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불운한 천재다.
그것도 세기에 한 번쯤 나올까, 말까한 그런 . . . . 그러나 내가 여기서 불운하다는 표현을 빌린 것은 이런 나의 천재성을 인식하는 사람들이 내 주위에는 없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현상은 이전을 살다간 많은 현인들의 역사 속에서도 흔히 있어 왔었던 일이다.
천동설에 대항하는 지동설을 주장한 갈릴레오, 강낭콩의 교배실험으로 일정한 유전법칙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발견한 멘델, 사과가 떨어지는 현상을 보고 만류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뉴튼과 같은 사람들은 모두가 동시대의 사람들보다 적어도 50년에서 100년은 앞서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가지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세상은 넓고 할일은 많다!”
이 구호는 나의 좌우명이다.
시대가 아무리 어려운 IMF시대라지만 이 넓은 세상에서 우리가 해야 할일은 얼마나 많은가! 하지만 오늘을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무한한 잠재능력을 벽 속에 가두어 놓고 살아간다. 공무원의 경쟁률이 평균 몇 백대 일이라는 둥, 임용고사가 임용고시로 명칭이 바뀔 정도로 시험이 어려워졌다는 따위의 궁색한 변명을 늘어 놓고서 말이다.
하지만 천재는 항상 천대와 멸시 속에서도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고 오로지 자기 일에만 몰두한 나머지 역사는 오늘 날까지 발전되어 왔다. 상대성이론을 주장한 아인슈타인이 그랬고 최초의 철갑선을 고안한 이순신 장군이 그랬으며, 장군의 아들 김두한도 아마 그랬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시대를 앞서 살다간 현인들의 삶을 본받아 세속에 찌들어 빠진 어리석은 중생들의 동요에 흔들리지 않기로 했다. 비록 지금은 부모님의 눈초리가 따갑고 애인의 바가지 긁는 소리가 싫어서 9급 공무원 수험서와 들리지도 않는 Toeic문제집을 들고서 학교독서실을 출퇴근하고 있는 실정이지만 마음만큼은 항상 저 푸른 해원을 향하여 나부끼는 노스텔지어스의 손수건처럼 자유를 갈망하고 있는 것이다.
어릴 적 나는 세르반테스의「돈키호테」를 감명 깊게 읽었다.
아니 TV로 감명 깊게 보았던 듯하다.
어릴 적에 내가 책을 읽었던 기억이 나의 머리 속에는 하나도 없으니까
그리고 20여년이 지난 지금 나는 애인으로부터 내가 마치 돈키호테 같다는 말을 들었다.
이 삭막한 세상에서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방황하는 나에 대한 애인의 핀잔이었다.
나에게는 아직도 먼 옛날 그 어릴 적 순수했던 동심이 아직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일까?
만약에 그렇다면 나는 애인의 핀잔을 감수하고서라도 이 시대의 마지막 돈키호테가 되고 말리라! 시대가 변하고 주위의 환경이 아무리 변한다고 해서 사람의 마음까지 변해야 한다는 말이 결코 정답이 될 수 없는 것처럼.
2
오늘도 어김없이 나의 발길은 학교 도서관을 향하고 있었다.
내 옆에서 팔짱을 끼고 동행하는 애인과 함께 학교정문을 들어서려는 입구에서는 어떤 아저씨 한분이 붕어빵을 팔고 있었다.
참새가 방앗간을 지나칠 수 없듯이 나는 묻는다.
“이거 하나에 얼마죠?”
붕어빵 장수는 마치 미끼에 걸린 붕어를 낚아채듯이 잽싸게 말한다.
“아~예, 그거 세 개에 천원인데요.”
망설이던 나는 결국 기어이 붕어빵 세 개를 사고야 만다.
학교 정문을 들어설 때까지 애인과 나는 붕어빵을 씹으며 금술 좋은 부부처럼 잘 지냈다. 그러나 도서관을 향하면서부터 둘 사이는 냉전체제로 돌입하였다.
그 놈의 남아 있던 붕어빵 하나가 화근이 된 것이다.
‘아, 배고파 죽겠다. 혹시 이놈의 가시나가 붕어빵을 달라고 말하면 어쩌지?’
‘아침밥도 안 먹었는데 잘됐다. 아쉬우나마 붕어빵으로 배를 채워야지.’
“오빠 나, 붕어빵 하나 더 먹을래.”
‘아~ 진짜! 그 좋고 많은 말 중에서 왜 하필 붕어빵 이야기야!’
“싫다!”
‘이게 요즘 들어 미쳤나! 기가 막혀 말이 다 안나오네.’
“뭐~어, 방금 싫다라구 했어!”
‘이런 상황에서는 한대 얻어맞기 전에 어서 빨리 변명을 해야 한다.’
“내 돈으로 산거니까 당연히 내가 두 개를 먹어야지!”
‘어쭈~ 짜식 요즘 많이 컸네.’
“붕어빵 하나에 치사해서 정말.”
내가 이렇게까지 모험을 걸었던 이유는 어젯밤 꿈자리가 좋았기 때문이다.
어쨌든 아침부터 하루일정이 좋아서 정말로 기쁘다.
독서실에 자리를 잡고 우리는 모닝커피를 마시기 위해서 커피자판기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시험기간이 얼마 남지 않아서인지 아침부터 공부하러 나온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자기 돈으로 자판기 커피 두 잔을 뽑은 애인이 눈웃음을 치며 잔을 건넨다.
“오빠, 우리 저기 있는 벤치에 앉아서 커피 마셔요?”
‘이야~오늘 진짜 무슨 날인가? 운수대통인걸.’
“으음~ 그래, 그러지 뭐. . . .”
나는 자신만만하고 늠름하게 대답한다.
커피자판기가 위치한 곳은 2층이었고 벤치가 있는 곳은 1층 건물을 나와서도 제법 걸어
들어가야 하는 한적한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아침부터 야가 못 묵을 거를 묵었나? 왜 이리 분위기를 잡고 난리고.’
벤치에 다다른 우리는 서로가 나란히 일직선이 되게 앉았다. 그리고 애인은 나를 향해 바싹 엉덩이를 밀착해서 앉는다.
‘하하하! 오늘 진짜 재수 좋네.’
하는 찰나에 사늘하게 내리깐 칼날 같은 목소리를 들었다.
“야!”
정면을 주시하며 커피를 들이키던 애인의 목소리였다.
할말을 잃어버린 나는 커피가 들어 있는 종이컵을 두 손으로 움켜질 뿐 더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니, 요새 마아이 컸다. 그제!”
“아아~ 아닌. . .데요.”
콧웃음을 한 번 치며 내리깐 목소리로 애인이 말을 계속 이어 나간다.
“야, 임마! 잘해줄 때 잘해라 응, 잘해줄 때 잘 해라고, 알았나?”
“예, 명심하겠습니다.”
살기 위해서 어쩔 수없는 한마디였다.
3
이렇게 오늘도 오전은 무사히 넘겼다. 젠장!
남들은 자신 있게 말한다.
우리 둘 사이가 세기에 나올까, 말까한 그런 최악의 커플이라고.
하지만 사람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것이 운명이라고 했던가!
나는 애인과의 인연을 운명이라고 단정 짓기로 했다.
그렇게 스스로를 자책하며 위안을 삼는다.
애인과 내가 처음으로 만난 것은 소개팅에서였다.
“여자는 무조건 처음에 기선제압이 중요하다이~.”
남자들의 세계에서 자칭 카사노바로 통하는 내 친구가 나에게 신신당부한 말이었다.
“알았다. 명심할께!”
부푼 기대와 설레이는 가슴을 안고 이렇게 소개팅은 시작되었다.
“저어~ 제 이름은 돈키호테라고 합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나는 내 나름대로 내리깐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전지현이라고 합니다. 저도 잘 부탁드려요.”
‘전지혀언~ 우와! 돌아가시겠다. 돌아가!’
얼굴 상판대기와는 전혀 무관한 이름이었다.
그래도 나는 좋았다.
내 팔자에 여자가 생기는 것도 그렇거니와 조선시대에나 나올 법한 현모양처를 상상하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여느 소개팅에서도 그러하듯이 우리는 주선자의 소개가 끝난 후 점심을 먹고, 영화를 보고, 다시 저녁을 먹고 이렇게 하루일정을 보내고 마지막으로 술을 마셨다.
그런데 이 놈의 술이 화근이었다.
그 놈의 술이!
“저어~시간도 애매하고 헤어지기도 그런데 술이나 한잔 합시다?”
“예? 아, 예에~ 그러죠 뭐.”
‘기선제압이 중요하다고?’
이 말은 소개팅이 있기 전에 자칭 카사노바가 나에게 신신당부한 말이었다.
나는 한쪽 다리를 꼬고 팔짱을 낀 상태에서 웨이터가 가져온 메뉴판을 지현이 쪽으로 탁! 하고 던지면서 말했다.
“드시고 싶은 것 있으면 아무거나 시키세요!”
탁! 하는 소리에 깜짝 놀란 지현이 눈을 말똥말똥 뜨면서 나를 쳐다본다.
그리고 나서 나에게 해석하기 애매한 여자 특유의 야릇한 미소를 보낸다.
일단 기선제압은 성공인 것 같다.
‘어라, 이놈 봐라. 생긴 것은 궁색하게 생겨가지고 돈 좀 꽤나 있나본데. 잘 됐다. 안 그래도 용돈이 궁해서 미칠 지경이었는데 쪼매만 가지고 놀다가 버려야겠다. 불쌍한 놈! 으흐흐 그런데 왜 자꾸 웃음이 나오지?’
“저어~ 술을 잘 못해서 그러는데 돈키 씨가 드시고 싶은 것으로 할게요.”
나는 지현이의 메뉴판 양보를 기선제압의 성공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하하, 카사노바 그 자식 제법 인걸.’
“으음~ 생각이 정 그러하시다면 그렇게 하죠 뭐.”
나는 메뉴판을 보면서 어떤 것을 고를까? 고민하는 척하면서 가격표를 주시하고 있었다. 지금 이 분위기를 계속 몰아가서 한 번 더 기선제압을 하기 위한 작전을 짜기 위해서였다. 세밀하게 검토한 결과 가격은 그런대로 양호한 편이었다.
‘그래, 그렇게 하면 되겠다.’
“하~이, 웨 이러~”
“예, 부르셨습니까? 손님!”
나의 근엄한 목소리는 웨이터에게 하지만 시선은 지현이를 지긋이 바라보며 말했다.
“이 집에서 제일 비싼 것으로 세팅해주세요.”
“예에~ 손님, 양주1번 세트로 세팅해 드리겠습니다.”
하며 나가는 웨이터는 고개를 연간 굽신굽신거리며 웃는다.
‘으잉! 이건 또 무슨 뚱딴지같은 소린가? 호프집에서 무슨 놈의 양주를 판단 말인가!’
그런데 두 장인줄 알았던 메뉴판을 자세히 살펴보니 세장이 아닌가!
한 장은 호프와 맥주 그에 어울리는 안주들이 적혀 있었고 다른 한 장은 소주와 그에 어울리는 안주들이 적혀 있었다. 나는 이 두장이 메뉴판의 전부인 줄 알았는데 맨 마지막 장 뒤편에 그러니까 소주와 안주류가 적힌 장과 양주세트1,2,3번이 적혀 있는 장이 고추장에 서로 눌러 붙어 있었던 것이다.
“저, 저, 저기요!!!”
“예, 손님! 뭐 더 필요한 것이라도 있으십니까?”
자상한 목소리였다.
그 자상한 목소리에 찬물을 끼얹는 말을 나는 차마 하지 못했다.
‘에라 모르겠다. 내가 언제 나중을 기약하며 살았더냐.’
“아아. . . 아뇨, 그냥 물이라도 한잔 갖다 주세요.”
‘됐다! 됐어! 바로 이놈이다. 이놈! 앞으로 적어도 일주일 동안은 내가 부르조아 생활을 만끽하며 살수 있는 유일한 구원자가. 신이시여! 저에게 이렇게까지 축복을 주심을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저는 언제나 주님의 살아계심을 믿사옵고. . . . ’
“돈키 씨, 오늘 너무 무리하시는 거 아니에요?”
“하하하, 뭐~ 애들 껌 값이죠.”
‘껌 값은 무슨. . . .문득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는 사자성어가 생각난다. 지나친 것은 차라리 안 하니만 못하니라!’
이 사자성어는 앞으로도 내가 살면서 내 머리 속에서 영원히 잊지 못하고 기억될 것이다.
여하튼 그날 나는 아버지 몰래 가지고 나온 현금카드를 도용하여 아버지조차도 꺼려하는 정도의 상당한 금액을 지불하고 호프집을 나왔다.
4
점심을 지현이와 같이 먹고 난 후에 지현이는 계속 공부를 하기 위해 곧바로 독서실로 들어가고 나는 담배 한대를 태우기 위해 잠시 밖으로 나왔다.
벌써부터 나뭇잎들이 울긋불긋한 채색을 하고 있었다.
어느덧 가을이 우리 앞으로 성큼 다가와 있었다.
조금 있으면 겨울이 찾아올 것이고 다사다난(多事多難)했던 올 한해도 마무리를 짓게 될 것이다.
이런 감회에 젖어보는 것도 참 오랜만이다.
아직은 28청춘이라고 호언장담하는 철없는 친구들도 몇 명 있기는 하지만 서른을 바라보는 이 시점에서 아무것도 내세울 것 없는 초라한 내 자신을 볼 때마다 낭만이라는 단어 자체가 어쩌면 지금 나에게 있어 지나친 사치인지도 모르겠다.
어릴 적 그러니까 내가 초등학교를 다니던 시절에 나의 시적(詩的) 잠재능력을 높이 평가해 주시던 선생님 한 분이 계셨다.
그 분은 선생님이자 이 지역의 시인협회에 문인활동도 같이 하고 계시는 분이었는데 때로는 엄하기도 하셨지만 그 인자하신 웃음이 퍽이나 인상적으로 기억에 남는 분이다.
문인활동을 해서인지는 몰라도 우리는 국어시간에 동시(童詩)를 자주 짓곤 하였다.
그때마다 그 분은 책상 앞에 앉은 내 뒤에서 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면서 나에게 시를 잘 쓴다는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그분은 항상 수업시간에 반에서 제일 잘 쓴 시라고 판단한 시를 수업을 마치기 직전에 낭독하게 하셨는데 한 두번을 제외하고 그것은 언제나 나의 몫이었다.
나는 그분을 통해서 시에 대한 자신감을 얻었고 교내 백일장에서도 나보다 상급반에 있는 누나와 형들을 제치고 상장을 몇 번씩이나 받게 만들었다.
지금에 와서 그분이 나의 시적재능을 과대평가한 이유를 생각해보면 참으로 사소한 것이다.
그 당시 나는 책이라는 존재 그 자체를 싫어했으므로 공부를 그리 잘한 것도 아니었고 기껏해야 어떤 사물(事物)을 봄에 있어 남들과는 조금 다르게 생각하는 독특한 발상정도가 전부였을 것이다. 하지만 시란 영역은 이제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만큼은 그 누구에게도 양보할 수 없는 것으로 굳게 자리매김을 하였다.
중학교를 진학하면서부터 이러한 시에 대한 나의 자부심은 상실되기 시작하였다.
100점 만점에 내가 얼마의 점수를 더 획득해야만 한다는 것이 시를 쓰는 것보다 더욱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었기 때문이다.
가끔씩 아주 가끔씩 논설문이나 설명문이 아닌 시부분에서 내가 풀었던 문제가 틀리기라도 하는 날이면 자존심이 많이 상하기도 했지만 만해 한용운의 <님의 침묵> 에서 ‘님’이 왜 ‘조국’만 될 수 있고 ‘애인’이 될 수는 없느냐고 따지다가 선생님께 따귀를 한대 맞고 난 이후부터는 그런 상상조차도 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로부터 약 십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성적위주, 등수위주의 이러한 사고방식의 연장선상에 나는 서 있다. 앞으로 얼마 안 있으면 치루게 될 9급 공무원의 행정직 국어시험에서도 나는 만해 한용운의 <님의 침묵>에서 ‘님’은 당연히 ‘조국’이라고 당당하게 그 정답을 적어야만 할 것이다.
갑자기 내 뒤통수 부분이 싸늘해진다는 느낌과 함께 쐐애액 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머지않아 탁!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대낮에 떠있는 휘황찬란한 별 하나를 보았다.
빈 깡통이 나의 뒤통수를 덮친 것이다.
이런 고도의 기술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 사람밖에 없다.
아니나 다를까 연이어 귀 고막을 찢는 듯한 굉음이 들려온다.
“시험이 낼 모렌데, 지금 여기에 나자빠져서 뭐하고 있는 거야!!!”
“. . . . .!!! ”
명상에 잠길 일분일초의 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그렇게 시험이 중요했더란 말인가!
나는 아픈 뒤통수를 감싸 안고 독서실 입구이자 지옥 같은 그곳으로 발길을 향한다.
나를 꼬나보고 서 있는 지현이는 마치 화염광 지옥문을 지키고 서 있는 문지기처럼 보인다.
5
맨 처음에 지현이는 내가 돈 많은 갑부 집 아들로만 생각하고 있었던 같다.
하지만 젊은이는 환상을 바라보면면서 살고 노인은 추억을 바라보며 산다고 하지 않던가!
다만 지현이의 환상은 자신이 예상했던 것보다 조금 일찍 그 환상이 깨져버린 것이 이 명언에 대항하는 흠이라면 흠이랄까. . . .
나를 만난 이후로 처음 얼마간 지현이는 나에게 요구하는 것이 참으로 많았었다.
나의 한 달 용돈은 소개팅 이후로 벌써부터 바닥난 지 오래고 지현이가 요구하는 내용은 대부분이 물질적인 것이었으므로 그때마다 나는 아버지의 현금카드를 계속해서 도용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이다.
그날도 나는 어김없이 아버지의 현금카드를 도용해야만 했다.
그날이 나에게 있어서는 맨 처음에 언급한대로 그 운명적인 만남의 종지부를 찍는 날이고 지현이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팔자에도 없는 혹 하나에 쐐기를 박아버리는 슬픈 역사가 살아 숨쉬는 날이었다.
여기 한적한 놀이공원에 젊은 선남선녀 두 명이 마주보며 서 있다.
둘은 같은 시간에 만나서 같은 장소에서 머무르고 서로 마주보며 웃고 있지만
둘이 생각하는 바는 심히 다르다.
이런 것을 두고 옛 선인들은 동상이몽(同床異夢)이라고 했던가!
‘보자~ 오늘 견적은 한 20만원 정도 나오겠다.’
‘주여! 실업자가 무슨 돈이 있습니까! 제발 오늘 만큼은 돈쓰는 일이 없도록 해 주세요.’
‘그 좋은 많은 장소를 다 놔두고 왜 하필 놀이동산에서 만나자고 할게 뭐람!’
“돈키 씨! 제가 놀이기구 타는 것을 좋아하는지 어떻게 알았어요.”
‘돈 안 들이고 산책이나 하자고 놀이동산으로 오자고 했더니만 에이~ 오늘도 글렀다.’
“하하~ 제가 어젯밤 지현 씨 마음속을 한번 들여다보았지요.”
놀이동산에서 자유이용권을 끊고 놀이기구 탈 때까지만 해도 좋았다.
‘아!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지금 딱 이대로의 금전 지출로만 하루를 무사히 넘겼으면. . . .’
그렇게 놀이기구와 씨름하며 반나절을 보냈다.
‘이제 간단하게 저녁식사를 끝내기만 하면 오늘도 무사 평온한 하루가 지나가겠구나.’
저녁도 그런대로 무안하게 해결된 것 같다.
오랜만에 김밥이 먹고 싶다며 은근히 값싸고 영양이 풍부한? 분식집으로 내가 유도를 했던 것이다.
이제는 잘 가라는 인사와 함께 다음에 또 보았으면 좋겠다는 약속을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일만 남아 있다.
긴장했던 순간이 한순간에 사라지고 맥이 쫙 풀리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대뜸 지현이가 선물 하나를 갖고 싶다는 것이다.
또 다시 긴장의 순간이 돌아오고 있었다.
“돈키 씨, 나 저거 갖고 싶은데.”
하며 곁눈질로 내 눈치를 살핀다.
지현이가 손가락으로 지목한 것은 18K 커플링반지였다.
“하하하, 이정도야 뭐.”
눈에서 피눈물이 날것만 같이 지현이가 얄미웠다.
지현이는 주위를 둘러보면 계산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금반지를 하나 갖고 싶었는데 한 개를 사달라고 하면 왠지 자신의 사리사욕만을 챙기는 못된 인간으로 평가될 것만 같은 뉘앙스가 풍기니까 커플링을 지목한 것이다.
‘돈도 없는데 차라리 하나만 사달라고 하지.’
얇고 세련된 디자인의 커플링도 많이 있는데 지현이는 자꾸 굵고 큼직한 쪽으로만 시선이 가고 있다.
지현이는 제법 굵직한 금반지 하나를 손가락에 끼면서 나에게 말한다.
‘이 정도면 너무 부담이 될라나?’
“이거 어때요? 저한테 어울려요?”
‘이게 돌았나! 하루 종일 땅파봐라 10원짜리 하나 나오는지!!!’
“으음, 지현 씨의 가냘픈 손가락에는 왠지. . . .”
‘쳇! 돈이 아깝다 이거지.’
“예에~ 듣고 보니 그러내요.”
나는 얇고 세련된 쪽으로, 지현이는 굵고 큼직한 쪽으로 이렇게 한참동안 실랑이를 벌이다가 결국은 적당한 크기의 1돈 반짜리 커플링에서 쇼부를 보았다.
“아가씨, 이것으로 계산해주세요.”
“예에, 손님! 25만원 되겠습니다.”
“카드로 계산해 주시겠습니까?”
‘어흐흑, 이 달 말일 카드결제일이 되는 날이면 나는 이제 아부지한테 죽었다.’
“예, 손님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요.”
지~직, 지지직~ 카드 긁히는 소리가 마치 내 심장을 긁어내는 소리같이 들린다.
남자는 여자를 사귐에 앞서 우선은 능력이 있고 봐야 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더 새삼스럽게 깨닫는다.
“어~손님 카드에 이상이 있는 것 같은데요?”
카드와 나 사이의 신용(信用)에 불신감이 역력한 목소리였다.
“어~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다시 한번 더 해보세요.”
확신에 찬 목소리였지만 도둑이 자기 발을 저리는 심정이었다.
2~3분이면 끝날 것을 이렇게 몇 번이고 반복을 하다보니 10여분이나 지나 있었다.
‘이게 무슨 망신이람!’
지현은 아무 말 없이 그저 창밖을 내다보고만 있다.
그러다가 갑자기 경찰이 들어 닥쳤다.
“바로, 저 사람들 이예요!”
갑자기 180도로 돌변한 점원 아가씨가 우리를 향해 손가락질을 하며 경찰에게 주절대는 표정과 행동은 마치 액션영화에 나오는 여주인공을 방불케 했다.
지현과 나는 이 돌발적인 상황이 마치 남의 일인 냥, 서로를 쳐다보며 고개만 갸우뚱거릴 뿐 아무런 말이 없었다.
“당신은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으며 필요에 따라서는 변호사를 선임할 권리를 . . . ”
경찰이 갑자기 내 손목에다 수갑을 채우는 바람에 그 다음의 말은 생각이 나질 않는다.
“어머~이거 왜이래요! 이손 놓고 이야기하세요.”
나와 똑같은 처지가 되어버린 지현이의 마지막 발악이었다.
수갑에 묶인 채, 조서를 꾸미고 있는 동안에 지현이는 마치 내가 살인죄라도 저지른 흉악한 범죄자라도 되는 것처럼 나를 째려보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이 열악한 환경에서 벗어날 수 있는 구원자가 머지않아 찾아오리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1시간을 예상하고 있었는데 구원자는 30분이 채 되기도 전에 내 앞에 나타났다.
‘아따! 빠르기도 빠르다.’
구원자는 우리에게 매우 낯이 익은 얼굴이다.
“어떤 개XX이 내 현금카드를. . . .”
“그럼, 아부지가 개요?”
“으응~ 아니 돈키아이가! 니가 여길 어떻게?”
“내사 마, 할말은 없는데 어서 빨리 이 수갑이나 풀어주소.”
여기서 잠깐!
나는 우리 아버지가 어떠한 분인지에 대해서 약간의 언급을 하고 넘어가야겠다.
아버지는 그야말로 불의를 보면 못 참는 성격을 지닌 정의의 사도다.
어릴 적에 나는 슈퍼맨이나 바야바, 돌아온 장고 같은 만화영화를 볼 때마다 그 주인공과 아버지가 항상 같은 편이라고 생각했다.
독수리 5형제가 지구를 지킬 때 강박사의 친구가 우리 아버지가 아닌지 하는 상상도 자주해보았다. 어떤 때는 우리가 결코 알아서는 안 되는 그 어떤 비밀문서를 아버지가 간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착각에 아버지 몰래 호주머니를 뒤져보기도 하였다.
그때 생긴 습관이 오늘날 이렇게 아버지의 현금카드를 훔치게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빠, 어떻게 하면 아빠처럼 멋진 사람이 될 수 있어?”
“해병대를 나와야지.”
“해병대? 그게 뭔데?”
“으음~그건 말이야, 돈키가 나중에 커서 . . . . 자연스럽게 알게 된단다.”
아직도 의협심에 불타는 우리 아버지에 대한 기억들이 머릿속에 생생하다.
하지만 자기편 앞에서는 한없이 관대한 것이 또한 우리 아버지이다.
나는 아버지께서 내가 지금 직면해 있는 이 사태를 조용하게 수습해 줄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한다. 나는 현금카드를 돌려주고 아버지는 경찰서에서 우리를 꺼내줄 것이다.
나는 아버지를 믿고? 아버지는 나를 믿는다?
그 전날 아버지는 단란주점에서 술을 마셨다.
카드로 계산을 마친 아버지는 다음 날 아버지의 수중에 있는 그 많은 카드 중에서 하나가 없어진 것을 발견하게 된다. 주범이 나라는 사실을 상상도 못했던 아버지는 경찰서에 신고를 했으며 만약에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범인이었다면 그 놈은 아마도 죽음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전날 밤 아버지는 술을 많이 마셨으므로 길거리에서 카드를 잃어버렸거나 취객을 전문으로 절도하는 범인의 소행이거나 아님 단란주점의 못된 아가씨 중에 한명이 그 카드를 훔쳤거나 하는 상상 따위는 아버지의 짧은 식견으로는 충분히 나올법한 추리이다.
손자병법(孫子兵法)에도 이르기를 대치된 적(敵)보다도 더 무서운 것은 내부의 적(敵)이라고 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절대로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
그런 불가능한 일이 현실로 드러났으니 그 충격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니가~ 아니! 우리 돈키가, 어쩌다가 이리 됐노?”
“. . . . ”
“어서 말해봐라. 어서 빨리 말해봐라 말이다. 으잉!!!”
아무리 싸잡아 보아도 변명할 길이 없던 나는 결국 진실을 토로하고야 만다.
“이기, 다~ 그 놈의 여자 때문 아이요. 여자!”
“여자~아?”
“예~, 여자!”
“여자 때문이라꼬? 허허허 그거 참 잘됐네. 잘됐어. 그 가시나 당장 우리 집에 데꼬와서 앉히뿌라!”
“그래도, 엄마하고 상의를 해봐야 . . . ”
“너거 엄마하고는 상의 할 거 없다. 당장에 데꼬온나!”
아버지의 말은 곧 우리 집에서 법이다.
그리고 이것으로서 지현이의 운명은 이미 결정되어져 버렸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내가 줄곧 지켜본 바로는 아버지는 자신이 원하고자 했던 바를 놓쳐본 적이 단 한번도 없었던 분이셨으니까.
6
시간은 더디 가도 세월은 유수와 같이 빨랐다.
그 해 겨울이 다가기전에 지현이와 나는 9급 공무원 시험을 쳤으며 그 결과는 서로 상반되는 극과 극을 달리고 있었다.
그리고 언제나 부정적인 방향은 내 쪽이었다.
‘병신 같은 놈! 그렇게 공부하래도 처자빠져 궁상이나 떨고 앉아 있더니만. . .’
“돈키 씨는 시험결과가 어떻게 되었어요?”
나는 차마 말을 하지 못한다.
“. . . . . . ”
‘내년에도 시험에 떨어지면 내하고 너는 끝인 줄 알아라!’
“뭐~ 올해 시험만 시험인가! 다음번에 잘하면 되죠 뭐!”
“지현씨를 쳐다볼 면목이 없소.”
‘흥! 알긴 아네.’
“아이~ 너무 자책하지 말아요. 그러면 제가 더 무안해 지잖아요.”
대학교 정원 캠퍼스에는 벌써부터 찬바람이 불어온다.
지금 내 옆에 지현이가 없기 때문일까?
찬바람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욱 차갑게 느껴진다.
시험에 합격한 지현이는 공무원으로 채용되기 이전에 앞으로 약 3개월 정도 연수원 생활의 과정을 마쳐야만 한다.
그리고 오늘이 바로 그 연수원 입사의 첫째 날이다.
‘차라리 내가 시험에 붙고 지현이가 떨어졌더라면 좋았을 텐데. 아!~ 벌써부터 지현이가 보고 싶어진다.’ 지현이에게는 다소 서운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이 말은 진심이었다.
만약에 지현이가 시험에 떨어졌다면 위로와 격려의 말이라도 해줄 수 있었을 텐데.
내가 지현이에게 해줄 수 있는 최소한의 일이라도 남아 있었을 텐데. . . .
이것으로서 이제 내가 지현이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게 되었다.
아무런 힘도 되지 주질 못하고 도리어 보살핌을 받아가며 살아갈지도 모를 일이다.
‘무능한 놈!!!’
나는 내 스스로에게 채찍을 가해본다.
“아니~ 지현이하고 똑같이 공부해 놓고서 너만 왜 자꾸 시험에 떨어지는 거야!”
이 소리는 요즘 들어 이미자의 <동백아가씨> 다음으로 즐겨 부르는 어머니의 18번이다.
대학교에 들어와서 심리학 수업을 통해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부모 밑에서 자식이 태어날 때 우리가 소위 말하는 IQ 유전인자의 80%는 여자에 의해서 유전된다.
그리고 나머지 20%는 후천적 경험인 교육에 의해 얻어지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지금 우리엄마는 자기 얼굴에다 침을 뱉고 있는 것이다.
엄마의 잔소리를 듣는 동안에 이런 생각을 하니 갑자기 웃음이 나온다.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어서 빨리 이 자리를 피해야겠다는 생각에 나는 얼른 인사를 하고 나와 버렸다.
“내 나이가 벌써 28이구나.”
나는 독서실을 들어가기 직전에 스스로에게 중얼거린다.
첫댓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