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 천 면 (甘泉面)
1018년(현종 9)에 안동부(安東府) 감천현(甘泉縣)으로, 임진왜란(1592) 직후에 감천면, 1906년(광무 10) 9월 24일 지방관제 개정에 따라 예천군에 편입되었다. 상관(上官), 덕율(德栗), 하포(下浦), 현내(縣內), 대산(大山), 이곡(李谷), 우곡(牛谷), 유동(酉洞), 석남(石南), 미흘(美屹), 홍현(紅峴), 천전(泉田), 오향(梧香), 진작(眞勺), 도평(島枰), 증거(增巨), 산동(山洞), 돈답(敦畓), 벌방(閥方), 수한(水閑), 장산(獐山)의 22개동을 관할하였다.
1914년 4월 1일 행정구역 통폐합(統廢合)에 따라 보문면(普門面)의 진양동(眞陽洞), 평고리(平古里), 지과동(知過洞)의 각 일부를 병합(倂合)하여 덕율, 포동(浦洞), 대맥(大麥), 미석(美石), 현내, 관현(官峴), 천향(泉香), 진평(眞坪), 증거, 유동(酉洞), 돈산(敦山), 벌방, 수한, 장산의 14개 동으로 개편 관할하다가 1983년 2월 15일 보문면의 마촌동(馬村洞)을 편입하여 15개 동이 되었다. 1988년 12월 12일 대통령령 제12557호로 감천면 미석리 1~1079번지까지를 영주시 장수면으로 편입되었다.
동쪽은 보문면과 영주시 장수면, 남쪽은 보문면과 예천읍, 서쪽은 용문면과 하리면, 북쪽은 영주시 봉현면과 장수면에 접하고 있다.
감천(甘泉)의 명칭 유래는 고려시대부터 감천 현청이 있던 곳에 명천이란 샘물이 잘 솟고 수량이 많아 한해(旱害)가 들면 영농(營農)에 급수하였으며, 또한 그 샘 물맛이 좋아서 甘泉(단샘)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최근에는 우수한 온천수를 자랑하는 예천온천(醴泉溫泉)이 이 곳에 있어 지명 유래와도 매우 밀접하다.
관광자원으로는 예천온천, 석송령, 한천사, 예천천문과학문화센터, 옥천서원, 수락대, 충효테마공원(추진 중) 등이 있으며, 특산물은 토마토, 노지수박, 사과, 인삼 등이 있다.
감천(甘泉)의 유래(由來)
ㅇ 위 치 : 감천면 현내리
ㅇ 내 용
현내리(縣內里) 마을 복판에 있는 우물이 감천(甘泉)이다. 돌 사이에서 나오는 물은 그 물맛이 달고 차며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시원하다.
고려시대부터 감천(甘泉) 현청(縣廳)이 있던 곳으로 명천이라 하여 샘물이 잘 솟고 수량이 많아 가뭄에도 영농(營農)에 급수하였으며, 또한 물맛이 좋아서 단샘(甘泉)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깊이는 한 길쯤 되는데 옛날에는 우물 내벽을 자연석(自然石)으로 쌓아올리고 지상 부분은 통나무를 정자(井字)로 쌓아 사용하였다. 현재는 지상 부분은 시멘트로 토관 (土管)을 놓고 있으나 우물 내벽, 즉 지하부분(地下部分)은 옛날 그대로이다.
현내리 581번지는 감천면사무소(감천현)의 옛터였으나, 1921년에 할미성으로 불리는 지금의 포리(浦里)로 옮겼다.
감천면(甘泉面)의 이름은 이 우물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옛날 나라가 한창 외적(外敵)의 말밥굽 아래 쑥밭이 되어 가던 무렵이다. 이 일대에아침 햇살을 받아 휘황찬란(輝煌燦爛)한 투구와 갑옷을 입고 서슬이 시퍼른 칼날을 번뜩이는 어느 장군이 있었다.
그는 어수선한 나라의 국기(國紀)를 바로 잡고 야비한 외적의 횡포를 이 강산(江山)에서 몰아 내기 위하여 가는 곳마다 승전의 환호성을 울리면서 발걸음도 가볍게 지축을 계속 동진(東進)에 동진을 거듭하였다. 그러던 중 목이 말라 입술을 적실 틈도 없이 갈증(渴症)으로 이 마을에 잠시 휴식을 취하였다. 장군은 병사들에게 물 한 대박을 떠오라고 하였다.
병사들은 여러 샘터를 찾아서 겨우 물 한 대박을 장군에게 떠 바쳤다. 이 물을 받아 마신 장군은 금방 활력소(活力素)라도 먹은 것처럼 생기(生氣)가 돌았다. 물 맛이 시원하면서 단맛을 내었던 것이다. 그 때부터 이 마을을 달 감(甘)자와 샘 천(泉)자를 써서 감천(甘泉)이라 이름하였다 한다.
감천면 지명유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