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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아차산 峨嵯山모습>
조선때 문인 이덕무가 지은 청장관전서 내에 실려있는 아정유고 제3권, '문(文)'에서의 협주기
(=한강을 거슬러 가며)의 내용이다.
<1776년, 내가 3월25일 정사원과 동자와 함께 청교에 사는 심경문의 집에 이르자, 여문중이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이들과 함께 출발하여 광희문을 나와 전관의 고개에서 쉬면서
동쪽에 있는 아차산을 바라보았다.
그 산은 붉은 쇳물을 내리부은 듯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나지 않았다. 산 밑의 평원에는 풀
이 푸르고 무성하여 역마들이 꼴을 뜯고 있으며, 밭의 보리가 이리저리 쓰러져 있다. 같은 비
단 필목처럼 훤한데 공중에서 메추리의 울음소리만 들려온다. (이하 생략)>
<서울의 아차산모습>
서울의 아차산은 강북의 동쪽끝에 위치하며 구리시와 서울시 동대문구,광진구와 접해있는 산
이다. 높이 287m이다. 산이 푸르르고, 후대에 고구려유적지가 발견되어 경기도 구리시에서는
떠들썩하다. 아차산남쪽 한강변에는 외국인들이 많이 찾는 워커힐호텔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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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그러나 조선시대의 아차산은 서울의 아차산과 매우 다른 모습이다. 조선시대 문헌속의 아차산
은 한반도의 녹음이 우거져 있는 그런 아차산이 아니다. 산에 나무 한그루, 풀 한포기가 나지
않는 사막기후류의 산을 말한다.
비록 나무와 풀이 없다함이 산불이 일어났다면 잠시 그럴 수도 있으나, 그것도 겨울이 아니라
면 풀,나무들은 다시 생겨나기 마련이다. 다만 산 밑의 평원에는 풀만 자란다고 한다. 그리고
아차산은 신당동 야산(전관의 고개)에서 나무와 말을 볼 수 있는 가까운 거리(1km이내거리)로
나온다.
그런데 서울의 신당동에서 아차산을 본다면 산의 테두리는 볼 수 있어도 어느 물체를 볼 수는
없다. 양쪽의 거리만 해도 7여km나 된다. 그래서 서울의 아차산은 조선시대의 아차산이 아닌
것이다.
다시 정리하자면 조선의 아차산은 한반도의 기후와는 전혀 맞지 않는 그런 곳이다. 비가 자주
오지 않고, 토질이 나무와 풀이 잘 자랄수 없는 곳이다. 건조지대와 접해있는 스텦류기후지역
이다. 비가 와도 1년에 조금씩 내려 풀만 자랄 수 있는 곳. 고산지역은 그남아 빗물이 모아질수
없는 곳. 반사막지역, 황토지역이다.
옛 독립문사진의 뒷산의 그런모습이다.(서안일대로 추정) 산은 거의 돌산의 모습. 나무가 있
다하나 어쩌다가 한 두개 보이고... 문헌속의 아차산의 모습과 흡사하다. 그동안 조선이 대륙
에 있음을 여러번 밝히면서 서울도 대륙의 서안에 있음을 점쳐왔었다. 그런 도중 아차산이 만
약에 서안일대에 있었다면 어떠했을까? 한번 가정해보면 거의 일치한다.
사진= 일제당시의 독립문 (대륙조선사 연구회참고)
아차산은 섬서성 서안인근에 있다.
서안의 섬서성중남부일대는 황하지류인 위수가 흐르고 있고, 위수 이북, 서쪽의 감숙성으로 가
는 산골쪽은 모두 황토로 이뤄진 산악지대이다. 이곳은 필자가 2007년 12월에 방문한 적이 있
다. 겨울에 가서 그런지 나무한그루, 풀한포기가 없었다.
그러나, 물을 끌어들여 밭농사를 한 흔적이 보인다. 물을 대면 풀, 야채류는 자랄 수 있다고 해
석이 된다. 그러나 나무는 거의 한두 그루밖에 보이질 않는다. 거대한 산악지대가 계단식 밭모
양으로 정상에서 아래까지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만약에 바람이 불것 같으면 황토가 먼지가
되어 온 동네를 휩쓸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섬서성 이지역은 건물이 모두 이곳 황토로 만든
황색벽돌로 지어졌고, 동네가 항상 뿌여했다.
사진- 섬서성일대의 황토산 (MBC 황화6부작 참고)
사진= 해발1700여m 의 섬서성 황토고원 (함께여는 세상/천둥산참조)
고산지대의 협곡을 넘어 서안시내쪽으로 가면 위수(패수)를 따라 드넓은 초원이 전개된다. 조
선시대 아차산이 바로 이런 지형을 나타내고 있다. 한편 한반도 서울의 지형하고는 전혀 맞지
않는다.
<지은이 이덕무 약력>
이덕무(李德懋 1741~1793, 영조~정조) 조선후기의 실학자로 자가 무관이고, 호가 형암이다.
본관은 전주이고, 박지원, 유득공과 친하다. 박학다재하고 문장가로 이름을 떨쳤으며, 저서로
는 <청장관전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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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주 중요한 관찰 입니다
사막 지대가 아니라 원래 그 지역 토질이 좋지 않다고 합니다. 게다가 이덕무 시대면 한양 인구는 사상 최대가 되고 땔깜 같은 나무 수요가 급증합니다. 그래서 민둥산들이 많아졌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