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22:2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교회 안에는 크게 나누어 두 가지 믿음이 있다 하나는 하나님과 원수되게 하는 육신을 좇는 육시적인 믿음이다. 또 하나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영을 좇는 영적인 믿음이다.
이 두 가지 면이 믿는 사람의 모든 사람 속에도 다 이러한 양면이 있다. 그러므로 진리를 잘 못 알고 있으면 내 마음의 향방이 하늘을 향해 나아 갈 수도 있고 아래로 내려 갈 수도 있다. 그러므로 그 결과는 하나는 영벌이요 하나는 영생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그러므로 거룩해 지는 영적 원리를 적용하고 살지 않는 율법적인 마인드를 가진 삶은 잘 못된 것이다. 이것을 순종하지 않고 사는 삶은 불의로 하나님의 진로가 머리위에 있다는 것으로 말하고 있다 (요3:36)
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선을 알고도 행치 않으면 죄가 발동되어 함정과 덫에 빠지게 된다. 복음 안에서의 죄는 행동 차원의 죄가 아니라 진리요 길이요 생명을 오해하고 잘 못 믿는 것이 죄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을 좇지 않는 소극적인 자세가 이미 죄 중에 있는 상태다 죄가 도사리고 있다가 어떤 계기가 되면 발동되는 것이다. 죄의 소원을 다스리는 권세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이것이 죄가 되는 것은 복음 안에 있다 하면서 불의하여 십자가를 헛되이 한 것이 죄가 되는 것이다.
영어 성경의 주기도문에 죄를 wrong(잘못). sin(죄) debt(빚). trespass, (칩입하다, 울타리를 넘어 들어가다) 라 말하고 있는 것을 보면 죄의 개념이 더욱 분명하게 보인다.
율법은 행동차원에서 가인이 행한 것을 죄라한다면 복음은 마음으로 시기하고 마워하는 차원이 벌써 악이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 생명 곧 영생으로 살아난 내 이웃이나 형제를 선대하지 않고 대적하거나 공격하는 것은 적극적으로 율법이나 강령을 범한 것이며 그리스도를 욕되게 하고 핍박한 것이다. 육체의 자녀가 약속의 자녀를 핍박하고 영혼에 상처를 입히고 죽이는 것이다. 이러한 차원은 혈과 육의 차원을 넘어 영들의 싸움에 참여한 것이다.
이러한 믿음의 선한 싸움의 진리를 알고 자기의 이기심을 버리고 보다 더 적극적인 자세로 서로 사랑하는 것이 위로부터 주어진 카리스마적인 사랑으로 수건이 벗겨진 상태에 있는 영의 눈이 열린 상태이다. (고전13:12)
영적인 상태를 정의하고 표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본다는 것이 무엇인가? 믿는 다는 것이다 to see = to beleave. 그러나 이 본다는 것이나 믿는다는 것이 단회적인가 반복적인가 지속적인가? 영원한 것인가? 는 말하지 않기 때문에 오해하게 되는 것이다.
정체된 현상은 구체적으로 분명하게 정의 할 수 있지만 영적이며 동적인 것은 표현하고 정의하기가 쉽지 않다. 더구나 듣는 인간의 귀가 천차만별이요 선과 악의 두 가지 속성을 다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자칫 오해하기 쉽다.
그러므로 영적인 진리는 히브리, 헬라어, 원어든 영어든 한글이든 영적인 현상을 언어로 정확히 표현 할 수 없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으면 율법적인 표현이 되어 오해하기 쉬운 것이다.
성경과 하나님의 능력을 오해하는 근본 원인이다. 그러므로 문맥을 따라 읽되 영으로 읽고 영적 맥락으로 해석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 중의 하나이다.
언어가 틀에 갇히면 생각도 틀에 갇힌다. 육신적인 생각이나 문자적인 생각은 우리를 이 생각의 틀 속에 갇혀 버리는 것이다. 사고력이 한정되어 생각의 풍성함이 부족하게 되어 우물안 개구리 같이 유아독존이 되고 교만해 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식이 영적으로 교만해지는 원리다
시공간을 초월하고 하늘의 신령한 속성을 가진 사고와 마음과 의지를 갖지 못하면 영도 자유롭지 못하다 자신의 정신적, 인격적, 물질적 속박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사고력이 풍성한 마음을 갖게 하고 영의 질도 변화 시킬 수가 있게 되는 것이다.
마음이 부패해지는 것은 영이 열리지 않고 눈이 가려진 상태에서는 마음이 굳어 있고 몸도 굳어 있어 영이 선을 지각 할 수 없기 때문에 선을 볼 수 있고 행할 수 없는 어두운 상태로서 카리스마적인 그리스도 예수의 영이 잠자고 있거나 소멸된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성경을 사사로이 육신의 생각으로 읽고 문자적으로 읽는 것은 성경이 닫혀 있거나 성경이 열린 상태가 아닌 것이다. 율법적인 상태에 있고 영생의 말씀 안에 있지 않다는 의미다.
영생의 말씀 안에 있지 아니한 상태는 생명과 성령의 법이 너희를 자유케하리라는 말씀이 나에게는 적용되지 않고 있는 상태이다.
그러므로 첫 사랑을 잃어버리고 형식만 남아 있는 심령에는 내 심령에 다시 오신 예수님이 임재하지 않고 율법적이고 관념적인 상태에서 착각하거나 오해하고 있는 상태다. 그러므로 계속적이고 지속적인 성령의 기름 부음과 성령의 나타나남이 있어야 영적으로 성장하게 되고 열매를 맺게된다.
그러므로 성령은 어떠할 때 소멸되며 어느 상태에서 나타나시는가?
육하원칙의 영적원리에 대한 체계를 세우고 분명하게 성경에서 흐르고 있는 영맥의 진리를 헤아리는 것이 천국나라와 그 의를 빼앗기지 않고 영생의 자리에 들어가게 되는 경건에 이르는 훈련을 스스로 할 수가 있게 된다.
이러한 성령에 대한 지식과 능력은 인간의 영과 혼과 몸의 유기적인 관계를 다루는 생명과 성령의 법을 통하여 실제적으로 분명하게 알게 된다. 어떻게 구원이나 영생의 열매를 맺는가에 대한 해답을 찾지 않으면 안 된다. 이렇게 실질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에 대한 지식을 성경을 통해 찾고자 할 것이다. 그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고 구하고 찾다가 보면 하나님의 능력이나 성경에 대하여 아무것도 모르고 있고 오해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기 까지 많은 시행착오와 시험을 받게 될 것이다.
구원의 마지막은 영생이다 영생의 열매를 맺기 까지 진행되는 것이 구원이다.
언어적인 표현이나 말에 영의 속성이 잘 못된 상태는 영성이 잘 못되어 있으며 그로부터 나오는 말이나 표현이 진리에서 벗어나 오류를 일으키게 된다. 그러므로 진리의 영이 역사하지 않는 상태에서 주장하는 진리는 오류가 들어가거나 죽은 진리가 되고 진리의 영이 아닌 세상의 영이나 적그리스도의 영이나 사탄의 영이 역사하기 때문에 위로부터 오는 신령한 생명이 없는 것은 우상이다.
그러므로 신학도 목회도 사역도 인생도 영생의 진리가 아닌 것은 세상 정신이며 우상이며 인간이 만든 황금 송아지다. 또한 하늘에 속한 카리스마는 성경과 하나님의 능력도 오해 없이 믿어지고 성경의 난제나 오류 없이 성경이 예수 그리스도요 예수 그리스도가 말씀이요 말씀이 하나님이요 성경대로 반드시 되어지는 영생의 진리를 절대적으로 믿어지는 믿음이 생기는 것이다. 이것이 복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다. 그 외의 것은 자기의 의로 믿는 믿음으로 실질적으로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믿음이다. (롬 1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