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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과 기술(2003/07) |
이덕환(서강대, 화학과) |
물의 비정상적인 특성 물은 물리적, 화학적으로 매우 독특한 물질이다. 비슷한 크기와 구조를 가지고 있는 다른 물질에 비해서 녹는점(0oC), 끓는점(100oC), 밀도(997.05 kg/m3, 25oC), 증발열(40 kJ/mol), 열용량(75.327 J/mol/K), 유전상수(78.4), 임계점(647.096 K, 22.064 MPa), 표면장력(0.07198 N/m, 25oC), 그리고 점성도(0.8909 mPa s)를 가지고 있다. 물은 또한 액체가 얼어서 고체(얼음)이 되면서 부피가 늘어나는 유일한 물질이고, 온도와 압력에 따른 밀도, 점성도, 열용량, 음속 등의 변화도 독특한 특성을 나타낸다. 물의 비정상적인 특징은 무려 38가지에 이른다. 지구상에 생명체가 살 수 있는 것은 모두 물의 이러한 비정상적 특성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항온 동물의 경우에는 열용량이 큰 물을 이용해서 체온의 급격한 변화를 막을 수 있으며, 증발열이 크기 때문에 증발에 의한 수분의 손실을 막을 수 있고, 더운 환경에서는 수분의 증발을 이용해서 체온을 유지할 수도 있다. 또한, 이온이나 작은 극성 분자들을 안정화시켜 주는 효과가 커서 '만능 용매'로 알려진 물은 생명 유지에 필요한 다양한 화학 물질을 녹여서 생명체의 필요한 부분으로 운반하거나, 정교한 화학 반응이 일어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역할도 한다. 특히 단백질이나 핵산과 같은 생화학 물질의 경우에는 생체 내에서의 기능에 결정적인 3차원 구조를 유지시켜주는 역할도 한다. 그리고 비교적 쉽게 이온화할 수 있는 물 분자는 생체 분자들 사이의 양성자 교환을 쉽게 해주기도 한다. 그 뿐이 아니다. 물은 4oC에서 밀도가 최대가 되고, 고체인 얼음의 밀도가 액체의 밀도보다 오히려 더 작은 유일한 물질이다. 그래서 강, 호수, 바닷물이 어는 경우에도 얼음이 표면으로 떠올라 열교환을 방해하기 때문에 겨울에는 물이 어는 것을 지연시키고, 봄에는 쉽게 녹을 수 있게 해준다. 또한, 기온이 떨어지는 경우에 표면에 있는 물의 온도가 4oC 근처로 떨어지면 밀도가 증가해서 아래쪽으로 가라앉기 때문에 자연적인 대류가 일어나서, 결과적으로 수심이 깊은 바다나 호수는 쉽게 얼지 않도록 해준다. 그런 이유 때문에 기온에 의한 바닷물이나 호수의 온도 변화는 육지의 온도 변화의 1/3 정도에 불과하게 된다. 물 분자들의 수소 결합 물 분자 하나의 특성에 대해서는 많은 것이 알려져 있다. 산소 원자는 8개의 전자를 가지고 있고, 그 중 바깥쪽에 분포하고 있는 6개의 전자를 이용해서 화학 결합을 형성한다. 물 분자의 경우에 산소가 가지고 있는 전자 중에서 2개는 수소와 공유 결합을 형성하는 데 사용되고, 나머지 4개의 전자는 2개씩 쌍을 이룬 비공유 전자쌍으로 분포하게 된다. 그래서 물 분자의 공유 결합은 그림 1에서처럼 서로 104.5o의 각도를 이루게 되고, 그래서 물 분자는 겉보기에 구부러진 구조를 가진 것으로 보인다. 구부러진 물 분자에서는 전자들이 산소 쪽으로 치우쳐서 분포하기 때문에 산소 원자는 약간의 음전하를 갖게 되고, 수소 원자 쪽은 약간의 양전하를 갖게 되는 전기 쌍극자를 이루게 된다. 물의 유전 상수가 매우 커서, 이온이나 다른 극성 분자들을 쉽게 안정화시킬 수 있는 것은 물 분자의 바로 이런 특성 때문이다. 한편, 분자들 사이의 거리가 매우 가까운 액체나 고체와 같은 응축상에서는 물 분자들 사이에 그림 2와 같은 '수소 결합'이 형성된다. 수소 결합은 그 세기가 대략 상온에서의 열 에너지와 비슷하지만, 물의 물리적, 화학적 성질에 큰 영향을 미친다. 물의 비정상적인 특성은 대부분 물 분자들 사이의 수소 결합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다. 액체의 물에서는 100oC의 경우에는 대략 85%, 그리고 0oC에서는 95% 이상의 물 분자들이 서로 수소 결합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만약 물 분자가 곧은 구조를 가지고 있다면, 물 분자의 극성도 사라지고, 수소 결합도 불가능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물의 끓는점은 -80oC가 되어서 강이나 바닷물은 물론이고, 생명체의 몸 속에 있는 물도 모두 기체 상태로 존재하여 사라져 버릴 것이다. 물론 액체의 물 분자들은 대략 10-11초를 주기로 빠르게 진동을 한다. 그래서 물 분자들 사이의 수소 결합도 일정하게 유지되지 못하고, 끊어진 후에 새로 만들어지는 과정이 빠른 속도로 반복된다. 한편, 공유 결합으로 연결된 산소와 수소 사이의 거리도 10-13초의 주기로 빠르게 진동을 한다. 그래서 물 분자들의 열운동에 의한 진동과 공유 결합의 진동이 함께 일어나면, 두 개의 물 분자가 하이드로늄 이온(H3O+)과 하이드록사이드 이온(OH-)으로 분리되는 경우가 생기게 된다. 25oC의 온도에서는 순수한 물 1리터에는 그런 '자동 이온화'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H3O+과 OH-이 각각 10-7mole씩 존재하는 평형 상태가 유지된다. 2 H2O H3O+ + OH- 염산(HCl)과 같은 산(酸)이나 수산화 나트륨(NaOH)와 같은 염기를 넣으면, H3O+과 OH-의 농도가 바뀌게 되지만, 열역학적인 이유 때문에 H3O+과 OH-의 농도의 곱은 언제나 10-14의 값을 유지하게 된다. 생체에서 다양한 양성자 교환 반응이 쉽게 일어날 수 있는 것도 바로 물 분의 이런 특성 때문이다. 얼음과 물의 구조 우리 생활에서 일상적으로 볼 수 있는 얼음은 '얼음-1'이라고 부르는 육방정계(hexagonal)를 이루고 있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산소 원자에 두 개의 다른 물 분자가 수소 결합을 하고 있는 얼음에서는 중간에 다른 물 분자가 들어갈 수도 있을 정도의 큰 공간이 생겨서 밀도가 920 kg/m3으로 작은 값을 갖는다. 물론 얼음에서 물 분자의 규칙적인 배열은 작은 부분에서만 이루어지고, 얼음 덩어리는 그런 작은 결정들의 집합이다. 온도가 100K 이하로 낮아지거나, 압력이 1,000기압 이상으로 올라가면 물 분자들 사이의 수소 결합이 깨어지면서 물 분자들이 다른 모양으로 배열된 얼음이 만들어진다. 고체 상태의 얼음은 모두 12 종류가 알려져 있고, 밀도도 1.17~2.51 kg/m3으로 다양하다. 한편, 비교적 심한 열운동을 할 수 있는 액체의 물에서는 다른 액체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물 분자들의 위치가 고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일정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도 없고, 실험적으로 그 확인할 수 있는 방법도 없다. 다만, 얼음-1의 경우처럼 수소 결합을 하고 있는 물 분자들 사이의 빈 공간이 메워지기 때문에 밀도가 9% 정도 증가한다. 겨울에 수도관이나 장독이 얼면서 터지는 현상도 바로 수소 결합을 하고 있는 물 분자들이 부분적이기는 하지만 규칙적인 배열을 하기 때문이다. 물이 얼 때의 부피 변화에 의해서 대략 250 기압의 압력이 발생한다. 대부분의 물질은 압력을 높여주면 어는점이 올라간다. 높은 압력에서는 고체 상태가 더 안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물의 경우에는 압력을 높여주면 어는점이 오히려 내려간다. 수소 결합 때문에 일시적이기는 하지만 일정한 구조를 가질 수 있는 액체 물이 높은 압력에서는 무질서도가 더 큰 구조로 바뀌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효과는 매우 적어서 130 기압에서 물이 어는점은 -1oC로 내려갈 뿐이다. 따라서, 흔히 알려져 있는 것과는 달리 추운 겨울날 스케이트를 탈 수 있는 이유는 물이 어는점이 내려가기 때문이 아니라, 얼음의 표면에 노출되어 있는 물 분자들이 충분한 수의 수소 결합을 하지 못해서 액체의 물처럼 쉽게 움직일 수 있기 때문이다. 구조를 가진 물 강한 극성을 가지고 있는 물 분자들과 전하를 가진 이온 사이에는 강한 정전기적 인력이 작용한다. H+이나 Na+와 같은 양이온 주위에는 물 분자에서 약간의 음전하를 가진 산소가 가까이 분포하게 되고, OH-나 Cl-와 같은 음이온의 주위에는 수소 원자 쪽이 더 가까이 다가가게 된다. 정전기적 인력의 크기는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기 때문에 이온의 크기가 작을수록 더욱 증가한다. 따라서 크기가 작고, 전하가 큰 이온들 주위에는 물 분자들이 비교적 단단하게 결합된 '수화층'이 만들어진다. 이론적인 계산에 의하면 3, 4 또는 5개의 물 분자가 고리 모양을 이루거나, 6개의 물 분자가 3차원의 새장 모양을 이룬 '클러스터'가 안정한 것으로 밝혀지기도 했다. 280개의 물 분자로 구성된 이십면체 모양이 특별히 안정하다는 보고도 있다. 그러나 물 분자와 수소 결합을 할 수 있는 단백질 분자에 인접하고 있는 물 분자들이 어느 정도의 구조를 형성하고 있는 것은 인정이 되고 있지만, 활발한 열 운동을 하고 있는 물 분자들 사이에서 만들어지는 구조는 10-11초 이상 유지되지 못하고, 깨어진 후에 다시 새로운 구조가 만들어지는 과정이 반복되기 때문에 일반적인 '구조'와는 그 성격이 매우 다르고, 그런 물 분자들의 구조가 어떤 생물학적인 기능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물 분자들 사이에 일시적으로 형성되는 클러스터를 이용해서 독성 물질을 넣은 물을 무한히 희석해서 치료제로 사용하는 동종 요법(homeopathy)을 합리화하려는 시도는 열역학적으로도 옳지 않다. 눈송이의 아름다움 눈송이의 모양에 대해서 처음으로 관심을 가졌던 사람은 요하네스 케플러였다. 물 분자의 존재를 알 수 없었던 케플러는 눈 송이가 그저 둥근 모양의 공들이 모여서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1611년에 "육각형 눈송이에 대해서"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비록 물질을 구성하는 '분자'의 존재를 알지는 못했지만, 우리 눈에 보이는 거시적인 모양이 미시적인 입자들의 집합에 의해서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제안했던 셈이다. 1936년에는 벤틀리와 험프리스가 무려 2,400여 종류가 넘는 눈송이의 모양을 사진으로 남겼다. 눈송이는 실제로 얼음-1을 기본 구조인 육방정계에 속하는 얼음 입자들이 모인 것이다. 물 분자들의 수소 결합으로 만들어지는 6각 기둥의 각 면에 기체 상태의 물 분들이 흡착되면서 성장하는 속도에 따라서 다른 모양의 눈송이가 만들어진다. 눈송이의 모양은 눈송이가 만들어지는 온도와 기체 상태에서 수증기의 과포화 정도에 따라 크게 달라지는 것으로 밝혀져 있다. 그러나 온도와 과포화 정도에 따라서 6각 기둥의 각 면이 성장하는 속도가 달라지는 정확한 이유는 아직까지 밝혀져 있지 않다. 실제로 겨울에 내리는 눈은 물을 흡수하고 있는 작은 먼지를 중심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작은 육각 기둥 모양의 얼음 조각이 수증기로 과포화된 공기 속을 날아다니는 과정에 온도와 과포화 정도가 심하게 바뀌면서 다양한 눈송이의 모양이 생겨나는 것으로 밝혀져 있다. 그래서 실제로 겨울에 내리는 눈은 정확하게 같은 모양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다. 일정한 모양의 눈송이를 만들어내는 것이 더 어렵기 때문에 눈송이가 만들어지는 동안에 들려주는 음악에 따라 그 모양이 달라진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오늘날에는 과학적 원리를 이용해서 인공적으로 눈송이를 만들기도 한다. 인공눈은 사실 작은 물 방울을 고압의 공기와 함께 작은 구멍을 통해서 분출시키면 온도가 떨어지는 열역학적인 현상을 이용해서 만든 작은 얼음 조각이다. 아름다운 모습을 가진 천연의 눈송이에 버금가지는 못하지만, 겨울철에 눈이 내리지 않은 날씨에도 스키를 즐기기에는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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