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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사랑이 포도주보다 나음이로구나
- 아 1:1-2:7의 주석과 현대적 의미 -
그 말씀 2004년 8월호를 위하여
宋濟根
1. 아가서 해석의 기초 : 제 2경륜의 책에서 제 3경륜의 의미로 재해석해야
아가서 해석은 논란이 많이 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정경성의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해석의 문제인데 이 두 가지가 사실은 서로 상관되어 있다. 먼저 이것이 구약성경에 포함되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일어난 논란은 예수님 당시 이전까지 올라갈 것이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이것이 남녀의 사랑을 담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의 내용과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라는 점이었다. 그리고 여기에 하나님의 이름이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이 그러할 것이다. 둘째로, 이것을 성경에 포함시킨다고 할 때에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구약적 상황에서도 그러하지만 신약적 상황에서 이것을 어떻게 해석하여 적용 설교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늘 어려운 숙제처럼 여겨졌다.
우선 첫째 문제에 대해서 보면 여기에 묘사된 남녀간의 사랑의 관계가 창조주 하나님과 이스라엘을 구속하시고 언약을 맺으신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관계를 전제로 하고 있기에 사실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창세기 1-2장(특히 2:23-25)에 묘사된 부부가 되는 남녀의 관계를 잘 발전시킨 것으로 보면 이상할 것이 없다. 창 2:23 자체가 시적으로 표현되어 아담의 하와에 대한 사랑의 마음을 표현한 것으로 보면 이것이 확대되고 발전된 양식으로 아가서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둘째 문제는 쉽게 대답할 수 있는 것 같지 않다. 이것은 특히 신약과 구약의 상관관계라는 신학의 가장 중요한 문제와 직접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약과 구약의 관계이전에 구약시대의 하나님 나라와 신약시대의 하나님 나라의 상관관계를 먼저 고려하면 이 문제는 잘 정리될 수 있다. 이미 필자가 표현한대로1) 구약시대의 제 2경륜과 신약시대의 제 3경륜으로 나누면 계시의 해석의 문제도 이해될 수 있다. 즉 아가서는 제2경륜시대의 계시로서 남녀간의 사랑을 묘사해도 사실상 문제될 것이 없는 것이다. 그런 사랑 자체가 하나님의 축복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제 3경륜의 시대가 열렸고, 이 시대에서 눈에 보이는 관계는 사실상 잠시 있다가 가는 것이므로 영원한 것을 추구하도록 되어 있다. 그래서 남녀간에 누리는 사랑도 좋지만 그 사랑을 절제하고 더 큰 하나님 나라에 대한 사랑으로 발전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오히려 남녀간의 배타적인 사랑이 하나님 나라를 방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아내나 남편을 미워할 준비를 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그리고 더 나가서 남녀의 관계 자체는 창조질서에 속하지만 일시적인데 그 관계가 지칭하는 영원한 관계인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언약관계를 묘사해 주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실제 구약에서도 (예 : 호세아서) 이렇게 표현한 경우도 있었는데, 신약시대에서는 이것을 더 명확하게 소개하고 있다. 엡 5:22-33까지는 부부관계에 대해서 말하면서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를 빗대어서 설명한다. 그런데 바울의 마음 속에는 본질인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를 빗대어서 그림자와 같은 남녀관계를 설명하는 것이 사실상 불합리하게 여겨진 것 같다. 영원한 관계를 사용하여서 천국에서는 남편도 아내도 없어지는 이 지상에서의 일시적인 관계를 설명하는 것이 격에 안맞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해서 말하노라” 라고 갑자기 선포한다 (엡 5:32).
그래서 우리는 오히려 아가서를 더 본격적으로 제 3경륜 시대에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즉 그리스도의 신부된 교회가 어떻게 수동적 혹은 능동적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에 반응하면서 살 것인가를 찾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보통은 인간인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능동적으로 할 것이 없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이것을 근본적으로 수정해 준다. 즉 이스라엘 편에서 능동적으로 사랑을 찾아나가는 과정을 잘 설명해주는 것이다. 사랑의 관계는 수동적, 능동적 어느 한편으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때 그 때마다 언약의 양당사자의 의지적 결정과 행동에 따라서 좌우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은 여기서 이 사랑을 관찰할 제 3자를 결코 허용하지 않고 모두 남자와 여자의 대화로 이루어져 있는데, 결코 남자 혼자의 monologue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더 명확하게 나타난다.
아가서의 이런 해석은 아가서가 가진 또 다른 중요한 이점을 나타내 준다. 그것은 개신교가 지나칠 정도로 개인신앙 위주로 발전되어 있는데 이것을 교정해준다. 즉 여기서 여자의 역할을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 개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교회인 것이다. 여기서 그리스도인 개인의 영적인 관계의 발전을 말한다기 보다 우선적으로 하나님의 나라인 교회의 그리스도에 대한 수동적, 능동적 사랑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가서는 이런 점에서 개신교의 신앙에 대한 결정적인 교정작업을 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
2. 발전되는 그리스도와 교회공동체와의 사랑관계
여기서 묘사되는 사랑은 정체된 것이 아니라 발전적인 것이다. 즉 초여름의 풋사과와 같은 사랑에서 여름철의 뜨거운 태양 아래서 익어지는 시간을 거쳐서 가을철의 잘 익은 사과와 같은 사랑으로 발전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즉 아가서 1장에서의 사랑과 8장에서의 사랑의 차원은 아주 다른 것이다. 1장의 사랑은 싱그럽고 푸르지만 여물지 않았다. 그래서 사랑표현이 아직 미숙하고 단조롭다 : “네 사랑이 포도주에서 지남이라 (1:2,3).” 그러나 2장(15절)의 작은 여우의 위기를 거치고 3장의 사랑하는 자를 잃어버리는 사건을 통과한다. 또 5장에서의 사랑하는 자가 결정적으로 떠나가는 모습과 폭풍우를 지나는 경험을 통해서 사랑을 회복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어서 6-7장의 완숙한 사랑의 모습을 보이며, 마지막으로 이제 막 사랑에 눈을 떠서 사랑의 행로를 시작해야 할 “우리에게 있는 작은 누이”(8:8)에 대한 격려를 하는 상태까지 발전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스도와 지역교회 혹은 거시적 역사적 공동체와의 사랑에 이러한 단계를 거친 발전을 이룰 수 있는 것이 엄청난 위로가 된다. 그러므로 아가서를 통해서 각 공동체의 발전단계를 점검해 볼 수 있는 탁월한 점도 있다. 이러한 점은 계 2-3장에서 어느 정도 나타나고 바울의 서신서 속에서도 그 모습을 볼 수 있다.
3. 아가서 1:1-2:7의 해석과 현대적 의미
3.1. 여자의 고백으로 시작됨 (1:2-8)
동양적 상황에서 아가서가 가장 충격적인 면의 하나는 여자의 고백으로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것도 아주 적극적인 고백으로 되었다는 것이다 (1:2-3). 물론 남자 편에서 여자를 향한 사랑이 전제되어 있기는 하다 : “내게 입맟추기를 원하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자의 사랑을 확신하며 그 사랑을 적극적으로 표현함으로 시작한다는 점이 특이하다. 이 점은 1:1-2:7의 아가서의 초반부의 중요한 특성이 되어 있다.
더 나가서 남자의 몸에서 나는 향기나는 기름과 그 권위로운 이름의 탁월함에서 나는 향기의 유사성으로 노래하는 문학적인 감각이 탁월한 여자를 본다 (1:3). 그래서 나만 아니라 예루살렘 여자들이 모두 이 남자를 사랑하는 것이 당연한 것을 나타낸다. 이어서 그 왕이 나를 침궁으로 인도하는 것에 대한 기대와 감격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잘 나타낸다 (1:4).
그러나 이제 처음으로 여자는 위기를 극복한다. 그것은 자신의 외모에 대한 자신없음이다 (1:5-7). 형제들이 자신을 아름답게 키운 것이 아니라 밖에 두어서 얼굴이 검어서 게달의 베두인의 검은 장막처럼 된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여자의 역설적인 발전을 보여준다. 그런 검은 자신의 얼굴을 솔로몬의 휘장이라고 적극적으로 확신있게 자기인식을 할 줄 안 것이다. 이런 확신은 남자의 사랑에 대한 확신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이런 확신을 가지고 남자가 일하는 양떼들이 있는 곳으로 적극적으로 찾으러 가는 모습과 그 만남에서 당당히 자신의 검은 얼굴을 보이려는 여자의 모습이 감동스럽다.
이제 교회공동체는 이런 면을 본받아서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변함없는 확신 속에서 적극적으로 나갈 수 있다.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삶을 경험한 교회는 구주의 이름이 얼마나 향기롭고 존귀하며 능력있는가를 경험해야 한다. 이어서 역사 속에 존재하는 공동체는 역사의 시련을 통해서 엄청난 상처와 고난을 지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으로 교회는 열등감을 가져서는 안되고 그리스도는 공동체의 그런 외적인 모습이 아니라 본래적인 건강한 검은 얼굴을 사랑하는 것을 확신하며 더욱 그리스도 앞으로 나가야 한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사역지로 달려가서 그를 마주 보려는 용기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이 용기를 그리스도는 엄청나게 사랑하는 사실을 확신해야 한다.
3.2. 남자의 고백 (1:8-11)
이어서 수동적으로 남자의 고백이 따른다. 여자가 염소새끼를 몰고 자신의 일터에 올 수 있는 길을 소개하며 환영한다 (1:8). 이어서 남자의 본격적인 사랑의 고백이 처음 시작되었다 (1:9-11). 이 고백은 우선 남성적이다 : “바로의 병거의 준마”. 그리고 여자의 상체를 묘사한다 : “뺨에 흘러내린 머리털” “목에 달린 목구슬”. 이런 것에 감동하여 흔히 남자들이 하듯이 여자를 꾸미고 싶어지는 것을 보여준다 : “금사슬을 은을 박아서 만들리라”.
이제 이런 적극적인 교회 공동체를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의 고백을 들을 때가 되었다. 그리스도를 찾는 길을 소개해 주며 함께 일을 하며 (“너의 염소새끼를 먹일지니라”), 공동체가 얼마나 전체적으로 그리고 구체적으로 아름답게 형성되었는가를 고백한다. 아마도 바울이 3년동안 사역하였던 에베소 교회나 빌라델비아 교회와 같은 모습일 것이다. 데살로니가 교회에 대한 바울의 칭찬은 이런 모습을 많이 닮아 있다. 그 교회들에 바울이 더 많은 결실을 맺기 위해서 남은 권고를 아낌없이 주는 것은 금사슬에 은을 박아 목거리를 해주고 싶은 아가서에서의 남자의 마음과 동일할 것이다.
3.3. 여자의 고백 (1:12-2:1)
여자는 특이하게 쌍방향으로 표현한다. 즉 자신이 정성스럽게 준비한 나도기름향이 남자의 마음을 흐뭇하게 하는 것을 알면서 동시에 남자 자신이 몰약향낭과 같고 엔게디의 포도원의 고멜화송이와 같다고 표현할 줄 아는 것이다 (1:12-14). 이것은 대단히 적극적이고 센스가 넘치는 발상이며 남자를 지극히 기쁘게 하는 것일 것이다.
이제 눈을 마주 보는 두 사람, 침상에 같이 마주 보는 두 사람의 환상적인 사랑의 모습을 소개한다 (1:15-17). 그런 사랑의 분위기를 더 빛나게 하는 것은 백향목 들보, 잣나무 석가래이다.2)
이어서 여자는 자신의 미모에 대한 처음으로 적극적인 확신을 표현한다 : “샤론의 수선화, 골짜기의 백합화” (2:1). 이것은 검은 얼굴의 결점을 극복하는 단계를 넘어서는 것이다.
이제 그리스도의 사랑의 고백을 받은 교회공동체는 더 적극적으로 그리스도와 하나를 이루는 관계롤 발전하고자 한다. 자신의 거룩하기 위한 노력은 나도향기처럼 그리스도에게 여겨질 것을 확신한다. 그렇지만 공동체에 사랑으로 다가오는 그리스도는 품안의 몰약향낭과 같고 엔게디 포도원의 고멜화송이와 같다는 것을 고백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사랑의 행동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의 행동의 가치를 제대로 아는 것이다.
교회 공동체는 더 나가서 샤론의 수선화와 골짜기의 백합화와 같은 자신의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확신을 가질 수 있어야 하는데 이렇게 자신에 대한 솔직하고 건강한 확신은 그리스도의 태도에서도 알 수 있는 것이다.
3.4. 짦은 남자의 고백 (2:2)
아가서 초반에서의 남자의 고백을 대체로 짧은데 이것이 대표적인 것이다. 여자의 모습을 가시나무 속에 자라나는 백합화로 특이하게 표현하였다. 이것은 강인함을 칭찬하는 말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교회공동체의 사랑에 대한 그리스도의 평가는 사실적이고 용기를 북돋게 하는 것이다. 버가모 교회에 주신 멧세시가 이와 유사하다 : “네가 어디 사는 것을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단의 위가 있는데라” (계 2:13). 거기서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죽었을 때에도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던 교회를 칭찬한 것이다.
3.5. 여자의 고백 (2:3-7)
여자의 고백은 점점 발전된다. 처음으로 입에서 체험된 것 같은 사랑을 수풀 속에서 발견한 익은 사과를 그 그늘에 앉아서 먹는 것으로 표현한다 (2:3). 그리고 남자가 잔치집으로 여자를 인도하는 것에 대한 자부심을 느끼고 그런 남자가 자신의 깃발과 같음을 예민하게 느끼고 고백한다 (2:4). 이어서 그런 사랑을 경험한 것이 자신에게 “탐닉된 사랑”(addicted love)과 같은 것임을 고백하고 건포도와 사과로 자신을 고쳐줄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요청한다 (2:5). 그러나 남자가 그런 자신의 머리에 베게하고 자신을 오른손을 안는 기쁨을 누리며 영원히 머무르고 싶은 사랑의 순간을 그 어느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싶은 선포를 과감하게 한다 (2:6-7).
교회공동체는 그리스도가 적극적으로 이끄는 사랑의 단맛을 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가 인도하는 모든 공적이고 역사적인 상황에서 얼마나 교회를 존귀하게 취급하는 지를 알고 그리스도 당신이 자신의 깃발과 같음을 경험하여야 한다. 이어서 그리스도와의 일방적일 정도로 탐닉된 사랑의 관계에 빠질 정도가 되어야 한다. 진젠돌프의 공동체가 그리스도의 피에 대한 집착으로 “나는 그리스도의 피를 먹고 사는 흡충”이라고 표현할 정도가 된 것과 유사할 것이다. 이어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깊은 체험을 하여서 그 어느 누구도 그 순간을 깨우지 않고 여기가 좋사오니 영원히 초막을 짓고 머무르자고 고백할 정도가 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