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 바버는 신낭만주의 계열에 속하며 화성적 어법은 19세기적이며 보수적이라는 점에서 '우리 시대의 브람스'라고 불려진다. 그의 음악은 낭만적이고 감성적인 것에 기초하여 대가답게 세심하고 정교하게 작곡되었다. 또한 서정성이 뛰어나며, 풍부한 화성을 사용했다.
그는 1910년 3월 9일 미국 Pennsylvania주의 West Chester에서 태어난 미국 작곡가이다. 바버는 오늘날 미국을 대표하는 중견 작곡가의 한 사람으로 그 가운데서도 보수적이며 가장 건실한 작풍, 낭만적 서정성을 특색으로 하여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바버는 14세때 필라델피아의 커티스 음악학교에 입학하여 1932년 22세 때 이 학교를 졸업했는데, 졸업작품인 '소문난 학교'로 일약 유명해졌다. 여기서 지휘를 프리츠 라이너에게, 작곡을 로자리오 스카레로에게 각각 배웠다.
그는 1935년과 1936년에 컬럼비아 대학으로부터 퓰리처상을 받았고, 한편 구겐하임 장학금을 받기도 했다. 또한 같은 1935년에는 미국 로마대상을 받고 로마의 아메리칸 아카데미에서 2년간 유학을 했는데, 이 때에 쓴 '교향곡 1번'과 오늘날 자주 연주되는 '현을 위한 아다지오' (1937) 등은 그의 이름을 세계적으로 알리게 한 출세작으로 작곡계의 주목을 받았다.
사무엘 바버는 6살때 처음으로 피아노 레슨을 받기 시작했으며, 7살때 작곡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첼로도 조금 배웠다. 그의 처녀작인 짧은 오페라 '장미나무'(The Rose Tree)는 자신과 자신의 누이인 사라에 의하여 연주되었다. 이 초기의 시도가 성악 음악으로 가려는 시작이 되었으며, 성숙한 작곡가가 되어서도 그의 작품의 중요한 분야가 되었다. 그는 이모인 콘트라알토 루이스 호머와, 성악 작곡에 대단한 열성을 보였던 이모부인 작곡가 시드니 호머의 영향으로 성악 작곡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바버는 스무살이 채 되기도 전에 웨스터 민스터 교회당의 오르가니스트가 되었으며 West Chester 고등학교에 입학하여 1926년에 졸업하게 된다. 그가 정규적인 음악 교육을 받은 것은 14살 때 커티스 음악원이 설립되면서 개교와 함께 첫 입학자가 되면서이다. 그리고 커티스 음악원의 설립자인 Mary Louise Curtis Bok는 그의 후원자 중의 한 명이 된다. 그는 거기서 재능있는 음악가로 주목을 받게 된다. 피아노를 조지 보일과 이사벨라 벵게로바, 작곡을 스카레로, 지휘를 프리츠 라이너에게 각각 배웠다. 그는 자신의 바리톤 목소리를 발전시키는데도 관심을 가졌는데, 에밀리오 에도아르도 데 고고르자에게 배웠다. 그의 성악 레슨 과정이 성악음악을 추구하던 시기에 매우 좋은 영향을 주었다.
그는 커티스 음악원에서 독창회를 가졌으며, 졸업 후 비인에서 존 브라운에게 지도를 받았다. 커티스 음악원에 재학 중이던 8년 동안, 바버의 작곡 기법은 확고한 기초를 다지게 되었다. 3년동안 작곡된 많은 작품들은 재능있는 학생의 습작 그 이상의 것이었다. 그중에서도 잘 알려진 작품 번호 2번의 두 개의 성악곡과 '현악 4중주를 위한 세레나데', 현악 반주가 있는 '도버해안' 그리고 '첼로 소나타'가 있다. 이후의 많은 작품들과 함께 이들 작품은 미국인들의 대표적인 레퍼토리가 되었다. 더욱이 학생시절동안 나타난 바버 특유의 양식적 요소는, 유절 가곡의 서정적 선율, 가사에 적절한 작법, 악기 음색과 기법의 개발 등으로 지적될 수 있는데, 이후에도 일관성 있게 지속되었다.
1931년부터 1933년까지 커티스 음악원에서 피아노를 가르치면서부터 그는 음악활동으로 생활비를 벌기 시작했다. 당시 미국 사회에서 이러한 전업 음악가는 매우 드문 경우였다.
바버가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그가 '바이올린 소나타'로 1928년 컬럼비아 대학에서 Bearns상을 타면서 부터이다. 또 그는 1933년 '소문난학교'로 두번째로 Bearns상을 받게 된다. 1935년과 1936년 유럽 여행을 하게되며 로마에 있는 미국 아카데미에서 작곡을 하게 되는데 이것으로 로마대상과 퓰리쳐상을 받게 된다. 여기서 머무는 동안 작곡된 제1번 교향곡인 '셸리에서 본 경치를 위한 음악'은 뉴욕과 로마에서 즉시 연주되었다.
그 후 1935년 바버는 토스카니니를 만나게 되는데 이때 자신의 몇 개의 작품을 보여주는 행운을 안게 되었고, 3년 후 토스카니니는 오케스트라를 위한 에세이 1번과 '현을 위한 아다지오'를 연주했다. '현을 위한 아다지오 작품11'은 바버가 1935년 미국 로마대상을 수상하여 로마에서 유학하는 동안인 1937년 작곡한 현악 4중주곡 제 1번의 제 2악장을 1938년 현악 합주용으로 편곡한 것이다.
3악장으로 된 현악 4중주곡은 같은 무렵에 완성된 교향곡 제 1번과 함께 바버의 이름을 유럽 악단에 알린 출세작이었다. 현악합주를 위한 이 편곡은 1938년 토스카니니가 지휘하는 NBC 교향악단이 연주한 후로 더욱 유명해졌는데 원곡보다 더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영화 '플래툰'에서 사용되기도 했다. '현을 위한 아다지오'는 토스카니니가 연주한 미국 작곡가의 작품으로는 최초의 작품이라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낭만적 서정성, 깨끗한 서정과 정열로 가득 차 있는 이 작품은 사무엘 바버 초기의 전형적인 작품으로 그의 작품 중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이 곡은 앞에서도 소개한 바 있는 바버의 백부 시드니와 그의 부인 루이즈 호머에게 헌정되었다. 작곡가 시드니는 바버에게 음악적 영향을 준 사람이며 루이즈 호머는 커티스 음악원의 설립자였다. 그의 음악을 가리켜 '신낭만주의'라고 일컫는 것은 부드럽게 흐르는 음악에 급격한 불협화음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과도 관련이 있다.
연주 시간은 약 8분으로 제 1바이올린, 제 2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더블베이스로 구성된 현악합주에서 제 2바이올린과 첼로를 다시 2부로 나눈 7성부의 두터운 편성으로 되어 있다. 70마디가 채 못되는 소곡으로 바버의 작곡기법을 잘 나타내어 준다. 2/4박자, 몰토 아다지오로 조용하게 제 1바이올린이 명상적인 주제를 연주하면, 비올라, 첼로, 더블베이스가 차례로 가담하여 텍스추어와 다이내믹, 음역에 있어서의 그 힘을 증폭시켜 마침내 클라이맥스에 도달한다. 잠시 휴지가 있은 다음 다시 처음에서 다시 시작하는 기분으로 진행되다가 주제가 제 1바이올린과 비올라의 유니즌으로 연주된 다음 끝난다.
그는 1939년 커티스 음악원에 다시 돌아와 작곡과 교수로 1942년까지 있게 된다. 그러나 그는 이 직업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결코 다시는 가르치는 일에 종사하지 않았다. 1943년 뉴욕 마운틴 키스토에 커티스 음악원 스카레로교수의 동문이며 유럽여행의 동반자인 오페라 작곡가 Gian Carlo Menotti 와 함께 저택을 구입하게 된다. 바버는 이 집을 팔게 되는 1974년까지 대부분의 작품을 여기서 쓰게 된다.
1939년 4월 바버는 미국 육군 항공대에 입대하게 된다. 복무 첫 1년 동안 거의 대부분을 텍사스의 Fort Worth에서 보내게 되는데 여기서 두 개의 작품을 쓰게 된다. 첫번째는 관악 밴드를 위한 '코만도 행진곡'이고, 다음은 육군 항공대의 위촉으로 비행기의 폭음을 도입한 '교향곡 제 2번'으로 항공대에 헌정되었다. 두번째의 작품은 보스톤과 뉴욕에서 초연되었는데 그리 많은 호평을 받지는 못했다. 1947년 바버는 이 교향곡을 수정하였지만 결코 만족하지 못했다. 그는 이 곡을 작곡한지 24년이 지난 후 이 곡을 회수하여, 악보와 연주자료들을 불에 태웠다. 그러나 2악장은 '밤의 비행'으로 수정되어 남아있다.
바버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제대하여 유럽으로 돌아와 즉시 구겐하임 재단의 회원이 된다. 그리고 1948년 로마의 미국 아카데미의 고문이 되었다. 1940년 말에서 1950년에 걸쳐 그는 많은 중요한 위촉작품들을 쓰게 된다. 존 니콜라스 브라운에게 위촉받은 첼로 협주곡과, 디트슨 재단에 의하여 위촉받은 발레 '메데아', 뉴욕 발레 협회의 키르스타인에 의하여 위촉받은 춤곡인 '추억'등이 있다. 그리고 세 개의 성악작품인 '크녹스빌', '1915년의 수메르', '키에르케고르의 기도문'은 각각 엘리노 스테버, 국회 도서관의 쿨리지 재단, 쿠세비츠키 음악재단의 위촉으로 작곡된 것이다. 또한 피아노 소나타는 미국 작곡가 연맹의 위촉 작품이다.
1950년대에 작곡된 바버의 작품 중 가장 뛰어난 것으로는, 메노티의 대본으로 1957년에 완성한 4막짜리 오페라 'Vanessa'를 들 수 있다. 초연 후 이 작품은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좌에 1958~9년, 1964~5년의 두 시즌에 상연되었다. 또한 이 작품은 1958년 잘츠부르크 음악제에 연주되기도 하였다. 이 작품은 1958년 퓰리쳐 음악상을 수상하게 된다.
두번째의 퓰리쳐 상이 수여된 작품은 1962년 뉴욕의 음악출판사인 셔머 출판사 창설 100주년 기념으로 바버가 위촉받은 피아노 협주곡이었다. 10년간 바버가 작곡한 곡중 가장 규모가 큰 작품은 대작 오페라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이다. 이 작품은 1966년 새로 건립된 링컨센터 개관 연주로서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단으로부터 위촉받은 작품이다. 그러나 이 오페라는 비평가들과 청중들로부터 외면당했다. 스코어가 너무 빈약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결코 비난받을 만한 것은 아니었다.
비평가 피터 헤이월스는, 이 작품이 독창성을 결여한 후기 낭만적 스타일이지만 서정적인 긴장의 필요 때문에 행동과 움직임의 조화에 대한 문제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였던, 그리고 목소리의 느낌을 좋아하는 작곡가의 작업실로부터 나온 것이 분명하다고 말하였다. 오페라가 실패하는 중요한 원인이 기획에 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 작품은 제페렐리가 대본을 쓰고 기획과 감독을 맡은 작품이다. 데스몬드 쉐위 테일러는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화려하고 웅장한 광경 속에 숨어 있는 듯한 바버의 음악이 저녁 내내 나에게 되풀이 되었다" 아주 정교한 세트와 의상들, 다수의 합창 단원과 무용수들, 수백명의 배우들, 실제의 동물들이 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기획은 결정적으로 조잡하고 구태의연했으며 때로는 혼란스러웠던 것이다. 바버는 실패 후 마음을 정리하고 다시 일어났지만, 즉시 뉴욕을 떠나 이태리의 알프스에서 약 5년간 은둔 생활을 하였다.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가 메노티에 의하여 각색되어 수정된 것은 1974년 4월의 일이었다. 이 작품은 오늘날에도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단의 고정 레퍼토리로 공연되는 몇 안되는 미국 작품 중의 하나로 손꼽힌다.
바버는 1960년 말엽에 한가지 이상한 것을 만들었다. 즉 유명한 그의 작품인 '현을 위한 아다지오'에 야뉴스 데이'(신의 어린양)의 가사로 합창곡을 만든 것이었다. 그는 1971년 두개의 위촉 작품인 '연인들'을 연주하기 위하여 미국으로 돌아왔다.
바버의 작품으로는 이외에도 출세작인 '현악 세레나데'(1929), 현악4 중주의 반주가 있는 가곡 '도버의 강변'과 폴리포닉한 스타일에 의한 '위대한 신'을 비롯하여 '소문난 학교'(1932), 1942년 부르너 발터가 지휘하는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에 의해 초연된 '관현악을 위한 에세이 제2번'(1942), '바이올린 협주곡'(1941), '카프리콘 협주곡'(1944), 발레음악 '메데아'(1946), '추억'(1953), '첼로 협주곡'(1945), '피아노 협주곡'(1962), 관현악 반주의 합창곡집, '키에르케고르의 기도', '축전 토카타'(1960) 그밖에 많은 실내악 작품들이 있다.
제1교향곡의 수정보완판에 대해서 버질 톰슨은 다음과 같은 비평을 썼다. "바버의 중요한 문제는 격렬함에 호소하지 않고 낭만주의의 환영에 사로잡혀 있는 것 같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아무런 특징 없이 이루어졌다. 왜냐하면 바버는 오직 낭만적 환영에만 사로잡혀 있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분명히 언제나 개인적 감정의 표현을 일차적 목적으로 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는 흔히 신낭만주의로 분류되었다.
바버의 예술은 본질적으로 서정적이고 낭만적이며 그의 화성적 어휘는 기본적으로 19세기 말엽의 그것이었다. 그의 음악의 대부분은 조성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다. 1540년에 그는 현대의 일반적인 음악 어법들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몇몇 비평가들은 그의 바이올린 협주곡(제1악장이 전음열적 불협화음과 까다로운 선율을 가지고 있다)을 그의 새로운 음악의 양식적인 시기로 지적하고 있지만 이것은 너무 주관적인 해석일 것이다. 이 협주곡은 바버의 예술적 선택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의 후기 관현악 작품을 살펴보면 밀도 높은 화성적 구조가 발견된다. 그렇지만 언제나 하나의 조성 또는 중심적인 조성에 근거하지는 않는다. 유일한 경우이지만, 피아노 소나타의 한 악장은 화려한 12음 기법에 기초하고 있기도 하다.
그의 교육과 전통적 형식의 사용에서 보자면 바버는 또한 고전주의자로 생각될 수도 있다. 협주곡, 교향곡, 그리고 다른 기악 작품들은 소나타 형식에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또한 피아노 소나타에서 자주 발견되는 푸가와 제 1번 교향곡에서 등장하는 파사칼리아기법도 사용하고 있다. 더우기 비례에 대한 그의 감각과 종합적인 구성력은 매우 예리하기까지 하다.
바버의 음악은 대체로 선율적이며 낭만적인 정서가 넘친 작풍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해하기 쉬운 보수적인 경향에서 그의 화성법도 상식적이고 색채감이 풍부하다. 따라서 현대음악의 특징 같은 무조나, 다조, 12음기법이나 재즈적인 요소는 거의 찾기 힘들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초기의 작품에는 스트라빈스키의 영향이나 재즈의 도입도 약간 비치기는 했으나(1944년에 작곡된 미국 민요 주제에 의한 피아노 소품들), 주로 보수적인 수법에서도 현대 미국의 생활 위트와 감정을 잘 반영한 신선미를 가지고 있어 이것이 그의 매력으로 되어 있다.
물론 그의 음악성이 풍부한 내용을 가지고 있지만 또한 그의 작곡법도 세련되어 있어 일찍부터 토스카니니, 발터, 로진스키 등 거장들에 의해 그의 작품이 연주되었고, 세계적으로 널리 사랑을 받게 된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사무엘 바버는 그의 작품이 자주 연주된다는 점에서 미국 작곡가로서는 조지 거쉰이나 아론 코플랜드와 같은 비중을 차지한다. 그가 남긴 가곡, 합창곡, 피아노곡, 실내악곡은 미국 연주자들이 즐겨 연주하는 레퍼토리로 정착했다.
참고 사이트 :www.classical.net
www.schirmer.com
www.naver.com
참고자료 : 세광 음악대사전
James Joyce (1882 ~ 1941)
1882년 2월 2일. 20세기 문학의 거장으로 불리 우는 제임스 조이스는 아일랜드의 수도 더블린에서 태어났다. 조이스의 어머니는 열렬한 카톨릭 신자로서 성격이 극히 온화한 여자였는데 피아노를 잘 쳤으며, 아버지 존의 아름다운 목소리와 더불어 조이스에게 유전됐다. 그의 작품에 나오는 음악성도 이에 연유했을지도 모른다.
1888년에서 1897년까지 Clongowes Wood College초등학교 및 Belvedere College중학교 등 예수회 학교를 다녔으며, 1898년 4월에 University College의 영문과에 입학했다. 고고한 태도 때문에 친구들과 몰려다니기 보다는 학교 근처의 유명한 국민 도서관에 다녔다. 그는 대학 재학 중, 불어․독어․이탈리아어를 완전히 마스터하였다. 이러한 면은 후의 그의 작품들에서 만국어(萬國語)를 구사할 만큼의 능력이 된다. 또한, 이때부터 기독교 및 편협한 애국심에 대한 그의 반항심이 움트기 시작한다.
1992년 2월에 대학을 졸업하고 더블린에의 혐오가 심해져 고국을 등지고 파리로 간다. 그리고 여기서 의학과 성악을 잠시 배운다. 그는 파리를 비롯하여 여러 나라에서 영어 개인교사와 교사직으로 연명했다.
1906년 그의 단편집인《더블린 사람들》의 출판을 에워싼 8년여의 분규가 시작된다.
1912년 9월에는 결국 출판은 중지에 이르게 되고 조이스는 영원히 스스로 추방자가 되어 고국을 떠난다. 그의 작품인《율리시즈》로 하여금 그는 새로운 문단의 총아로서 주목을 한 몸에 받지만 미국에서는 외설시비로 고소당하여 유죄 판결을 받는다.
1922년 조이스 탄생일에《율리시즈》초판본이 프랑스 파리에서 출간한다. 하지만 영국에서는 영국 세관에 의해 5백부 중 499부가 몰수당하는 등의 그의 작품 대부분이 그의 생전의 출판은 순조롭지 않았다.
1941년 1월 13일 장궤양으로 복부 수술을 받은 후 쮜리히에서 사망한다.
그의 단편집《더블린 사람들(Dubliners)》(1914)은 위에서 본 바와 같이 그것이 출판에 이르기까지 기구한 우여곡절을 겪었다. 현시점에서 볼 때에는 아무렇지도 않은 내용이 그 당시에는 더블린의 온갖 시민 생활의 침체성을 폭로했다는 그 이유 하나로 11년이라는 세월을 기다려야만 했던 것이다. 조이스는 출판사에 보낸 서한에서 이렇게 말한다. 「내 의도는 우리나라 윤리사의 한 장을 쓰려는 데 있었다. 그 무대로 더블린을 택한 것은 이 도시가 마비의 중심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네 가지 형상으로 그것을 대중에게 제시하려고 하였다. 즉 소년시대․사춘기․성숙기․노쇠기의 민중의 생활이 그것이며, 작품들은 그 순서로 배열되어 있다.」
그의 두번째 작품인《젊은 예술가의 초상(A Portrait of the Artist as a Young Man)》(1916)은 대부분의 위대한 작품들이 그러했듯 당대 문학작품들의 패턴에 들어맞지 않았다. 이 소설이 최초로 출판되었을 때 독자들은 그 정교한 의미와 주제의 함축성을 파악하는데 실패했다. 이 소설은 너무나 독창적이어서 어떤 안이한 범주에 들어맞지 않았고, 이를 분석하려고 노력했던 비평가들은 새로운 비평의 어프로치와 통찰력을 발견하지 않고는 그 상징적 뜻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조이스는 그의 자서전적 사건들을 단순히 기록하기보다는 보다 큰 목적을 위해 그것들을 사용했고, 한 특이한 주인공을 설정함으로써 그가 속세를 도피할 것을 결심하게 하고, 美를 창조하려는 욕망을 그의 생애에 있어서 온갖 장애물에 항거하는 젊은 예술가의 고통의 기록이 되도록 했다. 이를 위해 조이스는 문체와 문학의 새로운 기법을 개발하고 사용함으로써 소설의 보다 높은 차원과 보다 광범위한 뜻을 첨가하고 있다. 유추, 대응, 그리고 말의 상호연관의 정교한 구조를 갖는다. 그의 등장 인물들의 행동은 간접, 성찰 및 은근함에 의하여 드러나고, 소설의 플롯 역시 명상 및 독백의 방법으로 전개되고 있다. 조이스는 '의식의 흐름(stream of consciousness)', '에피파니{Epiphany}', '신화의 사용(the use of myth)'과 같은, 적어도 세 가지 새로운 문학의 기법을 여기《젊은 예술가의 초상》에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
20세기의 거장 작가요, 구미(歐美) 소설사에서 가장 혁명적인 작가로 알려진 제임스 조이스의 걸작《율리시즈(Ulysses)》 (1922)는 이른바 소설문학의 극한까지 추구한 인간 의식의 백과사전이라 불리고 있다. 근 3만 자에 달하는 어휘와 10여 가지의 외래어, 수많은 문체의 실험 그리고 여러 가지 형태로 개발된 의식의 흐름의 기법을 사용함으로써, 현대인의 정신적 황무지, 생중사(生中死, death in life)와 사중생(死中生, life in death), 정신적 마비, 父子간의 갈등, 부부의 부정(不貞), 산업사회와 물질문명에 찌든 현대인의 정신세계의 부정적 요소들을 사실주의와 자연주의 수법에 의하여 마치 모자이크처럼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유의해야 할 것은, 작가 조이스는 이러한 부정적 인간 심리를 묘사함은 물론 한걸음 더 나아가 차원 높은 상징주의를 개발함으로써 오늘날 현대인의 이른바 정신분열증을 우리들로 하여금 극복, 정화(淨化), 구제케 하고 불모의 현대속에 새로운 생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율리시즈》는 한마디로 인간 정신의 정화, 즉 카타르시스이며, 유머로 충만된 '인간 희극(Human Comedy)'이다. 《율리시즈》는 1904년 6월 16일 하루 동안, 아일랜드의 수도 더블린에서 일어나는 사건의 여러가지 외형적 세계와, 수많은 더블린 사람들, 특히 젊은 아마추어 예술가 '스티븐 디덜러스'(22세)와 광고 외무원인 중산층 신사 '리오폴드 블룸'(38세) 그리고 그의 다정다감한 아내인 소프라노 가수 '몰리 블룸'(35세)이 겪는 내적 세계의 기록의 총화이다. 현대인을 각기 대변하는 이들 세 사람은 평범한 하루를 지내면서 정치, 경제, 문화, 종교, 윤리 등 광범위하고 다양한 의식을 추구하고 있다.
제임스 조이스의 작품으로는 위의 세 작품외에 전아한 분위기를 바탕으로한 서정시집《실내악(Chamber Music)》(1907), 입센의 영향하에 쓴 그의 유일한 희곡《망명자들》(1918), 17개 국어의 혼용으로 이른바 '만국어'를 구사한 마지막 작품《피네건의 經夜(Finneganes Wake)》(1939) 등 다수가 있다.
**James Joyce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영문학박사 민태운 선생님의 글을 참고했습니다.
Richard Ellmann은 "우리는 아직도 제임스 조이스의 동시대인이 되기 위해 애쓰고 있다"는 의미심장한 말로 조이스의 전기를 시작하고 있다. 아마 조이스의 작품세계는 난해하기로 악명이 높기 때문에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독자들이 많은 노력을 경주해야 하고, 따라서 조이스는 어떤 시대의 독자들에게든지 시대를 앞서 가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게된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나중에 나온 이론들이 때늦게(?) 조이스에 적용되어 그의 작품들은 많은 문학이론들의 각축장이 되어 온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물론 그는 모더니즘을 대표하는 작가들 중의 하나로 쉽게 분류된다. 그는 그의 작품들, 특히 『율리시즈』Ulysses(1922)에서 상징, 신화적 구조, 복수 시점 multiple perspectives을 사용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다양한 문체적 실험을 하고, "의식의 흐름"의 기법 등을 통해 의식, 무의식, 잠재의식 등 내면화된 경험의 세계를 조명하며, 독자들에게 많은 지식과 판단력, 감수성을 요구하고, 열린 결말로 작품을 끝맺음으로써 모더니즘 소설의 전형적인 특징들을 보여 주었다. 물론 그가 소설사에서 처음으로 이러한 기법들을 사용한 것은 아니었으나 어느 누구보다도 교묘하고 다양한 방법으로 그것들을 사용하였고 또한 『율리시즈』를 통하여 많은 작가들이 문체의 실험을 하도록 영향을 미쳐왔다는 데에 그의 중요성이 있다. 그러나 그가 이러한 전형적인 모더니즘적 특징들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리얼리즘에 저항했다든지 결별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는 『더블린 사람들』Dubliners (1914)에서 상징주의와 리얼리즘을 결합하는 실험을 했고, 『율리시즈』에서는 배경이 되고 있는 그 당시의 더블린의 모든 모습을 꼼꼼하게 재현해 내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에 관해서 『포스트구조주의자 조이스』Poststructuralist Joyce(1984)라는 책이 나올 정도로 소위 포스트모더니즘시대의 이론들도 그의 작품들을 애호하였다. 예를 들면, 데리다Derrida의 해체주의 이론, 라캉Lacan의 정신분석학 이론, 바흐찐Bahktin, 바르뜨Barth의 이론 등이 조이스의 텍스트에 이용되었다. 뿐만 아니라, 최근에 포스트식민주의 이론은 제국주의적 영국의 식민지였던 아일랜드를 소재로 삼고 있는 조이스의 텍스트의 이해에 깊이를 더해 주고 있다. 특히 조이스의 마지막 작품인 『피네간스 웨이크』Finnegans Wake (1939)는 난해성에도 불구하고 여러 면에서 최근에 포스트식민주의적 텍스트라 부르게 된 것들을 예고해 주는 작품이었다. 결국 각 세대는 조이스의 복합적인 의미의 세계를 다시 정의해 왔고 조이스의 텍스트들은 새로운 비평적 반응과 접근에 불을 붙여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당연히 조이스와 관련된 수많은 연구자들과 연구서들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옴으로써 "조이스 산업" Joyce Industry이라는 신조어까지 생겨났고 이제 다른 작가들을 평가할 때 조이스의 이름이 언급되는 것이 조금도 이상하지 않게 되었다. 왜냐하면 조이스 이후의 작가들 중 그의 영향을 조금이라도 받은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훨씬 많기 때문이다.
조이스를 이해하기 위해서 알아두어야 할 기본적인 배경적 사실들이 있다. 그것은 아일랜드가 정치적으로는 영국의 식민지배를 받았고 종교적으로는 강한 카톨릭 국가였다는 것이다. 조이스는 『율리시즈』의 첫 번째 장에서 스티븐Stephen Dedalus의 입을 빌어 아일랜드 사람은 "두 주인"을 섬기는 종이라고 말하는데, 여기서 두 주인이란 바로 식민지배자인 영국과 카톨릭교의 교황청이 있는 로마를 가리킨다. 식민지로서의 아일랜드의 경우는 포스트식민주의 이론의 입장에서 예외적인 경우이다. 왜냐하면 아일랜드인들은 백인들이고 제국주의의 희생자들로만 볼 수 없는 측면도 없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일랜드인들은 최소한 영국인들에게는 유색인종처럼 보였고 제국주의자들에게 억압받은 자들의 입장에 서 있었던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래서 조이스는 『율리시즈』에서 아일랜드의 역사를 "깨어날 수 없는 악몽"으로 보았던 것이다.
특히 조이스는 파넬Charles Stuart Parnell이라는 정치인이 아일랜드인들의 독립에 대한 희망을 가득 채우고 있던 시기에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조이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마른하늘에 청천벽력처럼" 일어난 파넬의 몰락은 조이스에게 지워지지 않는 충격을 남겼다. 그의 비극은 그의 정치적 인기가 절정에 이르고 있을 때인 1889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윌리엄 오쉬어William Henry O'Shea가 파넬과 오랫동안 내연의 관계를 맺고 있던 자기 아내 캐써린Katharine을 상대로 이혼청구소송을 제기하면서 시작되었다. 그의 가까운 정치적 보좌관이었던 팀 힐리Tim Healy는 지도자를 버리지 않아야 한다고 외쳤지만 곧 카톨릭교의 주교들 및 다른 정치가들과 함께 파넬을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았다. 얼마 후 파넬의 당은 무너지고 파넬은 1891년에 영국에서 사망했다. 조이스는 지지자였던 아버지 못지 않게 파넬을 배반한 힐리에 대해서 분노를 느끼고 아홉 살의 나이에 시이저Caesar를 배신한 부르터스Brutus에 힐리를 비유한 시 "힐리, 너마저"Et Tu, Healy를 썼다. 처음부터 정치의 주제가 그의 문학세계에 들어간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그는 {젊은 예술가의 초상}에서도 아일랜드를 "새끼 돼지를 잡아먹는 늙은 암퇘지"에 비유하면서 아일랜드를 예술가들을 추방하여 몰아내고 지도자를 배반하는 나라로 비난한다.
아일랜드에서 카톨릭교회는 비록 오랫동안 영국 정부의 억압을 받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지배적인 정치적, 문화적, 종교적 세력으로서 아일랜드 사람들의 태도와 행동에 지대한 영향력을 미쳤다. 조이스는 카톨릭 문화에서 태어나고, 자라고, 교육받았다. 『젊은 예술가의 초상』에도 묘사되어 있듯이, 그는 여섯 살 반에 클론고우즈 우드 칼리지Clongowes Wood College에 들어가 정규교육을 받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벨베디어 칼리지Belvedere College에 다녔는데, 이 두 학교는 모두 카톨릭교의 최대 종파인 예수회Society of Jesus에서 운영하는 곳이었다. 조이스는 교회가 아일랜드인들에게 미치는 강한 영향력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는 20대 초에 카톨릭교의 교리와 교회 주도적인 사회구조가 아일랜드인들을 희생물로 만들고 있다고 강한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고, 『젊은 예술가의 초상』에서 아일랜드인들을 "신부들에게 시달리는"민족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그는 교회를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한 편지에서는 교회를 "아일랜드의 적"으로 언급하기도 했다. 그것은 『젊은 예술가의 초상』에서 한때 독실한 신자였던 스티븐이 교회를 거부하는 것과 일치한다. 그러나 이 작품의 5장에서 그의 친구 크랜리Cranly가 스티븐에게 그가 믿지 않는다고 하는 카톨릭교의 정신이 스티븐에게 누구에게보다도 가득 차 있다고 말하듯이, 비록 조이스가 제도적인 교회를 부인하기는 했지만 그의 텍스트에서 종교의 위치를 최소화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의 의식의 많은 부분이 카톨릭 문화에서 형성되었기 때문에 그의 텍스트는 당연히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그 문화를 반영하고 있다. 가장 눈에 띄는 예가 『젊은 예술가의 초상』의 3장에서 아널Arnall 신부가 생생하게 묘사하는 지옥에 관한 설교 부분이다. 또한 미사, 성체식, 장례의식, 성모 마리아에 대한 기도, 피정, 등 수많은 카톨릭교의 신앙활동과 관련된 용어들이 단지 장식적인 것 혹은 배경적인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주제와 관련하여 중요한 요소로서 나타난다. 『더블린 사람들』의 첫 번째 작품인 "자매"The Sisters는 타락한 신부를 다루고 있고, 『율리시즈』에서 처음으로 입을 여는 인물인 멀리건Buck Mulligan은 미사의 흉내를 내며 시작한다. 『피네간스 웨이크』에서 가장 중요한 두 이미지인 인류의 타락과 부활은 종교적이고 신학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며 이 작품의 의미를 찾아가는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
『젊은 예술가의 초상』의 마지막 장에서 스티븐은 미학론을 펴면서 서정적 문학이 예술가가 상상력을 표현하는 최초의 시도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흥미롭게도, 조이스의 최초의 예술적 충동은 서정시들을 쓰게 했고, 그 시집이 조이스 최초의 작품인 『실내악』Chamber Music (1907)이다. 이런 시들에서 보여지듯이 조이스에게 감상주의적인 면이 있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스티븐이 『젊은 예술가의 초상』의 미학론에서 더 발달된 예술의 단계는 서술의 형식이라고 말하듯이, 조이스의 성숙과 더불어 이러한 감상주의는 통제되었고 그의 서정적인 재능은 『더블린 사람들』,『젊은 예술가의 초상』, 『율리시즈』, 『피네간스 웨이크』등의 걸작들에서 보여지듯이 소설의 형식에 쏟아 부어졌다. 물론 위에서 말한 작품들 중 어느 하나도 엄밀하게 전통적 의미에서의 소설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없지만 그의 절제된 감정은 최소한 소설에 가까운 형식을 필요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