이다. 예수께서 행하신 기적들 중에 제자들을 이보다 더 놀라게 할 만한 것은 없었다.
그렇다면 문제가 무엇이었는가? "그들의 마음이 완악해진 연고"(52절)였다. 여기서 "완악해진"이라는 의미는 파라오 같은 불신자의 완악함을 뜻하는 게 아닌데(출 8:15, 19) 이는 그 제자들이 그리스도의 가장 가까운 추종자들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들은 이후에도 4,000명을 먹이는 기적을 한번 더 경험했다(8:17-21). 그들이 완악했기에 그들은 주께서 자신의 부활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도 믿지 않았다(16:14). 민수기 13-14에서 유대인들은 "믿음 없는 악한 마음"을 품고 "죄의 속임수"에 빠져(히 3:12-13) 그들의 마음을 완악하게 했다. 주 예수께서는 자신의 가장 가까운 제자들조차도 인간의 악한 본성을 가지고 있음을 당연시하셨다(마 7:11; 눅 11:13). 역사상 가장 위대한 크리스찬이었던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내 안에 (곧 내 육신 안에는,) 선한 것이 거하지 않는 줄을 내가 아노니"(롬 7:18). 크리스찬이들이여, 그대들이 마음과 생각에 파수꾼을 세우지 않으면 여러분은 구원받지 못한 죄인이 짓는 어떤 죄도 지을 수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 자신이 파송하여 회개를 전파하고 마귀들을 쫓아내며 병자들과 완악한 마음을 가진 자들을 치유하게 임무를 위탁하셨던 그 사도들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 요 12:37-40을 보라. 예수께서는 주를 믿지 않아 구원받지 못한 유대인들을 대하시는 것과 똑같은 자세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53 그후 그들은 바다를 건너서 게네사렛 땅에 이르러 해변에 배를 대니라.
54 그들이 배에서 내리자 사람들이 곧 주를 알아보고,
55 온 지방을 두루 뛰어다니니 주께서 계시다는 곳으로 병자들을 침상째로 메고 나아오기 시작하더라.
56 또 주께서 마을들이나 성읍들이나 시골이나 들어가시는 곳마다 그들은 거리에 병자들을 내려놓고 주의 옷자락만이라도 만지기를 주께 간구하더라. 주를 만지는 사람들은 다 온전해지더라.
"게네사렛"(53절)은 히브리어 지명인 "킨네렛"의 헬라어 발음이다. 그곳은 갈릴리 바다 서안에 위치한 납탈리 지파의 땅에 있는 성읍이었다(수 19:32, 35). 갈릴리 바다라는 명칭은 그 성읍의 이름에서 가져온 것으로 여러분은 성경에서 그 바다를 종종 "킨네렛 바다"(수 13:27)나 "게네사렛 호수"(눅 5:1)라 지칭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들이 배에서 내리자 사람들이 곧 주를 알아보고"(54절). 이것은 또다시 재림의 예표 장면이다. 그리스도께서 대환란 끝에 하늘에 나타나시면 적그리스도의 박해와 공격으로부터 살아남은 지상의 모든 유대인들이 공중에 나타나신 예수를 보고 그 분이 메시아이심을 알아차릴 것이다. 그리고 그 민족의 남은 자들 전체가 하루만에 회심할 것이다.
"또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의 거민들 위에 은혜와 간구의 영을 부어 주리라. 그러면 그들은 그들이 찔렀던 나를 쳐다볼 것이며, 그들이 그를 위하여 애통하리니, 마치 어떤 사람이 자기 외아들을 위하여 애통함같이 할 것이요, 그들이 그를 위하여 비통에 잠기리니 마치 어떤 사람이 자기 첫아들을 위하여 비통에 잠기듯 하리라"(슼 12:10).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 기록된 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와서 야곱에게서 경건치 아니한 것을 제거하리라"(롬 11:26).
55-56절은 주석이 필요 없다. 이런 장면은 우리가 마가복음을 읽어나가면서 계속 나타나는 일반적 모습이다(1:32-34, 45, 2:1-3, 3:7-10, 5:24-29). 56절에서 예수께서는 "성읍들"(큰 도회지들), "마을들"(오늘날 교외라고 불리는 곳), 그리고 "시골"(1:45, 6:31-32의 "외딴 곳"과 같은 의미)에서 사역하셨다. 바울은 페스토와 아그립파 앞에서 "이 일이 한쪽 구석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행 26:26)라고 말했다. 내가 감히 장담할 수 있는 것은 예수께서 공사역을 끝마치셨을 무렵 갈릴리와 유대 전 지역에 걸쳐서 예수에 관해 모르는 유대인이 전혀 없었으리라는 사실이다.
마가복음 7장
1 그후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몇 사람이 함께 주께로 와서
2 제자들 가운데 몇 사람이 더러운 손, 곧 씻지 아니한 손으로 음식을 먹는 것을 보고 흠을 잡더라.
3 이는 바리새인들이나 모든 유대인이 장로들의 전통을 지키어 자주 손을 씻지 않고서는 먹지 아니하기 때문이라.
4 또 시장에서 돌아온 후 씻지 않고는 먹지 아니하며 그 외에도 여러 가지 받아서 지켜 온 것이 있었으니, 잔과 단지와 놋기명을 씻고 식탁을 닦는 것이라.
5 그때 그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주께 묻기를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따라 행하지 아니하고 씻지 아니한 손으로 음식을 먹나이까?”라고 하니
6 주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말씀하시기를 “너희 위선자들에 관하여 이사야가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된 바와 같으니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여도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7 그러면서도 사람들의 계명들을 교리들로 가르치니, 그들이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8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들의 전통을 지키니, 단지와 잔을 물로 씻는 것과 이와 같은 여러 가지 다른 일을 자행하는도다.”라고 하시니라.
9 또 주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 자신의 전통을 지키기 위해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쉬 버리는도다.
10 모세가 말하기를 ‘네 아버지와 네 어머니를 공경하라.’고 했고, 또 ‘아버지나 어머니를 저주하는 자는 죽이라.’고 하였거늘
11 그러나 너희는 말하기를 ‘어떤 사람이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말하기를 나로 인하여 유익을 받게 될 것은 무엇이든지 코르반, 즉 예물이라고 하면 그만이라.’고 해서
12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더 이상 아무것도 하지 아니하여도 무방하다.’ 하였으니
13 너희는 너희가 전수한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기하느니라. 또 이와 같은 많은 일을 자행하고 있도다.”라고 하시더라.
다시 한번 예수께서는 당시의 학자 연합, 곧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충돌하신다(2:16, 24, 3:6을 보라). 이번에 그들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먹는 것에 불만을 토로한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마음 속에 더러움과 사악함을 숨겨두고서 사람들의 겉이 얼마나 깨끗한지만 관심을 보였다(마 23:25). 요 18:28에서 그들은 유월절을 정결함 가운데 지키고자 빌라도의 법정에 들어가려 하지 않을 정도로 결벽증을 보였는데 그와 동시에 그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살해하려고 한 공모자들이었다(행 7:52).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손은 더러울지라도 깨끗한 마음을 지녔으며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손은 깨끗하나 더러운 마음을 품었는지 모른다. 빌라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폭도들에게 넘겨 죽이게 한 자신의 죄를 물로 씻어내려 했지만(마 27:24) 그것은 효과가 없었다(행 4:27-28). 여러분은 물로 자신의 도덕적 더러움과 죄를 씻을 수 없다(벧전 3:21 주석을 해당 주석서에서 보라).
3절에서 여러분은 손을 자주 씻는 실행이 성경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전통에서 왔음을 알게 된다. 손을 씻는 것은 레위기 율법에 기인한 것이 아니었고(이를테면 레 15장을 보라) 하나님의 말씀에 무언가를 첨가한 전통이었다. 이것이 크리스찬이 경계해야 하는 세 가지 비성경적인 것들 중 하나인데 그것은 "사람의 전통"(골 2:8)이다. 나머지 두 가지는 "철학"(골 2:8)과 "과학"(딤전 6:20 - 여러분이 성경 대신 과학의 말을 믿으라는 뜻으로 새로운 역본들에서는 이 단어가 다른 것으로 교체되었다)이다. 이 세 가지는 성경에 대한 여러분의 믿음을 파괴시키기 위해 고안된 것이며 그것들 전부가 사탄적이다.
이 부문에서 언제나처럼 마호메트는 자신의 독자적인 것을 제시하지 못하고 유대 탈무드 전통을 모방한다. 모슬렘은 기도 전에 팔꿈치까지 손을 씻고 발목까지의 발을 물로 씻어야 한다. 그가 병들거나 여행 중이거나 화장실에서 나왔거나 혹은 여인과 접촉했다면(마호메트는 자신이 기도하기 전에 항상 모든 아내들과 성관계를 가졌다고 말했는데 그가 가장 총애했던 아내인 아이샤 - 마호메트는 그녀가 여섯 살일 때 신부로 삼았고 아홉 살 때 합방했다 - 에 의하면 마호메트는 주술에 걸린 자였다) 알라가 그를 "정화시킬 수 있게" 온 몸을 씻어야 한다. 근처에서 물을 찾을 수 없으면 "깨끗한 흙"(그게 정확히 무엇이든지)으로 자기 얼굴과 손을 문질러서 알라가 그 모슬렘에게 온전한 호의를 베풀 수 있을 정도로 자신을 "정결케" 만들어야 한다. 여러분은 그 내용을 코란의 수라 5:6에서 볼 수 있다.
이 헛소리에 더해서 이슬람 전통에는 아침 기도를 하기 전마다 코로 물을 세 번 흡입해서 밤새 콧속에 들어와 잠든 사탄을 몰아내는 의식도 있다(하디스, 부카리, Vol. I, no. 462). 부카리 하디스 각주, Vol. IV, no. 516에는 모슬렘이 이것을 의무적으로 믿어야 한다고 써 있다. 알라가 그것을 코란에 기록하는 것을 까먹었다 할지라도 모슬렘들은 그 전통을 마호메트의 명령으로 알고 지켜야 한다. 이 문제에 관해 참고할 수 있는 성경 본문은 행 15:9; 딛 2:14; 히 9:14; 벧전 1:22; 그리고 요일 1:7이다.
그 전통은 문맹이고 간질병 걸린, 잔인하고 복수심에 가득 찬 마귀들린 한 명의 색정광 남자로부터 나온 것에 다름아니다.
그렇다면 주 예수께서는 그러한 "전통들"에 대해 어떻게 느끼셨는가? 6절: "너희 위선자들에 관하여 이사야가 잘 예언하였도다..." "당신의 제자들은 왜 저녁 식사 전에 손을 씻지 않습니까, 예수여? 그것은 전통입니다." "너희가 어떤 자들인지 내가 알려주겠다, 너희는 위선자 집단이다." 성경의 예수 그리스도는 그렇게 말씀하는 분이었다. 그분은 스튜어트 커스터나 조엘 오스틴이 말하는 예수가 아니다.
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어떤 자들인가? 그들은 가식적인 자들, 곧 배우들이다. 위선자란 그런 의미이다. 그들은 실제는 그렇지 않으면서 훌륭한 신앙인을 가장하여 행동했다. 그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으면서 그렇게 하는 듯이 가장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여도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그들은 마음과 입술이 따로 노는 자들이었다. 경험적 원칙에 의하면 이렇다: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이 말하기 때문이라"(마 12:34). 일반적으로 사람의 마음에 있는 것이 그의 입술로 나오는데 그 종교 지도자들은 가장하고 연극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말씀하신 것을 안다고 주장했지만(요 9:29) 그들은 모세가 알려준 하나님에 대해 무지했다(요 5:45-46). 그들은 아브라함이 진리에 대해 취했던 태도와 전혀 상반된 행동을 하면서도 자기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내세웠다(요 8:39-40).
이런 경향은 지금도 바뀌지 않았다. 바울은 "마지막 날들"에 대해 쓰면서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일들이 있을 것이라 말했다(딤후 3:1, 5). 그는 또 다른 무리에 대해 이렇게 썼다: "그들이 하나님을 안다고 고백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나니, 가증한 자요, 불순종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에 버림받은 자들이라"(딛 1:16).
막 7장으로 돌아와서: "그러면서도 사람들의 계명들을 교리들로 가르치니, 그들이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7절). 그리스도의 이 말씀을 해석하기에 앞서 변개된 현대 역본들이 본문의 "교리들"이라는 단어를 어떻게 다루는지 보자. 그들은 마가복음에서 앞서 "교리"라는 단어를 "가르침"으로 세 번 수정했었는데, 여기 본문의 경우 "가르침들로 가르치니"(teaching as teachings)라고 쓰는 것이 너무 어처구니 없다고 생각했는지 여기서는 교리라는 단어를 그냥 놔두었다. 이것이 ASV, NASV, RSV, ESV(RSV을 "보수주의자"의 입맛에 맞춰 재번역한), NRSV, 그리고 NKJV의 실상이다. NIV은 여기서도 "가르침"이라는 번역을 고수하면서 말이 될 수 있게 구절 전체를 손봐 버렸다. NIV은 이 구절에서 그리스도의 말씀을 의역해 놓았는데(그들은 그것을 "역동적 일치"라 부르면서 여러분을 속여 넘기려 한다) 이렇게 해 놓았다: "their teachings are merely human rules"(그들의 가르침들은 인간의 규칙들일 뿐이다).
달리 말하면 여러분이 6절에 나온 "위선자들" 부류를 주변에서 찾고자 한다면 성경을 고치고 성경을 거부하는 근본주의자들과 보수주의자들을 빼놓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그 자들은 킹제임스 번역자들이 번역 과정에서 단어들을 "획일화"시키지 않은 것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면서 정작 그들 자신은 필요할 때마다 귀에는 귀걸이 코에는 코걸이식 자의적 번역을 하는 것이다. 그들은 위선자들이다!
7절은 성경 외적 가르침들에 대해 비판하는데 그것은 단지 탈무드 유대교 전통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카톨릭, 프로테스탄트, 근본주의와 복음주의 신학교 교수들과 교사들, 은사주의자들, 몰몬교도들, 여호와의 증인들, 제7일 안식교도들, 크리스찬 사이언스 추종자들, "목적이 인도하는 삶", "구도자 예배"에 참여하는 자들, "이머전트 기독교"("Emerging Church), 그리고 모슬렘 같은 자들에게도 해당된다. 성경의 권위를 인간의 권위로 대체하는 자들(조셉 스미스, 초기 교부들, 엘렌 G. 화이트, 메리 베이커 에디, 교회 협의회, "학자들의 공감대", 하디스, 찰스 테이즈 러셀, 브링엄 영, "초기 기독교도들", 교황들, 대통령들, 대학 총장들, "선하고 경건하며 헌신된" 사람들에게도 이 구절의 비판이 적용된다.
"그들이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섬기는 척 하기 위해 교회에 출석하는 것은 자신에게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여러분이 예배와 종교 의식에 참여할지라도 "사람의 계명들"을 지키기 위해 그렇게 한다면 아무 의미가 없다. 왜 그런가? 이는 "사람들의 전통"이란 것이 사탄의 지배 하에 있는 잃어버린 세상의 기본적, 근본적 원칙들("세상의 유치한 원리" - 골 2:8, 20-22)과 곧바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연인 본성의 방식과 속박을 포함한다(갈 4:3; 엡 2:2). 그것은 자기 의와 자기 만족의 체계이며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는 계시와 동떨어져 있다.
그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에 전통을 첨가함으로써 하나님의 권위를 전통 아래 두려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자기들의 의를 세우려"(참고. 롬 10:3) 했다. 그것은 시작부터 끝까지 사탄에 의해 주도되는 풍조이다. 창세기 3장에서 마귀는 이브가 하나님의 말씀에서 삭제하고(그녀는 하나님께서 원래 말씀하신 데서 "마음대로"를 삭제했다 - 창 2:16 참고. 창 3:2) 그녀가 하나님의 말씀에 첨가하도록(그녀는 원래의 하나님 명령에 "만지지도 말라"를 첨가했다 - 창 2:17 참고. 창 3:3) 유도했다. 그것도 통하지 않으면 마귀는 그 다음 단계로 하나님의 말씀을 문맥과 상관없이 억지로 해석하도록 만든다.
8-9절에 여러분은 "하나님의 계명" - 성경을 달리 표현한 말(시 19:7-8, 119:6, 10, 19, 21, 32, 35, 47-48 등) - 이 사람의 전통 앞에서 무시와 배척을 당하고 있음에 주목하라. 이것이 중요한 것은 성경 대신 전통을 최종 권위로 제시하는 카톨릭 교회가 살후 2:15, 3:6을 이용해서 그들의 전통이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과 동등하다고(두 가지가 상충될 경우 전통에 우선권을 둔다는 뜻) 주장하기 때문이다. 물론 사도 바울이 언급한 전통들은 유아 세례, 로사리오 기도, 면죄부, 독신 사제 제도, 연옥, 화체설, 교황 수위권, 죽은 성도들에게 기도하는 것, 성물과 성화 숭배, 고해성사 등의 전통과 무관하다. 바울이 말한 전통은 성도가 일을 해서 생계를 유지하고 게으름을 피지 말라는 것(살후 3:10)이다. 또한 그가 말한 전통은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들과 장로들이 이방인 개종자들에게 음행과 흡혈(카톨릭 미사!), 그리고 목메어 죽인 것을 멀리 하라는 것(행 15:20)이었다. 또한 그 전통은 바울이 자기가 개척한 지역 교회들에게 가르친 율례들(고전 11:2)과 교리들(롬 16:17)이었다. 그 전통은 기록된 성경과 모순되어서는 안 되었다(딤후 3:15-17; 벧후 1:19-21). 여러분의 구주께서는 여러분이 하나님을 "영과 진리로"(요 4:24 참고. 고전 2:13; 요 17:17) 경배하고자 하면 "하나님의 계명"을 "사람들의 전통"보다 우위에 두라고 말씀하셨다.
이제 이하의 설명을 통해 여러분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철저히 "헛되다"고 말씀하신 교회가 어디인지 알게 될 것이다. 이 말들은 로마 카톨릭 교회의 공식 문서와 그 지도자들의 공식 발언에서 발췌한 것이다.
1876년 볼티모어의 대주교 제임스 카디널 기번스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 우리는 성경이 그 자체만으로는 우리의 믿음에 있어서 충분한 지침이 될 수 없다고 결론내릴 수 있는데, 이는 성경이 가장 중요한 문제들조차 그것들에 대한 분명하고 납득할 만한 대답을 질문자들에게 주지 못하기 때문이며 또한 성경은 구원을 위해 필요한 모든 진리들을 담고 있지도 않기 때문이다."(우리 선조들의 믿음, 요한 머피사, 1917, pg. 73).
이 발언은 뒤보이스라는 신부가 O Biblismi에 기고한 글이다(Para, 1921, pg. 96): "오늘날 우리(로마 카톨릭)는 1/10 만큼 성경에 근거하고 9/10는 전통에 따라 믿고 있다. 어쩌면 성경 안에 모든 진리들이 들어있지 않을 수 있다. 성경보다 전통이 더 위대한 것이다."
"피의 메리" 치세 기간 중 직을 수행한 로마 카톨릭의 마지막 캔터베리 대주교 레기날드 폴은 이런 말을 했다: "우리의 경배와 믿음은 전통에 근거하여 그 자체로 완전하다"(러셀과 콜린 스탠디쉬가 그들의 휴거와 적그리스도라는 책에 인용한 부분, Hartland Publications, 2004, pg. 161).
예수회의 헌터 신부라는 자는 그의 교리학 개론이라는 저서에서(Vol. I, pp. 153-155) 이렇게 썼다. "교회는 성경을 배제할 수도 있지만 전통은 배제할 수 없는데 이는 전통이 더 광범위한 것들을 다루며 우리에게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헨리 우즈는 우리의 가장 귀한 유산(1900, pg. 24)이라는 책에서 반종교 개혁에 연루된 예수회 멤버였던 로버트 벨라르민 추기경(1542-1621)의 다음과 같은 발언을 인용했다: "우리는 유서깊은 전통에 따라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 우리는 성경에 나오지 않는 많은 전통들에 대해서도 믿고 순종해야 한다."
성경의 원본만이 "영감으로 주어진 것"이라 믿는 근본주의자들의 전통은 여느 로마 카톨릭 전통만큼이나 사악한 것이다. 그들은 권위역본 성경을 밀어내기 위해 그 전통을 도입했다. 그 전통은 성경에서 성경 영감에 대해 어떻게 말씀하시는지와 무관하게 수립되었다. 성경의 "원본"만이 "영감으로 주어진 것"이 맞다는교리는 어떤 언어로 된 신구약의 어느 구절에도 나오지 않는다. 그 전통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자국어로 주신 성경을 거부하게 만들려고 발명된 것이다.
이제 10-12절에서 예수께서는 당대에 지켜지던 전통들 가운데 출 20:12, 신 5:16에 주어진 모세 율법의 계명, 또한 출 21:17, 레 20:9, 그리고 신 27:16에도 나타난 계명(또한 잠 20:20, 30:17을 보라)을 파괴하는 전통에 대해 지적하신다. 여러분은 주께서 하신 이 말씀이 그 바리새인들의 가장 아픈 구석, 곧 그들의 돈지갑을 찔렀음을 알지 모르겠다(딤전 6:10).
그것은 이렇게 설명할 수 있다: 어떤 아들이 자기 부모가 노년이 된 다음 봉양하는 데 들어갈 비용을 계산해 본 후 그 돈을 자기가 쓰고 싶은 탐심이 생겼다고 하자. 그는 랍비를 찾아가서 여호와께 대한 예물로 그 돈을 기탁한다. 부모를 봉양할 시기가 오면 그는 부모를 돌볼 돈이 "코르반", 즉 주께 바친 예물이라고 선언하면서 건드릴 수 없다고 한다. 그래서 부모가 죽을 때까지 자식의 지원을 받지 못함에도 그들의 아들은 하나님께 돈을 바쳤다는 명목 때문에 책임을 모면한다.
자, 구약에서 보면 이미 바쳐진 예물을 돌려받을 수 있었는데 그것에 대해 레 27장에 기록되어 있다. 기증자가 예물을 돌려받을 경우 바치도록 규정된 표준 수수료가 20%이다. 따라서 제사장들과 랍비들은 기증받은 예물을 그들의 소유로서 사용할 수 있고 기증자가 예물을 되찾아갈 경우 수수료를 받게 된다. 아들은 수수료를 뗀 나머지 돈을 돌려받지만 부모는 아들에게 정말 돈이 없다고 믿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이 비성경적 전통에 대해 위대한 비판을 남기면서 말씀을 끝내시는 것을 본다. 그 종교 지도자들이 "살아 있고 능력이 있"(히 4:12)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그렇게 완전히 무용하게 만들어 버리는지 우리는 알 수 있다. "너희는 너희가 전수한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기하느니라"(13절).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무효로 만들 수 있다. 카톨릭 전통, 프로테스탄트 전통, 근본주의 전통, 복음주의 전통, 그리고 침례교 전통이 이것에 해당될 수 있다. 성경과 상치되는 인간의 어떤 전통이든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높이는 자들이 성경을 읽을 때 그 말씀을 그들에게 무용한 것이 되게 만든다. "사람들의 계명"은 여러분을 "진리에서 벗어"나 그들에게 "귀를 기울이"게 만든다(딛 1:14).
14 그리고는 모든 무리를 불러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모두 내게 경청하고 깨달으라.
15 사람 몸 밖에서 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아무것도 그 사람을 더럽힐 수 없으나, 사람 안에서 밖으로 나오는 것들은 그 사람을 더럽히느니라.
16 누구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고 하시더라.
"경청하고 깨달으라"(14절). 이것은 단지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을 육신의 귀로 들으라는 명령이 아니라 이해하면서 들으라는 뜻이다. 16절의 "누구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는 말씀은 그런 뜻이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단지 듣기만 할 뿐 아니라 그 말씀을 사람의 말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으로 수용해야 한다(살전 2:13; 고전 2:13).
본문에서 주께서 말씀하시는 요지는 죄란 여러분 안에서 시작되는 것이지 밖에서 오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15절). 즉 어떤 사람이 자신을 더럽히는 어떤 것들을 행하고 있다면(음주, 흡연, 혹은 마약 복용) 그가 실제로 그 일들을 하기 전에 이미 죄로 더럽혀진 상태라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죄는 그것이 외적으로 표출되기 전에 이미 존재한다. 그 사람의 마음에서 마약을 거부하고 있다면 그는 그것을 몸에 주입하지 않을 것이다.
형제들, 죄의 뿌리는 우리들 자신이다. 외부적 유혹으로 인해 죄가 들어오는 게 아니라 우리들 마음 속에 이미 내가 이 죄를 지을까 말까 하는 선택지를 놓고 흥정을 벌이는 생각이 있다. 밥 존스 시니어는 이렇게 말했다. "죄로 인해 망가진 어떤 사람의 배후에는 기나긴 악한 생각의 과정이 있다." 달리 말하자면 어떤 사람이 자신의 외적 삶을 망치기 이전에 그는 죄를 놓고 내적 흥정을 하면서 그 죄를 지을 가능성을 즐기며, 또 죄에 대해 명상해 보고, 그 죄를 짓는 것을 고려하면서 계속 그 죄를 숙고하나닥 결국 그 죄를 행위로 표출한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한다. "마음은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악하니 누가 그것을 알 수 있으리요?"(렘 17:9).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의 생각의 모든 상상"에 대해 그것이 "계속해서 악할 뿐"(창 6:5)이며 사람이 "어려서부터"(창 8:21) 그런 존재라고 평가하신다. 달리 말하면 "사람의 태생적, 내재적 선"이 그의 "나쁜 환경"의 변수 때문에 변질된다는 가정은 사실이 아니다. 인간은 어린 아이 때부터 악한 존재이다(시 51:5).
미국 연방 교육 제도 하에서 아이들은 이런 이야기를 도통 들을 수 없는데 이는 그것이 "아동 학대"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여러분이 어린 아이들에게 인간은 원래 악하게 태어났기에 그들의 원초적 본성을 스스로 제어해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치면 연방 정부는 여러분이 아이들의 "심성"을 왜곡시키고 있다고 비난할 것이다. 그들은 호들갑 떨며 여러분에게 "하나님 맙소사, 아이들에게 그런 것을 가르치다니!"라고 하면서 "아이들은 자기를 표현할 줄 알아야 돼"라고 말할 것이다.
17 그후에 주께서 무리를 떠나 그 집으로 들어가시니, 제자들이 그 비유에 관하여 주께 묻더라.
18 주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도 그렇게 깨닫지 못하겠느냐? 무엇이나 밖에서 사람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그 사람을 더럽힐 수 없다는 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19 이는 그것이 사람의 마음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 배로 들어가서 뒤로 나오는 모든 음식은 깨끗하지 아니하냐?”고 하시더라.
20 또 말씀하시기를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 사람을 더럽히느니라.
21 이는 속에서, 즉 사람들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간음과 음행과 살인과
22 도둑질과 탐욕과 악의와 사기와 방탕과 악한 눈과 하나님을 모독함과 교만과 어리석음이기 때문이니,
23 이런 모든 악한 것은 속에서 나와, 그 사람을 더럽히느니라.”고 하시더라.
4:10에서처럼 제자들은 군중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개인적 시간에 그리스도께서 그 비유에 대해 주석해주시기를 기다렸다. 그들은 "그 비유에 관하여 주께 묻더라"(17절). 하지만 15절에서 주께서 하신 말씀은 전혀 비유가 아니었다. 1-16절로 돌아가서 본문을 다시 읽어보라. 거기에 비유라는 말이 한 번이라도 나오는가? 전혀 그런 내용이 없다.
제자들은 카톨릭이 성경을 해석할 때 겪는 문제와 동일한 문제를 갖고 있었다. 그들은 비유적인 말씀을 문자적인 것으로 혼동했고(요 6:51-63) 문자적인 말씀을 비유적인 것으로 혼동했다(마 16:18).
18절: "너희도 그렇게 깨닫지 못하겠느냐?"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화를 내셨다. 14절에서 "모든 무리를 불러"모으셨던 주께서는 "너희는 모두 내게 경청하고 깨달으라"고 말씀하셨다. 주께서는 모든 회중에게 그렇게 요구하셨는데 그들 중 가장 잘 깨달았어야 할 주의 제자들이 말씀을 전혀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이제 보면, 이 말씀 중에 나오는 더럽힘이란 하나님 앞에서 도덕적으로 더럽혀지는 것을 말하지 육체적인 지저분함을 뜻하는 게 아니다. 그것은 사람의 속이 더럽혀진 것을 말한다(20절). 사람이 먹는 음식이 그를 도덕적으로 더럽힐 수 없는 것은 "그것이 사람의 마음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19절)이다. 사람이 먹은 음식은 소화 기관에서 분해된 다음 배설 기관으로 나가면 끝이다.
19절의 "draught"(뒤)라는 단어는 "draught house"(변소, 왕하 10:27)의 축약형 표현이다. 그것은 옥외에 있는 변소를 뜻한다. 말하자면 여러분이 먹은 음식은 몸 안을 돌다가 변소에서 끝난다는 것이다. 눅 5:4에서는 같은 "draught"라는 단어가 다른 의미로 쓰였는데 거기서는 무엇을 "잡다, 낚아 올리다"의 뜻으로 쓰였다.
구약에 나온 하나님의 계명에 따르면 어떤 종류의 고기는 가증스럽고 불결해서 유대인들이 먹으면 안 되는 것으로 나오지만(레 11장) 그렇다고 그것들을 먹고 안 먹는 것이 그 당사자의 도덕성 문제는 아니었다. 식생활에 대한 율법은 주께서 유대인들을 이방 민족들과 나누기 위해 주신 것이었고 이방인들이 하나님께서 대속적 희생을 치르게 하신 독생자를 믿고 주께 나아옴으로 정결케 된 후에는 주께서 그 부정한 음식들을 정결케 하셨다(행 10장을 보라). 그래서 바울은 "내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또 확신하는 것은 아무것도 그 자체가 부정한 것은 없으나"(롬 14:14), 또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은 모두 좋은 것이요, 감사함으로 받으면 아무것도 버릴 것이 없으니"(딤전 4:4)라고 말한다.
무엇이 사람을 더럽힐 수 있는가? 그것은 "사람들의 마음"(21절)이다. 이것은 그 사람이 누구를 사랑하는가와 관련된 문제이다. 성경이 크리스찬에게 악한 세상 체제를 사랑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이유가 그것이다(요일 2:15 참고. 갈 1:4). 여러분이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그리고 생의 자랑을 추구한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다(요일 2:15-16).
예수께서는 "사람들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21절)이 무엇인지 나열하셨는데 모두가 악한 것들이다. 거기에 13가지 죄가 언급되어 있다(13이라는 숫자에 주목하라 - 창세기 13:13 주석을 해당 주석서에서 보라). 사람의 마음 속에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 보자.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여섯 가지" 중 하나가 "악한 계획들을 꾸미는 마음"(잠 6:18)이다. 주께서는 "불의한 사람은 자기 생각들을 버리고 주께로 돌아오라"(사 55:7)고 말씀하신다. 신약에서 크리스찬은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서 그리스도께 복종케 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이 명령은 북이스라엘의 열 지파가 앗시리아에 사로잡혀 갔던 것이나 남유다 왕국의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 사람들이 느부캇넷살에 의해 사로잡혀 갔던 것과 같이 자신의 생각을 사로잡으라는 뜻이다.
1. "악한 생각." 인간의 생각은 B.C. 3000년보다 한 치도 개선되지 않았다. 인간들의 "마음의 생각의 모든 상상"은 지금도 "계속해서 악할 뿐"이다(창 6:5).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주께서는 사람의 생각을 아시나니 그것들은 허무하도다"(시 94:11).
2. "간음." 이것은 결혼 서약을 외적으로 파기하는 것에 국한되지 않고(롬 7:2-3) 정욕과(마 5:28) 영적 간음에도 적용된다. 구약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우상 숭배(겔 6:9)를 가리켜 이방신을 "음란하게 숭배"하는 것이라 말씀하셨다(이를테면 출 34:15-16; 신 31:16; 판 2:17; 대상 5:25). 신약에서는 크리스찬이 구원받지 못한 세상과 "친구"가 되는 것이 영적 간음이다(약 4:4).
3. "음행." 이것은 온갖 종류의 성적 죄악, 곧 근친상간, 동성애, 수간 등에 다 적용될 수 있는 말이다(레 18장을 보라). 이것은 죄의 육신 때문에 일어나는 범죄이며(갈 5:19; 골 3:5) 크리스찬은 그것을 "삼가고"(살전 4:3) "피하라"(고전 6:18)는 명령을 받는다.
4. "살인." 로마 제국에서는 사형에 해당하는 죄목이 두 개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살인이고 다른 하나는 간음이었다. 어떤 죄인이 자기 의로 자신을 정당화하려 애쓸 때 이런 말을 하곤 한다. "나는 살인 같은 것은 해본 적이 없습니다." 이것은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는 죄를 지었다는(벧전 2:24) 사실을 들을 때 죄인들이 회피하는 방식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까닭없이"(새로운 "성서들"에는 이 표현이 사라졌는데 이는 하나님의 아들께서 죄를 지은 것으로 만들려는 의도이다 - 막 3:5 주석을 보라) 형제에게 노하는 것에 대해 살인죄라고 규정하셨고 형제를 미워하는 것도 마찬가지라 말씀하셨다(요일 3:15). 성경에 따르면 살인은 죄인의 좌절된 열망 때문에 일어난다(약 4:2).
5. "도둑질." 이것의 의미는 무척 단순하다. "너는 도둑질하지 말지니라"(출 20:15)는 계명 그대로이다. 여러분이 사람들에게 이것을 물어보면 대부분 자기들이 도둑질하지 않았다고 답할 것이다. 이는 그들이 작은 도둑질들을 간과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내 관점을 입증하기 위해 나는 설교 중 회중들에게 일어서라고 요구하곤 한다. 그리고 나서 나는 "여러분 가운데 이웃의 과실수에서 사과나 체리를 허락 없이 따간 적이 있는 사람은 앉으세요"라 말한다. 남부식으로 말하자면 "여러분 중 이웃의 텃밭에서 멜론을 훔쳐간 적이 있는 분은 앉으세요"가 될 것이다. 내가 그렇게 할때마다 9/10의 회중이 걸려든다. 나는 그들에게 말한다. "내가 '강도들의 소굴'에 있군요(마 21:13을 보라)."
여러분은 이 간단한 시험을 통과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는지 보라: 여러분은 고용주에게서 시간을 도둑질한 적이 없는가? 그는 여러분이 하루 여덟 시간 일할 것으로 기대하고 임금을 지불했는데 여러분은 한 시간에 십오분 꼴로 빈둥거리고 있지 않은가 하는 것이다. 여러분은 자신의 생활 방식 때문에 부모의 시간을 몇 년씩 도둑질한 적 없는가? 여러분은 어린 처녀의 뺨에서 그녀의 순수성의 꽃을 훔친 적은 없는가? 내가 감옥에서 이 질문을 했을 때 수감자 중 한 명이 "나는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없소"라고 큰 소리로 부정했다. 여러분은 이것들을 심각하게 생각해 보는 편이 좋을 것이다.
여러분은 자신이 또 하나의 존 델린저나 제시 제임스가 아니라고 확신하는가? 여러분은 "당연히 아니에요, 럭크만!"이라 할지 모르지만 이 구절을 한번 보라: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양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길로 넘어 들어가는 자는 도둑이요 강도라"(요 10:1).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길로 하늘나라에 갈 수 있다고 믿는다면(요 10:9) 여러분은 부치 캐시디, 보니 앤 클라이드, 프리티 보이 플로이드, 혹은 베이비 페이스 넬슨과 다를 바 없다.
6. "탐욕." 바울에 따르면 탐심은 우상숭배이다(골 3:5). 예수께서는 탐심을 주의하라고 하셨다(눅 12:15).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에 만족함으로써 여러분의 삶에서 탐욕을 몰아내야 한다(히 13:5). 여러분은 탐욕에 대해 "너희 가운데서 이름조차 부르지 말라. 이것이 성도들에게 합당하니라"(엡 5:3)는 말씀을 듣는다.
7. "악의." 이것은 일반적인 의미에서 마귀처럼 사는 생활을 가리키는 것이다. 크리스찬이 공의를 무시하고 살면 그의 삶은 여느 잃어버린 죄인의 생활과 다를 바 없게 된다(참고. 고전 5:13; 벧후 3:17).
8. "사기." 성경은 "마음은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악하니"(렘 17:9)라 말씀한다. 거듭난 사람의 옛 아담 본성은 구원받은 후에도 바뀌지 않는다. 옛 사람 아담은 여전히 "기만의 욕망에 따라 썩어진"(엡 4:22) 채로 남아 있다.
9. "방탕." 방탕은 걷잡을 수 없는 과도한 정욕과 악의를 말한다. 그것에 대해 가장 잘 기록된 구절이 벧전 4:3-4이다. 모든 도덕적 규제를 던져 버리는 것이 구원받지 못한 이방인들의 표식이다. 여러분은 크리스찬이 그런 모습으로 살수 없으리라 생각하겠지만 그럴 수 있다(고후 12:21). 성도들이여, 여러분이 성경을 덮고 기도를 멈추며 설교를 통해 하나님 말씀을 듣는 것을 중단하면 그때부터 여러분은 구원받지 못한 죄인이 지을 수 있는 모든 죄에 동참할 수 있는 것이다.
10. "악한 눈." 이것은 어떤 초자연적인 눈이 여러분을 감시하면서 액운을 부른다는 뜻이 아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사물이나 사람을 악한 의도와 정욕 가운데 쳐다보는 것을 말한다(신 15:9, 28:54, 56; 잠 23:6, 28:22). 요일 2:16에서는 이것을 "안목의 정욕"이라 부른다. 크리스찬은 자신이 무엇을 쳐다보고 있는지에 주의해야 할 뿐 아니라 어떤 눈으로 보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조심해야 한다.
11. "하나님을 모독함." 이것은 "너희 입에서 나오는 추잡한 말"(골 3:8)과 함께 크리스찬이 지양해야 할 것 중 하나이다. 내가 구원받았을 때 말 표현과 관련하여 문제가 있었다. 내가 구원받은지 겨우 한달 되었을 때 나보다 구원받은지 오래 된 친구가 대화 중에 내게 이렇게 말했다. "피터, 너 그거 고쳐야 돼."
"뭘 고치란 말이지?" 이해하지 못한 내가 물었다.
"그 말투 말이야 피터, 그 말투를 고쳐야 한다고!"
나는 여전히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채 다시 물었다. "내 말투가 어떻길래?"
"그 제길, 개 같은, 얼간이, 그런 표현들 말이야, 그런 말을 쓰면 안돼!"
정말로 나는 내가 어떤 말을 평소에 쓰고 있는지 몰랐었다. 나는 보병 장교로 병사들을 지휘하면서 저주가 입에 붙었고, 술집에서 술을 마시면서, 댄스 밴드에서 드럼 연주를 하면서(구원받지 못한 내 삶의 날들 동안) 상스러운 말은 내게 제2의 천성이 되다시피 했었다. 나는 내가 그런 더러운 말을 쓰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고 살았다.
내가 더러운 말들을 내 어휘에서 몰아내는 데는 시간이 상당히 걸렸지만 어쨌건 나는 그런 말들을 더 이상 쓰지 않게 되었다. 내가 고백해야 할 것은 그럼에도 이따금씩 옛날 내가 썼던 그 상스러운 말들이 마음에 떠오르고 아주 간혹 그것이 입에서 튀어나오는 경우가 있다. 사도 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나도 가끔 "내가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롬 7:15).
12. "교만." 이것은 사탄에게서 시작된 그 원죄이다(겔 28:12-15; 사 14:12-13). 이 죄는 "자신에 대하여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는 것이다(롬 12:3). 이 죄는 마귀의 자녀들의 성품을 특징짓는 그 죄이다(욥 41:34). 하나님의 자녀는 스스로를 높이는 대신 하나님 앞에 자신을 낮춤으로써 주의 손에서 은혜와 높임을 받도록 해야 한다(벧전 5:5-6).
13. "어리석음." 오, 이런! 왜 주께서는 이것까지 하지 말라고 하신다지? 더러운 말 뿐 아니라 성도들에게 "어리석은 말"과 "농담은 합당치 아니"하다(롬 12:3). 이는 핵심을 찌르는 것 없이 그저 웃기 위해 하는 농담 같은 것을 말한다. 그런 말을 계속 하면 여러분은 저속한 말을 통해 웃음을 유발해야만 되는 코메디언처럼 격이 떨어지게 된다. 그리고 결국은 "사악한 광기"(전 10:13)에까지 이른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한다. "어리석은 생각은 죄요"(잠 24:9). 어리석은 자는 좋은 지각이 없는 사람이다. 어리석은 생각은 무의미하고 사악하며 분별없고 육신적인 생각 가운데서 나온다. 하나님께서는 눅 12:20에서 그 부자를 "너 어리석은 자"라고 부르셨는데 이는 그가 영원에 대해 전혀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예수께서는 눅 24:25에서 제자들을 "어리석은 자들"이라 부르셨는데 이는 그들이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눅 24:25)이기 때문이었다. 그런 것들이 어리석음이며, 구원받았건 아니건 그런 것들에 참여할수록 그 사람은 성품이 부패하게 된다.
이제 우리가 살펴본 그 열세 가지를 보라. 하나님께서 당신네 선량하고 훌륭한 신사들을 보시는 관점이 그와 같다. 그것이 아담이고 그가 구원받은 사람 안에서 발견되던지 잃어버린 죄인 가운데서 발견되던지 똑같은 아담이다. 두 부류의 인간들이 가진 유일한 차이점은 구원받은 사람의 경우 옛 성품을 상쇄시킬 "새 사람"(엡 4:24; 골 3:10)을 가졌다는 것이다. 여러분이 구원받은 크리스찬이라면 성령께서 안에 내주하시므로 여러분은 이 열세 가지 죄악들이 자신을 더럽히지 못하도록 쫓아낼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나는 설교 중에 "복음 펀치 보드"라는 예화를 인용하곤 하는데 그것은 이런 이야기이다. 어떤 선교사가 구원받은 인디언에게 성도 안의 두 가지 본성에 대해 그가 그 교리를 이해한 대로 설명해 보라고 했을 때였다. 그 인디언이 말했다. "내 안에 흰 개와 검은 개 두 마리가 있는데 그들은 항상 싸웁니다." "그러면 어느 쪽이 이기나요" 선교사가 물었다. "내가 '그만, 네가 이겼어'라고 하는 개가 이깁니다" 인디언이 답했다. 롬 6장에 따르면 여러분은 자신의 몸을 "의의 병기"(롬 6:13)로 길들여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어느 개가 이기게 되는지 내가 한 가지 힌트를 더 주겠다. 여러분이 먹이를 더 주는 개가 싸워서 이긴다. 여러분이 "검은 개"에게 영화, TV, 나쁜 친구, 록음악, 잡지들, 신문들, 인터넷, 포르노 같은 것들을 먹이로 주면 그 개가 이긴다. 여러분이 "흰 개"에게 성경 읽기, 기도, 성도들의 교제, 좋은 설교, 찬송을 먹이로 주면 그 개가 이긴다. 여러분의 새 성품에 먹이를 주고 옛 성품은 굶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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