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사좌사공의 후손들이 모여사는 靈岩郡 始終面 新燕里
-
문숙공파/삼사좌사공파/수산공파/참군공파/판관공파/선무랑공파 파조는 14世 문숙공 諱 주정(周鼎), 15世 諱 심(深), 16世 삼사좌사공 諱 승사(承嗣), 17世 諱 정(精), 18世 諱 종연(宗衍, 신호위상장군), 19世 諱 백균(伯勻, 병마절도사), 20世 諱 자진(子進, 號 首山 = 고려 공민왕때 금위사정이며, 고려조가 조선조로 바뀌메 포은 정몽주와 두문제현에서 의리를 같이하여 나주 두곡(斗谷)에 은거하여 모든 것에 麗字를 붙쳤으며 李太祖와 태종이 수차 부르셨으나 두문종신(杜門終身)하다. 峴忠烈祿에 수록됨. 21世 諱 충손(衷孫, 훈련원참군,예조판서(不就), 22世 諱 숭문(崇文, 전주판관,사간원정언), 23世 諱 결(結, 선무랑), 24世 諱 경연(景鍊, 담양부사), 25世 諱 광건(光健), 號는 영모재(永慕齋)이며, 군자감첨정을 지내셨으며 나주(羅州) 공산면(公山面)에서 이곳 시종면(始終面)으로 이거 하셨으니, 이곳의 낙남조(落南祖)이시다. 현재 시종면 신연리를 중심으로 자손이 번창하여 50여세대가 이곳에서 생업에 종사하고 있다.
◈ 시중공의 후손들이 모여사는 靈岩郡 德津面 江亭里
-
문숙공파/시중공파/주부공파/소암공파/시서공파 일조(一祖) 만손(萬孫)이 백파천파(百派千派)로 번영함에 따라 각 종파가 형성되니 어찌 천리(天理)가 아니리요, 諱 시동 號 月湖公은 宣祖朝 정미생(丁未生, 1607년)으로 孝宗朝에 성균진사 이시니 시조 왕자공 諱 흥광(興光)의 27世孫이시고, 문숙공 諱 주정(周鼎)의 14世孫이시고, 시중공 諱 유(流)의 15世孫이시며, 조선 중기에 학행과 절의와 경륜이 높으신 유학자이신 諱 시서(市西)선생의 둘째 아드님이시다. 公께서 나주 교동(校洞)에서 영암 강정에 시거(始居)하시니 우리 강정종파의 낙남조(落南祖)이시다. 公께서 落南하신 후 나주까지의 원거리를 격일(隔日)하여 아버지의 안후(安候)를 살피시고자 왕래하시니 아버지 시서공(市西公)께서 公의 효성에 감동하시어 병인년(丙寅年, 1626년) 화사(畵師)에게 命하시어 초상(肖像)을 그려 아드님께 하사(下賜)하시며 조석(朝夕)으로 나를 보듯이 하라 하시는 命을 받들어 정중히 모셔 유전(遺傳)케 현존의 시서영당(市西影堂)에 모셔있는 도지정문화재 145호로 지정된 영정(影幀)이시고, 또한 公께서는 필법(筆法)이 출중하시어 도갑사(道岬寺)의 도선국사(道詵國師)의 신도비(神道碑) 전서(篆書) 필적(筆蹟)을 남기시고, 을묘년(乙卯年, 1675년)에 서거(逝去)하시다. 公의 孫이신 諱 일기(一麒, 贈嘉善大夫)께서는 숙종32년(1706)에 영정(影幀)을 모실 영당(影堂)을 창건하시고 매년 음 3월15일 영묘제(影廟祭)를 향사(享祀)하셨다. 근심지목(根深之木)은 풍적불발(風赤不拔)이요, 원원지수(源遠之水)는 조역불갈(早亦不渴)이란 원리와 같이 낙남이후 대과(大科)에 두 분, 소과(小科)에 네 분이 급제하시어 여러 분의 관환(官宦)이 배출되셨으니 어찌 삼한갑족(三韓甲族)의 후예(後裔)의 면모(面貌)가 아니리오, 또한 落南所蒙孫은 강정(江亭)을 중심으로 경향각지에 300여세대로 번창해 가고 있으며 각계각층에서 각기의 생업에 열중하고 있으니 어찌 앞날의 융성(隆盛)의 징후(徵候) 밝다고 아니하리오.
◈ 수사공의 후손들이 모여사는 靈岩郡 郡西面 亭里
-
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수사공파/판관공파 삼가 살펴보건데 왕자공의 諱는 興光이시다. 14世孫이신 양간공은 諱 연(璉)이요, 구명(舊名)은 중룡(仲龍)이요, 字는 기지(器之)니 고려 고종(高宗) 을해(乙亥) 1215년에 출생하시어 1255년(고종43) 시어사(侍御史)가 되어 선정하였고, 네 고을에 치척을 남겼으며 병부시랑(兵部侍郞) 추밀원(樞密院) 부사(副使)를 거쳐 형부상서(刑部尙書)에 이르렀다. 1275년(충렬왕2) 경상도 도지휘사가 되어 동정(東征: 원나라와 연합하여 일본을 정벌하는 일)할 전함 900척을 만들 때 총책임자가 되었다. 이때 어느 날 밤에 홀연히 꿈에 허리에 찬 금어(金魚: 벼슬아치가 차고 다니던 황금으로 물고기 모양처럼 만든 주머니)가 땅에 떨어지니 스스로 해몽하기를 "몸의 장식이 이미 갔으니 이제 오래 머물 수 없다."하고 사퇴하니 지도첨의(知都僉議)로 승진시키고 이어 광정대부(匡靖大夫) 첨의시랑(僉議侍郞) 찬성사(贊成事)로 치사(致仕)하고 충렬왕 신묘에 졸하니 시호는 양간(良簡)이며, 파조(派祖)이시다. 公은 성품이 순후하여 무릇 경조(慶弔)에 친소(親疎)의 구별이 없으니 이로써 찬성(贊成)이 많았다. 역사열전(歷史列傳)에 있으며 화상찬(畵像贊)과 신유년(辛酉年) 호적(戶籍)에 있다. 公의 8代孫인 諱는 국광(國光)이요, 字는 관경(觀卿)이요, 號는 서석(瑞石)이요, 金氏니 光山의 망족(望族)이다. 조선 태종 을묘년(乙卯年, 1415년)에 출생하여 무오(戊午) 1428년에 생원시에 합격했고, 신유(辛酉) 1441년 문과에 급제하여 문무재략으로 世祖의 알아줌을 입었고, 정충출기적개순성명량 경제홍화좌리공신 대광보국 숭록대부 좌의정 광산부원군(精忠出氣敵愾純誠明亮 徑濟弘化佐理功臣 大匡輔國 崇祿大夫 左議政 光山府院君)이 되었고, 경국대전(經國大典)을 편찬하였다. 五子를 낳았는데 長子는 극뉵(克뉵)이요, 次子는 극니(克泥)요, 三子는 극수(克羞)요, 四子는 극괴(克愧)요, 五子는 극침(克침)이시며, 원종공신 강화경력(原從功臣江華經歷)이다. 황강(黃岡)은 극뉵의 증손(曾孫)이요, 사계(沙溪)는 고손(高孫)이요, 신독재(愼獨齋)는 五代孫이시다. 극괴는 사계의 종고조(從高祖)이시다. 극괴(克愧)는 병술(丙戌) 1466년에 生하여 의표(儀表)가 영매(英邁)하고 지략(智略)이 과인(過人)하여 초유경제지재(超有經濟之才)러라. 上이 命하여 公의 숙부 공안공(恭安公)께서 천장재(薦將材)하라 하니 특명으로 경상좌도 수군절도사가 되었고, 수사공파(水使公)파의 파조(派祖)이시다. 公의 子, 孫, 孫子, 曾孫, 高孫은 경기도 광주 석마리(石磨里)에 안장(安葬)되었다. 公의 五代孫은 諱 익충(益忠)이요, 字는 연년(延年)이니 宣祖 1580년 경기도 화성에서 生하시어, 전남 영암(靈巖)으로 낙남(落南)하여 덕불고자(德不孤子)였는데 다행히도 삼손(三孫)을 두었고, 公의 고손(高孫)은 예성(禮聖)이요, 字는 대화(大化)요, 號는 송암(松岩)이니 肅宗 무인(戊寅) 1698년 2월에 生하여 정종 정유(丁酉) 1777년 승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陞嘉善大夫 同知中樞府事)를 역임하고 시년(是年) 7월에 卒하고, 公의 손자 諱 기양(箕陽), 字는 언직(彦直)이요, 號는 백헌(栢軒)이니, 병자(丙子) 1816년 7월23일에 生하다. 낙남조(落南祖)께서 처음 자리잡은 영암(靈巖)을 비롯하여 무안군과 강진등 각지에 산재된 인자(仁慈)하고 순직(純直)한 일가들의 호수를 살펴보면 근 450여 가구가 번창하여 벌족(閥族)한 가문을 부지(扶持)하고 있다.
◈ 문숙공 화평부원군의 후손들이 모여사는 靈岩郡 都浦面 完化里
-
문숙공파/화평부원군공파/참판공파/감사공파 전남 영암군 도포면 덕화리 1구 완화부락을 중심으로 광산김씨 문숙공파후 화평부원군(諱 石堅)의 후예 諱 자남(自南, 監司公)의 후손들이 150여호의 대성(大姓)으로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낙남조(落南祖)인 자남(自南)은 시조 왕자공의 22世孫으로 세종조 도승지, 이조참판인 諱 호(湖)의 四男으로 字는 정보(正甫)요, 세종조에 문과에 급제하여 참판, 황해감사(贈자헌대부 이조판서)를 역임하셨다. 전남 보성군 옥암면(현,보성읍)으로 이거 하셨다가, 다시 영암군 완화에 落南하시었는바, 23世 子 여화(礪華), 24世 지손(芝孫)은 지례현감, 난손(蘭孫)은 참봉의 벼슬을 지내시고, 25世 대연(大鳶)은 종부사 주부, 26世 세철(世鐵)은 진사, 27世 광수(光壽)는 참봉, 29世 상남(尙南)은 명종조 갑자(甲子)에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 첨정, 30世 기봉(起鳳)은 통덕랑, 기룡(起龍)은 훈련원 주부, 32世 후정(厚鼎)은 첨추, 33世 은지(銀芝)는 사헌부감찰, 은백(銀佰)은 진사, 35世 치규(致奎), 37世 흥현(興鉉)은 贈가선대부 등, 來來孫孫 벼슬이 끊이지 않았으며, 효자, 효부, 열녀가 속출하였고, 현세에 와서도 민수(玟洙), 용달(容達), 윤중(允中) 등 代代의 면장과 혁수(爀洙), 용규(容圭)의 부면장과 창중(彰中)은 고등학교 교장, 기타 수명의 교감, 교사, 교원 및 대중(大中), 호중(好中)은 軍고급장교인 중령 등을 배출하여 관, 경제계등 각계에 수많은 인재가 끊이지 않았다. 현재 42世 淳字가 수명이 고등학교에 재학하는등 자손이 번창하여 落南 20代에 150여 가구에 達하였으니, 1971년에는 光山下에 웅대하고 아담한 제각을 건립하고 매년 음 10월20일에는 각지가계에서 모여든 후손 100여명이 운집하여 선조에 세일사(歲一祀)를 모시는 성황을 이룬다. 자산은 문중산 15,000여평. 전답 2,000평. 매년 개간지에서 150여만원의 세입으로 자족하는 대문중이나 근세에는 농촌의 공통된 현상과 각지 직장생활로 집성촌은 40여호로 감소되었다.
◈ 시중공의 후손들이 모여사는 靈岩郡 始終面 芳頭里
-
문숙공파/밀직사사공파/주부공파/소암공파/시서공파·처사공파 시조 왕자공 諱 흥광(興光)의 24世孫은 선무랑(諱 深)이요, 장자는 諱 부성(富成)이시고, 차자는 諱 대성(大成)이시다. 대성의 子는 26世 기(琦)요, 孫은 27世 우석(禹錫)이시니, 당대(當代)에 나주 교동 서문외(西門外)에서 시종면 방두리로 이거 하시었으니, 낙남조(落南祖)이시다. 落南이래 후손이 누대에 걸쳐서 향학(鄕學)에 치중(置重)하고, 출사(出仕)를 사양하며 후학을 기르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현재 군내에는 방두리를 중심으로 130여 세대가 거주하고 있다. 시대의 변천에 따라 근대에 와서는 많은 인재가 배출되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장흥경찰서장 철수(鐵洙), 수원지방법원판사 만오(萬五), 사법고시(34회)에 합격한 광복(光福)을 들 수 있으며, 효행이 지극하여 호남 각 향교의 추천으로 효행상을 받은 故 용채(容彩)도 있다. (1994년도 기준)
◈ 문민공의 후손들이 모여사는 靈岩郡 三湖面 蘭田里
-
문정공파/문민공파/광성군공파/병조판서공파/지평공파 삼호(三湖)에 낙남(落南)한 선조 諱 원현(元鉉)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광산김씨 약사를 살펴보면 시조 왕자공의 15世孫 諱 태현(台鉉)은 字가 불기(不器)요, 號는 쾌헌(快軒)이요, 又號는 설암(雪菴)이다. 원종2년 신유(辛酉)에 生하고 1275년(충렬왕 1) 감시(監試)에 수석으로 합격, 이듬해 문과에 급제하고, 판도총랑(版圖摠郎)·우승지(右承旨)를 거쳐 1302년(충렬왕 28) 밀직부사(密直副使) 때 성절사(聖節使)로 원(元)나라에 갔다. 그때 원의 황제가 간쑤〔甘肅〕에 가 있으면서 모든 진공사(進貢使)는 연경(燕京)에서 대기하라고 명했다. 그러나 그가 황제의 명을 어길지언정 행재소(行在所)에 가는 것은 우리 군주의 명이니 어길 수 없다고 맞서자, 중서성(中書省)이 허락하여 행재소에 가게 되었다. 그의 충성을 높이 산 원제(元帝)로부터 정동행중서성좌우사낭중(征東行中書省左右司郎中)을 제수받았다. 이때 신하들이 분당하여 충렬왕과 아들(충선왕)을 이간시켜 국정이 어지러워지자, 1306년(충렬왕 32) 지도첨의사사(知都僉義司事)로 원나라에 가서 도당들의 흉계를 밝혀내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가 되었다. 충선왕의 복위 뒤 판삼사사(判三司事)를 거쳐, 충숙왕 때 평리(評理), 권정동행성사(權征東行省事)를 지내다 중찬(中贊)에 이르러 사임하였다. 충숙왕 17년 庚午 10월에 卒하니, 諡는 문정공(文正公)이요, 고려사에 나타나다. 묘(墓)는 개풍군 중면 대룡리 대야치 덕운산(開豊郡 中面 大龍里 大也峙 德雲山)에 있다. 국토가 분단되어 향화(香火)를 받들 수 없음을 후손들이 한하여 광산군 비아면에 설단하여 매년 3월 3일에 제향을 받들고 있다. 문정공의 둘째아들 16世孫 諱 광철(光轍)은 號는 둔헌(鈍軒)이다, 충열왕 31년 己巳에 문과 급제하고 삼중대광밀직사사화평군(三重大匡密直司事化平君)이시다. 충정왕 원년 己丑 6월 丙子일에 卒하니 諡號는 문민공(文敏公)이요, 고려사에 나타나다. 문민공(文敏公)의 둘째아들이신 17世孫 諱 도탁(都卓)은 천우위해령별장(千牛衛海嶺別將)을 지냈고 추성익대공신(推誠翊戴功臣) 광정대부 문하평리 상호군(匡靖大夫門下評理上護軍)에 추증되었으며 묘(墓)는 실전되어 정읍군 칠보면 무성리에 설단하였다. 18世孫 諱 계지(繼志)는 初名은 향(향), 호(號)는 송곡(松谷)이니, 조선초에 풍해도 병마절제사(兵馬節制使)에 올랐고, 병조판서겸 판의금부사 오위도총부도총제(兵曹判書兼判義禁府事 五衛都摠府都摠制) 순충보조명량공신(純忠輔祚明亮功臣)에 봉(封)해졌다. 태종조(太宗朝)에 태상왕(太上王)에게 충언 격군(忠言格君)하여 회천지공(回天之功)을 세웠다. 공의 공적을 황희의 상소로 전결노비(田結奴婢)를 하사(下賜)하였다. 선왕(先王)의 뜻을 이루었다 하여 王이 사명(賜名)을 계지(繼志)라 하시니 어사전민(御賜田民)이라는 문권(文券)을 지어 지금까지 전하여 온다. 광성군(光城君)에 봉(封)해졌다. 광성군(光城君)의 여섯째 아들 19世孫 諱 혼(渾)은 號는 무애정(無涯亭)이니 贈자헌대부 병조판서겸 의금부사요, 중종 8년 癸酉 12월 8일에 卒하였다. 묘는 무안군 해제면에 있다.
(중략)
여기 落南한 30世孫 諱 원현(元鉉)께서는 숙종때 무안군 해제면에서 삼호면 난전리 저두로 이거하여 현재 44세손이 영암, 목포, 해남, 각지에서 산재, 일가 호수를 살펴보면 약 600여 가구가 번창하여 종족이 대문중에 이르는 거족이다. 42世孫인 학순(學淳) 一名 俊植은 1985년 10월 26일 위선사업으로 중중 일가, 자손들의 헌금으로 삼호면 난전리 산1번지 선영하에 세장비(世葬碑) 제막식을 가졌으며 종중 일가화합과 종중사(宗中史)에도 명실공히 광산김씨 후손임을 부지(扶持) 거주하고 있다.
◈ 시중공의 후손들이 모여사는 靈岩郡 德津面 南星村
-
문숙공파/시중공파/주부공파/일사공파 시조 왕자공 諱 興光의 14世孫 문숙공(文肅公) 諱 주정(周鼎)이 파조(派祖)이시고, 15世 시중공(侍中公) 諱 유(流)는 중파조(中派祖)이시다. 26世孫 諱 하(河)는 曾祖 贈掌樂이시며, 27世孫 諱 해윤(海潤)은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이시고, 28世孫 諱 한발(漢發), 통덕랑(通德郞)은 父이시며, 29世孫 諱 진(璡) 절충장군 행용양위부호군(折衝將軍行龍양衛副護軍)께서 나주 교동(校洞)에서 덕진(德津) 남성촌(南星村)으로 落南하시어 世世孫孫 번창하여 남성촌(南星村)과 청림(靑林)을 中心으로 180세대가 집성촌을 이루어 융성하여 생업에 종사하고 있다.
◈ 화평부원군공의 후손들이 모여사는 靈岩郡 西湖面 會賢里
-
문숙공파/화평부원군공파/참판공파/참군공파 14世 문숙공(文肅公) 諱 주정(周鼎), 15世 충숙공(忠肅公) 諱 심(深), 16世 화평부원군(化平府院君) 諱 석견(石堅), 17世 諱 수(粹), 18世 諱 조간(祖간), 19世 諱 질(質), 20世 諱 사무(師武), 21世 諱 호(瑚), 22世 諱 자용(自庸), 23世 諱 당(?), 24世 諱 이필(利弼), 25世 諱 희문(希文), 26世 諱 현(鉉), 27世 諱 시형(時亨), 28世 諱 인(仁), 29世 諱 천복(千輻), 30世 諱 치영(致永), 31世 諱 진후(震후). 서호면(西湖面) 회현(會賢)에 落南하신 입향조는 贈가선대부 29世 諱 천복(千輻)이시며, 묘는 성전(城田)이다. 현재 회현(會賢)을 중심으로 60여 가구가 집성촌을 이루며 생업에 충실히 종사하고 있으며, 종족(宗族)간의 화목(和睦)과 상부상조(相扶相助)함은 타의 모범이며, 특히 장래를 위하여 육영사업에 치중하고 있다.
◈ 시중공의 후손들이 모여사는 靈岩郡 西湖面 西湖里
-
문숙공파/시중공파/ 시조 왕자공의 14世 문숙공(文肅公) 諱 주정(周鼎)의 三男 시중공(侍中公) 諱 유(流)의 후예 29世 諱 종선(從善)은 인조조에 진사를 하였으며, 落南中祖로 현 나주시 보산동에서 이거 하시었다. 그 후 자손이 일익(日益) 번창하여 31世 諱 인경(仁景)은 무과에 급제하여,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32世 諱 책(柵)은 통정대부 첨지중추부사(通政大夫僉知中樞府事)를, 33世 諱 석준(碩俊)은 영조조에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를, 36世 諱 상호(相鎬)는 장릉참봉(章陵參奉) 통훈대부 행의금부도사(通訓大夫行義禁府都事)를 역임하면서, 오늘에 13代에 300여년을 이어오면서 영암을 중심으로 인근 해남, 목포등지에 100여 가구가 경향 각지 각계에서 번창하여 활동하고 있다.
◈ 판교공의 후손들이 모여사는 靈岩郡 都浦面 回湖亭·始終面 錦城里
-
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판교공파/개령현감공파/ 우리 영암에 종친 일가가 단결하고 화목하게 거주하고 있는 도포(都浦), 시종(始終)에 처음 落南하신 諱 행저(行著), 재저(再著)의 행장(行狀)을 살펴보면 시조 왕자공 30世孫이며, 양간공(良簡公) 諱 연(璉)의 17世孫이시다. 선조 양간공 9世孫이신 판교공(判校公) 諱 경광(景光)께서는 세종 30년 문과에 급제하여 군기시정겸 교서관판교(軍器寺正兼校書館判校)요, 子 諱 극흔(克 )은 성종때 진사시에 합격하여 행개령현감(行開寧縣監)이요, 孫 諱 방윤(芳胤)은 승원랑(承院郞)을, 曾孫 諱 정한(廷翰)은 중종때 병절교위(秉節校尉)요, 高孫 諱 선휘(善輝)는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역임하고 통정대부 승정원좌승지(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를 贈職하였으며, 판교공 6世孫 종길(宗吉)은 문원공(文元公) 사계(沙溪) 문하생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통덕랑(通德郞)이요, 그의 孫(판교공 8世孫) 諱 석찬(碩璨)께서는 配人 해주오씨(海州吳氏)사이에서 落南祖 諱 행저(行著), 재저(再著) 형제를 출생하셨는데 당시 본거지 충남 논산과 연산에서는 광산김씨 자손이 득성(得姓) 융성(隆盛)하고, 국가민족의 발전에 기여한 인물 또는 안정과 평화에 공헌하고 문화창달 및 제반 학자가 수없이 배출되어 찬연히 명문종친의 전통을 이어받아 충효로써 고향에서 거주하셨습니다. 추모숭배한 선대 조상과 유가(儒家)의 가문을 논산, 연산에 두고 판교공의 9世孫(行著, 再著) 형제분께서 도포(都浦)와 시종(始終)으로 落南하셨습니다. 諱 행저(行著) 선조께서 配人 동래정씨(東萊鄭氏)사이에서 四子를 출생하여 이때부터 자손이 번성하기 시작하고, 인근 신북(新北), 도포(都浦), 시종(始終), 나주(羅州)에 산재하여 거주하고 있으며, 동생 재저(再著) 선조께서 配人 동래정씨(東萊鄭氏) 사이에서 二子를 두고 시종, 도포, 나주를 세거지로 후손이 거주하고 있으며, 諱 행저(行著)의 11世孫 선중(善中)이하 자손과, 諱 재저(再著)의 11世孫 희중(喜中)이하 제자손이 선조의 훈업(訓業)과 명문의 긍지로 매사에 신중(愼重)하며 화목하게 거주하고 있습니다. 落南祖께서 처음 자리잡은 도포면 회호정, 완산, 구학, 시종면 금성리, 신북면을 비롯 인자하고 순직(純直)한 落南후예 일가 호수는 약 150여 가구로 벌족(閥族)한 가문을 부지(扶持)하고 있다.
◈ 예조판서공의 후손들이 모여사는 靈岩郡 靈巖邑 農德·角洞
-
문숙공파/예조판서공파/정읍공파/ 신라 왕자공 諱 興光의 14世孫 문숙공(文肅公) 諱 주정(周鼎)은 고려 충렬왕때 출장입상(出將入相)하여 많은 功을 세웠다. 16世 諱 승노(承魯)는 예조판서(禮曹判書)를 지내셨으며, 중파조(中派祖)이며, 17世 諱 방(倣)은 조선초에 좌찬성(左贊成)을 지내고 김제 벽골제, 광주 경양박죽을 축조하였고, 18世 諱 문발(文發)은 관찰사(觀察使), 19世 諱 추정(趨庭)은 초계군수(草溪郡守), 20世 諱 학례(學禮)는 내자시직장(內資寺直長), 21世 諱 원(瑗)은 정읍현감(井邑縣監), 29世 諱 우화(愚華)는 숙종 을해(乙亥)에 별시 병과에 급제하여 부사(府使), 30世 諱 담(담)은 숙종 계사(癸巳)에 증광방(增廣榜) 병과에 급제, 31世 諱 덕현(德鉉)은 長子요, 후손은 전북 완주에 거주하고 있으며. 次子 諱 복현(福鉉)系 후손이 영암읍(靈巖邑) 농덕리(農德里) 및 각동(角洞)을 중심으로 70여 가구가 집성촌을 이루며 거주하고 있다.
◈ 의랑공의 후손들이 모여사는 靈岩郡 西湖面 太白里
-
문정공파/의랑공파/목사공파/양산공파 낙남조(落南祖) 諱 용범(龍範)은 시조 왕자공의 15世孫인 의랑공(議郞公) 諱 광식(光軾)의 15世孫으로 영조2년(1746)에 나주에서 生하시었으며, 字는 기연(箕連)이며, 號는 청송(靑松)이라. 父는 숙기(叔起)이며 母는 밀양박씨이다. 公이 어려서부터 효행(孝行)이 극진(極盡)하고 덕행(德行)이 뛰어났음이 훌륭한 조상님의 德이라. 12代祖인 옥하(玉河)는 목사(牧使)를 지내셨으며, 11代祖인 효근(孝根)은 문과에 급제하여 양산군수(梁山郡守), 10代祖 선(璿)은 직장(直長), 9代祖 세공(世恭)은 성종6년(甲午)에 동방생원과에 3등 47인으로 합격하시어 학문과 덕행으로 이름이 높았다. 8代祖 천손(千孫)께서는 영월교수(寧越敎授)를 지내셨으며, 5代祖 성복(成福)은 참봉(參奉)을 비롯하여 집안에 글읽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특히 公은 태백(太白)으로 落南하시어 상호(相湖),상진(相振)을 두셨으니 부모님께 효도하고 열심히 수학하여 지릉참봉(智陵參奉)을 지내셨다. 公은 이후로도 많은 훌륭한 후손을 배출하셨고, 현 태백에서 落南祖의 9代孫이 살고 있으며 100여호에 이르는 후손이 있으나 무안 등 모두 도시로 이거하고 태백에는 3가구, 그리고 서호에는 6가구가 落南祖의 脈을 이어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