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고성-속초를 가다
며칠 전 황순원의 <소나기>를 다시 읽다 울컥해지고 눈시울이 붉어졌다. 이 소설을 읽을 때마다 이런 증상이 약간씩 나타났지만 이번에는 그 정도가 심했다. 조금은 우스웠다. 무엇 때문에 어린 소년, 소녀의 이야기가 이토록 가슴 깊이 반복해 뜨거움을 만들어내는지 겸연쩍었다. 그것은 아마도 순수함에 대한 상실에서 시작된 아픔인지 모른다. 가장 소중한 것을 지키지 못하고 무력하게 떠나버려야 했던 슬픔의 기억을 재생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우울이 최근 산불로 파괴된 강원도 고성과 속초로 발길을 이끌었다. 이곳은 떠나버린 기억의 슬픔이 진하게 남아있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최근 또다시 강원도 영동 지방이 산불로 파괴되었다. 몇 년 전 거대한 산불로 무너져버린 낙산사의 잔해를 보았을 때 느꼈던 아픔이 다시금 떠올랐다. 강원도 영동 지방은 우리에게는 조금은 특별한 느낌으로 다가오는 곳이다. 문명과 권력과는 거리가 있는 곳, 힘겨운 도시의 먼지와 때를 정화시켜주는 힐링의 장소, 태백산맥의 위용이 때론 날씨와 삶의 방식을 다르게 만들어주는 현실의 이상향, 도착하면 펼쳐지는 끝을 알 수 없는 동해의 무한한 넓이, 이 모든 것이 우리로 하여금 높은 고개를 넘도록 유혹했다. 이곳은 분명 대한민국 사람들, 특히 서울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치유와 위안의 장소임에 틀림없다.
그렇기에 강원도 영동지방에서 자주 일어나는 산불은 단순한 걱정의 대상이 아닌 우리가 가슴 속에 간직하고 있는 평화의 장소가 파괴되는 아픔을 동반한다. 특히 산불이 날 때 우리는 무력하게 산과 나무가 그리고 마을이 무너져 내리는 모습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점이 깊은 우울을 동반하게 한다. 불타는 모습에서 어쩔 수 없이 나의 통제에서 벗어나 무너져버렸던 많은 사건들을 기억하게 만든다. 특히 고성과 속초는 지금은 사라져버린 소중했던 사람들의 흔적이 남아있는 장소였기에 불타는 산과 쓰러진 숲과 나무의 잔해는 사라져버린 사람들의 슬픈 이미지로 전환되었다.
속초와 고성을 가기 위해서는 경춘 고속도로를 이용하여 동홍천 IC로 빠진 후에 홍천과 속초를 연결한 국도를 이용한다. 경춘 고속도로가 만들어지고 속초는 일상의 공간으로 들어왔다. 마음이 답답하거나 서울을 벗어나고 싶을 때 약간의 과속이 더해지면 3시간 내에 충분하게 도착할 수 있는 장소였기 때문이다. 동해의 광활한 물결을 바라보며 먹는 오징어순대와 곰치탕은 일품 요리였다. 충동적으로 떠날 수 있는 휴식의 장소로 안성맞춤이었다. 더구나 가까운 곳에 있는 설악산은 산과 바다의 최선의 조합을 선사해 주었다.
또한 이곳은 S가 암 투병을 할 때 내려와 요양을 하던 곳이며 세상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정상적인 모습과 정신을 가지고 재활의 희망을 품고 생활하던 장소였다. 병원에서 치료를 포기했을 때 그녀가 찾을 수 있는 장소는 많지 않았다. 이상구 박사가 운영하던 치유센터는 S가 마지막으로 희망을 걸었던 곳이었다. 그러나 어떤 결과도 만들어내지 못하고 S는 사라졌고 우리가 다니던 국도 주변에서 지금 산불의 잔해를 바라보는 것이다. 그것은 장소에 대한 슬픔이었고, 인간에 대한 아픔이었다. 인간과 장소가 갖는 슬픔이 연결되었을 때 아픔의 강도는 더해진다. 이번 강원도 산불은 그것을 다시금 확인시켜 주었다.
올라오면서 국도에 있는 <38휴게소>에 들렸다. 이제 홍천과 속초를 잇는 국도는 사람들에게 잊혀져가고 있다. 2017년 '양양고속도로‘가 완공되면서 사람들은 영동지방을 가기 위해서 동홍천으로 빠지지 않고 그대로 양양고속도로로 달린다. 국도 주변에 있던 휴게소들은 문을 닫았고 주유소들도 사라졌다. 국도 이용이 줄어들자 홍천이나 인제, 속초 등 국도 주변의 지자체들은 국도를 활성화하기 위한 정책을 추진한다고 하지만 이 날도 도로는 한산했다. 인제군에서 내건 <힐링가도>라는 말은 맞았다. 차가 줄어드니 드라이브에 쾌적한 환경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38휴게소>에서 바라본 소양강의 풍경은 아름다웠다. 이 풍경만이라도 이 국도의 매력은 충분할 거란 생각이 들었다. 38선이라는 상징적인 의미와 함께 홍천군 가리왕산 모습의 실제적인 위엄도 확인할 수 있을 수 있을뿐더러, 인제군의 고적한 읍내 모습을 살펴보고 <박인환 문학관>의 낭만도 즐기며, 설악산 백담사의 아름다움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홍천-속초’간 국도는 여전히 매력적인 길임에 틀림없다. 미시령과 진부령이 갈라지는 길에서 방향 선택 또한 여행의 즐거움을 준다. 어느 곳을 선택하든 길은 전혀 새로운 느낌을 선사하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처음으로 진부령을 선택했다. 미시령과는 또 다른 재미를 준다. 같은 장소도 어떤 순서로 어떤 방식으로 이용하는가에 따라 그것은 커다란 차이와 흥미를 전달한다. 이 국도는 내가 사랑하는 (요즘의 표현방식으로) ‘인생 국도’임에 틀림없다. 위로와 슬픔을 간직한 진정한 깊이를 가진 길임을 유유히 흘러가는 소양강의 모습을 보면서 확인하게 된다.
첫댓글 갈라지는 길에서 방향 선택, 어느 곳을 선택하든 길은 전혀 새로운 느낌을 선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