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28일 본부 모임은 이번에도 은혜스러웠습니다.
설향목이 좋은 이유 중에 하나가 존경하는 여러 목사님들을 뵙고 도전도 받고 대화도 할 수 있다는 것이죠.
어제(8월 28일)엔 늘 제 뒷자리에 앉으시는 이명수 목사님께서 어제처럼 스님들이 전부 광장에 모인 것을 뭐라고 하는지 아느냐고 하시며 '야단법석'이라고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렇죠 야단법석이란 떠들썩하고 시끄러운 모습이라는 뜻으로 ‘야단(野壇)’이란 ‘야외에 세운 단’이란 뜻이고, ‘법석(法席)’은 ‘불법을 펴는 자리’라는 뜻입니다.
스님들이 전부 광장에 모여 불경을 외우고 하셨으니 야단법석이었지요.
내친 김에 저는 대학 4학년 때 수업시간에 혜초가 쓴 '왕오천축국전'을 읽으면서 알게 된 몇가지 불교적 용어가 우리 삶에 들어 온 것을 예를 들었습니다.
'이판사판(理判事判) '
이 말은 절간의 승려에게는 2가지 종류가 있는데 불경을 읽고 설법을 하는 승려는 理判(이판)이라고 합니다. 반면에 절간에서 주로 일을 하는 승려는 事判(사판)이지요. 그래서 승려 중에는 이판이거나 사판 이거나 둘 중에 하나입니다.
그래서 이거나 저거나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할 때는 이판사판이라고 굳어지게 되었지요.
(그런데 제가 이것을 배울 무렵엔 조계사 총무원장 자리를 놓고 싸움을 해서 신문에 늘 오르내려서 난장판도 요즘엔 있는 것 아니냐고 했었지요)
난장판 역시 불교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난장판은 '아수라장'이라고도 하는데 아수라들이 모인 현장 같이 어지럽고 정신 없다는 얘기입니다.
‘아수라는 수라라고도 하는데 범어 asura의 음역이라네요. 고대 인도에서부터 아수라는 전쟁과 투쟁을 일삼는 일종의 귀신으로 여겨지던 존재다. 더욱이 제석천[인드라신]과 싸우는 투쟁적인 못된 신쯤으로 간주되었다. 이로부터 아수랑이니 아수라의 싸움이나 하는 용어가 생겨났다.’-국어사전-
요령(瑤鈴)껏 해라. 요령을 핀다.
이 말 역시 불교에서 불경을 외울 때 방울을 흔드는 것을 말합니다. 이걸 시의적절하게 잘 흔들어야 하므로 요령껏 해라. 이런 말들이 생긴거죠.
아비규환은 불교의 지옥 중에 가장 혹독한 지옥, 아비지옥과 규환지옥을 합하여 아비규환이라고 하지요.
위의 몇 가지를 제가 이야기하자
이어서 이명수 목사님께서 ‘어처구니없다’는 무슨 뜻인지 말씀해 주셨습니다.
‘어처구니’는 맷돌질을 할 때 손잡이라고 해요.
맷돌질을 하는데 어처구니가 없으면 맷돌질이 안되니 안되는 거죠.
그래서 주변에 몇 사람이 ‘어처구니 없다’를 외치며 웃었습니다.
그 뒤로 ‘시치미 떼다’는 말의 유래를 말씀드렸지요.
매 사냥에서 매의 발목에 매었던 천 같은 표식입니다. 매가 길을 잃어도 주인을 찾아주기 위한 것이었는데 오히려 이 매의 발목에 붙인 시치미를 떼어 버리고 자신의 것으로 삼는 일이 생기기도 해서 ‘시치미를 떼다’라는 말이 생겼습니다.
이런 정보들이 오고갔지만 단연코 최고는 ‘어처구니없다’였습니다.
그런데 집에 돌아오는 차 안에서 돌아오는 주일 설교를 묵상하는데 ‘어처구니 없다’ 가 자꾸 생각이 나는 거예요.
원래는 무거운 맷돌을 힘들게 들여놓고 그것을 돌리는 어처구니가 없으면 돌릴수가 없으니 작은 물건일지라도 철저한 준비와 또한 그 역할이 중요하다는 의미인데,
제게는 좀 다르게 다가왔습니다.
마가복음 7장 1-23절의 말씀으로 바리새인들이 장로들의 유전이라는 율법의 잣대로 예수님과 제자들을 평가하고 정죄하고 비판하는 모습이 참 어처구니가 없었습니다.
맷돌이라는 본질은 놔두고, 그저 손잡이에 불과한 어처구니만 따로 떼어 내어 그것만을 붙잡고, 거기에 목숨을 걸고 있는 것으로 바리새인의 모습이 다가왔습니다.
제 목회에서 복음이라는 본질보다 다른 어처구니를 붙잡고 큰 소리치는 어처구니없는 목회자가 되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첫댓글 어처구니가 없는 것보다 더 어처구니가 없는 것은 어처구니만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