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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 투르크 제국
티무르가 자신의 발자취의 모든 민족들을 뒤흔든 지 백년 뒤, 15세기에 들어서자 코카서스 산맥에는 이슬람교를 믿는 두 세력이 발을 디디기 시작했다. 서쪽의 오스만 투르크와 동쪽의 페르시아 제국이었다. 그들이 각각 산맥의 서쪽과 동쪽에서 서서히 영향력을 확대하였다. 코카서스 산맥의 서쪽에는 카바르다인과 아디게인, 체르케스인이 있었고, 동쪽에는 다게스탄의 여러 부족들과 바이나흐 (체첸과 잉구쉬) 족들이 살고 있었다.
코카서스 산맥은 7세기부터 남쪽 그루지아 왕국의 영향으로 그리스 정교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현재도 오세티아 민족은 주변의 이슬람국가 속에서도 그리스 정교를 믿고 있다. 그러나 티무르의 침략과 투르크, 페르시아 제국의 영향으로 점차 이슬람교가 정착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체첸인들에게 이슬람교의 유입은 매우 더디게 이루어졌고, 다게스탄이 8세기 경에 이슬람교가 어느 정도 정착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체첸인들은 토착 종교의 세력이 강하게 남아 있었다.
15세기의 러시아에게 코카서스는 교역과 여행을 위해 거쳐가는 지점에 불과했다. 인도와 바그다드를 여행하는 러시아인들이 그루지아의 타브리즈에서 그루지아인들과 만났다는 것이 최초의 기록이었다. 코카서스 산맥을 넘보기에 러시아는 이제 막 킵차크 한국의 지배에서 벗어나려는 신생 제국에 불과했다.
16세기
그러나 백년 뒤, 모스크바 대공의 아들 이반 뇌제가 스스로를 '황제 (차르)'라 칭하며 몽골족의 잔존 세력인 카잔 한국과 아스트라한 한국을 복속시키면서 러시아는 코카서스에 발을 디디기 시작하였다. 당시 코카서스 산맥의 카바르다의 족장 중, 템류크와 타쥬르트는 모스크바에 사절단을 보냈다. 그들은 동쪽의 다게스탄의 타르쿠 (투르크 계 민족들의 연합체) 의 샴칼 (호족, 족장이라는 뜻) 에 대항하기 위해 신생 제국이었던 러시아에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러시아가 코카서스 산맥에 개입하게 되는 모든 시초가 된 이 일은 1557년에 발생한다.
이반 뇌제
코카서스 산맥의 주민의 자발적인 원조와 구조 요청에 의해 이 요충지에 개입하게 된 러시아는 기존의 이슬람 2대 제국, 오스만 투르크와 페르시아의 사파비 왕조와 각축을 벌여야 하였다. 이리하여 코카서스의 산민들도 이 삼대 제국의 틈바구니에서 자신들의 독립과 안전을 위해 절묘한 줄타기를 하여야 했다.
이반 뇌제는 카바르다족의 템류크의 구원요청을 진지하게 받아들였고, 장차 러시아가 남쪽으로 뻗어가기 위해서는 이 요충지를 확보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정치 군사 동맹이 맺어진 후, 이반 뇌제는 1561년 템류크의 딸 마리아 템류코비나와 결혼하였다. 그리고 이 동맹에 대하여 민감하게 반응한 오스만 투르크의 사주를 받은 크림 한의 공격으로부터 카바르다 족을 드네프르 하구에서 보호하였다. 또한 1567년, 순자강 서쪽에 러시아 요새를 건설하기 시작하였다.
러시아는 '강자의 압박으로부터 약자를 보호한다'는 대의 명분과, 족장들의 아들을 러시아에 인질로 들여서 군사학교에서 교육을 시키는 주도면밀한 책략을 적절히 병행하면서 이 지역에 영향력을 확대시켰다.
그러나 이반 뇌제가 1584년에 죽자, 그의 아들 표도르 1세가 즉위하였고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던 차르를 대신하여 외삼촌인 보리스 고두노프가 전권을 장악하였다. 보리스 고두노프는 러시아에의 복속을 거부하는 다게스탄 타르쿠의 샴할을 1593년에 카바르다족과 연합하여 공격하였다. 알렉산더 자세킨 공작을 총사령관으로한 러시아군 5천과 카바르다인 1만의 원정군이 타르쿠로 진격하였다. 러시아와 코카서스 민족 사이에 벌어진 이 최초의 전투에서 러시아군은 3천의 전사자를 내고 군 전체가 와해되는 대패를 경험한다.
러시아는 다게스탄에 영향력을 행사하던 페르시아의 샤 아바스에게 중재를 요청하고, 샤는 러시아군의 후퇴를 요청한다. 패배로 위축이 된 러시아군은 병력을 철수시키고 이 지역은 소강상태에 빠진다.
10년 뒤인 1603년, 그루지아는 오스만 투르크와 페르시아의 전쟁으로 인한 혼란 상황에 대한 불안감에 러시아의 원조를 요청한다. 보리스 고두노프는 부흐툴린 공작을 총사령관으로 하여 7천의 병력을 투입하여 다게스탄의 타르쿠를 점령한다. 하지만 샴칼의 요청을 받은 투르크군이 러시아군을 에워쌓고, 러시아는 협상을 요청하여 철수를 약속한다. 러시아군이 일단 테레크강까지 철수하자, 타르쿠의 샴할은 러시아군을 기습하여 전멸시킨다.
이로써 코카서스에 발을 디뎠던 러시아의 첫번째 시도는 동쪽의 산민들과 이슬람 제국들의 힘에 막혀 무참히 실패로 돌아갔다. 러시아가 다시 이 산맥에 도전하기까지는 1세기가 넘는 기간이 지나야 했다.
18세기 중반
근대 러시아의 기틀을 다졌다는 표토르 대제가 즉위하자, 그는 남쪽의 흑해로의 진출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 그것은 러시아의 오랜 전통이자 야망인, 바다에의 진출을 위한 숙원이었다. 하지만 흑해로 진출한다는 것은 그 지역에 자리잡은 크림 한국과, 그 후견인이자 강대한 세력이었던 오스만 투르크 제국에 대한 도전이기도 하였다.
표토르 대제
이 충돌이 실현된 것은 1709년, 스웨덴과의 폴타바 전투에서 러시아가 승리한 이후였다. 스웨덴의 국왕 카알 12세는 오스만 투르크로 도주하였고 술탄에게 원조를 요청하였다. 표토르는 오스만 투르크에게 스웨덴 국왕의 소환을 요청하였고, 거부할 경우 전쟁도 불사한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양국은 1710년에 전쟁을 벌였고, 이 전쟁에서 오스만 투르크는 러시아군을 참패시켰고 표토르 대제까지 포위하였다. 항복이나 다름없는 굴욕적인 협약에 따라 러시아는 흑해에서 물러서야 했다.
일단 흑해로의 길이 막힌 표토르는 시야를 카스피해와 중앙아시아로 돌렸다. 1721년 페르시아에 복속됬던 레즈기안 족이 중앙아시아의 러시아 상인을 공격하였고 큰 피해를 입혔고, 이미 첩자를 보내 페르시아의 샤하비 왕조가 붕괴 되고 껍데기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표토르 대제는 즉각 병력을 투입하였다.
러시아군은 카스피해 연안을 따라 페르시아 영역으로 쳐들어갔고, 가는 곳곳마다 페르시아 마을들을 함락시켰다. 내란에 의해 거의 무정부상태였던 페르시아의 저항은 없었다. 1723년, 페르시아는 러시아에게 코카서스 산맥 남단의 영역과 카스피해 서쪽 해안 일대를 러시아에게 넘겨준다는 협약을 맺었다.
페르시아 샤하비 왕조
러시아는 페르시아와의 일을 끝내고 본국에 돌아오기 위해서는 코카서스 동쪽을 거쳐야 했고, 이곳은 지난 세기에도 러시아군을 격파한 적이 있었던 타르쿠의 샴할의 영역이었다. 샴할은 처음에는 러시아에게 협조할 뜻을 보였지만, 러시아가 카스피해 해안에 교두보를 마련하지 못하자 산에 들어가 농성하기로 하였다. 러시아는 요새를 건설하면서 그들을 굴복시키고자 했지만, 산민들을 굴복시키기에는 표토르 대제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 1725년에 사망하기 때문이다.
표토르의 뒤를 이은 차르 들은 코카서스의 중요성에 대하여 별로 인식하지 못했고, 중앙의 적극적인 지원이 없이 장악하기에는 너무 어려운 곳이었다. 질병이 돌아서 카스피해 서안의 러시아 주둔군의 절반이 목숨을 잃었다. 업친데 덥친 격으로 페르시아는 나디르 샤의 지휘 하에 국력을 정비하고, 코카서스 지방의 빼앗긴 영역을 되찾으려고 하였다.
- 러시아가 나흐족을 지칭하는 용어인 체첸 (chechen)은, 1732년 아르군 강을 건너 처음 접했던 나흐족 마을인 체첸 아울에서 비롯되었다. 당시 러시아 분견대는 나흐족과의 전투에서 패배하고 동쪽으로 후퇴하였다.
1735년, 러시아는 간제흐 조약을 맺고, 10여년 전에 표토르 대제가 장악했던 코카서스와 카스피해의 모든 영역을 페르시아에게 넘겨준다. 이 조약은 4년 뒤에 패전 뒤에 투르크와 맺은 베오그라드 조약 (카바르다족은 중립지역이며, 러시아는 흑해에 해군을 보유할 수 없다.) 과 함께 러시아의 영역이 코카서스의 동쪽과 서쪽의 모든 영향력을 포기해야 했다. 거의 120년 만의 코카서스 산맥을 향한 러시아의 두번째 시도는 이렇게 실패로 끝났다.
러시아 제국의 팽창
18세기 후반
러시아가 다시 코카서스 산맥에 발을 디딘 것은 30년이 흐른 뒤였다. 러시아는 남쪽의 코사크 족들의 개척으로 점차 영역을 넓혀가면, 그 영역에 뒤이어서 요새를 건설하는 방식으로 점점 발을 넓혀갔다. 1763년에 예카테리나 2세는 북 코카서스의 코사크 정착지 중 하나인 모즈독에 요새를 구축하였다. 이 요새는 연이어 건설된 주변의 요새들과 함께 '모즈독 라인'을 구축하였고, 산민들을 정복하기 위한 러시아의 기지가 되었다.
예카테리나 여제
산민들은 늘어나는 코사크 정착지와 러시아 요새에 대해 점차 반감을 갖게 되었고, 과거 복속되었던 카바르다인들은 예카테리나 여제에게 요새의 제거를 청원하였고, 여제는 이를 거부하였다. 산민들은 오스만 투르크에게 이 문제의 해결을 부탁하였고, 러시아는 다시 오스만 투르크와 전쟁하였다. 예카테리나 2세는 번번히 투르크 술탄에게 막혀서 러시아가 물러나야 했던 그 아픈 기억을 떨쳐버렸다. 몰디비아 전투에서 승리하여 크림 반도를 장악한 여제는 1774년에 투르크와 쿠추크 카이나르지 조약을 맺는다.
러시아가 조약의 성과로 얻게 된 흑해 함대
이 조약은 러시아의 숙원이었던 크림반도와 흑해로의 진출을 보장해주었다. 또한 양 제국의 완충지대였던 카바르다인들을 러시아가 완전히 복속시킬 권리를 투르크로부터 얻어냈다. 하지만 코카서스의 산민들은 이 조약에 대해 별로 의미를 두지 않았고, 모즈독 라인에 대한 직접적인 실력행사를 하였다. 몇 개 요새를 습격한 것이다.
1779년 2월, 예카테리나 여제는 포템킨 공작을 사령관으로 러시아군을 코카서스에 투입하였다. 지역의 산민들을 제압하고 새로 얻은 영역을 고분고분하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또한 산맥 남쪽에서 같은 그리스 정교국인 러시아의 원조를 애타게 바라는 그루지아까지 영토를 확대시키고, 장차 페르시아와 인도까지 진출하는 발판으로 삼고자 하였다.
러시아가 건설한 도로와 방어 요새
이제 코카서스 산민들에게는 북쪽의 제국 러시아의 힘이 확실하게 인식되었다. 강대한 제국 3개의 팽팽했던 균형은 페르시아의 쇠퇴와 오스만 투르크의 패배로 인해 러시아 제국에게 넘어갔다. 1795년에 페르시아가 카프카즈 산맥 남쪽에서 세력을 키워서 러시아가 물러난 경우가 있지만, 일시적인 반등이었을 뿐 이미 힘의 추는 러시아에게 넘어가 버렸다. 산민들에게 남은 길은 러시아에게 굴복하느냐, 저항하느냐 뿐이었다.
바로 이 때, 코카서스의 산민들 사이에서 세이크 만수르 우슈루마 라는 어느 체첸인이 항쟁을 부르짖으며 떨쳐 일어났다.
최초의 성전인 하자바트(Ghazawat)가 시작된 것이다.
출처 : http://www.amina.com/article/br_hist.html
http://www.chechnyafree.ru/en/article.php?IBLOCK_ID=352&SECTION_ID=0&ELEMENT_ID=42384
http://www.truth-and-justice.info/chechnat.html
http://en.wikipedia.org/wiki/Russian-Circassian_W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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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포템킨... 전함 포템킨?;;
여제의 정부이자 측근으로 유명했던 사람 중 한명입니다.
조금 더 부연하자면. 예카테리나 여제 자체가 남편에게 반란크리(정확하게는 남편을 싫어하던 귀족들과 손잡고 남편을 감옥에 수감후 살해) 때리고 황제에 즉위한거라. 예카테리나 여제는 정부를 꽤 많이 두었스빈다-_-; 포템킨은 그중에 머리 좀 돌아가고 똘똘한 친구이빈다. 똘똘하기도 하지만 역시나 애널썩힝 기술이 뛰어나 [포템킨의 마을]이라는 고사성어를 만들어내기도 했스빈;;
포템킨의 마을?
포템킨의 마을이라뇨?? 좀 자세한 가르침을...^^:;;
왜 옛날 연개소문드라마에 나왔던 그림성처럼, 삐까뻔쩍한 이동식 마을을 제작한 다음에, 예카테리나여제가 러시아지방을 순시할 때 일정에 맞춰서, '황제폐하 이렇게 신민들이 잘살고 있습니다.' 라고 하는 식으로 계속 설치하고/황제한테 보여주고/ 다시 뜯고, 이걸 반복 했다는 거죠. 실제로는 러시아민중들은 예카테리나가 보는 것과는 달리 삶이 비참했다는 얘기죠. 그래서 전시행정이나 실속이 없는 정책 등을 보고 '포템킨의 마을같다.' 라는 말을 하는 겁니다.
근데 제가 본 책에서는(무슨책인지 기억은 안납니다만, 쿨럭), 예카테리나가 이 포템킨을 치세 초기에 정부로 둘 수 있었던 것이 러시아에 행운이었다는 식으로 표현하더군요. 무장공비님 말씀대로 이 포템킨이 예카테리나의 애널을 썩힝(자기에 대한 여제의 총애가 떨어지니 직접 잘생기고 젊은 장교들을 예카테리나에게 공급하는등..)하는 기술 때문에 권력을 잡은 건 맞지만, 장군으로서도 문관으로서도 뛰어난 인물임에 분명합니다. 실제적인 러시아 황제는 당시 포템킨이었다는 말도 있고요. 러시아 전함에 괜히 포템킨이라는 이름을 붙인 건아니겠죠. .
율리우스 / 포템킨의 마을에 대한 설명은 너무 잘 해주시니 제가 더 설명 할 것은 없고;; 제가 애당초 예카테리나의 치세를 부정적으로 보기 때문에-_-;; 포템킨의 능력에 대한 폄하는 좀 섞여 들어간 듯 하빈다. 아놔 자비 점 굽신굽신. 사실 좀 똘똘한정도는 아니긴 하죠;;
까페 최고 인기인인 무장공비님한테 반론하고 싶은 마음은 1g도 없었는데, 그러시니 오히려 제가 더 굽신굽신..... 저야 말로 예카테리나 안좋아해서 반대급부로 포템킨이 더 대단한 인물이 아닌가 .. 라고 생각하는 중인데 .. 쿨럭.
그런 유능한 자를 보냈다는 것은 곧 러시아가 코카서스를 상당히 비중있게 봤다는 의미겠죠
당근이죠. 러시아의 1차세계대전전까지의 모든 전략은 부동항 확보에 초점이 있지 않습니까? 쩝.
삭제된 댓글 입니다.
오스만 투르크 제국을 '오토만 제국'이라고 하기도 하지만, 저는 오스만 투르크 제국이라고 통칭합니다. (Osman Turk Empire / Ottoman Empire), 현지어로 카프카스(kavkaz) 산맥이라고 하지만, 저는 좀 더 알려진 영어 표현인 '코카서스 (caucasus)'를 사용하기로 하였고 제목도 그렇게 달았습니다.
중앙아시아하고 이 카프카스를 러시아가 장악한 시기가 비슷하네요.
러시아가 남쪽으로 내려가는 시점이니까요
그나저나 러시아는 왠지 한 300년전쯤판도로 돌아갈려는 조짐이 슬슬 보인다능.. 대략 이란(옛페르시아) 핵보유국반열에 오르고 레바논에서 축척한 노하우로 주변국뒷크리집중하고 터키(오토만) EU가입하고 중궈들 국경분쟁일으켜서 블라디보스톡뺐기면 대략 일당독재산유국테크탈조짐이...
터키와 이란이 각자 어느 정도 힘을 키우는 상황이지요. 하지만 코카서스 지방에는 아직 노골적으로 건드리기에는 많이 부족하죠
러시아의 중앙아시아 진출의 계기가 된것
네이버 까페의 어느 글인가에 러시아 중앙아시아 진출에 대해 자세히 나온 것이 있었습니다.
정말 재미있군요 세번은 독파를 해야 전체줄거리가 익혀질것같군요^^
그럴만한 가치가 있도록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다만 제가 너무 글을 복잡하게 써서 이해를 못하시는 거면 주의하겠습니다.
생각보다는 러시아의 점령이 느리군요. 대략 1760년대라... 이미 1600년대에 태평양을 보았던 러시아의 국력을 견제한 것은 산민들의 독립심과 강대락 2대 제국의 견제때문이었겠군요.
러시아가 저 지역에 발을 디디고 주변의 경쟁자들을 제압하는 데 걸린 기간이 거진 200년이 넘죠. 거기에 완전 제압하는 데도 100년 가까이 걸렸고요. 그 뒤로도 백여년이 흘렀지만 반란은 끊이지 않는 지역이지요.
그토록 작은 나라를 3대 메이저들이 둘러싸고 있었다니...ㅠ.ㅠ
세 제국의 힘의 균형은 결국 러시아의 우세로 마감되는군요..그리고 코카서스의 항쟁의 시작이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