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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선한 목자라
요한복음 10:11-16
요즘 칠레가 떴다. 국가 브랜드와 칠레인의 자존심이 하늘을 찌른다. 산호세 광산의 내부 붕괴로 고립된 광부 33명이 69일 만에 생환한 사건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 국민에 대한 생명의 존귀함, 생명의 소중함을 과시하였다.
그들이 지하 700여 밑에서 생존해 있다는 소식은 17일 만에 시추봉 끝에 붙어 전해진 메모로 전해졌다. 그리고 구출 작업은 세계적 관심사가 되었다. 마침내 구멍을 뚫은 지 39일 만에 캡슐을 넣어 한 사람씩 끌어 올렸다. 그들의 생환 소식은 전 세계에 생중계되면서 큰 감동을 주었다.
그 폐쇄된 공간, 희망을 기약할 수 없는 상황에서 33명이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막장에 처한 광부들은 공동체를 유지하였고, 리더가 있었고, 질서 있는 나눔과, 시간을 정하고 함께 기도생활을 하였다.
언론은 특히 마지막인 33번째로 구조된 루이스 우르주아에 대해 집중 조명하였다. “우르주아는 가라앉고 있는 배의 선장처럼 가장 나중에 갱도에서 탈출하였다”.
로마 카타콤은 지하 무덤이었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의 박해를 피해, 신앙의 자유를 얻고자 지하 무덤에 들어와 살았다. 지하세계에 층층히 미로를 뚫고 스스로 닫힌 세상을 선택하였다. 69일이 아닌 평생을 지하 무덤 속에서 살아갔던 처음 그리스도인들은 과연 어떤 희망으로 살았을까?
카타콤 지하 벽에는 자신들의 신앙을 고백하는 몇 가지 심볼이 그려져 있다. 그 중에 하나가 ‘선한 목자’이다. 수염이 없는 젊은 목동이 털이 많은 양 한 마리를 등에 지고 있다. 그들은 고백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무덤 속, 길 잃은 양 한 마리조차 찾으시는 선한 목자이시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을 목자로 표현한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시 23:1).
“그는 목자같이 양 떼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 먹이는 암컷들은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사 40:11).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리고 모세 등 구약의 많은 인물들은 목자였고, 목자는 사람들에게 가장 친숙한 직업이었다.
예수님은 스스로 자신을 가리켜 ‘선한 목자’라고 하신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11).
예수님의 말씀을 청중은 잘 이해하지 못하였다. 과연 목자 중에서 누가 양을 위해 생명까지 바친다는 말인가? 과연 신들 중에서 누가 인간을 위해 생명까지 바친다는 말인가?
“예수께서 이 (선한 목자)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셨으나 그들은 그가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라”(6). 그래서 이 선한 목자 비유를 수수께끼 말씀이라고 부른다.
1) 선한 목자와 삯꾼
본문은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선한 목자이며, 잃은 양을 구원하기 위해 목숨까지 버리는 목자라고 증거 한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꾼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가고 또 헤치느니라. 달아나는 것은 그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보지 아니함이나”(11-13).
예수님은 제자들을 세상으로 파송하면서 양을 이리 가운데 보내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셨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마 10:16).
또 바울은 에베소의 장로들에게 너희 가운데 흉악한 이리가 들어와서 양떼를 해칠 것이라고 주의를 당부하고 있다(행 20:29).
그러나 이러한 위기 상황 속에서 주의를 각성시키면서, 걱정마라, 주님이 너희를 위한 목자가 될 것이라고 안심시키신다.
예수님은 선한 목자와 삯꾼 목자를 대조하여 설명하신다. 삯꾼의 관심은 양이 아니라 품삯이다. 그래서 언제든지 양을 버리고 달아날 수있다.
율법 해석집 ‘미쉬나’에는 품삯을 받는 목자의 책임이 규정되어 있다.
그 목자의 책임은 이리 한 마리에 국한한다. 한 마리의 이리가 양을 습격하면 그 목자는 양을 보호하고 이리를 격퇴할 책임이 있다. 그러나 두 마리 이상의 이리가 습격하면 자기 안전을 위해 양을 버리고 도망쳐도 책임을 추궁 받지 않는다.
사실 안전한 상태에서 선한 목자와 삯꾼 사이는 큰 차이가 없다. 그러나 위험에 처하면 선한 목자와 삯꾼의 처신은 전혀 다르다. 삯꾼이 돌보던 양들은 결국 습격을 받아 죽을 것이다. 삯꾼의 관심은 자신의 안전과 자신에 주어질 품삯일 뿐이다. 그러므로 삯꾼은 양들을 위해 희생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선한 목자는 다르다. 오직 양의 안전과 양의 평화에만 관심이 있다.
양과 늑대는 이솝우화나 ‘톰과 제리’ 같은 만화영화의 단골주인공들이다. 예나 지금이나 이리와 늑대는 양에게 위협적인 존재이다. 양은 착하고, 이리는 악한 것을 상징적으로 대표한다. 그렇다고 양은 당하고만 살지 않는다. 그 착해 빠진 짐승도 그 나름의 삶의 지혜가 있다.
하루는 양 한 마리가 늑대에게 쫒겨 수도원 부엌으로 도망갔다. 뒤쫓아 온 늑대는 양을 설득한다. 수도원의 먹거리가 되지 말고 빨리 나오라고 소리를 질렀다. 이때 양은 이렇게 외친다. “늑대에게 죽는 것 보다는 명예롭게 거룩한 제물이 되겠다”.
예수님은 말씀 하신다. “나는 선한 목자라”(11).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린다. 우리 주님은 자기를 따르는 양들을 잘 알고 있고, 언제나 친밀하며, 양들과 밀접하게 하나의 사랑으로 묶인 분이다. 우리가 믿고 고백하는 예수 그리스도는 내 선한 목자이시다.
2) 나를 아시는 선한 목자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14-15).
선한 목자가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이유는 양을 알고, 사랑하기 때문이다. 목자가 양을 아는 것은 깊은 관계성을 의미한다. 내가 목자를 신뢰하는 것은 하나님이 나를 아시듯이, 그 목자가 나를 안다는 믿음 때문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15).
14-15절에는 ‘알다’라는 단어가 네 번 반복된다. 목자는 양 한 마리, 한 마리의 상태를 완전하게 알고 있다. 선한 목자는 자기 양을 숫자로 헤아리지 않는다. 이름으로 불러낸다.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요 10:3).
이름으로 아는 것은 인격적으로 친밀하게 아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내 목전에 은총을 입었고 내가 이름으로도 너를 앎이니라”(출 33:17). 다윗은 이렇게 고백한다. “주께서 나를 살펴 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시 139:1).
어느 신부가 양치기에게 라틴어로 주기도문 외우도록 하였다.
양의 이름을 차례대로 외울 수 있겠느냐고 물었더니, 양치기가 그렇다고 대답하였다. 그래서 먼저 양의 이름을 라틴어로 바꾸어 주었다. 그 후 양치기는 양을 몰고 다니는 동안 양 한 마리, 한 마리를 새로운 라틴어 이름으로 부르면서 주기도문을 다 외웠다. 첫째 양 이름은 ‘하늘에 계신’이고, 둘째 양의 이름은 ‘우리 아버지’하는 식이었다.
드디어 양치기가 신부 앞에서 주기도문을 암송하게 되었다. 처음부터 끝가지 잘 외웠는데 그만 중간에 ‘나라가 임하시오며’를 빠뜨렸다. 신부가 왜 그 부분을 빠뜨렸냐고 했더니, 양치기가 머뭇거리며 이렇게 대답했다.
“‘나라가 임하시오며’는 어젯밤에 제가 잡아먹었는데요”.
예수님은 “나는 내 양을 알고”(14) 계신다. 흔히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어린양들이라고 고백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예수님과 그리스도인 사이에는 이러한 완전한 인격적 관계로 연결되어있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선한 목자의 음성에 귀를 기울인다면, 내 목소리로 그 분을 부른다면, 선한 목자는 언제든 우리를 돌이키시고, 찾으시며, 구원하신다.
3) 선한 목자와 우리 밖의 양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16).
선한 목자는 잃은 양을 찾으신다. 우리 안의 양 뿐 아니라 우리 밖의 양을 찾으신다.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신’(마 9:13) 예수님은 이 양떼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버리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 교회는 유대인과 이방인이 한 목자 아래에서 하나의 교회 공동체를 이루었다. 이러한 보편적인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가능해 진 것이다. 목자의 목숨을 건 희생의 결과요, 그 열매였다.
세상의 방식으로는 99마리의 양을 잘 먹이기 위해서는 한 마리의 양을 쉽게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의 방식이 아니고, 교회의 방식도 아니다.
미국 어느 교회에서 등록한지 얼마 안 된 어느 중국인에게 누군가가 물었다.
“어떻게 예수님을 발견하셨습니까?”
이 새 신자는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제가 예수님을 발견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저를 발견하신 겁니다”.
예수님은 나의 선한 목자이시다. 산호세의 광산에든지, 로마의 카타콤 무덤이든지, 그 분은 나를 찾아 오신다. 나를 위해 목숨을 바치신 선한 목자이시다.
사실 누구든지 예수님의 비유처럼 쉽게 길을 잃을 위험이 있다. 양들을 길을 잘 잃는 경향이 있다. 양이 고의적으로 잘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단순히 앞에 보이는 다음 풀밭으로 이동하기 때문에, 자기들이 어디에 있었는지, 어디로 가는지 판단하지 않는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사람은 누구나 쉽게 길을 잃을 수 있다. 어느새 주님과 멀어지고, 어느새 사망의 낭떨어지에 설 수 있다. 순간이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 2:15-17).
그러나 선한 목자 되신 예수님께서 양을 찾으시는 것은 그 양의 경제적 가치 때문이 아니다. 단순히 길을 잃고 위험에 처한 양을 구하기 위함이다.
엘리어트는 ‘황무지’에서 이렇게 노래하였다.
“항상 우리와 나란히 걷는 제3의 인물은 누구인가?
세어보면 오직 그대와 나 뿐인데,
그러나 저 하얀 길을 내다보면
항상 우리와 나란히 걸어가는 또 한사람이 있다.
갈색 망토를 휘감고, 머리를 싸맨 채 발자국 소리도 내지 않고 미끄러지듯 걸어가는 그것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항상 우리 곁을 걸어가는 그 사람은 누구인가?”
주님은 나와 함께 하신다. 평생 선한 목자 안에 머물라.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 23:4).
주님이 나와 함께하심을 믿고, 그분의 돌보심을 구하라.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 14:17).
예수님은 우리에게 더욱 풍성한 생명, 소중한 생명을 주시려고 찾아 오셨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
예수 그리스도는 내 삶의 끝에서 나를 위해 먼저 목숨을 버릴 위대한 캡틴이시다.
그런 선한 목자의 사랑 안에 머무는 행복한 양의 삶을 누리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
첫댓글 의외로 진리는 단순하다는 생각입니다. 참 목자는 누구인가? 양을 위해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아니 포기 할 수 없는 목자의 심정을 가지고 있는가 라는 질문을 던져보면 해답이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주님께서 내게 맡기신 양은 누구일까 생각해 봅니다.
이 세상에서 선한 목자를 발견하는 것은 참 어려운 것 같습니다. 어리석은 양들을 위해 목숨까지 버릴 각오로 양들을 지키는 목자가 어찌 많겠습니다. 송목사님께서 어려운 결단을 하시고 부족한 저희를 인도하시니 새삼 감사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