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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번
척탄병들은 전투시 영예로운 맨 우측 대열을 형성하던 가장 키가 크고 힘센 엘리트 부대원
들이었습니다.
근위척탄병들은 그들의 존재만으로도 다른 병사들을 고무 시킬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엄격히 훈련받았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속도로 장전하여 정확히 발사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을 훈련시키고 유지시키는 비용은 다른 일반 전열보병들보다 훨씬 비싸기 마련이었습니다. 근위척탄병들의 명성은 올리버 크롬웰이 국왕 찰스2세를 폐위 시키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찰스2세가 왕정복고를 시도하며 군사력을 모으고
있을때 가장 먼저 이에 응한 것은 웬트워스경이 이끌던 근위연대 였습니다. 그들의 일부는 찰스의 왕정복고를 기도하며 프랑스에 주둔하고 있었고, 나머지 연대는 찰스를 보호하기 위해 창설되었던 존 러셀의 연대 였습니다. 후에 러셀과 웬트워스의 부대는 하나로 합쳐졌고
결국 제1보병근위연대로 알려진 부대가 창설 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워털루 전투에서 절정의 순간에 다시한번 유명세를 떨쳤고 그 이후 왕의 칙령에 의해 제1 근위척탄보병연대로
이름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바로 나폴레옹의 근위척탄병들을 격퇴시켰다고
믿어졌기 때문입니다.
47번
척탄병들은 그들 스스로를 최정예 병사들로 보았기 때문에 행군시 부대의 가장 우측을 도
맡았습니다. 거기에는 합당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오직 키가 크며 용감한 병사들만이 척탄
병이 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큰키와 강인한 체력은 돌격전에서 그들을 돋보이게
했습니다. 또한 그들의 신체조건은 백병전에서의 우위를 가늠하게 하는데 충분했습니다.
척탄병들은 그들의 부대에 대해 자부심을 가졌고 이러한 자부심은 그들로 하여금 명령에
절대 복종하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다른 보병들과 마친가지로 그들역시 중기병과 맞닥뜨렸을 때는 무척 조심스러워 해야 했고 유격대의 저격에 무척 취약했습니다.
역사적으로 척탄병 연대와 척탄병 대대는 임시적으로 조직된 공격부대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모든 전열보병 연대는 척탄중대를 보유하고 있었는데 중무장한채 의욕과 전투에 능한 이러한 병사들은 지휘관들에게 매우 유용한 직속 부대였습니다.
척탄중대는 척탄병연대가 창설 된 이후에도 계속해서 일반 전열보병 연대에 남아있었는데
그들 대부분은 수류탄을 사용하지 않았고 연대에서 가장 크고 힘센 병사들의 집단이
되었습니다.
48번
게릴라들은 군사적으로 조직된 부대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전시에 친지와 이웃들로
도적때들 처럼 전쟁을 수행했습니다. 그들은 사납게 싸웠고 넓게 산개해서 싸웠기
때문에 적의 병사들은 그들을 쉽게 맞추기 어려웠습니다.
그들은 매복전이나 저격전에서 탁월한 능력을 보이곤 했습니다.
지역의 지리에 익숙한 그들은 적의 침략군에 대항하여 어디에서 숨고 어디에서 나와 싸워야 할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훈련된 보병처럼 제대로 전열을 이뤄 싸울 수는 없었고 잘 훈련된 기병들과 전열보병 들과 마주쳤 을때는 핸디캡이 존재하기 마련이었습니다.
역사적으로 스페인사람들은 그들의 지배자가 침략자들과 평화협정을 체결한 후에도
오랫동안 대규모로 침략군에 대항해 싸웠으며 게릴라는 스페인어로 “작은전쟁” 을
의미합니다. 게릴라들이 지속적으로 전쟁을 수행 한 덕분에 프랑스군은 늪에 빠진
꼴이 되었고 나폴레옹은 스페인을 “궤양” 이라고 묘사할 정도 였습니다.
49번
빡쎄게 일하고 빡쎄게 마시는 그들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고생을 다 겪었습니다.
그들은 거칠었으며 그들의 상관들에게는 충성스러운 병사들이었습니다. 이 예거들은
그들이 죽을때까지 러시아군에 남았고 대다수는 노예병이나 다름 없었습니다.
그들은 고향을 떠나 생활하면서 야만스러운 행동으로 악명을 쌓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백병전에 적합하게 훈련 받지 못했으며 적들을 머스켓총탄
으로 쓰러눕히는것을 선호 했습니다.
이상하게도 짜르의 군대는 그들의 키에 의해 연대를 배정받았습니다. 키가 큰 사람은
언제나 척탄병이 되었고 키가 작은 사람은 무조건 야거 대대로 배속될 운명이었습니다.
하지만 키만 으로는 병사들의 자질을 보증 할 수 없었기 때문에 1811년 야전사령관
이었던 Barclay de Tolly는 이런 시스템을 뜯어 고쳤고 이제는 병사 개개인의 능력과
자질에 의해 부대의 배속이 결정 되었습니다. 하지만 더욱 이상하게도 키는 소련군에서도
문제가 되었는데 그것은 현실적인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키가 크거나 덩치가 큰 사람은
전차부대에서 복무할 수 없었는데 그 이유는 러시아제 탱크들이 피탄 면적을 줄이기
위해 가능한 차체를 작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50번
고도로 훈련되었으며 적들을 마주하고도 동요하지 않는 이들은 전열보병의 전술에 매우
잘 숙달되었습니다. 그들은 그들은 적에게 돌격하거나 “적의 배에 총알을 발사하는것”
보다는 굳은 의지로 대열을 형성하고 유지하는데 더욱 신뢰할 만 했습니다. 이 근접
대열은 적의 포격이나 저격에 취약했으며 그들이 전열을 이루고 있을때 적의 중기병
들에게 베어지기 쉬웠습니다. 그들의 마지막 위협을 격퇴하기 위해 그들은 사각방진
대형을 형성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일단 방진대형을 형성하면 적들의
기병대를 얼씬도 못하게 하는것이 가능했습니다.
영국전열보병은 1730년부터 1830년까지 브라운베스로 유명한 부싯돌식 머스켓 총으로
무장했습니다. 다른 국가들 역시 그들 의 제식 머스켓 으로 무장했습니다.
브라운베스는 프랑스제 머스켓보다 더 넓고 무거운 탄을 사용했으므로 적들이 영국군의
탄약을 탈취해도 쓸모가 없었습니다. 물론 이 납탄을 녹여서 다시 총에 맞게 제작할 수는
있었지만 탈취해서 그것을 바로 쓸 수는 없었습니다. 영국은 이 같은 점을 알아채고 프랑스
군의 탄약을 이용해 총열에 탄약을 넣은 뒤 개머리판을 바닥에 한번 살짝 내려치고 바로 사격을
하는 “탭-로드” 방식 사격을 하곤 했습니다.
46번
\n\nGrenadiers are elite troops, the tallest and strongest men, taking the position of honour on the right of the line during battle. Grenadier Guards have the ability to inspire their fellow soldiers just by their presence. They are incredibly disciplined and can reload their weapons with breathtaking speed and discharge them with high accuracy. Their extensive training makes them more expensive than line infantry.\n\nThe Grenadier Guards have a prestigious history that dates back to the time of Oliver Cromwell and the exile of King Charles II. Charles gathered troops around him in the hope of reclaiming his throne; one of the first of these units was Lord Wentworth’s Regiment of guards. These men remained in France following Charles’ restoration to the English throne, and another regiment was created to protect him, John Russell’s Regiment. Russell’s and Wentworth’s were eventually combined and became known as the 1st Regiment of Foot Guards. Their renown reached a peak at the battle of Waterloo where they were renamed, by royal proclamation, to the 1st or Grenadier Regiment of Foot Guards, because it was believed they had repulsed the Napoleon’s Grenadiers of the Guard.
척탄병들은 전투시 영예로운 맨 우측 대열을 형성하던 가장 키가 크고 힘센 엘리트 부대원
들이었습니다.
근위척탄병들은 그들의 존재만으로도 다른 병사들을 고무 시킬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엄격히 훈련받았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속도로 장전하여 정확히 발사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을 훈련시키고 유지시키는 비용은 다른 일반 전열보병들보다 훨씬 비싸기 마련이었습니다. 근위척탄병들의 명성은 올리버 크롬웰이 국왕 찰스2세를 폐위 시키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찰스2세가 왕정복고를 시도하며 군사력을 모으고
있을때 가장 먼저 이에 응한 것은 웬트워스경이 이끌던 근위연대 였습니다. 그들의 일부는 찰스의 왕정복고를 기도하며 프랑스에 주둔하고 있었고, 나머지 연대는 찰스를 보호하기 위해 창설되었던 존 러셀의 연대 였습니다. 후에 러셀과 웬트워스의 부대는 하나로 합쳐졌고
결국 제1보병근위연대로 알려진 부대가 창설 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워털루 전투에서 절정의 순간에 다시한번 유명세를 떨쳤고 그 이후 왕의 칙령에 의해 제1 근위척탄보병연대로
이름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바로 나폴레옹의 근위척탄병들을 격퇴시켰다고
믿어졌기 때문입니다.
47번
\n\nGrenadiers see themselves as elite soldiers, and occupy the place of honour at the right of the line on parade. They have good reason: only large, brave men become grenadiers, this size and strength makes them an impressive sight in a charge. It also gives them an advantage in melee combat. Grenadiers are a proud group and this pride makes for dedicated soldiers who will follow orders to the letter. Like other infantry, they must exercise caution when facing heavy cavalry, but they are also vulnerable to attack from skirmishers.\n\nHistorically, grenadier regiments and battalions began as ad-hoc assault groups. All line infantry regiments had grenadier companies; collecting these sub-units gave commanders a useful group of heavily armed, aggressive and skilful soldiers. Grenadier companies remained in line infantry regiments after the creation of grenadier regiments, but they largely abandoned using grenades: instead, each grenadier company became a “heavy mob” of the biggest and strongest soldiers in a regiment!
척탄병들은 그들 스스로를 최정예 병사들로 보았기 때문에 행군시 부대의 가장 우측을 도
맡았습니다. 거기에는 합당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오직 키가 크며 용감한 병사들만이 척탄
병이 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큰키와 강인한 체력은 돌격전에서 그들을 돋보이게
했습니다. 또한 그들의 신체조건은 백병전에서의 우위를 가늠하게 하는데 충분했습니다.
척탄병들은 그들의 부대에 대해 자부심을 가졌고 이러한 자부심은 그들로 하여금 명령에
절대 복종하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다른 보병들과 마친가지로 그들역시 중기병과 맞닥뜨렸을 때는 무척 조심스러워 해야 했고 유격대의 저격에 무척 취약했습니다.
역사적으로 척탄병 연대와 척탄병 대대는 임시적으로 조직된 공격부대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모든 전열보병 연대는 척탄중대를 보유하고 있었는데 중무장한채 의욕과 전투에 능한 이러한 병사들은 지휘관들에게 매우 유용한 직속 부대였습니다.
척탄중대는 척탄병연대가 창설 된 이후에도 계속해서 일반 전열보병 연대에 남아있었는데
그들 대부분은 수류탄을 사용하지 않았고 연대에서 가장 크고 힘센 병사들의 집단이
되었습니다.
48번
\n\nGuerrillas are not a recognised military organisation, but bands of comrades and neighbours who have adapted banditry into a way of making war. They fight hard, working in spread out formations that make them difficult for missile troops to hit effectively. They are best when employed in ambush, or as harassing skirmishers. Their “local knowledge” means they are able to hide and appear at will, using their homeland’s hidden places to help fight against invaders. They cannot be expected to fight in carefully dressed lines like disciplined soldiers, and as such are at a disadvantage against well-trained cavalry and infantry.\n\nHistorically, the Spanish people had an enormous capacity for carrying on wars against foreign occupiers long after their rulers had made their peace with an invader. Guerrillas often arose as part of a rebellion; the name is Spanish, and means “little war”. When his men were bogged down, Napoleon described Spain as an “ulcer”, thanks in part to the constant partisan warfare carried on by the guerrillas. They gave the French no peace or safety, even far from the front line.
게릴라들은 군사적으로 조직된 부대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전시에 친지와 이웃들로
도적때들 처럼 전쟁을 수행했습니다. 그들은 사납게 싸웠고 넓게 산개해서 싸웠기
때문에 적의 병사들은 그들을 쉽게 맞추기 어려웠습니다.
그들은 매복전이나 저격전에서 탁월한 능력을 보이곤 했습니다.
지역의 지리에 익숙한 그들은 적의 침략군에 대항하여 어디에서 숨고 어디에서 나와 싸워야 할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훈련된 보병처럼 제대로 전열을 이뤄 싸울 수는 없었고 잘 훈련된 기병들과 전열보병 들과 마주쳤 을때는 핸디캡이 존재하기 마련이었습니다.
역사적으로 스페인사람들은 그들의 지배자가 침략자들과 평화협정을 체결한 후에도
오랫동안 대규모로 침략군에 대항해 싸웠으며 게릴라는 스페인어로 “작은전쟁” 을
의미합니다. 게릴라들이 지속적으로 전쟁을 수행 한 덕분에 프랑스군은 늪에 빠진
꼴이 되었고 나폴레옹은 스페인을 “궤양” 이라고 묘사할 정도 였습니다.
49번
\n\nHard-working and hard-drinking, these hard men are hardened to every conceivable hardship; they are tough, and loyal soldiers to their superior officers. The jägers remain in the Russian army until the day they die, almost as military serfs; most of them were serfs anyway. They have a lifetime of experience of living off the land, and a fearsome reputation for being rather barbaric. Despite this, they are not well suited to the discipline of close combat, and are much more use when peppering an enemy with musket balls.\n\nStrangely, the Tsar’s troops were assigned regiments depending on their physical size. The tallest always became grenadiers, and the smallest were destined for the jäger battalions. But physique is no guarantee of soldierly qualities and in 1811 Field Marshal Barclay de Tolly changed the system so that personal merit and worth determined a man’s assignment. Even more strangely, this practice of “sizing” soldiers went on in the Russian Soviet army as well, but for the practical reason that tall or bulky men simply would not fit into tanks: the design philosophy of Russian tanks was to make them as low as possible, hence the lack of space inside.
빡쎄게 일하고 빡쎄게 마시는 그들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고생을 다 겪었습니다.
그들은 거칠었으며 그들의 상관들에게는 충성스러운 병사들이었습니다. 이 예거들은
그들이 죽을때까지 러시아군에 남았고 대다수는 노예병이나 다름 없었습니다.
그들은 고향을 떠나 생활하면서 야만스러운 행동으로 악명을 쌓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백병전에 적합하게 훈련 받지 못했으며 적들을 머스켓총탄
으로 쓰러눕히는것을 선호 했습니다.
이상하게도 짜르의 군대는 그들의 키에 의해 연대를 배정받았습니다. 키가 큰 사람은
언제나 척탄병이 되었고 키가 작은 사람은 무조건 야거 대대로 배속될 운명이었습니다.
하지만 키만 으로는 병사들의 자질을 보증 할 수 없었기 때문에 1811년 야전사령관
이었던 Barclay de Tolly는 이런 시스템을 뜯어 고쳤고 이제는 병사 개개인의 능력과
자질에 의해 부대의 배속이 결정 되었습니다. 하지만 더욱 이상하게도 키는 소련군에서도
문제가 되었는데 그것은 현실적인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키가 크거나 덩치가 큰 사람은
전차부대에서 복무할 수 없었는데 그 이유는 러시아제 탱크들이 피탄 면적을 줄이기
위해 가능한 차체를 작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50번
\n\nHighly disciplined and calm in the face of the enemy, these men are well trained in line infantry tactics. They can be relied upon to perform their duties with stolid determination rather than with dash and “fire in their bellies”. Their close ranks can make them vulnerable to artillery bombardment and skirmishers, and they will be ripped apart by heavy cavalry charges if they are in line. To counter this last threat, the unit can be ordered to form square. As long as discipline holds, an infantry unit in square should be able to see off enemy cavalrymen.\n\nThe weapon of the British line infantryman was the famous ‘Brown Bess’; a flintlock musket used, in various guises, from 1730 to 1830. Other nations had their own standard pattern of musket. The Brown Bess used a large heavy ball that would not fit into French muskets, meaning that British ammunition captured on the battlefield was useless. It could be melted down and recast, but not immediately fired at its former owners. The British discovered that, in times of crisis, it was possible to “tap load” a musket by banging the butt on the ground. The bullet was jogged down the barrel, and could then be fired.
고도로 훈련되었으며 적들을 마주하고도 동요하지 않는 이들은 전열보병의 전술에 매우
잘 숙달되었습니다. 그들은 그들은 적에게 돌격하거나 “적의 배에 총알을 발사하는것”
보다는 굳은 의지로 대열을 형성하고 유지하는데 더욱 신뢰할 만 했습니다. 이 근접
대열은 적의 포격이나 저격에 취약했으며 그들이 전열을 이루고 있을때 적의 중기병
들에게 베어지기 쉬웠습니다. 그들의 마지막 위협을 격퇴하기 위해 그들은 사각방진
대형을 형성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일단 방진대형을 형성하면 적들의
기병대를 얼씬도 못하게 하는것이 가능했습니다.
영국전열보병은 1730년부터 1830년까지 브라운베스로 유명한 부싯돌식 머스켓 총으로
무장했습니다. 다른 국가들 역시 그들 의 제식 머스켓 으로 무장했습니다.
브라운베스는 프랑스제 머스켓보다 더 넓고 무거운 탄을 사용했으므로 적들이 영국군의
탄약을 탈취해도 쓸모가 없었습니다. 물론 이 납탄을 녹여서 다시 총에 맞게 제작할 수는
있었지만 탈취해서 그것을 바로 쓸 수는 없었습니다. 영국은 이 같은 점을 알아채고 프랑스
군의 탄약을 이용해 총열에 탄약을 넣은 뒤 개머리판을 바닥에 한번 살짝 내려치고 바로 사격을 하는 “탭-로드” 방식 사격을 하곤 했습니다.
51번
\n\nHis presence alone is enough to inspire battle-weary troops to fight on, even in the bleakest of situations: a general who carries the respect of his troops (if not his fellow officers) is a valuable asset. Although cavalrymen lead from the front, it is advisable to keep this man away from particularly dangerous fights, for his protection if nothing else.\n\nHenry Paget, the Earl of Uxbridge, later Marquis of Anglesey, was Wellington’s cavalry commander during the 1815 Waterloo campaign. This was not a comfortable arrangement for either of them, as Paget had proved himself to be something less than a gentleman by seducing, and running off with, the wife of Wellington’s youngest brother. This social gaffe put a bit of a crimp on what had been a distinguished military career as a cavalry leader. Nobody denied that Paget was courageous and skilful, but he was a cad and a bounder. He is also the man who had his leg shot off at Waterloo in the middle of a conversation with Wellington. It is not recorded whether their dry exchange of remarks: “By God, sir, I've lost my leg!” and “By God, sir, so you have!” was accompanied by an excusable smirk on Wellington’s behalf.
\n\n그는 단지 자신의 존재만으로도 전장에 염증을 느낀 병사들은 물론 절망적인 상황에 처한 병사들까지 고무시킬 수 있습니다. 부하들에게 존경을 받는 장군은 진정 나라의 보배라 부를만 합니다. 장군은 비록 최전방에서 자신의 호위기병대를 이끌기는 하지만 가급적이면전장에서 그를 멀리 떨어뜨려 놓는 것이 현명한 방법입니다. \n\n욱스브릿지의 백작이자 훗날 앵글시의 후작이 되었던 Henry Paget은 1815년 워털루 전역에서 웰링턴 장군의 기병지휘관으로 활약했습니다. 그같은 인사 조치는 당사자들에게는 그다지 내키지 않은 것 이었습니다. 왜냐하면 Henry Paget은 신사답지 못하게도 웰링턴 장군의 막내동생의 아내를
유혹해 달아났던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그는 자신의 기병지휘관으로서의 경력에 오점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누구도 Paget이 숙련되고 용감한 군인이라는
점을 부정 할 수 없었지만 그는 상스럽고 천박한 남자라고 여겨졌습니다. 다음은 두 사람에 관해 전해져 내려오는 일화 중 하나입니다. 워털루 전투 당시 Paget이 웰링턴 장군과의 대화 도중 누군가가 쏜 총탄에 맞아 다리를 잃게 되자 그는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 맙소사! 웰링턴 경, 전 제 다리를 잃었습니다! ” 그러자 웰링턴이 말했습니다. “ 맙소사! 페짓 경,
그랬군! ” 이 무미건조한 대화 내용이 실제 였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웰링턴의 입장을 고려해 보면 그러한 빈정거림은 충분히 이해할 만한 것 이었습니다.
52번
\n\nHorses cannot stand the smell of camels, and this gives all camel riders the advantage in melee. However, these soldiers are most effective when using their firepower to harass enemies, whittling down their numbers to the point where a charge will break them. They are also swift and very manoeuvrable, and this can be used to keep them out of trouble as well as send them to a critical point in battle. They will not, however, survive for long if they are sent against a disciplined and well-handled line infantry unit.\n\nHistorically, the Bedouin people talked before resorting to the feud, although they were very adept at defending themselves when needed. Life in the desert was harsh and unforgiving, and unnecessary squabbles or attempts to save face through violence did nothing for a man’s survival. The Bedouin were raiders on other folk but that was a matter of survival, and directed, as often as not, against outsiders.
\n\n 말들은 낙타의 냄새를 견딜 수 없어 하기 때문에 낙타기병들은 근접전에서 어드밴티지를 얻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병사들은 침략군을 향해 원거리에서 총을 발사할 때가
가장 효율적입니다. 만일 잘 짜여진 적진을 향해 돌격할 경우 대형은 와해되고 말 것입니다. 그들은 매우 민첩하고 기동성이 빠르므로 전투의 결정적인 지점에 신속히 투입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는 반면, 만일 숙련된 전열보병의 대열을 상대해야 할 경우 생존을 장담할 수 없었습니다. \n\n역사적으로 베두윈족은 항상 분쟁을 끌고 다닌다는 평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필요할 경우 스스로를 잘 보호 할 줄 알았습니다. 사막에서의 삶은 가혹하고도 무자비한 것 이었으며, 불필요한 분쟁이나 체면치례를 위한 싸움은 사막사람
들에게는 불필요한 것 이었습니다. 베두윈은 약탈자들이긴 했지만 그것은 생존을 위한
한 가지 방식이었으며, 또한 조직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이러한 약탈은 종종 외국인들에게도 자행되곤 했습니다.
53번
\n\nHowitzers fall somewhere between guns and mortars, the other main artillery types. Like guns, they can be moved, if slowly. They do not fire straight at the target, but lob shots high into the air to plunge down on a target. The charge of powder and the barrel angle can be varied, which means a howitzer can lob missiles over a wall or intervening woods. In close action, they can fire canister rounds directly into enemy formations, blasting them with hundreds of musket balls. These experimental batteries can also fire carcass shells and quicklime rounds, setting fire to enemy structures or poisoning enemy troops with caustic chemicals.\n\nHistorically, ballistics was not an imperfectly-understood science and, apart from inaccurate targeting, a shell did not necessarily do any damage when it arrived. Erratic winds could send shells off course. Shell fuses had to be lit while still in the barrel, and the length of fuse judged to match the flight time. If the fuse was too short, the shell could explode in mid air; too long and the enemy might be able to put it out before it exploded!
\n\n 곡사포는 주요 야포 중 직사포와 박격포의 중간 정도 되는 유형의 포입니다. 만일
느리게 움직인다면 그것들은 직사포 처럼 기동할 수 있었습니다. 곡사포는 적을 향해 수평
사격을 할 수는 없었지만 롭-샷을 이용해 하늘로 높이 쏘아 올린뒤 땅위의 목표물로 내리
꽂는 방식의 사격을 할 수 있었습니다. 화약의 양과 포신의 양각을 조정해 다양한 각도의
목표물을 향해 사격하는 것이 가능했는데 이것은 벽 뒤에 있거나 울창한 숲 속에 있는 적에게 포탄을 쏠 수 있음을 의미했습니다. 근 거리 전투에서는 적의 대열을 향해 직접 산탄포탄을 사격할 수 있었는데 이때 적에게 발사한 포탄이 파열되면서 내부에 탑재한 수백발의 머스킷 탄환이 발사 되었습니다. 이 실험적인 포는 소이탄과 생석회탄을 발사할 수도 있었는데 이 포탄들은 각각 적의 건물을 전소시키거나 또는 유독성 화학성분을 이용, 적의 인마살상을 하기 위해 제작되었습니다. \n\n 역사적으로 탄도무기들은 불완전하고 미숙한 수준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조준은 정밀하지 못했고, 포탄은 설사 정확히 맞았다 하더라도
목표물에 충분한 데미지를 입히지 못했으며, 풍향의 변동에 영향을 받아 포탄은 조준한
목표물을 벗어나기 십상이었습니다. 도화선은 포탄을 포신 안에 장전을 한 후에 불을 붙여야 했는데 이때 도화선의 길이에 따라 포탄의 체공시간이 결정 되었습니다. 만일 심지가
너무 짧을 경우 목표물에 도달하기 전에 공중에서 터져 버렸고, 심지가 너무 긴 경우 적들이 떨어진 포탄으로 달려가 타고 있는 심지를 잘라내 버리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54번
\n\nHowitzers fall somewhere between guns and mortars, the other main artillery types. Like guns, they have limited mobility and are slow moving, but are they not as accurate as cannons. They do not fire straight at the target, but lob shots high into the air to plunge down on a target. The charge of powder and the barrel angle can be varied, which means a howitzer can send an almost-vertical shot over a wall. Given such an ability, they are best employed to bombard areas where enemies are concentrated. In close action, they can fire canister rounds directly into enemy formations, blasting them with hundreds of musket balls.\n\nHistorically, howitzers were not easy to use. Ballistics was not a perfectly understood science and, apart from inaccurate targeting, a shell did not necessarily do any damage when it arrived. Erratic winds could send shells flying off course. Shell fuses had to be lit while still in the barrel, and the length of fuse judged to match the flight time. If the fuse was too short, the shell could explode in mid air; too long and the enemy might be able to put it out before the shell exploded!
\n\n 곡사포는 주요 야포 중 직사포와 박격포의 중간 정도 되는 유형의 포입니다. 만일
느리게 움직인다면 그것들은 직사포 처럼 기동할 수 있었습니다. 곡사포는 적을 향해 수평
사격을 할 수는 없었지만 롭-샷을 이용해 하늘로 높이 쏘아 올린뒤 땅위의 목표물로 내리
꽂는 방식의 사격을 할 수 있었습니다. 화약의 양과 포신의 양각을 조정해 다양한 각도의
목표물을 향해 사격하는 것이 가능했는데 이것은 벽 뒤에 있거나 울창한 숲 속에 있는 적에게 포탄을 쏠 수 있음을 의미했습니다. 근 거리 전투에서는 적의 대열을 향해 직접 산탄포탄을 사격할 수 있었는데 이때 적에게 발사한 포탄이 파열되면서 내부에 탑재한 수백발의 머스킷 탄환이 발사 되었습니다. 이 실험적인 포는 소이탄과 생석회탄을 발사할 수도 있었는데 이 포탄들은 각각 적의 건물을 전소시키거나 또는 유독성 화학성분을 이용, 적의 인마살상을 하기 위해 제작되었습니다. \n\n 역사적으로 곡사포는 다루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탄도무기들은 불완전하고 미숙한 수준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조준은 정밀하지 못했고, 포탄은 설사 정확히 맞았다 하더라도 목표물에 충분한 데미지를 입히지 못했으며, 풍향의 변동에 영향을 받아 포탄은 조준한 목표물을 벗어나기 십상이었습니다. 도화선은 포탄을 포신 안에 장전을 한 후에 불을 붙여야 했는데 이때 도화선의 길이에 따라 포탄의 체공시간이 결정 되었습니다. 만일 심지가 너무 짧을 경우 목표물에 도달하기 전에 공중에서 터져 버렸고, 심지가 너무 긴 경우 적들이 떨어진 포탄으로 달려가 타고 있는 심지를 잘라내 버리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55번
\n\nIn effect, a small ship of the line is sawn in two, horizontally, and the top deck removed completely. The resulting ship has a hull that was originally constructed to withstand the recoil of heavy guns and, as a result, it is far stronger than an ordinary, purpose-built frigate. The loss of a deck and guns improves the ship’s handling too, and a razee is manoeuvrable and speedy. The overall result is a very strong, powerful vessel that is better than its donor battleship or a frigate.\n\nHistorically, few razees were actually made, as sacrificing a ship-of-the-line to make a weaker vessel was not an action that many admiralties could get their political masters to approve. However, one of the most successful examples was HMS Indefatigable, under Edward Pellew. In the company of another frigate, Pellew took on, and defeated, the Droits de l'Homme, a French 74 ship-of-the-line, in 1797. This victory was rightly considered a stunning feat of seamanship and command. During the next year or so, Pellew and the Indefatigable went on to take a further nine vessels.
소 전열함의 두 가지 외형적 차이점은 바로 뱃머리가 낮다는 점과 상갑판이 완전히 제거되었다는 것 이었습니다. 이러한 함선들은 중포의 반동을 견딜 수 있게 제작 되었는데, 이로 인해 일반적인 목적으로 건조된 프리깃 함선들보다 훨씬 더 튼튼한 선체 구조를 갖게 되었습니다. 갑판을 제거하고 포를 실은 덕에 함선의 조향성이 좋아졌고 기동성과 속도 또한
증가하였습니다. 전체적으로 봤을 때 이 함은 도너급 전함이나 프리깃보다 훨씬 더 튼튼하고 강한 화력을 낼 수 있었습니다.
\n\n 역사적으로 봤을때 레이지함은 가급적이면 전열함을 만들고 싶어하는 해군성 관료들 때문에 소수만이 건조 되었습니다. 하지만 레이지함의 가장 성공적인 예 중 하나가
에드워드 펠로의 지휘하에 있던 HMS 인디패티거블 함이었습니다. 1797년, 인디패티거블함은 전단의 다른 프리깃함 한 척과 같이 Droits de l'Homme가 지휘하던 74문을 탑재한
프랑스 전열함을 격침 시켰습니다. 이 승리는 명백히 뛰어난 조종술과 감투정신, 그리고
탁월한 지휘 덕분 이었습니다. 몇 년후 동안 펠로우와 인디패티거블은 9척의 군함을 더 지휘하게 되었습니다.
56번
\n\nIn horse artillery units everyone in the gun crews rides into battle: drivers ride the lead horses in teams, while gun crews sit on the gun limbers. The Artillerie à Cheval! represent a good balance between speed of movement and firepower. The crews are highly experienced and disciplined, and their intimate knowledge of the guns enables them to deliver accurate, devastating shots at long range.\n\nHistorically, these men and their cannons were part of Napoleon’s Imperial Guard, and held in the highest regard by the emperor. Admittance to the Imperial Guard was extremely tough and, because only the very experienced or very good gained entry, the Guard could boast of the very best gunners in Europe. The horse artillery division was the elite within the elite, and got the best of everything. When the supply of suitable horses ran low in 1815, Napoleon ordered his Horse Grenadiers to give up their mounts to be draft animals for his beloved horse artillery.
\n\n기마 견인포병대에서는 포병들이 말을 타고 전장에 투입되었습니다. 각 포대에서는 기수가 말을 몰았고 포대원들은 포가에 걸터 앉아 이동 했습니다. Artillerie à Cheval! 은
기동속도와 화력이 잘 조화된 이러한 기마 견인포병대였습니다. 포대원들은 고도로 숙달,
훈련 되어 있었으며 포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바탕으로 원거리에서 가공할 정도로 정확한
사격을 했습니다.\n\n역사적으로 이들은 나폴레옹 제국근위대의 일원 이었고 이들은 나폴
레옹에게 매우 총애를 받았습니다. 제국근위대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매우 경험이 풍부하거나 큰 공을 세워야만 했으므로 들어가는 것이 무척 힘들었고 따라서 이들은 근위대의 일원으로서 전 유럽에서 가장 우수한 포병대임을 자랑할 수 있었습니다. 기마 견인포병대는 엘리트 중의 엘리트 였으며 모든 면에서 최고였습니다. 1815년이 되어서 전투용 말의 공급 부족이 심해지자 나폴레옹은 그의 기마척탄병들에게 공급 될 예정이었던 전투용 말을 걷어들인 후 그의 총애하는 기마 포병대에게 지급할 정도 였습니다.
57번
\n\nIn the hands of a good master, a brig is a handy little ship, and can almost turn in its own length. The square-rigged sails allow precise control. A good helmsman can swiftly bob in and out of range of larger, deadlier ships whose cannons could demolish the brig’s weak hull. This manoeuvrability makes up for the light armament, which consists of only 6-pounder cannons, which have little real firepower in naval terms.\n\nHistorically, the United States Navy favoured brigs, particularly on the Great Lakes. Brigs, like the USS Argus, account of themselves against the Barbary Pirates along the North African coast. United States traders had suffered at the hands of the pirates after the Revolution; the Barbary Pirates had an agreement to leave British and British colonial ships alone, but after the successful rebellion, they considered the newly-flagged American ships to be fair game. Today, a brig is more commonly understood to be a ship’s prison cells, a usage that is probably due to the US Navy’s use of brigs as prison hulks.
\n\n 숙련자가 조종할 경우, 브릭은 자신의 선체 길이 만큼만을 회전반경으로 할 수 있을
정도로 조종하기 쉬운 작은 배였습니다. 사각식의 범장을 한 돛은 정밀한 조향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숙달된 조타수가 키를 잡을 경우 브릭에게 치명적인 위협을 줄 정도로 크거나
중 무장을 한 배로부터 신속히 도망 칠 수도 있었습니다. 이런 기동성으로 말미암아
바다에서는 경무장이라고 할 수 있는 6파운드 대포로 무장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n\n역사적으로 미합중국 해군은 브릭을 선호했는데 오대호 연안에서 특히 더 그랬습니다. USS 어거스 같은 함선은 북아프리카 해안에서 바바리 해적들을 상대로 용감한 활약을
펼치기도 했습니다. 미합중국의 무역상들은 미국 독립전쟁이후 해적들의 손아귀에서 고통을
받아야 했습니다. 바바리 해적은 영국과 영국 식민지 소속의 배들은 공격하지 않기로 협정을 맺었었는데 미국 독립전쟁 이후 미국깃발을 새로 단 미국의 배들은 그 협정에서 명백히
제외되는 것 이었습니다. 오늘날 브릭은 보통 감옥선 으로 이해되고는 하는데 그것은 아마도 미해군이 브릭을 감옥선으로 이용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58번
\n\nIt is also heavily-armed, with 42-pounder cannons giving it a formidable weight of shot for each volley. It can also move directly into the wind, and even turn on the spot if the rowers on one side of the ship back water while their companions continue to row normally. These handy sailing qualities come at a price, though: the large crew of rowers are vulnerable to grapeshot; the hull and oars are weak compared to a ship of the line.\n\nGalleys tended to be employed in relatively sheltered waters, and close to a friendly port, the second due to the large crew of rowers. The life of a rower can be brutal and short. Some countries use criminals at the oars, and these men are chained to the ship to prevent escape. If the ship goes down, however, the rowers perish with it. They are always confined below the fighting platform of the ship, and are in danger from grapeshot and broken oars. Indeed, a good raking with grapeshot will cripple a galley as surely as firing chainshot into the masts of a sailing vessel.
\n\n중무장한 이 함선은 42파운드의 함포로 무장했으며 일제 사격시 가공할만한 위력을 보여줍니다. 이 함선은 역풍을 안고 항해 할 수 있으며 한쪽 현측에서 노를 저을 경우 제자리 에서 선회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다루기 쉽다는 이점이 있는 반면 노를 젓는 승조
원들은 포도탄 사격에 대단히 취약 했습니다. 또한 선체와 노 역시 전열함에 비하면 내구도
가 매우 취약했습니다. \n\n 겔리선은 연안이나 가까운 곳에 안전한 항구가 있어야만
했는데 그것은 많은 수의 노수들 때문 이었습니다. 노수들의 삶은 매우 비참하고도 짧았습
니다. 몇몇 국가들에서는 범죄자들을 노수로 사용했고 이 노수들의 탈주를 방지하기 위해
발목에 쇠사슬을 달아 놨었습니다. 따라서 만일 배가 침몰할 경우 이 노수들은 배와 운명을 함께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노수들은 언제나 협소한 전투실 아래층에 갇혀 있어야 했고
때문에 적함선의 포도탄이나 부서진 노의 파편들은 매우 치명적이었습니다. 만일 겔리선이
적의 포도탄 사격에 제대로 노출되었을 경우 그것은 쇠사슬탄에 돛을 피격당해 항해불능
이 된 범선과 같은 처지가 되곤 했습니다.
59번
\n\nIt is the task of the heavy cavalry to break the enemy by shock and impact. Simply put, the Horse Guards are expected to charge home and smash enemy ranks through weight and speed. They are not for chasing down enemies: that is the work of faster, lighter cavalry forces. Instead, they are a battering ram, hurled over short distances against close-formed enemies in the hope of producing a breakthrough and utter consternation. Thanks to being part of the royal household guard, these cavalrymen also lend a touch of class to the brutal business of a cavalry charge!\n\nHistorically, the Horse Guards Parade in London was the setting for “Trooping of the Colour”, a practice that dates back to the 17th Century. A regiment’s colours were a rallying point on the battlefield and so they were shown to the soldiers beforehand, in order that they would be recognised in battle. Today, the ceremony is used to celebrate the official birthday of the ruling monarch; at the time of writing Queen Elizabeth attends every year and takes the salute at the end of the parade.
\n\n 이 중기병의 임무는 적의 대열에 강한 충격을 줌으로서 적을 분쇄하는 것 이었습니다. 쉽게 말해 근위기병들은 그들의 속도와 질량을 이용한 충격 공격으로 적진과 적의 대열
을 분쇄 하기 위해 존재 했습니다. 그들의 임무는 적의 패주대열을 추격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좀 더 빠르고 가볍게 무장한 경기병들의 임무였습니다. 대신에 중기병들은 근거리에 위치한 적의 밀집대형을 향해 돌격해 적진을 돌파하고 적들에게 충격과 공포를 확산 시키는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이들은 왕립근위기병대의 일원으로서 기병들의 이러한 냉혹한
임무를 수행해야만 했습니다!
\n\n역사적으로 런던에서 행해지는 형형색색의 근위기병 퍼레이드는 17세기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전장에서 각 연대들은 연대 고유의 색깔로 집결지점을 표시 하였습니다.
오늘날 이 행사는 국왕의 생일날 공식적으로 행해지고 있는데 과거 퀸 엘리자베스 여왕
시절에는 여왕의 명으로 매년마다 이 행사가 행해졌고 여왕은 퍼레이드의 맨 마지막에
그들의 경례를 받으면서 행사를 마쳤습니다.
60번
\n\nLife Guards are an elite court regiment where appearance is as important as fighting ability. This doesn’t diminish their skills as soldiers: their powerful charge is capable of breaking the most stoic of enemy lines and their skill in a fight is almost unrivalled. However, their pride can lead some to be a little hot headed: they lack the discipline of other cavalry units and, like all cavalry, they may prove ineffective against infantry in square.\n\nHistorically, perhaps the oddest sounding of the various royal guard cavalry regiments were the curiously named “horse grenadier guards”. Common sense would seem to indicate that these men would only ever get to throw their grenades once, before their horses took off at speed towards all points of the compass! In British service, the Household Cavalry regiments, including the horse grenadiers did not, and do not, have sergeants: they have “corporals of horse”. The word “sergeant” has the same origins as “servant”, and no gentleman, even a private trooper, is ever a servant.
\n\n 라이프가드는 정예 왕실근위연대로서 그들의 외모는 그들의 전투 능력만큼이나 중요 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점이 군인으로서의 그들의 자질을 떨어뜨리는 것 은 아닙니다.
그들의 강력한 돌격은 적들의 견고한 대열을 돌파 할 수 있도록 하며 그들의 전투능력은
거의 적수가 없을 정도로 뛰어 납니다. 하지만 그들의 이러한 자존심은 가끔 그들을 위험
한 상황에 빠뜨리기도 합니다. 다른 모든 기병대들과 마찬가지로 라이프가드 연대또한
규율이 부족하므로 보병의 사각방진에 대해 돌격하는 것은 효율적이지 못합니다.
\n\n역사적으로 봤을때 아마도 다양한 모든 근위기병대들 중에서도 특이한 이름을 가진
근위기병은 “기마척탄근위대” 일 것입니다. 일반적인 관점에서 이 단어를 보면 마치 기병들이 말을 타고 전속력으로 달리다가 적 앞에서 말을 멈추고 수류탄을 던졌던 것처럼 보입니다! 영국의 하우스홀드 기병연대에 소속되어 있는 이 기마척탄근위대는 병장을 의미하는 sergeants 라는 계급이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입니다. 대신 기마상병 이라는 계급이 있는데( coporal of horse ), 그 이유는 병장을 의미하는 단어(sergeant)의 기원이 하인을 의미하는 servant와 같은 어원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비록 왕실의 사적인 군대이긴 했지만 신사였지 종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p.s 생각했던것 보다 시간 엄청 잡아먹는군요..고작 번역 몇 줄하는데 이정도이니 실제 파일 추출하고
패치 작업 하시는분들 노고가 얼만큼 인지 짐작이 갑니다 ;ㅁ; 모두들 수고 하시구요
한글 100% 패치에 이름 올릴 그날 까지 ! ㅋㅋ
첫댓글 수고하셨습니다. 계속 수고 부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