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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숲으로 스크랩 박인환의 현실인식과 사실주의 시 / 공광규
작은나무 추천 0 조회 64 08.07.17 00:20 댓글 10
게시글 본문내용

 

 

*[문학사상] 2006년 3월호

 

박인환의 현실인식과 사실주의 시 - 공광규


1. 들어가며


  박인환은 1946년 12월 <<국제신보>>에 <거리>를 발표하여 등단한 후 10여 년 동안 문단에 숱한 일화와 화제를 뿌리다가 1956년 3월 20일 31세로 죽었다. 지금까지 그에 대한 시사적 평가는 “해방 후에 나타난 새로운 모더니스트”1)로 집약된다고 보아도 무방하며, 그의 시세계는 주로 “도시문명에 대한 비판, 물량주의, 자본에 대한 혐오, 그리고 팽배된 죽음의식”2)이나 “소박한 센티멘털리즘에 바탕을 둔 허무주의”3) 등 논점의 자장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시 전편을 살펴보면 의외로 구체적인 현실인식과 사실주의 기법에 충실한 시들이 많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럼에도 그의 사실주의 시편들에 대한 다양한 검토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것 같다.4) 그리고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의 책이 나올 때마다 사실주의적 시편들은 편집과정에서 번번이 빠지기가 일쑤였다. 이를테면 1955년 박인환 자신이 편집하여 출판된 『박인환 선시집』(산호장)은 「거리」와 「남풍」이 빠지고, 1976년에 그의 아들이 편집한  20주기 기념시집 『목마와 숙녀』(근역서재)에서는 「남풍」 「자본가에게」 「인도네시아 인민에게 주는 시」 등이 빠져있다. 당시 정치적 상황을 고려한 편자들의 내부 검열로 보인다.

 

  박인환은 해방 직후 정치권과 문단이 좌우 분열로 혼란스러웠으나, 거기에 휘말리지 않고 새로운 해방의 나라 새로운 도시의 새로운 현실을 그가 생각하는 ‘시민정신’이라는 렌즈로 들여다보며, 이를 시로 쓰려는 부단한 노력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전란을 직접 겪으면서 숨어살거나 피난행렬에 속하기도 하고, 종군기자로 참여하여 전쟁의 참화를 체험하고 시로 썼다.

 

  또한 전후의 상실감과 문명비판의 시들도 구체성이 떨어지기는 하나 정확한 현실인식 노력을 통해 창작에 임하였음을 박인환의 많은 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점들이 당대 현실인식을 시로 쓴 박인환을 리얼리스트로서 보아야 할 근거가 된다. 자본 및 문명비판에 대하여는 다른 지면에서도 많이 다루어졌으므로 해방직후 혼란기에 쓴 시와 전쟁과 전쟁으로 인한 상흔을 제재로 한 시를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2. 해방기 현실인식과 시적 형상화


  박인환의 현실인식과 그가 지향하는 문학정신은 산문을 통해 확인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당신 문단에서 주목을 받았던 동인지 <<신시론>>(1948.4. 국판 16쪽) 1집에 박인환이 산문을 썼지만 아직 내용을 확인할 수 없다. 다만 같은 동인지에 산문을 쓴 김경린의 글을 통해 ‘새로운 시적 사고’와 ‘현실의 과학적인 채택’, 그리고 ‘현실과의 새로운 결합’이 박인환과 동인들이 지향한 창작 이념이었다는 것을 눈치 챌 수 있다.

  박인환은 <<신시론>> 제2집에 해당되는 사화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1949.4)에 창작시와 발문을 싣고 있어서 그의 문학적 지향성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 거기에 박인환이 「불안과 희망 사이에서」라는 제목으로 쓴 발문 일부는 다음과 같다.


            나는 불모의 문명, 자본과 사상의 불균정한 싸움 속에서 시민정신에 이반된 언어작용만의 어리석음을 깨달았다.

            자본의 군대가 진주한 시가지는 지금은 증오와 안개 낀 현실이 있을 뿐......

            더욱 멀리 지난 날 노래하였던 식민지의 애가이며 토속의 노래는 이러한 지구에 가라앉아간다5)


  위 인용문에서 박인환이 지향하려는 핵심은 시민정신이며, 시민정신의 렌즈로 본 현실은 “불모의 문명”, “자본과 사상의 불균정한 싸움”, “자본의 군대가 진주한” “증오와 안개가 낀 현실”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과거의 식민지 애가와 토속의 시는 한물 간 것으로 보고 있는 데, 이는 ‘청록파’ 등 기성문단을 지목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다시 정리하면 박인환은 새로운 도시에서는 시민정신에 입각한 시민들의 합창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가 생각하는 시민정신이 무엇인지는 다음 기회로 미루거나 더 논의해볼 필요가 있다. 

  아무튼 박인환은 나름의 일관된 시민정신으로 새로운 사회에 대한 당대적 현실인식 노력과 시 창작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박인환 자신이 편집하여 출판된 『박인환 선시집』(산호장. 1955)의 제목을 ‘검은 준열의 시대’로 하려고 했던 것을 보면 그가 시에 당대의 시대의식을 시에 반영하려는 노력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박인환 선시집』 후기를 보자.


            시를 쓴다는 것은 내가 사회를 살아가는데 있어서 가장 의지할 수 있는 마지막 것이었다. 나는 지도자도 아니며 정치가도 아닌 것을 잘 알면서 사회와 싸웠다. (중략) 여하튼 나는 우리가 걸어온 길과 갈 길 그리고 우리들 자신의 분열한 정신을 우리가 사는 현실사회에서 어떻게 나타내 보이며 순수한 본능과 체험을 통해 본 불안과 희망의 두 세계에서 어떠한 것을 써야 하는가를 항상 생각하면서 여기에 실은 작품들을 발표했었다.6)


  박인환은 문단에 등단한 시점이 10년쯤 되는 시기에 선시집을 엮으면서 자신이 시에 의지하여 “사회와 싸웠다”고 밝힌다. 이는 그가 현실주의 시 정신을 항상 가지고 있었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들의 과거나 미래, “분열한 정신”을 “현실사회에서 어떻게 나타내 보”일건가를 항상 생각했다고 했는데, 이는 현실인식의 시적 표현의 문제라고 볼 수 있다. 이 시적 표현은 곧 사실주의 시로 나타난다.  

  또한 박인환은 국제적인 정치정세에 대한 시사적인 감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항상 문학의 새로움을 찾았던 박인환을 비롯한 동인들은 구미의 시인들을 번역하거나 직접 일본에서 동인을 하다가 온 사람들이었다. 박인환은 외국잡지를 들고 다니기도 하였고, 적어도 일본어 외에 영어 프랑스어 해독 능력이 있었던 것 같다. 박인환은 실제로 1947년 <<신천지>>에 <아메리카 영화 시론>을 1948년에는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를 발표하기도 했다. 박인환이 외국 문학이나 예술에 대한 관심으로 얻은 ‘외래어 남용’은 ‘시의 멋부리기’보다 시에 현대성을 구현하려는 표현전략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의 국제정세에 대한 시사적 감각은 해방 직후 신식민지로 진입하려는 한국의 혼란현실을 지구적 상상력을 통한 객관화 하려는 전략으로 이해할 수 있다. 

  등단작 「거리」(1946.12)는 산만한 표현이 보이기는 하지만 지구적 상상력을 통한 이국의 지명과 문명어를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무말도 하지 말고

지나간 날의 동화를 운율에 맞춰

거리에 화액(花液)을 뿌리자

따뜻한 풀잎은 젊은 너의 탄력같이

밤을 지구 밖으로 끌고 간다

                             - 「거리」 부분

  “나의 시간”은 해방 직후 혼란기를 보내고 있는 창작자로 보이는 화자의 현재 시간이다.  핵심 단어인 ‘거리’는 혼란한 국내 현실이다. 이러한 거리의 시간에 있는 화자의 현재 정서는 슬픔이다. 그러나 화자는 결국 슬픔을 극복하자는 긍정적 세계관을 피력한다. 1연에서 “한없이 아름다운 계절이 / 운하의 물결에 씻겨”갔다며 한국의 아름답지 않은 현실 상황을 전제 한 뒤, 그러나 화자는 이런 슬픈 현실에서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지나간 날의 동화를 운율에 맞춰 / 거리에 화액을 뿌리자”고 선동한다. 그러면 “따뜻한 풀잎”은 “밤을 지구 밖으로 끌고 간다”는 것이다. 지구 밖은 다른 나라이며, 그곳은 “코코아의 시장”이 있는 곳이며, “베링 해안 같은 나의 마을”이 있는 곳이다. 스코올, 코코아의 시장, 아세틸렌, 베링 해안, 베고니아, 크리스마스 등 외래어와 문명어들이 등장하여 현대적인 감각을 보여주고 있다. 표현의 구체성이 떨어지고 심상의 집중이 안 되고 감상적인 면이 드러나는 것이 사실이지만, 현재의 혼란한 슬픈 현실을 극복하려는 의지를 전 지구적으로 상상력을 확장하고 있다는 데 이 시의 의의를 찾을 수 있다.

  그가 두 번째 발표한 시로 보이는 「남풍」(1947.7) 역시 지구적 상상력을 동원하고 있다. 다만, 지구적 상상력을 통하여 반제국주의 투쟁을 종용하고 있다는 것이 등단시와 다르다. 박인환을 모더니스트로만 보기 어려운 놀라운 진경이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민족의 운명이

쿠멜신(神)의 영광과 함께 사는

앙코르와트의 나라

월남인민군

멀리 이 땅에도 들려오는

너희들의 항쟁의 총소리

                             - 「남풍」 부분


  이 시는 한마디로 반제국주의 투쟁의 아시아적 연대를 고무시키고 있다. ‘남풍’은 남쪽에서 벌이고 있는 반제국주의 투쟁의 비유이다. 시에 거명된 말레이, 버마, 월남 등에서 일어나고 있는 반제국주의 투쟁의 현장이 위도 상 남쪽에 있으며, 이들의 투쟁 바람이 “아시아의 모든 위도”에 불어오기를 바라는 시인의 열망이 시로 표현되는 것이다. 1연의 “거북이처럼 괴로운 세월이 / 바다에서 올라온다”는 것은 바다를 건너오는 제국주의의 식민지 열풍을 비유하고 있다. 2연은 식민주의자로 상징되는 ‘백인’이 경영하는 고무농원에서 일하는 식민지 민족의 절망감을 표현하고 있다. 제국주의의 약탈적 착취와 그 아래 사는 식민지 강제적 노동에 동원된 노동자의 절망을 보여주고 있다. 3연은 지나 반도의 구체적이고 무력적인 반제국주의 투쟁을 묘사하고 있다. “앙코르 와트의 나라”와 “월남인민군”이 벌이고 있는 반제국주의 무력투쟁의 총소리가 화자가 사는 “이땅” 즉, 한반도에까지 들려온다는 것이다. 4연에서는 화자의 “가슴이 부서질 듯 남풍이 분다”고 하여 한반도에서 반제국 투쟁의 절실함을 말하고 있으며, “계절이 바뀌면 태풍이 온다”고 하여, 향후 한반도에 거센 무력투쟁이 있을 것임을 예언하고 있다. 5연에서는 반제국주의 투쟁의 아시아적 연대에 “귀를 기울여라”하며 독자에게 명령적 어조로 이야기하고 있다. 6연에서는 반제국투쟁의 절실함이 체화되어 있음을 “눈을 뜨면”이라는 행으로 처리하고 있다. 그리고 남방의 무력투쟁의 바람이 “남방의 향기”로 전화되어 ‘가슴’이 아니라 ‘가슴팍’으로 강하게 온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 시는 서구 제국주의에 침탈당하고 있고, 그에 대항하여 싸우고 있는 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의 상황을 통해 해방정국의 혼란 속에서 미국과 소련의 개입으로 자주국가 건설이 요원해진 한국의 정치상황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1948년 5월 <<신천지>>에 발표한 「인도네시아 인민에게 주는 글」 역시 초기의 작품이다. 작품 끝에 1947년 7월 27일에 썼다고 기록하고 있으니 「남풍」을 발표한 시기와 같다.


우리와 같은 식민지의 인도네시아


(중략)


마땅히 요구할 수 있는 인민의 해방

세워야 할 늬들이 나라

인도네시아 공화국은 성립하였다 그런데 연립임시정부란 또다시 박해다

지배권을 회복하려는 모략을 부숴라

이제 식민지의 고아가 되면 못 쓴다

전 인민은 일치 단결하여 스콜처럼 부서져라

국가 방위와 인민전선을 위해 피를 뿌려라

                                - 「인도네시아 인민에게 주는 시」 부분



  인도네시아의 시사적이고 구체적 정보를 가지고 쓴 모두 11개연 66행으로 구성된 장시이다. 화자는 제국주의로부터 해방이 됐지만 다시 연립임시정부에 개입을 통해 지배권을 회복하려는 반제국주의 투쟁을 통해 진정한 독립으로 새로운 나라를 맞이하라는 강도 높은 선동을 하고 있다. 해방정국에 미국과 소련이 개입해있는 한국의 정황을 인도네시아의 상황을 통해 환기해내고 있다. 창작자는 내심으로 진정한 한반도의 해방은 인도네시아의 해방처럼 진정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과, 진정한 해방을 위해서는 반제국 인민무력투쟁도 가능하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이렇게 박인환은 국제적인 시사 감각을 시에 반영하여 국내의 당면 사항을 시로 형상화 내려고 애쓴 현실주의자의 면모를 가지고 있다. 위에 인용한 시 외에도 반제국주의 식민지 상황이나 투쟁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시는 「인천항」 「정신의 행방을 찾아」 「식민항의 밤」등이 있다.



3. 전쟁 생체험과 전후 현실의 형상화


  박인환은 해방 직후 국내의 좌우분열과 혼란을 경험한 뒤 제국주의의 대리전인 1950년 6월25일 시작된 한국전쟁을 직접 경험한 생체험 현실을 시로 형상화한 대표적 전장시인이기도 하다. 동족상잔의 처참성과 비극을 경험하면서 인간 이성의 한계를 목격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그의 시에는 전장의 현실과 신과 죽음과 불안이 나타난다. 박인환은 북한군이 점령한 서울에서 1950년 9월 28일, 수복이 되기까지 서울에서 숨어 지내는 도중 딸을 낳게 된다. 그리고 상황이 역전되자 1950년 12월 8일 가족들을 인솔하고 야간에 군용열차로 피난길에 오르기도 한다. 이때의 힘들고 참담한 경험을 시로 형상화한다.


서울에 피의 비와

눈사람이 섞여 추위가 닥쳐오던 날

너는 입은 옷도 없이 벌거숭이로

화차 위 볕을 헤아리면서 남으로 왔다.


(중략)


나의 어린 딸이여

너의 고향과 너의 나라가 어데 있느냐

그때까지 너에게 알려 줄 사람이

살아 있을 것인가.

                             _ 「어린 딸에게」 부분


  모두 8연 28행의 이 시는 전쟁의 참화가 가족의 고난과 겹쳐서 비극성을 더한다. 화자는 어린 딸을 매개로 전쟁이 언제 끝날지 모르고, 고향과 나라까지 잃어버릴지 모르는 불안한 미래를 걱정하고 있다. 1연에서는 전쟁중 화자의 딸이 “주검의 세계”에 태어났다고 한다. 주검의 세계는 전쟁 상황의 세계이다. 이렇게 태어나서 잘 울지도 못하고 힘없이 자란다고 한다. 2연은 전장에서 죽음을 피하여 가족이 여러 번 이사를 했음을, 3연에서는 또 다른 전투가 닥쳐오면서 피난을 하여 남으로 왔다고 한다. 4연은 전쟁 상황을 모르는 어린 아이의 천진함을, 5연은 어린 아이의 맑은 표정과 전투 기계장비의 대비적 효과를 노리고 있다. 6, 7, 8연이 이 시의 핵심이다. 전쟁이 언제 끝날지 모르며, 어린 딸이 아이가 계속 행복할 수 없을 것이라는 불안감, 전쟁이 끝나고 서울에 돌아가도 폐허로 인하여 어디서 태어났는지도 모른다는 비극성, 전쟁으로 고향도 나라도 없어지고, 고향을 알려줄 딸 아이의 엄마나 화자 자신이 죽을 수도 있다는 전쟁의 실상을 비극적으로 나타내주고 있다.

  박인환은 경향신문의 기자로 있으면서 1951년 5월부터 종군작가단의 일원으로 기자로서 전쟁의 현장을 체험한다. 그러한 전장의 생체험을 「어떠한 날까지-이중위의 만가를 대신해서」 「한 줄기 눈물도 없이」 「서부전선에서-윤을수 신부에게」 「신호탄」 등의 시로 형상화한다.


-형님 저는 담배를

피우게 되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던 날

바다가 반사된 하늘에서

평면의 심장을 뒤흔드는

가늘한 기계의 비명의 들려왔다

20세 해병대 중위는

담배를 피우듯이

태연한 작별을 했다.

                             - 「어떠한 날까지-이중위의 만가를 대신해서」 부분


  전장에서 직접 체험한 ‘이중위’의 죽음을 시로 형상화하고 있다. 작품 내 주인공인 이중위는 20세의 해병대 중위이다. 화자에게 담배를 피우게 되었다고 한 날 죽는다. 중위의 죽음을 “평면의 심장을 뒤흔드는 / 가늘한 기계의 비명이 들려왔다”거나 “담배를 피우듯이 / 태연한 작별을 했다”거나 “복잡으로부터 / 단순을 지향하던 날”이라고 암시하는 높은 형상성을 구현한다. 화자는 이러한 죽음 앞에서 “운명의 부질함”을 느끼고 “이단의 술을 마”신다. 화자 자신은 물론 전쟁과 자유의 한계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화자는 어린 장교의 죽음을 통하여 “적은 바로 / 나와 나의 일상과 그림자”이며, 전장에서 외로움과 단절감을 느끼고 있는 자신을 인식하고 있다. 「한줄기 눈물도 없이」는 야전병원에서 죽어가는 병사를 소재로 하고 있다.


음산한 잡초가 무성한 들판에

용사가 누워 있었다

구름속에 장미가 피고

비둘기는 야전병원 지부 위에서 울었다.

                             - 「한줄기 눈물도 없이」 부분


  이 시는 시의 주인공이 “음산한 잡초가 무성한 들판”에 누워있는 것에서 시작한다. 들판에 누워있는 부상병과 야전병원 지붕 위에서 비둘기가 대비를 이루어 전쟁의 비극과 죽어가는 인간의 쓸쓸함을 보여주고 있다. 또 평화를 상징하는 비둘기의 울음을 통해 전쟁의 비극성을 확장시키고 있다. 들판에서 흰 붕대에 감겨 죽음을 기다리는 부상병은 대열을 지어 전선으로 나가는 환청을 듣는다. 그 병사가 전장에서 마지막으로 부른 이름은 ‘어머니!’였다. 결국에는 조국이나 자유가 아니라, 어머니를 부르고 화려한 옛날의 그리운 이야기를 떠올리면서 죽어가는 실존적 인간의 형상을 잘 그려내고 있다. 그가 아무리 몸을 바쳐 자유를 위해 싸웠지만, 들판에 버려져 죽어가는 그를 찾아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싸움이 다른 곳으로 이동한

이 작은 도시에

연기가 오른다

종소리가 들린다.

희망의 내일이 오는가.

비참한 내일이 오는가.

아무도 확언하는 사람은 없었다.

                             - 「서부전선에서-윤을수 신부에게」 부분


  위 시는 전쟁이 휩쓸고 간 서부전선의 작은 도시의 일화를 시로 형상화하고 있다. 시의 내용은 작은 도시에 한판 총격이 치러지고 다른 곳으로 이동하면서 시작된다. 도시의 성당 종소리가 들리지만 화자는 미래를 장담할 수 없다고 한다. “희망의 내일”이 올지 “비참의 내일”이 올지. 도시에 잠시 총소리가 들리지 않자, 흩어진 가족들이 모여들고 성직자들도 성당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신부는 기도를 한다. “신이여 우리의 미래를 약속하시오 / 회한과 불안에 얽매인 우리에게 행복을 주시오”라고. 화자는 이러한 기도문이 주민이 원하는 것이라고 한다. 미래를 알 수 없는 이런 전장의 도시에 웃음이 들리고 평화의 상징인 비둘기 들이 화창한 봄 햇볕을 쬐고 있다고 종전의 희망을 이야기 한다.

  「신호탄」은 “수색대장 K중위는 신호탄을 올리며 적병 30명과 함께 죽었다. 1951년 1월”이라는 주를 달고 쓴 시다. “옛날 식민지의 아들”이었던 시적 주인공이 “참다운 해방”을 위하여 ‘신호’하다 죽었다고 한다. 죽은 주인공과 화자 자신이 “자유의 그늘에서” 살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새로운 결의를 위하여」는 “적의 침략을 쳐부수기 위하여” 가정을 버리고 산악에서 싸웠으나 “죽은 자와 날개 없는 승리”만 있다고 한다. 이러한 싸움은 “자유라는 것만이 남아있는 거리와 / 용사의 마을에서는 / 신부는 늙고 아비 없는 어린것들은 /  풀과 같이 / 바람 속에서 자란다.”고 한다. 화자는 “의의를 잃은 싸움의 보람”과 “소기의 것은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며 무의미한 전쟁과 전쟁의 무용성을 강조한다.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야기할 때」에서 전쟁은 “나를 괴롭히는 물상”일 뿐이며 화자가 바라던 모든 것을 불태워버리는 상실감을 주는 것이며 공포이고 애욕을 사라지게 하는 것이며, 불안과 황폐와 종말의 노정을 걷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화자는 전쟁이나 사나운 애정을 잊고 “인간의 단상에 서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야기자고 하자고 한다.

  박인환은 전쟁 후 물리적 심리적 상흔을 시로 형상화하고 있다. 「고향에 가서」는 전쟁이 끝난 후 고향에 가서 쓴 고향 상실의 시이다. 화자가 가본 고향은 “학교도 군청도 내 집도 / 무수한 포탄의 작열과 함께 / 세상엔 없다”고 한다. 옛날에 남아있던 것들이 없어진 고향에서는 “비내리는 사경(斜傾)의 십자가와 / 아메리카 공병이 / 나에게 손짓을”하는 새로운 식민일 뿐이다. 「잠을 이루지 못하는 밤」에서 화자는 전쟁 기간중 “하루하루가 나에게 있어서는 / 비참한 축제였다.”고 한다. 화자는 이 전쟁에서 “재산과 친우”를 잃었고, 서적도 잿더미가 되고, 지난날의 영광도 날아가버렸다고 한다. 현재 가족을 위해서 비겁하게 살며, 자신의 말로를 바라보며 혼자 울고, 자신만이 “지각”이라는 인식을 통해 인간 실존에 접근하고 있다. 신에 대한 질문이 반복으로 시작되는 「검은 신이여」는 “전쟁이 뺏아간 나의 친우는 어데서 만날 수 있”느냐고 묻는다. 그리고 “하루의 1년 전쟁의 처참한 추억은 / 검은 신이여 / 그것은 당신의 주제일 것”이라고 한다. 시인이 생체험한 전쟁의 상흔은 뇌리에 깊게 박혀 전후의 불안과 황폐와 죽음과 신으로 빈번하게 나타난다. 전쟁은 생명, 고향, 친구, 서적 등 모든 것을 떠나가게 했으며, 이러한 현실인식은 그의 명작 「목마와 숙녀」나 「세월이 가면」으로 남게 된다.



4. 나오며 


   지금까지 연구자나 독자들은 박인환을 모더니스트, 센티멘털리스트라는 풍문에 가두고 있다. 그런 선입견 때문에 박인환이 몰사회적이고 비현실적 인물이며, 따라서 그의 시들이 몰사회적 상상력과 비현실적 어구들을 나열한 관념 투성이의 시를 쓴 시인으로 비하하여 보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가 올바른 현실인식을 통한 새로운 시를 위해 노력하였고, 당대의 정신을 시로 형상화하기 위하여 노력한 사실주의 시인으로 볼 것을 제안한다.

  박인환은 조국의 비참한 식민지의 현실에서 탄생하고 성장하여 해방기의 정치적 혼란기를 거쳐 전쟁의 참상을 체험하고 전후의 폐허를 경험한 격동의 역사현장을 살다 간 시인이다. 그는 해방 직후 ‘신시론’,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 ‘후반기’ 동인을 주도하여 1950년 전후 문단을 뜨겁게 달구어 놓았던 주인공이었다. 그는 나름대로의 ‘시민정신’의 렌즈로 혼란기 해방정국 현실을 보려고 하였고, 전장의 생체험이나 전후의 상황을 구체적 실존의 문제로 보려는 노력을 하였다.

  박인환은 국제적인 시사 감각으로 해방직후 국내 현실을 올바르게 인식하려고 노력하였으며 이를 사실적인 시로 형상화 하였다. 그의 당대성을 갖는 현실인식의 시들은 대개 지구적, 아시아적 상상력 통해 국내 현실을 유추하는 방법이다. 자연히 시의 내용은 반제국, 반식민, 반자본주의 투쟁이나 성격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비판적 사실주의 시들은 거의 등단 초기에 쓰여졌다. 또 이러한 시들이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이 합창』(1949.4)7)에 대부분 실렸다는 것을 보면, 박인환이 지향하려는 새로운 나라 “새로운 도시”에서 불러야 했던 “시민들의 합창”이 뭐였던가를 짐작할 수 있다.

  또 박인환은 직접 전쟁의 참화를 겪었으며, 이의 생체험을 통해 전장의 현실과 전후의 현실을 구체적으로 시를 통해 형상화하려고 하였다. 그는 전장의 생체험을 통해 전쟁에 희생되는 인간과 파괴되는 문명을 보면서 인간의 실존적 삶을 자각하거나 무의미한 전쟁을 부각시키고, 전쟁의 무용성과 불안, 그리고 절망의 주제화를 통해 전쟁문학을 한 차원 고양시킨 시킨 사실주의 시인이었다. 이러한 그를 더 이상 모더니스트나 감상주의자라는 관념에 가두어 놓을 필요가 없을 것이다.*

 

 

세월이 가면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옛날은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취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모더니즘의 깃발을 높이 들고 전후 폐허의 공간을
술과 낭만으로 누비던 박인환(1926∼1956)의 「세월이 가면」은
전쟁으로 가족을 잃고,연인을 잃고,혹은 살아 있는 사람과 이별했던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적신 화제작이었다.
 
을지로 입구 외환은행 본점 건물을 왼쪽으로 끼고
명동성당쪽으로 비스듬히 뻗어 간 명동길을 걷다보면
세월의 이끼가 낡고 앙상하게 묻어나는 3층 건물이 나타난다.
이 건물의 2층에는 놀랍게도 딜레탕트 박인환의 흔적을 기억이라도 하듯
「세월이 가면」이라는 간판을 내건 카페가 들어서 있다.
 
바로 이곳이 전후 명동에서 문인들의 사랑방 노릇을 하던 「명동싸롱」이었다.
박인환은 이곳에서 문우들과 어울리다가 계단을 내려와 죽음이 휩쓸고 간 세월의
쓸쓸함을술로 달래기 위해
맞은편 대폿집(은성: 당시 새로 생긴 술집이었다.)으로 향했다.
 
동석했던 가수이자 배우인 나애심에게 노래를 청하자 끝내 빼는 바람에
역시 같은 자리에 있었던 박인환의 친구 이진섭이 제안을 했다.
인환이 니가 시를 쓰면 내가 곡을 붙이겠다고.
그리고 시가 나오자 이진섭은 즉석에서 샹송풍의 곡을 붙여 흥얼겨렸다.
이렇게 「세월이 가면」은 명동의 허름한 대폿집에서 누구나의 가슴 속에있지만
미처 명확한 단어로 규명하지 못한 "그 눈동자와 입술" 을 발굴해냈다
 
이 시에 대하여 강계순은 평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아! 박인환, 문학예술사, 1983. pp. 168-171)
1956년 이른 봄 저녁
경상도집에 모여 앉은 박인환, 이진섭, 송지영, 영화배우 나애심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술이 몇 차례 돌아가자 그들은 나애심에게 노래를 부르라고 졸랐지만
그녀는 좀체 부르지 않았다.
그 때 갑자기 박인환이 즉석에서 시를 쓰기 시작햇다.
그 시를 넘겨다 보고 있던 이진섭도 그 즉석에서 작곡을 하고 나애심은 흥얼 흥얼
 콧노래로 그 곡을 부르기 시작했다.
 
이렇게, 깨어진 유리창과 목로주점과도 같은 초라한 술집에서 즉흥적으로 탄생한 것이
오늘까지 너무나도 유명하게 불려지고 있는 「세월이 가면」이다.
한 두 시간 후 나애심과 송지영은 돌아가고 임만섭, 이봉구 등이 합석을 했다.
테너 임만섭이 그 우렁찬 성량과 미성으로 이 노래를 정식으로 다듬어서 불러, 길 가는 행인들이 모두
이 술집 문 앞으로 모여드는 기상천외의 리사이틀이 열렸다.
마른 명태를 앞에다 놓고 대포잔을 기울이면서 아름다운 시를 쓰고 작곡을 하고 노래를 부
르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을 지켜보며 박수를 보내는 많은 행인들―.
그것은 마치 낭만적인 영화의 한 장면 같기도 했다.
 
박인환의 「세월이 가면」은 순식간에 명동에 퍼졌다.
그들은 이 노래를 명동 엘리지라고 불렀고 마치 명동의 골목마다 스며 있는
외로움과 회상을 상징하는 듯 이곳 저곳에서 이 노래는 불리어졌다.
이 「세월이 가면」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애절한 이야기가 담겨져 있다.
이 시를 쓰기 전날
박인환은 십년이 넘도록 방치해 두었던 그의 첫사랑의 애인이 묻혀 있는 망우리 묘지에 다녀왔다...
그는 인생을 정리하고 있었던 것 같다.
사랑도, 시도, 생활도..
차근 차근 정리하면서 그의 가슴에 남아 있는
먼 애인의 눈동자와 입술이 나뭇잎에 덮여서 흙이 된 그의 사랑을 마지막으로 돌아보았다...
순결한 꿈으로 부풀었던 그의 청년기에 아름다운 무지개처럼 떠서 영원히 가슴에 남아있는 것,
 어떤 고통으로도 퇴색되지 않고 있던
젊은 날의 추억은 그가 막 세상을 하직하려고 했을 때
 다시 한번 그 아름다운 빛깔로 그의 가슴을 채웠으리라.
 
그는 마지막으로, 영원히 마지막이 될 길을 가면서 이미 오래 전에 그의 곁에서 떠나간
연인의 무덤에 작별을 고하고 은밀히 얘기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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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08.07.17 16:29

    첫댓글 모더니스트나 감상주의자라는 관념에 가두어 두면 안될 사실주의 시인 박인환의 불꽃같은 생과 문학을 이렇게 잘 정리해두셨군요...공시인님의 노고에 감사 드리며 글 옮겨주신 화타님도 이렇게 무량으로 모셔와 친히 보여주신 작은나무님께도 감사 드려요~~ 세월이 가면이란 명시와 노래가 술자리에서 즉흥적으로 탄생했다는 이야긴 익히 알고 있었는데.. 박시인께서 그 전날 망우리 묘지에 가 첫사랑 애인을 보낸 슬픔에 젖어 있었던건 몰랐네요..일제 강점기를 혹독히 거치자마자 민족간 전쟁의 참화를 견뎌낸 우리민족의 애환이 참 아픈 역사와 서려있네요....그런데 작금의 역사 또한 아직도 미국과 일본에 휘둘려 있으니...

  • 작성자 08.07.17 22:27

    그러게 말입니다. 이 나라의 운명이 장차 어찌되려는지...답답한 현실입니다.

  • 08.07.18 00:50

    세월이 가면이었군요.. 어릴 적엔 타이거마스크를 좋아했었드랬는데..

  • 08.07.18 23:34

    나으유먼데암도안웃고마..ㅉ

  • 작성자 08.07.19 09:44

    ㅎㅎ 하늘수 님, 몰라서 못웃어유우 ㅎㅎ 타이거마스크가 몬가요?

  • 08.07.19 10:24

    호랭이가면이요.

  • 작성자 08.07.19 15:20

    ㅎㅎ하늘수 님, 호랭이가면? 하고 한참을 갸우뚱하다가 순간 아하! 했습니다. 정말 썰렁 개그인 건 아시쥬?

  • 08.07.20 01:50

    저도 추워요^

  • 08.07.18 22:41

    박인환의 <세월이 가면>이란 시에 곡을 붙여 박인희의 목소리로 학창시절에 참 많이도 들었습니다. 그래서 박인환시인을 모더니스트나 비현실적 감상주의자로 보는 경향이 강한 듯합니다. 그러나 식민지배 하에 태어나 해방과 전쟁의 혼란과 아픔을 겪으면서 정확한 현실 인식과 그 인식을 바탕으로 한 시를 통한 형상화에 노력했다는 명백한 증거들이 작품으로 남겨진 이상 더이상 모더니스트나 감상주의자로만 단정지을 일만은 아니라는 주장에에 공감하고 싶습니다.

  • 작성자 08.07.19 09:48

    박인환 님을 모더니스트나 비현실적 감상주의자로 인식했던 것은 어쩌면 암울한 시대를 살아가면서 현실에 눈뜨기 보다는 감상적인 것을 추구하도록 정치, 사회 등 전반에 걸친 구조적인 문제가 기인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정확하게 보지 못한 독자의 몫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구요. 대개는 깊이있게 알기 보다는 대중적으로 많이 알려진 시를 만나기가 쉽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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