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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화산(1027m)
강원 영월 충북 단양
한강기맥 상의 삼계봉(약 1000m)에서 남으로 가지를 치는 영월지맥이
태기산(1259m)에
이르러 백덕지맥을 흘리고,
계속 남서쪽으로 이어지다가 치악산(1282m) 남대봉에 이른다.
남대봉에서 백운산 줄기를 남서쪽으로 분가시킨 영월지맥은
남동으로 방향을 틀어
감악산~석기암산~용두산~가창산~삼태산~국지산을 거쳐
마지막으로 태화산을 빚은 후 여맥을 남한강에 가라앉힌다.
태화산은 영월군 영월읍과 충북 단양군 영춘면 경계를 이룬다.
서쪽을 제외한 삼면이 남한강으로 에워싸여
주능선에서 조망되는 강 풍광이 남다르게 아름다운 곳이다.
동쪽 산자락 끝머리에는 고씨동굴이 자리하고 있다.
등산로는 영월 방면에서는
흥월이 종점인 달곳~광산터 남릉, 달지마을~큰골~북동릉을 경유해 정상에 오르는 코스,
영춘면 각동리~괴목골~북동릉, 영춘~화장암~남릉을 경유하는 코스가 많이 이용된다.
흥월리 종점 달곳에서 약 1.5km 더 오른
흥교 마을에서 남릉을 경유해 정상~북동릉 885m봉 남동릉을 거쳐
고씨동굴로 하산하는 코스.
최근 영월악우회에서 주요 기점마다 안내표를 설치해 놓았다.
버스종점 달곳에서 흥교 마을로 가는 길은 포장길이다.
포장길을 따라 30분 오르면 흥교 마을(행정지명 흥월2리) 흥교분교에 닿는다.
흥교분교에 이르기만 해도 벌써 높은 산정에 오른 기분이 난다.
사지원리 협곡이 내려다보이고,
협곡 건너로는 영월지맥 상의 국지산 삼태산 등이 조망되기 때문이다.
흥교분교 앞에서 태화산 남릉을 바라보며 약 40m 가면 삼거리가 나온다.
삼거리에서 왼쪽(북쪽)으로 약 100m 오르면 초록색 물탱크가 있다.
물탱크에서 오른쪽으로 약 50m 더 오르면
왼쪽 숲속으로 들어서는 길과 만나는 삼거리에 닿는다.
왼쪽 숲속으로 약 100m 들어서서 건천을 건너 곧이어 세 갈래 길에 닿으면
가장 오른쪽 길로 약 5m 들어서서 또 두갈래 길과 만난다.
왼쪽 무덤 옆으로 난 길로 들어가면 북동쪽 사면길로 이어진다.
사면길로 4~5분 올라 폐쇄된 뱀그물을 지나고 5~6분 더 올라
동에서 서로 이어지는 지능선으로 올라선다.
지능선에서 사면길은 계속 북동으로 이어진다.
오른쪽 잡목숲 능선으로 발길을 옮겨 7~8분 오르면
흐릿한 능선길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능선길로 15분 오르면 돌밭길이 약 5분 정도 이어진 후
20분 가량 더 오르면 일직선으로 자란 소나무 군락지로 들어선다.
곧이어 오래된 움막터를 지나 7~8분 거리인 두번째 소나무 군락지로 들어서서
3~4분 더 오르면 길은 왼쪽으로 휘어져 1001m봉 서쪽 사면길로 이어진다.
사면길을 따라 10분 가면 능선마루로 올라서게 되는데,
이제부터 서쪽 흰깃재 방면으로 이어지는 영월지맥이다.
오른쪽 길을 따라 3~4분 거리에 이르면
단양군 영춘면과 경계를 이루는 남릉 삼거리 푯말에 닿는다.
삼거리 남쪽으로 약 150m 거리, 1001m봉을 넘는 남릉은 영춘면 상리 화장암 방면 길이다. 삼거리에서 북쪽 길로 들어서서 10분 오르면
영월군에서 세운 푯말(↑태화산성 2.5km, ↑큰골 2.8km, ↓달곳 3.0km)이 있는
작은 공터에 닿는다. 공터를 뒤로하고 2~3분 더 오르면 정상이다.
삼각점(영월 23)을 가운데 두고 정상비석이 2개 있다.
남쪽에는 단양군, 북쪽에는 영월군에서 세워놓았다.
북으로는 영월읍과 별마로천문대가 있는 봉화산이 조망되고, 더 멀리로는 치악산도 보인다. 남으로는 소백 연봉들이 천문대와 함께 하늘금을 이룬다.
정상에서 고씨동굴로 가는 길은 북동릉을 탄다.
북동릉으로 10분 가면 왼쪽 큰골 갈림길 삼거리가 나온다.
3분 거리인 1025m봉을 넘어 5~6분 가면 왼쪽 절터(대흥사터)~절골 갈림길에 닿는다.
절터 갈림길을 지나 13~14분 거리인 헬기장을 지나 10분 오르면
태화산성~절골 방면 갈림길에 닿는다.
태화산성 갈림길을 뒤로하고 7~8분 가면 오른쪽 괴목 갈림길 삼거리다.
이 삼거리에서 계속 왼쪽 북동릉길로 15분 가면 앞을 가로막는 전망바위 아래에 닿는다.
오른쪽(남동쪽) 급경사 방면에 작은 푯말(고씨굴 방향→)이 있다.
화살표 방면 10m 거리에 삼각형형 바위가 있다.
바위 안부를 넘어가면 북동릉을 벗어나는 급경사 사면길이 지그재그로 이어진다.
10분 가량 내려서면 화전터에 닿는다.
화전터를 뒤로하면 남동쪽 능선길로 이어진다.
이 능선길로 4~5분 가면 나무들을 잘라낸 전망장소에 닿는다.
전망장소에서는 지나온 북동릉만 올려다보인다.
전망장소를 뒤로하고 1분 거리 묵묘를 지나 40분 내려서면
노송 어우러진 급경사 바위로 들어선다.
왼쪽 남한강 건너로 진별리에서 고씨동굴로 건너오는 다리가 보인다.
바위지대를 7~8분 내려서면 능선길은 끝나고 왼쪽 급경사로 이어진다.
사면길은 바위를 타고 내리는데 절벽에 가까워 초심자는 위험하다.
바위지대를 7~8분 내려서면 바위가 없는 급경사 사면길로 이어진다.
이 길도 대단한 급경사다.
계속 나무밑둥을 잡으며 15분 가량 내려서면 20m 밧줄이 걸린 급경사바위에 닿는다.
밧줄을 잡고 내려서면 식수대 옆이다. 식수대에서 약 30m 거리가 고씨동굴이다.
고씨동굴로 내려서는 급경사 구간은 영월군에서 철계단을 설치할 계획이라고 한다.
달곳 버스종점을 출발하여 흥교분교~지능선~남릉 1001m봉 삼거리를 경유해
정상에 오른 다음,
북동릉~큰골 갈림길~절골 갈림길~태화산성 갈림길~괴목 갈림길~885m봉
~885m봉 남동릉을 경유해 고씨동굴로 내려서는
산행거리는 약 12km로, 6시간 안팎이 소요된다.
* 유래
흥교마을-고려 때 대사찰 흥교사 있던 곳
해발 500m 높이인 흥교 마을은 고려시대 때 대사찰인 흥교사가 있었던 곳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태화산 서쪽 고려시대의 대사찰이 있었다.
이 절에는 고려 인종의 아들인 충희대사의 비석이 있는데,
보문각학사이며 우사간이었던 최선이 임금의 뜻을 받들어 비문을 썼다.
글씨는 벗겨져서 한 자도 알 수 없으나
승통을 지낸 충희의 제자들 이름들이 기록되어 있었다' 라는 기록이 전해진다.
흥교분교(폐교) 운동장에서는 84년 높이 6.5cm인 석가여래입상이 발굴되어
문화재관리국에 보관되어 있다.
지금도 분교 운동장과 마을 집집마다에서는 불교 상징인 연꽃무늬가 새겨진
수막새, 귀면와 등 각종 기와 파편들을 비롯해 청자조각과 석탑 파편들이 발견된다.
흥교사를 신라 때에는 세달사라 불렀는데,
신라 47대 현안왕 아들인 궁예가 이곳에서 중이 되었다는 기록도
삼국사기 열전에 전한다.
예전 교통의 중심지로 50여 가구가 살았을 시절에는 흥교 마을이 버스종점이었는데,
90년 인구가 줄면서 달곳 마을로 종점이 옮겨졌다.
98년 흥월분교가 폐교된 이후로는 현재 10여 가구만 살고 있다.
주민들은 고랭지 채소농사를 짓고 있다.
고씨동굴-영월 1시간 간격(07:00~20:00) 운행. 요금 900원. 20분 소요.
택시 영월에서 흥교까지 12,000원. 고씨굴에서 영월은 7,000원.
영월 콜택시 080-372-1818, 봉래택시 033-374-2644, 영흥택시 372-7766,
대석택시 374-4556.
자가용으로 흥교 마을로 가는 길은
영월읍에서 세경대학~농공단지~울고개~흥월분교~달곳을 거쳐 흰깃재를 넘어가면 된다.
고씨동굴 입구 주차장 옆에
산장가든(372-9290), 구림식당(372-1103), 예촌(372-9784) 등이 있다.
태화산 일원 산행정보 문의
영월악우회 현윤기 전화 033-373-2505, 휴대폰 016-477-8848.
광주 태화산(644m)
경기도 광주시 남쪽 끝에 자리한 도척면은 백제 온조왕이 한강유역에 도읍을 정하려 이곳을 탐사할 때, 자로 재고 또 재고 해서 도척이란 이름이 붙었다는 곳이다.
도척면 북서쪽을 병풍처럼 에워싸고 있는 산이 대화산(644m)이다.
이 대화산이 무슨 이유인지, 언제부터인지는 모르나 태화산으로 불리고 있다.
조선 영조 때의 조선고지도와 청구도, 팔도군현지도, 광주부읍지, 광주목지에는 대해산, 해동지도에는
대화산으로 기록되었다.
정수산으로 기록된 것도 있는데 이는 이웃의 용인시 양지면 '정수리'에서 따온 것으로 보인다.
한강의 남쪽에선 양평과 여주 경계에 있는 양자산(709.5m) 다음으로 높은 산인 태화산은
경기 남부에서 아름답기로 이름난 산이다.
태화산 산행들머리는 유정저수지다. 관광낚시터로 관리되는 저수지 주변은 전원주택과 식당이
들어서서 시끌벅적하다. 버스정거장 이름이 '작은 안나의 집'. 버스정거장에 '태화산 등산로'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바우산골로 들어간다.
바우산골은 바위성골이라고도 한다. 한자로 암성곡이라고도 한다지만 이는 일본식 이름이 아니겠는가. 바우산골에 갖가지 바위들이 있다. 관바위, 수리바위, 병풍바위, 상사바위, 조춤바위 등
다섯 개의 바위가 마을을 둘러싸고 있다고 바우산골이다.
바우산골에는 절간도 있다. 조계종 소속의 비구니 사찰, 오래되지 않은 절간이다.
산골짜기에 많던 물푸레나무로 도끼자루를 만들어 팔던 음씨 성을 가진 목수가 살던
집터에 지었다는 은곡사, 은곡사 가는 길은 포장도로다.
소나무와 조림된 잣나무숲이 절마당까지 이어진다. 잘 가꾸어진 들꽃들이 활짝 피었다.
늦게 핀 우리나라 토종인 왕벚꽃도 나무 한그루를 뒤덮었다.
정상 쪽으로 소나무숲을 가로질러 나간다. 최근 도척면에서 다듬은 산길을 따라 태화산을 오른다.
밤나무와 참나무가 섞인 산길이 하늘을 가린다.
간밤에 내린 봄비로 융단을 깔아놓은 듯 폭신폭신한 산비탈에 싱그러운 바람이 날린다.
산길 따라 오르기를 10여분, 샘터에 닿는다. 커다란 고로쇠나무 밑에서 솟는 샘은 이가 시리도록 차다.
두어 모금 마시고도 한기를 느낀다. 긴 나무의자를 만들어 놓아 쉬기도 좋다.
샘터가 있는 삼거리로 오른쪽은 정상과 612.8m봉 사이의 안부로 오르는 길이며
왼쪽은 병풍바위를 거쳐 정상으로 가는 길이다.
병풍바위 오름길은 된비알로 엄청난 크기의 바위들이 늘어서 있다.
아랫부분의 바위를 돌아 중간쯤 오르면 암릉 등반을 해도 좋을 만한 바윗길이 이어진다.
전망 또한 좋다. 샘터에서 병풍바위까지 바위로 이어져 바우산골을 빛내고 있는 곳.
바우산골에 바우(바위)가 많다는 것은 모두 이쪽 비탈을 보고 하는 말일테다.
암벽등반도 하는가. 벼랑곡대기에서 삼각볼트를 박고 슬링(줄)을 둘렀다.
높이가 20m즘 되어 보이는 벼랑. 밧줄을 가져왔으면 내려가 볼텐데, 아쉽다.
병풍바위 오름길은 최근에 도척면에서 산길을 정비하면서 바윗길 옆으로 새롭게 길을 만들고
밧줄을 설치했다. 안전을 위함이겠지만 된비알에 무리하게 길을 냈다.
머지않아 엄청난 훼손이 벌어질 것으로 보인다.
병풍바위 위에 섰다. 늙은 소나무가 그림을 그린 바윗길에 철쭉도 꽃 피우고 있는곳.
태화산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을 연출한다.
올라온 바우산골은 물론 유정저수지 너머 광주와 이천의 벌판이 시원스레 펼쳐진다.
오르지 않고는 볼 수 없는 너른 세상, 하늘을 날지 않고는 내려다 볼 수 없는 속세,
인간과 동물이 어울려 사는 지구 마을의 한 모퉁이가 저기가 아닌가.
"철쭉나무가 엄청나군요. 진달래나무도 많고, 철죽꽃이 피기 시작하는 걸까요,
이미 꽃이 피고 진 것일까요."
"글쎄요? 철쭉꽃이 필 때인데, 꽃망울이 안 뵈네."
키큰 산철쭉나무가 빼곡히 산길에 이어진다. 참나무보다 철쭉이 더 많아 보인다.
이렇게 좋은 산에서 '철쭉축제'는 왜 안하는 걸까. 철쭉꽃이 안 피는 철쭉나무도 있나?
철쭉나무는 '작은 안나의 집'에서 오르는 길(삼거리)을 지나 동봉까지 이어진다.
엄청난 철쭉나무 군락지다.
동봉(600m)에서 남쪽으로 조망도 좋다. 이곳이 나라의 땅을 이동통신사의 송신소에 빼앗기고
태화산 정상 역할을 하는 곳이다. 소나무로 둘러싸인 곳, 서너 평 되는 죽은 자의 산소 자리 같은 곳이다.
엎어지면 코 닿을 곳에 헬기장이 있다. 남쪽과 북쪽으로만 트인 곳,
발 아래 추곡리의 저수지 전원마을이 가깝게 보이고 뒤로 용인시의 회색건물이 열병을 하고 있다.
돌아보기도 싫은 북쪽으로 산꼭대기에 흉측스러운 건물이 들어섰다.
못된 문명이 침범하여 정상을 차지하고, 정상석은 뽑혀 헬기장 구석에 쳐박혔다.
하얀 대리석에 세로로 '태화산 泰華山'. 철조망도 둘러쳤다.
그리고 뾰족한 쇠꼬챙이를 세워 하늘님의 '똥꼬'를 지르고 있다.
"저기가 조상의 산소(묘)라고 생각하면 저 짓거리를 할 수 있을까요?
부모의 묘 정수리에 쇠꼬챙이 세우는 짓을!"
"그러네. 왜놈들이 조선의 맥을 끊는다고 산 정수리마다
쇠꼬챙이 박아 놓은 것을 의로운 산꾼들이 찾아내서 뽑기도 하는데..."
"아니, 앞에 있는 동봉이나 동북쪽의 봉우리(612.8m)에다 세워도 될 것을
하필이면 정상에다 허가를 해주냐? 천벌을 받을... 치산 치수의 '치' 자도 모르는 것들이!"
"그러니까 대한민국의 공무원들은 모두 산꾼으로 뽑으면 좋겠다. 그러면 안 될까!"
농담 아닌, 헛소리가 아닌, 속 시끄러운 마음 풀기가 이어졌다.
간밤에 내린 빗물을 말리는 햇볕에 밀려 휘뿌연 하늘에다 대고.
철 구조물 공사 하다 남은 쓰레기도 덜 치워진 어수선한 정상을 철조망을 따라 한바퀴 돌고 하산이다.
정상 바로 아래 암자가 있다 한다. 암자로 내려가는 길이 어딘가.
산불이 나서 타버린 앙상한 나무가 듬성듬성 자리한 산비탈을 흝었다. 야생화가 한창이다.
앉은뱅이 붓꽃이 함초롬히 핀 된비알을 조심조심 내려와 안부에 섰다.
추곡리 노인정 앞으로 내려가는 길을 버리고 조립식 주택이 있는 왼쪽으로 내려갔다.
천길 바위 벼랑 밑에 자리한 암자, 백련암. 고려 때 일련선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암자로,
을축(1925)년 대홍수 때 매몰, 광복 후에 새로 세웠다는 절간이다.
옛날 암자 근처에 대화약수라는 샘물이 있어서 장군수라고도 불렀다.
지금의 백련암은 볼품없는 암자로 사람사는 주택이나 다름없다.
조립식으로 엉성하게 지은 산집과 그 옆의 샘물도 대화약수가 맞는지도 모른다.
을축년 대홍수 때 산사태가 나서 매몰된 후에 새로 다듬었다는 샘물이다.
어찌됐거나 시원한 샘물을 대화약수로 알고, 장군샘으로 알고 목을 축이고 암자를 떴다.
구불구불, 된비알로 쏟아지기를 200여m, 글이 새겨진 바위 앞에서 멈췄다.
김병수 대감이 약수 마시고 병이 나은 기념으로 썼다는
'大華水石'(대화수석)이 새겨진 바위는 하얀 차돌바위다. 길 가에 있다.
마을로 이어진 시멘트포장길이, 속세로 이어지는 길이, 무릎에 고통을 줄 때쯤,
잘 다듬어진 가족묘지를 지나면서도,
고고한 자태로 잔디밭을 지키는 잘 생긴 소나무를 보면서도, 풀리지 않는 궁금증 하나.
대화산이 왜 태화산이 되었을까. 정수산이 아닌, 대해산도 아닌, 태화산.
혹시 이것도 왜놈들의 소행?
우리는 언제쯤, 왜놈들이 왜곡시킨, 멋대로 지어 지도에 적어놓은,
우리의 땅의 이름을 바로잡을 수 있을까! 과연, 누가?
*산행길잡이
유정교-(40분)-샘터-(20분)-20분)-병풍바위-(20분)-정상-(10분)-백련암-(30분)-백련암 입구
태화산은 진달래와 철죽이 많은 산이다. 높지 않지만 바위가 있어 조망이 좋고 숲이 우거져
삼림욕을 즐기기도 좋다. 계곡물이 적은 것이 아쉽다.
들머리는 저수지가 있는 유정리나 추곡리가 된다. 어디로 오르든지 산행시간은 3시간이면 충분하다.
은곡사 입구에서 찻길을 따라 통신대까지 오른 후,
능선을 타고 612.8m봉을 오른 다음에 정상을 향하는 코스는 1시간 정도 더 걸으면 된다.
먹을 물은 고로쇠나무 샘터나 백련암에서 구할 수 있다.
*교통
서울 동서울터미널에서 곤지암까지 좌석버스 이용(동원대학행도 있다). 곤지암에서 용인행 또는
추곡리행 버스 이용, 작은안나의 집(양로원) 앞에서 내린다. 용인에서 곤지암행 버스 이용.
승용차는 중부고속도로 곤지암나들목에서 나온다. 곤지암에서 용인 방면 98번 국도를 따른다.
도척면사무소를 지나 우회전, 유정저수지 옆에 주차할 곳이 있다.
*잘 데와 먹을 데
저수지 근처에 숲속의 산장(031-764-7792)은 민박과 식당을 겸하고 있다.
농원가든(798-4151)에서는 닭백숙과 영양탕이 일품이다.
은곡사 입구에 있는 목부방은 산채정식집으로 1인분 13,000원.
*볼거리
백련암
고려 1325년 일련선사에 의하여 창건(고려 충국왕 12년). 처음 절 이름은 일련암으로
1387년(우왕 13년)에 해안이 중건하고, 일련선사의 부도와 3층석탑을 건립한 후 백련암으로 개칭.
3층석탑은 1925년 을축년 홍수 때 산사태로 매몰되었다. 도척면 추곡리 산 25번지에 있다.
백련암 부도는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53호로 지정되었다.
방형의 지대석 위에 놓여 있는 높이 1.75m, 넓이 98cm의 석종형 부도로 조선 때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가래실마을
서판서가 피난 와서 사는 동안에 가래나무를 많이 심었다 하여 가래실, 한자로는 추곡(楸谷)이며
추곡리 노인정이 있는 마을이다. 산신제단은 서판서가 피난 왔던 약 350년 전부터
마을의 수호를 위하여 산신제를 올리는 터로 말치고개 맞은편 산 중턱에서 2년마다
음력 10월 초순에 산신제를 올린다.
천주교회터 1880년 흥선대원군의 천주교박해 때, 산간지대로 신자들이 피하면서 생겼던 터.
6.25전쟁 중에 불타 빈 터만 남아 있다.
글쓴이:안재홍 필명 오원. 한국등산학교 정규반 13기(1980), 산악동인 돌뫼 창립(1982),
제5회 한국산악문학상(중편소설 부문) 수상(1994), 현재 주얼리 컨설던트로 활동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