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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신문]바다가 들려주는 말 | |||||
디지털이니 유비쿼터스니 하는 말들이 만연되고 있다. 편리한 세상을 희구하는 인간이 만들어내고 있는 기술과 그에 따라 파생되는 언어는 하루가 다르게 가속되어 간다. 번역 일을 하면서 그러한 내용을 자주 접하는 나로서도 신기술과 그 용어들을 이해하고 따라가기조차 벅찰 지경이다.
이럴 때일수록 자연의 언어가 그리워진다. 10년 전, 인도의 체나이에 있는 마리나 해변에서 나는 입을 굳게 다문 채 바다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바다의 말에서는 그 어떤 인간의 외침보다 호소력이 느껴졌다.
시간을 잊은 채 바다를 마주하고 앉아 있으면 가슴이 탁 트인다. 끝없이 펼쳐진 모래밭과 수평선 때문만은 아닌 듯하다. 어스름 저녁에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너른 백사장을 넘실거리는 파도는 우리의 마음을 달래 준다. 끊임없이 일렁이는 것이 사람의 마음 아닌가. 한시도 고요할 겨를이 없이 일어났다 스러지고 또다시 일어나는 물결처럼 사람의 마음 또한 그러하리라. 파도가 우리에게 위안을 주는 것은 그런 사람의 마음을 닮았기 때문일 것이다.
바다는 목청을 높여 설득하려고 하지 않는다. 다만 가슴으로 느끼게 할 뿐이다. ‘쏴아’하고 밀려오는 나지막한 소리는 마음을 진정시켜 주는 위안의 노래가 된다. 물결이 부서지는 소리는 신경을 거슬릴 만큼 시끄럽지도 않고 너무 심심하다 할 정도로 고요하지도 않아서 그야말로 자연스럽게 가슴 속까지 밀려든다. 수많은 사연들이 쌓이고 쌓였다가 절제된 채 흘러나오는 회한의 소리 같다.
밀려드는 포말의 전선은 급기야 마음의 물결과 어우러져 그것이 밖에서 밀려든 것인지 안에서 밀려나온 것인지 구분되지 않고 하나가 되어 울렁거린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바다를 찾는 모양이다.
바다가 이렇듯 사람들의 가슴을 어루만져 줄 수 있는 것은 바다 자신이 그만큼 깊고 넓기 때문일 것이다. 깊고 넓은 만큼 그 속에 내포된 이야기는 무수히 많을 것이다. 해변가로 몰려와 모랫벌을 끝없이 쓰다듬으며 우리의 마음을 달래는 포말들은 그야말로 절제된 손길이다. 그 손끝을 타고 바다의 심장부로 항해해 들어가다 보면 수많은 배를 삼켜 버린 격정의 파도를 만날 수도 있다. 거기에는 모비 딕을 좇던 에이허브 선장을 삼킨 비정의 소용돌이도 있을 것이다.
사람의 세상 또한 그렇지 않은가. 고통의 바다를 건너가다 보면 때로는 분노할 수도 있고 깊은 슬픔의 심연에 빠질 때도 있다. 그 모든 것을 바다는 이미 알고 있는 듯하다. 그러면서도 절제의 손길로 백사장을 어루만진다.
지금도 가끔 마리나 해변에서 바다를 바라보던 기억을 떠올린다. 그럴 때마다 바다가 주는 위로의 말이 들려오는 듯하다. 나지막하면서도 가슴 깊이 밀려드는 파도 소리는 그 어떤 고뇌도 달래 주는 듯하다. 하얗게 달려와 발등을 어루만지던 포말들의 촉감은 ‘너보다 더 아픈 나도 있단다’ 하고 말하며 아픔을 달래 주는 영혼의 속삭임과도 같이 느껴진다.
살다 보면 더러는 바다를 닮은 사람도 만나려니 하는 바람도 생긴다. 바다같이 드넓은 가슴으로 모든 이들을 감싸안을 수 있는 사람이 왔으면 좋겠다. 그러려면 나 또한 바다를 닮아야 할 것이다. 세상의 모든 상처, 멍든 가슴들을 어루만지면서 바다와 같은 깊이로 파도와 같은 노래를 부르고 싶다.
이렇듯 자연이 주는 생명의 언어를 디지털로는 감히 흉내조차 낼 수 없을 것이다. 올 여름 바닷가에서 진리의 언어에 귀를 기울일 일이다. 바다에는 하나님의 신성이 살아 숨쉬고 온갖 작용이 벌어지기 때문에 본성에 따라 살려는 사람은 바다를 닮고자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지창영 시인·번역가 |
( 2005/06/15 14:50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