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둘레길<09>
미리 가본 지리산 둘레길 300km
남명 조식 선생의 기개가 살아있고 의병운동 촉매제됐던 그곳
산청군 시천면 덕천서원~단성군 어천마을 21.5km...덕산 곶감마을도 지나
남명매, 남사마을 원정매, 단속사지 정당매 '산청 3매' 꼭 둘러봐야
지리산의 동쪽 산청의 핵심 키워드는 아무래도 천왕봉과 남명 조식 선생이다. 말 그대로 청정골 산청의 한약초와 곶감 등의 특산물도 유명하지만 요즘 같은 난세에는 천왕봉의 웅장한 산세에 화답하는 남명 선생의 기개를 되새기지 않을 수 없다.
난세의 지식인으로 전남 구례에 매천 황현 선생이 있다면 경남 산청에는 남명 조식 선생이 있었다. 매천 선생은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자 "새 짐승도 슬피 울고 강산도 찡그리네. 인간 세상에 글 아는 사람 노릇하기가 어렵구나" 라는 '절명시' 3수를 남기고 자결했으며, 남명 선생은 끝끝내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산청군 시천면 원리의 덕천서원 앞 세심정에 걸터앉아 덕천강을 바라보며 '맑은 물빛으로 마음을 씻듯이' 남명 선생의 출처에 대해 생각한다. 선생은 1538년 헌릉참봉에 임명되었지만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고, 이후에도 선조가 여러 차례 불렀으나 끝끝내 그 뜻을 굽히지 않았다. "선비가 벼슬을 하는 것은 녹을 받아 자신의 사리를 채우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군주를 도와 백성의 생활을 윤택하게 하는 데 있다"며 "선비는 모름지기 출사할 때와 은둔할 때를 알아야 한다"고 했다. "선비의 절개 있고 없음이 출처 한 가지에 달렸다(士君子大節 惟在出處一事而已)"며 선비가 출사해 자신의 뜻을 펼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구차하게 연명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남명 선생은 은둔처사로만 머물지 않았다. 결코 현실을 외면하지 않았던 것이다. 1568년에는 상소문 '무진봉사(戊辰封事)'를 올렸는데, 특히 서리망국론은 당시 서리의 폐단을 극렬히 지적한 것으로 유명하다.
산림처사를 자처하면서 말년에는 산천재를 짓고 후학들을 양성하였는데, 남명의 학문적 사상인 경과 의는 제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리하여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의를 중심적 실천과제로 삼았던 곽재우 등 제자들이 최초로 대대적인 의병활동을 시작해 전국적으로 의병운동이 확산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관직 거절했지만 은둔하지는 않아
남명 선생의 위패가 모셔진 덕천서원을 참배하는 마음으로 둘러보고 시천면소재지 방향으로 길을 나서는데 곳곳이 시끌벅적하다. 1월 9∼10일 이틀 동안 산청 곶감축제가 벌어지고 있었다. 뽕짝 가락이 울려 퍼지는 상투적인 축제의 풍경은 어디나 비슷하다. 그러나 '지리산 호랑이도 무서워하는 곶감'인 산청군의 특산물을 외면할 수 없다. 예로부터 조선시대의 임금님에게 바치는 진상품 중에서 감으로는 경남 하동군 악양면의 대봉감 홍시와 산청군의 곶감이 제일이라 했다.
다들 알다시피 곶감은 감을 저장하는 방식의 하나로 매우 오래전에 제조방법이 창안되었으며 건시라고 불린다. 단단한 생감의 껍질을 벗겨 줄이나 싸리나무 등에 꿰어 바람이 잘 통하고 햇볕이 좋고 비를 잘 피할 수 있는 헛간에 장대를 걸어 높이 달아 말린다. 감의 떫은 성분이 사라지고 단맛이 배어나오며 시설이라 불리는 하얀 가루가 생기면서 곶감이 된다.
산청 곶감은 시천면(덕산), 삼장면, 단성면 지역에서만 자생하는 고종시와 단성시를 깎아서 만든다. 천연 당도가 높고 껍질이 얇을 뿐 아니라 육질이 찰지고 연하며 씨가 적어 먹기도 좋아 품질 면에서 월등히 뛰어나다. 올해만 해도 1300여 농가에서 1700t을 생산해 300억 원의 소득이 예상된다니 그 규모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길거리 좌판에 주욱 늘어선 곶감들을 둘러보다가 재빨리 원리교를 건넜다. 오른쪽 강변길을 따라 축제장의 소음으로부터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장터를 지나 선천재로 가는 강변길에서 문득 한 후배를 떠올렸다. 시천파출소 맞은편 덕산한의원의 원장 신윤상이다. 차라도 한잔 얻어 마시고 갈까 하다가 발길을 재촉했다. 조금 아쉽기도 하지만 어수선한 축제 때보다는 좀 더 한가한 날로 미루고.
신윤상 원장과의 인연은 참으로 남달랐다. 2001년 지리산댐 문제가 불거지자 지리산 850리 도보순례를 했는데, 바로 그때 처음 만났다. 당시 그는 한의대 휴학생이었다. 나는 20여 명 순례단의 대장 역할을 맡아 16박17일 정도 야영을 하면서 지리산을 한 바퀴 걸어서 돌았는데, 키도 크고 눈도 크고 코도 큰 젊은 청년이 품성까지 너무나 좋아 보였다. 그리하여 단장인 수경 스님과 상의해 순례단 깃발을 잡고 맨 앞에서 걸어가는 기수를 맡겼는데, 걷다가 지쳐 잠시 쉴 때도 깃발을 함부로 땅바닥에 내려놓거나 하지 않았다.
그러던 그가 3년 후 홀연히 지리산에 다시 나타났다. 한의대를 졸업하자마자 도시의 삶을 버리고 바로 시천면에 아주 작은 덕산한의원을 차린 것이다. 나중에 들은 말이지만 도보순례를 하면서 산청군 시천면(옛 지명 덕산)을 눈여겨봐두었다고 한다. 일평생 시골 한의사로 살 만한 곳을 물색하고 있었는데 순례 중 남명 선생의 혼이 깃든 시천면에 눈길, 마음길이 팍 꽂혔다는 것이다. 지금도 시골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지병을 돌보며 효자 아들 같은 한의사 길을 가고 있다.
아직 젊은 한의사지만 어느 새 이 동네의 신망 높은 유지가 되었다. 자주 만나지는 못하지만 산청의 신윤상을 떠올리면 그 자체만으로도 마음이 흐뭇해지고 지리산의 좋은 벗(동무) 하나가 동시대의 같은 하늘 아래 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지는 것이다.
천천히 덕천강을 따라 걷다가 아주 오래된 소나무 세 그루가 그윽한 풍취를 자아내는 산천재를 바라본다. 남명 선생이 말년에 수학하며 후학들을 가르치던 곳이다. 선생은 산천재를 짓고는 그 뜰에 매화나무(남명매)를 손수 심었다. 밑에서부터 크게 세 갈래로 갈라진 줄기가 뒤틀려서 위로 뻗어 오른 이 나무는 440여 년의 연륜을 자랑한다. 해마다 3월 하순이면 연한 분홍빛이 도는 반겹꽃이 가득 피는데, 그 향기가 지극히 맑다.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진정한 은둔지사였던 남명의 정신이 해마다 봄이면 산천재의 뜰에 은은히 퍼지는 것이다.
남명 선생 말년 후학들 가르치던 산천재
이 남명매는 남사마을의 원정매, 단속사지의 정당매와 더불어 '산청3매(三梅)'로 널리 불리고 있다. 섬진강변의 매화는 봄의 전령으로서 달뜬 상춘객의 눈길을 끌지만 조금 늦게 피는 고매한 '산청3매'는 정신의 맑은 향기를 뿜어낸다. 3월 말쯤 지리산에 온다면 꼭 산천재∼남사마을∼단속사지의 '산청3매'를 둘러볼 것을 권한다.
산천재 앞 도로(국도 20호선)를 건너 마근담으로 가는 길은 차량이 겨우 드나들 만한 포장길이다. 산청의 오지마을 중 하나인 마근담마을은 원래 '막힌 담'이란 말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농업학교가 자리한 안마근담에서 웅석봉 자락의 협곡에서 길이 막히니 그럴 만도 하다.
길 옆에는 맑은 계곡물이 흐르다 얼어붙어 있고, 지난해 늦가을 몰아닥친 한파에 그대로 얼어붙은 홍시들이 지천이다. 곶감을 깎기 위해 채 따기도 전에 얼어붙은 것이다. 농민들에겐 아쉽지만 덕분에 개똥지빠귀 등 새들에겐 겨우내 양식이 확보된 셈이다.
지리산 둘레길(숲길)은 마근담 마을 오른쪽 산길로 접어들어 산 너머 단성면 백운천 계곡에서 올라오는 임도를 만나기까지 오르막 오솔길을 올라야 한다. 시천면과 단성면의 경계인 고갯길을 넘어서면 8km 정도의 임도가 구불구불 이어진다. 백운천 계곡을 건너 고령토 채취장을 지나치면 운리 원정마을의 1001지방도가 나오는데, 왼쪽으로 이 길을 따라 조금만 가면 바로 탑동마을의 단속사지가 나온다.
단속사는 말 그대로 속세와의 연을 끊는다는 뜻으로, 신라 경덕왕 때 신충이라는 대신이 지리산으로 출가하여 지은 절이라 한다. 경덕왕이 두 번이나 불렀으나 신충은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어 이 단속사를 짓고 죽을 때까지 속세를 떠나 대왕의 복을 빌기를 간청하니 경덕왕이 허락하였다고 전한다.
단속사지의 금당 터 앞에는 동서로 두 탑이 나란히 서 있다. 동탑은 2단의 기단에 3층의 탑신을 올린 전형적인 모습이다. 기단의 아래층은 'ㄴ'자 모양의 돌을 이용해 바닥돌과 동시에 만들어졌는데, 그 위로 기단을 한 층 더 올린 후 몸돌과 지붕돌을 교대로 쌓은 탑신을 올려놓았다. 꼭대기에는 네모난 받침돌 위로 머리장식의 일부가 남아 있다. 동탑은 서탑과 그 규모와 건조 수법이 거의 동일한 신라 중기 이후의 양식으로 상하의 비례가 알맞고 석재의 구성에도 규율성이 있어 보인다.
탑을 둘러본 뒤 위쪽 마을길로 조금만 들어서면 바로 그 유명한 정당매가 담벼락 아래 보호철책을 두른 채 모습을 드러낸다. 고려 말 정당문학 겸 대사헌을 지낸 강회백이 단속사에서 공부할 때 심었다고 한다. 단속사지 입구에는 남명 선생의 작은 시비가 하나 있다. '옛 단속사 축대엔 봄이 깊었구나 / 이별하던 때 잘 기억해두게나 / 정당매 푸른 열매 맺었을 때' 라는 내용으로 단속사지에 들른 사명대사에게 남명 선생이 준 시다.
단속사지를 지나 임도를 따라가면 점촌마을과 산중의 청계저수지가 나오는데, 이 청계계곡은 지리산 끝자락인 웅석봉(1,099.3m) 아래에 자리 잡은 곳으로 많은 이들이 찾는 휴양지다. '가파른 벼랑 아래로 곰이 떨어져 죽었다'는 슬픈 전설이 전해지는 웅석봉은 전북 남원시 운봉읍의 바래봉에서 시작하는 지리산 태극종주의 마지막 봉우리다.
47년 전 미국 이민간 의사 편지 보내와
이병주 선생의 대하소설 <지리산>에도 웅석봉 얘기가 나온다. '달뜨기는 지리산의 초입이다. (중략) 지리산을 찾은 빨치산들은 조개골 등에 숨어 이곳 달뜨기 능선 위로 떠오르는 달을 보며 고향과 가족을 생각했다. 낡은 총자루를 옆에 두고 구수하게 풍기던 된장냄새와 아내의 젖비린내와 어머니의 말라붙은 가슴팍을 떠올렸을 것이다' 라고 했다. 여기에서의 '달뜨기'가 바로 웅석봉의 다른 이름이다.
문득 미국에서 온 편지 하나가 떠오른다. 전혀 모르는 사람인데, 지리산에 사는 나의 글과 졸저인 산문집 <지리산 편지>를 읽고 보내온 편지였다. 서울대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이미 47년 전에 미국으로 간 정두현 선생이 보내온 간절한 편지였다. 대학 2학년 시절인 1958년 어렵게 당국의 허락을 받아 지리산 산행을 하였는데, 그때 노고단에서 본 빨치산의 흰 뼈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고국을 떠난 지 오래돼 맞춤법이 틀릴지도 모른다며 겸손하게 보내온 편지엔 '지리산, 1958년' 이라는 시 한 편이 동봉돼 있었다. 그의 시를 읽고 가슴이 먹먹해 우물쭈물하다가 때를 놓치고 보니 아직까지 답장을 못했다. 머나먼 나라에서 조국의 분단을 아파하며 모국의 안부를 묻는 백발의 의학도가 눈앞에 선하다.
산중에서 두서없이 살다보니 차일피일 미루던 답장을 하루 빨리 해야지 다짐하며 청계저수지를 에둘러 1001번 지방도를 오른다. 고갯길에서 가쁜 숨을 내쉬며 조금 쉬었다가 내리막길에 접어드니 어느새 어천계곡의 산간오지인 어천마을이 나온다.
낙동강과 남강의 상류인 경호강이 멀지 않다.
글쓴이:이원규 시인 1962년 경북 문경 출생. 1984년 <월간문학>, 1989년 <실천문학>으로 등단. 시집 <강물도 목이 마르다> <옛 애인의 집><돌아보면 그가 있다> <빨치산 편지> 등과 산문집 <지리산 편지> <길을 지우며 길을 걷다> 등을 펴냈다. 신동엽창작상, 평화인권문학상 수상. 순천대 문창과, 지리산학교, 실상사 작은학교 강사.
참조:지리산
참조:지리산 둘레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