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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列國志 제103회
공자 귀생(歸生)의 字는 자가(子家)이고, 공자 송(宋)의 字는 자공(子公)인데, 이 두 사람은 정나라의 귀척(貴戚)으로서 지위는 경(卿)이었다. 정영공(鄭靈公) 원년이었다. 공자 송과 공자 귀생은 아침 일찍 정영공을 알현하러 갔는데, 홀연 공자 송의 식지(食指)가 저절로 움직였다.
첫 번째 손가락을 무지(拇指), 세 번째 손가락을 중지(中指), 네 번째 손가락을 무명지(無名指), 다섯 번째 손가락을 소지(小指)라 한다. 두 번째 손가락은 음식을 먹을 때 반드시 사용해야 하므로 식지(食指)라고 한다.
귀생이 이를 보고 이상히 여기자, 송이 말했다.
“다름이 아니라, 내 식지가 이렇게 움직이는 날에는 반드시 별난 음식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전에 晉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에는 석화어(石花魚)라는 물고기를 먹었고, 초나라에 갔을 때에는 천아(天鵝)라는 새고기를 먹었소. 그리고 또 한 번은 합환귤(合歡橘)이라는 것도 먹었는데, 이 식지가 항상 미리 알려주었습니다. 지금까지 한 번도 맞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오늘은 또 어떤 별미를 맛보게 될는지 모르겠습니다.”
두 사람이 조문(朝門)에 들어서는데, 내시가 요리사를 급히 불렀다. 송이 내시를 불러 물었다.
“네가 요리사를 급히 부르는데, 무슨 일이 있느냐?”
내시가 대답했다.
“오늘 어떤 사람이 한강(漢江)에서 큰 자라 한 마리를 잡아 주군께 바쳤는데, 그 무게가 2백 근이 넘습니다. 지금 그 자라를 당하(堂下)에 묶어 놓았는데, 주군께서는 자라탕을 끓여서 여러 대부들에게 대접하고자 하여, 저에게 요리사를 불러오라 하셨습니다.”
송이 귀생을 돌아보며 말했다.
“별미가 무엇인가 했더니, 바로 이거로군요. 내 식지가 괜히 움직일 리가 없거든.”
두 사람이 안으로 들어가 보니, 굉장히 큰 자라가 기둥에 묶여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 바라보며 빙긋이 웃었다. 두 사람은 영공을 알현할 때까지도 얼굴에 웃음이 가시지 않았다. 영공이 물었다.
“경들은 무슨 좋은 일이 있소?”
귀생이 대답했다.
“신이 송과 같이 입조하는데, 그의 식지가 홀연 움직였습니다. 송의 말에 의하면, 그럴 때마다 별미를 맛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당하에 커다란 자라가 묶여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주군께서 끓여 드신다면 반드시 여러 신하들에게도 맛을 보게 하실 터이니, 식지의 영험이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웃었습니다.”
영공은 짓궂게 말했다.
“영험이 있는지 없는지는 과인에게 달렸소.”
두 사람이 물러나올 때, 귀생이 송에게 말했다.
“별미가 있긴 한데, 주군이 과연 그대를 부를지 모르겠습니다.”
“모든 대신을 다 대접한다고 했는데, 어찌 나만 빼놓겠습니까?”
그날 저녁, 과연 내시가 여러 대부들에게 조정으로 들어오라는 전갈을 전했다. 송은 기분 좋게 입조하다가 귀생을 만나 웃으며 말했다.
“주군이 나를 부르실 줄 알고 있었습니다.”
여러 대부들이 모두 자리에 앉자 영공이 말했다.
“자라는 수족(水族) 중에서도 맛이 뛰어난 것이기에, 과인이 혼자 먹을 수 없어서 여러 경들과 함께 맛보고자 하오.”
여러 대부들은 입을 모아 감사의 말을 했다.
“주군께서 이처럼 한 끼 식사에도 신들을 잊지 않으시니, 신들은 무엇으로 보답하겠습니까?”
요리사가 자라탕을 가져와 먼저 영공에게 바쳤다. 영공이 맛을 보니 기가 막혔다. 영공은 자라탕을 여러 대부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명하고, 아울러 상아 젓가락 한 벌씩을 하사했다. 그런데 영공은 자라탕을 하석에서부터 상석으로 올라오면서 차례로 한 그릇씩 놓게 했다. 그러다 보니, 제일 상석의 두 자리가 남았는데 자라탕은 한 그릇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요리사가 영공에게 아뢰었다.
“자라탕은 이제 한 그릇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어느 분에게 드려야 할지 명하여 주십시오.”
영공이 말했다.
“자가(귀생)에게 드려라.”
요리사가 귀생 앞에 자라탕을 놓자, 영공이 크게 웃으며 말했다.
“과인이 여러 경들에게 자라탕을 대접하려 했는데, 마침 자공(송) 것만 없구려. 자공만 자라탕을 먹지 못하게 되었으니, 식지가 무슨 영험이 있단 말이오?”
원래 영공은 요리사에게 분부하여 일부러 한 그릇만 모자라게 준비하라고 일렀다. 그래서 송의 식지가 영험이 없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한 번 웃어 보려는 생각에서였던 것이다. 그러나 송은 이미 귀생에게 자신의 식지가 영험이 있다는 것을 실컷 자랑한데다, 오늘 백관이 모인 자리에서 자기 혼자만 먹지 못하게 되었으니, 창피하기 짝이 없었다. 그리고 그 창피하다는 생각은 곧 분노로 변하였다.
송은 벌떡 일어나 영공의 면전으로 가서, 그릇에 손을 집어넣어 자라고기 한 점을 건져내어 맛을 보았다.
“신은 이미 맛을 보았습니다. 그러니 식지가 어찌 영험이 없다고 하겠습니까?”
송은 말을 마치자 곧바로 나가 버렸다. 영공 역시 노하여 젓가락을 집어 던지며 말했다.
“송이 불손하구나. 감히 과인을 희롱하다니! 정나라에 그 목을 칠 한 자루의 칼이 어찌 없겠는가!”
귀생 등이 모두 엎드려 용서를 빌었다.
“송이 폐부지애(肺腑之愛)만 믿고, 잠시 장난한 것일 뿐입니다. 어찌 감히 주군께 무례한 짓을 했겠습니까? 용서하십시오.”
[‘폐부(肺腑)’는 허파로서 마음의 깊은 속을 의미하며, ‘폐부지애(肺腑之愛)’는 지극한 총애를 뜻한다.]
영공은 화가 풀리지 않았다. 君臣이 모두 좋지 않은 기분으로 헤어졌다.
귀생은 즉시 송의 집으로 가서, 주군이 몹시 노하였으니, 내일 아침 입조하여 사죄하라고 권하였다. 송이 말했다.
“내가 듣건대, ‘남을 업신여기는 자는, 자신도 남에게 업신여김을 받는다.’고 하였습니다. 주군은 먼저 나를 업신여기고서, 자신은 책망할 생각은 않고, 어찌 나만 책망한단 말입니까?”
“하지만 君臣의 관계가 아니오? 사죄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다음 날, 두 사람은 함께 입조하였다. 송은 반열에 끼어 예를 행하면서도 사죄하는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귀생이 도리어 불안하여 대신 아뢰었다.
“송은 주군의 책망을 두려워하여 사죄를 드리고자 하였으나, 전전긍긍(戰戰兢兢)하여 감히 말씀드리지 못하고 있으니, 주군께서 너그러이 용서하십시오.”
[‘전전긍긍(戰戰兢兢)’은 겁을 먹고 벌벌 떨며 몸을 움츠린다는 뜻으로, 위기감에 절박해진 심정을 비유한 말이다.]
영공이 말했다.
“과인이 자공에게 죄를 지을까 두렵소. 자공이 어찌 과인을 두려워하겠소?”
영공은 옷깃을 떨치고 일어났다.
송은 돌아가는 길에 귀생을 자기 집으로 청하여 은밀히 말했다.
“주군의 노여움이 아주 심하니, 내가 죽음을 당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차라리 먼저 난을 일으켜, 일이 성공한다면, 죽음을 면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귀생은 귀를 막으며 말했다.
“가축도 오래 기르다 보면 차마 죽이지 못하는 법인데, 하물며 일국의 군주를 어찌 죽인단 말입니까? 감히 시역(弑逆)을 가벼이 말하지 마십시오.”
송이 말했다.
“내가 한 번 농담해 본 것뿐이니, 그대는 누설하지 마십시오.”
귀생은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송은 귀생이 영공의 아우인 공자 거질(去疾)과 친하여 자주 왕래한다는 것을 탐지해 냈다. 송은 조정에서 이렇게 떠들어댔다.
“자가(귀생)와 자량(子良; 거질)이 아침저녁으로 모여 무슨 일을 모의하는지 모르겠지만, 혹 사직에 불리한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두렵다.”
귀생은 송의 팔을 끌고 조용한 곳으로 가서 말했다.
“대체 무슨 소리입니까?”
송이 말했다.
“그대가 나에게 협조하지 않으니, 나보다 하루라도 먼저 죽게 하려는 것입니다.”
귀생은 평소 유약한 성격으로 결단력이 없었다. 송의 말을 듣자 귀생은 크게 두려워하여 말했다.
“도대체 어쩌겠단 것입니까?”
“주군이 무도하다는 것은 이미 자라탕을 나누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만약 대사를 성공하기만 하면, 내 그대와 함께 자량을 군위에 받들고 晉과 화친하여, 우리 정나라의 안정을 도모하겠습니다.”
귀생은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대가 알아서 하십시오. 내가 이 일을 누설하지는 않겠습니다.”
송은 가병들을 모아, 영공이 가을 제사를 지내기 위해 재실(齋室)에서 자는 틈을 타서 밤중에 몰래 잠입하여 흙주머니로 눌러 죽여 버렸다. 그리고는 영공이 가위에 눌려 갑자기 훙거했다고 말을 퍼뜨렸다. 귀생은 송이 한 짓임을 알았으나 감히 말을 하지 못했다.
공자(孔子)께서 『춘추(春秋)』를 편찬하실 때, “정나라 공자 귀생이 그 주군 이(夷)를 시해했다.”고 기록하셨다. 공자 송이 지은 죄를 귀생에게 돌린 까닭은, 일국의 정사를 책임지고 있는 사람으로서 협박이 두려워 역적을 따랐기 때문이었다. 이른바 ‘책임이 중한 자는 질책도 중하다.’는 것이다. 성인께서 역사를 기록하는 법이 이러하였으니, 신하된 자들을 경계하기 위함이었다. 두려워해야 할 것이다!
다음 날, 귀생은 송과 공모하여 공자 거질을 군위에 세우고자 하였다. 거질은 크게 놀라 사양하며 말했다.
“선군에게는 아들이 여덟 명 있소. 만약 어진 사람을 군위에 세우고자 한다면 거질은 덕이 없어 안 되고, 연장자를 군위에 세우고자 한다면 공자 견(堅)이 있소. 거질은 죽어도 차례를 뛰어넘을 수는 없소,”
이리하여 공자 견이 즉위하니, 그가 정양공(鄭襄公)이다.
정목공(鄭穆公) 난(蘭)에게는 아들이 13명 있었다. 영공 이(夷)는 피살되고, 양공 견(堅)이 즉위하였으니, 11명이 남았다. 거질(去疾)의 字는 자량(子良), 희(喜)의 字는 자한(子罕), 비(騑)의 字는 자사(子駟), 발(發)의 字는 자국(子國), 가(嘉)의 字는 자공(子孔), 언(偃)의 字는 자유(子游), 서(舒)의 字는 자인(子印)이었다. 또 풍(豐), 우(羽), 연(然), 지(志)가 있었다.
양공은 아우들이 많아 훗날 변란을 일으킬까 두려워, 거질과 상의하여 거질을 제외한 다른 아우들을 모두 쫓아내려고 하였다. 거질이 말했다.
“선군은 모친이 난초 꿈을 꾸고 태어났는데, 점괘에 ‘필시 희씨(姬氏) 종족이 번창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무릇 형제들이 공족으로서 가지나 잎처럼 무성해야 근본이 번영하는 것이지, 만약 가지나 잎을 잘라버리면 근본도 말라죽게 됩니다. 주군께서는 그들을 용납하시기를 바랍니다. 만약 주군께서 그들을 용납하지 않으신다면 저도 함께 떠나겠습니다. 저만 홀로 이 나라에 남았다가 훗날 무슨 면목으로 지하에서 선군을 뵙겠습니까?”
[제48회에, 남연 길씨의 딸이 잉첩으로 정문공에게 왔는데, 꿈에 헌칠한 대장부가 나타나 난초를 건네주며 말했다. “나는 백조(伯鯈)인데, 너의 조상이다. 이제 이 난초를 줄 테니, 너의 아들로 삼아 나라를 번창하게 하라.” 그리고 난초를 주었다. 꿈을 깨고 보니, 방안에 난초 향기가 가득하였다. 그날 임신을 하여 낳은 아들이 정목공 난(蘭)이다.]
양공은 거질의 말에 감동하여 깨닫고, 아우 11명을 모두 대부에 임명하여 국정에 참여하게 하였다. 공자 송은 晉에 사신을 보내 화평을 청하여 나라를 안정시키고자 하였다. 주정왕(周定王) 2년 때의 일이었다.
다음 해인 정양공 원년에, 초장왕(楚莊王)은 공자 영제(嬰齊)를 대장으로 삼아 시군(弑君)한 죄를 물어 정나라를 정벌하였다. 晉나라는 순림보(荀林父)로 하여금 정나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초나라는 병력을 이동하여 陳나라를 정벌하였다. 정양공은 흑양(黑壤) 땅에서 진성공(晉成公)과 동맹을 맺었다.
주정왕 3년, 晉나라 상경 조돈(趙盾)이 세상을 떠났다. 극결(郤缺)이 조돈을 대신하여 중군원수가 되었다. 陳나라가 초나라와 화평을 맺었다는 소식을 들은 극결은, 진성공에게 아뢰어 순림보로 하여금 성공을 모시고 宋·衛·鄭·曹 4국의 군대와 연합하여 陳나라를 정벌하게 하였다.
하지만 진성공이 중도에 병으로 훙거하자, 순림보는 회군하였다. 晉나라 대신들은 세자 유(孺)를 군위에 옹립하였으니, 그가 진경공(晉景公)이다.
그 해에 초장왕이 친히 대군을 거느리고 다시 정나라를 정벌하러 가서 유분(柳棼) 땅에 주둔하였다. 晉나라 극결이 정나라를 구원하러 가서 楚軍을 기습하여 패퇴시켰다. 정나라 사람들이 모두 기뻐하였는데, 공자 거질만은 근심스런 기색이었다. 정양공이 이상하게 여겨 까닭을 묻자, 거질이 대답했다.
“晉軍이 楚軍을 패퇴시킨 것은 우연입니다. 초나라가 장차 우리 정나라에 노여움을 풀려고 할 것인데, 晉만 믿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머지않아 楚軍을 우리 교외에서 보게 될 것입니다.”
다음 해, 초장왕은 다시 정나라를 정벌하러 와서 영수(穎水) 가에 둔병하였다. 그때 공자 귀생은 병으로 죽었다. 공자 거질은 자라탕 사건의 죄를 다스려 공자 송을 사형에 처하고, 그 시신을 조문 앞에 전시하였다. 그리고 귀생의 관을 파내어 부수고, 그 가족을 국외로 추방하였다. 정양공은 사신을 楚王에게 보내 사죄하였다.
“과군은 역신(逆臣) 귀생과 송을 모두 처형하였으며, 陳侯와 함께 상국과 삽혈하고 동맹을 맺기를 원합니다.”
초장왕은 허락하고, 陳·鄭과 진릉(辰陵) 땅에서 동맹을 맺고자 하였다. 장왕이 사신을 陳나라로 보냈는데, 사신이 돌아와 보고하였다.
“陳侯는 대부 하징서(夏徵舒)에게 시해 당하고, 陳나라 국내는 크게 혼란해졌습니다.”
당시 상황을 읊은 시가 있다.
周室東遷世亂離 주왕실이 동천한 이래 대대로 변란이 끊이지 않아
紛紛篡弒歲無虛 분분하게 군주를 시해하는 일이 해마다 일어났네.
妖星入斗徵三國 요성(妖星)이 북두를 침범하여 3국의 군주가 죽었는데
又報陳侯遇夏舒 또다시 陳侯가 하징서에게 죽임을 당했도다.
[혜성이 북두칠성을 침범한 일은 제97회에 있었다. 제나라 상인(의공)이 세자 사를 죽였고, 송나라 공자 포(문공)은 송소공을 죽였다. 제98회에 제나라 병촉과 염직은 제의공을 죽였고, 공자 원(제혜공)이 즉위하였다. 제99회에 노나라 중수는 세자 악을 죽이고 공자 왜(선공)를 옹립하였다.]
한편, 진영공(陳靈公)의 이름은 평국(平國)인데 진공공(陳共公) 삭(朔)의 아들이었다. 주경왕(周頃王) 6년에 즉위했는데, 사람됨이 경망하고 게을러 위의(威儀)라고는 전연 없었다. 또한 주색에 탐닉하여 유희만 즐기고 정사는 전혀 돌보지 않았다. 영공이 총애하는 공녕(孔寧)과 의행보(儀行父)라는 두 대부가 있었는데, 이 셋은 뜻이 맞아 함께 주색잡기(酒色雜技)를 즐겼다.
그때 조정에는 설야(泄冶)라는 한 현신이 있었는데, 그는 충량(忠良)하고 정직한 사람이었다. 설야는 일이 있을 때마다 직간을 서슴지 않았기 때문에, 영공과 두 대부는 그를 두려워하고 꺼려하였다.
또 하어숙(夏御叔)이라는 대부가 있었는데, 그의 부친 공자 소서(少西)는 진정공(陳定公)의 아들인데 字가 자하(子夏)였다. 하어숙은 하(夏)를 字로 삼고 또 소서씨(少西氏)라고 하였다. 하어숙은 부친의 사마(司馬) 벼슬을 이어받았으며, 식읍은 주림(株林)이었다.
하어숙은 정목공(鄭穆公)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는데, 그녀는 하희(夏姬)라 불렸다. 하희는 나면서부터 아미봉안(蛾眉鳳眼)에 행검도시(杏臉桃腮)를 타고났으며, 여희(驪姬)나 식규(息媯) 같은 용모에 달기(妲己)나 문강(文姜) 같은 음란함이 있었다. 그녀를 한 번 본 사람은 놀라서 넋이 나가 엎어지고 거꾸러지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아미봉안(蛾眉鳳眼)’은 나방의 더듬이 같은 반달 모양의 눈썹과 봉의 눈을 가리키고, ‘행검도시(杏臉桃腮)’는 살구꽃 같고 복사꽃 같은 붉은 뺨을 가리킨다. 여희는 진헌공(晉獻公)의 부인으로 제39회에 등장했으며, 식규는 식후(息侯)의 부인 규씨로 제34회에 등장했다. 달기는 은나라 주왕(紂王)의 애첩으로, 제4회에 언급되었다. 문강은 제희공(齊僖公)의 딸로 제17회에 등장했다.]
하희는 기이한 일을 겪은 적이 있었다. 그녀가 15세 되던 해였다. 꿈에 헌칠한 대장부가 나타났는데 별 모양의 관을 쓰고 새의 깃털로 만든 옷을 입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상계(上界)의 신선이라 하면서 하희와 교합하였다. 그는 하희에게 정기(精氣)를 빨아들이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그리하여 하희는 남자와 교접할 때, 온갖 즐거움을 마음껏 누리면서도 그런 중에 양기를 빨아들여 음기를 보충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나이가 먹을수록 오히려 젊어져 갔다. 그녀는 자신의 그러한 기술을 소녀채전지술(素女採戰之術)이라 하였다.
그녀는 출가하기 전에 이미 정영공(鄭靈公)의 이복형이며 자신의 이복오빠인 공자 만(蠻)과 사통하였다. 이처럼 남매간에 사통한 지 3년 만에 공자 만은 요절(夭折)하고 말았다. 하희는 하어숙의 아내가 되어 아들을 하나 낳았는데, 이름은 하징서(夏徵舒)라 하고 字는 자남(子南)이었다. 하징서가 12세 되던 해에 하어숙은 병으로 죽었다. 그 후로 하희는 하징서를 성 안에 남겨두어 공부를 계속하게 하고, 자신은 주림에 살고 있었다.
첫댓글 열국지를 읽을 때는 읽는 중에 항상 나라이름을
염두에 두고,읽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혼란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