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Mary Magdalene (막달라 마리아)?
Brown이 Mrs. 예수라고 주장하는 막달라의 마리아는 누구인가?
복음서에는 7사람의 마리아가 있다. 그 중에서 성모 마리아 다음으로 막달라의 마리아가 자주 기록되고 있다.
막달라의 마리아는 공관 복음의 기록에 의하면 갈릴리에서 온 여인중의 하나로 예수님과 제자들에게 재정적인 도움과 수발을 덜었든 여인들 중의 한사람이었다. 또 마리아는 십자가와 묘지에까지 동행하였었다.(마 27:, 막 15:, 눅 23:) 그리고 부활의 아침에는 첫 증인으로 제자들에게 부활을 알렸든 사람이다.(마 28:, 막 16:, 요 20:) 눅 8:2에 의하면 일곱 귀신이 들렸다가 고침을 받은 여인이다. 막달라는 갈릴리 바다의 서쪽 해안에 있는 작은 동리로 디베랴 라는 도시의 북편에 위치하고 있었다. 여기가 마리아의 고향인 듯 하다.
초대교회의 이야기들에서는 눅 7장에 기록된 여인이 막달라 마리아라고 생각하였었다. 어느 날, 예수님은 바리세인 시몬의 집에 초청되어 가셨다. 이 때, 죄인인 한 여인이 자기의 눈물과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고 옥합의향유를 예수님 발에 부은 기록이 있다. 예수님께서 "네 죄사함을 얻었느니라.....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라고 말한 이 여인이 막달라의 마리아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요한 12장에는 예수님이 자주 가셨든 베다니 나사로(시몬?)의 집 이야기가 나온다. 누이들인 마르다와 마리아와 함께 한 자리였다. 나사로를 예수님이 죽음에서 다시 살리신 그해의 유월절 때의 이야기이다. 마리아가 나드 한 근이 들은 병의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머리로 그 발을 씻었다. 누가복음의 기록과 요한복음의 기록이 동일한 내용이나 같은 사건이라고 보기도 하고 아니라고 하기도 한다. 그러나 카도릭 교회에서는 1969년 이후부터 연관이 없다고 하는 입장이다. 위의 두 사건이 막달라 마리아가 한 일이라는 확실한 증거가 없다.
정교회의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로는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는 사도 요한을 따라서 후년에 예배소로 가서 죽었고 사후 콘스탄티노풀에 장사 지냈다고 한다. 우리가 읽은 데로 또 다른 근거 없는 전설로는 나사로와 마르다와 마리아는 프랑스의 남쪽 지방에 갔고 중세 때의 소문으로는 이 지방에 그의 묘가 있다고 한다. 불란서 혁명 때 그녀의 뼈들은 불란서 전국에 흐트졌고 지금은 Marseille 가까운 Le Saint-Baume 에는 머리 부분만 소위 "마리아의 무덤"이라고 하는 묘에 있다고 한다.
막달라 마리아가 나사로와 마르다의 동생이었다거나 또 창녀였다는 이야기는 성경 어디에도 없다. 그러나 벳세다의 마리아, 죄 많은 여인이고 예수님께 기름을 바른 여인을 하나로 묶어 만든 사람이 590년서 604년 간에 교황을 지낸 St. Gregory the Great 라고 한다. 지금은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카도릭에서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7. 예수님은 결혼을 하였는가?
성경 어디에도 예수님이 결혼하였었다는 기록이 없다. 물론 하지 않았다는 기록도 없다.
초대교회에서 예수님이 결혼하지 않았다는 것은 확실한 사실로 받아더려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신약의 저자들은 많은 경우에 교회를 "그리스도의 신부"로 표현하고 있다. (고후 11;2, 옙 5:21-23, 계 21:9-10) 만약 실제 Mrs. 예수가 있었다면 그를 두고 교회를 신부라고 표현하는 일은 껄끄러운 말로서 그런 표현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Brown은 예수님 당시의 유대 사회에서는 사회규범 상 독신 남성이 결혼하지 않는 것은 금하고 있어서 독신으로 지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이야기한다.
1세기의 유대인 철학자인 아렉산드리아의 Phillo 의 기록에 의하면 이 당시의 Essene들은 결혼을 거부하고 독신을 권장하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우리가 잘 아는 세례 요한이 엣세네 인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가장 비슷한 모습으로 신약 성경에 기록된 인물이다. 예수님과 동년배이지만 결혼 한 것 같지는 않다. 쿰란 동굴에서 발견된 사해 두루마리 중에는 그들의 생활규범이 기록된 것이 있는데 여기 보면 결혼과 관계없이 그들은 금욕적인 집단 생활을 하였으며, 결혼한 사람들은 처와 자녀들을 그들의 집단에서 떨어져 밖의 다른 지역에 거주하고 있었다.
또 쉽게 구해 볼 수 있는, Josephus의 역사서 (The Antiquities of the Jews 18권 1:5:18-22) 에는 Essenes들의 기록이 있는데 결혼에 관한 한구절만 인용하면 다음 같은 것이 있다. "....이와 같이 사는 사람들은 약 4000명이 있었다. 이들은 결혼하여 처를 가지지도 않았으며 하인들을 두려고도 하지 않았다. 후자는 사람으로 불공평하게(unjust) 하게 할까 생각하여서이고 전자는 (결혼) 가정적인 다툼에 휘말릴까 하여서이었다...."
일부의 사람들은 예수님이 엣세네들의 집단과 무관하지 않을 가능성이 많다고 한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그들의 기록들과 비슷한 내용이 너무나 많아서 그 같이 이야기한다. 또 예수님 당시에는 사두개, 바리세, 엣세네 외에도 많은 생각이 다른 분들도 있었든 것이 확실하다,
브라운이 말한 이러한 율법주의적인 것은 주후 70년에 예루살렘 멸망 후에야 유대인들의 Rabbinic Judaism이 왕성하여졌고 그 때부터 유대의 율법적인 생활규범이 더 확실하여졌다. 어떻든 Rabbinic Judaism의 조상인 바리세파 사람들을 야단치고 저주하시든 예수님이 그들과 다르다는 것이 하등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예수님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바리세의 가르침만 따르지는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경에도 주님을 온전히 섬기기 위하여 (고전 7:25-38), 천국을 위하여 (마 19:12) 독신으로 지날 수 있다고 말한다.
또 저자는 The Nag Hammadi Library의 위경 들을 예로 든다. 나는 이전에 한번 Gnosticism 에 대하여 글을 쓴 일이 있음으로 그 항을 보아주시면 도움이 될 줄 안다.(24번 이단의 뿌리) 이 위경들은 대부분이 2-4세기경에 기록된 것으로서 우리의 성경보다 시간적으로 후일에 기록되었다. 또 이방의 신들을 섬기고 헬라의 철학적인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그들의 생각에서 그리스도를 해석하려는 데서 나오고 기록된 경전이다. 콥딕어로 기록된 이 경전들 속에 빌립의 복음서, 마리아의 복음서 그리고 토마의 복음서 등 많은 위경 들이 있다. 저자는 거기에서 인용한 구절들이 예수님의 결혼 사실을 증명한다고 말한다. 위경은 대부분의 내용들이 어떤 면이 우리가 읽어도 유치하고 이상한 구석들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빌립의 복음서도 그렇다. 예수님의 이야기는 많지 않다. 예수님의 말씀도 복음서에 있는 것을 몇 개 인용하였다. 좀더 철학적이고 요사이 말로 신학적인 글이다. 또 땅 밑에 오래 보관돤 결과로 비교적 보존 상태가 좋지 않는 부분도 있는 경전이다.
Brown이 인용한 구절은 다음과 같다. (번역은 영문에서 내가 하였다)
59:6-10 "주님과 항상 같이 동행하는 세 사람이 있었다. 어머니 마리아, 그의 여형제, 그리고 그의 동반자로 불리든 막달라이다. 그의 여동생, 어머니 그리고 그의 동반자, 각자가 모두 마리아였다."
63:33-36 "그리고 동반자 [.....] 막달라 마리아. 그녀를 [모든..] 제자들 보다[....사랑하였다]. 그리고 [자주] 그 여자의 [.....]에 키스하였다. 나머지 [제자들]은 [.......]"
여기서 문제가 되는 점은 동반자 (짝)란 단어와 아마 [입]이라고 생각되는 단어가 짐작이 되는 입맞춤이다. 그는 말하기를 아람어를 하는 사람은 누구나 동반자란 단어가 wife를 나타내는 말로 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경은 원래 아람어와는 관연이 없는 희랍어로 기록된 것을 콥딕어로 번역한 것이다. 희랍어의 koinonos 란 단어는 바로 wife를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한다. 더 영적인 뜻으로 사용되어지고 있다 한다. 물론 처나, 여자 형제를 지칭하기도 한다. 한 예로 눅 5:10의 "시몬의 동업자 야고보와 요한"이란 단어의 동업자가 바로 그 단어이다. 처로 말하는 것은 무리이다. 특히 Gnostic 문서들은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 많음으로 전체 경을 읽어 가는 중에 별 생각 없이 지나갈 구절을 이상하게 해석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예수님 당시에서 200-300년 이상 지난 뒤에 누가 기록한지도 모르는 경을 중요시 할 필요는 전혀 없다고 생각된다.
만약 없어진 부분이 입에 한 키쓰라고 하드라도 경을 전체적으로 읽어 가면서 보면 큰 뜻이 없어 보인다. 우리 성경의 바울의 글에도 거룩한 입맞춤으로 문안하는 말이 나온다. 현대 생활에도 많은 경우에 서양 사람들의 입맞춤은 나에게는 꼭 성적인 의미로만 해석 될 수가 없다고 생각된다.
소설에서는 주장하지만 사해문서에는 신약의 성경과 연관된 것이라고 생각되는 초대 기독교의 인물들의 이름이 나오는 경을 나는 발견 할 수가 없었다. 예수님의 이름은 내가 과거에 보았든 5권의 사해문서를 기록한 책들에서 나는 찾을 수 없었다. 아마 Brown은 사해문서의 내용도 정확히 모르고 있은 듯 하다(?).
또 마리아가 벤야민 지파의 공주라고 하는 말은 성립 할 수가 없다. 막달라가 있는 갈릴리는 벤야민 지파의 자리가 아니다. 예수님 같이 고향을 떠나서 살았다면 다른 문제이긴 하지만...그래서 남부의 베다니를 그의 집으로 만들기 위하여 Margaret Starbird 는 그의 책에서 막달라 마리아는 나사로, 마르다와 형제간이라고 주장한다. 그렇게 만들어 유다지파인 다윗의 후손과 벤야민 지파의 사울왕의 후손을 결혼시킬 이론적 근거를 만들고 있다.
9. Leonardo Da Vinci?
Brown은 Mona Lisa는 여성화한 Leonardo의 자화상이라고 하며 그 이름은 애굽의 여신 Amon and L'isa 합성에서 Mona Lisa가 나왔다고 한다. 사실은 Florence 의 비단장사로 거상이었든 Francesco di Bartolomeo del Giocondo 의 부인으로 실제 생존하였든 Madonna Lisa (Mona Lisa Gherardini) 란 여인의 초상화였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몇 일전 (2005년1월 20일)의 전 세계적인 보도로 다빈치가 1500년부터 4년간 Florence (피렌체)에 머무르면서 그림을 그렸든 숨겨진 화실을 발견하였다고 발표하였다. Florence 중심의 Saintissima Annunziata 란 성당의 부속된 수도원 건물인 이 곳은 다빈치의 벽화와 제자들의 그림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었다고 하였다. 미술 전문가들은 이 성당에서 다빈치는 Madonna Lisa를 만났다고 항상 추측하고 있었다. 이 곳은 그가 30구 이상의 시체해부를 하였든 Santa Maria Nuova Hospital이 바로 근처에 있다. 이 성당은 Lisa의 시댁의 가족 성당이었다고 한다.
또 다른 이야기로는 Maike Vogt-Luerssen가 11년 동안 연구한 뒤에 이 여인은 Milan의 공작부인인 Isabella of Aragon 이라는 분이라고 말하였다. 다빈치는 17년간 Milan의 Ludovico Sforza 공작의 궁에서 공작이 1499년에 실각하기까지 궁정화가로 근무하였다. 그는 모나리자의 흑녹색의 옷이 이를 말해 준다고 주장한다. 1489년의 봄 혹은 여름에 새 공작부인의 초상화로 그린 것이라고도 한다.
다른 학설로는 Bell Laboratory 의 Lillian Shwartz 는 컴퓨터로 다 빈치와 마돈나의 얼굴을 재고 맞추어 본 결과는 두 사람의 얼굴 규격이 너무 같은 모습이라고 한다. 그래서 자화상일 가능성을 이야기한다.
최후의 만찬은 희미하여진 부분을 컴퓨터 그래픽으로 재생하여보면 공중에 떠있는 손이나 애매한 부분이 전혀 없다고 한다. 다빈치는 특히 그림의 대칭의 안전성을 중요시하여서 이 그림도 정확한 대칭적인 구도를 보이고 있다. 물론 이 그림이 이태리식으로 해석된 최후의 만찬임으로 의자에 앉은 그림이다. 예수님 오른편에 앉은 한 사람만이 수염이 없는 얼굴이다, 그래서 오랜 동안 사람들이 여인 같은 모습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데로 이 사람은 요한 이다. 요한은 제일 젊은 제자라고 알려져 있어서 수염이 없는 모습으로 나타난 듯 하다. 특히 다빈치가 동성애자로서, 그가 젊은 남자 얼굴을 그릴 때 여성에 가까운 느낌을 주게 그릴 가능성은 있다고 하여도 놀랄 일은 아니다.
저자가 제자들과의 간격의 모양이 V자 모양, M 자 모양 등이라고 하며 그 중요성을 이야기하나 그것은 저자 자신의 느낌일 뿐이다. 나는 차라리 ㄱ자나, ㅅ자, ㅈ자 모양으로 내 눈에 보인다고도 할 수도 있다. 다빈치에 대한 가정이 없어지면 아무 뜻도 없는 이야기가 되고 만다.
10. 기타
* 기독교는 여신을 비하하고 축출하였는가? 또 니케아의 회의에서 이방의 남신 사상을 끌여 들였는가?
아니다. 기독교는 유대교에서 출발하였고, 구약성경은 아세라 목상을 섬기는 자들을 죽이고 저주하고 있다. 그런 유대교에서 기독교인이 된 히브리파 유대인들은 할례를 지키고 유대교의 교조주의적인 교리를 지키기를 원하였다. 이를 Ebionism이라 하고 오랜 동안 남아 있었다. 바울은 야고보로 대표되는 예루살렘 교회와 (Ebionist?) 그 때문에 평화롭지 못하였다. 초대 기독교는 바울의 예베소 전도에서 보듯이 여신인 아데미와 적대관계에 있었다. 이 일은 니케아회의의 300년도 전에 일어난 일이다.
기독교 안에서는, 신교들은 그렇지 않지만 오히려 카도릭에서는 이방 종교의 여신 숭배사상이 많이 남아있다고 나에게는 생각된다. 성모 마리아와 많은 성녀들.......을 생각하면 그렇다.
* 노아도 알비니즘(백색증) 이었든가?
정경의 어느 곳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말이다. 그러나 위경의 1 Enoch서 106:2 에 있다고 한다. 내가 본 에녹서는 일부만 있어서 (방대한 분량의 에녹서 전체를 나는 갖지 못하여) 확인하지는 못하였다. 몸의 메라닌 색소가 선천적으로 결핍되어서 나타나는 현상으로서 보통 색소 결핍으로, 눈동자의 색소가 없어서 시각에 문제가 보통 있다.
* Knight Templar(성당 기사단) 오늘날의 건축 노동조합 같은 단체인가?, 또 그들이 중세 성당을 건립 할 때에 Gothic 식 건축만을 지었고 이는 여신의 성기를 암암리에 나타내는 표증인가?
그들이 유럽의 성당을 지을 때에 아무런 권한도 없었고 관여 할 입장도 아니었으며 각 지역의 주교들이 결정하고 건축하였다.
실제 성당 기사단은 1118년에 성지를 방문하는 순례자들의 안전을 지키기 위하여 만들어졌다.1291년 십자군의 마지막 성까지 무너진 후에 그들은 괄세를 받게 되었다. 그들의 마지막은 로마의 교황이 아니라 불란서의 Phillip에 의하여1307년에 120명이 화형을 당했다고 한다.
많은 글을 보았으나 간추려 이야기하는 재주가 없고 워낙 재미 없는 내용이라서..... 책을 보셨든 분들은 한번 더 의심되는 부분의 참고로 보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첫댓글 선배님 하루만에 뵙게 되네요. 선배님의 자료수집과 연구 그리고 정리솜씨에 감격하면서 오늘 점심 약속한 우리 교회 교육목사님에게 보여드리려고 인쇄 한 부 했어요. 괜찮겠죠? 감사합니다.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