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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우.리.들.산 원문보기 글쓴이: 오로지
▲5월의 봉화산에...철쭉이 봉홧불처럼 타오른다 ⓒ백두대간학교 |
<백두대간12걸작선(傑作選)>⑦은 2011년 5월 28일 토요일, 복성이재에서 시작합니다. 시리봉과 봉화산을 잇고, 낙동강과 섬진강을 나누는 분수령인 고개입니다. 400여 년 전 천기(天機)를 보다 3년 내에 큰 전란(임진왜란)이 일어날 것을 예견하였다는 기인 변도탄의 이야기가 전해지는 곳이지요. 고개 이름이 복성이재가 된 것도, 마을 이름이 복성리가 된 것도 모두 변도탄의 이야기로 비롯된 것입니다.
변도탄은 큰 전란을 예측하고 상소하였다가 태평성대에 혹세무민한다 하여 삭탈관직되고 쫓겨 났습니다. 그는 전란이 일어날 것을 예측하고 피난처를 찾기 위해 천기의 기운을 살피던 중 북두칠성 중 복성이 남쪽을 비추는 것을 발견하고, 그 별빛을 따라 갔습니다. 남쪽으로 흐르던 복성 별빛이 멈춘 곳에 움막을 짓고 살았고 그가 집을 지은 재료는 쌀이었다고 합니다. 임진왜란 당시 마을 사람들이 왜적들과 싸우러 나갈 때 먹을 것이 없자 변도탄의 집을 뜯어 먹고 나갔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고개란 원래 민초들의 수많은 애환이 서려있는 곳입니다. 복성이재도 그러하지요. 혼례 치른 지 몇 날 며칠 되지도 않아 전쟁터로 향하는 서방을 먼발치에서라도 바라보겠다며 맨 발로 쫓아와 눈물 흘리며 생이별을 한 곳도 이 고개이고, 끝내 돌아오지 않는 서방 기다리며 녹아내리는 가슴을 쓸고 쓸다가 그대로 굳어져 망부석이 된 곳이 이 고개이겠지요.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낸 곳도 이 고개이고, 이제나 저제나 돌아오겠다던 은애하는 이를 기다리며 마음 졸이던 곳도 이 고개였겠지요.
어디 그 뿐인가요? 오랜 전란에 소식 없어 죽은 줄만 알았던 아들이 괴나리봇짐 메고 터벅터벅 넘어 오던 곳도 이 고개이고, 왜적들과 싸우겠다고 쌀로 만들어 놓은 집을 뜯어먹고 전쟁터로 나가던 이들이 넘던 고개도 이 고개이었겠지요. 그 복성이재 고갯길 한 편에 그다지 어울려 보이지 않는 복성리라고 쓰인 표지석이 서 있습니다. 그 표지석을 지나 산행을 시작합니다.
숲으로 들어갑니다. 봄을 보내고 여름을 맞기 위해 이미 무성해지기 시작한 숲 사이로 난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이내 무명봉을 지나 치재에 이르게 됩니다.
치재는 치재마을의 서쪽 언덕 위에 있는 고개입니다. 흔히 이용하는 교통로는 아니어서 지나는 이들이 많지 않은 고개입니다. 동쪽 가까이에 임도가 따라 놓여 있습니다. 이 지역은 각종 버섯류와 산과일, 산채나물, 고랭지 채소 등을 많이 생산됩니다. 고개라는 뜻의 '치'(峙)와 '재'가 합쳐져 지명이 되었습니다. '치'도 '재'도 모두 고개를 의미하는 말이니 '치재마을'은 아마도 '고개 많은 마을' 이라는 정도의 뜻을 담고 있지 않을까 합니다.
치재에 서면 흥부마을로 유명한 아영리 성리마을도 내려다 보입니다. 이 마을에는 판소리에 나오는 화초장 바위거리, 흰죽배미, 노리다리 등의 지명이 실제로 있다고 합니다.
치재에서 발걸음 이어 이름 없는 봉우리들을 넘으며 생명력 가득한 봄의 안온하고 평안한 숲길을 걷다 보면 이내 꼬부랑재를 지나 봉화산에 이르게 됩니다.
봉화산(919.8m)은 남으로 뻗은 백두대간이 남해 바다에 이르기 전 장중하게 꿈틀대며 솟아오른 곳에 위치해 있습니다. 이곳에는 나라의 위급한 소식을 알리는 봉수대가 있었기에 봉화산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습니다. 봉수대에 대한 기록은 고적 조사자료에 나와 있습니다. 기록은 "번암면 동화리 장안산 주(周) 140간(間) 석축(石築) 남원 함양 계(界)"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곧 봉수대는 번암면 동화리 장안산에 있고, 돌로 쌓았는데 둘레는 약 140칸(약252m)으로 남원과 함양 간의 경계선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 봉수대는 대략 통일신라 이후부터 폐지된 것으로 보입니다. 봉화산은 위 기록에서 볼 수 있듯이 전에는 장안산으로 불리었습니다. 봉화, 봉수대가 생기며 봉화산으로 불리우게 된 것이지요. 지금은 다만 봉화산 정상에서 동북쪽으로 1km 정도 떨어진 무명봉에서 '봉화산 봉화대'라는 팻말이 남아 있어 옛 자취를 느낄 수 있을 뿐입니다.
봉화산은 지금은 비록 이름만 남았지만, 5월이면 수많은 철쭉들이 봉홧불처럼 타오르며 온 산을 태웁니다. 철쭉으로 붉게 물드는 봉화산의 봄을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산행 자료]
[복성이재]
해발 601.4m. 전북 남원시 아영면과 장수군 번암면의 경계를 이루는 백두대간의 고개로서, 산줄기는 시리봉과 봉화산을 잇고, 물줄기는 낙동강과 섬진강의 분수령이다.
임진왜란(1592년)이 일어나기 전, 기인 변도탄이 천기를 보고 국가에 큰 전란이 일어날 것을 예측하고, 대비 할 것을 상소하였으나 평화로운 기운을 어지럽게 한다 하여 관직을 삭탈 당했다. 그후 전란을 대비하며 피난처를 탐색하던 중, 천기의 기운이 남쪽으로 비쳐 그 빛을 따라 지리산으로 향하는데 북두칠성 중에 복성 별빛이 이곳에 멈추었다. 변도탄은 별빛 멎은 곳에 자리 잡아 움막을 짓고 살았다.
이런 내력으로 인해 이 고개 이름이 복성이재가 되었다. 이후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모여 살게 되며 복성이 마을을 이루었다. 복성이재의 남쪽에는 삼국시대 백제와 신라가 서로 영토 쟁탈전을 벌였던 아막산성(전북지방기념물 제38호)이 있다.
[봉화산]
해발 919.8m. 명산 지리산에 가리어 그 이름조차 생소하게 들렸던 남원의 봉화산은 덕유산에서 지리산에 이르는 백두대간 남부 구간의 중간지점에 위치한 산이다. 행정구역상으로는 전라북도 남원시와 장수군, 그리고 경상남도 함양군의 경계를 이루는 산으로 무릇 우리나라에 봉화산이란 이름 붙은 산들이 수도 없이 많은 것처럼 이 산 역시 과거 봉화가 피어올랐던 산임에는 틀림없었을 터이다.
동네 뒷산처럼 보이던 봉화산은 5월 중순이 되면서 그 모습이 크게 달라진다. 해발 400∼500m 고지대에 위치한 아영면으로 접어들면서 단연 눈에 띄는 모습은 봉화산 서쪽 능선을 감싸고 있는 온통 붉은 철쭉밭이다. 마치 불타오르는 듯한 모습은 그저 말없이 지나는 여행객들이라 할지라도 입을 떡 벌어지게 할 만하다.
철쭉군락은 남원시 아영면과 장수군 번암면을 가로지르는 일명 '치재'(현지 주민들은 '짓재'라 한다)에서 백두대간 동쪽 능선을 타고 올라가 첫번째 봉우리에서부터 약 500m 구간에 걸쳐 등산로와 등산로 좌우 산비탈을 비집고 광활하게 펼쳐져 있다. 이 구간은 말 그대로 철쭉밭이다. 사방 팔방을 둘러보아도 철쭉밖에는 보이는 것이 없다. 심지어 좌우로 휘영청 불거진 철쭉나무들로 인해 산길이 아예 '철쭉터널'로 되어있는 곳도 있다.
봉화산 철쭉은 선연한 붉은빛을 띤다. 이곳 사람들은 봉화산 철쭉이 오히려 남원 운봉의 유명한 바래봉 철쭉이나 또는 심지어 지리산 세석고원의 철쭉보다도 더 곱고 화사하다고들 말한다.
이 철쭉밭에서 봉화산 정상까지 이어지는 능선길 곳곳에도 작은 규모의 철쭉군락이 듬성듬성 이어진다. 하지만 멀리 보이는 봉화산 정상까지는 1시간여를 더 가야 하며, 능선 오르막길인데다가 어떤 곳은 산길을 헤치고 나가기에도 쉽지 않을 만큼 철쭉 가지가 산 길을 가로막아 가뜩이나 좁은 등산로가 비좁아지기도 한다. 그래도 모름지기 산행을 목적으로 왔다면 국토의 등줄기 백두대간 산마루를 타고 철쭉 숲을 헤치고 또한 넓게 드리워진 억새평원을 지나 봉화산(919.9m) 정상에 서봐야 할 일이다.
봉화산 정상에 서면 사방으로 막힘없는 조망이 전개된다. 북으로는 전북의 오지, 장수군의 깊은 산골 지지계곡 골짜기 좌우로 장수의 진산 장안산(1,237m)과 무령고개, 그리고 경남 함양과의 경계인 백두대간 백운산(1,279m)의 웅장한 산줄기가 눈앞에 버티고 서 있다. 뒤돌아 남쪽을 바라보면 아영면 고원지대 들판너머로 천왕봉(1,915m)을 비롯, 반야봉과 바래봉까지 이어지는 명산 지리산의 장쾌한 산맥이 우뚝 솟아있다. 동으로는 함양 땅과 멀리 거창에까지 이르는 경상도 산하의 풍경이, 서쪽 아래로는 그림 같은 장수군 번암면 일대의 산골마을 풍경과 그 뒤로 뾰족하게 솟아 오른 만행산(910m) 등, 겹겹이 이어진 전라도 땅의 첩첩산중이 펼쳐진다.
봉화산 정상의 조망도 그렇거니와 특히 5월 철쭉이 아니더라도, 가을철에 이곳을 찾아도 후회하지 않을 듯싶다. 수만 평 드리워진 억새밭은 이웃한 지리산 만복대의 그것과도 견줄 만하기 때문이다. (자료 출처 : 숲ON)
글 출처 - 프레시안, 일부 사진 - 구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