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립서울현충원이 자리한 곳이 동작동(銅雀洞)이다.
'동작(銅雀)'이란 말은 '동재기'라는 옛말을 한자음으로 표기한 데서 유래한다.
서울 흑석동에서 국립서울현충원으로 넘어가는 한강 연안 일대에 검붉은 구리빛 색깔을 띤 돌이 많이 분포되어 있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서빙고에서 이곳으로 연결된 동작대교 근처 한강변은 중요한 교통수단인 동재기 나루터(銅雀津)가
있는 곳으로, 조선시대에 서울에서 과천 수원 평택을 거쳐 호남 지방으로 내려가는 사람들과 서울로 들어오는 사람들이 배를 타고
한강을 건던 교통의 요지였다.

지금의 반포아파트 일대는 한강변의 모래사장이거나 늪지재였다. 이수로터리를 지나 사당동 방면으로
'정금마을'이 있었다. 마을에 정(丁)씨 성을 가진 감사(監司)가 살던 마을이라 하여 '정감몰' '정가우'라 부르기도 하였다.
일설에 따르면 이곳에는 조선 후기에 포방터(사격장)가 있었고 여기서 훈련을 마친 후 나루를 건너기 전에 인원과 장비를
점검했다고 해서 '점검마을'이라 부르던 것이 오늘날 '정금마을'로 변했다고도 한다. 또 옛날부터 서울에서 나루를 건너
호남 지방으로 왕래하던 여행객들과 우마차 수레가 잠시 쉬어 가는 주막이 위치한 동네라 하여 '정거머리'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이와 같이 역사적으로 볼 때 동작은 호남 지방으로 통하는 국토의 대동맥이 지나던 곳으로, 수많은 사연이 오가던 애환의
길목이기도 하였다.

이 땅이 거쳐 온 행정 구역은 삼국시대에는 고구려의 율목군(栗木郡)이었고 신라 경덕왕이 통치하던 율진군(栗津郡)으로 바뀌었다.
고려 태조 초에 과주(果州)로 아름이 지이지고 조선 태종 때 읍호(邑號) 개정이 대대적으로 실시되어 '일주'를 산이나 천으로
고치면서 과주가 과천(果川)으로 바뀌게 되었다. 조선시대에 경기도 과천군 상북면 포촌리였다가 후기에 시흥군 북면 동작리가
되었고 그 후 1936년 서울시(당시 경성부)로 편입되어 영등포구로 되었다.
1973년 영등포구에서 관악구로 분구되었고 1986년 동작구가 신설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국립서울현충원이 발간한 <민족의 얼> 제8집에서 따온 글임을 밝혀둔다-
첫댓글 수고많으셨습니다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