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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대구남산산악회 원문보기 글쓴이: 고두영
하동 쌍계사, 구례 운조루, 천은사를 가다.
글 쓴 이 都 寅 高 枓 永
4월21일, 묘시(卯時) 초(初)에 일어나 여수(옛 여천)시 망미공원을 산책합니다. 내륙도시 대구에서 보던 환경과는 많은 차이가 있어, 공기도 맑고 시원한 바다를 바라보는 전망이 참으로 좋다.
여러개의 나무계단을 올라 작은 동산에 오르니, 2층 누각의 만월대(滿月臺)가 일출(日出)과 달맞이를 할 수 있는 멋진 공간에 서 있다. 주위는 잔디로 잘 가꿔져 있으며, 많은 잡목들을 베어내고 동백(冬柏)나무를 많이도 심어 놓았다.
여수의 진산(鎭山) 고락산(335m)에서 바라보면 청룡, 백호가 잘 감싸주고 있으며, 현 공원의 위치는 여의주(如意珠)에 해당 되겠도다! 서쪽으로는 바다가 적당한 거리에 호수처럼 펼쳐져서 여수(麗水)라는 지명(地名)에 공감이 간다.
옛 말에 “벌교에서 주먹자랑 말고, 여수에서 돈자랑 말라!”드니... 과연 허언(虛言)이 아니외다. 해변가로는 빌딩이 즐비하고, 북쪽의 학동, 죽림리 일대에는 고층아파트가 숲을 이루고 있다.
게다가 광양만 일대의 광양제철(제2포스코)을 중심으로 하여, 여천공단에 관련산업체에서 쏟아내는 재력(財力)을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아름다운 항구도시 여수(麗水)는 세계와 통하지 않는가!
두어시간 산책을 한 후 회원님들과 간단히 조반(朝飯)을 들고는 오늘의 첫 일정인 하동 쌍계사로 향합니다. 17번국도와 남해고속도를 타고 광양시를 지나 옥과에서 다시 하동으로 신나게 달리니, 진월면(津月面) 신아리(新鵝里) 부근을 지날때는 섬진강(蟾津江)의 아름다운 풍광이 한눈에 들어온다.
모두들 탄성을 지르며, “역시 섬진강이다!”를 연발하신다. 섬진강(蟾津江)의 유래는 원래는 모래가람, 또는 다사강(多沙江)이었으나 고려 초기부터 두치강(豆恥江)으로 불리워 오다가, 고려 우왕11년에 섬진강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고려 말기엔 왜구(倭寇)들의 침입이 극심해서, 한번은 왜구들이 하동쪽에서 강을 건너 광양쪽으로 침입하려고 하자, 바로 이웃의 진상면 섬거(蟾居)마을에 살던 두꺼비 수만 마리가 십여리나 떨어져 있는 다압면(多鴨面) 나루터로 떼를 지어 몰려와 울부짖는 소리에 놀라 왜구들이 도망을 쳤다 한다. 이 후부터 두꺼비섬(蟾)자와 나루진(津)자를 따서 섬진강으로 부르고 있는것이라 한다.
하동을 지나 아름다운 섬진강변을 따라 유유히 그리고 여유롭게 달리니, 평사리 최참판댁의 이정표도 보이고, 오래전에 등산했던 신선봉일대의 고소성(사적51호)도 아련히 기억에 떠 오른다.
화개장터에서 쌍계사로 들어가는 길은 예나 지금이나 아름답고 정겨웁다. 철지난 벚꽃나무들을 바라보면서, 제철(축제때)엔 엄두도 내지못할 여유를 부리며 달림니다. 또 연변(沿邊)과 지근한 거리의 산비탈엔 온통 녹차나무를 심어 녹차(綠茶)의 본고장임을 은연중에 과시하고 있슴니다.
자료에 의하면 쌍계사 일대는 신라 흥덕왕3년(828)에 김대렴이 당나라에서 가져온 차를 재배하기 시작한 우리나라 차의 시배지(始培地)라 한다. 거대한 쌍계석문(雙溪石門)을 지나 구길로 오르니, 우측에는 넓은 주차장이 새로 생겨나 들고 나는 차들로 분주하며, 주위는 온통 상가로 넘쳐난다.
오늘은 날씨도 화창하고 따뜻하여 쌍계사로 오르 내리는 사람들이 어찌나 많은지 그야말로 인산인해(人山人海)다. 솔바람에 나뭇잎은 산들 산들 봄 향기를 더해 주시고, 상춘객(賞春客)들의 옷차림도 울긋 불긋 움직이는 꽃들이다!
아름다운 쌍계사의 일주문을 지나 금강문, 천왕문에 들어서니 사천왕상(四天王像)이 8개의 눈을 부릅뜨고 사방을 호위하시니, 잡귀는 얼씬도 못하겠심더! 선채로 삼배의 예를 드리고 몇 계단을 더 오르니 팔영루(八詠樓) 앞에는 9층석탑이 서 있는데, 오대산 월정사의 팔각구층석탑(국보 제48호)과 많이도 닮아 있다.
안내문에 팔영루(경남 문화재자료 제74호)는 통일신라 840년에 진감국사(眞鑑國師)가 세웠고, 조선시대 1641년과 1978년에 보수하여 오늘날에 이르고 있으며, 범패(梵唄)의 창시자인 진감선사가 여덟음률로 된 범패인 어산(魚山)을 작곡했다고 하여 팔영루(八詠樓)라 한다고 적혀있다.
팔영루를 지나 대웅전 뜰아래는 ‘진감선사부도비(眞鑑禪師浮屠碑:국보 제47호)’가 모셔져 있는데, 비문은 고운 최치원이 글을 짓고쓴 것으로 우리나라 4대 금석문 가운데 으뜸으로 꼽히며, 최치원의 사산비명(四山碑銘) 가운데 하나이다.
비신(碑身)은 여러 조각으로 깨어진 것을 다시 보수하여 모셨으며, 이수(螭首)는 山 모양으로 운룡문(雲龍紋)이 힘차게 조각되어 있고, 앞면 가운데 “해동고진감선사비(海東故眞鑑禪師碑)”라는 제액(題額)이 전서체로 쓰여있다.
그 뒤로 높은 대(臺)위에는 대웅전이 정면5칸 측면3칸의 다포계 팔작지붕이다. 내부는 우물마루에 우물천장, 불단위에 닫집을 만들고 그 밑에 용(龍)과 연화(蓮花)를 늘어뜨려 화려하게 꾸며 놓았다.
간단한 예(禮)를 드리고 잠시 주위를 살펴보니 주산(삼신산)은 웅장하고 수려하며, 청룡은 비교적 허(虛)하여 수림(樹林)으로 비보(裨補) 하였고, 백호는 우람하고도 장엄하여 안산(案山)의 역할까지 겸하고 있어 천하의 길지로다!
도량(道場)내의 전각의 수도 많아서 대웅전을 비롯하여, 팔영루, 범종루, 적묵당, 설선당, 첨성각, 나한전, 안심요, 삼성각, 화엄전, 명부전, 반야실, 육화요, 방장실 등 40여 동(棟)의 전각이 포진되어 있으며, 2013년도에는 조계종(曹溪宗) “총림도량(叢林道場)”으로 지정 승격 되었다.
또 쌍계사는 신라 성덕왕 23년(724)에 의상스님의 제자 삼법(三法)이 창건 하였다 하며, 당나라에서 육조 혜능의 정상(頂相)을 모셔와 “삼신산(금강산,한라산,지리산) 눈 쌓인 계곡 위에 꽃피는 곳에 봉안하라.”는 계시를 받고 현 쌍계사 자리에 혜능의 정상(머리)을 묻고 옥천사(玉泉寺)라 하였다. 이후 문성왕 2년(840) 진감선사가 크게 불사(佛事) 하였으며, 정강왕 때 ‘쌍계사’라는 이름을 얻었다 한다.
법당 뒤로 오르니 적멸보궁(寂滅寶宮)을 모셔 놓았다. 천원지방(天圓地方)이라 하여 아랫단은 정사각형이고, 그 위에 석종형 부도에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셔 놓았다. 근래에 모신 것이라 고색어린 멋은 없으며, 다만 뜻으로 참배할 일이다.
그 위로 몇 계단을 오르면 거대한 자연석에다 세분의 불상을 조각하여 모셨는데, 조각기법이 정교하고 세련되어서 근래에 보기드문 예술품이다. 게다가 자연석 그대로 조각을 하여서 많은 정성과 고도의 조각 기술을 보여 주신다.
일정상 다 둘러볼 수 없슴이 못내 아쉬우며, 대자연과 어우러진 절집의 풍광들을 둘러 보노라니 선계(仙界)가 따로 없다는 생각이 든다. 오래 오래 머무르고 싶은 아쉬움을 뒤로한 채 구례 운조루를 향해 떠남니다.
도중에 화개장터에 들러 간단하게 점심을 한 뒤 이곳 저곳 하동의 특산물(特産物)을 구경합니다. 지리산의 약초들이 주류를 이루고, 그 밖에도 각종 먹을거리가 많으며, 또 50여 년동안 그 명맥을 이어 온 ‘대장장이 탁수기씨’가 있어 어릴 때 보던 옛 추억이 새록 새록 돋아납니다.
무엇보다 화제(話題)는 화개장터 바로 옆의 “화개파출소장”이 “조영남”이라는 것이다. “화개장터”를 불러 유명세를 탄 가수 ‘조영남씨’와 이름이 같다는 이유로 경찰서장이 발령을 내셨다니, 약간은 코믹하고 여유로워 보입니다.(4/20일자 조선일보)
화개장터 사람들은 “조영남이 덕분에 먹고산다”고 하지만, 정작 조영남씨는 “화개장터 노래로 먹고살았다”한다. 조영남씨 말에 의하면 1988년 김한길 작사, 조영남 작곡의 “화개장터”와 “사랑없인 못살아요”의 두곡을 발표 했는데, 촌스럽다고 기대하지도 않았던 “화개장터”가 “대박”이 나서 덕분에 현재 살고 있는 청담동 아파트(약40억)도 샀다고 한다.(4/27일자 조선일보) 세상(世上)은 참 재미난 일이 많슴니다 그려! 그래서 사는 것이 더 즐거운가 봅니다!
토지면 오미리(五美里)에 당도하니 마을 어귀에는 오미정(五美亭) 팔각정자가 우뚝하고, 넓은 들판에는 봄풀이 파릇 파릇 향기를 더해 주시며, 만석군의 집 ‘운조루(雲鳥樓)’가 산기슭에 고즈넉이 자리하고 있다.
운조루(雲鳥樓)는 지리산 반야봉에서 흘러내린 지맥의 병풍산을 배산(背山)으로 하며, 앞으로는 구만들의 넓은 평야와 그 너머로 우에서 좌로 굽이도는 섬진강이 흐르고, 안산(案山)격인 오봉산(五峰山)은 뭇 신하들이 엎드려 절하는 형국이다.
1,000여 평의 대지 위에 건평이 100평 넘는 보기드문 이 한옥은 일자형(一字形) 행랑채(24칸), T자형 사랑채(6칸), 외사랑인 운조루가(16칸), ㅁ자형 안채(36칸), 사당(2칸) 등 옛날에는 99칸의 대저택이었다고 한다.(현존73칸)
본래 운조루는 조선 영조52년(1776) 무관(武官) 류이주(柳爾冑1726~1797)가 지은 가옥의 사랑채를 말함인데, 지금은 가옥전체를 운조루라 부르고 있으며, “구름위를 나는새가 사는 빼어난집”이라는 뜻으로 중국의 도연명(陶淵明)이 지은 귀거래사(歸去來辭)에서 따온 글귀라 하며,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금귀몰니(金龜沒泥), 금환낙지(金環落地), 오봉귀소(五鳳歸巢)의 명당이 있는 곳으로 이 집터에서 거북이 형상을 한 돌이 출토되었기에 금귀몰니의 명당으로서 남한의 3대 길지로 알려져 있다.(1987년에 돌거북을 도둑맞아 지금은 볼 수 없다함.)
무엇보다 특기할 사항은 사랑채 밖의 목(木)독(나무로된 쌀독)은 가난한 이웃들을 위하여 자선보시(慈善布施)의 흔적을 보여주는 것으로 후세의 귀감이 되고 있으며, 류이주의 5세손인 류제양(柳濟陽)은 일만여편의 시를 쓰고, 손자 류형업(柳瑩業)에 이르기 까지 80여 년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생활일기와 농가일기를 썼다고 8세손인 류응교(柳應敎, 전북대 건축과 교수 공학박사)선생은 전해 주신다.
부(富)와 명예 권력은 인간이면 누구나 바라는 것이어서, 다 누리기는 참으로 어려운 법인데... 운조루(雲鳥樓)의 주인은 누대(累代)에 걸친 적선(積善)과 음덕(陰德)의 소산(所産)으로 광영(光榮)을 누리심인가?
운조루에 올라앉아 행랑채 너머로 보이는 오봉산의 봉우리들이 노적봉(露積峰)으로 다가오니, 만석군의 집터란 말이 사실로 다가온다. 벽에붙은 유훈(遺訓)과 가훈(家訓)을 보노라면 모든 것이 노력과 정성, 사랑으로 이루어 졌슴을 느끼면서 솟을대문(三門)을 나선다.
삼문(三門)앞에는 문수골에서 흘러내린 물이 동에서 서로 흐르고, 그 앞에는 사각연못이 있어 가운데는 원형의 대(臺)를 쌓아 소나무 한 그루가 심어져 있어 운치(韻致)를 더해 주신다. 연못은 동양사상의 천원지방(天圓地方)으로서 하늘과 땅의 이치를 담아 있고, 안산(案山)인 오봉산의 화기(火氣)를 다스리기 위해 만들어 졌다고 하신다.
모든 것이 풍수지리를 염두에 둔 조성이요, 오복(五福)을 염원하는 것임을 알게되니, 하늘과 땅의 이치대로 또 자연으로 회귀(回歸)하는 삶이 곧 행복이라는 것을 배웁니다. 안내자의 정성과 사랑에 감사를 드리고, 문화류씨(文化柳氏)의 가문에 무궁한 발전과 영광이 계시기를 빌면서 님들과 곡전재(穀田齋)로 걸어 갑니다.
금환낙지처(金環落地處) 이순백(李淳白)의 가옥은 구만들의 가운데 쯤으로 느껴지며, ‘운조루’와 그리 멀지않은 곳에 조그마한 마을이 있으니, 그중에 이병주씨(이순백.子)가 살고있는 집이 금환낙지(金環落地)의 명당이라 한다.
금가락지의 형태로 둥글게 막돌로 담을 쌓아, 묵은 담쟁이 넝쿨이 담장을 에워싸니 고색어린 멋이 풍기고 자연친화적인 환경을 느끼게 한다.
솟을대문(三門)을 지나 행랑채로 들어서니, 바깥마당에는 동에서 서로 명당수(明堂水)가 태극모양으로 굽이쳐 흐르니, 경주의 남산에 유상곡수(流觴曲水)로 유명한 포석정(砲石亭)이 연상(聯想) 된다.
사랑채는 3칸으로 새로지어 찻집으로 활용되고 있으며, 몸채는 정면5칸에 측면2칸의 팔작지붕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동편에 쪽마루를 놓기위해 기둥을 하나더 세운 것이 특이하고, 1920년대에 지어진 집이라 고색창연(古色蒼然)한 멋이 있다.
안내장에 1910년경부터 승주(昇州) 황전(黃田)에 사는 삼천석의 부자 박승림(朴勝林)이란분이 명당을 찾아 10여 년을 수색끝에, 이곳 이 금환낙지(金環落地)라 확정짓고 이교신(李敎臣:이병주의 증조부)씨와 함께 건축하게 되었다. 그 후 박승림씨는 타계하시고 이교신씨가 인도하여 현재 5대째 살고있다 하신다.
원래는 6채 53칸의 한옥으로 지어졌으나 중간에 훼손되어 1998년에 새로이 동행랑과 중간 사랑채를 복원하고, 누각을 신설하여 ‘춘해루(春海樓)’라 이름 지었으며, 연못(洗淵)을 확장 하였다고 한다.(현재 5채 51칸)
춘해루(春海樓)를 지나 대문으로 돌아 나오니 문기둥에 주련(柱聯)이 달려 있어 간단히 적어 봅니다.
소지황금출(掃地黃金出)이요! (마당을 쓰니 황금이 나오고)
개문만복래(開門萬福來)로다! (대문을 여니 만복이 들어온다.)
삼문(三門)옆에는 방명록과 주인명함 안내장이 놓여 있고, “한번 오신분은 평생 가족으로 모시겠습니다.”라는 글귀가 붙어 있으며, 민박 하실분은 1개월전에 예약하시란다.
“신혼 부부들이 하룻밤만 명당터에서 숙박을 하면 금환낙지(金環落地)의 운이 돌아와 평생 부귀영화를 누린다.”라고 쓰여 있으니...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의 바램은 한결 같아서
돌장승이 말하고 춤추는 날 내 다시 오리다!
두 고택(古宅)의 답사를 마치고 나오니, 어떤 회원님들은 이제 그만하고 집에가자 하신다. 그렇다! 이틀동안 제대로 쉬지도 않고 강행군을 했으니 지칠만도 합니다. 사랑하는 님들이여! 마산면 사도리(沙圖里) “당몰샘”으로 가셔서 영천수(靈泉水) 한잔씩 드시고, 150세 까지 건강하게 살도록 합시다.
사도리(沙圖里) ‘당몰샘’ 에 도착하니 쌍산재(雙山齋)는 문이 굳게 잠겨있고 마을은 조용하다. 농번기라서 그러한가? 사도리 상사(上沙)마을 ‘당몰샘’은 전북 순창군, 전남 구례군, 곡성군, 담양군 4개지역이 장수촌에 해당되는 지역이며 예로부터 물맛이 좋기로 소문난 곳이다.
이지역 사람들이 장수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이 당몰샘의 영험한 물맛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으며, 돌담에는 “천년고리(千年古里) 감로영천(甘露靈泉)”이라 새겨져 있고, 또 어떠한 가뭄이나 홍수에도 일정하게 흘러 넘친다고 한다.
70년대 까지만 해도 샘 주위에는 구기자(枸杞子) 나무가 많이 있었다고 하며, 그 물이 우러나 약수였던 셈이다.
안내판에는 지리산의 천년묵은 산삼이나 약초들의 물이 우러나 영험있는 약수라 적혀 있으니, 몸에 좋은 것은 더 말해 무삼하리요! 또 영천수 입구에는 2004년 6월 4일에 실시한 수질검사표가 있어 카드뮴, 비소, 셀레늄 등 47개 항목에 걸친 유해물질 검사에서 모두 합격판정을 받았다고 적혀 있다.
물 한바가지로 여독(旅毒)의 갈증을 축이며 마을의 한 노인(老人)에게 여쭈니, 최고령자가 105세라 하시며 이웃하고 있는 오미리(五美里)에는 108세된 할머니가 아직도 바늘귀에 실을 꿴다고 하시며, 연신 싱글벙글 자랑이 많으시다.
모든 회원님들이 물 한바가지씩 마시고 장수무병(長壽無病) 하시기를 기원하면서 마을 어귀로 걸어나와 ‘사도천년사적비(沙圖千年事績碑)’를 보니, “음차수자(飮此水者) 수개팔순(壽蓋八旬)”이라 적혀 있다. 장수마을 답게 풍수적(風水的)으로도 많은 신경을 써 조성된 마을임을 충분히 알겠도다!
주산은 지리산 반야봉, 노고단, 형제봉을 거쳐 병풍산이 마을뒤를 감싸주고, 안산(案山)은 오봉산(五峰山)과 오산(鰲山)이 겹겹이 에워싸고 있으며, 청룡이 허(虛)하여 비보림(裨補林)을 조성 하였도다!
마을 앞에는 연못을 만들어 거북이 알의 형상인 바위들을 못속에 적당한 간격으로 쌓아두고 있으니, 마을지세(地勢)에 걸맞는 구상(構想)이라 생각된다. 봄날의 긴 하루해도 어느덧 기울어서 귀가길에 천은사(泉隱寺)로 갑니다.
성삼재로 가는 길은 경사와 굴곡이 심해서 여간 조심스럽지 않다. 조심 조심 20여 분을 달려 천은사 입구에 도착하니 비교적 한산하다. 일주문 앞에서 마지막으로 회원님들에게 기념촬영을 해 드리고, 현판을 보니 “지리산 천은사(智異山 泉隱寺)”라고 수기(水氣)가 줄~ 줄~ 흐르며, 동국진체의 대가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1705~1777)의 글씨다.
천은사는 828년 인도 승려인 덕운선사가 창건한 절이며 처음에는 감로사(甘露寺)라 했는데, 경내에는 물맛이 뛰어난 샘이 있었다 한다. 어느날 우물가에 자주 나타나는 구렁이를 죽인 후 부터는 샘물이 말랐다고 한다.
그래서 샘이 숨었다고 하여 “천은사(泉隱寺)”로 이름을 바꾸었는데 그 뒤로 원인모를 화재가 자주 일어나니, 수기(水氣)를 지켜주는 뱀을 죽여 그렇다는 소문이 무성해서 “물흐르는 듯한 체”로 글씨를 써서 걸었다고 한다. 지금도 이른 새벽에 일주문 기둥에 귀를 대고 들으면 쫄~쫄~쫄~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린다고 한다.
아름다운 전설을 상기하면서 수홍루(垂紅樓)를 건너 여러개의 돌계단을 오르니, 호젓하고 청아한 전각(殿閣)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밖에서 보면 2층 보제루(普濟樓)가 극락보전 쪽에서 보면 단층의 맞배지붕이다.
“보제루(普濟樓)”의 글씨는 호남의 명필 창암 이삼만이 쓴 글이라 하며, 누각 계단에서 앉아 보면 극락보전(極樂寶殿)을 中心으로 설선당, 승회당, 첨성각이 한 영역을 이루고, 그 뒤로는 팔상전, 응진전, 진영당, 칠성각 등이 또 하나의 영역을 이룬다.
안내문에 대부분의 전각들은 1774년 무렵에 중건된 것들이라 하며, 각각의 현판(懸板)은 창암 이삼만, 원교 이광사의 글씨와 추사체를 모사(模寫)해서 쓴 것이라 한다. 극락보전의 후불탱화(後佛幀畵)가 보물 제924호로 지정되 있으며, 조선 영조52년(1776)에 그려진 것이라 한다.
법당에 들어 감사의 참배(參拜)를 드리고 도량(道場)을 한바퀴 휘~ 돌아 일주문을 나오니, 허허(虛虛)롭고도 실실(實實) 합니다!
아름답고 향기로운 물에 몸과 마음을 씻고
三神山에서 도를 나투어 우주를 밝히네
알다가도 모를 山이여 샘물을 감추었 구려
단기 4346년(서기 2013년) 4월 20, 21일
여수시 오동도, 진남관, 향일암(영구암), 하동 쌍계사,
화개장터, 구례 운조루, 곡전재, 당몰샘, 천은사를 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