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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가야산역사문화연구회 원문보기 글쓴이: phillip
1. 헌종태실 (조선 24대왕) 1827(순조 27)~1849(헌종 15).
헌종은 외척들의 세도정치 속에서 왕권강화를 이루지 못하고 요절했다. 이름은 환(奐). 자는 문응(文應), 호는 원헌(元軒). 할아버지는 순조이고, 아버지는 익종(翼宗)이며, 어머니는 조만영(趙萬永)의 딸 신정왕후(神貞王后)이다. 비는 김조근(金祖根)의 딸 효현왕후(孝顯王后)이며, 계비는 홍재룡(洪在龍)의 딸 명헌왕후(明憲王后)이다. 1830년(순조 30) 대리청정(代理聽政)을 하던 익종이 병사한 후 왕세손에 책봉되었고, 1834년 순조가 죽자 8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1827년 태어나 8세의 어린나이로 등극한 헌종은 재임중인 1847년에 자신의 태봉지를 단장했다. 당시 태봉지 조성에 대한 안태사 이지연의 보고용 그림과 실록기록은 서울규장각에 있는 '원손아지씨안태등록'에 자세히 나와있다.
이 태실은 왕실문화를 철저히 파괴시켰던 일제에 의해 1927년 태항아리를 이장하고 난 뒤, 태실 석물이 훼손방치돼 일부 석물은 분실됐다. 또 인근 민가 앞마당과 태봉 위 곳곳에 흩어져 있으며 비석은 저수지에 수몰(주민 주장)돼 있다. 다행히 여러차례 도난의 위기를 맞을 정도로 중요한 태주석은 현재 덕산면사무소에 보관하는 등 복원에 필요한 중요석물이 남아있고 뛰어난 예술성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예산군내에는 이 태실외에도 대술 궐곡리 숙종 왕자 태실, 대흥 동헌 뒤편에 영조 왕녀 태실, 신양 황계리에 현종태실 등 4곳이 있다.(운산면 태봉리 산6-2번지 조선13대 왕인 명종(1534~1567)가야산에 1곳 더 있다)
가야산에는 총5곳에 태실이 있다.
서산 운산에 위치한 명종태실이 1975년에 복원, 관리되며 도 지정 유형문화재로 지정됐으며, 금산 추부에 있는 태조태실은 1993년에 복원 역시 도지정문화재로 등록돼 있다. 이외에도 세종, 경종 등 전국 곳곳에 있는 태실들은 가치를 인정받아 문화재로 관리 보존되고 있다.
‘대청숭덕육년이월초사일축시생원손아지씨태실(大淸崇德六年二月初四日丑時生元孫阿只氏胎室)’이라는 기록으로 남겼다.
조선시대에 왕손이 출생하면 태를 백자항아리에 넣어 명당자리에 태실을 만들고 뒤에 임금으로 등극할 경우 개건했다. 태봉에 안치된 태의 주인공이 보위에 오르면 가봉(加封)했는데, 이는 등극한 임금의 태실을 다시 손질하는 것으로 귀부석(龜趺石)이 가봉시에 설치되며 그지역이 한단계 승격됐다. 덕산현이 덕산군으로 승격된 것이 24대 헌종13년(1847년) 때인 것을 볼 때 태실 고장에 대한 예우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태실의 설치는 군현, 명호의 승격·위상과도 밀접히 관련됐고, 영역확대 등의 특혜가 주어지는 경우도 있어 태실을 자기 지역에 유치하기 위해 지역분쟁이 발생하기도 했다. 태함(백자항아리)은 대부분 일제때 도굴됐지만 조선시대 풍수지리와 당시 미술 양식을 알 수 있는 문화사적 가치를 갖고 있다.
일제강점기 전국에 안치된 조선 왕의 태실을 파헤쳐 서삼릉으로 옮겼다.
헌종의 태실비와 태실유구가 60년대 까지 완전히 남아 있었으나 현재는 지주석 . 개석 . 귀부석만 남아 있다.
타원형의 주석 하나는 태봉밑에 민가에(덕산면) 남아 보존되고 있다.
조선말까지 태봉을 지키고 돌보는 수직사찰(守直軍건물이나 물건 등을 맡아서 지키는 군사)을 두었던 바 이곳에도 지금의 저주지 인근에 수직사찰을 두었을 것이다.
그 터는 아마도 수몰된 지점으로 생각된다.
옥계리 저수지는 54년도에 조성되었으며 제방쯤에 상가리에 출입을 통제하는 하마비가 있었으며 수몰되었지만 가야구곡의 윤봉구의 집이 있었다.
(운산 태봉리 명종대왕 태실)
2. 명빈박씨
명빈박씨(䄙嬪朴氏)에 대하여
출생년도 미상∼1703년(숙종 29). 본관은 밀양(密陽).(구밀성)
숙종(肅宗)의 후궁으로 본관은 밀양(密陽)이며 연령군(延齡君 영조의 이복형제)의 어머니이다.
원래 희빈장씨(禧嫔張氏)의 나인이었다. 1683년 숙종의 총애를 받았으며 1698년 연령군을 임신한 것으로 인해 상궁(尙宮)에서 숙원(淑媛)로 승진하고 1699년 연령군이 탄생하자 숙의(淑儀)에 봉해진다.
1702년(숙종 28) 10월 18일 임금의 전교에 의해 귀인에서 명빈(䄙嬪종1품)으로 봉해진다.
1703년(숙종 29)에 명빈박씨(䄙嬪朴氏)가 사망하자 숙종은 예장(禮葬)으로 거행하게 하고 제수(祭需)를 넉넉히 보내고 관판(棺板) 한 벌도 잘 골라 보내도록 명한다.
명빈박씨묘의 비는 숙종의 어필이다.
나인 [內人,拿引]- 고려와 조선 시대, 궁궐 안에서 임금, 왕비, 왕세자를 모시고, 궁중의 일을 맡아보던 여자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19대 숙종대왕(가계도)
1) 인경왕후 김씨(仁敬王后,1661~1680) - 공주2명(모두 조졸) (광산김씨 김장생,만중,만기,진규)
2)인현왕후 민씨(仁顯王后, 1667~1701) - 후사없음
3) 인원왕후 김씨(仁元王后, 1687~1757) - 후사없음
4) 희빈 장씨 (禧嬪 張氏 = 玉山府大嬪(옥산부대빈), 1659~1701) -장희재 - 공주목사박성식-사위윤봉구
① 서1남 : <20대 경종대왕> (景宗大王, 1688∼1724)
② 서2남 : 성수(盛壽) (1690년 9월 출생, 10일뒤 조졸)
5) 숙빈 최씨 (淑嬪 崔氏,1670~1718)
③ 서3남 : 영수(永壽 , 1693년 10월 출생, 2개월 뒤에 조졸)
④ 서4남 : <21대 영조대왕> (英祖大王, 1694∼1776)
⑤ 서5남 : 子(이름없음, 조졸)
6) 명빈 박씨 (溟嬪 朴氏, ?~1703)
⑥ 서6남 : 연령군(延齡君, 이름 : 이 헌, 1699~1719),
7) 영빈 김씨 (寧嬪 金氏 1669~1735) - 우리가 알고 있는 귀인 김씨, 1702년에 빈의 첩지를 받음
8) 소의 유씨 (昭儀 劉氏) - 후사 없음
9) 귀인 김씨 (貴人 金氏) - 후사 없음
3. 숙종과 명빈박씨의 아들 연령군
연령군(延齡君)에 대하여
연령군(1699∼1719)의 휘는 훤(日日)이요, 자는 문숙(文叔), 시호는 효헌(孝憲)이다. 숙종대왕의 6남으로 어머니는 명빈(示冥嬪) 박씨이다.
연령군은 성품이 효성스러웠고 근실했다. 1703년(숙종 29)에 군으로 봉해지고 종친부 유사당상(有司堂上)이 되었다. 연령군이 5세 때 어머니 명빈 박씨가 별세했다. 1707년(숙종 33) 상산김씨 수찬(修撰) 동필(東弼)의 딸과 혼인했다. 1708년 연령군 저택을 마련해 주라는 왕명이 내렸는데 신하들이 호화주택을 반대하여 선조대왕의 딸 정명공주(貞明公主)의 집을 사서 주었다.
연령군은 1719년에는 형인 연잉군(延礽君: 뒤의 영조)과 함께 왕의 기로소 입소를 적극 권유하는 소를 올렸다. 성품이 효성스럽고 근면하여 왕의 간병에 조금도 게으름이 없었으며, 또한 사제(私第)에 거처하였으나 민간에는 폐를 끼치지 않았다고 한다.
숙종이 특별히 사랑하여 제문과 묘지문을 직접 지었다. 도승지 김연(金演)이 초상(初喪)을 주관하였는데, 연령군의 부인이 그의 종손녀였기 때문이다.
(명빈박씨는 숙종의 부인이고 연령군은 숙종의 아들이다.
숙종이 가장 총애하던 아들이라고 합니다.(경종.영조,연령군) 영조대왕의 이복동생이며 영조와의 사이도 각별했으며 연령군은 1719년 10월 2일, 21세의 젊은 나이로 아무런 병색조차 없이 급사하였다)
연령군의 묘는 원래 동작구 대방국민학교 교정에 있었는데 1940년 경성지구 구역정리로 묘소는 충남 예산군 덕산면으로 옮겨지고 신도비만 남게 된 것을 1967년 8월 3일 현위치로 옮겼다. 연령군은 어린시절 안국동에서 자랐기 때문에 안국동 별궁비라고도 부른다.
4. 흥령군 이창응
남연군 이구(南延君 李球, 1788년 ~ 1836년)
흥녕군 이창응(興寧君 李昌應, 1809년 - 1828년)
흥완군 이정응(興完君 李晸應, 1815년 - 1848년)
흥인군 이최응(興寅君 李最應, 1815년 - 1882년)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 1820년 - 1898년)
이창은은 고종황제의 할아버지가 되시는 南延君께서는 4명의 아들을 두셨으니 첫째가 興寧君 李昌應, 차남은 興院君 李晸應, 3남은 興寅君 李最應, 막내 4남은 興宣大院君 李昰應입니다.
남연군 장남으로 1809년(순조 9) 탄생하였다. 1822년(순조 22) 12월 27일 수원관(守園官)을 지내고 1828년 2월 1일 향년 20세로 별세하였다.
묘소는 禮山郡 德山面 玉鷄里(남연군묘소를 가기 전 옥계저수지 상류 옆 도로변 우측)에 소재하여 있습니다.
(碑文에서 興寧君 李昌應은 왕실의 宗親이면서도 死後에 領議政을 追贈하였기에 증직품계贈職品階인 大臣品階 正一品 贈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와 生前에 品階인 宗親品階 正二品 承憲大夫로 두 가지가 함께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로 興寧君 李昌應의 부인은 王室 宗親들의 부인에게 내리는 첩지帖旨 군부인郡夫人이 아닌 大臣들의 부인에게 내리는 帖旨인 정경부인貞敬夫人으로 기록되어 있다)
남연군 구(球 : 1788∼1836)는 흥녕군(興寧君) 창응(昌應 : 1809∼1828) · 흥완군(興完君) 정응(晸應 : 1815∼1848) · 흥인군(興寅君) 최응(最應 : 1815∼1882) ·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하응(昰應 : 1820∼1898)의 4남을 두었는데 흥선대원군의 아들이 대통을 이어 고종황제가 되자 고종황제의 아들 순종황제와 황태자 영왕으로 선원세계가 이어지고 그 나머지 지손들은 연령군파에 속하게 되었다.
연령군파의 인물로는 최응이 명성황후의 신임을 얻어 영의정을 지냈고 그 아들 재긍(載兢 : 1857∼1881)은 판서를 지냈으며 재긍의 양자 지용(址鎔 : 1870∼?말년에 예산에거거주)은 한일병탄의 중역을 담당했다. 창응의 아들 재원(載元 : 1831∼1891)은 이조판서를 거쳐 갑신정변 때 3일천하의 영의정을 했으며, 정응의 아들 재완(載完 : 1855∼?)은 이조판서 · 내무대신을 지냈다.
흥선대원군의 큰 아들 재면(載冕 : 1845∼1922)은 판서 · 영돈녕을 지냈고, 그 아들 준용(埈鎔 : 1870∼1917)은 참판을 거친 이른바 준공(埈公)이라는 분이다.
현존인물로는 의친왕의 아들인 석(錫 : 海錫)이 있다.
5. 가야구곡
윤봉구(尹鳳九, 1681~1767)는 조선 영조 때의 학자. 호는 병계(屛溪), 구암(久菴). 시호는 문헌(文獻), 관은 판서. 한원진, 이간, 이이근, 현상벽, 채지홍, 최징후, 성만징과 함께 황강 권상하의 문하 제자로 ‘강문팔학사(江門八學士’라 이르며, 그 아호는 옥병계(玉屛溪)에서 연유하여 병계라 했다.
가야 구곡는 예산 가야산의 계곡이다.
伽倻九曲 序曲 (屛溪 尹鳳九 1683~1768)
伽倻秀氣炳三靈 <가야수기병삼령>가야산 수려한 기운 삼령처럼 빛나는데
一道巖泉九曲淸 <일도암천구곡청>한 길 암천은 아홉 굽이 맑아라
鬼護神呵千載秘 <귀호신가천재비>귀신이 보살펴 천 년 동안 감췄는데
淙然和我膝琴聲 <종연화아슬금성>물소리 내 무릎 위 거문고 소리와 어울리네
제1곡 관어대로부터 북쪽 제9곡 옥량폭까지 10리 남짓한 구곡의 그윽한 경관을 차례로 살펴보기에 앞서 먼저 가야산 수려한 경관이 삼령三靈[해 달 별]처럼 빛나고 아홉 굽이 암천이 맑음을 노래하는것부터 시작 한다.
가야구곡은 조선 영조 때 병조판서를 지낸 병계 윤봉구(尹鳳九, 1681~1767)선생이 가야계곡의 아름다운 비경인 아홉 곳(관어대, 옥병계, 습운천, 석문담, 영화담, 탁석천, 와룡담, 고운벽, 옥량폭)을 ‘가야구곡’이라 칭하고 문집에 기록해 놓음으로써 비롯된다.
■제1곡 : (觀魚臺) 관어대 - 저수지로 수몰됨
■제2곡 : (玉屛溪) 옥병계 - 조선시대 판서를 지내고 덕산에서 잠시 귀향을 살던 죽천 광산김씨 김진규의 글로 옥병계라는 글이 있고 덕산에서 잠시 거주하던 조선의 명필 청송 성수침의 수재대(水栽臺) 고운 최치원의 세이암 (孤雲 崔致遠 洗耳嵒)글이 있다.
본관은 광산. 자는 달보(達甫), 호는 죽천(竹泉). 사계 김장생의 후손이며, 아버지는 영돈령부사 김만기(金萬基)이고, 어머니는 한유량(韓有良)의 딸이다. 누이동생은 숙종비 인경왕후(仁敬王后)이며, 부인은 정철(鄭澈)의 6대 손녀로서 1752년(영조 28)에 정려를 받았다.
■제3곡 : (濕雲泉) 습운천 - 인근에 전국적으로 유명했던 도인이 살던 터가 있음
■제4곡 :(石門潭) 석문담-죽천 김진규는 ‘석문담’(石門潭) 우암 송시열은 ‘취석’(醉石)등 암각글이 있다.
가야산에 살고 가야산의 아름다움을 가야구곡으로 칭한 살았던 병계 윤병구의 동생 석문 윤병오 선생의 호 또한 이에 연유한다
조선 숙종 때의 문신(1607~1689). 송시열은 가야산에 자주 방문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그후 손자인 송순석(宋淳錫)도 가야사에서 공부했다고 한다.
■제5곡 : (暎花潭) 영화담 - 복숭아가 많았다고 한다.
■제6곡 : (卓錫川) 탁석천 - 스님들의 종이 등 생산하는 곳이었다고 한다. 지금도 종이나무가 주변에 있다.
■제7곡 : (臥龍潭) 와룡담 - 죽천의 글이 있으나 저수지가 조성되며 토사에 매몰되어 지금은 볼 수 없다.
선비들이 공부하거나 수련하는 곳이었다고 한다. 인근에 다수의 절터가 있다.
■제8곡 : (孤雲壁) 고운벽 - 최치원과 관련이 있을 듯
■제9곡 : (玉梁瀑) 옥량폭 - 망이망소의 전설이 있는 중방바위와 한국전등 많은 이야기가 있다.
伽倻九曲 위치
一曲觀魚臺 在谷口淸風山之西-1곡은 관어대니 골짜기 입구의 청풍산 서쪽에 있다
二曲 玉屛溪 在壽星峯之北-2곡은 옥병계니 수성봉 북쪽에 있다
三曲 濕雲川 玉屛溪向上少北 小澗之自東北 入於屛溪者也-3곡은 습운천이니 옥병계에서 위로 향해 조금 북쪽에 있다 작은샘이 동북으로부터 병계에 들어오는 것이다
四曲 石門潭 在濕雲之小西 衆仙洞北-4곡은 석문담이니 습운천의 조금 서쪽 중선동 북쪽에 있다
五曲 暎花潭 去石門一轉 在靑龍坊-5곡은 영화담이니 석문을 지나 한번 돌아 청룡방에 있다
六曲 卓錫川 在白塔南-6곡은 탁석천이니 백탑 남쪽에 있다
七曲 臥龍潭 在迦葉峯之東趾 能仁菴下-7곡은 와룡담이니 가섭봉의 동쪽발치 능인암 아래에 있다
八曲 孤雲壁 在靈臺少下溪南-8곡은 고운벽이니 영대 조금아래 계곡 남쪽에 있다
九曲 玉梁瀑 在龍潭北 紫玉峯下 山之僧稱古梁洞者也 示別派也-9곡은 옥량폭이니 용담 북쪽 자옥봉 아래 있다 산승이 고량동이라 일컫는 것은 다른 갈래를 보인다
병계(屛溪) 윤봉구(尹鳳九)(1683~1768) 선생이 구곡시를 지었으며 이 구곡의 명칭 가운데 옥병계 석문담 와룡담은 일찍이 죽천(竹泉) 김진규(金鎭圭)(1658~1716)가 명명하고 손수 팔분체(八分體)로 써서 암석 표면에 새겨둔 일이 있었고, 나머지 육곡은 병계가 그 아우 석문(石門) 윤봉오(尹鳳五)(1688~1769)와 함께 옥계(玉溪) 아래 복거한 후에 명명한 것이다.
죽천 김진규는 덕산에서 귀양살이를 하였다.
6. 보덕사
보덕사1871년(고종 8년)에 흥선대원군(興先大院君)창건
흥선대원군이 1844년(헌종 10) 가야사를 불사지르고 그의 아버지 남연군(南延君) 이구(李球)의 묘를 썼다. 그 결과인지, 그 뒤 1863년에 그의 아들이 고종으로 즉위하게 되었고, 흥선대원군은 그 보은의 뜻으로 지금의 자리에 절을 짓고 보덕사라고 했다.
흥선대원군은 가야사를 불태운 죄책감에 가야산 동쪽에 절을 짓고 부처의 은덕에 보답한다는 의미로 이름을 報德寺라 하였습니다. 본관 동래(東萊). 속성 정(鄭). 호 벽담(碧潭). 경기 출생. 일찍이 출가하여 경기 고양군 숭인면(崇仁面:지금의 서울 안암동) 영도사(永導寺:지금의 開運寺)에서 승려가 되었다. 흥선대원군의 차남인 이재황(李載晃:뒤에 고종)이 12세 때 이 절에 맡겨져, 도문의 처소에서 지냈다.
고종이 즉위한 후 그를 찾아 영도사로 거둥하여 절 이름을 개운사(나라의 운을 열었다는 뜻)로 고쳐 사액(賜額)하였다. 《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1844년(헌종 10) 가야산(伽倻山) 가야사를 헐고 그 자리에 아버지 남연군(南延君)의 묘를 면례(緬禮:이장)한 뒤, 인근 골짜기에 절을 지어 보덕사(報德寺)라 이름짓고 이때가 고종 8년인 1871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당시의 주지는 碧潭道文(벽담도문)이었습니다.
개운사 (나라의 운을 열었다는 뜻)주지인 도문을 초대 주지로 삼고, 남연군묘 수호일품대승(守護一品大僧)이라는 직책을 내려 남연군의 묘를 돌보게 하였다.
그러므로 보덕사는 고종과 그의 부친인 흥선대원군의 원찰로 창건된 것입니다. 보덕사는 1950년 한국전쟁으로 소실되었으나, 이듬해 2월 비구니 華山守玉(수옥) 스님이 중창하였습니다. 그리고 1962년 비구니 宗顯(종현) 스님이 중수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1) 석등 - (報德寺石燈) -종 목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83호
2) 석탑 - 상가리석탑(현 보덕사 소재)
원래는 가야사지에 있던 것으로 예산군청을 거쳐 보덕사로 옮겨온 것이다.
마을의 고노들 증언에 의하면 가야사지(돌구수인근)에 있던 석탑의 부재들을 보덕사로 옮긴 것으로 증언한다.
"1914년 일본인이(군산의 쌀 무역상을 대리인으로 반출시도) 가져가려는 것을 보덕사 주지 김관용 스님의 항의로 회수"한 것으로 기술하고 있는데, 이 내용의 출처가 명확하지 않다.
몇가지 자료조사로 보면, 1914년의 보덕사 주지는 김응월이라는 분이며, 1936년에 군산으로 반출되었다가 일본인으로부터 되찾아 군청에 보관한 것은 1937년이다.
7. 남연군의비
'숭정기원후 4을축 5월 일립'이라는 기록을 통해 1865년 5월에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유명조선국현록대부남연군시충정공신도비명병서(有明朝鮮國顯祿大夫南延君諡忠正公神道碑銘幷序)
성상께서 왕위에 오른 원년 갑자에 영의정 조두순이 건의하기를 남연군의 사당은 사체가 유별해서 불천지위의 법전을 기다릴 수 없고 당시의 시호가 알맞지 않음은 아니지만 마땅히 좋은 시호로 고쳐 성상의 생각을 표시해야 합니다 하니 그 시법이 염방공정(廉方公正)을 충(忠)이라 하고 이정복지(以正服之)를 정(正)이라 하여 우리 성상께서 이미 치제하고 또 친히 왕림해서 정성을 다하였으며 그 다음해 을축년에 병학이 공의 덕업훈로가 크므로 의안군과 익안군의 옛 일을 생각하여 순조묘정에 배향을 청하자 임금께서 조정에 문의하여 추향하는 예를 거행하였으니 아! 현양하는 미풍과 숭보하는 의리에 정례와 문채가 모두 질서 있으며 법전에도 빛을 더하니 또한 세상에 드문 일이로다.
어찌 훌륭하지 않으리오. 이에 흥선대원군 합하께서는 사모와 슬픔을 더해서 비석을 깎아 무덤에 세우려고 병학에게 글 짓기를 청하였다. 생각컨대 공은 구슬과 옥처럼 빼어나서 주나라 성덕의 복을 받았고 상관영렵의 운수를 열어 종묘사직이 다시 편안해지니 만세에 힘을 입으니 드높은 그 공덕의 성대함은 다 새기지 못하고 역사에 다 기록하지 못한다. 온 나라에 은혜를 입은 무리들은 집집마다 찬송하고 축원하지 않는 이 없으니 병학은 무슨 말을 하리오.
삼가 살피건대 공의 휘는 구이고 자는 치수이며 초휘는 채중이니 인조의 혈손이다. 인평대군에서 나뉘어 6대를 내려와 공에 이르러 은신군 희 진의 후사를 이었다. 바로 장헌세자의 증손으로서 위로는 영조를 할아버지로 한다. 어머니는 군부인 홍씨니 현령 휘 대현의 따님이고 본관은 남양이다. 휘 혁은 의원군이고 시호가 문정이니 종친 중에서 경학을 아는 군자로 오례집설·열성세기·요람 역대군신록 등을 저술하였다.
이가 휘 숙을 낳으니 안흥군이고 시호가 효정이며 영종 신해에 정승 홍치중의 건의로 인해서 특명으로 인평대군의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 이가 휘 진익을 낳으니 음직으로 참판이며 증좌찬성으로 의리가 분명하고 지조가 굳건하였다. 이가 휘 병원을 낳으니 진사로 증영의정이니 이가 공의 본생 아버지 할아버지이고 4대이다. 의정공의 원배는 증정경부인 영일 정씨 통덕랑 휘 의환의 따님이요 계배는 증정경부인 광주 김씨 휘 진구의 따님이니 공은 원배의 소생이다.
공이 정종 무신 8월 22일에 출생해서 순조 을해에 세자의 증손으로서 법대로 봉작되어 소의대부에 뛰어 올랐고 병자에 중의로 오르고 정축에 승헌으로 현륭원의 원을 지키는 벼슬을 하였다. 경진에 특별히 도총부도총관을 지내고 이해에 숭헌으로 오르며 신사에는 가덕으로 진급하니 백관에게 친수를 더하였다. 그뒤 건릉의 수릉관에 차용되고 임오 을유에는 의덕과 흥록에 오르니 왕릉을 지킨 공로 때문이었다. 무자년에 별사의 정사가 되어 연경에 갔고 기축년에는 글을 익종 임금에게 올려 영종·진종·정종 세 임금의 어필을 이어 간행해서 국가에서 길이 전하는 보배로 삼도록 하자고 청하자 임금이 따랐으니 대저 영종 을사년에 여러 임금의 어필을 간해한 고사를 따른 것이다. 이해에 홍부인의 상사를 만나고 신묘년에 복을 벗었으며 임진에 도총관이 되고 계사에 다시 도총관이 되었으며 갑오에 현록으로 진급하니 가장 높은 계급이다.
헌종 병신 3월 19일에 정침에서 돌아가니 향년이 49세였다. 부고가 알려짐에 임금이 조회를 멈추고 진도했으며 순원대비가 바야흐로 임정하니 전교를 내려 슬퍼했고 중사를 보내어 호상하고 동원의 부기를 하사해서 예장이나 녹봉을 모두 관례대로 거행하였으며 성복하는 날에 치제하였다. 처음에는 마전 백자동에 장사 지냈다가 바로 연천 남송정에 이장하고 을사년에 또 덕산 가야산 북쪽 기슭에 이장하였다가 병오 3월18일에 드디어 중록 건좌한 언덕에 면례하고 묘표를 세웠다. 경술에 순원대비가 명령해서 사방으로 산의 경계를 정했으니 특별한 운수이다.
배는 군부인 여흥민씨니 선공감 감역으로 증우의정 경혁의 따님이니 정숙해서 여사의 덕행이 있었으며 집안이 엄숙해서 조정과 같았다. 정종 갑진 6월 26일에 출생하고 공보다 오년 먼저 돌아가니 지금 공의 묘 좌측에 합부하였다. 4남 1녀를 두었으니 장남은 흥령군 창응이고 다음은 흥완군 정응이고 다음은 흥인군 최응이고 다음은 흥선대원군 하응이고 사위는 신억이니 지금 관찰사이고 흥녕은 아들이 없으니 흥완의 아들 재원이 후사가 되어 공의 제사를 주장하고 지금 참판이다. 흥완은 일가 사람 참봉 신의 다섯째 아들 재완을 취해서 아들을 삼았고 흥인의 아들은 재긍이고 대원군은 실상 우리 주상전하를 탄생해서 계해년에 태모 명령을 받들어 들어와서 왕통을 이었으며 장남 재면은 지금 승지로 검교대교이며 사위에 조경호는 문과이고 서자 재선은 무과 경력으로 별군직이다. 신억의 계자 도희는 지금 교리이고 재원의 사위는 심상만·조준호이고 나머지는 어려서 다 기록하지 못한다.
공은 기도가 준정하고 지조가 엄정하며 효우가 천성에서 근본하고 충의가 지성에서 나왔으니 어려서부터 어버이 섬김에 그 충실한 봉양을 다하고 늙은 나이로 상제가 되어서도 슬퍼함을 지나치게 했다. 형제들도 마음 속의 사랑에 느끼고 일가들도 화목한 정의를 기리어 가정 안의 일은 남들이 사이하여 말이 없었다. 그러자 공족에 가까워지고 벼슬도 극품에 올라 우뚝한 종친으로 홀로 서 있어 존귀한 모습이 비할데가 없으되 선비의 소박함으로 지키고 검소 간략으로 다스려 재물을 진흙처럼 여기고 성악이나 여색을 가볍게 여기었으며 구슬이나 보화를 끊고 의복도 화려함을 사양해서 모든 번화에는 담담하였다. 권세와 명리를 멀리해서 바깥 조정이나 시대의 귀객과 소식을 통하지 않고 시례(詩禮)를 읽고 실천하여 서책을 스스로 즐기되 30년을 하루와 같이 하였으니 하간왕의 옛것을 좋아함과 동평왕의 선이 즐겁다는 것이 더 훌륭할 수 없으리라. 몸을 밝히고 삼감으로써 다스리며 가정을 공경과 화목으로 다스리고 여러 아들을 옳은 방도로 가르치고 노복들을 어거함에는 엄격함으로 단속하니 귀객이 문전에 드물게 찾아왔고 노예가 저자와 마을에 나가지 않았다.
이것이 모두 사부와 선비들 사이와 길쌈하는 아낙네와 땔나무하는 사람들도 눈으로 보고 귀에 익히 들은 것들이다. 크고 밝은 풍채와 준걸하고 가다듬는 도량이 세 임금의 특별한 대우를 받아 예우가 갈리지 않았고 총애도 갖추었으되 끝까지 두려워하고 조심해서 나오고 그침이 정한 자리가 있으며 일찍이 사사로운 일로 요구함이 없으니 이로 말미암아 위와 아래가 더욱 공경하고 어려워 했다. 모든 국가에 혼인대사가 있으면 공을 의지해서 일을 치르되 예절에 허물이 없었으니 이는 예문에 익숙함이다. 크고 작은 상사가 있어서 능이나 원을 지키게 하면 제전을 반드시 정성으로 해서 슬퍼함과 겉치례가 법도에 맞았으니 이는 법제에 통달함이다. 사명을 받들어 연경에 갔을때는 그쪽 화물을 하나도 가까이 하지 않았으며 나라의 체통을 보존함에 힘썼으니 이는 사신의 일에도 능한 것이다.
이것이 대저 공의 보통 행한 행실이고 덕이다. 왕실을 위해 마음을 써서 좋은 일 궂은 일을 함께 하고 힘과 정성을 다해 쉬운 일이나 어려운 일을 가리지 않았으니 진실하고 인후한 성품과 맑은 명망은 오늘이나 옛날의 종실중에 어진이를 모두 뽑아 보더라도 더 훌륭한 이는 없을 것이다. 마땅히 하늘에서 그 덕을 살피고 보답이 커서 성덕을 길러내는 경사가 발현되어 끝없는 아름다움을 응하게 될 것이다. 아!성대하여라. 시경에 이르되 「군자 만년에 큰 명이 따르리라.」하였으니 역사와 경전에서 일컫는바로 고징해보면 적덕 백년한 뒤에 일어난다 함이 그 실험이 아니겠는가. 공경으로 명을 지으니 큰 뫼뿌리 정령을 모아 왕족에서 발상하니 선왕의 지손이 공에 와서 더욱 번창하였다.
돈독한 공로 나라에 있고 효우로는 집을 다스렸네.
임금은 그 충성 아름답게 여겼고 사람들은 그 바름에 감복하였네.
시례를 공부하고 부귀에는 마음 없었으니 나타난 좋은 의표 금과옥조였네.
몸에 덕을 쌓아 그 큰 복을 남기었으니 집안에 경사 모여 성덕의 탄강 더디지 않았구려.
높은 공렬 우러르니 나라의 간성이었고 높은 보답 비로소 성대하니 드날리고 밝히었네.
모든 착함 어찌 형언할까. 빛난 그 시호 생각하리라. 그윽한 처마에 심원한 생각 임금도 왕림했으니
울창한 저 가잠의 산에 길성이 모였으니 현철한 부인도 무덤 같이하여 신묘한 이치 모이고 모였으리.
이에 빗돌을 세우니 하늘은 거칠어질지라도 갈리지 않아서 길이 큰 운명 도와 때로는 만도 되고 때로는 억도 되리라.
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좌의정겸영경연감춘추관사김병학(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左議政兼領經筵監春秋館事金炳學)은 삼가 글을 짓고, 아들 상보국숭록대부흥인군겸종정경오위도총부도총관최응(上輔國崇祿大夫興寅君兼宗正卿五衛都摠府都摠管最應)은 삼가 쓰다. 손자 가선대부이조참판겸종정경동지경연의금부춘추관성균관사오위도총부부총관동지실록사규장각직제학춘추관수찬관지제교재원(嘉善大夫吏曹參判兼宗正卿同知經筵義禁府春秋館成均館事五衛都摠府副摠管同知實錄事奎章閣直提學春秋館修撰官知製敎載元)은 삼가 전자를 쓰다.
숭정(崇禎) 기원후(紀元後) 사(四) 을축(乙丑) 5월 일에 세우다.
마지막에 명(銘)을 지었는데 마지막 문장이 ‘큰 기틀을 영원히 보살펴서 억만년 이어지소서(永영佑우鴻홍基기時시萬만時시億억)’이다
남연군충정비의 비문 글씨는 남연군의 맏손자인 이조참판 이재원이 쓴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전면 오른쪽에는 위에서 아래로 ‘유명조선국 현록대부 남연군 시충정공 신도비명 병서’라고 쓰고, ‘성상이 즉위한 원년인 갑자년에 영의정 조두순이 건의해서’로 시작하는 비문이 이어진다.
남연군 '숭정기원후 4을축 5월 일립'이라는 기록을 통해 1865년 5월에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전체 4면비로 비의 상단 전면과 후면에 전서로 '남연군충정공신도비명'이라고 쓰여 있다. 이 글씨는 남연군의 맏손자인 이조참판 이재원이 쓴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전면 오른쪽에는 위에서 아래로 '유명조선국 현록대부 남연군 시충정공 신도비명 병서'라고 쓰고, '성상이 즉위한 원년인 갑자년에 영의정 조두순이 건의해서'로 시작하는 비문이 이어진다.
이 비문은 좌의정 김병학이 찬하고 남연군의 셋째 이들인 흥인군 이최응이 글씨를 썼다. 내용을 보면 김병학은 먼저 시호를 충정(忠正)으로 고쳐 내리게 된 연유를 쓰고 있다. 충은 염방공정(廉方公正)을 의미하고 정은 이정복지(以正服之)를 의미한다. 여기서 염방공정은 '청렴하고 방정하며 공정하고 바르다'는 뜻이다. 70년대까지만 해도 우등상에 '품행이 방정하다'는 말을 썼는데 이 방정이 염방공정의 준말이다. 이정복지란 '바른 것으로 다른 사람을 복종시킨다'는 뜻이다.
비문에서 남연군묘의 이장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비문에는 남연군의 가계가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인조대왕까지 그 혈통이 이어지는데 그 처음을 인조의 셋째 아들인 인평대군에게서 찾고 있다. 그리고 1788년 8월22일 태어나 은신군의 양자가 되었고 1836년 3월19일 4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음을 밝히고 있다. 묘는 처음 마전 백자동에 있다가 연천 남송정으로 이장하였다. 그리고 1845년 다시 덕산 가야산 북록(北麓: 북쪽 기슭)으로 옮겼다가 1846년 3월18일 중록(中麓) 건좌(乾坐)에 안장한 것으로 되어 있다.
8. 상가리귀부
상가리귀부가 있는 곳은 모두가 폐사지로 방치되었던 토지를 경작지로 만드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의 석물들이 발견된다.
고노들의 말씀에 수정사라는 명문석이 있었다고 하여 이곳에 수정사라는 절이 있었던 곳으로 지금은 경작지로 변하고 별다른 흔적이 없고 논두렁의 석축에 석물만 남아아있다.
귀부의 비는 사라졌고 마을에는 아랫남전의 둠벙에 뭍혀다는 전설과 같은 이야기가 있으며 상가리의 귀부의 정교한 조각과 고려시대 스님의 정치적인 위상과 귀부의 규모로 볼 때 가야사의 큰 스님과 연관이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85세의 마을 어르신은 옆의 계곡에는 승탑이 여러 기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유물은 대부분 70년대 이전에 모두 반출되었다.
9. 유숙 (柳淑)1324(충숙왕 11~1368(공민왕 17).
본관은 서산(瑞山). 자는 순부(純夫), 호는 사암(思菴). 아버지는 태상경(太常卿) 성주(成柱)이다. 1340년(충혜왕 복위 1) 과거에 급제하여 안동사록(安東司錄)으로 임명되었다. 1342~51년에 원나라에 가 있었던 강릉대군(江陵大君:공민왕)을 4년 동안 시종했다.
자는 순부(純夫), 호는 사암(思庵). 본은 서산. 벼슬이 첨의평리에 올랐고, 홍건적의 난에 공을 세워 서령군에 봉하였다.
1365년 당시 정권을 잡은 신돈(辛旽)을 반대하다가 파면되었다. 그뒤에도 신돈의 미움을 받아 시골에 내려와 있다가, 결국 신돈에 의해 죽음을 당했다.
시호는 문희(文僖)이고 공민왕 묘정에 배향되었다.
개경에서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덕산의 가야산으로 들어가 은거하였다. 조정에 붙어 있어 보아야 목숨을 잃을 것이라고 짐작한 끝에 취한 행동이었다.
고려 후기의 문신 사암(思庵) 유숙(柳淑, 1324-1368)이 지은 「가야사 주지 노스님의 시에 차운하다?次伽倻寺住老詩]」3수가 가장 오랜 것이다. 지면 관계상 첫 수만 읽는다.
少年歌舞醉華堂 젊은 시절 가무(歌舞)로 화당(華堂)서 취할 적엔
肯想淸遊雲水鄕 운수향(雲水鄕)서 맑게 노닒 생각이나 했으랴.
老去不堪趨綺陌 늙어가매 벼슬 길 내달림 못 견뎌서
退來隨分坐藜床 물러나 분수 따라 평상에 앉아 있네.
閑中氣味茶三椀 한가할 때 기미(氣味)는 차 석 잔에 들어 있고
夢裏功名紙一張 꿈 속의 공명이야 종이 한 장 그뿐일세.
多謝新詩慰幽獨 새 시 지어 외론 맘 달래줌 고마워라
上人深意若爲量 스님의 깊은 뜻을 어이 다 헤아리랴.
10. 상가리미륵불
고려시대 930년 중반에 조성된 것으로 보여지며 가야사지의 탑과 함께 조성된 것으로 시기를 추정할 수 있다.
방향이 북쪽의 계곡을 향한 미륵불은 비보미륵불로 북쪽 계곡의 기운을 막으려고 세운 것이다.
伽倻寺터에서 북편으로 약 200m 지점에 석불입상(石佛立像) 1구가 남아 있다. 이 석불입상은 그 원래의 위치가 이 곳인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으름재 계곡에 우뚝 서 북향하고 있다. 이 불상은 화강암 동일석으로 조성되었으며 자연석으로 기단을 삼은 위에 세워 놓았으나 하체의 일부가 지하에 매몰되었다.
머리에는 인도의 남방양식인 원통형의 관모를 썼는데 이 같은 양식은 高麗下代에 유행했던 불상에 보이는 수법이다. 한 가지 주목되는 것은 관모정면에 결가부좌(結跏趺坐)한 여래상(如來像) 1구를 배치하였다는 점이다. 이 여래상은 연화좌 위에 앉았으며 머리에는 두광(頭光)이 나타나 있고 수인(手印)은 입상과 같은 형태를 취하고 있다.
관모에 새긴 여래상 주변에는 당초문(唐草文)을 양각하여 장식을 가미하고 있으며 2조의 관띠가 사살적으로 표현되었다. 관밑으로는 보발(寶髮)이 보이며 양귀는 어깨까지 닿고 있어 자비가 넘치고 있다. 이마는 넓으며 눈은 반개(半開)하였고 코는 오똑한 편이나 왼쪽 일부가 마멸되어 존용을 그르치고 있다. 입가에는 잔잔한 미소가 어리며 얼굴은 비만하여 덕스러움이 넘친다. 목은 짧고 두꺼우며 삼도(三道)가 뚜렷하고 어깨에까지 보발이 흘렀다.
어깨는 당당한 편이나 부드러움이 강조되었고 법의는 우견편단(右肩偏袒)으로 왼쪽 어깨로부터 가슴 아래로 유려하게 흘러내렸다. 手印은 오른손은 가슴에 대고 엄지와 중지를 모은 아미타인(阿彌陀印)을 결하고 좌수는 복부에 대고 상장(上掌)하였는데 작은 약함같은 장식이 들려있다. 아래로 흐른 법의는 앓게 표현이 되었으나 하체에서는 도식화(圖式化)되어 시대가 떨어짐을 보여주고 있다.
이 석불입상은 관모와 보발의 표현, 상호(相好) 등으로 미루어 보살입상(菩薩立像)으로 명칭을 불여야 할 것 같으며 시기는 高麗中期 이후로 봄이 옳을 것 같다. 이 불상의 실측치는 전고(全高) 267cm, 관고(冠高) 30cm, 두고(頭高) 40cm, 견폭(肩幅) 78cm, 흉폭(胸幅) 46cm, 후(厚) 37cm이다.
가야산일원에는 안국사지와 여미리,해미지역과 덕산.수암산 등 20여기 이상의 미륵불이 있다.
11. 박일양기적비
상가리 보덕사 입구에 두개의 비가 있다.
박일양 기념비와 홍 씨 적선비이다.
박일양 기념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박일양은 상가리 동네의 마름(조선중기이후 지주의 위임을 받아 소작지를 관리하던 사람)이었다.
일제 강점기 상가리 주민들이 굶주림으로 허덕일 때 저수지를 만들고 밭을 논으로 개량하여 주민들에게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박일량은 당시 가야산 가야동내 지주의 임을 받아 마을내의 소작지를 관리하던 사람으로 전해진다,
당시 가야동은 경작할 토지가 많지 않았다.
대부분 산에서 숯을 만들어 덕산장에 내다 파는 형편이었었고 일부는 산에서 벌목하는 작업을 하였던 것으로 보여진다.
마을 사람들이 굶주림으로 허덕일 때 마을(아랫남전과 오얏골)에 저수지를 만들고 밭을 논으로 개량하여 주민들에게 도움을 주었다.
현재의 가야사터가 되는 곳도 대부분 이 당시에 일본인에 의해 마을사람들이 동원되어 개간 되었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주민들이 1938년 기적비를 세워 현제에 이르고 있다.
이 비는 현재(주차장)세워저 있는 곳에서 100m 아래에 세워져있었다.
홍봉섭 적선비
연대에 대한 정확한 문헌은 없다.
다만 상가리 주민 진 희관 씨의(2012년사망) 말에 의하면 “홍 씨가 흥선대원군의 부친인 남연군묘를 이장할 때 일을 편리하게 해주기 위하여 묘자리까지 길을 닦아 주었다”고 하여 그것에 대한 보답으로 “흥선대원군이 광무 4년(1900년) 적선비를 세워 주었다”고 한다..
오위장 홍유원의 비
옥계리 저수지 상류의 마을회관과 상가리 옥병계을 지나서 옥계리 절터에 여러기의 비석이 있었으나 대부분 사라지고 현재는 한기의 비석만이 잡초속에 남아 있다.
왕조실록 고종편에 대원군과 관련이 있는 분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정사에는 별다른 기록을 찾을 수 없고, 저수지가 조성되기 전인 50년대까지 이분의 후손들이 저수지에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으나 덕산과 고덕등지로 이주하였다.
대원군에 의해 가야산의 옥계리와 상가리에 상당한 토지와 임야을 소유하고 있었다.
대원군은 옥계리에 거주하는 홍유원이(홍병기) 남연군묘역과 산까지 이어지는 도로등 관리의 노력이 있정되어 상당량의 토지를 주었다.
(오위장五衛將)
오위의 으뜸 벼슬로, 초기에는 종2품관 12명을 두어 그때 그때 각 위를 나누어 맡아 통솔하게 하였으며, 모두 타관(他官)이 이를 겸직하였다.
5위가 평상시에는 주로 입직(入直)과 행순(行巡:도성 내외를 순찰하는 일) 및 시위(侍衛) 등의 임무를 수행하였기 때문에 5위장들은 외소(外所) ·남소(南所) ·서소(西所) ·동소(東所) ·북소(北所) 등 다섯 위장소(衛將所)에 번을 갈아 각각 1명씩 입직하여 왕의 지명에 따라 임무를 수행하였다. 또한 순행에 있어서는 5위장이 군사 10명을 인솔하고 시간을 나누어 순찰한 뒤 이상 유무를 직접 왕에게 보고하였다.
나라에 경사가 있어 국왕에게 축하를 드리는 조하(朝賀)가 있을 때에는 위장이 그 군사를 이끌고 궁정에 정렬, 시위하였다.
임진왜란을 계기로 5위의 기능이 대폭 축소되어 궁성 숙위(宿衛)만을 맡게 되자 5위장의 기능도 이것에 한정되어 품계를 종2품에서 정3품으로 내리고 3명을 증원하되 2명을 문관으로 충당하여 위장소의 사무를 맡아보게 하였는데 이를 조사오위장(曹司五衛將)이라고 하였다. 오위장은 1882년(고종 19) 군제개혁 때 5위와 함께 폐지되었다.)
고종 7년 경오(1870, 동치9) 10월 7일(기해) 맑음
홍병기를 오위장에 가설하라는 전교 (임금이 내리는 명령)
○ 전교하기를,
“돌아온 중사(中使)의 보고를 들으니, 덕산(德山) 묘소 아래에 사는 백성인 홍병기(洪秉驥)라는 사람이 소나무와 개오동나무를 손수 심은 숫자가 거의 수만 주에 이르는데 지금은 크게 자랐다고 한다. 그 성의가 가상하니 오위장 가설에 단부(추전)하라.”
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 이런 기록도 있다.
12. 기타
가야산 옥계리와 상가리에는 헌종태실과 함께 남연군의묘.흥령군의묘.아씨골(왕가의 어린 나이에 사망한 옹주의묘).명빈박씨와 연령군의 묘가 있습니다.
특히 이곳은 전국의 면단위 최고의 역사유적이 있는 곳으로 대원군에 의해 1854년 불태워져 폐사한 가야사지를 비롯해 180여개의 절터가 있는 곳으로 계곡의 대부분이 용연사지, 남전등 폐사지로 알려져 있다.
인근에 대원군의 부친이며 고종의 할아버지인 남연군의 묘가 모셔져 있으며 2km정도 거리에는 숙중의 부인인 명빈박씨와 영조의 이복형제인 연령군의 묘 대원군의 형인 흥령군의 묘가 있어 조선시대 후기의 왕실문화를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역사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여행지이기도 하다.
1844년 흥선대원군은 가동에 남연군을 면례하고 가동마을을 자주 방문하게 된다.
경기도 연천에 있던 남연군묘를 덕산 가동까지 옮겨서 가야사 부근의 북쪽의 가야구곡의 고운벽 인근에 1년간 임시매장 했는데 그곳은 지금도 마을에서는 그곳을 구광지(터)로 볼려지게 된다.
대원군이 가동을 방문하는 교통편은 주로 바닷길을 이용하여 방문하게 되며 지금의 옥계리에 있던 당시 가야산 일원의 사폐지의 지주인 윤봉구의 집을(윤봉구의 손자 윤철보 54년조성 옥계저수지에 수몰) 이용했다고 마을의 고노들에 의해 전해진다.
윤봉구의(손자윤철보) 사랑채에서 하루 이틀 머물고 옥계리에서 상가리의 남연군산소등 방문하고 으름재와 보현동(운산) 거처 운산을 경유하여 한양으로 귀향한 것으로 기록한다.
상가리에는 대원군의 방문에 마을내 위험한 사람을 관리하는 시설이 별도로 (장00) 있었으며 제사에 사용할 음식등 조리하는 별도의 시설이 있었다고 한다.(동구말류00)
지금도 음식을 조리하던 집터에서 처음 상가리에서 남연군을 모셨던 구광지 남연군의 제례를 모시기 위한 제실로 연결되는 구길이 있었던 것을 구지적도를 통하여 알 수 있다.(현황도로와 다른 예전 제례 때 제실을 빠르게 연결하기 위한 길이 있다)
남연군묘의 제실은 여러채가 있었는데 처음에는 현재 비닐하우스(식당)이 있는 곳 주변에 있었으며 이후 가야사지터에 2채가 있었으나 60년대와 80년대 모두 헐려 개인집의 신축에 사용되었다.
헌종태실이 있는 곳에 저수지가 만들어지며 수몰된 윤봉구집터와 포청주막 남연군의 묘가 있는 가야산을 출입하기 위하여 거처가는 길목에는 하마비와 가야구곡중 관어대가 있었습니다.
지금의 다리가 있는 지점에 비교적 큰 물길이 있어 가동을 출입하는 사람들을 검문하거나 통제하는 포청주막捕廳酒幕이(도둑 잡는 군사들의 숙소를 겸해 관에서 운영하는 주막)있던 장소이기도 하다.
가야산에는 4개소의 보루에 군사들이 중무장하고 가동의 출입을 통제하였고 이를 "소도화"라고 한다.
초기에는(오페르트사건) 덕산초등학교쯤에서 통제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산골마을에 들어가거나 나가는데는 사실 목슴을 걸어야하는 경우도 있었다.
호랑이가 많고 도적 때가 출몰하는 험한 길은 주막에서 몇일를 기다려 일행을 만들어 떠나기도했다.
길잡이로 화포.화승총을 갖고 있는 포수 등이 있었다고도 한다.
가야산 상가리하면 지역에서 사람들이 사납고 범죄자가 많고 무서운 곳으로 불렸던 곳이다.
그러나 잘못된 역사의 평가와 인식에서 비롯된 오명으로 망이망소이, 이인좌의 난과 황진기, 대원군과 오페르트, 동학농민전쟁, 한국전쟁 등의 가야산이 역사의 중심에 있어 비롯된 것이다.
가야산의 역사는 무교와 불교의 성지였으나 조선개국과 함께 억불정책과 황진기의 가야사와 백암사 은둔으로 가야산의 대부분 절집들이 사라지며 오명을 쓰게 된다.
이후 오페르트 사건으로 가야산지역은 한양에서 파견된 대원군 최측근인 참봉들이 지휘하는 완전 통제하는 소도화(동서남북에보루를설치통제) 정책으로 특수지역이 되며 조선의 부패한 사회와 정치를 변화를 요구하며 동학농민전쟁에 참여했던 세력들이 숨어들게 되고 동학농민전쟁을 폭도로 정치적인 판단으로 가야산 상가리는 더욱더 침체되게 되고 한시대 오명을 쓰게된다.
옥병계 수재대(水哉臺) - 성수침은 속진俗塵이 싫어 우계에 살고하자는 뜻을 알고 (속세(俗世)의 티끌이라는 뜻으로, 세상의 여러 가지 번잡한 일을 이르는 말)가야사에서 머물렀다.
‘옛 시내[古澗]’라고 말한 것은 저자가 1543년, 51세에 동생 성수영(成守瑛)이 고을 수령을 하던 충청도 덕산(德山)으로 모친을 모시고 갔다가 그 다음해에 동생이 형의 뜻을 알고 적성 현감(積城縣監)을 자청하여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조선시대말 비운의 정치가이며 수필가인 운양김윤식도 가야산을 여행하며 면양행견일기에 많은 기록을 남긴다.
옥계리와 상가리를 중심으로 답사하며 조선왕실의 중요한 자료들이 안내표지도 없어 찾기 힘들다.
대부분의 지자체에서는 역사문화유적 보존과 지역경제라는 명목 하에 지역의 향토 문화유산을 볼거리 즐길 거리 등 관광자원화 하는데, 예산군에서 조금만 관심을 갖고 유적에 접근로를 만들고 안내표지 정도만 설치하여도 많은 사람들이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답사를 통하여 많은 시민들이 향토유적의 가치를 함께 공감하고 지역에 있는 다양한 유적에 답사하는 분들이 쉽게 찾고 공감 할 수 있도록 안내판의 설치와 관리되지 않는 향토역사유적을 지역의 커뮤니티에서 관리하는 방법 등 다양한 고민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덕산가야산지역의 향토문화유적을 잘 활용하여 다양한 볼 거리 등 관광 콘텐츠를 활용하였으면 한다.
9월1차 답사에 참여하신 분들 이기웅.노한우.김병헌.송은수.정지윤 외 3명 모두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