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이야기
1971년 학장동 홍깨마을 고향집, 초가집 사이에 백양산과 학장초등학교 건물이 보인다.
내가 태어난 곳은 경상남도 동래군 사상면 학장리 홍깨마을 이다.
친구들은 기억할런지 모르겠는데 우리 학교 다닐 때 송충이 잡으러 갔던 곳이 학장 뒷산이다. 그때 염직과
친구들 중에 키 좀 작은 애들 십여명이 송충이 잡이 끝나고 우리집에 와서 놀다 갔었다.
학장국민학교 3학년때(1963.1.1) 경상남도 부산시가 정부직할인 부산직할시로 승격되면서 경상남도 동래군
사상면이 부산직할시에 편입되어 사상면 학장리가 부산진구 학장동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후 부산진구에서 북구가 분할(1978)되면서 북구 학장동으로 그 뒤엔 북구에서 사상구가 분할(1995)되면서
사상구 학장동이 되었다. 사상면이 통째로 사상구로 바뀌는데 32년이 걸렸다.
그 당시 학장리엔 지명도 많았는데 학성, 장문안(웃각단,아래각단), 붉은디, 구덕골짜기, 야시골짜기, 새밭,
통재이골짝, 대동도, 열두꼽부, 홍깨, 웃홍깨, 개논, 진자리 등 열두가지가 넘었다.
학장(鶴章)이란 명칭은 사람이 많이 사는 부락인 학성(鶴城), 장문안의 앞글자를 따서 지었다고 하며, 낙동강
제방이 만들어지기 전 홍깨마을은 넓은 갯가의 언덕에 있는 선착장이라고 홍깨 또는 홍개(넓을 弘, 개 浦)라
불렀다고 한다. 학장리 홍깨마을은 어머니의 고향이다. 김해군 김해읍 사람인 아버님이 어머니와 결혼하면서
처가동네에서 자리 잡고 살았다는데 아버님의 직장이 서면 철도공작창 이었던 것도 영향을 미쳤던 것 같다.
옛날 학장 사람들의 주업은 논농사였고 밭농사도 일부 하였다.그리고 가축업 특히 닭을 많이 키워서 계란과
닭을 부산시내에 내다 파는 집도 여러집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농사가 많은 집은 그 것만으로도 먹고 살 수 있었지만 농사가 적은 집이나 소작을 하는 집의 부지런한 아낙
네들은 농한기에 낙동강에서 재첩을 잡아 가마솥에 끓여 재첩국을 만들어 무거운 재첩동이를 머리에 이고
구덕고개를 넘어 대신동 부민동 보수동 쪽으로 재첩장사를 하러 다녔었다.
그리고 단술장사도 하였는데 집에서 단술을 만들어 동이에 이고 구덕고개를 넘어 멀리 부두가 에 까지 가서
단술동이를 놓고 부두노무자들을 주 고객으로 단술장사를 하였다고 한다.
사실 지금 생각하면 상상하기도 힘던 그런 일들을 농사일, 집안일에 또 한두명도 아닌 자식들 키워가며 하셨을까?
그 당시 어르신들(특히 어머니들)의 고생은 말로는 표현할 수 없을 것 같다.
부지런한 동네 남정네들은 발로 밟아서 작동하는 새끼꼬는 기계로 새끼를 꼬아서 부산시내에 내다 팔기도 하였고,
갈구리 만들어 파는 집도 있었제, 방 비자루 만들어 파는 집도 있었다. 다디미 만드는 공장도 두어개 있었고 정미소
하는 집도 있었지 그런집은 제법 잘사는 집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러던 고향 사상에 ‘68년도에 사상공단이 조성되기 시작하면서 넓은 저 지대 들판에 부산시내의 온갖 쓰레기
들을 버리는 2년여 동안 냄새와 모기, 파리 때에 시달렸고 그 진개장 위에 철도 사상역앞 회산을 착평하여 생긴
흙을 덮어 평탄 작업을 할 동안 먼지와 소음에 시달리던 끝에 ’75년도에 사상공단이 조성 완료되었다.
공단조성중이던 ‘73년도에 지금으로 따지면 기피시설인 교도소가 동대신동에서 학장동으로 옮겨오고 괴정과
하단에 있던 분뇨처리장이 엄궁 감전 경계지점에 슬그머니 옮겨왔다. 지금 같으면 엄청 시끄러웠을 것이다.
’74년도9월에 군에 입대하여 ‘77년도7월에 제대하여 와보니 사상공단이 완공되어 고향은 매연 투성이 였다.
’75년도에는 주례에 형제복지원이 들어서고 ‘84년도에 구덕터널이 완공되고 ’85년도에 학장구덕골짜기애 대남
정신병원이 들어섰다. 2002년에는 부산 최초로 감전동에 부산전문장례식장이 들어서고 2004년에는 삼신전문
장례식장도 들어섰다. 이리하여 그 옛날의 평화롭던 내 고향 사상은 기피 혐오시설의 집합장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2022년 현재에 이르러 사상은 지하철5호선(사상~하단)공사 중이고 사상 스마트시티사업을 추진하여
부산 서부청 청사와 첨단 산업시설이 들어설 예정이며 괘법의 신라대학과 주례의 동서대학이 사상의 좌청룡
우백호 역할을 해주어 희망이 있는 고장이 될 것이라고 믿어 그에 위안을 삼고 있다.
ㅇ 사상공단 조성전 평화로웠던 사상 지역 모습
1947년도 사상지역 모습(항공사진),1968년 사상공단조성 시작 전까지 이 모습이 거의 변함이 없었다.
1948년 동감전(지금의 지하철 감전역위 경부선 철길 아래 마을)에서 엄궁, 을숙도 쪽으로
1950년12월 주례 학장지역 모습
1954년 미군장교가 컬러 사진으로 촬영한 사상초등학교 주변 모습(괘법동,덕포동,삼락동 지역)
1955년 초가을 하야리아부대에 근무하던 미군장교가 촬영한 사상 지역 모습
1955년 초가을 미군장교가 컬러 사진으로 촬영한 학장 감전지역 모습
1956년4월 경남중학교 1학년 봄소풍 사진에 들어있는 학장 감전 지역 모습
1966년 사상지역(감전,주례,학장)모습, 도로라고는 경부선과 사상로,대동로(1964년 설치)만 보인다.
ㅇ 사상공단 조성
부산직할시에서 공장 용지의 필요성을 충당하기 위해 낙동강 동안의 저습지를 개발한 것으로 1968년에 착공
하여 1975년에 준공했다. 총면적은 8.50㎢이며, 경부선, 남해고속도로에 인접하여 교통이 편리하다. 단지 내에
총 2,600여 개의 공장들이 입주하고 있으며, 주로 조립금속 및 기계장비업체, 화학·석유·플라스틱 업체, 섬유·
의복 업체 등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공업용수, 전력, 하수·폐수처리 등 공단기반시설이 충분하지 않아 몇 차례
의 침수사태를 겪었다. 부산시는 다각적인 대책을 수립하고 있으며, 입주업체의 이전수용을 위하여 공단 남쪽
에 신평장림공업단지를 조성했고, 낙동강 서안에 녹산 신호 공업단지도 조성했다..
출처 : 다음백과
그러나 실지로 이 지역은 낙동강하구의 풍경이 수려한 지역으로 주택지로 개발하여야 함이 좋았으나
당시 시급한 공엽용지난 해결을 위하여 도심에 가까워 교통이 편리하고 공업용수 획득이 용이하고
저렴한 토지가격 때문에 이 지역을 선정 공업단지를 조성했다고 보지만 고향을 잃은 우리 입장에서는
한스러울 뿐이다. 하긴 그 시절엔 집 보다도 호구지책이 우선 이었으니까?..하면서 위안해 본다.
1968년 사상공단 조성 초기 모습
1973년 사상공단 조성중인 모습
1980년 사상공단 조성후 모습
2018 구글어스로 본 사상구 전경
ㅇ 부산환경공단 위생사업소 개소(분뇨처리장 감전,엄궁 경계 지점)
부산광역시 전 지역의 분뇨를 처리한다.
일제강점기 시절 설치된 괴정동의 분뇨투기장, 하단동에 설치된 분뇨산화처리장의 시설이 노후 낙후되어
1973년 4월 최신시설의 위생처리장관리소를 감전동 509-11 번지에 새로이 개소하였다.
1993년 6월 전량 해양 투기를 실시하였다. 1996년 7월 해양 투기를 위한 이송 관로를 설치하였다. 2000년
1월 부산광역시환경시설공단 발족 이후 부산광역시환경시설공단 위생사업소로 개칭되었다. 2005년 7월
분뇨·하수 연계 처리를 실시하였다. 2010년 부산환경공단 위생사업소로 개칭되었다.
출처 : 부산역사 문화대전
요즘 같으면 난리 났을 텐데..사상공단 조성에 발 맞추어 아무런 저항없이 이 지역에 정착..
신경 쓸 여유도 없었지만 ..별 소문도 없이 들어섰지..
'2010년대 감전동 위생사업소 전경
'70년대 엄궁 낙동강변 모습, 아래 중앙에 위생사업소와 연결된 뷴뇨 배수관과 분뇨처리선박이 보인다.
ㅇ 부산구치소 개소(주례,학장 경계지역)
1906년 10월 21일 부산감옥으로 부산광역시 서구 동대신동 2가에 개청하였다. 1923년 5월 5일 부산감옥에서
부산형무소로 개칭하였다. 1961년 12월 23일 부산형무소에서 부산교도소로 변경하였고, 1973년 12월 23일
부산광역시 서구 동대신동 2가에서 사상구 주례동 666번지로 이전하였다. 1986년 5월 31일 부산교도소에서
부산구치소로 변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출처 : 부산역사 문화대전
'73년 처음 이전해 왔을 때는 학장교도소라 했었는데 그 뒤 주례로 행정구역이 바뀌었다.
사상공단 조성에 발 맞추어 아무런 저항없이 이 지역에 정착..요즘 같으면 시끄러웠을 텐데..
부산구치소 전경
ㅇ 형제복지원 개소(주례)
사회복지법인 형제복지원(社會福祉法人兄弟福祉院)은 1975년부터 1987년까지 주례동 산 18번지(현재 부산광역시
사상구 백양대로 372) 일대에 위치했던 부랑자 강제수용소로, 3,146명이 수용 가능한 대한민국 최대의 부랑인
수용시설이었다.1987년3월22일직원의 구타로 원생 1명이 숨지고, 이에 35명이 탈출함으로써 그 내부에서
일어난 인권유린이 드러나게 되었다. 1975년 내무부훈령 제410호, 그리고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하계올림픽을 앞두고 대한민국 정부가 대대적인 부랑인 단속에 나선 것이 형제복지원 설립의 배경이었다.
형제복지원은 폐쇄 이후, 세상에 떠들썩하게 알려졌지만, 이후 빠르게 잊혔다. 27년 뒤, 1984년 입소하여,
1987년 폐쇄당시 전원조치된 피해자인 한종선이 2012년 5월 국회 앞에서 1인시위를 통해 세상에 알리고,
전규찬과의 공저 <살아남은 아이>(한종선, 전규찬, 박래군)의 책을 통해 형제복지원에서의 실상을 글과
그림으로 증언하며 세상에 알려졌다. 이후 형제복지원진상규명을위한 대책위원회, 형제복지원피해생존자
모임이 결성되었다.
2014년 3월 22일 SBS '그것이 알고싶다-홀로코스트 그리고 27년:형제복지원의 진실'에서는 27년 간 감춰
져 온 이 사건의 의혹과 진실이 방영되었는데, 이 복지원에서는 수용자들의 중노동은 물론 수용자들에 대한
구타와 감금 그리고 성폭행까지 자행됐으며, 12년 동안 500명이 넘는 인원이 사망한 것으로 조사되었다.
출처 : 위키백과
사실 이 시설이 설치될때 동네 사람들 뭔지도 잘 몰랐다고 한다. 그냥 거지 부랑아 보호 수용시설
정도로 알고 있었다네요. 난 그땐 군대 생활 중 이었으니 더욱 알 턱이 없고...
'70년대 형재복지원 모습
'80년대 형재복지원 모습
ㅇ 대남병원 개소(학장)
고도로 발달된 현대문명의 이기심에서 파생된 마음의 병을 치료하고 그 예방에 노력하기 위해 1985년 학장동
구덕터널 위쪽에 설립되었다. 부산지역뿐만 아니라 경상남북도, 대구광역시의 정신병 환자 요양병원을 위탁
운영하고 있다.
2000년 현재 600병상을 갖추고 신경과·가정의학과·내과를 설치하여 정신과 전문의료인력이 정신질환자의
진료를 담당하고 있다.
알코올 클리닉, 치매 클리닉 등 특수 클리닉과 데이 크레이 센터, 약물중독 및 알코올 중독 치료센터, 재활의학
부, 결핵병동, 150병상 규모의 노인치매병동 등을 설치·운영하고 있다. 그밖에 식물원·동물원·조류원·당구장·
탁구장·작업요법실 등을 설치하여 정신과 환자의 전인적인 치료에 만전을 기하고 있다. 부산지역의 행려병자
를 위한 의료보호 요양기관이며, 고려대학교 의과대학 정신과 전공의(레지던트) 수련기관으로서 정신과 교육
의 요람이 되고 있다.
출처 : 다음 백과
대남병원
6. 부산전문 장례식장과 삼신전문 장례식장 개소(감전동)
부산전문 장례식장은 부산 최초 장례전문 예식장으로 감전동에 2002.7.28 개장하였다.
부산전문 장례식장
삼신전문 장례식장은 장례전문 예식장으로 감전동에 2004.11.8 개장하였다.
삼신전문 장례식장
'60년대 중반까지 한적하고 조용한 시골마을이었던 고향 사상이 이때부터 이상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60년대 후반 에는 쓰레기 매립장이 되어 각종 악취에 파리 모기가 들끓는 세월을 보냈었다.
'70년대 초중반애는 소방도로 조성과 저지대 매립 및 공장설립 공사로 소음과 먼지에 시달렸다.
'70년대 후반부터'공장들이 본격적으로 가동되기 시작하니 고무공장 매연으로 하늘에 검은 눈이 내려 빨래도
못 널고 사료공장의 꼬리한 썩는 냄새, 주물공장의 메케한 연기 내음으로 숨쉬기도 힘들었다.
하수시설 미비로 몇 차례의 물 난리에 공장과 주택들은 침수되어 많은 피해를 보고 거기다 재래식 변소 물이
넘처 사방에 똥이 둥둥 떠다니고 공장 가동과 생산에만 급급하여 공단 기반시설이 취약하고 환경인식이
부족했던 사상공단의 실태였다.
'90년대 들어 감전1배수장 증설, 감전2배수장을 비롯한 배수장 신설과 도로 및 하수도 정비로 물난리 사태
가 거의 없어지고 환경인식 변화에 따른 각종 매연과 오염 물질 단속으로 공장들이 환경 시설을 설치하기
시작하여 매연과 오염물질이 현저하게 줄어들면서 주변 환경이 나아지기 시작했디.
'90년대 부터 산기슭에 고층 아파트단지 들이 들어서기 시작하고 '2010년대 들어서는 학장천 삼락천 물도
예전보다 많이 맑아졌지만 들판에 고만 고만하게 꽉들어찬 각종 공장들을 바라보면 답답하고 삭막한 마음
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특히 내가 태어 난 고향마을이 들판 이기 때문이다.
저렇게 험하게 변해 버린 고향 모습을 보니 너무 억울하고 원통한 마음에 아무 소용 없지만 장황하게
넋두리라도 하여 속을 좀 풀어 봅니다.
그렇지만 아직까지도 험한 그 곳 에 살면서 살기좋은 고향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선후배 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