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과 죽음에 관한 에세이 -
"어린시절 나는 운동장에 혼자 남아있길 좋아했다. 아이들이 모두 돌아간 텅빈 그곳에서, 아버지도 어머니도 그리고 나도, 우리 모두는 언젠가 세상을 떠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햇볕 따사로운 주말 하오. 아내와 함께 월명동 <8월의 크리스마스> 촬영 현장을 찾았다. 개봉된지 벌써 15년여 지났지만 어느 차고를 개조했다는 사진관 자리는 그대로였다. 인적이 없는 거리는 쓸쓸했고, 근처 맥주집 '8월의 크리스마스' 간판은 빛 바랜 흑백사진 같았다. 어쩔 수 없는 일, 하늘 아래 변하지 않는게 하나라도 있던가?
감동이 컸던 탓일게다. 비록 픽션이고 이미 여러 해가 지났지만 젊은 사진사 정원(한석규)과 주차요원 다림(심은하)의 모습이 선명히 떠올랐다. 아마 다림도 소식이 끊긴 정원을 생각하며 이랬을 거다. 잠시 거리를 걸었다. 영화 속 장면 하나하나가 스쳐갔다. 젊은 사진사 모습도 떠올랐다. 죽음과 사진이라! 차 안에서 지켜보던 아내가 빙그레 웃었다. "당신, 영락없이 영화감독 같네요."
멜로 하면 역시 정소영 감독의 <미워도 다시 한번>이다. 진부한 통속 멜로지만 얼마나 많은 여성들의 누선을 자극했던가. 남녀의 가치관이나 우리사회 자체가 영화 상황과 흡사했던 탓이다. 그러나 아무리 대단한 화제작도 세월 앞에선 빛바랜 추억 같은 것, 이제 진부한 스토리는 더 이상 어필할 수 없다.
영화 수준이며, 관객들의 눈높이, 세월따라 사회적 가치관까지 모두 변했으니 말이다. 이럴즈음 허진호 감독은 깔끔한 영상을 통해 한국 멜로영화 수준을 한 차원 격상시켰다.
<8월의 크리스마스>는 겉보기에 멜로 형식을 취하지만 실은 사진과 죽음에 관한 한 편의 에세이다. 기호학자 롤랑 바르트에 따르면, 인간은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 사진과 역사를 만들었다. 물론 이것들에 앞서 종교가 있었지만 현대사회에서 종교는 중세사회처럼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있다.
사진사 정원의 내레이션대로, 우리는 어느 날 우연히 세상에 왔다가 다시 떠난다. 아무것도 없는 텅빈 무(無)로 돌아가는 거다. 無란 결국 하얀 백지와도 같은 것일 텐데, 그렇다면 다시 돌아갈 그곳은 밑도끝도 없는 막연한 곳, 어느것 하나 의지할데 없는 두려운 곳일까?
인간은 뭔가 의지하고자 하는 대상을 찾던 끝에 마침내 종교를 떠올렸다. 종교란 전지전능한 신에 기댐으로써 공포를 덜고, 나아가 내세에서의 영생불사를 희구한다. 사실상 중세까지만 해도 이런 생각은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과학이 발달한 현대인은 더 이상 순진하지 않다.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 종교 자리에 역사와 사진을 대치했다. 언젠가 사라질 운명이지만 역사를 통해 살아온 모든 과정을 기록으로 남긴다. 역사는 단순한 기록을 뛰어넘어 현재를 변화시키고, 두려운 죽음조차 적극적으로 극복 한다. 이 점은 사진도 마찬가지다.
어떤 순간을 기념하기 위해서 사진을 찍곤 하는데, 사진은 생생한 지금, 현재 상태를 보존하고자 하는 행위다. 세월 따라 나이들지만, 현재의 순간들을 보존함으로서 시간을 뛰어넘는다. 그러니 사진은 종교나 역사처럼 무로 변하는 인간의 삶을 영속적으로 보장할 수 있다. 이미 지나간 시간, 끊임없이 변하는 시간을 고정시키기. 변하는 시간을 현재화함으로써 삶의 무상함을 뛰어넘기, 삶의 무한한 가능성을 확대하기. 이를 소설화 한 것이 바로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다. 그렇다면 사진은?
찬란한 생의 이면에 죽음이 있듯이 삶은 역설과 아이러니의 연속이다. 결코 오래 살고 싶다해서 살 수 없고,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게 또한 인생이다. 8월 염천에 크리스마스라니, 제목부터가 이미 삶의 부조리(不條理, absurd)와 아이러니를 내포하고 있다.
안락한 노후를 꿈꾸던 이가 한순간 교통사고로 죽는 일이 다반사이듯, 행복과 불행, 탄생과 죽음, 슬픔과 기쁨, 부자와 가난 등 인생은 아이러니 투성이다. 사진은 바로 이런 삶의 실상을 그대로 반영한다. 앞에서 사진은 종교, 역사와 더불어 영생을 소망하는데서 비롯된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사진 찍는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의식을 하든 안 하든 사진을 찍는 이들 곁엔 공통적으로 비극적인 죽음이 도사리고 있다. 허진호 감독은 이런 죽음 가까이에 사진을 정교하게 배치한다. 가령 가족사진을 찍고 난 할머니가 다시 찾아와 더욱 예쁜 모습으로 찍히길 원한다. 사진사인 정원 역시 자신의 마지막 모습을 찍는다. 늙은 아버지와 함께 찍는 가족사진, 생기발랄한 어느 소녀와 다림, 머지않아 세상을 떠날 정원, 친구들과의 기념사진 등 모든 사진 속엔 삶과 죽음이 사이좋게 공존한다.
친구들과 찍은 유쾌한 기념사진이지만, 그 가운덴 머지않아 죽을 친구가 함께 있고, 생기발랄한 다림 역시 퇴색된 사진의 주인공으로 남을 것이다. 결국 사진을 찍거나 찍히거나 간에 우리 모두는 언젠가 죽을 운명인 거다.
다시 물어보자. 과연 사진은 현재를 영원히 고정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사진은 단지 사진일 뿐이다. 물론 생동하는 어느 순간을 고정시키긴 하지만 사진은 결국 죽은 사물일 뿐이다.
어느덧 세월은 흐르고 애틋했던 사랑조차 잊혀갈 즈음, 다림은 초원사진관을 찾는다. 그 옛날 추억이 서린 사진관 자리를 잠시 바라본다. 겨울. 무성한 가로수가 아닌 하얀눈이다. 사진 속의 사랑은 이제 떠나고 없다.
한순간의 꿈이었다. 소설가 김연수 식으로 말하면 긴 농담이다. 그러나 따스했던 농담. 문득 흑백사진에 눈길이 미친다. 정원이 찍은 사진 한 장. 환희 웃고 있는 다림의 모습이다. 좋았던 시절! 이윽고 발길을 돌린 다림이 서서히 화면에서 사라진다. 한 포기의 풀이 말없이 사라지듯이,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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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렇게 변하고, 빛깔이 바래고 희미해져 마침내는 어느 날 쓰레기와 함께 버려질 이 어머니의 사진과 더불어, 도대체 그 무엇이 사라지고 없어질 것인가? 생명뿐만 아니라, 때로는 사랑조차도 사라지는 것이다. 나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함께 찍은 단 한 장의 사진 앞에서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영원히 사라지려 하는 것은 바로 보물과도 같은 사랑이라고. 왜냐하면 내가 이미 죽은 뒤에 어느 누구도 그 사랑을 증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직 무심한 자연만이 남을 것이다. 그것은 그다지도 날카롭고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기 때문에...." - 롤랑 바르트 <밝은방>
나는 앞에서 <8월의 크리스마스>의 주제는 '죽음과 사진'이라고 했는데, 이 영화는 죽음과 사진을 모티브처럼 반복한다. 우선 다림은 죽음의 이미지와는 전혀 무관한 생기발랄한 여성이다. 아름다움을 영원히 간직할 수 있고 실제 그렇게 살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정원이 그렇듯 다림 역시 언젠가 죽을 수밖에 없다. 죽음이란 그 누구도 피할 수 없으니까. 여기서 허진호 감독은 젊은 사진사의 죽음을 담담하게 바라본다.
결국 피할 수 없는 것이라면, 또 고안해낸 장치들이 효과가 없다면 차라리 용도 폐기하는 게 낫다. 허진호는 죽음에 적극적으로 대항하기 보다 담담한 태도로 수용한다. "동양적 죽음을 묘사한 영화"라고 한 칸느의 발언은 이런 맥락에서 타당하다. 다음은 버드란트 러셀의 말이다.
"나는 내가 죽으면 썩어 없어질 뿐 나의 에고 따위가 남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내 나이 젊지는 않지만 삶을 사랑한다 그러나 내가 허무로 돌아간다는 생각에 공포로 몸을 떠는 모습에 대해선 경멸한다. 행복이 진정한 행복일 수 있는 건 그것에 끝이 있기 때문이며, 사고나 사랑이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들이 제 가치를 잃는 것도 아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교수대에 올라가서도 당당하게 처신했다. 세상에서 인간의 위치가 어디인지에 대해 진실하게 사고하도록 우리를 가르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당당함이다." - 버드란트 러셀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
내 뒤를 이어 자식이 대신한다. 삶이란 허무하게 끝나지 않고 되풀이된다. 들에 핀 이름 없는 풀을 봐라. 저 혼자 왔다가 슬며시 혼자 사라지지 않던가? 알베르 카뮈의 영화 <흑인 오르페>의 한 장면이다. 사랑하던 여자 에우리디체가 죽자 오르페는 저 세상까지 찾아간다. 그러나 이미 죽은 자와 산 자의 자리는 서로 다르다. 땅을 치고 통곡해본들 다시 살릴 방법이 없다. 그렇다고 실망할 일이 아니다.
어느 무덤 곁에서 기타를 치며 춤을 추는 어린 소녀와 소년의 모습에서 알 수 있듯이 사랑하는 연인은 언젠가 나이 들어 세상을 떠나지만 자식들이 뒤를 잇고, 그들과 똑같이 삶과 사랑을 반복한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지만, 그렇다고 들에 핀 한 포기 풀 보다 나으라는 법이 있던가? 무릇 자연 가운데서 인간만이 유별날 이유는 없다. 만약 자연의 한 구성원에 불과하다면 죽음조차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죽음은 분명 두렵고 허무하지만, 자식을 생각하노라면 마냥 그렇지만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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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롤랑 바르트 <밝은방> 김웅권 역, 동문선(* 지금은 절판된 열화당판 <카메라 루시다>는 같은 책임.
2. 버드란트 러셀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 송은경 옮김, 사회평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