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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전원교회는
전신이 월상교회이다.
많은 목사님들이나 성도들이 생각할 땐 월상교회는 비참한 교회이다라는 것이다.
맞다. 그렇다 월상교회는 그야말로 비참한 오지 중의 오지
그리고 매년 물난리로 목사님들의 서재가 물에 잠김으로 낭패를 보는 교회
그래서 목사님들이 오면 떠나가는 교회
그래도 목사님들이 계속해서 교역자들이 비워두지 않은 교회
내가 오기전에는 그랬다.
내가 오니 그 때 낙동강 둑이 완성되었고 물걱정은 아예하지 않는 지역이 되어버렸고
둘째로는 박진대교가 개통(2000년)이 됨으로 월상에서 함안 25분, 의령 25분, 합천 25분으로
교통의 중심으로 많이 편리해 졌다.
마을의 여건
월상은 인근은 함안땅과 의령땅과 창녕땅으로 4개의 군이 인접하여 있는 지역이며
625사변에는 한국의 최후 전선, 한국을 기사회생 시킨 박진 전쟁터이며
우리나라에 가장 유명한 박진 나루턱이 있는 곳이다.
이곳은 창녕박진이란 동네와 의령 박진이란 동네가 마주하고 있었고 함안땅과 3개의 땅이 마주한 땅이다.
마을 변화 2002년도엔 박진전쟁기념관이 월상마을에 세워지게 되었고 박진전쟁기념탑도 월상마을에 있다. 박진전쟁기념관이 개장됨으로 이지역의 지명이 점차 월상마을은 사라지게 되고 박진이라는 지명으로 바뀌게 된다. 모든 도로명도 간판도. 지명에도 지도에도 마을은 월상마을로 남아 있지만 그외는 일체 박진으로 불리워지게 되었다. 또한 박진마을도 낙동강 둑을 하면서 철거를 시켰는데 자유롭게 했다. 이주가 아닌 보상으로 그래서 15가구가 보상을 받고 그의 떠나가고 교회의 위에 2가구가 집을 지어 살게 된다. 그리고 그들은 이곳을 박진마을이라고 한다. 그래서 2002년의 가을 노회에 교회명칭 변경을 신청하여 박진전원교회로 개명하게 된 것이다. 교회의 건축 이야기 이야기는 이 때부터 시작된다. 무슨 바람이 불어서 그랬는지 몰라도 우리교회를 위해 부산서 목사님 오셔서 월하마을에 신앙공동체를 과수원을 구입하여 오시게 된다. 그리고 이들은 동네에 헌신하게 되고 버섯과 닭을 키울려고 하는데 동네의 강력한 반대를 직면하게 된다. 그 와 중에 나보고 교회에 뭐 도와 줄일이 없느냐고 하길레 교회의 바닥이 내려 앉으니 교회를 리모델링을 하고 싶다고 했더니 밤낮으로 설계를 그려 가지고 마음에 드느냐라고 물을 때 교인들은 그때 7-8명으로 그 무엇도 할 수 없는 형편이고 교회바닥은 언제 내려 앉을찌도 모르는데 목사님 알아서 해 주십시요라고 했다. 건축의 일을 조금 아는 나에게도 설계와 이창권 목사님이 해 주겠다는 일에는 아무런 하자나 결점을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한 그런 설계였다. 그렇게 해서 그들이 교회에 부담지우지 않고 완벽하게 해 주겠다고 해서 나는 얼마나 감사하게 생각했는지 모른다. 그리고 그 때 교회당도 그렇고 사택도 완전 거지 움막과 같았다. 꼭 미궁을 헤메는 것 같았고 아무런 쓸모가 없었고 또 태풍이 와서 지붕까지 훼손하고나니 지붕엔 물이 세어서 곰팡이가 피지 도저히 사람이 살만한 집이 아니었다. 그래서 일전에 부산 거제교회에서 그교회의 후원받는 교회를 초청하여 위로회를 하는데 최흥철 목사님오셔서 강의를 하면서 멘트로 사택을 지을려는 사람은 자기에게 연락을 하라고 하길레 연락을 하니 최흥철 목사님이 오셨다. 교회는 이창권 목사님(신앙공동체)이 완벽하게 얼마가 들더라도 해 준댔지 아! 그럼 사택을 지어면 되겠구나 하고 연락을 한 것이다. 그래서 오셨고 최목사님이 교회에서 돈은 얼마 있느냐 길레 교회에 저금을 해둔 돈 건축헌금 750마원과 나의 은퇴기금을 모은 것 750만원 합이 1,500만원 있다고 하니까 그것이면 충분하다고 하여 사택을 건축하기로 하고 시작했다. 사택 앞 빈공간을 이용하고 그 공간 남은되로만 하기로 하여 사택을 시작했다. 합천서 기초 큰 돌을 실고와서 기초 합천 최흥철 목사님 집 주변의 강가에서 큰돌을 차량으로 가지고 와서 기초를 하고 그 위에 콘트리트 작업을 하여 사택 앉을 자리에 레미콘을 부어 터를 닦아 두엇고 그러한 와중에 신앙공동체는 교회의 마루를 청년 두분이 와서 일일이 뜯어내고 낙동강에서 모래를 경운기로 실고 와서 교회당 바닥을 채웠다. 그리고 콘크리트 폐자제를 구입하여 그 위에 깔고 교회당 바닥에 스티로폴로 중간 중간 깔고 그 위에 레미콘은 두 트럭으로 바닥 공사는 끝냈다. 그런 그 후에 전혀 일의 진척이 없었다. 가서 만나면 해 준다하고 그 대로 방치하여 시간은 자꾸만 가고 몇개월이 지난 후 최흥철 목사는 그 팀들은 교회를 수리할 능력이 없다고 하여 나 보고 손을 떼어 달라고 가서 부탁하라는 것이였다. 한 달이 가고 두 달이 가고. 그래서 공동체에 찾아 올라가서 부탁을 드렸지만 꼭 자기들이 한다는 것이였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들에게 교회를 돌볼 자금이 없다는 것이였다. 그래서 사정사정하여 교회에 손을 떼고 포기하도록 유도하여 이 목사님이 그렇다면 교회에서 공사를 하라고 크게 인심을 쓰는 모습이였고 그런 자세였고 그런 모습이였다. 물론 청년들은 아무런 말도 없엇다 그들은 교회를 철거하고 채운다고 엄청 수고하신 분들이고 너무나도 애를 쓰신 분들이였고 수고하신 분들이다. 지금도 생각하면 고맙고 감사할 뿐이다. 이제 교회당과 사택 이 두 마리의 토끼를 잡고 나가야 할 형편이였다. 그리고 목사님은 있는 돈을 전부 가지고 가서 자제를 구입해 놓자는 것이였다. 그래서 대구 종합센터에 가서 서사장이라는 사람을 만나 자제를 전부 구입을 했고 하이샤시에 가서 자제를 몽땅 사고 그래서 있는돈 없는 돈 전부 투자하고 그때부터 목사님과 한참 일들을 해 나갔다. 목사님에게는 일 삵을 해 줄 형편이 않되었기에 하루에 차비 만원으로 하여 10일마다 드렸다. 목사님께 미안한 마음 금할 깋 없다. 현재론 사택에 일하시는 그 모습 교회당에 일하시는 모습은 정말 하나님께 헌신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들을 해내었다. 교회당 천장을 철거 하면서 엄청난 먼지를 뒤집어 쓰고 그 땡볕에 사택 이층의 C형관 설치 작업과 지붕 작업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을 그의 아들 최동수 군도 불러서 둘이서 해 내었다. 정말 존경스러울 뿐이다. 교회당 종탑작업과 스라브를 치고 사택 지붕과(아스팔트 싱글 작업) 벽체가 어느 정도 되었고 교회당의 창문 설치가 끝나고 그 외 작업을 해야 할 때 변수가 생긴 것이다. 타교단이지만 최 목사님을 필요로 해서 갔었는데 그 교회 담임 목사님이 최흥철 목사님의 제자 교회였기에 그 목사님이 최흥철 목사님에게 교회를 수리 중에 그 교회를 최목사님에게 교회 인수를 권유했고 목사님은 그 교회를 인수 함으로 저절로 우리교회에 손을 떼게 되었다. 겨우 절반은 마친 상태에서 돈도 없고 건축에 대해서 조금 알지만 실전으로는 백치인 나에게 엄청난 시련을 안겨 준 것이다. 그 때는 노회에 어려움을 호소하여 770여만원 남 시찰에서약 400여만원이 왔고 그 후 아시는 분들을 통해서 많은 후원금이 모이게 되었지만 재료 구입에 다들어가고 이제는 암담할 뿐이였다. 그래서 중단되어진지 3-4개월이 지났을 무렵 진주노회 진주 동부교회 최상수집사님이 전화가 왔다. 좌우간 데모도의 경비 정도만 주면 일을 해 주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하기로 하고 하루에 12만원을 약정하고 미장이 두사람이 와서 일을 하고 아니면 3사람이 왔을 때는 18만원으로 했다. 기술자는 12-5만원을 했는데 최집사님이 너무 감사하다. 한팍 겉을 미장 작업으로 한달 넘게 일을 하셨다. 교회의 종탑과 교회당의 창문 주위와 사택의 방바닥과 사택의 미장 작업 등 완벽하게 정리해 주셨고 미장을 해주셨다. 또 계성교회 이창식 장로와 구석기 집사님이 보이라 시설인 엑셀 작업을 해 주셨다. 그리고 아내와 나는 교회당 벽에 돌을 붙이는데 돌은 내가 전도한 대구사람인데 합천에서 대형트럭으로 사업하시던 김무규형제의 도움으로 합천 강의 범람으로 토석을 철거 하는 중에 그 많은 돌과 바위들을 5차를 우리교회로 보내 주셨다. 물론 차 기름 값은 드렸다. 첫차는 40만원, 2-3차는 25만원씩, 4차는 20만원, 5차는 10만원을 드렸다. 물론 돌을 실고 온 차는 김무규형제의 차가 아니였다. 그 돌을 사택 앞에 도로를 2/3를 차지하고 부어 놓았는던 것이다. 근 2년동안 근데 정말 하나님은 세밀하시다. 돌을 그렇게 놓여 있어도 관청이나 동네에서도 말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 돌을 가지고 바위들은 정원석으로 사용하고 돌은 가려서 교회당 잔체 벽면과 사택 벽면과 화장실 벽면과 심지어 담장에 까지 붙였고 모래는 최고의 모래로 사용했다. 세면트가 4,500원이였는데 4,500원 생기면 신반에 가서 세면 한포를 사가지고 와서 돌을 붙이고 이런 씩으로 근 3년을 하였다. 최흥철 목사님이 건축하실 때도 큰일만 하시고 가시면 나는 밤중까지서라도 그 일을 마무리하고 보조하는 일을 다반사 했다. 특히 사택2층의 마무리 작업 천장 붙이기 작업과 석고보드 작업은 정말 어려운 작업이엿다. 근 한달여만에 마무리 짓고 교회 종탑의 천장 마무리 적업도 본인의 실력으로 너무 어려웠다. 겨우겨우 마무리를 하나하나 하는 데 한계가 왔다. 작업하면서 아시바에서 떨어지기를 3번이나 했고 그중에 한번은 갈비뼈가 1대는 나가고 한 대는 금이가는 그런 사고도 당했지만 별무리없이 진행 된 것이다. 그리고 사택의 천장 작업에는 이윤일 장로님이 오셔서 많이 수고 해 주셨고 사택 1층을 마무리를 해 주셨다. 우리교회에 시찰회 목사님들이 하루에 많이 와서 사택 거풋집을 콘크리트 작업 때 많이 수고 해주셨다. 정말 밤낮으로 우리교회 사모가 수고가 많았다. 그리고 돌을 붙이다가 부족하면 세간천에 가서 가서 돌을 주어다가 붙였고 담장도 그랬다. 이 이스타나로 몇 번을 실어 날랐는지 모른다. 자제들은 광렬한 태양 빛에 상해서 마음을 아프게 하지 정말 암담했다. 외벽공사는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되었는데 내장공사와 외부 환경공사는 전혀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이였다. 그리고 사택의 도배는 경기도 한사랑교회 이종군목사님이 보내주신 도배지로 대구 대암교회에 시무하시던 김기영목사(현:유하교회)님과 사모님이 오셔서 우리 아이들과 함께 도배를 마쳤고 대강 마무리하여 입주를 했다. 그리고 구사택을 뜯는데 정말 과관이였다. 집을 짓는데 몇차례 지은 것을 볼 수 있었다. 처음에 조그만 방하나에 부엌하나 화장실 하나 그리고 그 후에 서재 조그마한 것 그리고 화장실2칸(좌변기가 아닌) 내면서 부엌 확장 그리고 방앞에 방을 설치하고 창고하나 설치 조그만 사택을 5차례 걸쳐 지은 것을 보고 또 동네에서 보면 완전히 거지 집 부산의 달동네도 이 보다 보기는 싫지는 않았다. 그리고 모랫바람이 불어 오니까 비니루를 방 앞에 마루를 깔고 그 앞에 쳐 놓았기애 더더욱 과관이였다. 이 사택을 손수 뜯었다. 그 큰 건물을 철거하고 나무는 가려서 동네에 주고 블록이나 폐자제는 교회 마당에 뭍었다. 이 작업을 그의 한달 가까이 했다. 기리고 나니 그리해도 분위기는 났다. 그리고 교회 천장 아시바를 깔다가 떨어져 갈비뼈를 다쳐 움질 수 없는 상황이므로 어쩔 수 없이 쉴 수밖에 없었다. 부산 온천 교회의 청년들이 와서 천장에 석고보드는 붙였다. 정용호집사님의 아낌없는 헌신 그리하여 그후 몇 개월을 지났는데 그 와중에서도 창원 한빛 교회에서 의료 선교를 한 것이 계기가. 되어 집사님 한분이 그 당시 제 2남전도회에 알리게 되고 제 2남전도회가 와서 교회당 앞부분의 담장 대신에 둑을 쌓아 꽃을 심게 만들 작업을 부부간에 와서 열심히 하셨다. 그일을 하시는 중에 정용호집사님과 그의 아내 윤미자집사님 보시고 감동을 받아 교회에 봉사하기로 하셨는데 18일 동안 직원들을 2명이나 데리고 와서 하루도 빠짐없이 교회로 출근하여 마무리를 해 주셨다. 이 어찌 사람의 생각으로 가능한 일인가. 교회를 완벽하게 손을 보아 주시고 사택 이층 바닥 마무리와 벽체의 칠까지 마무리 해 주셨다. 자재를 일일이 준비 해 가지고 와서 교회당 바닥(데코타일)과 종탑 화장실 등등 사택 2층 마무리와 장판 종탑 장판까지 너무너무 감사하고 완벽한 하나님께 헌신이였다.
또한 화장실은 지붕과 샤슈와 유리창 일체는 창원 한빛교회 제3남전도회(당시) 남상복 집사님이 헌신하시고 헌물하시었다. 이교회를 완성하시고 헌당까지 수고하신 분들이 너무 많다. 이교회를 마무리하고 교회를 헌당드릴 때 정말 기뻤다. 그리고 알리지도 않았다. 이웃의 목사님이 말씀하시길 오는 손님도 없을 것이고 그냥 초촐하게 하자 하였다. 교회의 헌당 선물은 동서가 맡았는데 250장의 수건을 했다. 내가 이웃교회의 목사님의 소리를 듣고 150장을 말했는데 동서의 믿음이 훨씬 컷다. 그리고 헌당 때 식사 문제가 크게 대두 됬었다. 왜냐하면 인근에 개농장이 있어 파리 때가 말할 수 없이 시도 때도 없이 날아 들여 바깥에서 음식을 먹을 수 없는 형편이였는데 나는 그어떤 마음인지 몰라도 헌당하는 날은 하나님의 역사로 파리새끼 한 마리도 없을 꺼라고 했는데 300여명의 축하객들이 와서 식사하시는데 정말 넘 좋았고 그 때 파리 한 마리 없었다. 그리고 그 후에 동서가 수건을 못 받으신 분들 때문에 수건을 100장 더 주문하여 못 받으신 분들에게 일일이 찾아 뵙고 드렸다. 이 동네 생기고 그 많은 차는 처음 보았고 수없는 사람은 처음이였다고들 말하신다. 정말 장관이였다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ㅇ닐 뿐이다. 이일을 하는데 엄청나게 수고하신 최흥철 목사님과 최동수형제, 정용호집사님과 그의 직원들, 진주의 최상수집사님, 남상복집사님, 이창식 장로와 구석기 집사님, 이윤일 집사님, 그 외도 수없이 많다 일일이 열거하지 못하겠지만 특별히 본교회를 위해 애쓰시고 본 목사를 염려해 주시고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으신 정현식 목사(길곡교회시무)를 잊지를 못한다. 많은 분들에게 감사를 드린다. 이제 끝으로 사택의 지붕이 완전히 부실공사로 염려하고 걱정하던 차에 부산의 집사님에 문의 해 하여 견적을 뽑아본 결과 500여만원만 있으면 지붕을 수리 할 수 있다는 소리를 듣고 2년을 경과한 후에 안양일심교회 김상수목사님께 편지를 썻다. 구구절절로 그런데 목사님께서 답을 주셨다. 나는 물가 상승비를 포함하여 500-700만원이면 지붕을 핳 수 있다 했는데 교회의 어느 분이 헌신하여 500만원을 주신다는 거였다. 그래서 불야불야 업체를 선정해서 견적을 내어 보니 아니 이럴 수가 1,100만원이라는 거였다.그래서 목사님께 아래었더니만 장로님이 150만원을 해 주신다는 것이엿다. 450만원이 부족하였다. 그래도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하였는데 무난하게 잘 마무리가 되어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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