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0화 생명이 끊어진 하얀 장미
쓰러진 키라키쇼를 들고 있는 가야토는 엘리스 게임이 열렸던 무도대회장에 도착했다. 이곳은 키라키쇼가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기 위한 엘리스 게임을 개최한 곳이자, 화려한 것을 선호하는 그녀에게 제일 어울리는 장소라 그런지 그가 여기로 데려온 것 같았다.
그는 그녀를 무대 위에 눕혀놓고 품속에서 바느질세트와 솜이 가득 들은 한 봉지를 꺼냈다. 그리고 즉시 목에 박힌 강철 BB탄을 꺼내고, 그 속에 솜 한 뭉치를 넣고 바늘에 새하얀 실을 연결해 꿰매어주었다. 또 자신의 저격용 총으로 인해 뻥 뚫린 가슴부분에 마찬가지로 솜 한 뭉치를 넣고 구멍이 난 헝겊을 오므려서 거의 흔적이 남지 않도록 꼼꼼하게 꿰매주었다.
이렇게 대충 응급처치가 끝나자, 가야토는 잠시 동안 얌전히 누워있는 키라키쇼를 바라보다가 무언가 떠오르는 것이 있었는지 곧바로 오른손을 들어 히나이치고에게 한 것처럼 키라키쇼의 가슴을 강하게 짓눌렸다. 그런데 오른손에 전혀 잡히는 것이 없자, 그는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흠...다른 인형들은 저마다 인공정령을 하나씩 가지고 태어나는 것 같은데...... 이 7의 돌은 정령을 갖고 있지 않은 듯 하군. 그렇다면 이 녀석은 미완성인 것인가? 아니면 처음부터 지니지 않는 것인가? 그런데 어떻게 이 녀석이 마법을 부릴 수 있었던 거지?’
이렇게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오른손을 떼었을 때였다.
“오호, 키라키쇼님을 다시 이곳으로 데려오셨군요.”
그때, 나직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그는 고개를 돌렸다. 그가 돌아본 곳에 엘리스 게임의 진행을 맡았던 토끼인형이 서 있었다. 그의 이마에는 저번에 저격용 총으로 명중한 자국이 새겨져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기억이 나는 듯한 가야토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이마를 전통으로 맞았는데도 살아남다니. 정말 용하군.”
“저는 당신과 같은 인형이기 때문에 그 정도는 버틸 수 있지요. 그것보다 당신은 왜 갑자기 나타나서 신성한 엘리스 게임을 방해하셨습니까? 혹시 누구에게 복수하기 위해 그런 것입니까?”
그는 쓰러진 키라키쇼를 내버려두고 자리에 일어나면서 대답했다.
“아, 그땐 네 놈이 쓰러져서 내 계획을 듣지 못했던 것 같군. 내가 엘리스 게임을 방해한 이유는 간단한다. 나를 만들고 버린 그 자식에게 복수하려는 것이지. 단지 그것뿐이다.”
“그렇다면 상처를 입은 키라키쇼님을 왜 치료하셨습니까? 복수를 하기 위해서는 그분들이 가지고 있는 로자 미스티카들이 필요할 터인데, 그것만이 목적이 아닙니까? 그 행동에 대해서 이해가 잘 안됩니다만......”
“그래, 네 놈의 말대로 나는 로자 미스티카를 전부 모아야만 복수를 진행할 수 있다. 그러니 상대의 인형이 어떻게 되든 난 로자 미스티카만 손에 넣으면 된다. 그런데 그 행동에 대해선 나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내 동생들이나 다름없는 녀석들이 상처를 입은 것을 보면 나도 모르게 그 행동을 취하게 되지. 그런 녀석들은 날 적으로 생각하는데 말이다.”
“후후, 키라키쇼님과 비슷한 목적을 가지고 계시는군요. 키라키쇼님은 엘리스 게임을 통해 로자 미스티카를 모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번 기회에 키라키쇼님과 손을 잡으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이미 망쳐진 엘리스 게임을 다시 개최하여 그 인형들을 불러내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당신은 그녀들에게서 로자 미스티카를 빼앗는데 수월해지고, 키라키쇼님은 엘리스 게임에 승리하여 최고의 인형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서로 이익을 얻을 수 있으니, 정말 좋은 제안이 아니겠습니까?”
여기까지 그의 제안을 들었을 때, 가야토는 무엇이 그리도 좋은지 조용히 웃었다. 그의 모습을 본 토끼인형은 자신의 제안이 통한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 생각이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가야토가 주머니에서 소형권총을 꺼내 자신을 겨누고 있었기 때문이다.
“참, 좋은 제안이다만, 단 세 가지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 제안을 거절해야겠다. 첫째는 난 남에게 도움을 받아야 할 정도로 그리 약하지 않다. 둘째는 내가 왜 엘리스 게임을 이렇게까지 와서 망친 줄 아나? 그 게임은 나를 포함한 아버지라는 녀석에게 만들어진 인형끼리 서로 싸워 승리를 차지한 인형이 최고의 인형이 되는 게임이다. 그 녀석의 사랑을 받기 위해 몸부림을 치는 게임이 너무나 역겨워서 망치려고 한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셋째는 난 처음부터 너 같이 수상한 녀석을 믿어본 적이 없다. 그러니까 여기서 사라져줬으면 좋겠는데?”
“역시...당신은 쉽게 넘볼 인형이 아니군요. 하지만, 여기서 사라져줄 인형은 내가 아니라 당신입니다.”
“!”
그 소리에 가야토는 무언가 깜빡 잊고 있었던 것이 있었는지 곧바로 몸을 움직이려고 했으나, 이미 가시투성인 새하얀 장미넝쿨에 휘감긴 뒤였다. 방금 전까지 이런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던 가야토는 고개를 뒤로 돌렸다. 그의 뒤에는 응급처치로 인해 멀쩡해진 키라키쇼가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 그를 발견하고 자신의 넝쿨로 재빠르게 포박한 것이었다.
가야토가 확실하게 포박당한 것을 확인한 토끼인형은 그 자리에서 연기처럼 사라져버렸다. 한순간에 당해버린 느낌이 든 그는 몸을 움직여 어떻게든 빠져나가려고 했으나, 넝쿨표면에 온통 날카로운 가시들이 돋아있어 심하게 몸부림을 쳤다간 그 자리에서 몸이 찢겨져나가기 때문에 마음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새하얀 장미넝쿨에 꼼짝도 할 수 없는 그를 바라본 키라키쇼는 조금씩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당신 때문이야...... 당신이...엘리스 게임을 망쳤어......”
“그래, 그 역겨운 게임을 두 번 다시 할 수 없도록 망쳐놓았다. 그게 그렇게 기분이 나쁘더냐?”
“당신은...게임에 참여할 자격도 없는 쓰레기야. 아버지의 사랑을...받을 자격이 없다.”
“훗, 내가 전에도 말하지 않았었나? 그 자식에게 복수하기 위해 이 일을 꾸민 것이라고 말이다. 그러니 망쳐놓은 게 당연한 것이 아닌가?”
“......”
그녀가 그와의 거리를 두 발자국쯤 남겼을 때, 키라키쇼는 무언가 느낀 것이 있었는지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난...느껴진다. 로자 미스티카가 말이다. 그것도...두 개씩이나......”
“!”
그녀의 말에 가야토는 또 다시 움찔했다. 지금 그의 가슴 속에는 예전 그녀들과의 싸움에서 빼앗은 두 개의 로자 미스티카. 히나이치고의 베리벨과 소우세이세키의 렘피카였다. 역시 제 7의 돌답게 로자 미스티카를 가지고 있는지 아닌지 느낌으로 알 수 있는 모양이었다. 키라키쇼가 미소를 짓는 이유가 있었다. 왜냐하면, 엘리스 게임은 최고의 인형을 가리기 위해서 서로 전투를 해야만 하는데, 그 전투에서 상대의 로자 미스티카를 빼앗는 것이 승리를 차지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손아귀에 있는 가야토를 쓰러뜨리고 로자 미스티카를 빼앗는다면, 경쟁자 두 명을 쓰러뜨리는 것이기에 그녀가 기뻐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로자 미스티카를...두 개씩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좋은...것을...가지고 있어. 당신의...몸을 흡수한다면...더욱 강해질 수 있어...... 그 몸...나에게...줘......”
그녀는 이렇게 말하고 조용히 그에게 다가가 살며시 입을 맞췄다. 그녀와 입을 맞추자마자 무언가 속이 거북한 느낌이 든 가야토는 잠시 고개를 숙였다. 속뿐만 아니라 가슴과 다리, 발, 얼굴까지 이상한 느낌이 들어서 왠지 답답하게 느껴져서 참을 수가 없었다. 아마도 키라키쇼가 입맞춤을 하면서 무언가 마법을 걸어놓은 것 같았다. 키라키쇼는 새하얀 장미넝쿨과 수정말고도 상대방 인형에게 입을 맞추어 몸에 장미와 가시넝쿨을 기생시키는 무서운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이 마법은 바이러스를 퍼뜨리는 것과 비슷한 것으로 의지가 매우 약한 인형은 빠른 속도로 퍼져 나중에는 폭발하게 된다. 반면에 의지가 강한 인형은 속도가 많이 늦추어질 것이고......
입을 뗀 키라키쇼는 더욱 활짝 웃으면서 자신의 오른손을 뻗어 그의 가슴에 갖다 대었다. 그러나 그의 가슴부분에 파란색 빛이 나면서 그녀의 오른손이 들어가는 것을 확실히 거부하고 있었다. 여러 번 시도를 해도 마찬가지였다. 파란색 빛이 방패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런 상황을 처음 겪은 키라키쇼는 순간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이건 말도 안 돼! 분명히 내가 마법을 걸어놓았는데...... 어떻게 이 녀석이 가지고 있는 로자 미스티카를 빼앗을 수 없는 거야?! 이건...이건 말도 안 된다고!”
그녀의 외침을 얌전히 듣고 있던 가야토가 조용히 비웃다가 고개를 들며 말했다.
“후후후, 감옥이 누군가 부숴버릴 수 있을 만큼 허술해서야 되겠나? 내 정령은 프리센이라 어느 누구도 빼앗을 수 없지. 그리고 아까 전에 내게 한 입맞춤 말이지. 왠지 속이 거북해져서 기분이 무지 나쁘거든. 그러니까 이번에는 두 말할 것도 없이 죽어줘야겠다.”
“크윽...하지만...너는 빠져나올 수 없어. 나의 아름다운 가시넝쿨 속에서 빠져나온 자는...아무도...없어. 그리고 내 마법은...너를 흔적도 없이...삼켜버릴 거야......”
“과연 그럴까?”
가야토는 이런 말을 하면서 오른손에 들려있는 소형권총을 키라키쇼에게 향하게 하고 그대로 방아쇠를 당겼다. 소형권총의 총구 속에서 나가는 강철로 만든 BB탄이 순식간에 딸기넝쿨로 바뀌어 키라키쇼의 얼굴을 휘감아버렸다. 그 바람에 앞을 볼 수 없게 된 키라키쇼가 당황하고 있을 때, 가시넝쿨이 조금씩 느슨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등에 메어있는 저격용 총의 총구를 잡고 그대로 휘둘렸다. 그러자 그의 몸을 포박하고 있던 가시넝쿨이 깨끗하게 잘라져 그녀의 포박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포박에서 빠져나온 가야토는 저격용 총을 다시 오른쪽 어깨에 메고 다시 소형권총을 들었다. 그리고 인정사정 볼 것 없이 그녀의 왼손과 오른손에 각각 한방씩 쏘아 구멍을 내버리자, 비명을 지르면서 쓰러지는 키라키쇼. 가야토는 그녀의 가슴을 오른발로 꽉 누른 다음에 그녀의 얼굴에 묶여있는 딸기넝쿨을 제거했다. 이제야 앞이 보이는 그녀는 다시 넝쿨을 내보내려했으나 그가 가슴을 짓누르고 있는 탓에 곧바로 힘을 쓸 수가 없었다.
“자,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느냐?”
“으윽...오라버니...... 제발...용서해주세요! 제가 오라버니를 알아보지 못하고...이렇게 큰 무례를 저질러버렸어요! 제발 용서해주세요! 다신 안 그럴게요!”
그녀는 갑작스럽게 존댓말로 그에게 잘못을 빌었다. 평소에 반말을 하면서 거칠게 공격하다가 궁지에 몰리니 목숨만 살려달라고 애걸복걸하는 것 같았다. 아니면 그가 방심하는 틈을 타서 다시 공격하기 위해 속임수를 쓰고 있을 지도 모른다.
그녀의 간절한 목소리를 들은 가야토는 그녀의 가슴을 더욱 세게 짓누르며 말했다.
“그런 달콤한 말로 지껄이면 정말로 용서해줄 주 알았나? 아까 너에게 로자 미스티카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확인했으니 넌 이제 쓸모가 없다. 그냥 내버려두면 또 귀찮게 할 것 같으니...... 이 저주받은 마법도 풀 겸 이 오라버니가 확실히 버릇을 고쳐주마!”
말이 끝남과 동시에 그녀의 오른쪽 눈에 붙어있는 하얀 장미를 거침없이 떼어내 버렸다. 그 순간, 키라키쇼는 갑자기 숨이 막히는 듯이 심하게 발버둥을 치다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예전 그가 말했듯이 그녀의 오른쪽 눈에 달려있는 새하얀 장미가 생명을 책임을 지고 있는 듯했다. 그것을 단숨에 떼어냈으니 생명이 끊어지는 것은 당연했다.
아무리 발로 건드려도 전혀 움직이지 않자, 가야토는 등을 돌리며 이런 말을 내뱉었다.
“이제야 제일 성가신 녀석을 처리했군. 진작 잘못을 뉘우쳤더라면 봐줄 수 있었을 것을...... 어쨌든 하루 빨리 두 번째 단계를 실행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