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6년부터 일본의 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尊氏)가 겐무(建武)정권을 쓰러뜨리고 정권을 잡은 때부터 1573년 아시카가(足利) 막부가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에게 멸망될 때까지 약 240년간의 시대를 말한다. 가마쿠라(鎌倉) 시대까지는 천황을 받드는 구게정권(公家-왕이 있는 조정의 정권)과 막부정권이 양립하는 2원정치였으나 아시카가(足利)시대는 구게정권을 물리치고 무가에 의한 단독정권을 수립한 것이 특징이다.
◈겐무의 신정(建武 新政) - 1334년, 고다이고(後醍醐)천황은 가마쿠라(鎌倉)막부가 멸망하자, 교토(京都)로 돌아와 천황제와 귀족정치를 이상으로 하는 천황중심의 독재적인 새로운 정치를 시작했다. 그러나 이는 전통이나 관습을 무시하고 정치 쇄신을 서둘렀기 때문에 심각한 역효과가 발생하였으며, 무사들을 경시하였기 때문에 무사 반란이 잇달아 곧 붕괴하였다. 이리하여 신정부는 겨우 3년 만에끝나고 1336년, 아시카가씨(足利氏)에 의한 무가정권이 부활하게 되었다.
◈남북조(南北朝)시대 - 패주한 고다이고(後醍?)천황은 황위의 정통을 주장하며 요시노(吉野)에 조정을 세웠고(南朝), 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尊氏)는 교토(京都)에 새로운 천황(쿄묘 -光明천황)을 앞세워(北朝), 1338년에 정이대장군이 되어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를 개창하였다. 이들은 서로 다른 두개의 연호를 쓰면서 약 60년간 대립, 병존하였다. (南北朝 時代)
◈남북조(南北朝)의 통일 - 무로마치 초기, 막부 내부에서는 권력투쟁에 의한 분열과 전란이 계속되었으나, 아시카가 요시미츠(足利義?) 쇼군(將軍)이되면서 큐슈를 평정하고 막부의 권력을 확립하며 안정기에 접어들었다. 그리고 1392년, 요시미츠는 남조와 교섭하여 남조의 고카메야마(後龜山)천황이 북조의 고코마츠(後小松)천황에게 양위하는 형식으로 남북조의 합체를 실현하였다. 이리하여 무로마치 막부는 전국지배를 완성하고 이후 황위는 북조의 자손이 계승하게 되었다.
*슈고 다이묘의 성장
약 60여년 간의 내란의 결과 조정의 정치권력은 무력해지고 장원체제도 크게 후퇴했다. 이에 반하여 지방무사의 세력은 증대하고 이들 무사세력을 가신화하여 내란을 이겨냈던 슈고는 무로마치 막부의 지배체제 하에서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게 되었다. 막부는 지방세력을 조직화할 필요에서 아시카가씨 일족을 정치적, 군사적 요지에 배치하고 내란을 극복하기 위해 슈고의 권한을 강화하였다. 또한 슈고는 국아의 기능도 흡수하며 1국 전체에 미치는 지배권을 확립해 나갔다. 이러한 슈고를 가마쿠라 시대의 본래의 슈고와 구별하여 슈고다이묘라 부른다. 이들은 지방무사와 주종관계를 맺고 영주화 되어 갔다. 슈고다이묘의 영국은 세습되고 막부는 슈고를 해임할 수 없었다. 이러한 슈고다이묘가 만들어 낸 지배체제를 슈고영국제라고 한다. 한편으로 슈고다이묘는 재지영주의 저항을 받는 일도 있어 그 존립을 위해서는 장군의 권위와 막부라고 하는 정치조직을 필요로 하였다. 장군도 직할군사력의 약하고 직할령도 적어 내란의 혼란기를 극복하고 전국적 지배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슈고다이묘의 힘을 빌리지 않을 수 없었다. 장군과 슈고다이묘는 때로는 대립하는 일도 있었지만 결정적으로는 분리하기 어려웠다. 즉 무로마치 막부는 장군과 슈고다이묘의 타협과 균형 위에 성립한 연합정권이라고 할 수 있다.
*서민의 대두
14,15세기의 농촌에서는 전란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혹은 영주와 무사에 대항하기 위해 '소'라든가 '소손'이라고 부르는 자치적 집단이 발달하였다. 이들은 처음에는 타촌으로 도망가거나 탄원을 하였지만 이윽고 '도잇키'라고 부르는 무장봉기의 형태로 나타났다. 그 요구는 장원영주에 대해 연공의 감면과 가혹한 지배를 하는 대관의 파면, 슈고다이묘에 대해서는 조세와 사역의 감면이 중심이었다. 이들은 막부에 덕정을 요구하며 교토 나라의 요소를 점거하기도 하고 직접 돈을 빌린 도소, 시카야를 습격하여 차용증서를 태우거나 저당물을 빼앗기도 하였다. 이에 막부는 덕정령의 발포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덕정을 이용해서 막부의 수입을 챙기는 등의 행위도 서슴치 않았다. 이리하여 사회는 더욱 문란해지고 재정도 혼란에 빠져 막부의 권위는 점차 실추되어 갔다.
●오닌의 난 전 상황(배경)●
요시미쓰의 뒤를 이어 요시모치가 된 후 쇼군과 유력 다이묘 사이에 세력은 균형을 이루었다. 안정된 세월은 그 후 6대 쇼군에 취임한 요시노리에까지 이어졌다. 요시노리는 출가를 했다가 환속하여 쇼군이 되었다. 그러나 이때에 이르면 쇼군의 권력이 약화된 편이라 할 수 있다. 요시노리는 다이묘들에 의한 제비뽑기에 의해쇼군이 되었기 때문이다. 요시노리는 막부 내에서 쇼군의 지위를 강화하려 했다. 요시노리는 관령 및 유력 슈고 다이묘의 권력을억압하고 귀족들도 탄압하였다. 1438년 간토에 토벌군을 보내 가마쿠라 구보인 모치우지를 물리쳤다. 요시노리는 성격이 잔혹한 편이어서 일련의 정책들은 공포스런 분위기를 만들었다 그러나 요시노리는 1441년6월 아카마쓰 미쓰스케에 의해 목이 잘리는 비운을 맞이하게 되었다. 아카마쓰는 자신의 영기가 몰수된다는 소문을 듣고 일을 벌린 것이었다. 아카마쓰시는 이후 막부군에 토벌되었으나 요시노리의 죽음은 쇼군의 권위를 떨어뜨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쇼군 권력이 약해짐에 따라 막부정치의 실권을 유력 다이묘가 차지하게 욌다. 그리고 약육강식에 따가 전란이 계속되는전국시대의 막이 오닌의 난을 시발로 하여 올랐다.
●오닌의 난(내용)●
1465년, 무로마치 바후쿠의제8대 쇼군인 아시카가 요시마사는 그다지 정무에 관심이 없었다. 게다가 아내인 히노 도미코와의 사이에 아들이 없었다. 그래서 요시마사는 이미 출가하여 불문에 귀의해 있던 동생 요시미를 후계자로 정하고 호소카와 가쓰모토를 그의 후견인으로 결정하였다. 그런데, 때마침 도미코가 아들(요시히사)를 낳았다. 일단 쇼군의 자리를 요시미에게 양위하기로 결정했던 요시마사 였느나 도미코가 설득하자 요시히사를 후계자로 인정하고 말았다. 이때에 도미코는 야마나 소젠을 후견인으로 하겠다고 설득했는데 야마나는 호소카와 세력을 다투던 사람이었다. 이렇게 되자 요시미가 참을 수없게 되었다. 결국 쇼군가는 쇼군 후계자 문제로 요시히사파(히노 도미코)와 요시미파로 분열되고 말았다. 이와 같은 쇼군 후계자 문제로 바후쿠의 실권을 둘러싸고 호소카와 가쓰모토와 야마나 쇼젠이 서로 맞서고, 나아가 시바씨와 하타케야마씨 등 슈고다이묘의 상속 싸움까지 겹쳐 눈 깜짝할 사이에 분쟁이 시작되고 말았다. 막부는 호소카와 동군, 야마나 서군으로 나뉘어져 전쟁을 벌였다. 요시마사는 이 들을 통제할 수가 없어서 다른 슈고들에게 싸움을 진압할 것은 요청하였다. 그 결과 아시카가 씨의 모든 부하는 두 파로 분열되어 11년 간이나 계속되는 전쟁을 치렀다. 일본 전국을 휘몰아친 오닌의 난은 양측의 대효인 호소카와 가쓰모토와 야다나 소젠이 모두 사망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무장들이 줄이어지면서 , 1477년 불타 황폐해진 교토를 남긴 채종결 되었다.
●오닌의 난(결과) ●
오닌의 난은 끝났지만 그 후유증은 엄청났다. 더이상 정치적 안정을 기대할 수 없는 무로마치 막부는 무가의 정점인 쇼군의 권위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또 10년의 걸친 싸움으로 막부의 통솔력은 현저히 약화되었고 지방의 호족과 슈고 다이묘가 실권을 잡게 되었다.
♣무로마치 시대의 문화♣
무로마치 문화는 무가세력의 신장과 서민의 대두를 기축으로 전개되었다. 무가는 공가의 전통적인 문화를 흡수하면서 독자의 문화를 발전시켜 나갔다. 그리고 도시에서의 활동 혹은 지방에서의 자치활동과 도잇키는 문화의 면에서도 반영되어 집단으로 즐기는 서민적인 예능과 문예가 발달하였다.
▶ 화려한 가운데 청산함을 느끼게 하는 기타야마(北山)문화
공가의 몰락에 따라 천태, 진언의 구불교는 주류적 지위를 잃어버리고 대신 신불교가 교단을 형성하여 무사, 농민, 상공업자에게로 그 신앙은 퍼져나갔다. 그 중 임제종은 장군가의 보호하에 융성해졌다. 제3대 장군 아시카가 요시미쓰는 남송의 제도를 모방하여 오산. 십찰 제를 정비하고 오산의 승려를 정치. 외교고문으로 임용하였다. 이리하여 대명무역의 성행과 더불어 한시문을 중심으로 하는 오산문학이 태어나고 송에서 일어난 주자학이 연구되었으며 송, 원의 수묵화가 유행하고 오산판이라 불리우는 출판이 행해지는등 오산은 학문과 문화의 중심이었다.
14세기말 요시미쓰는 교토 기타야마에 별장을 만들어 거기에 화려한 금각을 세웠다. 기타야마 문화는 장군과 슈고다이묘의 보호하에 성장하여 공가문화의 전통과 대륙문화를 기조로 한 것이었다. 그것은 금각의 건축양식이 전통적인 양식에 선종양식을 가미한 것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현재 전통예술로 성황을 누리는 노(노래와 춤, 반주로 이루어진 종합무대연극)는 옛날 종교의식의 예능에서 출발하여 가무와, 연극의 형태에 중점을 두는 일종의 오페라이다.
무로마치시대에 사원과 신사의 보호를 받으며 노를 전문으로 하는 예능집단도 생겨나 각지에서 자주 흥행되었다. 익살과 풍자를 기조로 하는 교겐은 노의 사이사이에 공연되는 희극으로 당시의 세태를 소재로 풍자하며 많은 서민으로부터 애호 되었다.
▶ 일상생활속의 미를 추구하는 히가시야마(東山)문화
제8대 장군 아시카가 요시마사는 오닌의 난 이후 요시미쓰의 금각을 모방하여 은각을 세웠다. 간소하고 깊은 정취가 풍기는 쇼인 즈쿠리 양식의 은각에는 이 시대 무가독자의 문화가 나타나는데 이 히가시야마 문화는 전통적인 문화를 무가가 흡수하여 독자적으로 완성한 것으로 간소함과 한적함을 기조로 하고 있다.
차노유(다도라고 불린 것은 18세기 후반)는 차와 선의 정신과의 통일을 주장하고 마음의 정화와 평온을 추구하는 와비차의 개념을 창출하여 16세기 중반에 다도가 센리큐에 의해 완성되었다. 또 무로마치 중기에는 이케보노 센케이에 의해 릿카(불전에 놓는 꽃)를 주로 하는 이케바나(꽃꽃이)가 확립되어 널리 유행하였다. 묵의 농담으로 자연과 인물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수묵화는 화승 셋슈에 의해 대성되었고 또 가노 마사노부. 모토노부 부자가 수묵화에 야마토에의 기법을 가미해 새로운 가노파 화풍을 일으켰다. 그들은 막부의 화공이 되어 병풍, 후스마 등에 회화를 그렸다.
교토를 비롯한 각 지역 계층에 지어진 무로마치 문화는 현대문화에도 강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