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땐 왜 그랬을까?
집도 싫고 엄마도 싫고 바다도 지겹고 유자나무도 지겹고, 밥상 위에 올라온 마늘 장아찌만 봐도 토할 것 같았다. 스무살, 친구들은 다들 도시로 도시로 대학을 가고 취직을 해 떠나고, 남해 촌구석을 지키고 있는 건 정신지체아 친구 경숙이만 빼면 달랑 그녀 하나였다. 배를 타지 않아도 멀미가 났고 바다냄새만 맡아도 신물이 올라오는 그런 시간들이었다. 그녀의 열망은 오직 하나, 지루한 섬을 떠나 도시로 가는 것, 가난한 집을 떠나 돈을 버는 것, 숨막히는 불쌍한 엄마를 떠나 멀리 조금이라도 더 멀리 달아나는 것.
그때 남편을 만났다.
서울에서 의대를 다니던 남편은 마을 보건소의 군의관으로 왔다. 남편은 정말 눈이 부셨다. 새하얀 의사가운에 하얀 얼굴, 흙이라곤 한번도 만져본 적이 없는 것 같은 정갈한 손. 그녀가 꿈꾸던 이상형 그대로였다. 열심히 쫓아다녔다. 반찬도 해 나르고 우렁각시처럼 빨래랑 청소도 몰래 해놓고. 처음엔 부담스러워하던 남편도 어느새 그녀의 방문을 기다렸다. 남편과는 금새 친해졌다. 그럴 수밖에. 섬에 젊은 사람이라곤, 특히 젊은 여자라곤 정신이 모자란 경숙이를 제외하곤 그녀밖에 없었으니까. 서둘러 도시로 떠나준 친구들이 얼마나 고맙던지. 달뜬 나날이 바람처럼 흘러갔다. 그런 어느날 임신사실을 알았다. 그녀보다 남편이 더 당황했다. 아무말이라도 해주길 원했지만 남편은 그날이후로 입에 자물쇠를 채워버렸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시간만 흘려보내고 있던 어느날 엄마가 알았다. 종일 맞았다. 죽도록 맞았다. 이러다가 뱃속의 아이까지 죽는 게 아닐까, 배만은 죽자고 감싸안은 채 엎드려 맞다가, 차라리... 하는 생각으로 몸을 홱 뒤집어 배를 엄마에게 갖다댔다. 정신없이 때리던 엄마가 되려 놀라 매질을 멈췄다. 그때부터 사흘밤낮으로 엄마는 대성통곡을 했다. 엄마의 곡소리가 동네방네 울려퍼져 이웃마을까지 쫘악 소문이 났다. 나흘째 되던 날, 마을에 전염병이 돈 것도 아닌데 마을 사람들이 줄을 지어 보건소를 찾았다. 선상님, 우리 영심이 우짤깁니꺼? 일을 ?으문 책임있게 수습을 하시야지요./ 하이고오 젊은 선상, 의사 할라꼬 맴묵은 사람이 사람목숨 우습게 생각하문 클난데이./ 보이소 선상님, 혹시라도 야밤에 출행랑 치문 마을주민들 도장 받아갖꼬 군에다 진정서 넣어뿔 끼요. 우얄란교? 이 자리서 내캉 약조를 하입시다! 퍼뜩요?
그때 마을사람들이 아니었으면 남편과 결혼할 수 있었을까? 남편은 어떻게 했을까? 그녀를 버렸을까? 버렸..겠지?
마을사람들 덕분에 그녀, 하루아침에 개천에서 용됐다. 그렇게 열망하던 도시 서울로 촌닭이 백조가 되어 화려하게 날아갔다. 20살에 결혼하고 21살에 엄마가 됐다. 시댁은 아주 부자였다. 다들 의사고 박사고, 대학 못 나온 건 시어머니가 애지중지 하는 강아지 ‘브래드(피트)’와 그녀뿐이었다. 시댁의 반대는 실로 무지막지 엄청났다. 하다못한 남편은 배부른 그녀를 시댁에 홀로 덜렁 놔두고 독일로 유학을 떠나버렸다. 그때부터 지옥의 나날이 시작됐다. 그때 그녀 나이 스물, 1년 억울하게 나이 먹은 걸 고려하면 열아홉, 그저 죽어주십쇼, 두 눈 질끈 감고 소처럼 죽어라 일만 했다. 그녀를 징그러운 벌레 보듯 경멸하는 시댁식구들, 그 치욕의 시간을 견디기 위해서 웬종일 집안일을 찾아다니며 일하고 또 일하고. 그녀는 백조가 아니라 몸종이었다. 노예였다. 배는 점점 불러오는데 유학간 남편한테선 소식 한 점 없고, 입덧은 나날이 심해지는데 시댁식구들은 누구 하나 아는 체 해주지 않았다. 집안에 의사가 셋인 병원집에서 그녀는 영양실조와 빈혈로 쓰러져 병원에 실려갔으며, 소문날까 걱정된 시어머니는 그녀를 시아버지의 병원에서조차 내쫓아 동네 산부인과에 입원 시켰다. 그리고 그녀가 아이를 낳아 품에 안고 다시 시댁으로 찾아갈 때까지 시댁에선 아무도 그녀를 찾지 않았다. 참으로 지독한 사람들이었다. 스물한 살 촌 가스내인 그녀가 버텨내기엔 너무나 잔인한 시간이었다.
시댁의 냉대와 멸시는 아이가 자라면서 차츰 수그러들었다. 제대로 못먹였는데도 아이는 건강하게 태어났고, 게다가 사내아이였고, 천만다행스럽게도 촌스런 그녀가 아니라 세련되고 귀티가 좔좔 흐르는 남편을 쏘옥 빼닮았다. 그렇게 아이가 받아들여지면서 덤으로 그녀도 받아들여졌다. 남편이 돌아왔고, 그녀는 남편이 독일 유학중에 만난 부유한 재독 교포의 딸로 둔갑돼 민씨 가문에 소개되었고, 뒤늦은 눈물의 결혼식을 마침내 올렸다.
그녀는 그때 생각만 하면 지금도 뼛속까지 시리고 못으로 후벼파는 것처럼 가슴이 아프다. 그때 산후조리를 제대로 못한 탓에 서른도 안된 나이에 날씨만 조금 찌푸려도 삭신이 쑤시고 비라도 내릴라치면 요통 견비통에 관절염까지... 그녀는 잊었는데 그녀의 몸이 여태도 그 시절의 상처를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는 탓에 종종 그녀는 시댁식구들과 남편에게 화가 난다. 그녀의 몸은 이렇게 뼈마디가 쑤시고 아픈데, 늙어갈수록 더 아플 텐데, 너무도 태평스런 얼굴로 이런저런 요구를 해대는 천연덕스런 그들... 해서 그녀는 멀쩡하다가도, 착한 현모양처에 지극한 효부이다가도 비오는 날만 되면 돌변, 식구들이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한다. 군시렁거리고, 톡톡 말대답하고, 개기고, 반항하고, 난폭(?)한 행동을 일삼으며 시어머니와 남편을 굶기고, 시누이와 맞짱을 뜬다. 그녀의 식구들, 비오는 날이 싫다. 장마가 정말 무섭다. |
첫댓글 동영상보기는 유료라서 여기서는 볼수가 없어요....내용만 읽어주세요~
비가 오는 날이 무섭다... 너무 재미있어요..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