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6년 2월초 낯선 인물 한 사람이 거창고등학교 운동장에 나타났다.
농어촌 청소년들의 눈을 열고 가슴을 뜨겁게 한 교육자,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한 시골선교사, 언행일치 한 자, 빛과 소금의 역할을 몸소 보이시고 끝내 한 알의 밀알이 되신 스승, 바로 전영창 교장선생님이다. 그는 패혈증으로 대구동산병원에서 수술 중 59세의 일기로 순직하셨다.
소천하신 1976년 5월 20일, 그날은 하늘도 울고 불신자들도 눈물을 흘렸다.
그 눈물은 거창고등학교의 앞날을 염려하여 걱정하는 울음이며, 스승과의 이별이 끝내 아쉬운 제자들의 눈물이었다.
모두 다리가 떨리고 가슴이 울렁거려 걸음을 제대로 옮기지 못했었다고 할 정도로 많은 이들이 애도하였다.
거창고등학교의 역사는 이러하다. 호주 선교사들이 운영하던 학교를 주남선 목사의 장남 주경중 장로와 교육의 열정을 가진 몇 분이 1953년에 인수, 전국 최초의 남녀공학의 민주학원을 기치로 거창의 첫 인문계 고등학교가 탄생되었다.
그러나 재정에 어려움을 견디지 못하여 문을 닫아야 할 지경에 이르렀을 때, 전영창 선생이 인수하여 학교를 운영하게 되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을 본받아 첩첩산중의 초라한 학교를 인수, 농어촌의 향학열에 불타는 청소년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심기 위하여 희생과 봉사를 아끼지 않으셨다.
한때 평화중고등학교 교감 김상도 목사와 황창호 선생은 1956년 2월초에 방문하여 인수의 뜻을 가졌으나 학교건물이 너무도 초라하여 포기하였다. 그러나 전영창 선생은 포기하지 않고 황창호 선생을 교무주임으로 등용해 2년간 학교업무를 돕게 하였다.
그러나 학교 형편은 여의치 못하였다. 비가 오는 날은 우산을 들고 가르치고 배웠던 작은 허름한 교사, 낡은 숙소 등 자랑할 것이 전혀 없었던 폐허와 같은 학교였다. 말할 수 없는 어려움이 많았다.
기독교학교로 운영하니 학생들 태반이 농고나 상고로 전학을 해 버렸다. 당시 거창 사람들은 교회는 예사롭게 보고 넘겼지만 학교 교육 만큼은 기독교적으로 시키는 일에 대해서는 배타적이었다.
특히 학생 모집과 교육 행정면에서 어려움과 핍박이 많았다. 그리하여 거창의 유지였던 이재술 장로를 서무과장 겸 학원총무로 영입하여 부족한 부분을 채워갔다. 이 장로는 복음병원으로 이동하기까지 8년을 협력, 헌신하였다.
무엇보다 전영창 선생님은 실력 있는 교사들을 초빙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였다. 교사들은 주야로 학생들을 열심히 가르쳤고, 교장선생님도 직접 과외학습과 영어특강을 지도하셨다.
육체적인 노동인 운동장 고르는 일과 학교 진입로의 돌다리 고치기, 농장에서 노작활동 등 솔선수범하셨다. 선생님은 쌀이나 보리양식 대신에 고구마와 감자로 끼니를 이어 갈 때도 많았다는 것을 졸업 후 수년이 지나서야 알았다.
어느 날, 더 이상 교직원들의 봉급을 줄 수 없어 학교 문을 닫으려고 교직원 회의를 하였다.
그런데 운동경기에서 우승하고 돌아온 학생들이 “선생님, 교장선생님 우리 학교가 우승했습니다. 만세 만세 거창고등학교 만세!”하며 외치는 소리에 “저 순진하고 철부지 촌놈들을 어찌 버리고 떠나겠느냐”라고 하시면서 교장과 모든 교직원들이 봉급의 50%만 받기로 결의하고 희생·봉사하여 학사를 이어가게 되었다.
‘어찌 아이가 부모의 어려운 심정을 알겠느냐’는 속담을 새삼 새겨본다. 재정상태가 너무 어려워 홀트 영아 입양원의 비행기를 타고 미국으로 가셔서 미국 교회와 화란 교회의 도움으로 직업관을 신축하고, 친구인 미국 크리스털교회 로버트 슐러 목사의 헌금으로 본교사와 강당을 신축하였다.
한국 기독교 지도자들과 교육에 관심을 가진 분들의 헌금과 졸업생들의 적은 헌금으로 장학금을 충당하였으며, 이후에는 국가에서 상당부분을 지원하여 주므로 자율학교로 학사운영을 하게 되었다. 모든 일이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는 재건복 골덴 양복에 검은 고무신 차림으로 용산 미군사령관과 면담하려다 한국인 수위에게 무시당했다. 그러나 유창한 영어로 미군 소령과 사령관과의 통화를 듣고 극진한 사과를 받았다.
수위의 태도를 예로들며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고 경고하며 영국, 미국, 호주, 캐나다 선교사들의 희생과 원조 등 그리고 흑인들의 피땀 나는 노력으로 대학의 교수와 가수가 되었다는 실례를 들어 학생들에게 감동을 주셨다.
‘소년들아 야망을 품어라’(BOYS BE AMBITIOUS!)를 강조하셨던 전영창 교장 선생님은 ‘정의는 후에 이긴다’고 설파하기도 하셨다.
전영창 선생님은 1917년 12월 26일 전북 무주군 적상면 여울리에서 전일봉 님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아동시절 교회에서 성구를 잘 암송하므로 미국 보이어 선교사의 도움으로 전주 신흥학교로 유학하셨다.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함으로 교장 린턴 박사의 눈에 들어 1938년에 일본 고베 중앙신학교에 유학하였으나 일본이 미국 진주만 폭격을 한 후 불량선인으로 낙인 되어 1942년 1년간 감옥살이를 하시고 한국으로 추방되어 무주에서 주거제한의 세월을 보내셨던 사건.
8·15 광복을 맞아 미 군정청 군종과 통역관으로 활동 도중 미국의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 유학하려는 포부를 들은 브라운 소령은 군종과 벧졸드 목사님에게 연락, 그의 추천으로 1947년 대한민국 최초의 미국 유학생이 되셨다. 유학법이 없어 미 군정청에서 법을 만들어 주는 혜택을 입었다.
1년 후 웨스턴신학교로 옮겨 수학하던 중 6·25동란으로 조국의 위기소식을 듣고 한 학기를 남겨 놓고 조기 졸업장을 받아 귀국을 결심하였다.
신학교 뮬러 학장은 “전쟁이 일어났는데 왜 귀국하려고 하느냐 한국에 있는 가족을 책임지고 초청해 주겠으니 공부를 계속하라”고 권유하였지만 선생님은 한 학기 남은 졸업까지 조기졸업으로 마치고 급히 귀국하였다. 이때 부산 앞바다에는 여차하면 일본으로 도망하려는 졸부들의 배들이 즐비했다고 한다.
전영창 선생님은 귀국하자마자 부산 제일영도교회를 본부로 삼아 구호활동을 전개하였다. 하루는 부산 부둣가에서 병든 아이에게 젖을 먹이는 피난민 여인을 목격하고 병원설립을 결심 복음구호의원(지금의 복음병원)을 설립하였는데, 그때가 전영창 선생님이 34살 때 일이었다.
1·4 후퇴 때 피난하여 육군 임시군의관으로 계시던 장기려 박사를 원장으로 초빙하고 제3영도교회 교육관을 임시 구호의원으로 시작했다.
미군병원의 헌 수술기구들을 얻어 사용하는 등 열악한 환경속에도 넘쳐나는 환자들로 장소가 협소하였다. 이후 미군의 원조로 대형 텐트 3개를 영선초등학교 운동장에 설치하여 휴전이 되고 송도로 옮겨 갈 때까지 구호와 의료봉사를 하셨다.
전영창 선생님은 휴전이 되자 다시 도미하여 콘코디아 신학대학원에 수학하여 석사과정을 마치고 1956년 1월에 귀국하셨다.
귀국 가방 속에는 미국 남장로교의 선교사요 한남대학교의 설립자겸 초대학장인 린턴 박사가 보낸 부학장 초빙장이 들어있었다. 린턴 박사는 전주고등학교 시절의 교장선생님이셨다.
한남대학은 1956년 개학하였고 린턴 학장님은 1911년에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로 한국에 오셔서 1960년 8월 임종하기까지 50년 동안 선교와 교육에 투신 남장로교와 모든 외국선교사들의 모범이 되신 거인이셨다. 1895년 한국에 입국한 남장로교의 한국 최초 선교사인 유진벨 선교사(1925년 소천)가 린턴 박사의 장인이며 오늘날 유진벨 의료재단을 만들어 이북결핵퇴치운동을 펼치는 분들이 손자들이다.
이사장은 미국 컬럼비아대학 교수인 스티븐인데 이북 통으로 한국정부가 이분들의 조언을 많이 받았다는 소식이며, 모 장로의 사위이다.
전영창 은사님은 청소년들을 바로 교육해야 희망이 있다고 생각하여 아무도 가기 싫어하는 곳 거창 시골 촌놈들의 아버지가 되셨다.
각처에서 그와 일하기를 제안하였지만 그는 평생을 노모와 처와 자녀를 시골에서 모시고 보양하며 개혁적인 열린 교육과 시청각 교육을 실천하셨다.
그리고 능력별 열린 수업으로 분재형 교육보다 자연 성장식 능력개발 전인교육을 하시며 복음을 전하셨다.
눈이 온 이튿날엔 전교생과 함께 눈싸움과 토끼 사냥을 하며 소풍 때에는 1박2일 야영하였다.
거창고등학교는 인문고임에도 춘추로 교내체육대회와 학예발표회를 실시하여 청소년들을 잘 이해하고 전인교육을 하였다. 이러한 프로그램은 훗날 전국으로 퍼져 2박3일 청소년 수련의 모델이 되었다.
지금 은사님의 피와 땀과 생명까지 희생한 밑거름으로 거창고의 나무는 거목으로 자라고 있다.
은사님은 거창의 교육을 바꾸고 한국의 교육을 개혁하였다. 가난과 절망과 좌절의 농촌현실을 극복하고 불굴의 의지로 앞날을 개척하는 정신과 사회봉사와 교회와 국가에 헌신하는 작고 큰 인물이 되기를 바라셨다.
세계적인 훌륭한 분들의 성공을 예화로 들면서 제자들에게 야망을 품도록 고양하시고 가슴이 크고 멀리 보는 사람이 되라고 강조하셨다.
세상의 상은 하늘의 상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경향신문 주최로 ‘국민이 주는 희망상’을 수여하셨고 동상이 우상시 될 수 있다는 평소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이 1977년 1주기에 전신동상을 세웠다.
은사님의 헌신으로 거창고등학교가 전인교육과 더불어 참교육의 모범학교로 많은 방송과 교육 잡지에 소개되었다.
제자들이 세계에 흩어져 각 분야에서 희생 봉사하는 모범을 보이며 스승의 얼굴에 누를 끼치지 않는 삶을 살고 있다.
특별히 각기 다른 교파에 목사 장로 권사가 백여 명, 총장, 학장, 판·검사, 교수, 의사, 간호사, 교육부 고위공무원을 비롯하여 초중고 교장, 교사, 사장, 기자, 방송위원, 화가, 문필가 등 사회에 진출하였으며, 빛도 없이 이름도 없이 사회봉사자들로 수고하고 있다.
현재 학교의 전통으로 졸업생으로 구성되는 체육대회가 2년마다 개최되고 있으며, 졸업 후 30년 만에 ‘Home Coming Day’를 최초로 실시하였으며, 부산지방 총동문회가 학교 교훈비(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를 교정에 설립하였는데 특이한 것은 졸업생 수가 제일 적은 제5회 졸업생들이 주동이 되었다.
그리고 각 지방에 동문회 활동을 잘하고 있으며, 지금은 17회와 18회 졸업생이 교장 교감직을 맡아 잘 운영하고 있다.
스승의 달과 어버이 달에 은인이요 보호자이신 은사님의 은혜와 사랑을 기리며 교장선생님 서거 31주기를 맞이하여 이 못난 제자가 송구한 마음으로 추모와 회한의 글을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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