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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7장 생산풍습(生産風習)
○ 제1절 과천의 농경생산 정황
○ 제2절 과천의 두레풍습
○ 제3절 과천의 농기구풍습
▣ 제1절 과천(果川)의 농경생산 정황(農耕生産情況)
과천시의 향토사 편찬사업의 일환으로 진행된 이 지역 생산풍습항목(生産風習項目)의 조사는 주로 농경생산에 초점을 맞추어 이루어졌다. 이 지역 역시 인근 안양, 시흥 등과 더불어 전형적인 농업생산지대였다. 그러나 도시화로 인하여 과거의 농경풍습은 일정한 잔재를 남기고 있을 뿐이다. 특히 과천시의 복판은 완전한 아파트 주거지로 변한 지 오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지역에는 여전히 농업을 하고 있는 본토박이들이 존재하여 농경풍습의 잔재를 알려주는 자료가 되고 있다. 따라서 변화된 현재의 농사관행보다는 과거 농경생활에서이 농경풍습에 초점을 맞추어 연구를 수행하였다.
이 경우에 연구조사가 이루어질 수 있는 시기는 주로 조선시대와 일제강점기일 것이다. 조선시대의 연구는 주로 조선후기의 문헌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바 현전하는 문헌이 극히 드물어 제한성이 많다. 일제강점기는 증언에 의하여 이루어지는데, 이 역시 증언자가 직·간접적으로 영농활동에 참여하였던 일제강점 말기 정도를 증언해 줄 정도다. 따라서 역사학과 민속학적 영역에서 두루 살펴서 검토해 볼 과제가 되는 셈이다.
과천 지역의 옛 농업생산관계를 구체적으로 알려주는 문서는 별로 전해오지 않는다. 현재 안양시·의왕시·과천시·군포시 등은 행정구역의 편제에서 많은 변화를 겪은 탓으로 옛 자료와 현재 구역을 정확히 구분하기 어려운 점도 있다. 다만, 오늘의 과천 지역 역시 경기 중부지방 생산풍습의 일면모를 지니고 있었음은 분명하다. 과천의 농업 정황을 몇 가지로 나누어 검토해 보기로 한다.
첫째, 지형(地形)과 관련하여 어떠한 농업생산이 이루어졌는가 하는 문제다. 오늘의 과천은 지형상으로 볼 때 산세(山勢)를 비집고 들어선 형상을 이루고 있다. 태백산맥에서 갈라진 광주산맥의 일 지맥이 구릉상(丘陵狀) 산세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관악산·청계산·수리산 등을 이루었다. 말하자면 오늘의 과천은 북쪽의 관악산, 남쪽의 청계산 자락을 사이에 두고 길게 발달한 지형을 보여주고 있다. 밑으로 매봉[鷹峯]이 펼쳐져 있어 야산형 협곡(野山型峽谷)을 이룬다. 따라서 과천의 농경지는 인근의 인덕원을 거쳐 평촌(오늘날의 평촌신도시)에 이르는 대규모 평지에 이르기까지 완만하고 작은 평지를 이루는 농지를 형성하고 있다. 따라서 농업생산, 특히 논농사는 오늘날 아파트 집단거주지로 변한 일대, 과천 서울대공원 지역, 그 밖의 완만한 산세를 이용한 작은 협곡들에서 널리 행해졌다. 즉, 평야를 이룰 만한 대규모의 농경지는 없는 대신 소농경영(小農經營)에 부합되는 작은 농경지들로 농사가 이루어졌다. 따라서 농업생산풍습 역시 소농경영에 부합되는 방식으로 발전하였다.
둘째, 과천 지역의 토지소유관계를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현재 조선 후기 과천 지역의 농업관계를 알려주는 문서로는 양안(量案) 정도가 전해진다. 현재 과천시에 해당되는 지역의 양안은 2권이 전해지며 규장각에 보관되어있다(도서번호: 奎 17655-9, 10). 과거 과천군 군내면 양안(果川郡 郡內面 量案)으로 1900년 당시를 기준으로 하면, 군내면의 총결수는 239결 2부 1속, 농가호수는 680호로 평균 토지소유는 35부 2속정도였다. 이를 농지 소유관계로 환산하면 부농과 중농·소농이 20%를 넘지 못하며, 대개가 소작이거나 무토농민(無土農民)을 이루고 있음으로 해서 토지소유의 부농집중(富農集中)현상이 높았음을 알려준다. 말하자면 생산농민의 처지가 상당히 어려웠음을 반증한다(자세한 것은 2편 3장의 토지제도 참조).
해방 이후에도 사정은 별반 변하지 않았다. 1948년 정부 수립 당시의 과천면의 농가호수는 총 926호로 자작이 94호, 자작 겸 소작이 571호, 소작이 261호로 대부분이 소작을 하였다. 1960년 경에 이르면 총 농가호수가 711호로 줄어 들었는데, 이는 도시화를 지향하는 추세를 일정하게 반영하고 있다. 통계에 의하면, 이 지역은 2모작보다는 1모작지대로 나타나며 농사관행에서도 그렇다. 그러한 탓에 살림살이가 어려울 수밖에 없던 지역이기도 하다. 이 역시 이 지역의 농업생산풍습이 전적으로 소농경영에 부합되는 방향으로 발전할 수밖에 없던 정황을 전해 준다.
셋째, 과천의 특산물로는 조선 전기에는 느타리버섯, 영지버섯 등이 토공품으로 올라있는 바, 이는 인근의 명산인 관악산에서 생산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말하자면 좁은 농경지에서 순수 농업만으로는 생계가 힘들었고, 인근의 산을 활용하여 임산자원을 채취하는 농업이 많았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다. 『동국여지지(東國輿地誌)』에 의하면, 조선 후기에는 쏘가리[金麟魚], 누치[訥魚] 같은 담수어종이 올라 있다. 이는 당시에 한강에 속한 노량진까지가 과천현에 속하였던 사실에서 비롯된 것으로 오늘날의 과천 지역은 해당되지 않는다. 그 밖에는 밤이 토산품으로 올라 있다. 이들 자료는 과거의 과천현을 기준으로 한 것이기에 인근 지역까지 포함한 원과천 지역에 해당되는 자료로서 그대로 오늘의 과천시 지역에 적용하기에는 곤란한 점도 있으나 농업생산의 지역적 보편성을 고려한다면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넷째, 농업에서 절대적으로 중요한 농업용수를 중심으로 농업정황을 검토해 보면, 현재 안양으로 흐르는 갈현천, 과천저수지와 연결되는 막계천, 서울의 서초구로 연결되는 양재천 등이 주요 농수로 활용되었다. 양재천은 과천시 갈현동 관악산 남동쪽 계곡으로부터 발원하고 있다. 원래는 한강으로 들어가는 지류였으나 홍수관계로 탄천으로 유입되는 지류가 되었다. 즉, 양재천은 남동쪽으로 흐르다가 과천시 문원동에 이르러 서북쪽으로 휘어지면서 과천시를 관류한 뒤 막계천을 합하고 양재동에 이른 다음에 탄천으로 들어간다. 산세로 들어간 농경지들은 수량은 적은 편으로 농수 확보에 난관이 있었으며, 이는 여타 지역과 다를 바가 없다.
결론적으로 과천시의 농경은 경기 중부지역 농법의 일반적 경향인 소농경영에 부합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으며, 농경풍습 역시 이들 소농의 의식을 반영하는 방식으로 전개되어 나간 것으로 파악된다. 동시에 농경풍습의 내용에 있어서도 인근의 안양·시흥·의왕 등지와 큰 차이는 없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러한 결론을 갖고서 과천시의 농업생산풍속을 검토해 보기로 한다. 과천서의 농업생산을 검토해 볼 수 있는 지역은 극히 제한적이다. 토박이들이 그나마 많이 살고 있는 지역들에서 약간의 자료가 확인된다. 즉, 죽바위·돌무께·삼부골·구리안·샛말·가루개·옥탑골·찬우물·가일·안골·벌말 등지에서 약간의 제보가 이루어질 정도다. 도시화의 정도가 빨랐던 만큼 농경생산풍습의 소멸 정도도 가속화된 탓이다. 조사방식은 주로 노인정을 찾아가서 면담조사를 행하는 방시기 쓰여질 수밖에 없었으며 과거 농사풍습에 연유된 전형적인 농기구 촬영 등은 이미 시기를 놓쳐 버렸다. 이 점, 조사의 난관으로 작용하였다.
조사대상으로서는 이 지역의 상부상조하는 농경조직인 두레조직, 각 절기마다의 농사력(農事曆)·농기구 등이 조사되었다.
여기서 조선시대 농사풍습의 참고 사례로 강희맹의 『금양잡록(衿陽雜錄)』을 살펴볼 피료가 생긴다. 『금양잡록』은 서울을 에워 싼 인근 일대의 농경풍습과 전근대사회의 풍습을 살피는데 대단히 중요하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금양’이란 지명이다. 금양은 태종 14년(1414)부터 태종 16년(1416)까지의 행정명으로 금천현의 ‘衿’자와 양천현의 ‘陽’자를 합한 것으로, 금천현은 지금의 광명시와 서울특별시 중 영등포구·구로구·관악구 등의 일부 지역이며, 양천현은 지금의 서울특별시 중 강서구와 양천구 등의 지역인데, 강희맹이 『금양잡록』을 저술한 곳은 과천과 이웃한 지금의 서울특별시 구로구 시흥 4동 8-2~5호이다.
그러나 역사적 사건과 다르게 농경풍습이란 마을마다 다른 것이 아니라 대개는 지역적 보편성을 지니고 나타나는 것인 바, 『금양잡록』에 등장하는 농경풍습은 바로 인접하였던 옛 과천 지역에도 적용될 것이다. 현재의 행정구역만을 가지고 평가할 문제는 아닌 탓이다.
특히 조선 전기의 자료로서 당대 농요의 음악적 측면을 전해주는 자료가 귀한 터에 『금양잡록』은 그 자체 음악적 해설자료로서도 의미가 있다. 여기서 다룬 곡조는 빠른 가락과 느린 가락 두 가지이다. 이는 현재의 전승민요에서 김매기노래가 느린 가락과 빠른 가락으로 대별됨과 일치한다. 이로써 이미 조선 전기에 노동에 따른 곡조의 빠르고 느림이 완성된 상태였음을 알려 준다. 다만, 이 단계에서는 이후 두레농업에서 보이는 ‘쌈싸기’라거나 ‘몬들소리’ 같은 양식이 아직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 농구(農謳)에서의 구연방식은 되받아 부르기, 메기고 받아 부르기, 주로 받아 부르기, 혼자 부르기 중에서 주고 받아 부르기 형식일 가능성이 짙다. 이는 선창자가 앞소리를 부르면 후창자가 거기에 대를 맞추어 뒷소리를 받아 부르는 형식인데, 『금양잡록』에서는 “농부들이 그 소리를 돕는 형세이다”라는 표현이 있어 이를 유추해 볼 수 있는 것이다.
농구(農謳)의 농업사적 측면도 중요하다. 『금양잡록』에 나타난 당대 농민들의 생활은 전형적인 열악한 소농경영 그대로였다. 조선 전기 사족(士族) 지주층의 농장경영에 사용된 대농법을 주로 기술하였던 『농사직설(農事直說)』에는 반드시 두 마리의 소가 한 셋트로서 작업에 동원될 정도로 풍부하게 사용되었음에 반하여 당시 경기도 지역 소빈농층(小貧農層)의 농법을 기술한 『금양잡록』에는 ‘100집이 사는 마을에 농사일을 맡을 수 있는 소가 겨우 몇 마리뿐이다’라는 모순된 현실을 보여준다.
즉, 『금양잡록』에는 소가 없는 농가에서 소대신 사람의 힘으로 쟁기를 끌게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 때 9명의 힘이 한 마리 소의 힘을 대신한다고 하고 있는 데서 열악한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소농민경영은 농자(農者)의 직영지 경영과는 반대로 농민의 존재형태가 『금양잡록』 농담(農談)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바로 ‘굶주린 가을 파리’처럼 혹심하였던 것이다. 즉, 당시 농촌사회는 농사직설 농법과 금양잡록 농법으로 대변되는 노동생산성 중심의 대농법과 토지생산성 중심의 소농법이 공존하였던 것이며, 『금양잡록』은 소농법을 수행하던 농민현실을 보여준 것이다. 이는 후대 과천 지역 농민들의 처지와도 상당히 일치하는 부분이다. 참고로 고려할 사항인 것이다.
▣ 제2절 과천(果川)의 두레풍습(風習)
농민들은 항시 서로 돕고 사는 상부상조하는 생활 속에서 두레·황두·소겨리·품앗이·수눌음·접·계 등 다양한 형태의 조직을 만들어 생활을 꾸려왔다. 전통적인 공동노동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 두레인 바, 쌀농사지대인 남한 지역을 중심으로 한 두레와 북쪽 지역 밭농사지대의 황두가 대비된다. 두레는 지역에 따라 두레·둘개·동네논매기·농사(農社)·농계(農契)·농상계(農桑契)·농청(農廳)·계청(契廳)·목청(牧廳)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웠다. 일감에 따라서 초벌두레·두벌두레·만물두레 등의 농사두레뿐 아니라 꼴을 베는 풀베기두레, 여자들만으로 조직되는 길쌈두레도 있었다. 이러한 두레의 기원은 과거 농촌의 공동체적인 생활조직에서 유래된 것으로 인정된다.
유수원(柳壽垣)은 우서(迂書) 논한민조(論閑民條)에서, “우리나라의 소위 향도계는 서울은 물론이고 시골의 어느 곳에나 있다. 무릇 축성 등 공가(公家) 여러 일에 불려 다니기도 하고 여항간(閭巷間)의 길흉 대소사, 예컨대 상여매는 일, 분묘 조성, 제언 쌓고 농토 일구는 일, 수레 끄는 일, 집짓기, 측간 청소, 우물파는 일, 가마메는 일, 이엉마는 일, 담 고치는 일, 모내는 일, 북치는 일, 기와나 벽돌 굽는 일, 눈쓸기, 물장사 등등 잡다한 일들이 모두 이들로부터 나온다” 고 하였다. 또한, 장유(張維)의 『계곡집(谿谷集)』에는 두레의 호미씻이를 상징하는 대목이 정해지는 바, “농가에서 김매기가 끝나면 남녀노소가 다 같이 모여서 음식을 함께 먹는데 이것을 호미씻이라 한다”고 하여 두레의 기원이 오래됨을 전해 주었다. 『영조실록(英祖實錄)』 권 47에는 이미 100년 민속이 된 두레를 거론하고 있다. 곧 “호남어사가 장계를 올려 말하기를 ‘전 부안(扶安) 현감이 농민으로부터 징과 꽹과리를 몰수하였습니다. 그러나 오늘에 이르러 징과 꽹꽈리를 농민에게 돌려 주는 것이 옳을 듯 합니다’하고 하였다. 왕이 묻기를 ‘농민들이 무슨 까닭으로 꽹과리를 울리는가’ 라고 하니, 우의정이 답하여 말하되 ‘논밭에서 일할 때 피곤함을 잊는 데는 징과 꽹과리를 울리고 북을 쳐서 그 기운을 진작시킴만 같은 것이 없으므로 꽹과리를 치는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주】1)
이같이 두레의 역사는 전래의 상부상조하는 생활기풍에서 나온 것으로 특히 본격적인 두레의 발생은 조선 후기에 전국적으로 보편화된 모내기의 확산과 동시에 이루어졌다. 예컨대, 조선 후기 수도작(水稻作)농업에서 이앙법(移秧法)의 전면적 전개는 두레 공동노동조직을 강하게 추동하는 저력이 되었으며, 조선 후기 농업생산활동의 중심축으로서 두레를 자리매김하였다. 즉, 두레는 상부상조하면서 공동으로 김매기하던 우리 고유의 풍습을 말하는 것이니, 농촌 어디서고 쉽게 눈에 띄던 대표적인 민속이었다.
두레노동의 체계화는 농업노동상에서 절기별 노동주기(勞動週期)와도 관련된다. 사실상 김매기가 집중되는 계절은 매우 더운 철이고 뙤약볕에서 일시에 많은 논을 맨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그래서 두레꾼들은 풍물을 꾸려서 악기를 치고 신명을 잡으며 논두렁으로 들어갔다. 고통스런 일을 신명으로 풀어내는 지혜는 매우 놀라운 문화체계였다.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일명 ‘농악’이라 하는 것의 완결은 바로 두레에서 이루어졌다. 농민문화의 중심을 풍물굿이라고 하거니와 두레는 그 굿의 뿌리였던 셈이다.
따라서 일과 놀이를 겸비한 두레문화를 발전시켜 삶의 대동성을 확보하고자 한 것이다. 두레꾼들은 음력 6월의 한 달 가량을 공동논매기하고 나서 두레의 최대의 축제적 행사인 호미씻이를 7월 칠석이나 백중날에 열었다. 그리하여 ‘어정 칠월 건들 팔월’이라는 호시절을 만나 더운 여름철을 만끽하는 것이다. 개장국을 끊이고 씨름도 즐기며 들돌을 들어 힘자랑도 하면서 술추렴으로 모처럼의 여가를 즐겼다.
또한, 두레는 농민민주주의(農民民主主義)가 관철되는 현장이었다. 농사일을 결정하는 호미모둠이나 두레의 결산을 보는 호미씻이 같은 회의는 민주적 농민회의의 전형이었다. 두레꾼들은 자체적으로 엄격한 규율을 정해 공동노동의 단결성도 확보하였다. 상부상조의 전통을 엄히 지켜서 마을의 노약자나 과부 등 일손이 없는 집에 대해서는 농사를 무상으로 지어주는 미풍도 있었다. 동시에 마을의 두레풍물패는 걸립으로 공동 계금(契金)을 확보하여 악기를 보수한다거나 마을 대소사에 자금을 대어주는 기능도 담당하였다.
두레풍물패의 큰 기는 평상시에는 농사일에 쓰였으나 유사시에는 농민군(農民軍)을 모아들이는 깃발이기도 했다. 민란이 터지면 두레기나 영기를 들고 농민들은 관아로 나아갔던 것이다. 두레기는 바로 농민의 상징물이었다. 두레기는 대단히 큰 기여서 마을에서도 제일 힘이 센 장정들만이 들 수 있었다. 두레농사를 지으러 나갈 때는 물론이고 두레패가 이동하는 곳에도 으레 두레기가 따라 다녔다. 신분 여하를 막론하고 두레기 앞에서는 말에서 내려 걸어가야 했다. 그 만큼 두레기는 농민들의 자긍심의 상징이었다. 형두레와 아우두레, 선생두레와 제자두레 식으로 서열을 정해 마을 세력권을 형성하였으며, 자기 마을의 자긍심을 지키기 위해 다부지게 싸움도 벌였으니 ‘두레싸움’이 바로 그것이며, 두레끼리 인사하는 예법이 ‘기세배’였다. 또한 논둑에서 먹던 두레밥의 푸짐한 정경도 빼놓을 수 없는 정겨운 장면이었다. 한솥밥 공동체로 묶였던 농민들의 세계를 잘 보여주는 것이며, 그러한 생활상의 저력에서 농민들의 순박하면서도 강인한 힘이 잉태되었던 것이다.
그러한 미풍양속으로 전해오던 두레는 일제강점기에 대대적으로 소멸되기 시작하였다. 강제징용과 근로보국대 등으로 마을 청장년들이 빠져나가면서 악기를 칠 사람이 줄어든 탓이다. 심지어는 꽹과리와 같은 쇠붙이도 공출해 가던 시절이었다. 두레의 소멸은 농업생산풍습에서 많은 것을 빼앗아갔다. 우선 아름다운 민요가 많이 사라졌다. 김매기를 할 때 선소리꾼이 매기던 노래도 사라졌다. 두레의 상징인 농기(용당기·덕석기·두레기라고 부르는 깃발)도 사라졌고 논둑에서 공동으로 참을 먹던 두레밥도 사라졌다. 물론 풍물 자체도 사라지거나 축소됐다. 과천시의 두레 역시 이러한 범주를 벗어나질 않았다. 다만, 타 지역과 비교할 때 약간의 지역적 차별성은 존재한다. 이를 좀더 구첵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 1. 두레조직
○ 2. 두레노동
○ 3. 두레놀이
○ 4. 두레회의
○ 5. 두레의 변천
▣ 제3절 과천(果川)의 농기구풍습(農器具風習)
과천지역 역시 농기구들은 농경세시, 즉 농사력에 알맞게 발전하였다. 특히 소농경영이 보편화된 과천 지역 농업의 특성상 농기구 역시 소농에 요구되는 일반적인 농기구가 뒤따랐다. 일제시대를 기준으로 보면, 당시 과천의 농민들도 겨울철에는 주로 새끼 등을 꼬면서 소일하고 음력 2월까지는 이러한 작업이 계속 연장되었다. 특히 일제 말기로 접어들면서 가마니 공출이 심하여 집마다 일정하게 할당된 가마니를 치는 일이 매우 중요했다. 마을에 따라서는 겨울철 장작하기도 매우 중요했다. 대개 소작으로 살던 사람들이 겨울 식량을 마련하기 위하여 인근 산에서 장작을 하여 내다 팔았다. 가령, 안골마을에서는 겨울에 나무를 하여 지게에 지고 남태령을 지나 멀리 마포에까지 나가 장에 팔았다. 그 만큼 생활이 어려웠던 시절의 풍습이다.
【사진】쇠스랑, 고무래, 삼태기
과천 지역에서는 대략 곡우 정도에 못자리보기가 시작되었다. 풀을 베어다 못자리에 깔아 준비한다. 당시에는 짚이 초가지붕을 잇는데 쓰이는 등 귀했던 탓으로 산에서 풀을 베어다가 거름으로 썼다. 따라서 ‘논이 부글부글 끓는다’는 표현이 정확할 정도로 논농사의 어려움이 많았다. 쟁기로 갈아 엎기 시작하면서 대략 망종부터 하지 사이에는 모내기가 일제히 완료되었다. 초벌 김매기, 두벌 매기가 완료되어 대개 6월에 시작한 논매기가 7월이면 거의 끝이 났다. 실상 7월로 접어들면 한 해 농사가 거의 끝났다고 할 정도로 가장 힘든 작업이 모내기와 김매기였다. 8월로 접어들면 가을풀베기가 시작되었고 이내 추수기로 접어들었다.
이같이 절기마다 이루어지는 과천 지역의 농사관행은 경기 중부지역의 관행과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그리고 각각의 절기에 알맞게 농기구가 사용되었다.
봄이 오면 소에다 쟁기를 매어 논밭을 가는 모습은 과천 지역에서도 볼 수 있는 풍경의 하나였다. 써래질을 하여 모를 내고 호미로 잡풀을 뽑고 낫으로 알곡을 거두어 멍석에 말려서 섬이나 가마니에 넣어 두어 갈무리하는 모습도 흔하기만 하였다. 그러나 이들 살림도구들도 다 사라졌다. 현재 농사를 짓는 과천의 일부 지역에서도 전래 농기구는 사라지고 현대화된 농기구로 대체되었다. 가령, 폴리에틸렌 자루가 개발되면서 가마니 구경을 하기가 힘들어졌고, 경운기가 쟁기를 대신하고 논매는 호미 대신 제초제가 사용되고 있다.
과천 지역의 농기구를 살펴볼 경우에도 먼저 24절기 자체를 이해해야 할 것이다. 각각의 도구들은 절기와 관계 없이 쓰이는 것도 많지만, 어느 절기에만 집중적으로 쓰이는 경우도 많은 탓이다.
【사진】멍석, 괭이
【사진】써레, 멍에
절기란 본디 세(歲)·일(日)·월(月)·성신(星辰)을 율력으로 계산하고 이 율력을 계산하는 방법으로 10간 12지를 사용한 데서 비롯됐다. 이에 따라 1년을 24절기인 입춘·우수·경칩·춘분·청명·곡우·입하·소만·망종·하지·소서·대서·입추·처서·백로·추분·한로·상강·입동·소설·대설·동지·소한·대한으로 제정한 것이다. 이들 절기는 농경생활과 대단히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발전되어 왔으며, 과천 지역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바로 농경생활의 현실적 요구에 의하여 절기들이 알맞게 배치되고 변화발전을 거듭하여 온 것이다. 24절기는 태양력을 기준으로 하고 있으면서도 태음력을 기반으로 하는 세시풍속에 영향을 미친다. 이 역시 농사와 연관된다. 원래 태음력은 순전한 음력이 아니라 계절과 역일이 서는 계절을 올바로 알기 위하여 12절기와 12중기(中氣)로 된 24절기를 음력의 역일에 배당하여 썼던 것인데 그 중에는 세시절일로 설정된 것도 있다. 이들 각 절기에는 각각의 농사력이 존재하며 세시풍속이 정해진다. 특히 세시풍속은 해마다 같은 시기에 반복되는 주기전승의 생활문화로서 각 절기마다 다양한 요소를 지니고 있다. 농경의례이기도 한 세시풍속은 농사가 복잡하고 다양한 만큼이나 종류도 많고 그 내용에 있어서도 복합성을 띠고 있다. 농사력 역시 다양할 뿐더러 파종·성장·수확의 농사주기가 각기 다르다. 음력 정월의 준비기를 거쳐서 2월부터 4월까지의 파종기, 5월부터 7월까지의 성장기, 8월부터 10월까지의 수확기, 11월부터 12월까지의 저장기로 대략 가른다. 즉 이러한 관행이 과천지역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1. 봄과 농기구(農器具)
과천의 정월도 마냥 한가하기만 한 절기는 아니었다. 추위에 뿌리가 들뜨지 않도록 보리밟기도 해두고, 퇴비도 만들고 농기구를 손질하여 봄을 대비하였다. 2월 경칩·우수에 접어들면 보리이랑돋우기, 거름뿌리기, 봄보리파종, 묘판준비, 볍씨담그기, 삼씨뿌리기, 논둑태우기 같은 일들이 벌어졌다. 2월로 접어들면 농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기점이었다. 3월 청명·곡우에 접어들면 볍씨소독 및 담그기, 못자리만들기, 볍씨뿌리기, 감자파종, 고구마 싹키우기, 보리밭매기, 봄보리갈기, 봄보리파종, 삼씨뿌리기, 서속파종, 목화파종, 뽕나무심기 같은 일들이 이루어졌다. 4월 입하·소만에 이르면 못자리관리, 올콩심기, 이른모내기, 녹두심기, 올보리수확, 면화갈기, 고구마이식이 이루어지고, 5월 망종·하지는 정말 바쁜 철이라 보리수확, 모심기, 감자캐기, 메밀밭매기, 콩심기, 마늘수확, 논갈이 같은 일들이 겹쳐서 벌어졌다.
이 때 가장 많이 쓰이는 도구가 가는 연장과 삶는 연장, 씨뿌리기 등이었다. 가는 연장은 쟁기·가래·쇠스랑이 으뜸이었다. 가래는 겨우내 무너진 논두렁을 붙이는 일에 쓰였다. 조선가래와 양가래(왜가래)가 있었으며, 조선가래는 참죽나무로 만들었다. 쇠가 귀했던 시절이라 가장자리에 쇠를 벼루어서 테를 붙여 강도를 보장하였다. 쇠스랑은 씨앗을 뿌리기 위하여 논을 고를 때 흙뭉텅이나 잔돌을 골라내는 데 쓰였으며, 고무래는 보리가는 데 쓰였다. 삶는 연장은 써래·번지·나래·곰방매·고무래·밭고무래·끙게 같은 것들이 쓰였다. 써래는 반드시 소가 끌어 주어야 하며 쟁기로 논갈기를 마치고 난 후에 논을 골라 주었다. 써래발은 약 10여 개 정도였으며 처음에는 나무로 만들어 쓰다가 나중에는 시장에서 쇠로 만든 것을 사다 썼다. 논을 고르는 번지는 나무판으로 길게 만들어 써래에 매달아 썼다.
【사진】종태기
【사진】도리깨, 키
거름주는 연장은 초기에는 항아리로 만든 오줌장군이나 나무로 만든 거름통, 똥바가지 등이 많이 쓰였다. 괭이는 조선괭이가 많이 쓰였는데, 주로 단단한 땅을 파는 데 사용되었다. 쟁기는 조선쟁기와 왜쟁기가 있었는데, 처음에는 조선쟁기가 쓰이다가 나중에는 왜쟁기가 쓰였다. 조선쟁기는 무거운 탓에 작동시키기가 힘들었던 탓이다. 과천 지역 역시 문제는 소였다. 소가 상당히 귀한 시절이라 소를 구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다.
2. 여름과 농기구
6월에는 소서·대서가 끼어 있다. 농사일로는 보리수확 완료, 모심기, 김장무우심기, 고추모솎기, 밭김매기, 잡곡거두기, 들깨심기, 열무씨앗파종 등을 해야 했다. 세시로는 복날·유두가 있었다. 7월은 입추·처서의 절기에 해당되며, 농사일은 논매기, 밭매기, 풀뜯기, 논밭에 웃비료주기 등이었다. 세시는 칠석·백중·호미씻이 등이 집중되었다.
매는 연장은 단연 호미가 으뜸이다. 호미는 매년 날을 벼루어야 했다. 호미는 밭호미, 논호미 구분없이 썼으나 원래는 논호미가 별도로 있었다. 조선호미는 왜호미와 달리 대장간에서 두드려 만들었다. 과천의 인근 대장간으로는 ‘곽서방네 대장간’, ‘삼거리대장간’ 등이 알려졌다. 대개 농사철이 시작되기 전에 호미 벼루기를 했다. 물이 귀했던 탓으로 물대는 두레 역시 중요했다. 용두레와 고리두레를 많이 썼다.
3. 가을과 농기구
8월은 백로·추분의 절기에 해당되며, 농사일은 수수수확, 이삭거름주기, 피뽑기, 깨수확, 고추잎따기, 고구마줄기자르기, 봄감자수확 등이었다. 세시는 추석이 가장 중요했다. 9월은 한로·상강에 해당되며, 농사일은 벼베기, 콩·고구마·감자·고추 등의 수확과 김장배추관리가 중요했다.
거두는 연장은 낫이 가장 중요했다. 물론 조선낫이 많이 쓰였다. 터는 연장은 태질을 하여 두드려 털다가 나중에 그네가 나왔고, 후에 호롱기 같은 수동식기계가 나왔다가 탈곡기로 바뀌어 갔다. 알곡은 대개 디딜방아와 연자매로 탈피(脫皮)를 했다. 디딜방아는 각 호마다 있지는 않았으며 마을에 몇 개 정도 있는 정도였다. 연자매는 구비가 여려운 품목이라 잘 사는 마을에 한 개 정도 있었다. 말리는 연장은 멍석·도래방석 등이 중요했다. 겨울에 소일거리 삼아 만들어 둔 멍석은 큰 것이 마당을 꽉 채울 정도였다. 도래방석은 작고 동그란 멍석으로 잡곡류를 너는 데 많이 쓰였다.
【사진】절구
고르는 연장은 풍구·바람개비·키 등이 중요했다. 알곡 및 가루 내는 연장은 물레방아·연자매·디딜방아·맷돌·절구 등이 중요했다. 운반연장은 길마·발채·장군·지게·우차·망태기·바구니·광주리 등이 중요했다. 갈무리연장은 섬·가마니·독·등구미·소쿠리·뒤옹박 등이 중요했다. 갈무리 도구의 기본은 가마니와 섬이다. 볏섬이 먼저 출현하였으며, 가마니는 일제시대에 급격히 보급되어 쓰이다가 폴리에틸렌 섬유가 등장하면서 현대화와 더불어 급격히 사라져서 보기 힘들게 되었다.
4. 그 밖의 농기구들
그 밖의 계절에 구애받지 않는 연장으로는 축산연장과 농산제조연장이 있었다. 축산연장은 소를 키우기 위한 먹이통인 구유와 소죽바가지·작두 등이 중요했다. 농산제조연장은 과천에도 아주 오래 전에는 베틀·물레·씨아 등이 있었다고 하나 그 전승이 이미 오래전에 끊긴 상태다. 섬틀·가마니틀 같은 것들도 있었으며, 짚신을 신던 시절에는 물론 신틀도 존재했을 것이다. 기타 연장으로는 나무를 할 때 쓰이던 갈퀴, 눈을 치거나 알곡을 엎던 넉가래, 비가 올 때 쓰던 도롱이, 그 밖에도 삿갓·메·되·비·바가지·함지 등이 두루 쓰였다.
이들 연장들은 도시화의 촉진과 더불어 농업 자체가 사라지면서 대거 소멸해 갔다. 그나마 남은 농경지도 현대화된 새로운 농법과 농기구 자체의 변화로 말미암아 질적인 변화를 겪었다. 더욱이 서울 인근에 자리잡아 서울생활권에 포함되면서 농업의 품종 자체에 변화가 이루어지면서 전래의 농업방식과 농기구들은 거의 사라지고 구전되는 풍습으로만 남게 되었다.
【집필자】 朱剛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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