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노래는 우리 고유의 추임새와 외래(外來)의 추임새가 절묘하게(?) 결합된 ‘얼씨구 절씨구. 차차차’ ‘지화자 좋구나. 차차차’라는 후렴을 거쳐 ‘아니 노지는 못 하리라. 차차차’라는 가사로 마무리를 짓는다. 그런데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이 가사가 경기민요 <창부타령>에서 따온 것이라는 사실이다.
아니 노지는 못 하리라.
음악적으로 볼 때, 이 노래와 <창부타령> 사이에는 아무런 연관성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노래를 <창부타령>의 유행가 버전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이렇게 노골적으로 처음부터 놀기를 권하는 노래는 들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두 노래가 서로 탄생배경도 다르고 음악도 다르지만 그 근저에 흐르는 정서의 천박성에 있어서만큼은 서로 일맥상통한다고 생각했다. 본래부터 나는 <창부타령>을 비롯한 경기민요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삶의 진실을 외면한 듯 능청거리고 희희낙락하는 가락이 왠지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 마음이 이 양지(陽地)의 정서를 받아들일 준비가 전혀 안 되어 있었던 것이다.
김혜란의 서울굿 CD 표지 사진
내가 경기소리의 낙천성을 사심 없이 받아들이고, 진심으로 그 가락을 즐기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그 분기점이 된 것이 지난 94년에 있었던 김혜란 명창의 서울굿 공연이다. 물론 이 공연은 삶의 현장에서 연행되던 본래의 굿하고는 여러 가지 점에서 다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것을 보면서 서울굿이 이 지방 사람들에게 정서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를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것은 한마디로 놀자판이었다. 굿을 빙자해 한바탕 거나하게 놀아보자는 음모가 도처에 흘러넘치고 있었다. 심지어는 죽은 아버지의 혼을 만나 가족들이 눈물을 흘리는 대목에서조차도 진정한 슬픔은 찾아볼 수 없었다.
• 내가 당신한테 꼭 할 말이 있수. • 어서 하시구랴. • 절대 딴 맘 먹지 말고 시집가지 말고 있소. • 에이. 살아생전에도 나를 꼼짝 못하게 하더니. 죽어서 저승가면 그 버릇 고칠 줄 알았더니 아, 아직도 못 버렸수. • 아유, 내가 미인으로 보이는게 당신 밖에 없수. • 여보 영감. 그러나 저러나 나도 할 말 있소. • 아유, 실컷 하우. • 아, 저승에 가면 생전 늙지를 않는다던데 거기 젊고 싱싱한 여자들 많다는데 당신 장가 안 갔수?
이런 식으로 모처럼 찾아온 혼백과 농지거리를 한다. 앞에 상봉하는 대목에서 서로 눈물을 빼기는 하지만 이것은 짐짓 슬픔을 가장한 눈물일 뿐,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눈물은 아니다. 그래서 서로 ‘아이구 아이구’하고 우는 대목을 보면서도 슬쩍 웃음이 나온다.
바로 이런 것이 경기지방의 정서다. 경기 사람들은 세상살이를 하면서 겪게 되는 온갖 감정들을 모두 신명 속으로 끌어들이는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경기 소리는 언제나 산뜻하고, 시원하며, 흥겹다. 누군가 경기소리는 떠나는 임의 옷자락을 잡으려는 여인의 겉웃음 같은 소리라고 얘기한 것을 읽은 적이 있다. 슬프나 통곡은 아니고, 흐르는 눈물에도 살짝 교태가 깃들어 애교스러워 보이는 소리가 바로 경기 소리라는 것이다.
그날 공연을 지켜보면서 나는 비로소 경기소리가 가지고 있는 절대적 낙천성에 사심 없이 몰입할 수 있었다. 물론 이렇게 느끼게 된 데에는 김혜란 명창의 탁월한 가창력이 큰 역할을 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녀가 탁 트인 목으로 맛깔스럽게 불러나가는 소리를 듣고 있으니 그렇게 속이 시원할 수가 없었다. 가슴 속에 쌓인 스트레스가 확 풀리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경기소리는 우리 정서의 진정한 해방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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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별산대놀이
경기민요가 지니고 있는 독특한 정서를 시각적으로 표현한다면 아마 경기도 양주에서 전승되는 별산대놀이 쯤이 될 것이다. 같은 탈춤이지만 양주별산대 놀이의 춤사위는 봉산탈춤이나 강령탈춤의 그것과는 전혀 성격이 다르다. 동작의 선이 굵지도 않고, 능청거리지도 않는다. 손목과 고개를 까딱까딱하며 모든 춤사위를 깔끔하고 산뜻하게 처리한다. 탈을 쓰고 이렇게 까딱까딱 춤추는 것을 보고 있으면 매사에 뒤처리는 깔끔하지만 자기가 손해 보는 짓은 절대로 하지 않는 서울깍쟁이를 보는 듯 하다.
김혜란 명창이 멋들어지게 부르는 <창부타령>을 듣고 나서 나는 우리 음악의 화사한 양지(陽地)인 경기소리가 좋아졌다. 그 전에는 그 양지를 온전한 양지로 즐기지 못했었다. 아마 후천적으로 세뇌된 ‘노는 것’에 대한 죄의식과, 선천적으로 타고난 그늘 없는 소리에 대한 경멸이 이런 거부감을 불러 일으켰던 것 같다. 하지만 이제는 놀이를 그냥 놀이로 즐기고 싶다. 노는 데에도 그럴듯한 명분과 의미를 부여해야 직성이 풀렸던 나의 결벽증에 이제는 작별을 고하고 싶다. 이렇게 마음의 문을 열고나니 경기소리가 그렇게 맛깔스럽게 가슴에 와 닿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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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명창 이춘희
<노랫가락>은 <창부타령>처럼 순진무구하게 낙천적이지는 않다. 살짝 그늘이 드리워져 있는 소리이다. 한 절을 초장, 중장, 종장으로 구분해서 말하면, 처음 초장은 비교적 낮은 가락으로 시작한다. 그러다가 중장에 이르러 갑자기 소리를 높이 질러내는데, 이것이 음악적으로 일종의 클라이막스와 같은 효과를 낸다. 음을 도약시킴으로써 듣는 이의 감정을 한 단계 업 그레이드(upgrade)시키는 것이다. 그런 다음 마지막 종장에서 낮은 가락으로 감정을 추스르며 곡을 마무리 짓는다.
나는 개인적으로 중장에서 경험하는 이 시원한 업 그레이드가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바로 이 맛에 <노랫가락>을 듣고 또 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