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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8장 선화 (仙化)
출처 : 인류의 어머니 수부 고판례 (상생출판) 422p~ 431p
태모님께서는 천지신명과 억조창생의 어머니로서 10년 동안의 천지공사를 통해 창생들의 모든 죄를 대속하시어 후천 오만년 선경세계로 나아갈 길을 열어 주시고 한(恨) 많은 세월을 뒤로하신 채 천상으로 떠나시니라. (道典11:416:8~9)
그해 9월, 증산 상제님 성탄치성 전날이었다. 고수부님은 갑자기“이 자손들을 어찌하면 좋으리요. 죽게되면 저희들이나 죽지 애매하고 불쌍한 우리 창생들을 어찌하리”하고 애통해 했다. 잠시 후 고수부님은 성도들을 동쪽으로 향하여 앉게 하고 주문을 읽으라고 하였다. 그리고“살려내자. 살려 내자”하고 부르짖었다.
장차 일본 제국주의의 칼날에 수없이 죽어갈 이 땅의 백성들을 구제하기 위한 공사이다(11:385). 물론, 다음 공사 말씀에 유의한다면 후천 가을 개벽기에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공사와도 무관하지 않다.
태모님께서 말씀하시기를“장차 괴질(怪疾)이 군산(群山) 해안가로부터 들어오느니라.”하시고“그 괴질의 기세가 워낙 빨라 약 지어 먹을 틈도 없을 것이요, 풀잎 끝에 이슬이 오히려 더디 떨어진다.”하시니라. 또 말씀하시기를“소병, 대병이 들어오는데 죽는 것은 창생이요, 사는 것은 도인(道人)이니 오직 마음을 바르게 갖고 태을주를 잘 읽는 것이 피난하는 길이니라.”하시니라. (11:386)
증산 상제님이 짜 놓은 후천 가을개벽 도수가 세 벌 개벽이라고 할 때 첫 번째 개벽은 병란(兵亂, 전쟁), 두 번째는 병겁(病劫), 세 번째는 지축정립이다. 그러니까 이 공사는 병겁 상황에서의 구원에 대한 내용이다
(후천 가을개벽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도전』7:1∼92 ;『개벽실제상황』;『 천지성공』등을 참고할 것).
그해 10월 초에 고수부님은 고민환 성도를 불러“초 엿샛날 치성을 준비하라”고 말했다. 고민환이 무슨 치성이냐고 물었으나 고수부님은 그냥“서둘러 준비하라”고 할 뿐이었다. 고민환이 정성을 다 바쳐 치성 준비를 마쳤다.
10월 초엿샛날 치성을 봉행한 뒤 고수부님은 갑자기“을해년에 임옥에서 땅 꺼진다”고 고함치듯 말했다. 이 공사는 1908년 증산 상제님이“임옥에서 땅 빠진다”고 한 공사의 연장선상에 있다. 구체적으로 고수부님 당신의‘ 선화 치성 공사’다. 여기서‘을해년’은 다음 해인 1935년이다.
여기서 우리는 고수부님이 당신의 선화가 얼마 남지 않은 시기에 잇달아 후천 가을개벽 공사를 집행했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그만큼 가을개벽이 시급한 과제이며, 인류의 어머니로서 단 하나의 창생이라도 더 살리고자 하는 애절한 마음이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운명의 1935년이 왔다. 고수부님이 56세 되는 해다. 고수부님의 그해는 역시 병자들 치유 공사로 시작되었다.
2월 3일 시두(천연두)에 걸린 김제군 용지면 예촌리에 사는 황경수, 같은 달 13일 예촌리 사람 황일봉의 모친, 3월 29일 임피 술산 문명수의 아들, 김제 장산리 사람 유호열과 유남열, 7월 보름날 폐병에 걸린 옥구군 대야면 고척마을 사람 김완산, 9월 초사흗날 이름도 모르는 급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는 김제군 백구면 가전리 사람 서해식을 치유해 주었다.
아무리 많은 병자들이 찾아와 호소해도 고수부님은 조금도 싫은 내색을 하지 않았다. 오면 오는 대로 반겨주고, 원하면 원하는 대로 해주고, 가면 가는 대로 바라볼 뿐이었다. 하루 빨리 병으로 고통 받는 창생들이 없었으면, 하는 바람뿐이었다.
고수부님은 당시 남모르는 생각을 하고 있는 중이었던 것 같다. 오성산에 온 이후부터 그랬다. 고수부님이 고민환에게 늘“내 집 지어라. 내 집을 어서 지어라”고 재촉하는 것은 그런 이유 중의 하나였다. 고민환은 영문도 모른 채 집을 짓기 시작하였다. 그런 어느날 고수부님은,
“내 일이 좀 바쁘구나. 오늘은 내 집을 구경해야겠다”고 하며 도장을 출발하였다. 성도들이 모두 따라나섰다. 옥녀봉에 이르렀을 때 고민환이 고수부님의 건강을 염려하여“어머님, 여기에서도 다 보입니다. 여기서 보고 돌아가십시다”하고 만류하였다.
고수부님은“그럴까?”하고 걸음을 멈추었다. 옥녀봉에서 성덕리 마을까지는 1킬로미터가 채 되지 않는 거리다. 고수부님의 건강상태로는 그 거리조차도 갈 수가 없을 정도였다. 옥녀봉에서 아랫마을이 훤히 내려다 보였다. 고수부님은 한창 짓고 있는 집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잠시 후 발길을 돌리는 고수부님은,“날짜가 급하다. 내 집 빨리 지어라”고 말했다.
고수부님은 지금 당신의 선화와, 선화 후까지도 예비하고 있는 중이었다. 지난 해 10월에 보았던‘ 선화 치성 공사’가 고수부님 자신의 선화 자체에 대한 것이라면, 지금 보고 있는 공사는 선화 후에 머물 집에 대한 공사다. 고수부님의 공사 대로 선화 후에 (고수부님의)진영이 그려지게 되었고, 그 진영은 증산 상제님 어진과 함께 바로 그날 옥녀봉에서 내려다보며‘내 집’이라고 말한 바로 그 집에 모셔지게 된다.
그해 10월 어느 날 밤이었다. 그러니까 조선총독부가 각 학교에 신사참배를 강요하던 그 시기에, 고수부님이 공사를 보고 있는데 아직도 강남으로 떠나지 못한 제비 한 마리가 문밖에 날아와 재잘거렸다.
“오라. 너, 남주작(南朱雀) 왔느냐!”고수부님은 마치 사람을 대하는 듯 말했다. 또 한 마리가 와서 재잘거렸다.“ 오냐! 내가 이미 알고 있느니라.”
겉으로 보면 천지자연과 벗하면서 유유자적(悠悠自適)하고 있는 삶이다. 그러나 고수부님의 오성산 도장생활은 비참하기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다. 일제의 탄압은 갈수록 극심해졌다. 고수부님의 오성산 도장시절은 도장 운영보다‘거미’처럼 은거하는 차원이었기 때문에 신도들의 왕래도 드물었다. 결국 오성산 도장은 유지 자체가 어려웠다. 고수부님은 끼니조차 잇기 어려운 형편이었다. 도장에는 양식이 떨어지기 일쑤였다. 도장에서 부엌일을 담당하고 있는 성도가 아래 마을로 내려가 시주를 받아와 고수부님을 봉양할 정도였다. 그러나 고수부님은 먹고사는 문제에 대해서는 초연한 듯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이 무렵 고수부님은“나의 한(恨)을 다 이야기하자면…, 너희는 모르느니라.”하고 회한에 찬 음결로 얘기하곤 하였다. 그럴 터였다. 지금까지 우리는 고수부님의 생애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그가 얼마나 한 많은 삶을 살았는지 논의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고수부님의 한을 다 이야기할 수가 없었다.
고수부님은 고찬홍의 아내 백윤화(白潤華: 1895∼1972) 성도에게“27년 만에 근본을 찾았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무슨 얘기인가? 『도전』에서는 이 27년에 대해‘증산 상제님이 어천한 1909년부터 고수부님이 선화 하게 될 1935년까지’라고 해석하고 있다.
고수부님이 오성산 도장에 온 지 2년이 되었다. 이무렵 고수부님은“내가 너희 아버지한테 빨리 가야 너희들이 잘될 텐데. 너희들은 집안만 잘 지키고 있으라” 하고 말하곤 하였다.
그날도 고수부님은 성도들을 향해 좀 쓸쓸한 표정을 지으며“내가 올 적에는 세상 사람들이 알게 하고 오리라”고 유언을 남기듯 말했다. 고수부님 자신이 다시 출세할 것을 예고하는 암시다. 증산 상제님도 어천 직전에 당신이 출세할 것을 유언하며 공사를 보았었다.
한 생애를 정리하는 사람은 사소한 곳까지 신경이 쓰이는가 보았다. 아니, ‘인류의 어머니’로서 후천 가을 개벽기에 죽어가게 될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천지공사를 거의 다 보았다고 해도, 막상 인류를 두고 떠나야 하는 마음이 그리 자상할 수밖에 없을 터였다.
그해 10월 5일 부엌에 들어간 고수부님은 팔을 척척 걷어올리고 구정물통에 손을 쑥 집어넣어 휘휘 저었다.
“밥티 하나라도 조심을 해라. 사람이 먹는 것이란 천지가 안다.”고수부님이 부엌에서 일하는 김종명(金鍾鳴, 1880∼1977) 성도를 향해 말했다. 나뭇간으로 가서 땔나무를 돌아보던 고수부님은“야야, 나무도 아껴서 때라”하고 옆에 있는 이길수 성도의 등을 토닥거려 주기도 하였다.
밖으로 나온 고수부님이 여러 성도들에게 말했다.“차후에 형편이 어려우면 너희들끼리 앉아서 너희 아버지와 나를 위해 보리밥 한 그릇에 수저 두 벌만 놓아도 나는 괜찮느니라.”
이어 성도들에게 목욕물을 데우라고 하였다. 말은 하지 않았으나 성도들은 그날따라 고수부님의 행동이 이상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고수부님은 평소 찬물로 목욕을 했기 때문이다. 몸은 비록 망가질 대로 망가진 채로 은거 중이었으나 성도들로서는 당신이 선화 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목욕을 끝낸 뒤에 고수부님은,
“새 옷을 다 내놓으라”고 하였다. 일전에 성도들이 해 올린 새 옷으로 갈아입은 뒤에 요에 누운 고수부님은 고민환 성도를 불러 머리맡에 앉으라고 하였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두어 시간 후에 고수부님은,
“너희들이 마음만 잘 고치면 선경세계를 보게 될 것이언만…, 선경세계가 바로 눈앞에 있건만….”혼잣말처럼 말하고, 다시“잘 꾸리고 있으라”고 말했다.
고민환이 무슨 뜻인지를 물었다. 고수부님은“글쎄 말이네!”라고 할 뿐이었다. 이어서“내 자리 옆에 새 요를 하나 더 깔아라”고 한 뒤에 고수부님은,
“증산 상제님이 오시면 나도 올 것이요, 내가 오면 상제님도 오시리라”고 말했다. 물론 당신의 선화 이후 출세할 것을 다시 얘기하는 것이었다. 잠시 후에 고수부님은,
“나의 머리에 손을 대라”고 말했다. 그리고 증산 상제님 어진을 가리키며“너희 아버지가 벌써 오실 때가 되었는데….”
세 번 거듭 말한 뒤에 조용히 눈을 감았다. 고수부님이 선화 한 것이었다.
태모님께서는 천지신명과 억조창생의 어머니로서 10년 동안의 천지공사를 통해 창생들의 모든 죄를 대속하시어 후천 오만년 선경세계로 나아갈 길을 열어 주시고 한(恨) 많은 세월을 뒤로하신 채 천상으로 떠나시니 이 날은 환기(桓紀) 9134년, 신시개천(神市開天)5833년, 단군기원 4268년, 을해(乙亥: 道紀65, 1935)년 10월 6일 축(丑)시요, 서력기원 1935년 11월 1일이니, 이 때 성수(聖壽)는 56세이시니라. 이 날 태모님을 곁에서 모신 성도는 고민환, 전선필, 박종오, 이길수 등이니 날이 밝아 수의를 수습하매 태모님께서 이미 횃대에 걸어 놓으셨더라. (11:416)
수석성도 고민환은 각처 성도들에게 고수부님의 선화를 알리는 부고를 보냈다. 고찬홍, 이진묵, 전선필, 문명수, 문기수, 이중진, 유일태, 오수엽, 조학구, 김수열, 김내언, 이재균 성도들이 달려왔다. 평소와 다름없이 눈을 감고 누워있는 고수부님을 보고 성도들은 다만 잠자는 줄로 착각할 정도였다.
나흘 뒤 11월 9일, 성도들이 입관하려고 하는데 고수부님의 성체가 방바닥에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이때 고민환을 비롯한 모든 성도들이 지난날 고수부님과의 사무친 정이 솟구쳐 올라 서럽게 통곡하였다. 도장 안팎이 온통 울음바다가 되었다. 한참 후에 성체를 간신히 떼어 입관을 한 다음 오성산 북변(北邊)에 있는 봉우재에 장사를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