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고 동창과 함께 떠난 역사 여행
고3에 시작된 우리의 인연은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결혼 시기도 제각각, 사는 모습도 제각각이라 그동안은 엄두를 못 냈다. 엄마로, 아내로 할 일 많이 했으니 오랜만에 떠나보자고 했다. 되짚어보니 27년 만에 우리끼리 떠나는 여행이었다.
완전체로 모이니 어느새 우리는 19살로 돌아가 있었다. 마냥 신나고 한없이 편하다. 여고 동창생은 그래서 좋은 거다. 이것이 진정한 힐링 여행.
취재·사진 유병아 리포터 bayou84@naeil.com
어디를 가는지, 무엇을 할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우리가 오랜 만에 밤을 같이 보내며 긴 시간 함께할 수 있다는 데 의미가 있을 뿐이니까. 그래도 목적지는 필요했다. 고심하는 우리에게 여행지를 제안한 이는 역사교사인 친구다. 군산, 전주는 역사적으로 매우 의미 있는 장소라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한다고 했다. 의미가 있는 곳을 중심으로 여행 코스를 짤 것이고 해설도 해주겠다는 제안이었다. 뭣이 중하겠는가? 친구의 제안인데. 우리의 행선지는 그렇게 정해졌다.
군산에서 발견한 1900년대 그리고 아픈 역사
여행을 가기 2주 전부터 전국이 끓고 있었다. 전주역에 내리자마자 피서 가는 시기에 더위를 찾아 왔음을 실감 했다. 전주 기온은 35.5℃였다. 렌터카가 없었다면 공부는커녕 일사병에 걸렸을 것이다. 첫 일정인 군산으로 향했다. 군산에서 제일 먼저 찾은 곳은 군산근대역사박물관. 2011년에 건립한 박물관에서는 과거 무역항으로서 번성기를 누린 군산의 옛 모습을 볼 수 있다. 박물관 창밖으로 군산항이 펼쳐져 있어 사진 속 모습과 지금을 비교할 수 있었다. 세월의 흐름에 숙연해졌다. 박물관 안에는 인력거, 초가집, 술 제조 상점, 잡화점 등 근대 문화를 볼 수 있는 장소도 마련돼 있다.
다음으로 들른 곳은 히로쓰 가옥. 2005년에 국가 등록 문화재로 지정된 이곳에서 ‘장군의 아들’ ‘타짜’ 등의 영화 촬영지라고 한다. 목조로 된 2층 주택으로 지붕과 내부, 일본식 정원 등이 건립 당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어 건축사에서도 의의가 큰 곳이다.
서산방조제에서 새만금방조제까지
추억여행 이어가기
걸어서 10분 거리에는 1913년 일제 강점기에 지은 동국사가 있다. 일본 에도 시대의 건축양식을 띠고 있는, 유일하게 남은 일본식 사찰이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들은 우리의 민족정신과 문화를 없애기 위해 많은 짓들을 했는데 사찰 건립도 그 중 하나라고 한다. 역사 유적지라곤 하지만 막상 가보니 기분은 안 좋다.
동국사 가까운 곳에는 초원사진관이 있다.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 촬영지로 유명한 곳이다. 여행객 모두 한석규, 심은하가 돼서 한 컷씩 찰칵!
군산에 갔다면 새만금방조제는 꼭 봐야 한다. 군산시와 고군산군도, 부안군을 연결하는 방조제로 길이가 33.9km이다. 방조제를 차로 달리려니 끝이 보이지 않아 현기증이 날 정도다. 사람의 능력이 얼마나 위대한지 실감했다. 새만금방조제에서 생각해보니 우리들의 아가씨 시절 마지막 여행지가 서산방조제였다. 우리는 방조제를 좋아하나보다며 한참 웃었다.
역사 선생님인 친구는 군산에서 꼭 기억해야 것은 일제 강점기라고 했다. 일본인들은 우리 자원을 빼앗기 위해 항구인 군산을 이용했으며 그 시절 군산 사람들은 쌀 한 톨까지 빼앗겨 굶는 사람 천지였고 노역에 시달렸다는 것. 군산은 역사 속에서 아픈 장소라는 말이 정말 아프게 다가왔다. 자녀를 동반한다면 옛 군산세관과 구 조선은행, 채만식문학관도 들러보면 좋겠다.
전주에서 어진을 감상하다
군산에서 전주로 이동해 경기전을 찾았다. 1410년에 태종은 전주, 경주, 평양에 태조 이성계의 어진(왕의 초상화)을 봉안하고 제사하는 전각을 지었다. 경기전은 태조의 고향인 전주에 세운 전각으로, 태조 어진은 전주 경기전에 유일하게 보존되어 있다. 어진 박물관에는 영조, 철종, 고종, 순종의 어진 모사본과 세종, 정조의 표준영정을 모시고 있다. 드라마를 보면서 왜곡됐던 임금들의 얼굴이 이제야 제대로 각인됐다.
경기전 안에는 실록을 보관하던 전각인 전주사고가 있다. 전주에 사고를 설치한 것은 태조 어진이 있기 때문이란다. 실록은 이곳에서 120년 간 잘 보존되다가 임진왜란 때 안전한 곳으로 피난을 다녔다고 한다. 군산에 이어 전주에서도 아픈 역사가 함께 한다.
경기전을 봤다면 이성계가 황산에서 왜구를 토벌하고 개선 길에 연회를 연 오목대도 둘러봐야 한다. 역사적 장소라는 의미보다 전주 한옥마을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즐거움이 크다. 조선 역사에서 전주가 중요한 장소라 역사의 고장, 양반의 고장으로 불리는 것 같다.
전주향교와 한옥마을, 전동성당
전주 한옥마을에서 기와집 물결 속을 걷고 있자니 과거로 온 것 같았다. 1977년 한옥 보존지구로 지정된 전주 한옥마을은 일제 강점기 때 일본 상인들이 성곽을 헐고 성 안으로 들어오자, 이에 대한 반발로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고 한다. 다음으로 들른 곳은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순교지인 전동성당. 1914년에 준공한 서양식 근대 건축물로 초기 천주교 성당 중에서 규모가 크고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영화 ‘약속’의 결혼식 장소로도 알려졌는데 내부에 들어갈 수 없어 아쉬웠다.
전주향교는 조선시대 지방 양반 자제의 교육을 담당하기 위해 나라에서 세운 학교다. 세종 23년에 경기전 근처에 지었다가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고 한다. 전주향교는 드라마 ‘성균관 스캔들’의 촬영지로도 유명한 곳이다.
전주를 여행지로 삼을 때부터 작정한 것이 있었다. 소화제를 먹는 한이 있어도 먹고 싶은 것은 다 먹자는 것이었다. 왜? 전주니까. 역시 전주는 맛있는 음식이 많았다. 그중에서도 한옥마을에 있는 ‘베테랑’의 칼국수와 콩국수는 일품. 눈꽃 얼음을 덮고 콩가루를 뿌린 모습이 빙수 같다. 콩가루를 국물에 잘 섞다보면 얼음이 녹아서 시원함과 고소함이 배가 된다. 칼국수 국물은 더위를 잊을 만큼 시원하다. 삼천동 막걸리 골목의 ‘용진집’은 맑은 막걸리가 일품이다. 기본을 시키면 막걸리와 안주가 차려져 나오는데 한정식 식당에 온 것 같다.
역사에 해박한 친구와 유적지를 다니니 보는 재미와 함께 배우는 재미가 크다. 자녀와 동반하는 여행이라면 해설사의 이야기가 필요하겠다. 맛있고 멋있을 뿐 아니라 친구와의 추억이 생긴 전주. 다시 꼭 가고 싶은 장소가 됐다.
미즈내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