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개성을 가지고 있다. 그에 따라 세상을 보는 관점도 저마다 다르다.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생각을 직접적으로는 알 수가 없다.
단지 상대방의 말과 행동을 보고 상대방의 생각을 짐작할 뿐이다. 그런데 그 짐작하는 잣대는 바로 자기자신을 기준으로 하게 된다.
상대방의 저런 언행은, 자기 같으면 이런 생각을 할 때 그렇게 하게 되므로, 상대방도 아마 이런 생각에서 저런 언행을 하게 되었으리라는 짐작을 한다.
다행히도 인간은 서로가 조금씩은 다르게 태어났지만 근본적으로는 크게 다르지 않아서 웬만한 경우에는 상대방의 언행으로 그의 생각을 가늠할 수가 있다.
다만 상대방이 인간의 본질과 크게 벗어나는 이념의 포로가 되어 있을 때 예외가 생기는데, 이 경우 상대방의 언행을 통상적인 인간양심의 기준에 맞추어 해석하다가는 큰 낭패를 당하는 것이다.
여간첩 김수임(金壽任)은 바로 그 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녀는 해방 후 우리사회에 들끓던 이질 인간들의 성향을 미리 파악하여 경계하지 못한 탓에, 한때 만나 정을 나누었던 간첩 이강국(李康國)에 대한 연정에 사로잡혀, 북에 가있는 이강국의 지속적인 공작 요구를 사랑하는 사람의 인간적인 부탁 정도로 생각하고 협조하다가, 결국 그들이 놓은 덫에 걸려 파멸에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한국애인과 미국남편(?)사이에서
김수임은 빈농의 자식으로 태어나서 타고난 영특함으로 고등교육을 받고 상류 사교계로 진출하였다.
그녀의 수준에 맞는 신랑감은 혼담이 오가다가도 그녀의 출신배경을 알게 된 후에는 물러서곤 하여 그녀는 당시의 결혼적령기에 결혼을 하지 못하고 독신으로 살다가, 1943년 봄 조선호텔에서 모선교사의 귀국 파티에서 경성제대 출신 정치학 박사에 이왕가의 후손인 이강국이라는 호남을 만나게 된다.
김수임은 그날 이후 이강국을 마음속에 사모하게 되었으나 감히 마음을 나타낼 엄두도 못내고 있던 차에 이강국으로부터 그녀에게 데이트 신청을 하는 전화가 왔으니 이 어찌 운명인 만남이 아니라 할 수 있으랴.
그것이 한없는 악연의 시발이라 할 지라도…둘은 서로간에 진한 사랑의 정을 나누었다.
그러나 이강국은 얼마안가 8·15 해방 후 좌익운동에 투신하여 혁명과업의 무거운 사명을 수행하고자 월북하였고 김수임은 함께 따라가고 싶었으나 아직은 서로가 행복한 사랑을 즐길 만한 그날이 오지 않았으니 때가 아니라는 이강국의 말에 따라 남한에 남게 되었다.
김수임의 미모와 재능은 어느 남자에게도 빈심을 불러 일으킬만 하였으므로 그녀는 평소 상사로서 자기에게 호의를 베푸는 미군 헌병사령부의 실력자 패드 대령에게 부탁하여 군용지프를 빌려 체포령이 내려있는 이강국을 개성까지 바래다 주었다.
그녀는 그 후 패드 대령의 현지처로 자리잡았다. 단순히 요즘 말하는 현지처 정도가 아니라, 단지 패드대령이 미국의 본처와 이혼을 안할 뿐이지 그의 아이까지 낳고, 또한 되도록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퇴역하기 전까지는 이 곳에 살려고 하는 등, 말하자면 첩과 같은 위치였다.
그녀의 미군 남편과의 삶도 행복했다고는 할 수 있었으나 그녀가 거기 만족하지 않고 간첩행위를 한 것은 패드대령이 결국 완전한 자기의 남편은 아닌 만큼, 이강국이 후에 ‘통일조국’의 그날이 오면 함께 영광을 나누자고 한 것을 마음에 새겨두고 있었을지도 모르고 혹은 그저 사랑했던 사람의 청을 거절할 수 없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현대판 낙랑공주와 왕자 호동인가
이강국은 이후에도 남파간첩을 통해 김수임에게 서신을 보내 자기의 안부를 전하고, 아직도 그대를 사랑하고 잊지 않고 있으며, 훗날을 기약하며 그날이 올 때까지 어렵더라도 자기의 부탁을 들어줄 것을 청하였다.
그의 요구에 따라 김수임은 남편의 차를 계속 남파간첩의 월북과 물자수송 등에 이용하였다. 미군이 운전하는 미군 실력자의 차는 국군의 삼엄한 경계망을 의심 없이 뚫고 나갈 수 있었다.
개성에 사는 계모가 위독하기 때문에 한의를 대동하고 급히 가야 한다며 차를 빌리고, 월북간첩을 한의사와 조수로 위장시키고 김수임자신은 유창한 영어로 검문을 무사히 통과시키기도 하였으니, 그녀의 행동은 이미 마지 못해 억지로 하는 수준을 넘어서고 말았다.
김수임은 그들의 활동자금까지 구해주는 등 몇 번의 요구를 들어주다가, 더 이상 계속할 수 없다는 생각을 가졌으나 그 때는 이미 크나큰 간첩죄를 저지른 후였고, 또한 북에서는 만약 더 협조를 않는다면 이미 행한 간첩행위를 폭로할테니 계속 협조하라며 간첩 YO로서 ‘임명’까지 해놓은 상태였다.
의심을 받지 않는 미군남편의 차를 이용한데서 더 나아가, 역시 의심을 받지 못하며 사찰대상이 될 수 없는 자신의 집(미군 남편의 집)을 간첩들의 접선 아지트로 쓰게 하고 잠자리의 남편으로부터 군사기밀까지 얻어내는 단계까지 그녀는 오고만 것이다.
사랑에 눈이 어두워 조국을 배신한 행위는 역사상 그렇게 특이한 일도 아니다.
우리의 유명한 옛 이야기 <왕자호동과 낙랑공주>에서도 낙랑공주는 사랑하는 호동왕자의 요구에 따라 자명고를 찢음으로써 부왕으로부터 처형을 당하였고 외국의 경우에도, 명배우 율부린너의 주연으로 영화화 되기도 했던 중앙아시아 코사크족의 이야기 <대장부리바>에서 주인공의 아들은 적국의 여인을 사랑하여 배신함으로써 역시 아버지인 주인공으로부터 처형을 당하였다.
이들 이야기의 ‘부친들’이 조금도 매정하거나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자로 묘사되지 않는 현실에 비추어 김수임이 설령 유력자의 딸이었다 해도 그녀의 죄과는 용서될 수 없었을 것임을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다.
김수임의 사건은 세월이 흘러 몇 세기가 지난 후 그녀를 둘러싼 여러 세속적 정황들이 자연 마모되고 세탁되어진 후에는, 낙랑공주나 대장부리바의 아들과 같은 비련의 이야기로 승화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 그녀를 둘러싼 여러 속물적 배경이 선명히 남아있는 상황에서는, 그녀에 대한 일방적인 동정은 어려워지는 것이다.
애인을 잔인하게 이용한 이강국도 처형
그녀가 이강국을 진심으로 사랑하였다해도 이미 그녀는 다른 남자인 미국 패드대령의 아내가 되어 부귀영화를 즐기고 있었으므로 사랑을 위해 인내하는 비련의 주인공은 되기 힘들다.
패드대령이 본국에 본처가 있었기 때문에 그를 완전한 남편으로 삼고 안정을 찾을수가 없었다면 더욱 그렇다.
이강국은 패드대령과의 헤어짐을 예비한 그녀의 미래남편 이었던가. 이강국 또한 본부인이 있는 남자였으니 김수임이 이강국에게서 기대했던 바는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그러나 사랑의 관계는 미묘한 것이므로 제삼자가 섣불리 억측은 하는 것은 금물이다.
다만 그녀가 오로지 인간적인 정으로 이강국의 요구를 물리칠 수 없었다해도, 그녀는 자신의 교육수준과 사회적인 위치 등을 고려할 때, 사사로운 정을 떠나, 자기에게 다른 일반 민중들보다 더한 혜택을 준 조국에 대해 올바로 생각하여야 했고 대국적인 견지에서 미리 결단을 내렸어야 했던 것이다.
그녀를 그토록 잔인하게 이용한 이강국마저, 뒤에 이용가치가 떨어지자 결국 김일성에 의하여 처형당할 수 밖에 없는, 그러한 좌익혁명운동의 실장을 일찍이 깨달았어야 했던 것이다.
인간에게 있는 본연의 정에서 우러나오는 상대방에 대한 호의를, 저네들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는 좌익의 수법은 그 후에도 면면히 이어 내려오고 있다.
양심의 허점 이용하는 좌익기질 인간들
좌익기질의 인간들은 예나 지금이나 그들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인간 양심의 허점을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이미 그러한 수법을 당연시하는 同種基質의 인간들이, 그보다 훨씬 앞서, 가장 인간적인 분야라 할 수 있는 문학계를 장악하여 국민정서를 유린한 것에 비하면, 그렇게 놀라운 일도 아닌 것이다. ♠
잊을 수 없는 공산당의 만행
이도형
「노근리에서 미군이 양민을 대량 학살했다」는 소문이 그럴듯하게 떠돌았다.
어떤 좌익교수 말마따나 6·25당시 태어나지도 않았을 클린턴 전 미국대통령이 유감의 뜻까지 표했다. 이에대해 일부 한국인은 미국대통령이 「사과」를 하고 미국정부가 피해보상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식으로 말하면 미국이 일본에게, 일본은 미국에게, 독일·이탈리아는 미·영·불에게, 미·영·불은 독일·이탈리아에게 각각 사과하고 「민간인 피해보상」을 해야 될것이다. 이런 어불성설(語不成說)을 한국의 좌익들은 배짱좋게 내놓고 떠들어 대고 있다.
또 어떤 TV는 공산당원에서 대한민국에 충성하겠다고 전향했던 「보도연맹」원을 6·25가 나자 학살했다고 방영했다.
「보도연맹원」 상당수가 대한민국으로 「전향」하는 척 했다가 인민군이 들어오니까 앞장서 반공인사들을 색출하는등 이중간첩활동을 하는걸 보고 위협을 느끼며 남한의 군·경 보복을 한것인데도 그 TV는 마치 인민군이나 빨갱이나 그 앞잡이인 「보도연맹」은 「양민」이고 국군·경찰만이 「만행」을 한것같이 부각시키고 있다.
양민을 방패로 내세우며 싸운 비열한자들
그렇다면 6·25 당시 전국도처에서 있은 공산당 또는 「인민군」에 의해 계획적, 의도적으로 학살된 사람들에 대해선 누가 사과를 하고 어느나라 정부가 피해보상을 해야 하는가?
공산당은 서울·평양·대전·함흥등 대도시는 말할것도 없고 전국 방방곡곡에서 저희들을 반대했다는 단 한가지 이유만으로 사람들을 마구 쏴죽이고 찔러죽였다.
노골적으로 반대 반공(反共)을 한 사람도 아니고 잘산다는 이유, 지주라는 이유, 지식인, 종교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또 얼마나 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공산당의 총을 맞거나, 창으로 찔리거나, 몽둥이로 맞거나, 모진고문으로 죽어갔는가?
그 원혼(寃魂)들의 한(恨)은 6·25때 「나이 어려서 전쟁도발 책임이 없다」는 김정일이 풀어 줄것인가? 아니면 그많은 무고한 양민을 학살하고도 제명에 죽은 김일성을 지옥까지 찾아가 사과를 받을것인가?
적색분자들은 공산당의 6·25 남침당시 마치 미군과 국군만이 양민을 학살한것처럼 선동선전하고 있다.
1946년 10월1일 대구에서도, 1948년 4월 제주도에서도 마치 경찰 또는 국군만이 양민을 대량학살한것처럼 떠들어대다가 급기야는 폭동을 일으킨 자들까지도 「민주화투쟁희생자」로 둔갑시키는 법까지 만들기에 이르렀다.
백보를 양보해 미군이 노근리에서 양민을 분간못하고 사살했다고 치자. 불법 남침하는 인민군이 피난민 복장으로 피난민 대열에 섞여 미군에게 총격을 가하는대도 만리타국에 자유를 지키기 위해 급파된 미군은 그 총에 맞아죽어야만 했나?
그리고 피난민을 악용한 인민군의 비열하고 치사한 원죄는 따지지 않아도 되는가? 미군의 6·25 참전으로 오늘의 번영속에 안일자족하고 사는 한국인은 그것을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을것이다.
미군의 한국참전을 「외세개입」이라고 말하는것은 공산당 즉 멋대로 사람을 죽이는 빨갱이가 아니고는 말할수가 없다.
제주도에서 폭동을 일으킨 공산 게릴라를 소탕하는 과정에서 국군이 과잉진압하다가 무고한 양민을 많이 죽였다고 하자.
그러나 이것은 「생각이 다르다」는 단하나의 이유만으로 마을을 샅샅이 뒤져 사람들을 잡아죽인 공산당의 만행과는 비교가 안된다.
또 인민군이 후퇴하면서 교도소에 가두어 두었던 수많은 반공청년들을 집단학살한 인간이하의 만행에 비하면 그것은 약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빨갱이들은 지금 제세상을 만난듯 국군과 미군들의 「실수」를 침소봉대(針小捧大), 확대 재생산 함으로써 반한·반미감정을 부추기는데 눈알이 싯벌개져 있다.
공산당의 거짓·음모는 천년후에도 밝혀야
우리는 빨갱이들의 6·25 남침 당시, 부자로 살다가, 지식인으로 대접받다가, 또는 공산당이 싫어 은신하다가 붙잡혀 죽은 진짜 양민들의 원혼을 잊을수가 없다.
더욱이 그 만행을 50년이상 지난 오늘날 적반하장(賊反荷杖)으로 뒤집어씌우는 빨갱이들의 발호를 더이상 묵과좌시(默過坐視)할수없다. 50년 아니라, 1백년, 1천년이 지나도 밝혀야 한다. 진실을.
남한의 빨갱이들은 50년전의 죄업을 덮기위해 사실을 은폐하고 죄를 뒤집을 뿐만 아니라, 아직도 북한에서 반대자를 색출하여 무자비하게 무더기로 공개처형하고 있는 그 상전들의 만행도 은폐하려 하고있다.
실수아닌 의도적·계획적 대량살상
6·25 남침 이래 공산당이 저지른 만행은 어떤 글이나 말로도 표현할수 없을정도로, 상상을 초월한 잔인성과 비인간성을 드러내놓고 있다.
무수한 양민들을 도처에서 무참히 죽인것은 물론, 무기를 든 전투원들의 살상행위도 공산당 특유의 무자비성을 노정시키고 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4시. 경기도 개성시(현재 휴전선 북방) 북방 송악산 기슭에 설치된 국군 제1사단 헌병대 최전방 검문소 앞으로 인민군 탱크부대가 남하하고 있었다.
검문소를 지키던 헌병 4명은 못보던 탱크였지만 혹시나하고 거총한 자세로 정지신호를 보냈다.
이럴때 정상적이며 정정당당한 전투행위라면 압도적으로 우세한 무장(탱크)을 갖춘 군대는 소총으로 무장된 적인 국군헌병 4명을 향해 투항을 권고해야 할것이다. 이에 불응하면 사살할수도 있다.
그러나 인민군은 탱크를 저지하려는 국군헌병 4명을 그대로 깔아뭉개버리고 말았다. 처참하게 죽은 이 헌병 4명은 아마도 6·25 남침 개시후 최초의 국군 희생자였을지 모른다.
이처럼 인간이기를 포기한 공산당의 잔인성은 그후 도처에서 표출됐다.
남침개시 사흘만인 6월 28일 오전 10시쯤 서울 중구 을지로6가 18번지(현 흥인시장)근처에서 낙오된 국군병사 수명과 장교2명은 무장을 풀고 투항하려는것을 다발총으로 쏴죽였다.
그후 도처에서 승전보(勝戰譜)를 울린 인민군은 보도연맹원(해방후 좌익활동중 전향했다가 적의 남침후 다시 부역한자들)의 제보로 「색출」한 부자, 지식인, 종교인, 경찰관, 낙오병, 공무원, 교사등등 서울시내에서만도 1천여명은 총살된 것으로 추정된다.
필자가 50년 6월 28일부터(서울피침) 9월 28일(서울탈환)까지 서울시내 종로4가, 낙원동 일대에서 목격한 인민군 또는 내무서원에 의한 피살자만도 1백여명에 이른다.
이는 국군이나 미군이 작전수행상 실수로, 또는 무장폭동진압과정에서 과잉방어로 살상한것과는 차원이 다른, 의도적, 계획적 대량살인행위였다.
대전형무소 피학살자만도 3,119명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사례가 저 악명높은 대전형무소 대량학살이다. 대전시가 적의 수중에 들어간것은 1950년 7월 20일이었다.
그해 9월15일 미군과 한국군 해병대가 인천에 상륙하면서 낙동강까지 남하했던 인민군의 허리가 잘렸다. 그 사이에 위치한 대전이 수복된것은 10월 3일이었다.
인민군의 패색이 완연해진것은 9월 20일경이었다. 당시 인민군과 내무서에 의해 대전형무소에 수감됐던 양민은 3천여명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경찰관을 비롯하여 교사, 학생, 공무원, 농업종사자 심지어는 이발사, 운전기사등 저들의 증오의 대상일수 없는 사람들도 있었다.
현재 「반공애국지사유족회」(회장 朴鍾薰·71)가 파악하고 있는 피학살자는 모두 3천1백19명, 수감됐던 사람 거의전원이 희생된 것이다.
사실 지금까지 알려진 생존자는 단한명, 구사일생(九死一生)으로 살아난 그는 6·25 당시 충남 보령경찰서 사찰계 형사였던 이갑산(李甲山·78)씨다.
이씨는 당연히(?) 「반동」으로 몰려 붙잡혀서 대전형무소에 수감됐다. 반평 남짓한 방에 그와함께 갇혔던 사람은 경무대(청와대) 비서관이던 이선직(李善稷), 대덕군수 정영진(鄭英鎭), 대한청년단 서천군단장 김동학(金東鶴), 서천경찰서 경찰관 김흥수(金興洙)등 7명이었다고 한다.
이씨가 월간조선 2000년 6월호에서 밝힌 죽음 일보직전의 상황을 여기 다시 재생해본다.
2백명씩 묶어놓고 사살, 고랑에 쳐넣어
『내가 끌려나가기 며칠전부터 밤마다 외마디 비명소리가 들려왔어요. 고문하는 줄 알았지. 그것이 죽음의 비명일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우리 감방 사람들도 한명씩 불려 나갔습니다. 내차례가 되어 나갔더니 철사로 두손을 묶고는 형무소 뒷쪽으로 끌고 가는거예요. 앞서 끌려간 사람은 보이지 않고, 사방이 깜깜했어요. 문이라고 짐작되는 곳을 지내는 순간 정신을 잃었습니다.
정신을 차려보니 시체가 즐비한 밭고랑 사이에 누워있는 겁니다. 머리와 허벅지가 굉장이 아팠어요. 뭘로 맞았는지 모르지만 뒤통수가 쑥 들어갔고, 칼로 찔린 허벅지에는 피가 응고돼 있었습니다.
내가 꿈틀대니까 내주위에서 시체를 뒤적이던 사람들이 철사줄을 풀어주었습니다. 그길로 엉금엉금 기어서 형무소옆 논에 고인물을 먹고 다시 정신을 잃었습니다.
정신을 차려보니 피로 물든 팬티 하나 걸치고 논두렁에 쓰러져 있는겁니다. 인민군이 도망갔다는 얘기를 듣고 옷을 구하기 위해 형무소로 들어갔습니다.
감방은 텅 비었고 우물엔 돌멩이가 잔뜩 들어 있었습니다. 6사(舍)1호의 옷보관 창고에서 헌옷을 꺼내입고 대전형무소를 떠났습니다…』
이씨 이외의 나머지 3천여명(당시 유엔군사령관은 5천여명으로 추정)은 어떻게 학살됐나?
그 진상의 일단을 1953년 유엔군사령관이었던 마크 W. 클라크장군이 유엔에 제출한 보고서를 통해 살펴본다.
『…1950년 9월 20일, 드디어 운명의 날은 다가왔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은 백명 내지 2백명 정도로 구성된 (대전형무소) 수감자 수개반을 야간을 이용, 교묘하게 감방에서 끌어냈습니다.
그리고 이들의 손을 등뒤로 묶고 다음에는 그들을 연쇄적으로 이어서 결박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묶인 상태로 미리 예정된 학살장소에 수송됐습니다.
그들은 이미 패여있는 길다란 고랑에 쳐놓고 사정없이 사살했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은 생존자가 있는가를 조사한후 발견되면 머리를 깨뜨렸습니다. 그리고 흙을 덮어 집단매장을 했던것입니다.
이 흙은 조급하게 덮어졌기 때문에 얇아서 피로 물든 그 자리를 즉시 판별할수가 있었습니다.
구덩이가 시체로 넘치자 교회서 학살
1950년 9월26일에 이르자 이 악귀같은 공산당 내무서원들은 철수 이전에 학살을 끝내기 위해 더욱 서둘렀습니다.
내무서 구내에도 구덩이를 파고 북한군의 지원까지 받아서 피비린내 나는 살륙을 계속했습니다.
걸을수 있는 군인포로는 몇사람씩 끌어내어 즉시 죽여버렸고, 부상한 수명의 미군포로들은 들것에 실어 구덩이로 끌고가서 사살 또는 때려 죽였습니다.
시간에 쫓기자 공산경찰인 내무서원들은 아직 처치하지 못한 반공인사들을 이미 시체로 꽉찬 구덩이에 끌고가서 그위에 계속 쓸어넣고 죽였습니다.
천주교 교회내에 수감했던 사람들도 미친개처럼 서둘러 학살했습니다. 구덩이가 시체로 넘치자 나머지 수감인들은 교회의 구내나 지하실에서 학살 했습니다.
우물속으로 던져버린 시체도 부지기수였습니다. 그리고 이 몸서리 나는 학살극을 끝낸 공산 악귀들은 도주하여 버린것입니다.
두개의 큰 우물에 퉁퉁불은 시체가 꽉차
시체를 검시(檢屍)하여보니 대다수가 학살되기 전에 구타당하여 몸이 성한데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이 수천명의 희생자들 가운데에 생존자는 일반 민간인 3명, 한국군 병사 1명, 미국인 2명을 합해 불과 6명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이 수천의 시체들은 모두 발굴 되었습니다.』
이어 클라크장군의 다음과 같은 맺음말은 우리를 더욱 슬프게 하고 한국민을 한층더 부끄럽게 하는 구절이었다.
『전대미문의 이 학살극은 바로 한국민의 동족상잔의 비극이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엄청난 일이 일어날수 있을까요!』
그러면 공산당의 비인간적 대량학살의 태풍이 스쳐간 직후 현장에 달려간 몇몇 사람의 증언을 들어보자.
1950년 10월 3일 유엔군이 대전을 탈환한 직후 대전형무소로 복귀령을 받고 선발대로 달려간 이준영(李俊榮·78)전교도관. 그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형무소 취사장 옆에 있는 직경 1m짜리와 2m짜리 두개의 큰 우물에 퉁퉁 불은 시체가 꽉 차 있었습니다. 우물위로 사람의 머리가 삐죽삐죽 나와있는데 모두 썩어가고 있었죠. 시체 썩는 냄새에 오장육부를 다 토해낼 지경이었습니다.
10여명 이상의 사람들을 한꺼번에 우물속에다 집어넣고 기어나오지 못하게끔 사람과 사람 사이에 벽돌과 기왓장을 함께 넣었습니다.
그 위에다 또 수십명의 사람을 쳐넣어, 마치 단무지 담그는 방식으로 사람들을 차곡차곡 포개서 생수장(生水葬)시켜 놓았습니다. 한 우물속에서 끄집어 낸 시신이 1백구(具)가 넘었습니다.』
이씨의 증언은 계속 이어진다.
『형무소 구내를 한바퀴 돌아보니 취사장 옆의 우물 두군데와 농사를 짓기위해 설치한 온상(溫床)속에 시체가 집단으로 모여 있었습니다…
온상에는 길이 60m 가량의 고랑이 양쪽으로 두개가 있었습니다. 양쪽 고랑에 각각 두줄로 시체가 포개어져 있었습니다. 어림잡아 2백구가 넘었습니다.』
「문민정부」도 「국민정부」도 외면한 희생자들
이렇게 비참하게 죽은 사람들은, 그러나 가족·친지이외에, 대한민국의 그 누구도 그 죽음을 알아주거나 보상해주려는 사람이 없다.
그들은 「전사자」도 아니며 「민주투사」도 못된다. 「전사자」는 「민주화 유공자」 만큼의 대접은 못받아도 죽은사람의 입김만한 「보상」과 「대접」은 받는다.
그러나 공직에 있었거나 제나름의 사회적 공헌을 해온, 공산당에 의한 「피학살자」는 그누구도 보상은커녕 죽음의 의미조차 알아주려 하지 않는다.
침묵속에 44년을 지내던 희생자 가족들은 1994년에야 「반공애국지사유족회」(회장 朴鍾薰·70)를 구성했다.
이들은 그후 해마다 현충일이면 추모제를 갖는 한편, 정부에 대해 대전형무소 학살사건 희생자들의 명예회복을 촉구해 왔으나 「문민정부」도, 「국민의 정부」도 줄곧 외면해 오고 있다.
게다가 6·25 남침이라는 비극의 동족상잔극 자체가 누가 저지른 범죄인지 희미하게 만들고, 심지어는 「누가먼저 쳐들어갔다 한들 그게 무슨큰 문제냐」며, 반민족적 범죄를 가리고 호도 하려는 세력이 권력의 중추에서 큰소리를 치는 세상이 됐다.
그래서 폭동을 일으킨 자들은 「민주투사」로 둔갑을 하고 대한민국의 체제를 전복하려다가 살아남은 자들은 무슨 명예인지 「명예」를 회복받고 보상까지 받고있다.
이름모를 자유전사 9백여명의 사연
대전형무소의 대학살극이 전개되고 있던 바로 그 싯점, 서울의 곳곳에서도 비슷한 학살극이 황급히 도주하는 인민군 또는 내무서원들에 의해 저질러지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알려진 가장큰 규모의 학살은 서울 종로4가에 있던 옛동대문경찰서를 3개월간 점령했던 내무서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들은 1950년 9월28일 오후 유엔군이 남산쪽에서 청계천4가를 거쳐 돈암동 방면으로 진격하기 직전 내무서 안에 강제구금했던 양민 약 80명을 밧줄로 묶어 종로4가 네거리 한구텅이로 끌고갔다.
이윽고 다발총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퍼졌다. 네거리 구덩이 마다에는 깊이 2~3m의 큰 웅덩이가 파여 있었다. 방공호로 팠던것이었다. 총을 맞아 쓸어진 사람들은 이 구덩이속으로 줄줄이 고꾸라졌다.
즉사한 사람, 꿈틀거리는채 생매장 된 사람, 신음하는 사람…등등으로 그것은 아수라장(阿修羅場) 그대로였다.
동대문시장 건너편 예지동(禮智洞)에서 한약도매상을 하던 친척집 문틈으로 이광경을 본 필자는 물론 공포에 떨고 있었지만 그후 지금까지도 그 광경은 가끔 악몽으로 재생되곤 한다.
살인자들이 사라진지 한시간쯤 이었을가. 오후 3시쯤 아마도 정찰목적인듯 헬리콥터 한대가 종로4가 상공을 선회하더니, 다시 한시간이 지난 4시쯤에야 꿈에도 그리던 국군(해병대)과 미군이 2열종대로 남산쪽에서 진입해 들어왔다.
이들은 불과 2~3시간전에 학살된 양민들(통학생등등)이 길가 구덩이속에서 꿈틀거리거나 신음하는걸 보고 「구출작전」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선명한 적십자가 뚜렷이 그려진 앰불런스가 몇대 달려왔다. 그후 앰뷸런스는 돈암동쪽으로 갔다가 다시 또와서 「환자」 또는 시체들을 싣고 갔다.
후에 알고보니 앰뷸런스들은 원남동의 서울대학병원으로 「환자」와 「시체」들을 운반했다는 것이다.
이 서울대학병원 또한 비극을 겪은 현장이기도 했다. 지금도 서울대학병원 후문 안쪽에 높이 약 5m의 흰 비석이 우뚝 솟아 있는데 비문은 다음과 같이 새겨져 있다.
서울대병원의 참극
1950년 6월 28일/여기에 자유를 사랑하고 자유를 위해 싸운 시민이 맨처음 울부짖은 소리 있었노라/여기 자유서울로 들어오는 이 언덕에/붉은군대들이 침공해 오던날/이름도 모를 부상병 입원환자/이들을 지키던 군인 시민 투사들이 참혹히 학살되어/마지막 조국을 부른 소리 남겼노라/그들의 넋은 부를 길이 없으나 길게 빛나고 봄볕의 숲속에 편히 쉬어야 하리/겨레여 다시는 이땅에 그 슬픈 역사를 되풀이 하지 말게 하라
창경궁 맞은편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부속병원으로 이르는 길 초입에 장례식장이 있다. 그 뒤 언덕위에 비석은 서있다. 그 꼭대기에 검은 까마귀 한마리가 외로이 앉아있다. 마치 그날 그 까마귀의 몇대조 할아버지(할머니)가 훨훨 날아다니며 시체들을 파헤친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필자가 여기서 복바치는 감정을 억누르며 그날을 회고하기보다 역시 그때 병원장의 손자벌은 될 1999년의 서울대 병원장의 이름으로 적힌 「이름모를 자유전사비유래」를 여기 옮기는것이 나을것같다.
『1950년 6월 25일 미명, 북괴군은 38도선 전역에서 일제히 공격을 개시, 파죽지세로 남하하여 수도서울의 최후방어선인 미아리 고개마저 돌파하고 창경궁 앞까지 다다르게 되었다.
당시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부속병원은 거의 1천여명에 달하는 부상장병들로 응급실, 입원실, 수술실은 물론, 병원 복도까지 가득차게 되었다.
고양·파주일대의 태극단원들의 희생
이때 병원은 南소위가 지휘하는 국군1개 경비소대가 지키고 있었는데 병원내 의사와 간호원들은 서울함락이 목전에 임박했음에도 환자를 두고 떠날수 없다며 피난도 잊은채 오직 환자치료에만 전념했다.
6월 28일 새벽, 국군 경비소대가 병원주위를 철통같이 방어하여 완강히 저항하자 북괴군은 1개대대 병력을 투입했다.
경비소대는 이곳 뒷산(당시 이곳은 조그만 동산이었다)에서 인민군 1개대대를 맞아 결사항전 했다. 그러나 중과부적으로 소대장 南소위가 전사하고 선임하사인 閔하사와 나머지 소대원 전원도 끝까지 사수하다가 장렬한 최후를 맞았다.
이곳 동산이 함락되자 북괴군은 병원에 난입하여 입원한 국군 부상장병과 일반환자 그리고 가족을 포함하여 9백명 이상을 산채로 구덩이에 묻거나 불에 태워 죽이고, 총을 난사하여 무자비하게 학살하는등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질렀다.
이곳이 바로 그 처참했던 역사의 현장이다. 나라를 지키고 병원을 지키다 그 젊은 나이에 장렬히 산화하신 이름모를 자유전사들, 그리고 환자들과 그 가족의 영령 앞에 머리숙여 명복을 빕니다. 고이 잠드소서.
1999년 현충일에 세우다
서울대학교 병원장
소위 「인민군」은 만 3개월간 수도서울을 비롯한 남한 곳곳을 유린하며 돌아다니다가 유엔군의 9?5인천상륙으로 패색이 짙어지자 또다시 곳곳에서 무자비한 비전투원 살상을 자행했다.
경기도 고양군과 파주군 일대에서 광란의 집단살인극을 벌인것도 그중의 한 예이다.
16세의 중학생(당시 6년제 구제중학)에서 23~24세의 대학생, 일반인에 이르기까지 38도선에서 가장 가까운 이 일대의 청소년 수백명은 적들의 남침이 개시되면서 모두 지하활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팔다리 자르고 입찢고 창으로 찔러
북의 기습남침이 시작된지 만 이틀만인 1950년 6월 27일 경기도 고양군 금촌에는 적도(赤徒)들이 이미 진입하고 있었다.
중학교 4학년생인 이순창씨(18세)는 경의선(京義線)으로 서울시내 각학교에 통학하던 학생들을 조직, 자발적으로 적의 통신망을 절단·교란시키고 경의선 철로를 파괴함으로써 적의 보급로를 차단할 뿐만 아니라, 소총·수류탄등 무기를 확보, 지하유격활동을 시작하였다.
당시 교통부육운국에 근무하던 이장복씨(李章馥·26세)가 제일 연장자로서 태극단(太極團)을 조직, 유격활동을 지휘하였다.
이들은 적들이 쳐들어온 6월 27일부터 유엔군이 진입하기 직전인 9월 20일까지 수색(水色)의 구1사단 사령부(현국방대학원)에서 금촌(金村)→백마(白馬)→청석(靑石)→산남(山南)→교하(交河)→능곡(陵谷)→광탄(廣灘)→송포(松浦) 등지에서 게릴라활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서울수복 약 1주일전인 9월 20일 고양군(高陽郡)과 파주군(坡州郡)을 장악하고 있던 인민위원회와 내무서등은 지금도 생존중인 좌익분자 김영식·백경배(가명)등 30여명을 앞세워 태극단원을 색출하기 시작했다.
총3백 88명의 태극단원중 송포의 이태영(李泰永·29), 이두영(24) 양씨가 제일먼저 붙잡혔다.
그리하여 송포에서 11명, 산남(山南)에서 13명, 청석 4명, 본부에서 10명등 38명이 생포되어 송포면 덕이리 은장으로 끌려가 무참히 학살되었다.
이들은 태극단원중 최초의 희생자 였는데 그 학살양상이 너무나도 잔인했다.
그중에서도 조직부장 홍원식(洪元植·20·일산)과 핵심단원 윤석만(尹錫萬·21·청석)은 팔과 다리를 자른다음 창으로 찌르고 입을 찢어 살해했다.
또 산남의 이응만(李應萬·33)은 도주하다가 되잡혀 낫으로 얼굴 두점·엉덩이살 두점을 도려내고 다리까지 잘라 죽였다. 금촌에서는 15~16세의 어린 학생들을 납북하다가 학살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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