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소식]
불기 2550(2006)년 8월 18일 천주교 함세웅 신부님 예방
불기 2550(2006)년 8월 16일 북녘 큰물피해(수해) 지역 동포돕기 구호물품 전달
*부처님의 자비를 담고 불교평화공동체를 지향하는 부산불교평화연대에서 큰물(수해)로 인해 고통 받고 있는 이북 동포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자 의류 1만여점 (싯가 1억원 상당)을 민족공동체추진본부(민추본)의 북녘동포 생활용품 지원사업에 부산불교평화연대의 황정스님(마지막사진)이 직접 2.5톤 트럭에 물품을 실고와서 총무원 사회부에 전달하였다.
이번 물품은 민추본의 일정에 따라 북측의 조불련 앞으로 인천항 배편으로 지정기탁 될 예정이다.(9월 중)
불기 2550(2006)년 8월 14일 제16교구본사 고운사 주지 직무대행 호성 스님 임명장 수여
[종단 소식]
총무원장 지관스님, 강원룡 목사 빈소 조문
총무원장 지관스님이 지난 17일 타계한 강원룡 목사의 빈소를 조문하고 애도의 뜻을 표했다.
총무원장 지관스님은 18일(금) 오후 3시 30분, 강원룡 목사의 빈소가 차려진 서울대학교 병원을 방문, “강원룡 목사님의 召天을 哀悼한다.”며 “강원룡 목사께서 종교의 화합과 민주화를 위해 일생을 받쳤음은 온 국민의 마음속에 깊이 자리하고 있다”며 강원룡 목사를 추모했다.
한편 총무원장 지관스님은 17일 강원룡 목사의 타계소식을 접하고 “육신은 사대(四大)로 돌아가더라도 고인의 높은 얼과 뜻은 우리 사회 곳곳에 남아 다하지 못한 고인의 숭고한 뜻이 실현될 수 있도록 지남(指南)이 되고 표상(表象)이 되어 남아 있을 것”이라며 애도문을 발표했다.
원로회의, 세납 70세 이상, 10년 단임제 등 종헌종법 개정안 결의
여비 전액 수재의연금 기탁
조계종 원로회의(의장 종산 스님, 오른쪽사진)는 지난 8월 16일(수) 청주 보살사에서 제26차 원로회의를 개최하고 종헌개정안을 중앙종회에 제출토록 결의했다.
이날 개최된 원로회의에서 원로의원스님들은 현행 17~25인에서 17~21인으로 원로회의 구성인원 축소와 원로회의 의원 자격을 ‘연령 65세 이상’을 ‘연령 70세 이상’으로 개정할 것을 결의했다. 또한 현재 임기는 10년으로 하며, 1차에 한하여 중임할 수 있다는 재임조항을 ‘10년 단임’으로 개정하되 임기가 끝난 원로는 명예원로로 추대할 수 있도록 했다.
특히 원로의원 선출방법과 관련해 현행 ‘중앙종회에서 추천하고 원로회의에서 선출’하는 방식 대신 ‘원로의원이 추천하고 원로회의에서 선출’하는 방식으로의 개정도 함께 요구하기로 결의했다.
이날 원로회의에는 의장 종산 스님을 비롯해 지혜, 보성, 도원, 원명, 이두, 정천, 천운, 동춘, 진제, 혜정, 고산, 수산 스님 등 원로의원스님 18명 가운데 13명이 참석했다.
한편 원로회의는 에 참석한 13명의 원로의원 스님들은 여비 650만원 전액을 수재의연금으로 조계종 총무원에 기탁했으며, 정화 사찰 및 종단 귀속 사찰에 대해 종헌종법 개정을 통해 창건주의 권리를 인정할 수 있도록 하는 종헌종법 개정 권고안 채택과 어산범패작법보존회가 원명 스님을 어산종장으로 추천한 건에 대해서도 찬성의 뜻을 밝혔다.
[공지 사항]
직원 채용 공고
대한불교조계종 문화유산발굴조사단 사무국에서 일할 직원 채용을 다음과 같이 실시합니다.
? 모집분야 : 사무국 - 경리, 회계, 사무관리
? 인 원 : ○명
? 고용형태 : 정규직
? 근무조건 : 상근(주 5일), 4대 보험 적용 등
? 지원자격 : 조계종 신도 / 병역 의무복무 필 또는 면제자 / 종법 상 결격사유 없는 자 /
모집분야 경력자 / 전산전공자 우대
? 제출서류 : 이력서 / 자기소개서 / 최종학력 졸업증명서 / 주민등록등본 /
경력증명서 / 기타자격증 사본(소지자에 한함) / 반명함판 사진 2매
? 제출기간 : 불기 2550(2006)년 8월 16일(수) ~ 8월 30일(수) 오후 5시(마감일 소인 유효)
? 전형일시 : 서류심사 합격자에 한해 일시 장소 추후통지
? 전형방법 : 면접
? 최종 합격자 발표 : 개별통보
? 접수/문의: 대한불교조계종 문화유산발굴조사단 사무국(☎ 02-735-9944,9948)
대한불교조계종 문화유산발굴조사단
제11회 포교사 선발 최종 합격자 발표
아래의 명단과 같이 제11회 포교사 선발 최종 합격자를 발표합니다.
포교사 선발 최종 합격자는 다음의 사항에 유의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1. 최종 합격자는 2006. 9. 2-3일 시행되는 포교사 품수식(8재계 실천 대법회, 통도사)에 반드시 참석하여야 하며, 불참시 불합격 처리됩니다.
2. 최종 합격자라 하더라도 교육과정 참석 여부가 허위로 밝혀질 경우 불합격 처리됩니다.
3. 최종 합격자가 불가피한 사정으로 품수식에 불참할 경우 제12회 포교사 선발과정에 한하여 필기고시 면제를 통한 기본교육 과정 참여 기회를 부여합니다.
* 합격자 명단 : 대한불교조계종 홈페이지 공지사항 참고
[언론에 비친 종교]
영천 은해사 스님, '우리도 소방관'
영천 은해사 스님, '우리도 소방관'
<연합뉴스 2006/8/18/금>
소방차량 기증받아 화재 대비
(영천=연합뉴스) 이승형 기자 = 경북 영천 청통면 은해사에 불이 날 경우 스님들이 직접 소방차를 사용해 화재진압에 나선다.
은해사는 18일 영천소방서로부터 소방차량 1대를 기증받았다. 영천소방서는 낙산사 화재처럼 긴급한 상황이 발생할 때 스님들이 소방차로 불을 끌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노후 교체차량을 처분하지 않고 은해사에 맡겼다.
이번에 기증된 소방차는 평소 3t의 물을 채워둘 수 있어 웬만한 화재엔 초기진화가 가능할 정도다.
다소 오래된 차량이지만 실제 사용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영천소방서는 유사시 스님들이 실제로 소방차를 조작할 수 있도록 16.17일 이틀간 교육을 실시했다.
소방장비 점검요령과 주요 점검항목을 설명하고 소방펌프 조작 및 방수원리, 호스 연장 등에 대해 교육했다. 스님과 종무원들이 소방차로 불을 끄는 실습도 병행했다.
또 지속적인 차량 관리와 함께 은해사 스님과 종무원을 대상으로 연 2회씩 훈련을 진행하며 분기별로 이뤄지는 의용소방대 훈련 때도 스님들이 참가하게 된다.
영천소방서 관계자는 "사찰은 대부분 산 속에 있어 불이 나더라도 거리상 빠른 접근이 쉽지 않아 초기 대처가 중요하다"면서 "화재가 발생할 경우 초기진압으로 소중한 문화재를 지키기 위해 소방차를 기증하게 됐다"고 밝혔다.
은해사 종무소 관계자는 "불이 나서는 안 되겠지만 일단 심리적으로 든든하다"면서 "1차 교육을 받은 스님뿐만 아니라 다른 스님과 종무원들도 소방차를 능숙하게 사용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영천소방서와 은해사는 이날 오전 은해사에서 소방차 기증식과 함께 화재진압 시범행사도 가졌다.
같은 민족 아니라도 어렵다면 도와야지
같은 민족 아니라도 어렵다면 도와야지
<세계일보 2006/8/21/월/인터뷰2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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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수해복구 지원 앞장서는 정토회 법륜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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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수행공동체인 정토회를 이끌고 있는 법륜(53) 스님은 최근 북한 수해복구 지원 활동으로 바쁜 시간을 보냈다. 북한 수해의 심각성을 국내외에 알리기 위해 동분서주했고, 8월 초에는 9박10일 일정으로 중국을 직접 방문해 수해를 입은 북한 주민에게 물품을 보내는 일을 진두지휘하기도 했다. 특히 법륜 스님은 정부와 민간단체가 북한 수해복구를 위해 200억원 규모의 지원을 하기로 결정하는 데에도 작지 않은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법륜 스님이 이사장으로 있는 ‘한국JTS’는 북한의 수해사실이 알려진 직후인 7월 말 민간 북한 지원 단체로는 처음으로 북한수해주민 돕기 성금 모금 활동에 들어갔다. 법륜 스님은 이와 함께 정치권과 시민단체에 북한 수해복구를 돕기 위한 인도적 지원의 필요성을 호소했고, 동시에 수해복구 지원 물품을 북한에 보냈다. 그는 북한 수해 소식을 접했을 때 무엇보다 신속한 지원이 중요하다고 판단하고 실행에 들어갔다.
법륜 스님은 “우리의 이 같은 결정과 활동은 북한 수해의 심각성을 알리는 데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안다” 며 “북한이 남북관계 경색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지원한 물품을 받는 것을 보고 정부나 다른 민간단체들도 북한이 남측의 지원을 수용할 자세가 돼 있다고 판단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대북 지원을 놓고 국내 여론이 갈리는 것과 관련해선 “북한 정부를 미워하는 것과 북한 주민을 지원하는 것은 별개”라고 말했다.
그는 “북한 주민이 우리 민족이기 때문에 도와주는 것이 아니다”며 “국제적 기준에 비추어 볼 때 북한의 객관적 상황은 심각하고, 그렇다면 북한 주민에 대한 인도적 지원은 당연하다”라고도 말했다.
법륜 스님은 객관적인 사실에 입각해 북한 지원 정책을 펼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또 인도적 지원 문제는 정치적 문제와 분리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그는 “정치적인 관계가 좋지 않을수록 인도적인 관계를 확대해야 한다”며 “그래야 인도적 지원이 정상적인 관계를 여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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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아에 허덕이는 북한 어린이의 사진. |
법륜 스님은 북한 지원과 한반도 평화 정착 활동을 체계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세 단체를 이끌고 있다. ‘좋은벗들’은 주로 북한 인권 활동을 펼치고 있고, ‘한국JTS’는 대북 지원과 국제기아 퇴치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그리고 한반도 평화 문제를 학술적으로 연구하는 ‘평화재단’이 그것이다.
법륜 스님은 이와 관련, “관점은 동일하고 결국 인간의 고통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이라며 “주민들의 입장에서 보면 모두 다 같이 열악한 상황이고 고통의 종류는 다르지만 고통을 받고 있다는 사실은 동일하다”고 말했다.
법륜 스님은 북한에 대한 두 가지 인식이 부딪칠 때 결정이 어렵다고 말했다. 그는 “북한의 권력은 민중의 관점에서는 가해자이고 비민주적인 부분은 비판받아야 한다”며 “하지만 화해의 입장에서는 수용할 수밖에 없어 혼란스럽다”고 말했다.
법륜 스님은 1996년 북한동포 돕기 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는 이에 대해 ”95년 대홍수로 북한에 대기근이 덮친 96년 여름에 중국과 북한의 국경변에 기아 상태에 있는 한 북한 어린이를 눈앞에 두고서도 국경 다른 편에 있다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 그 아이를 도울 수 없었을 때 너무나 가슴이 아팠다”며 “국경이나 국가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기에 굶주리는 아이를 돕는 데 장애가 돼야 할까 깊이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후 정부 차원에서 대북 식량 지원을 할 것을 촉구하는 100만인 서명운동을 전개했고 ‘북한 식량난 실태보고서’를 만들어 국제사회에 북한 식량난의 실상을 알렸다. 또 ‘북한난민 실태 및 인권보고서’를 만들어 국제사회에 북한 인권의 심각성을 호소했다. 법륜 스님은 이 같은 활동을 인정받아 2002년 막사이사이상(평화와 국제이해부문)을 수상했다.
경주에서 태어나 1969년 15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불심도문(佛心道文) 스님을 은사로 경주 분황사에서 출가했고 1991년 비구계를 받았다. 청년 시절 민주화운동에 참여해 두 차례나 체포되면서 사회적인 이슈로 관심 영역을 넓혔다. 법륜 스님이 지도법사로 있는 정토회는 기성 종단과 비켜 서 있으면서 빈곤·환경·통일 운동을 펼치는 불교수행공동체다. 대북 지원 활동 외에 인도, 몽골 등에서 빈민 지원 활동을 펼치고 있다. 평소에는 불자를 대상으로 설법과 명상 지도를 한다.
그는 10년 이상 북한을 가까이에서 관찰해본 결과 북한에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법륜 스님은 “정치군사적인 측면에서는 큰 변화가 없지만 사회경제적 측면에서는 혁명적인 변화가 있었다”며 “우선 북한 사람들이 사고 중심이 이념적 측면보다 경제적 측면에 집중되고, 사회 전체가 시장 중심으로 영위되고 이동이 훨씬 자유로워졌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 상표가 붙은 쌀이 북한 시장에서 공공연하게 팔리고 있고, 북한 사람들이 남한 유행을 바로 따라간다”며 “변화가 없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는 그 사람이 원하는 변화가 없었다는 뜻”이라고 덧붙였다.
법륜 스님은 특히 북한은 변하지 않고 남한만 변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지적에 대해 “남측은 성숙한 사회인 반면 북측은 그렇지 않다”며 “북한 현실을 감안해 남북관계를 이끌어가는 현명함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전천실 기획위원 chun21@segye.com
법륜 스님은…
△경주 출생(53) △대한불교조계종 중앙불교교육원 원장 △한국불교 사회교육원 원장 △정토불교대학 이사장 △한국JTS 이사장 △평화재단 이사장 △저서 ‘즉문즉설’ ‘그냥 살래 바꾸고 살래’ 등 다수
"北 7월 말 최악 수해로 이재민 150만 달할 것”
對北 인권단체 '좋은벗들' 주장
법륜 스님이 이사장으로 있는 북한인권 단체 ‘좋은벗들’ 소식지는 7월 말 북한을 덮친 수해의 충격적인 실상을 공개해 눈길을 끌었다.
‘좋은벗들’ 소식지는 “지난 7월 중순 북한 수해로 인한 사망·실종자는 1만명 이상이고 이재민은 130만∼150만명에 달한다”며 “농경지 유실·침수 피해는 10만정보 이상이다”라고 소개했다. 이는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총련) 기관지 조선신보가 7일 인터넷판에서 사망자가 549명이고 실종자가 295명이라고 보도한 것과는 큰 차이를 보인다.
법륜 스님은 이같이 피해 규모에 대한 보도가 엇갈리고 있는 것과 관련해“피해 규모가 워낙 커서 북한 정부가 정확한 내용을 발표하지 않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며 “국제기구의 추산은 북한 정부의 보고를 기초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정확하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조선신보의 보도나 국제기구의 평가가 초기 피해 상황 집계에 불과할 수도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는 ‘좋은벗들’ 소식지의 추산치도 최종 집계가 아니고 중간 집계여서 피해 규모가 더 커질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대동강 상류 지역의 피해가 크다고 소개했다.. 특히 평안남도 양덕군, 신양군, 맹산군과 강원도 금강군 등이 심하다는 것이다.
법륜 스님은 “지난 10여년 동안 대북 지원 활동을 하면서 정보망을 축적해놓았기 때문에 이번 북한 수해 규모를 신속·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면서 “이번 피해를 방치하면 1995년 대홍수로 인한 대규모 기근사태가 재발할 수도 있다는 판단이 들었다”고 말했다.
법륜 스님은 상황이 심각하다고 판단해 북쪽에서 요청하기 전에 지원하겠다고 먼저 제안했다고 밝혔다. 남북관계가 좋지 않아 북측이 어떻게 나올지 불안했는데 바로 식량을 비롯한 옷, 신발 등 생필품 등을 보내달라는 응답이 왔다고 말했다.
강렬한 수행과 실천 한국불교 독창성 매혹적
강렬한 수행과 실천 한국불교 독창성 매혹적
<한겨레 2006/8/21/월/문화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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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 불교학자 랭커스터 교수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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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수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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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 불교학자인 루이스 랭커스터 버클리대 명예교수가 세계전자문화지도협의회(ECAI) 등이 주관하는 국제학술대회 참석을 위해 한국을 찾았다. 랭커스터 교수는 미국에서 동아시아 불교 연구를 개척하고, 관련 자료를 디지털 데이터로 옮겨 축적하며, 이를 다시 서구 학자들이 두루 사용할 수 있도록 애써 왔다. 일흔다섯의 나이에도 여전히 불교 연구에 심취해 있는 그를 17일 서울대 호암교수회관에서 만났다.
-한국 불교에 관심이 높은 것으로 안다.
=한국 불교는 다른 나라의 불교에 비해 매우 강한 수행과 실천의 요소를 갖고 있다. 중국 송대의 불교와 비슷한데, 그런 불교는 지금 중국에서는 사라졌다. 이 점이 내가 한국 불교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 이유다. 연구하다 보니, 한국 불교의 역사가 단순히 중국 불교를 모방한 게 아니라는 점을 알게 됐다. 어떤 이들은 한국 불교가 중국에서 유래됐다고 하지만, 내가 보기엔 4세기 중반 지금의 터키를 포괄하는 ‘북방 지역’과의 교류를 통해 한국 불교가 독특한 방식으로 성립된 듯하다. 한국 불교 연구 과정에서 지난 1988년부터 해인사 팔만대장경의 디지털화 작업을 시작해, 한국내 연구자 및 승려들과 공동으로 이 작업을 끝내기도 했다. 팔만대장경에는 요즘엔 쓰지 않는 옛 한자도 많아서 1만3천자의 한자를 일일이 컴퓨터에 새로 입력해야 했다.
팔만대장경 디지털 작업 동참 2~3년안 검색 프로그램 나올것
-팔만대장경을 디지털화하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대장경은 언어와 나라별로 여러 판본이 있다. 티베트의 대장경이 있는가 하면 대영박물관에도 대장경이 있다. 각 대장경을 일일이 필사해 검토하기란 대단히 힘든 일이다. 대장경의 디지털화 작업으로 인해, 동아시아 불교에 관심있는 연구자들이 좀더 쉽게 이 자료를 서로 비교 연구할 수 있다. 한국, 중국, 일본 등 세계 모든 대장경을 저장하고 서로 검색·비교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지금도 개발중이다. 2~3년 뒤면 가시적 성과가 있을 것이다.
-불교를 통해 동아시아를 이해하는 것의 가치는 무엇인가?
문화 외 정치·경제 등 아울러야 아시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어
=어떤 점에서 아시아에 대한 (서구인들의) 관심은 아시아에서 일어난 전쟁 때문에 촉발됐다. 그러나 어떤 지역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정치·경제적 요소 외에도 모든 측면을 두루 봐야 한다. 최근 이슬람에 대한 서구의 태도에서도 이런 문제가 등장하고 있다. 다행스런 것은 적지 않은 미국인들이 문화의 관점에서 아시아를 이해하려 한다는 점이다. 내가 공부를 시작한 1954년에는 불교를 공부하는 사람들이 매우 드물었지만, 이제는 아시아 종교 과정이 개설되지 않은 대학이 없다.
-앞으로 연구 계획은?
=현재 원효의 글을 영어로 번역하고 있다. 내가 지금까지 읽어본 어떤 불교 경전과도 다른 독특한 글이다. 방대한 자료를 인용하며 글을 써내려간 원효는 천재다. 그의 글을 영어로 옮기는 게 힘들지만 꼭 끝내고 싶다.
글·사진 안수찬 기자 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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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 '앙굿따라 니까야' 번역 출간한 대림스님
[사람들] '앙굿따라 니까야' 번역 출간한 대림스님
<연합뉴스 2006/8/18/금>
첫 두권 출간, 내년 상반기까지 여섯 권 완간 예정
(서울=연합뉴스) 이준삼 기자 = "이미 '청정도론(淸淨道論)'을 번역해봐서 니까야(경장ㆍ經藏) 번역은 그렇게 어려운 점이 많지 않았어요. 또 어려운 점은 주석서를 참고했고…."
초기불전연구원장 대림(44) 스님이 각고의 노력 끝에 석가모니의 가르침이 오롯이 담긴 '앙굿따라 니까야' 첫 두 권을 최근 번역해 출간했다.
초기불전연구원 지도법사 각묵(49) 스님이 3월 '디가 니까야'(전3권)를 한글로 완역한 데 이은 두 번째 빠알리어(고대 인도어) 경장 번역서다.
18일 낮 인사동에서 조촐한 출간 기념 기자간담회를 가진 스님은 "번역작업에 얼마나 걸렸는가", "작업은 어렵지 않았느냐'는 기자들 질문에 "2년 정도 걸렸는데 별로 고생하지는 않았다"며 겸손해했다.
그러나 봉녕사 승가대학을 졸업한 뒤 인도 뿌나 대학교에서 산스크리트어 석사학위와 철학박사 학위를 받는 등 13년 간 인도, 스리랑카, 미얀마 등지에서 산스크리트어와 빠알리어, 쁘라끄리뜨어 등의 고대 인도어를 공부해온 이력을 볼 때 책이 나오기까지는 까마득한 세월이 뒷받침됐음을 엿볼 수 있다.
불교 경전은 크게 생활규범을 담은 율장과 부처의 설법이 담긴 경장, 부처의 직계제자들이 설한 논장으로 나뉜다.
특히 부처님의 설법이 담긴 경장은 '디가 니까야', '맛지마 니까야', '상윳따 니까야', '앙굿따라 니까야', '쿳다까 니까야' 등 일정한 기준에 따라 묶은 다섯 부의 경전으로 전한다.
따라서 부처님 초기 말씀을 담은 다섯 부의 '니까야'를 한글로 완역한다는 것은 국내 불교 연구자들이 부처가 직접 행했던 설법을 더 원형에 가깝게 접할 수 있게 됐음을 의미한다.
자리를 함께 한 각묵 스님은 "한국불교는 중국을 거쳐 전래하면서 왜곡된 부분이 적지 않았다"면서 "앞으로 중국과 한국이 가까워지면서 불교도 더욱 가까워질 텐데, 그 전에 우선 기존 불전들의 정확성을 기하는 작업부터 선행돼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빠알리어 경장의 한글완역작업이 끝나는 2010년께에는 한문 불경을 번역한 기존의 경장들과 초기 불전들을 비교 대조해가며 잘못된 부분을 가려낼 계획이다. 또 일반인들도 접하기 쉬운 재미있고 이해하기 쉬운 책으로 만들어 발간한다는 생각이다.
'앙굿따라 니까야' 중 기억에 남는 부분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로힛따사경'을 소개했다. '어떻게 하면 생로병사가 없는 세상의 끝에 도달할 수 있습니까"하며 묻는 신의 아들 로힛따사의 질문에 대한 부처님의 대답이 담긴 부분이다.
"도반이여, 참으로 태어남도 없고 늙음도 없고 죽음도 없고 떨어짐도 없고 생겨남도 없는 그런 세상의 끝을 발로 걸어가서 알고 보고 도달할 수 있다고 나는 말하지 않겠다// 도반이여, 그러나 나는 세상의 끝에 도달하지 않고서는 괴로움을 끝낸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도반이여, 나는 인식과 마음을 더불은 이 한 길 몸뚱이 안에서 세상과 세상의 일어남과 세상의 소멸과 세상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을 천명하노라." 각권 656-664쪽. 각권 3만원.
고대목탑 중심기둥 세우기 비밀 마침내 풀렸다
고대목탑 중심기둥 세우기 비밀 마침내 풀렸다
<연합뉴스 2006/8/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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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수리절터 목탑 기둥자리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지난 4-6월 조사한 충남 부여군 군수리절터 백제시대 목탑 자리. 가운데 사각형으로 뻥 뚫린 구멍이 심초석(心礎石)이 있었고, 그 위에는 거대한 목탑 심주(心柱,중심기둥)가 섰다. 이 심초석 자리 왼쪽(서쪽) 편으로 땅을 파고 내려간 흔적이 보이는데, 이것이 심초석을 이곳에 일단 뉘었다가 세우기 위한 시설이었다./김태식/문화/2006.8.20 (서울=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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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수리 절터 목탑지 '뉘었다가 세우기' 최초 확인
경주 나정 "우물 아닌 기둥구멍" 판명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사찰에서 목탑을 세울 때 그 가운데 불탑 건축물 전체를 지탱하기 위해 심주(心柱)라고 하는 나무 기둥을 세운다. 최소 10m 이상 되는 거대한 나무기둥을 고대인들은 어떻게 세웠을까?
그 오래된 의문이 충남 부여군 부여읍 군수리 19-1번지 일대 소재 군수리절터(사적 44호)의 백제시대 목탑이 있던 곳에 대한 발굴조사 결과 마침내 풀렸다.
아울러 이를 통해 신라건국시조 박혁거세가 탄강한 곳이라는 전설이 서린 경주 나정(羅井)의 이른바 '우물'이란 곳 또한 우물이 아니라 팔각형(혹은 원형) 건물의 중심기둥이 섰던 자리였음이 판명됐다.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소장 송의정)는 4-6월 군수리절터 중 현재의 목탑지 정중앙 지하에 자리잡은 심초석(心礎石. 중심기둥 받침돌) 주변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거대한 중심기둥을 일단 수평으로 뉜 다음, 기둥 밑둥을 지하에 위치한 심초석으로 밀어넣기 위해 의도적으로 땅을 파고 들어간 흔적을 확인했다고 18일 밝혔다.
조사 결과 심초석은 현재의 지표면 기준으로 194㎝ 지점에서 윗면을 드러냈다. 화강암재 대리석을 이용한 심초석은 아래는 둥글고 상면은 사각형인 상방하원(上方下圓) 형태였으며, 상단과 하단은 약 5㎝ 가량 되는 높이 차이가 났다. 크기는 상단이 한변 94㎝인 정사각형이며, 하단은 동서 130㎝, 남북 138㎝였다.
백제인들은 이 심초석을 안치하기 위해 사각형 모양으로 2m 이상 되는 깊이로 땅을 팠다.
그런데 조사 과정에서 이렇게 수직으로 파고 내려간 심초석 구덩이 중 서쪽 측면 맨 아래쪽에서 시작해 비스듬히 일정한 각도를 유지하면서 올라가다가 마침내 지표면과 연결되는 긴 고랑과 같은 시설(길이 474, 너비 180㎝)이 확인됐다.
조사단은 바로 이 '고랑시설'이 거대한 목탑 중심 나무기둥을 심초석 위에 안치하기 위한 고안임을 발견했다.
송의정 소장은 "수 십m가 되었을 거대한 나무기둥을 지하 2m 지점에 위치한 심초석 위에 그대로 세우기는 기술적으로 매우 곤란했을 것이므로, 이런 난제에 봉착한 백제인들이 심초석 지점까지 땅을 비스듬하게 파고 들어간 다음, 여기에 기둥을 뉘어 놓고서 반대편 기둥 끝을 잡아당겨 세웠음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군수리 목탑지 중심기둥 안치 복원도 참조)
이와 같은 '뉘었다가 세우기' 방식은 일본에서 호류지(法隆寺) 오층목탑에서 확인되기도 했으며, 최근에는 중국 고대 목탑에서도 같은 방식이 보고됐다.
하지만 한국에서 이런 목탑 심주 세우기 방식이 확인된 것은 군수리 절터가 처음이다.
군수리 절터 목탑에서 이 방식이 구명됨에 따라 중앙문화재연구원이 최근 연차 발굴조사를 벌인 경주 나정 유적의 이른바 '우물' 흔적 또한, 우물이 아니라 기둥 심초석을 안치하기 위해 마련된 시설임이 드러났다.
왜냐하면 나정 유적 또한 지하 2m 가량 되는 지점에 심초 시설과 같은 흔적이 발견된 것은 물론, 그 한쪽 면에서 지상으로 비스듬히 연결되는 도랑과 같은 시설이 확인됐기 때문이다.
[문화소식] '유니카' 회원들 봉은사 방문
[문화소식] '유니카' 회원들 봉은사 방문
<연합뉴스 2006/8/20/일>
(서울=연합뉴스) 이준삼 기자 = ▲유네스코 산하단체로 비전문 영화인으로 구성된 국제연맹인 '유니카(UNICA)' 총회 참석차 한국을 방문하는 세계 33개국 대표단이 23일 오전 강남 봉은사를 방문한다. 대표단들은 주지 스님의 환영사를 들은 뒤 다도, 참선, 사찰 음식 등을 체험할 예정이다.
▲'탈북민사역자연합회' 창립총회가 21일 오전 10시 '한국교회100주년기념관' 소강당에서 진행된다.
탈북민신학회가 한국기독교총연합회 등의 후원을 받아 주최하는 행사로 탈북민신학대학생, 졸업자, 목회자, 교계인사, 북한사역자 등이 참석한다.
▲불교조계종과 불교중앙박물관은 문화재 보존관리 차원에서 23일 전남 구례에 있는 화엄사 사천왕상과 금강역사상 등에 대한 세척작업을 진행한다.
종교계 '귀농학교' 잇달아 개설
종교계 '귀농학교' 잇달아 개설
<연합뉴스 2006/8/21/월>
불교 귀농학교, 천주교 농부학교 운영
(서울=연합뉴스) 정천기 기자 = 생태적 자립과 대안문명 등을 추구하는 종교계의 귀농(歸農) 프로그램이 잇달아 개설된다.
인드라망생명공동체(상임대표 도법스님)는 29일부터 10월27일까지 서초구 양재동 인드라망 교육센터에서 불교귀농학교 제19기 가을강좌를 연다.
불교귀농학교는 귀농을 꿈꾸는 사람, 생명과 평화의 삶에 관심을 가진 이들을 대상으로 이론강좌와 텃밭실습 등을 실시한다. 생명평화탁발순례를 3년째 하고 있는 도법스님, '철학과 굴뚝청소부'의 저자인 철학자 이진경 서울산업대 교수, 이태근 (사)흙살림 대표, 황선진 마리학교 대표 등이 강사로 나온다.
도시인을 위한 생태교양강좌이기도 한 불교귀농학교는 1998년 개설해 600여 명의 수료생을 배출했고, 이 가운데 15% 정도가 귀농한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가을강좌는 매주 화·금요일 오후 7-9시에 진행되며 수강료는 개인 12만원, 부부 18만원. 자세한 내용은 홈페이지(www.indramang.org) 참조. ☎ 02-576-1886.
천주교 서울대교구 우리농촌살리기운동본부는 '천주교 농부학교'를 처음 개설한다. 농촌지역에서 소농(小農)으로 살면서 순환적인 삶을 추구하는 도시의 천주교 신자들을 위한 프로그램이다. 농가에 대한 이해와 살림살이, 집짓기, 생태위기와 농업 등 이론강좌와 두 차례의 현장실습을 실시한다.
교육은 9월21일부터 11월2일까지 매주 목요일 오후 7-9시 명동 전진상 교육관 별관에서 실시한다. 회비는 개인 10만원, 부부 15만원. ☎ 02-727-2283.
[김성호기자의 종교건축 이야기] (11) ‘원불교 발상지’ 영광 영산성지
[김성호기자의 종교건축 이야기] (11) ‘원불교 발상지’ 영광 영산성지
<서울신문 2006/8/21/월/기획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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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영광군은 이런저런 명물과 사연들로 이름난 곳이지만 종교계에선 단연 ‘원불교의 고장’으로 통한다. 그중에서도 영광읍 중심부로부터 약 10㎞ 떨어진 백수읍 길룡리 일대는 원불교가 시작된 제1성지로 연중 순례객들의 발길이 이어진다. 교조 소태산 박중빈(1891~1943) 대종사가 탄생해 구도, 대각하고 원불교의 문을 연 근원성지. 소태산 대종사가 탄생한 이후 원불교의 교법을 제정하기 위해 변산으로 자리를 옮기기 이전까지 29년간에 걸친 ‘구도자의 혼’이 묻어있는 곳이다. 그런 만큼 탄생가, 구도지, 대각지를 비롯해 교단 초기의 각종 행적들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사적, 유물들이 곳곳에 보관 전시되고 있다. 주위에는 영산수도원, 영산원불교대학교, 대안학교인 영산성지고등학교, 영산성지송학중학교 등이 둘러서 있어 거대한 원불교 단지를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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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옥녀봉에서 내려다본 원불교 영산성지. 교조 소태산 박중빈 대종사가 제자들과 함께 바닷물을 막아 대규모 농토를 일군 정관평 너머로 원불교 개교 당시의 사연을 담은 크고 작은 건물들이 옹기종기 들어앉아 있다. 김명국기자 daunso@seoul.co.kr | |
원불교 교조인 소태산 대종사는 이곳 길룡리 영촌마을의 평범한 농가에서 태어나 1916년 26세의 나이로 깨달음을 이룬 인물. 지금도 길룡리 주민들에게 소태산 대종사는 어려서부터 자연현상과 생로병사에 대해 의심이 많았던 범상치 않은 인물로 전해진다.“만유가 한 체성이며 만법이 한 근원이로다. 이 가운데 생멸 없는 도와 인과 보응되는 이치가 서로 바탕하여 한 뚜렷한 기틀을 지었도다.”라고 대각의 기쁨을 표현했다는 소태산 대종사. 그가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라는 표어를 내세우고 9인의 제자들과 함께 생활불교, 대중불교를 표방하며 창시한 게 바로 원불교다.
●5만평 간척지 ‘정관평´… 낙원 건설 의지 서려
전남 영광은 예로부터 조창이 있었고 쌀·소금·굴비 생산이 많아 ‘삼백고’,‘옥당골’로 불렸던 곳. 특산물과 ‘먹을 것’이 풍부했던 만큼 이 것들을 진상해 출세하려는 관리들이 다투어 눈독을 들였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6·25전쟁중에는 민간인이 2만 1000명이나 사망했고 전국에서 부녀자와 어린이 희생자가 가장 많았던 넓은 지역이다. 이에 비해 지금의 영산 성지가 있는 길룡리 일대는 대대로 궁벽산촌이었고 지금도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다.
성지에서 동쪽으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선진포에서 법성포까지 배를 이용해 다닐 만큼 바닷물이 성지 인근까지 들어왔고 성지 앞은 개펄지대였다. 소태산 대종사가 대각후 가장 먼저 시작한 일이 바로 바닷물을 막아 이 개펄을 농토로 만든 간척사업인 방언공사다. 제자들과 함께 2차례에 걸친 공사 끝에 모두 5만평 200마지기의 논·밭을 일구었다고 한다. 이른바 정관평으로, 중국 당태종의 연호인 정관에서 따 평화 안락한 낙원세계 건설의 의지를 나타내고 있다. 대종사는 정관평 간척사업을 하면서 저축조합을 운영했는데 이 저축조합을 독립운동 자금과 관련된 것으로 의심한 일경들에게 붙들려 수감되는 등 숱한 고초를 겪었다고 한다. 지금 이 정관평 논·밭 가운데 130마지기는 원불교 교무들이,70마지기는 주민들이 나누어 경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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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불교 영산성지의 중심부분. 뒤쪽 둥근 초가지붕 건물이 원불교 최초의 건물 영산원이고 그 맞은편 것이 정산 종사와 가족들이 살았던 법모실이다. | |
성지 한가운데 자리잡은 초가집 영산원은 대종사와 제자들이 방언공사를 하면서 공사 사무실 겸 집회소로 썼던 원불교 최초의 건물. 지금 전국에 퍼져있는 교당들의 효시 격이다.1918년 지금의 성지에서 400m 떨어진 생가 터 옆에 지은 구간도실(九簡道室)이 원래의 건물로 1923년 성지를 조성하면서 현재의 위치로 옮긴 것이다.
●아홉칸 방 ‘구간도실´엔 ‘백지혈인´ 전설이…
구간도실이란 가로 세칸, 세로 세칸의 아홉 칸 방에서 제자들이 함께 공부하고 기도하는 집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 그런데 이 구간도실에는 원불교에서 빼놓을 수 없는 ‘백지혈인(白紙血印)’이란 이적의 전설이 담겨있다. 방언공사를 끝낸 대종사가 여덟 명의 제자들에게 각각 칼을 나누어주고 원불교의 큰 뜻, 즉 공도를 위해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사무여한(死無餘恨)’의 정신을 시험했던 것. 대종사로부터 자결할 것을 명령받은 제자들이 자결하기 전 흰 종이에 맨 손가락으로 도장을 찍었는데 모두 핏자국이 나타났다는 이야기다. 교단의 신성성을 부각시키기 위한 전설로 통하지만 원불교 교역자인 교무들은 한결같이 교역의 으뜸정신으로 되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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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옥녀봉 정상 아랫부분 바위에 새겨진 원불교의 상징, 일원상. | |
영산원 맞은편의 초가 법모실은 대종사와 2대 교주 정산 종사의 인연을 보여주는 건물. 정산 종사는 경상도 성주 출신으로 증산교를 찾아 정읍에 들어와, 원불교 총장을 지낸 김삼룡 박사의 조모 집에 기숙하고 있었다고 한다. 당시 정산 종사와는 아무런 안면이나 인연이 없었던 대종사가 직접 정산 종사를 찾아가 연을 맺어 정산 종사와 가족들이 모두 옮겨 살았던 곳이 바로 이 법모실이다.
대종사와 정산 종사의 인연은 후계 전통이 되어 최고 지도자는 임기중 반드시 후계자를 양성해 지목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영산원, 법모실을 중심으로 둘러선 대종사 탄생가·일원상을 새긴 옥녀봉·방언공사를 마친 뒤 이를 기념한 삼밭재 마당바위·대종사가 자주 찾아 정진했다는 선진포 입정터·깨달음을 얻은 노루목 대각터·만고일월비·정관평 방언답·방언공사 제명바위·구간도실터·구인기도봉 등에는 모두 나름대로의 사연이 담겨 있다. 석가모니불의 영산회상에 연원을 두었다는 영산. 소태산 대종사와 제자들은 ‘영산회상’을 재현할 것이라는 뜻에서 이름붙여 일군 이곳을 떠나 1924년 전북 익산군 북일면 신룡리(현재 익산시 신룡동)에 본산인 총부를 세웠다. 하지만 대종사가 득도했다는 대각터에 세워진 대각기념비에는 지금도 ‘만고일월(萬古日月)’의 글씨가 또렷하다. 대종사의 뒤를 이은 정산 종사의 제의로 새겨진, 원불교의 과거이자 미래의 압축 상징이다.
kimus@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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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산성지에 자리잡은 대각전.1936년 지어진 법당으로, 정면에 일원상을 봉안했고 그 우측에 소태산 대종사 영정을 모셨다. | |
■ 1916년 개교 ‘원불교’는
1916년 소태산 대종사가 개교한 원불교는 흔히 불교와 혼동된다. 그러나 불교와는 엄연히 구별되는 한국의 대표적인 민족종교중 하나다. 전통적으로 불교가 출가승 중심의 수행과 승단 구조를 갖는데 비해 원불교는 불교의 ‘처처불상’, 즉 ‘우주 만물 어디에든 불성(佛性)이 있다’는 원칙 아래 출가승 아니라도 누구나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생활불교의 특성이 강하다. 그래서 수행을 통한 깨달음과 견성보다는 종교적 신앙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현실 세계에서의 실질적인 도덕 훈련을 강조한다. 불상 대신 원(圓)을 모시는데 이 일원상(一圓相)은 시작과 끝이 없는 불생불멸과 인과보응의 진리를 형상으로 표현한 것이다.
교단에선 특히 ‘은혜’를 중시하며 사은(四恩), 즉 ‘내가 받은 천지(天地)·부모(父母)·동포(同胞)·법률(法律)의 4가지 은혜를 돌려 갚는다’는 것을 핵심 교리로 세우고 있다. 현재 국내에 15개 교구 550여개 교당과 180여 기관, 국외에 5개교구 14개국 51개 교당과 9개 기관 등을 두고 교화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신도수는 140만명. 심성계발훈련, 마음공부확산, 은혜심기운동, 남북 통일운동, 종교협력운동 등을 통해 교세가 급속히 확장되고 있으며 현재 국내 4대종교중 하나로 꼽힌다.
서울 부산 익산에 원음방송국을 연데 이어 최근 군종 진입과 함께 평양에 국수공장을 설립하고 캄보디아에 무료 구제병원을 연 것을 계기로 일반인들에게 훨씬 친숙해졌다. 한국 최초의 대안(代案) 중·고등학교인 영산성지고, 성지송학중학교를 비롯해 새터민 청소년 교육기관인 한겨레중·고등학교 등 7개교를 설립해 운영하고 있으며 영어·중국어를 비롯해 체코어·힌두어 등 21개 언어로 교서 번역 작업을 진행 중이다. |
문선명 총재, '참사랑만이 인종·종교 벽 허물어'
문선명 총재, '참사랑만이 인종·종교 벽 허물어'
<세계일보 2006/8/21/월/사회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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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학자 총재 180개 도시 평화순방 기념대회'서 문선명 총재 강연 각계 지도자 등3만여명 참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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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일 경기 고양시 킨텍스(한국국제전시장)에서 천주평화연합(UPF) 주최로 UPF 창시자인 문선명 총재 초청 특별강연회가 열렸다.
‘천주평화 조국향토 천지환원 승리석방대회’라는 이름으로 열린 강연회는 문 총재의 미국 댄버리 교도소 출감 21주년과 UPF 공동창시자인 한학자 총재의 세계 180개 도시 평화순방을 기념하기 위한 것으로, 각계 지도자와 평화대사, UPF 회원 등 3만여명이 참석해 성황을 이뤘다. 문 총재는 80여년 세월 동안 종교적 핍박과 모함 등으로 여섯 번의 옥고를 치렀다.
문 총재는 ‘하나님의 이상가정과 평화이상세계왕국’이란 주제의 강연에서 하나님을 중심한 평화운동과 참사랑, 교차축복의 가치를 역설했다.
문 총재는 “인간을 중심 삼아 전개하는 평화운동은 역사적으로 언제나 한계에 부딪혀 좌절되고 말았다”며 “하나님이 직접 운행하는 평화운동만이 진정한 평화이상세계를 실현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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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평화연합(UPF) 공동창시자인 문선명·한학자 총재 내외가 대회 시작에 앞서 청중들에게 환하게 웃으며 인사하고 있다. 이종덕 기자 |
문 총재는 “참사랑이란 남을 위해, 전체를 위해 먼저 베풀고 위해 주는 사랑이요, 그 속성은 절대·유일·불변·영원하다”면서 “참사랑의 가치는 국경의 벽, 인종의 벽, 나아가 종교의 벽까지도 영원히 종식시킬 수 있다”고 역설했다. 평화운동의 핵심 사상이 곧 참사랑이라는 의미로 풀이된다.
문 총재는 이어 “하나님의 눈에는 피부색의 차이가 없고, 국경이 존재하지 않는다”며 “국제 교차 축복(결혼)이야말로 인종·문화·국경·종교의 벽을 뛰어넘어 하나님 아래 인류 한가족을 만드는 대역사”라고 말했다.
문 총재는 아울러 종교권과 정치권의 대결장이 되고 있는 스위스 제네바에 평화의 전당인 ‘제2의 천정궁’을 세우겠다고 밝혀 박수갈채를 받았다. 현재 200개가 넘는 국제기구가 상주하는 제네바에서는 세계 각국이 저마다 국가 이익을 위해 각축을 벌이고 있다. 문 총재는 지난 6월 경기 가평군 설악면에 세계 정치·종교계 지도자들이 모여 인류 영성 회복과 평화 문제를 논의하는 돔 형식의 평화건축물인 천정궁을 건립하고 입주식을 가진 바 있다.
이날 행사에는 곽정환 UPF 회장, 황선조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회장, 김민하 전 민주평통 수석부의장, 김봉호 전 국회부의장, 이철기 전 천도교 교령, 나용화 불교 임제종 종정, 김우석 전 건설교통부 장관, 조철권 전 노동부 장관, 허문도 전 통일원 장관, 김동욱·문정수·이상회 전 국회의원, 김봉태 선문대 총장 등이 참석했다.
고양=정성수 기자 hulk@segye.com |
감정을 억누르는 게 명상 아니다
감정을 억누르는 게 명상 아니다
<문화일보 2006/8/14/월/EZ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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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회에서 감정의 격랑이 일어날 때 우선 심호흡으로 그 파도를 가라앉히는 방법을 소개하였다. 감정의 격동이 심할 경우 우선적으로 그것을 가라앉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심호흡이나 명상은 분명 감정을 차분히 가라앉히는 데 도움을 준다. 그러나 감정이란 참으로 묘한 놈이어서 무조건 가라앉히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많은 명상법에서는 감정을 가라앉히는 것을 중시한다. 실제로 불교 명상에서는 사랑도 미움도 모두 일종의 집착으로 보기 때문에 그것들을 버리는 것이 마음 닦기의 출발점이라고 생각하고 있고, 요가 명상 또한 세속적인 감정들을 다 씻어내고 은은하면서도 달콤한 영적 황홀경을 추구하고 있다. 선도의 명상 또한 이런 저런 감정의 흔들림에서 벗어나야 신선의 경지에 들어갈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필자 또한 처음 명상할 때는 모든 감정으로부터 초연해지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다. 직접·간접 체험을 통해 감정을 자꾸만 가라앉히는 훈련을 하다보면 나중에 가서는 정말 감정에 초연해지는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명상과 아울러 심리치료도 같이 공부하면서 우리 마음의 구조를 좀 더 깊게 알고 난 뒤에는 감정에 대해 다른 견해를 가지게 되었다.
감정이란 실로 뿌리가 깊은 것이어서 훈련을 통해 표면적인 통제는 할 수 있지만 그 뿌리까지 뽑을 수는 없는 것이다. 본인 스스로는 감정에 초연한 경지에 이르렀다고 여길지도 모르지만 사실은 감정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감정을 차단시키는 기제를 발달시킨 것이다. 속에서는 분명 감정이 일어났지만 차단기제에 의해 자신이 그것을 자각하지 못할 따름이다. 사실 감정이란 상황에 맞게끔 적절히 표현될 때 완전연소가 되는 경우가 많다. 자각하지 못한 채 무조건 차단된 감정들은 불완전연소가 되어 무의식 깊은 곳에서 뿌연 침전물로 남는다. 그리하여 삶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방해물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격렬한 감정에 휩싸여 정신을 차리지 못하거나 혹은 자신의 감정을 자제하지 못해 타인에게 마구 상처를 주는 것은 사실 감정의 노예가 되어 있는 상태이다. 이것은 분명 바람직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무조건 감정을 가라앉히거나 초연해지려고만 하는 것 또한 본질적인 처방책이 될 수 없다. 그것은 감정의 방관자가 되는 길이다. 가장 바람직한 것은 자신의 감정을 잘 알아차리면서 그것을 상황에 따라 적절히 표현할 수 있는 경지이다. 그러할 때 비로소 감정의 주인이 될 수 있다.
바라보기 명상은 방관자의 길이 아니라 주인이 되는 길이다. 방관자의 길보다는 주인의 길이 훨씬 어렵다. 이를 위해서는 평소 꾸준한 수련이 필요하다. 가만히 눈을 감고 들숨 날숨의 흐름 속에서 자신의 마음 상태를 가만히 알아차려 보려고 한다.
특히 감정의 움직임에 대해서 민감하게 알아차리려고 한다. 마치 극장에서 영화를 관람하는 것처럼 자신의 마음 스크린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움직임들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려고 하라. 그러나 강 건너 불구경하듯이 방관자적인 관점에서 먼 거리를 두고 바라보려고 하지 마라. 그보다는 아버지가 아들을 바라보듯이 궁금해하는 마음과 포용하는 마음으로 가만히 바라보라. 평소 이렇게 꾸준히 수행하면 생활 속에서 감정이 일어날 때도 그렇게 또렷하게 알아차리면서도 적절히 잘 조율하면서 표현할 수 있게 된다.
/ 박석 (미래사회와종교성연구원 원장· 상명대중국어문학과 교수) |
[이 한권의 책] 천년왕국 수시아나에서 온 환웅
[이 한권의 책] 천년왕국 수시아나에서 온 환웅
<서울신문 2006/8/19/토/책13면><세계일보 2006/8/19/토/북월드15면>
정형진 지음 |
단군신화는 단순한 신화가 아니라, 서쪽 어디에선가 천손(天孫)의식을 지니고 이주한 환웅족과 만주지역 토착세력인 웅녀족이 만나서 단군조선을 열어가는 모습을 신화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최근의 연구들은 만주지역의 토착세력인 웅녀족은, 곰을 토템으로 하고 적봉을 중심으로 한 요하 일대 신석기시대 홍산문화를 주도했던 세력으로 보고 있다. 그렇다면 환웅족은 구체적으로 어디에서 온 사람들일까?
이 책은 환웅족이 어디에서 기원하여 이주하는지를 15년 이상을 준비한 자료를 바탕으로 치밀하게 논증하고 있다.
단군신화를 신화로만 보는 사람들에게 저자의 결론은 매우 놀라울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미 다른 책들을 통해서,(1)부여족은 현재의 터키지역인 프리기아에서 출발하여 천산을 넘어 이주한 ‘프리기아인’들이며(‘고깔모자를 쓴 단군’),(2)신라 김씨 왕족들은 고 아리안의 일파였던 사카족들이 천산 주변에서 실크로드를 달려 한반도로 이주한 ‘사카족’이라는 것을 밝힌 바 있다(‘실크로드를 달려온 신라 왕족’).
저자는 환웅족의 단서를 신라 승려인 자장에게 내린 신탁에서 찾는다.‘삼국유사’에는 자장이 문수보살에게서 받은 “너희(=신라) 국왕은 인도의 찰리 종족의 왕이며, 동이공공(東夷共工)의 족속과는 같지 않다.”는 신탁이 전하고 있다. 저자는 그 신탁에 나오는 신라 김씨 왕족의 뿌리인 ‘찰리 종족(=사카족)’에 대해서 추적한 책을 이미 발표했다. 이 책은 그 후속 편으로 자장의 신탁 속에 보이는 ‘공공족’이 누구인가를 추적 해명한 것이다.
이번 책에서 저자는 환웅족은, 수메르문명을 건설한 엘람인들이 점령하기 전에 이란 서남부 평원의 ‘수시아나’에서 천산을 넘어 이주한 사람들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들은 중원으로 들어와 농경을 바탕으로 한 앙소문화를 주도했으며, 이후에 북경지역과 난하지역을 통해 요동과 한반도로 이주했다. 중국의 사서에서 ‘공공족(共工族)’으로 불리는 이 사람들이 바로 ‘환웅족’이라는 것이다.
이 책에서는 연결고리를 푸는 열쇠로 고깔모자와 편두를 집요하게 추적한다. 예를 들어 고깔모자는, 문화사에서 흔히 ‘천년왕국 시기(BC5000-BC4000)’로 불리는 수시아나에서 처음 사용됐다. 저자의 주장에 따르면 수시아나의 종교엘리트들이 이란고원 지대에서 내려와 수메르문명을 일군 엘람인들을 피해서 동으로 천산을 넘어 중원으로 들어왔는데, 그들이 바로 환웅족이라고 한다.
결국 이 책을 통해 우리는 한민족의 무의식 속에 면면히 내려오는 천손 의식이나 하나님(환인)에 대한 생각은 바로 수시아나의 천년왕국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환웅족=공공족의 후예는 역사문헌에 숙신·조선·한 등으로 등장하고, 숙신계열의 또 다른 명칭이 바로 진(辰(眞))이다. 이들 공공족=환웅족과 요서지역의 웅녀족이 만나서 단군이 탄생하는 것이다. 단군이 세운 고조선은 사실 ‘단군숙신’이 되며 이것이 ‘대쥬신(=숙신)족’의 뿌리가 된다. 많은 도판 자료를 제시하고 있어 일반 독자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으나 그 논증은 매우 치밀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우실하 한국항공대 교양학부 교수 |
[한강을 걷다](5)세조의 거둥길과 만과봉
[한강을 걷다](5)세조의 거둥길과 만과봉
<경향신문 2006/8/19/토/K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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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추지 않는 물길을 따라 오대산을 나섰지만 숲이 잊혀지지 않았다. 결국 다시 산문에 들어서서 새벽 기운 잔뜩 머금은 채 곧추 선 전나무 숲을 걸었는가 하면 반석에 앉아 맑은 물 고인 곳마다 노니는 송사리들을 바라보다 선정(禪定)에 들었다. 말이 선정이지 내가 뭘 안다고 선 운운 하겠는가. 그저 동 터 오는 곳을 향해 눈을 감고 새벽바람 소리를 들었는가 하면 송사리들 노니는 모습을 떠올렸을 뿐인 것을…. 그러다 불현듯 잊은 것이라도 있는 양 서둘러 다다른 곳은 부도밭이었다. 그 근처에도 빼어난 기품을 지닌 전나무들이 숲을 이루었지만 그보다는 부도밭만이 내놓을 수 있는 고즈넉함에 매료되었던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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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보이는 가장 높은 봉우리가 오대산의 주봉인 높이 1,563m의 비로봉이다. 앞을 흐르는 내는 오대산을 빠져나와 강의 모양을 갖춰가는 오대천이다. |
거기에 더해 남호암골에서 내려오던 날, 서붓서붓 걷다보니 엉겁결에 지나치고 만 아쉬움이 가득 차 있었던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앞서 깨달음의 길을 간 사람들의 흔적이 주는 묘한 뉘앙스 때문이었을까. 과연, 찾는 이 드문 부도밭은 절집에서 새나 짐승이 와서 먹으라며 음식을 놓아두던 생대(生臺)와도 같이 여겨졌으니 마음이 푸근하기만 했다. 그곳 어디쯤 이슬을 툴툴 털어내고 바위에 걸터앉아 펼쳐 든 것은 조선 중기 월사 이정구, 상촌 신흠, 계곡 장유와 함께 월상계택(月象谿澤)으로 불리던 택당 이식(1584~1647)의 시였다.
지금의 원주시 흥업면 월송 3리 다둔리에 있었던 울암사(鬱巖寺)에 머물던 택당이 지인인 혜종(惠宗)선사가 오대산 선방으로 가는 것을 전송하며 지은 것이다. 그 중 첫째 수에는, “저잣거리 벗어나면 모두가 선의 세계(離俗皆禪境)/영악한 속셈 망각하는 그것이 불법(忘機是佛乘)”이라는 대목이 있기도 하려니와 두 번째 수에는 “강물줄기 협곡 지나 활짝 열리면서(江出峽門開)/굽이진 곳 백 길 높이 자리한 선방(禪房百尺외)/맑은 물 하얀 자갈 훤히 보이고(淸流分素礫)/오솔길 푸른 이끼 온통 뒤덮였네(細逕入蒼苔)./그저 세상 초월하면 그만인 것을(直可超三界)/뭣 때문에 오대산을 굳이 가려 하시는고(何須向五臺)”라는 대목이 있으니 선에 대한 간결한 인식도 출중하거니와 지인을 떠나보내는 아쉬움까지도 잘 드러난 시이다.
택당의 말에 따르면 속진이 묻어나는 세상에서 떠나면 그 어느 곳이라도 그곳이 곧 선방이요, 또 저자에 머문다 하더라도 세상살이에 물들지 않으면 그곳 또한 선방이라는 것 아닌가. 그것은 결국 선의 문제는 장소가 아니라 자신의 마음이라는 것과도 같은 말이다. 그럼에도 왜 나는 산을 떠나지 못하는가. 이미 나섰던 문을 구태여 되돌아와 다시 산을 배회하고 있으니 말이다. 하안거에 들었던 스님들마저 지난 백중날 모두 산문을 나서지 않았는가. 그러나 내가 산문을 나서기를 저어하는 것은 산문 밖이 안보다 더 혹독한 선방이라는 것을 이미 깨닫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선방이라고 해서 반드시 맑고 고요해야 하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앞서 택당이 시의 행간에서 말했듯이 선은 그 어디에서고 날을 세울 수 있어야 하며 스스로가 머무는 곳은 그 어디이든 선방이 되어야 하는 것이니까 말이다.
첫 회 원고를 쓰기 위해 서대 염불암에 올랐던 지난 달 15일, 산 속에 있었던 나는 나뭇잎에 세차게 부딪치는 빗소리와 나를 송두리째 날려버릴 듯 불어대던 바람 속에서 마냥 행복했다. 자연의 신비로움에 대한 경외가 생길 만치 말이다. 그러나 물길을 따라 산문 밖으로 나오는 순간 그 모든 황홀함은 삽시간에 사라지고 소스라치게 놀란 나는 두려움에 가득 차서 전율에 떨어야 했다. 새벽에는 멀쩡하던 오대천 물길은 광포한 폭군과도 같이 변했으며 물길을 따라 진부면으로 향하는 길은 물과 흙에 뒤덮여 사라지고 집은 흙더미에 파묻혀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떨어져 내린 산이 참혹한 모습으로 눈앞에 펼쳐져 있었는가 하면 내 눈앞에서 쏟아져 내리는 흙더미가 집을 덮치고, 순식간에 자동차를 삼켜 버리는 아수라장과도 같은 광경을 두 눈 멀쩡히 뜬 채 보고만 있어야 했다. 발을 동동 구르는 집 주인을 모른 체하며 굉음을 내고 흐르던 오대천은 둑이나 다리 근처를 넘실거리며 호시탐탐 넘어 올 태세였으며 나는 그 참혹하고 암담한 장면들 안에서 12시간을 꼼짝 없이 갇혀 있어야 했다.
그날의 악몽을 지울 길이 없다. 오늘처럼 맑고 고요히 흐르는 물이 남겨 놓은 상처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크고 굵은 것들이니까 말이다. 그 때문에 선뜻 산문 밖으로 나서기를 저어하고 있는 것이리라. 산문 밖은 그 어느 때보다 감당하기 쉽지 않은 가시밭의 풍경이 되고 말았으니까 말이다. 그렇지만 어쩌랴. 물은 흐르고 또 흐르는 것을…. 무거운 걸음을 옮겼다.
산문을 나서서 20리쯤, 오대산의 남쪽 끝자락인 월정 삼거리에 다다랐다. 옛사람들의 기문에는 이곳을 성오평(省烏坪)이라고 하고 있으며 야색창연(野色蒼然)이라는 표현을 하는가 하면 이 삼거리에 다다라서야 비로소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이나 중을 만날 수 있었다고 하는 것으로 봐서 사하촌이 크게 번성했던 곳으로 짐작할 뿐이다.
지금은 삼거리에 주유소며 슈퍼마켓이나 모텔과 같은 것들밖에 남아 있지 않아 섭섭했지만 그나마 식당 하나가 해묵은 모습을 하고 있어 반가웠다. 조선의 7대왕인 세조가 즉위 12년인 1466년 3월에 상원사로 거둥을 할 때에도 이곳에서 하루를 머물렀다. 그날은 윤3월16일이었으며 다음날인 17일에 세조는 상원사로 향했다. 삼거리에서 동쪽, 곧 횡계로 방향을 잡자마자 길 양쪽으로 소나무가 튼실하게 자란 작은 동산이 보이는데 그곳은 만과봉(萬科峯)이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세조가 상원사에 거둥한 17일 행궁(行宮)에 돌아와서 영의정인 희현당(希賢堂) 신숙주, 이조판서인 자순(子順) 한계희, 호조판서인 천은당(天隱堂) 노사신으로 하여금 문과 시장(文科試場)에 나아가서 참시(參試)하게 했다고 되어 있으니 과거를 봤다는 이야기가 된다.
일종의 알성시(謁聖試)와 같은 것이었으며 그 시험을 치른 장소가 바로 만과봉 일대이다. 이 지방에 전해오는 설화에 따르면 당시 시험을 보러 오는 사람들에게 흙 한 줌과 돌을 하나씩 가져오게 하여 쌓은 것이 지금의 만과봉과 같은 동산을 이루었고 그 시험에 참가한 유생들이 모두 만 명에 이를 정도로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구체적인 내용은 기록에 남아 있지 않고 설화로 전할 뿐이지만 ‘조선왕조실록’의 당시 3월18일 기록을 보면 문과에 진지(陳趾) 등 18명을 뽑고, 무과에 이길선(李吉善) 등 37명을 뽑았다고 되어 있으니 과거를 본 것은 분명하며 급제자를 뽑은 것 또한 엄연한 사실이다.
그러나 의문은 세조가 왜 이토록 깊은 산골에서 불현듯 알성시를 치렀을까 하는 것이다. 설화에 따르면 왕이 피고름을 흘릴 정도로 고통스럽게 시달리던 피부병이 상원사 거둥길에 씻은 듯 나았기 때문이라고 전한다. 상원사 들머리에 있는 관대걸이에 관복을 걸어놓고 계류에서 목욕을 하던 중 등을 씻어 준 문수동자에 의해 그의 고질적인 피부병이 나아 그 기쁨으로 유생들에게 시혜를 베풀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좀더 면밀히 살펴보면 세조가 획득한 정권은 쿠데타에 의한 것이었으며 그로 인한 정권의 선명성이나 정통성은 없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더구나 조카인 단종을 폐위시키고 사육신을 참살한 그의 도덕성은 백성들의 지탄을 받아 마땅한 것이었다. 결국 그가 택한 것은 민심의 동요를 수습하는 것이었으며 또 다른 절대자에게 자신을 의탁해 왕위를 찬탈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피 비린내 나는 싸움으로 인한 고통을 다스리는 것이었다. 그가 택한 절대자는 부처였으며 재위 기간 중에 이룬 호불(好佛)정책이 이를 뒷받침해 준다.
그런가하면 그는 역대 왕들 중 유난히 거둥을 자주 했으며 그때마다 백성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노력한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 있다. 금강산을 떠나 동해안의 명파리와 간성을 거쳐 낙산사에 머문 세조는 상원사에 거둥하기 전인 3월14일 강릉의 연곡에 행궁을 차렸다. 그리고는 농요를 잘 부르는 사람들을 모아서 노래 경연대회를 열었다. 그 중 양양의 관노인 동구리(同仇里)란 자가 가장 노래를 잘했다고 한다. 그에게는 상으로 아침저녁으로 밥을 먹이며 악공(樂工)의 예(例)로 왕의 일행을 따르게 하고, 또 유의(유衣) 1령(領)을 내려 주었다고 하니 이는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특혜였다. 노비가 양인이 된 것이나 마찬가지이니까 말이다.
위의 기록에서 궁금한 것은 왕이 왜 농요를 들었을까 하는 것이다. 또 가장 노래를 잘한 사람으로 뽑힌 인물이 하필이면 가장 천한 신분인 노비였을까. 물론 그가 노래를 잘 했다는 명분은 있었지만 노비의 신분으로 왕의 행렬에 동참했다는 것은 조용한 고을에서는 큰 사건이었을 것이며 백성들이 입방아를 찧기에 충분한 얘깃거리였지 않았겠는가. 더구나 그것은 왕에게 부정적인 면보다는 긍정적인 이미지를 가져다주기에 충분했던 것일 테니 말이다.
세조는 자신이 가진 무한권력을 백성들에게 베풀며 소위 말하는 이미지 변신을 시도했던 것이다. 그것을 알았는지 몰랐는지 설화에는 그런 왕이 치르는 과거에는 참가하지 않겠다는 올곧은 선비들도 있었다지만 많은 이들이 앞 다투어 과거에 응시를 한 것은 또 무슨 까닭인가. 현실 앞에 무너져 버리고 만 명분의 씁쓸함처럼 아직도 봉긋하게 솟아 있는 만과봉을 뒤로 하고 돌아서는데 찌푸린 하늘에서 기어코 빗방울이 떨어졌다.
〈이지누〉
| [한강을 걷다]진부 가는길 봉긋 솟은 2개의 만과봉 |
조선왕조실록의 ‘세조실록’ 11년, 1465년 2월20일에 상원사가 무사히 중창된 것을 축하하기 위해 왕이 선물을 내렸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그 중창불사를 이끈 인물은 신미(信眉, 1405~1480)라고 한다. 신미의 속명은 김수성(金守省)이었으며 집현전 학사를 지내기도 했으나 중이 되어 후에 혜각존자(慧覺尊者)라는 법호를 받았다. 그는 또 ‘상원사중창기’를 쓴 괴애(乖崖) 김수온의 친형이기도 하다. 김수온은 불교 집안으로 어머니가 비구니로 불법에 귀의했으며 김수온 또한 ‘문종실록’ 즉위년, 곧 1450년 4월11일에 남은 기록으로 보면 “‘능엄경’이 ‘중용’보다 낫다”라는 말을 서슴없이 할 정도였던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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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만과봉 |
신미는 세종 당시부터 속리산 복천암에 머물며 왕의 총애를 받았다. 세종이 병환이 깊었던 1450년 1월26일, 와중에도 왕이 불사를 일으켜 신미를 침실에까지 맞아들여 법석을 베풀었으며 높은 예절로 대우를 했다고 하며 총승(寵僧)으로 불렸으니 국사(國師)의 예우를 받았음직하다. 신미는 상원사 중창불사를 마무리하여 세조가 상원사에 거둥할 당시에도 상원사에 머물렀으며 세조 13년인 1467년에는 강릉부(江陵府) 산산제언(蒜山堤堰)을 하사받기도 했다.
또한 세조가 자신의 업을 씻기 위해 설치한 간경도감(刊經都監)의 일을 도맡아 ‘석보상절’의 편집을 지휘했으며 ‘원각경’을 비롯해 ‘선종영가집’, ‘수심결’과 같은 28종의 불교경전과 몽산 등 고승법어를 한글로 직접 번역하는 업적을 남기기도 했으니 세조의 상원사 거둥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 인물로 봐야 할 것이다.
만과봉은 모두 둘이며 산문으로부터 물길을 따라 진부면 소재지로 향하는 도중에 있다. 맨 먼저 만나는 삼거리는 주문진으로 넘어가는 진고개로 향하는 병안삼거리이다. 그곳을 지나 주유소가 있는 작은 삼거리가 월정삼거리이다. 삼거리에서 왼쪽, 456번 지방도를 따라가면 대관령으로 향하는 횡계이며 오른쪽이 진부면 소재로 가는 길이다. 오대천 물길은 진부면 소재지로 이어지며 만과봉은 횡계 쪽으로 방향을 틀자마자 오른쪽 밭 가운데에 있는 것이 작은 만과봉, 왼쪽의 제법 큰 산처럼 보이는 것이 큰 만과봉이다. 작은 만과봉은 봉긋 솟은 젖무덤 위에 소나무가 보기 좋게 자리 잡고 있어서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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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구니의 깨달음 그린 연극 '목탁구멍..'
비구니의 깨달음 그린 연극 '목탁구멍..'
<연합뉴스 2006/8/19/토>
23일 여배우들 사찰에서 삭발식 거행
(서울=연합뉴스) 이준삼 기자 = 비구의 깨달음 과정을 그린 극단 천지인의 '그것은 목탁구멍 속의 작은 어둠이었습니다'(이만희 창작, 강영걸 연출)가 비구니 버전으로 다시 무대에 오른다.
'그것은 목탁구멍‥'은 속세에서 참담한 경험을 하고 출가한 한 비구가 깨달음을 얻기까지의 과정을 담은 작품으로 1990년 초연돼 호평을 받으며 삼성문예상, 서울연극제 희곡상, 남자연기상, 특별상, 백상예술대상 연출상, 희곡상, 인기배우상 등을 석권했다.
9월15일부터 제일화재 세실극장에서 공연되는 이번 비구니 버전에서는 깡패들에게 집단 성폭행을 당하고 출가한 도법스님이 불상을 조각해가는 과정에서 내면의 분노와 증오심을 이겨내고 마침내 진정한 깨달음을 얻기까지의 과정을 담아냈다.
특히 이번 연극에 출연하는 연운경, 이영란, 이인희, 윤순옥, 손성림 등 다섯 명의 여배우들이 공연을 위해 실제 삭발한다. 삭발식은 23일 오후 3시 광진구 영화사에서 거행되며 집도는 월주스님이 맡았다.
11월12일까지. 화.수.목 7시30분, 금.토 4시30분ㆍ7시30분, 일ㆍ공휴일 4시30분(10월3-7일 4시30분 1회 공연). 일반 3만원, 학생 2만원, 청소년 1만5천원. ☎02-3443-1004,1010.
jslee@yna.co.kr |
녹차, 그 달콤 쌉싸름한 유혹…
녹차, 그 달콤 쌉싸름한 유혹…
<한국경제 2006/8/19/토/A15면>
녹차시장이 급성장하고 있다.
페트병이나 캔으로 생산되는 녹차시장은 올해 작년보다 60% 이상 늘어난 720억원에 이를 것으로 업계에서는 보고 있다.
티백이나 직접 우려 먹을 수 있는 찻잎 시장은 2400억원에 육박한다.
이 시장도 해마다 10% 정도씩 성장하고 있다.
전체 차(茶) 시장이 3000억원을 훌쩍 넘어선 것. 이처럼 차 시장이 성장하면서 '다례(茶禮)'를 배우려는 사람들도 늘고 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다도(茶道)'는 일본의 차 문화를 일컫는 말이다.
아모레퍼시픽 녹차연구팀의 김영경 책임연구원은 "요즘은 대학에서 녹차 관련 강의를 와달라고 할 정도로 차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높아졌다"고 말한다.
○한국의 전통 차 문화
한국의 차 문화는 고려시대 때 녹차를 끼니처럼 자주 먹어 '다반사(茶飯事)'라는 말까지 생길 정도로 발달했다. 828년 통일신라 흥덕왕 때부터 차를 재배하기 시작해 사찰을 중심으로 차 문화가 퍼져나갔다. 하지만 조선시대에 들어오면서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으로 차나무를 키우던 사찰들이 없어지기 시작하면서 차 문화 또한 사라져갔다. 고려시대 때는 제사를 지낼 때 차를 올려서 '차례(茶禮)'라는 말도 생겼지만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술이 차의 자리를 대신했다. 차 전문가들이 조선시대부터 일제 해방까지를 한국 차 문화의 공백기라고 부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1945년 광복을 맞이하면서 미국의 영향으로 한국의 차 문화는 커피가 그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했다. 1970년대 후반 몇몇 기업이 본격적으로 차나무를 상업화하기 시작했고 1980년대 초 티백 형태의 녹차가 나왔다. 현재 한국의 연간 녹차 생산량은 대략 1400t 정도. 세계 시장에서 한국이 차 생산국임을 아는 나라가 거의 없을 정도로 미미한 수준이다. 하지만 홍차가 세계시장의 70%를 차지하지만 유독 한국과 일본에서는 녹차가 대부분을 차지한다는 것이 특이한 점이다.
○차를 분류하는 방법
차나무는 잎사귀의 크기로 대엽종과 소엽종으로 나뉜다. 대엽종은 따뜻한 지방에서 많이 재배하는 품종으로 인도 아삼지방과 스리랑카가 주산지다. 소엽종은 중국 일본 한국에서 주로 생산된다. 대엽종은 차 잎이 크고 두꺼우며 떫은 맛을 내는 성분이 많아 홍차나 우롱차 같은 발효차를 만들기에 적합하다. 한국에서 자라는 소엽종 차나무의 대부분은 녹차의 재료로 쓰인다.
찻잎의 가공방법에 따라서도 종류는 달라진다. 일반적으로 한국에서는 증제차와 덖음차로 구분한다. 증제차는 말 그대로 증기를 가해서 잎을 찌는 과정을 거친 것이다. 덖음차는 기름을 붓지 않고 솥에 찻잎을 넣고 볶은 것을 말한다. '덖다'라는 단어는 순한국말로 '물기가 조금 있는 고기나 약재,곡식 따위를 물을 더하지 않고 타지 않을 정도로 볶아서 익히다'를 뜻한다. 증제차는 녹색이 선명하고 풀 냄새가 더 강하게 난다. 덖음차는 구수한 맛이 있어 한국 사람의 입맛에 잘 맞는다.
수확하는 시기에 따라서도 차는 구별 된다. 차나무는 겨울 동안 양분을 빨아들여 4월5일 전후에 잎을 낸다. 4월 말부터 5월 중순까지 나온 것을 첫물차,5월 말에서 6월 중순에 나온 것은 두물차,7월에 나온 것은 세물차라고 한다. 순서대로 1번차,2번차,3번차라고 부를 때도 있다. 일찍 나온 차일수록 맛이 좋다.
24절기 중 곡우인 4월20일 전에 나온 잎으로 만든 차는 우전차라고 한다. 떫은 맛이 덜하면서도 감칠맛이 강해 가장 고급으로 친다. 앞서 나온 잎일수록 크기가 작기 때문에 우전차용으로 쓰이는 잎 또한 크기가 새끼 손톱 정도 크기다. 시중에 간혹 상대적으로 크기가 큰 세물차용 찻잎을 가짜 우전차로 파는 경우가 있다. 이 때는 찻잎을 물에 불려보면 우전차용 잎인지 아니면 세물차용 잎을 잘게 잘라서 속여 파는 것인지 쉽게 알 수 있다.
○녹차 안에 들어있는 성분
차 맛에는 쓴맛,단맛,신맛,짠맛,감칠맛의 기본적인 다섯 가지 맛에 떫은 맛이 더해진다. 여기서 떫은 맛을 내는 성분을 '카테킨'이라고 한다. 보통 녹차 안에 있는 폴리페놀이라는 성분이 몸에 좋다고 하는데 '카테킨'은 녹차의 주요 폴리페놀 성분이다.
봄에 딴 찻잎일수록 가격을 더 쳐주는 것은 감칠맛 때문이다. 감칠맛은 먹을수록 입맛을 더 당기는 것을 말하는데 이른 봄에 나는 찻잎일수록 강하다. 찻잎 안에 있는 데아닌이라는 아미노산이 감칠맛을 나게 하는데 차의 떫은 맛을 완화시키는 작용도 한다. 어느 시기에 나는 찻잎이든 카테킨이 들어 있는 양은 비슷하지만 감칠맛이 얼만큼 강하냐에 따라 가격이 달라진다.녹차에는 카페인도 들어있다. 커피와 화학적으로 같지만 양은 커피의 3분의 1 정도다. 하지만 녹차 속의 데아닌이 카페인의 작용을 억누르고,카테킨이 카페인의 흡수를 방해하기 때문에 걱정할 정도는 아니다.
글=박신영·사진=허문찬 기자 nyusos@hankyung.com
/도움말 김영경 아모레퍼시픽 녹차연구팀 책임연구원
창공을 나는 독수리처럼 시대 앞질러 간 개척자
창공을 나는 독수리처럼 시대 앞질러 간 개척자
<한겨레 2006/8/19/토/사람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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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신이의 발자취] 한국 기독교의 큰 별 강원룡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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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에는 정한 때가 있으며, 영원자가 하시는 일의 처음과 끝을 사람은 알 수 없기 때문에,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해야 한다고 지혜자의 말씀을 들은 바 있습니다. 누구나 한번 가는 인생인 줄 알지만, 강원룡 목사님의 홀연한 부음을 듣고 우리가 큰 충격과 슬픔을 느끼는 것은 강 목사님이 종교계와 사회 어른으로서 채우시던 자리가 그만큼 컸던 것을 새삼 깨닫기 때문입니다.
존경하는 강 목사님, 목사님이 우리에게 남기신 이미지는 창조적 개척자로서 영원한 청년상이었습니다. 주어진 환경에 운명처럼 주저앉거나 낙담하지 않고, 새로움을 향한 창조적 도전 정신으로 목사님은 평생을 사셨습니다.
수많은 양심적 청년 키워낸 경동교회 초석 놓고 ‘크리스찬아카데미 운동’ 통해 시대정신 일깨워 ‘바다 같은(여해)’ 목자로 모두 기억할 것입니다
1917년 함경북도 산골마을에서 태어나신 후, 18살 때 간도 용정 은진중학교에서 은사 김재준 목사를 만나 삶의 방향을 재정립하시고, 90평생 험난한 한국 현대사를 때론 강을 거슬러 오르는 잉어처럼, 때론 창공을 나는 흰독수리처럼, 시대를 남보다 늘 30년쯤 앞질러 달려가셨습니다. 목사님은 기독교 신앙을 믿고 증언하시되 교리 체계로나 학문 이론으로써가 아니라, 항상 삶 한복판에서 생명의 종교로써 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1945년 남하하신 이후에도, ‘선한 사마리아 사람 형제단’ 운동을 중심으로 해 오늘의 경동교회 초석을 놓기도 하셨지요. 경동교회는 교인수 규모로서는 대형교회에 비해 작은 규모지만, 경동교회의 말씀강단에서 설교하신 목사님의 참신한 설교를 듣고 방황하던 이땅의 수많은 청년들이 신앙을 얻고, 훗날 우리 사회 각 분야 큰 동량으로 봉사할 수 있었습니다.
목사님이 보여주신 종교지도자로서 또다른 뚜렷한 이미지는, 한 손엔 신문을 들고 다른 한 손엔 성경을 들고, 복음진리를 현실 상황 속에서 되살려내는 빵 굽는 사람이었습니다. 화덕에서 막 구워낸 따끈한 빵처럼, 주부가 솥에서 밥그릇에 막 담아낸 김나는 밥처럼, 그렇게 ‘생명의 말씀’을 목마르고 진리에 배고팠던 이땅의 청년들에게 먹이신 큰 목자였습니다. 다시는 경동강단에서 목사님의 명설교를 듣지 못할 것을 생각하니 그리움과 서운함이 더욱 맘에 가득합니다.
종교진리와 삶의 현실을 접촉시켜 ‘현실생명’을 살려내려는 선각자로서 목사님의 통찰은, 1965년 한국 사회사에서 최초로 한국크리스챤아카데미를 창설하시고, 그 운동에 온 심혈을 기울이셨습니다. 대화단절과 적대관계로 갈등만이 점증하던 한국사회 격동의 40년간, 목사님이 이끌어 가셨던 ‘한국크리스챤아카데미’ 운동은 기적과도 같은 결실을 한국 사회에 쏟아내셨습니다. 정치 경제 노동 매스컴 예술문화 여성 환경 종교 등 다루지 않는 주제가 없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오늘의 한국 사회를 이끌고 나가는 수많은 지도자들이 대화를 통해 시야를 넓히고, 생각을 창발적으로 추스르며, 서로 배우며 다른 생각을 경청하는 훈련을 받았습니다. 목사님은 특정 종파 목사가 아니라 진정한 의미에서의 ‘목자’ 사명을 다하셨습니다.
존경하는 강 목사님, 목사님의 사부이신 김재준 목사께서 여해(如海)라는 아호를 지어주셨다고 들었습니다. 맑은 강물만이 아니라 오염된 강물도 마다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바다처럼, 포용력과 영원한 생명력을 지닌 “바다와 같은 목자가 되라”는 기원이자 예언이었겠지요. 목사님의 가장 지속적인 두가지 관심은 종교간의 대화협력 증진과 생태환경 회복을 위한 생명문화 창달 운동이었습니다.
스승의 예언대로 목사님은 90평생 살아오신 동안 최선을 다했고, 달려갈 길을 다 달려갔고, 후회 없는 삶을 사셨다고 생각하면서 우리는 슬픔을 이기고 목사님을 우리에게 보내 주셨던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남기신 ‘평화포럼’의 과제, 곧 남북 7000만 겨레가 전쟁의 비극을 슬기롭게 극복하고 대화협력을 증진시켜 정의와 자유가 입맞추는 민주 평화통일의 대동세계를 이뤄내는 일에 남은 우리가 최선을 다할 것 입니다.
여해 강원룡 목사님, 이제 제한된 시공 안에서의 모든 염려 놓으시고, 그렇게 평생 믿고 가르치셨던 ‘영원한 사랑의 신비자’ 품 안에서 안식하소서.
김경재·한신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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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손가락 하나의 사랑 1' 외
[신간] '손가락 하나의 사랑 1' 외
<연합뉴스 2006/8/18/금>
(서울=연합뉴스) 이준삼 기자 = ▲손가락 하나의 사랑 1 = 도미니크 글로슈 지음. 서민원 옮김. 행복의 문을 여는 열쇠는 항상 우리 안에 있다는 점을 깨우쳐주는 맑은 언어를 담은 잠언집같은 책. 사고를 당해 불구가 된 저자가 손가락 하나에 의지해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며 생각의 편린을 묶어낸 것이다.
글로슈는 22살 되던 해에 자동차 사고로 불구가 된 뒤로 암흑과 같은 어둠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낸다. 수차례의 수술과 5년 간의 재활치료. 그는 여러 번 자살까지 시도했다.
그러나 '지금보다 나아지겠지'하는 긍정적 생각들이 조금씩 지은이의 생활을 바꿔 놓았다. 그리고 끊임없이 글을 썼다.
"손가락 하나. 나는 손가락 하나로 이렇게 또 다른 세상으로 빠져나왔다…행복의 문은 그대의 내부로부터 열린다는 것을, 복잡한 열쇠나 그것을 열려고 미친 듯 몸부림쳐대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그대에게 보여주는 것은 어떨까."(머릿말 중)
글로슈는 현재 프랑스 루앙상과대학을 졸업하고 시청각과 정보통신학 박사논문준비과정을 마쳤다. 그의 책들은 15개 언어로 번역돼 300만부 이상이 팔려나갔다.
동문선. 240쪽. 7천500원.
▲하나님, 도대체 언제입니까? = 조이스 마이어 지음. 최종훈 옮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끝까지 잃지 않는 방법들을 담았다. 저자는 1980년 이래 전임 사역자로 일하며 '비범한 삶을 사는 비결', '단순한 기도가 주는 기쁨' 등 영감을 담은 책들을 펴내고 있다.
엔크리스토. 87쪽. 6천원.
▲성경으로 본 재미있는 한의학 = 김양규 지음. 실제 한의사로 일하는 저자가 철저히 성경적 관점에서 한의학을 조명한 책. 전2권.
프라미스 키퍼스. 각권 304쪽. 각권 1만2천원.
[책]하느님은 왜 악을 허용했을까
[책]하느님은 왜 악을 허용했을까
<세계일보 2006/8/19/토/북월드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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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기독교인이 기독교에 대해 갖는 원천적인 궁금증의 하나는 전지전능하다는 하느님이 왜 악(사탄)을 허용했느냐 하는 것이다. 유대인은 ‘신이 약속한 땅’인 가나안을 빼앗으려는 자들을 모두 ‘적’이자 ‘악의 세력’으로 규정하고 끊임없이 갈등·대립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국은 독일을 비롯한 동맹국을 ‘추축국’으로 규정했다. 이후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옛 소련을, 조지 W 부시 현 대통령은 사담 후세인의 이라크 정권·북한의 김정일 정권·이란을 ‘악의 축’으로 명명했다.
이렇듯 역사상 인간은 사회체제에서 벗어나는 ‘타자’를 악으로 규정해왔다. 그럼으로써 자연 자신은 ‘선’이 된다. 그러나 숱한 문학과 영화, 종교에 등장하는 악의 존재는 인간과 악이 공존한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준다.
미국 프린스턴대 종교학과 교수인 저자는 ‘사탄의 탄생’을 통해 구약성서에서 적대자이며 하느님의 여러 측근 중 가까이하기 어려운 일원인 사탄이 어떻게 선과 악의 우주적 투쟁의 일환으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한 마왕이 되었는지, 그리고 예수의 추종자들이 왜 사탄을 이교도·이단자 등 자신들이 적대하는 인간들과 동일시하게 되었는지를 종교사와 사회사를 관통해 설명하고 있다.
조정진 기자
[책과 삶]재미있는 기독교 역사
[책과 삶]재미있는 기독교 역사
<경향신문 2006/8/19/토/K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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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의 역사…크리스토퍼 드 하멜/미메시스
▲AD 33…콜린 듀리에즈/이른아침
▲사탄의 탄생…일레인 페이절스/루비박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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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쯤 들여다볼 만한 기독교 관련 책 3권이 동시에 출간됐다.
먼저 ‘성書(서)의 역사’는 성서를 신학적·복음적 관점에서가 아니라 책으로서 어떻게 변화·발전돼왔는지를 상세하게 밝혀낸다.
‘인류 최고의 베스트셀러’라는 성서의 저술과 번역, 출판의 역사를 훑는 것은 곧 2000년 서구 문명의 일단을 살펴보는 흥미로운 일이기도 하다. 책은 히에로니무스가 히브리어·그리스어 성서를 라틴어로 번역한 4세기 후반부터 20세기 현대판 성서까지 다룬다. 물론 성서는 히에로니무스 훨씬 이전부터 전해져왔지만 그가 확실하게 신원이 파악된 인물인데다, 그의 번역본은 이후 1,000여년동안 큰 수정없이 사용됐기 때문에 첫 머리를 장식한다. 고문헌 전문가인 저자는 시대나 종교적·문화적·사회적 상황, 목적 등에 따라 성서란 책이 얼마나 변화무쌍하게 진화를 거듭하는지 풍성한 도판을 곁들여 보여준다. 중세 초기엔 손으로는 들 수 없을 정도로 대형 판본이 나오기도 하고, 13세기엔 휴대용 성서가 등장한다.
또 컬러 그림을 곁들인 채색필사본 성경, 즉 ‘가장 아름다운 책’이 등장한 것도 이 시기다. 이어 구텐베르크의 활판 인쇄술, 복음 전도사들이 전세계로 퍼지면서 성서는 다양한 번역본이 나타난다. 컬러 도판과 어우러진 전문가의 꼼꼼한 글이 기독교인이 아닐지라도 눈길을 잡는 책이다. 이종인 옮김.
‘AD 33’이란 제목을 보고 무엇을 떠올렸는가. 저자는 서기 33년을 ‘세계사의 판도를 바꿔놓은 해’로 묘사한다. 바로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함께 이뤄졌기 때문이다. 책은 전세계 역사의 흐름을 바꾼 이 해에 로마와 예루살렘, 갈릴리를 비롯해 세계의 모습을 종횡무진 그려낸다. 당시 세계 인구가 2억5천만명 정도이고, 인구 절반이 중국·로마제국 등에 살았으며, ‘카마수트라’가 집필되기 시작한 해이기도 하다. 하지만 책의 중심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 그를 둘러싼 숱한 의문점들에 대한 답을 찾는 일이다. 김소정 옮김.
‘사탄의 탄생’은 제목처럼 사탄, 즉 악의 기원을 사회학적 시각에서 살펴본다. 특히 초기 기독교사를 중심으로 지금까지 흔히 사탄으로 불리는 인물들이 어떻게 사탄화되는지 그 과정을 세밀하게 살핀다. 프린스턴대 종교학 교수인 저자는 그것을 통해 현대인의 사탄의 ‘악용’을 경고하기도 한다. 권영주 옮김.
〈도재기기자 jaekee@kyunghyang.com〉 |
[조용헌 살롱] 姜元龍 목사
[조용헌 살롱] 姜元龍 목사
<조선일보 2006/8/21/월/오피니언A30면>
▲ 조용헌 | |
이번에 작고한 강원용(姜元龍) 목사는 1998년에 출간한 자서전 ‘빈들에서’(전3권)에서 해방 정국의 정치지도자였던 몽양 여운형을 놓고 “당시 유명인사들 가운데 신언서판(身言書判)이 가장 뛰어났던 남자”로 기록하고 있다.
몽양도 인물이 좋았다고 하지만, 강 목사 자신도 몽양 못지않게 신언서판이 훤한 인물이었다. 관상을 연구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강 목사의 관상이 사례연구 대상이었다. 전형적인 ‘대인(大人)의 상(相)’에 해당되었기 때문이다.
어떤 부분이 대인의 얼굴에 해당하는가? 우선 강 목사의 얼굴을 처음 보았을 때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은 눈썹이 눈두덩 위로 높게 붙어 있으면서, 양 눈썹 사이의 미간(眉間)이 넓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이를 관상 용어로는 ‘미고거액’(眉高居額)이라고 부른다. 이렇게 되면 이상과 포부가 크고 높고, 멀리 내다보는 장기적인 안목을 지닌다. 그래서 지도자 얼굴 중에 이런 눈썹이 많다.
그 다음으로는 눈과 코다. 강 목사의 눈은 맑고 선한 눈이었다.
그 사람의 성격이 사나운가, 착한가는 눈에 나타난다. 그러면서도 눈이 길다. 눈이 길다는 것은 통찰력과 관련된다. 코는 매부리코[鷹鼻]에 가깝다. 매는 뭇 새의 왕이다. ‘중조지왕’(衆鳥之王)인 것이다. 매는 고공에서 먹이를 향해 쏜살같이 내리꽂힌다. 목표물을 정확하게 조준하고 장악하는 능력이 뛰어나다. 그래서 매부리코는 조직을 장악하는 힘이 있다. 선한 눈과 정확한 매부리코가 조합된 얼굴을 ‘안선구비’(眼善鉤鼻)라고 한다. 구(鉤)는 갈고리라는 뜻이다.
대인의 관상을 지녔던 강원용은 크리스찬아카데미라는 저수지를 파는 데 힘을 쏟았다. 이 저수지에서 세 군데의 못자리판으로 물이 공급되었다. 그 첫 번째는 여성지도자를 키우는 못자리판이었다. 박영숙 한국여성재단 이사장, 한명숙 국무총리, 신인령 전 이화여대 총장, 이계경 한나라당 의원을 비롯한 수많은 인물을 양성하였다. 두 번째는 민주화라는 못자리판이고, 세 번째는 종교 간 화합이라는 못자리판이었다. 다종교 사회인 한국이 이만큼의 종교화합을 이룬 데에는 고인의 힘이 컸다.
보통 사람은 1~2권의 소설 분량을 살고 가고, 혹은 5~10여 권의 분량을 살다 가지만, 선생께서는 30여 권의 분량을 살다 가셨다.
사라진 기적의 성모 마리아 성화
사라진 기적의 성모 마리아 성화
<연합뉴스 2006/8/20/일>
(부다페스트=연합뉴스) 권혁창 특파원 = 그리스 남부에서 700년 된 성모 마리아 성화(聖畵)가 감쪽같이 사라져 경찰이 수사에 나섰다고 현지 언론들이 20일 보도했다.
비잔틴 양식의 이 성화는 그리스 남부 펠로폰네소스의 엘레나 수도원이 소장하고 있던 높이 50㎝, 폭 40㎝의 성모 마리아 초상화로, 암시장에서 200만 유로(한화 24억여원)를 호가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무엇보다 이 성화는 지난 19세기 터키 오토만 제국의 지배 하에 있던 그리스의 해방을 상징하고 있으며, 이후에도 수많은 기적을 일으켰다고 전해지는 등 그리스 정교에서는 최고의 가치를 지닌 보물로 평가돼 왔다.
성화는 당시 수도원을 파괴하기 위해 몰려온 터키 군사들의 눈을 멀게 해 성화와 수도원을 지켰다는 얘기도 전설처럼 전해오고 있다.
근래 들어서는 성화가 중환자를 치료하고 험준한 이 지역의 도로를 지나는 자동차들이 사고를 피할 수 있게 해준다고 이 지역민들은 믿고 있다.
수도원은 평상시에는 관람객들에게 모조품을 전시해왔으나 지난 주의 경우 그리스 정교의 성모 마리아 탄생 기념 주간을 맞아 진품을 전시하다가 변을 당했다.
그리스 경찰은 수도원 소속 수녀들의 신고를 받은 뒤 수도원으로 향하는 모든 도로를 차단하고 인근 지역의 터미널과 항구 등을 샅샅이 뒤지는 한편 주변에서 열리는 각종 행사도 모두 취소시켰지만 아직 도둑의 흔적조차 찾지 못하고 있다.
경찰은 절도범들이 30m 가량의 로프를 이용해 수도원 뒤편 절벽으로부터 창문을 통해 내부로 침입, 액자로부터 성화를 잘라내 도주한 것으로 보고 전문적인 성화 절도 용의자들을 상대로 수사를 벌이고 있다.
지역 주민들은 성화 도난으로 성화의 기적과 효능이 사라질 것을 두려워하고 있지만 동시에 성화의 초자연적 힘이 절도범들에게 비극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믿는 사람도 많다고 그리스 신문들은 전했다.
교황, '과도한 일은 정신에 나쁘다'
교황, '과도한 일은 정신에 나쁘다'
<연합뉴스 2006/8/21/월>
(카스텔 간돌포(이탈리아) AP=연합뉴스) 과도한 일은 정신에 나쁘다고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말했다. 20일 교황의 여름 휴가지에서 관광객들에게 한 말이다.
교황은 12세기의 성 베르나르도가 저서에서 고위성직자들에게 충고하는 가운데 "과도한 활동의 위험을 경계하라"며 "어떤 일이든, '가슴을 둔감하게' 하고 '정신의 고통과 지력의 손실'을 초래하는 일이 종종 있기 때문"이라는 대목을 인용했다.
79세인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이 말은 모든 종류의 일에 해당하며, 교회 성직자들에게도 해당한다"고 말했다.
교황은 지난달 이탈리아 알프스에서 휴가를 가진 데 이어 8월 나머지와 9월 들어서도 상당기간 로마 동남쪽 에 있는 호반 휴양지 카스텔 간돌포에서 지낼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