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을 길게 들이쉬면서 ‘숨을 길게 들이쉰다’고 알아차리고,
숨을 길게 내쉬면서 ‘숨을 길게 내쉰다’고 알아차린다.
숨을 짧게 들이쉬면서 ‘숨을 짧게 들이쉰다’고 알아차리고,
숨을 짧게 내쉬면서 ‘숨을 짧게 내쉰다’고 알아차린다.
- 호흡관법경(呼吸觀法經)
밤사이에 온도가 뚝 떨어졌다. 빙하위의 얼음 땅이라서 그런가보다. 온도계를 보니 4도정도인데, 바닥에서 찬기운이 올라와서
더 춥게 느껴진다.
더군다나 텐트 출입구 한쪽의 지퍼가 고장이 나서 찬바람이 씽씽 들어온다. 머리를 반대로 하고 자는 수 밖에 없다.
분명히 스카르두에서 확인할 때만해도 새 텐트였는데 몇 일만에 고장이 났다는 것이 놀라울 뿐이다
오늘의 목적지는 K2가 첫 선을 보이는 콩코르디아(Concordia)다. 라틴어로 “조화”를 뜻하는 이곳은 해발 4650미터이며
발토로 빙하의 상류지역에 해당한다. 고로II에서 9Km가 조금 넘는 거리이며 대략 6시간 정도가 소요된다.
지금까지 다행스러운 것은 나를 포함해서 공산님과 요사니도 고소증으로 고생하지 않고 있다. 다만 식욕이 떨어져서 식사량이
많이 줄었다. 의무적으로 먹어야 버틴다는 생각으로 먹을 뿐이다.
아침의 여명을 받아 그동안 지나왔던 롭상스파이어, 캐세드럴 타워, 빠유피크등이 구름을 오고가며 아름답게 빛나고 있다.
모두의 고단한 행로가 다시 시작된다. 짐을 진 포터와 말의 오고가는 모습이 이제 익숙하기만 하다.
그리고 이들의 모습에서 척박한 자연 속에서 자신의 삶을 힘겹게 개척해온 선조들의 모습이 어렴풋이 느껴진다.
그들에 비하면 우리는 이방인이며 동시에 나약한 현대인이다. 우리가 트레킹과 모험을 기꺼이 즐기는 매니아라 하더라도
이 황량한 자연에서 그들의 도움 없이 스스로 살아남을 수는 없을 것이다.
이곳이 자본주의의 연장선상이라 해도 강자와 약자의 법칙은 존재한다. 그런 면에서 이들 포터족은 강자인 것이다.
한편 우리의 길은 순례의 길이다.
각자 자신만의 상념에 잠겨서, 자신만의 세계를 걷고 있는 이곳은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을 만나는 길이다.
K2라는 절대군주를 만나기 위해 찾아가는 이 길은 군주를 만나는데 목적이 있지 않다.
수많은 걸음과 거친 호흡을 느끼며 한발자국 내딛는 그 순간이 바로 목적이 된다. 그래서 과정과 목적은 둘이 아니다.
생각으로 생각을 없앨 수 없다. 걸으면서 걷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순간 나와 세계는 분리되어 머나 먼 과거와 미래를
떠돌아 다니게 된다. 현재에 온전히 있기 위해서, 그래서 과정이 나의 실존임을 알아차리기 위해서 쉴새없는 싸움이 계속된다.
고통스런 알아차림의 행보가 생각 너머로 몸에 각인될 때 구체적인 모습으로 드러나게 될 것이다.
나는 걷는다. 고로 존재한다. 지금 명확한 것은 다만 이것뿐이다.
멀리 군부대의 천막이 보인다. 군부대를 지나 10분 정도 거리에 오늘의 목적지인 콩코르디아가 있다고 한다.
지친 몸으로 기진맥진 걸어가는 앞으로 말이 쓰러져서 버둥거리고 있다.
아마 빙하에서 미끄러져 발이 부러진 것 같은데 마부는 안락사를 시킬것이라고 한다. 가슴이 아프다.
12시 반 드디어 콩코르디아에 도착하였다.
말 그대로 거대한 원형 광장 같다. 한껏 치솟은 주변으로 인해 이 곳은 왜곡되어 보인다.
구름이 오락가락하며 쉽게 K2를 보여주지 않는다. 브로드 피크와 가셔브롬 역시 짙은 구름 속에 들어가 있다.
콩코르디아 주위에는 K2(8611m), 브로드 피크(8047m), 가셔브롬I(8068m), 가셔브롬II(8035m) 같은 8000미터 넘는
봉우리들이 진을 치고 있다.
또한 미터 피크(Mitre Peak, 6025m) 및 초고리사(7665m), 스노돔(7150m), 시아강그리(7422m)등이 둘러싸고 있다.
< 구름에 가려 있는 가셔브롬 IV, III >
< 콩코르디아의 무지개 by Yosanee >
아스꼴리의 무지개를 닮은 콩코르디아의 무지개가 반짝인다.
K2는 쉽게 알현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발토로 빙하를 따라 이곳 콩코르디아까지 오면서 K2를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산과 산 사이에 꽁꽁 숨겨져 있다가 마침내 콩코르디아에서 전경을 드러낸다.
그리고 구름에 가려진 K2의 몸뚱이의 일부라도 보게되면 그 거대함에 압도될 뿐이다.
누군가를 짝사랑하게 되면 스스로를 왜소한 존재로 생각하게 된다. 꼭 감정적 사랑의 대상만이 그런 느낌을 주는 것은
아닐 것이다.
산 저편에서 서있으면서 보는 자 스스로를 왜소한 존재로 느끼게 하는 그 무게감, 바로 K2다.
K2의 원래 이름은 초고리(Chogori)이다.
초고리가 발티어라고 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는 티베트 말이다. 티베트어로 초고리는 초고(거대한) + 리(산)이란 뜻이다.
초고리에게도 짝사랑하는 대상이 있다. 바로 맞은편에서 빛나고 있는 초고리사(Chogolisa)이다.
사람들은 초고리사를 K2의 ‘신부봉’으로 부르고 있다.
억만년의 세월을 두고 서로 마주 보고있는 초고리와 초고리사는 스스로를 왜소하다고 겸손하게 느낄지도 모른다.
< 알현을 거부하고 있는 절대군주 >
< 군주의 아름다운 신부 초고리사 >
K2 맞은 편에서 콩코르디아의 야영지를 내려다보고 있는 미터(Mitre, 6025m)피크의 위용도 대단하다. 상대적으로 높지는
않지만 마치 독수리의 부리처럼 솟아있다.
< 텐트에서 바라본 미터피크 >
콩코르디아의 주변을 둘러본다. K2로 향하는 길이 어디일까 찾고 있는데 아래편 계곡에서 거대한 얼음동굴을 발견하였다.
높이 30미터, 너비 100여 미터의 얼음동굴 속으로 어마어마한 물줄기가 흘러들어가고 있다.
그리고 이 흐름은 다함도 없고 끊임도 없을 것 같다.
결국 이곳은 빙하지대의 끝에 펼쳐진 거대한 얼음동굴의 출구와 하나로 연결된 것이다.
기억되지 않는 수많은 시간을 지나 여기까지 왔다.
콩코르디아를 향해 몰려드는 수많은 미래들은 이곳에서 합해져서 과거로 흘러갈 것이고, 이곳의 수많은 과거의 지층들은
미래로 향하여 허물어 질 것이다.
마침내 운이 좋게도 잠시지만 K2가 모습을 드러낸다.
아직도 가야할 길이 더 있지만, 그동안 바라고 원했던 것이 눈앞에 서있다.
내 마음속에 오래전에 심어놓았던 종자가 싹으로 자라나 이제 내 앞에 현실화 되어 서있는 것이다.
기억되지 않는 수많은 시간을 지나 여기까지 왔다.
시공은 결국 하나로 연결된 지층이다.
나의 작은 산 K2를 숙제처럼 바라본다.
이제 어디로 갈 것인가...
저녁비가 내리면
시간의 지층이
허물어진다
허물어지는 시간의 지층을
한 겹씩 파내려 가면
먼 중생대 어디쯤
화석으로 남아 있는
내 전생을 만날 수 있을까
그 때도 나는
한 줌의 고사리풀
바람이 불지 않아도
저무는 바다 쪽으로 흔들리면서
눈물보다 투명한 서정시를
꿈꾸고 있었을까
저녁비가 내리면
시간의 지층이
허물어진다
허물어지는 시간의 지층
멀리 있어 그리운 이름일수록
더욱 선명한 화석이 된다
- 그리움도 화석이된다 by 이외수
첫댓글 멀리 있어 그리운 이름일수록
더욱 선명한 화석이 된다.
캬~~~~~~~~~
시간의 지층이 허물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