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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어사 강원 무비스님의 증도가 강의(11)
오늘 『증도가』가 이제
吾早年來積學問하야
(오조연래적학문하야)
나는 일찍부터 학문을 많이 쌓아서
오조연래적학문(吾早年來積學問)하야 여기부터 할 차례인데 영가스님도 천태학에 굉장히 밝았고, 유학도 많이 했고, 그래서 ‘내가 일찌기 오면서 학문을 쌓았다’ 그래요. 학문을 쌓았다, 그래서 공부를 이제 경학 공부를 아주 많이 했습니다.
그러다가 이제 선에 눈을 떠가지고 선종으로 오게 됐지.
그래서 이제
亦曾討疏尋經論이로다
(역증토소심경론이로다)
소초도 찾고 경론도 찾아 헤맸다.
역증토소심경론(亦曾討疏尋經論)이라, 또한 일찍이 토소(討疏) 소(疏)를 찾고 경론(經論)을 찾았다, 소는 경론을 해석한 걸 소라 그러고 또 논도 거슬러 올라가면 경을 해석한게 또 논이고, 이제 그런 것을 뭐 여러분도 강의 시간에 선론이니 종론이니 그런 이야기는 충분히 공부 했을 줄로 믿습니다.
영가스님이 그렇게 경학을 공부하고 또 거기에 또 해석한 것을 또 공부하고 거기서 해석에 또 해석을 붙인 것, 뭐 소 초, 이래쌌지. 그런 것들을 또 공부해서
分別名相不知休라
(분별명상부지휴라)
명상을 분별하기를 쉴 줄을 모른 것이
분별명상부지휴(分別名相不知休)라, 명상(名相)분별하는데 쉴 줄을 몰랐다. 이름과 형상, 그러니까 말하자면 무슨 오위칠십오법(五位七十五法)이니 오위백법(五位百法)이니 십신(十信), 십주(十住) 십행(十行) 십회향(十廻向)이니 온갖 보살 지위점차니 무슨 우법소승(愚法小乘)이니 대총상법문(大總相法門)이
니 별의별 그런 그 무슨 사선팔정(四禪八定)이니 등등 그 우리 교학이 얼마나 발달 했어. 불교의 교학은 참 발달했거든요.
그래서 그런 법수(法數), 행상(行相)이라 할까 이런 것들이 너무 많다고. 이 스님도 일찍이 그런 데 관심을 가지고 아주 열심히 이제 그런 공부를 했다 이거죠.
또 물론 공부할 때는 또 그런 공부를 해야지요. 그래서 그런 일이 마치
入海算沙徒自困이라
(입해산사도자곤이라)
바다에 들어가서 모래를 세는 격이라 스스로 피로할 뿐이었네.
입해산사도자곤(入海算沙徒自困)이야, 마치 비유컨대 바다에 들어가 가지고 모래를 헤아리는 거와 같아.
그러니까 바다 속에 들어가서 그 많은 모래를 헤아리면 그 얼마나 피곤하겠어요? 또 어찌 그걸 또 다 헤아릴 수가 있나? 어차피 헤아릴 수가 없는 거예요 그거는.
왜냐? 이런 그 어떤 법수 행상을 쪼개고 분석해 내는 일이 끝이 없으니까 그래.
장경 안에 있는 것이 끝이 아니예요. 그것을 또 분석하고 또 분석하고 또 해석하고 해석에 또 해석을 더하고 이런 식으로 해 나가기로 하면은 끝이 없다고.
마치 바다 속에 들어가서 모래를 헤아리는 거 하고 조금도 다를 바가 없더라. 도자곤이라 한갖 스스로 피곤할 뿐이더라.
우리가 지금 학인 입장에서 이렇게 입해산사도자곤의 이런 삶을 살고 있어요. 일단은 그렇게 하는 게 또 우리 입장에선 바람직해. 그래서 그 다음에 이제 사교입선(捨敎入禪)이라.
교를 버리고 선에 이제 들어가는 것, 이 영가스님이 아주 그런 절차를 아주 제대로 밟은 입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것을 나중에 다 버리고 정말 선의 경지에 이제 들어가는 그런 순서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却被如來苦呵責하니
(각피여래고가책하니)
도리어 여래의 아주 호된 꾸지람을 듣고 보니
각피여래고가책(却被如來苦呵責) 수타진보유하익(數他珍寶有何益)가, 그렇게 하는 것이 종지를 추리지 못하고, 근본 취지를 깨닫지 못하고 그렇게 문자만 쫓아가는 것이, 어찌 보면은 여래로부터 아주 심한 꾸지람을 입은 것이다.
도리어 여래로부터 심한, 고(苦)자는 아주 심한 꾸지람을 들은 것이다, 부처님이 나타나서 꿈결에 나타나서 꾸지람을 한 것이 아니라, 생각해 보니 참 부처님한테 미안하고 부끄럽다 이거야.
부처님의 그런 마음은 그것이 아닌데 그렇게 뭐 이 잡듯이 문자 헤아리는 것이 본래의 취지가 아닌데 그렇게 하고 있다 이거야.
數他珍寶有何益가
(수타진보유하익가)
다른 사람의 보배를 세는 격이라 나에게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수타진보(數他珍寶)라 유하익(有何益)가 다른 사람의 보배를 세는 일이라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이게 이제 『화엄경』에 자주 나오는 이야기죠.
수타진보유하익(數他珍寶有何益)가, 다른 사람의 보배를 세는 것이다, 나에게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이쯤 돼야 돼요. 우리가 공부하는 게, 문자상으로 공부하는 일이 이쯤은 되어야 내 마음에 이렇게 이제 이런 차원이 돼야 돼요. 그래서
從來蹭蹬覺虛行하니
(종래층등각허행하니)
예전에는 걸음을 제대로 걷지 못하여 헛되게 행했음을 깨달으니
종래층득각허행(從來蹭蹬覺虛行)하니 다년왕작풍진객(多年 枉作風塵客)이로다, 종래(從來) 그동안, 층등(蹭蹬)하는 것은 제자리 걸음 비척거리면서 제자리 걸음하는 거죠.
비척거리면서 헛된 수행을 함을 깨달았다. 그러니까 딴에는 수행을 잘 하느라고 했는데 그게 헛된 수행임을 알게 되었다. 그것을 이제 오늘날 알게 되었다. 그리고 생각해보니
多年枉作風塵客이로다
(다년왕작풍진객이로다)
오랜 세월동안 잘못되게 풍진객이 되었더라.
다년동안 오랜 세월동안 풍진객(風塵客)을 그릇 지었더라 풍진객, 그러니까 집에 돌아와 안식하지 못하고 객으로 돌아다니면서 온갖 고생 다 하면서 그렇게 나그네 생활을 했다.
그러니까 그야말로 한 생각 돌이켜서 이 마음 하나 제대로 챙기면 되는데 쓸데없이 밖을 향해서 쫓아다녔다 그래요.
임제스님의 법문 중에 가장 많은 것이 ‘밖을 향해서 돌아다닌다’ 자기 자신은 돌아보지 아니하고 밖을 향해서 돌아다닌다. 바깥에 무슨 문자나 뭐 온갖 그런 그 무슨 천불, 만불, 무슨 천보살 만보살 얼마나 많습니까?
천불 만불 천보살 만보살 그 경전에 나타나는 수많은 부처님과 수많은 보살들 수많은 성인들의 이름, 이게 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해서 우리에게 소개된 것이지. 그런데 그것을 가지고 쫓아가는 거야. 거기에.
거기에 쫓아가는 거라. 그야말로 참 풍진객이지.
밖으로만 나돌아 다닌다.
우리는 다행히 이제 대승불교 그리고 선불교 까지 이렇게 겸해서 공부하게 되는 그런 처지에 있기 때문에 보통 다행이 아니야. 그래서 우리는 문자로 공부를 하더라도 그런 그 종지, 근본 취지를 잃어버려서는 안 되는 거라, 근본 취지를.
그러니까 늘 우리가 이 한 마음 제대로 깨달으면은 그 속에 모든 것이 다 포함되어 있다.
‘관심일법(觀心一法)이 총섭제행(摠攝諸行)이라’ 그게 이제 우리 선문의 대강령이라.
마음하나 제대로 관조하는 것, 그것이 모든 수행을 다 그 속에 포함하고 있다 이렇게 보는 거예요.
선문의 가장 큰 취지가 그거라. 그러니까 선문은 간결한 거야. 선의 취지는 아주 첫째 조건이 간소야.
우리 지금 설선법회를 하고 있지만은 선의 그 조건이 있어요. 이 선을, 선에 대해 감이 안 오니까, 선(禪)하면 선에 대한 감이 착 와야 되거든.
예를 들어 우리가 강원생활에 몸에 이렇게 딱 배어 있잖아. 그럼 강원생활이 몸에 배면 강원 하면 강원에 대한 감이 오는거야, 우리가 어디 가서도.
선하면 선에 대한 감이 탁 안오고 선을 이야기 하려고 하니까 거기 이제 가서 보라고. 내일 보겠지만은, 무슨 큰 오색 찬란 휘황 찬란한 그런 탱화를 걸어놓고, 무슨 큰 행사하듯이 이렇게 현수막이 나부끼고 얼굴을 찍어 가지고 그렇게 해놓고, 이거는 여러분들 보기에 어때요, 감이?
이건 선과 선 아닌 것을 우리가 분별하는 제일관이라.
뭐하기 좋아요 지금은? 보제루 가서 그 꾸며 놓은 걸 보고 무얼 하기가 딱 좋은지. 선에 대해서 우리가 모른다 하자, 몰라도 그런 상황이 과연 선을 연출하는 것이냐, 딱 무당 푸닥거리 하기 좋잖아. 그 색깔하며 그리고 그 나부끼는 현수막하며 그건 선하고는 180도로 먼 거예요.
선에 대해 감이 안 오니까, 선을 대중들에게 알려 주고는 싶은데 선에 대해서 전혀 감이 안 오니까 막 그냥 자기 상식대로 꾸미는 거야. 그거 선 하고는 정 반대로 가고 있는 거지.
거기서 무당이 춤추기 딱 좋도록 꾸며놓고 선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야.
여러분들이 이런데 내가 이런 이야기를 비판 같이 들릴지는 모르지만은 이런 것을 집어 줘야 알 수가 있는거야. 분별할 수 있는 거지.
선은 이 저기 저 어떤 선문을 보더라도 어떤 제대로 된 선사의 삶을 보더라도 아주 간소해. 깔끔해.
깔끔하고 간소한 게 첫째 조건이라.
간소(簡素), 이 간단할 간(簡)자야 그리고 소박할 소(素)자. 아주 간단명료하고 아주 소박하고, 본래 모습 그대로, 전혀 꾸밈이 없는 본래의 모습.
첫째 조건이 간소야. 그래서 분위기가, 착 고렇게 그래서 선방에 가면 그렇다고요. 선방에 가면 간소하잖아 분위기가. 우리 강원도 거의 그런 분위기지만은.
그렇게 너덜너덜하게 무슨 덕지덕지 그런 어떤 그 사람의 마음이 붙어있고, 사량분별이 붙어있고, 탐진치 삼독이 붙어있고, 그렇게 지저분한 그런 어떤 의식이 표현이 되면 그건 선이 아니지. 선은 그런 게 아니야.
첫째 조건이 간소야.
그래서 옛날 스님들은 으레이 선법문 하면은 주장자 한 번 딱 이렇게 올린다던지 딱 친다든지 그래서 끝내잖아. 그리고그 외 것은 이제 말하자면은 군더더기라.
군더더기라고 하고 이야기 한다고. 이야기 할 때 ‘이거는 아니다, 이거는 군더더기지만은 하는 수 없어서 한다’ 선사스님들의 어록을 보면 꼭 그런 식으로 되어 있어요.
선 그렇게 하면 선에 대한 감이 와야 돼. 그리고 그 감에 의해서 연출을 해야 된다고 분위기도 그렇게 하고.
그리고 뭐 사회하는 데도 보면은 예를 들어서 죽비하나 치면 딱 될텐데 ‘무슨 선원에 뭐 무슨 소임을 맡고 있는 어떤 스님이 죽비 삼성으로 입정하겠습니다.’ 이런 군더더기가 세상에 어딨냐? 그게 무슨 선이냐? 그냥 죽비 딱딱 치면 입정할 줄 세상에 누가 모르겠어?
그런데 ‘어느 선방에 있는 어떤 스님이 이름도 뭐고 소임도 뭐고 그런 스님의 죽비 삼성으로 입정에 들겠습니다.’ 이거 싹 추려버려야 돼.
죽비만 딱딱 세 번 치면 그대로 딱 입정에 든다고.
요걸 한 번 우리가 분별을 해가면서 ‘아, 선이 이런 것이구나. 최소한도로 선의 정신이란 것은 이런 것이구나’ 하는 것을 조금 힌트를 얻을 수 있을 거예요. 참석해 보신 분들은 알거라. 뭔가 그게 안 맞는 것을 못느껴? 느낄 수 있잖아.
‘아, 저게 아닌데?’ 싶은 그런 감이 온다고.
그런데 이런 것을 내가 집어주는 이유가, 이런 것을 통해서 뭔가 정확한 그런 선의 정신을 어느 정도 이해하라고. 또 이런 기회가 아니면 또 이야기할 기회가 없죠. 그래서 이제 이야기 드리는 거예요.
그거 우선 사회 좀 보라고. 선법문 한 사회가 그렇게 해야 되는가? 전혀 안맞는 거야. 선하고는 180도 먼 거라.
그리고 그렇게 분위기를 그렇게 연출해 놓으면은 그건 선하고는 거리가 먼 거야. 간소해. 첫째 간소해, 첫째 조건은.
아주 간단명료하고 소박해야 돼.
그러면은 처음에 딱 보고도 아 이거 뭔가 어딘가 분위기가 다르다. 느낌이 다르다. 선을 조금 느끼고 가는 거야 사람들이. 그리고 뭐 이렇게 사회하는 것도 그렇고, 진행하는 것도 그렇고 모든 게 선의 원칙이 있는데 그 원칙에서 맞도록 그렇게 하는게 바람직한 거지.
구지선사라고 평생 손가락 하나 딱 세웠다잖아. 손가락 하나 세운 것으로써 평생 공부를 삼고 평생의 가르침을 삼은 그런 이들을 우리가 너무 좋아가지고 내 그냥 입만 벌였다면 구지선사 구지선사 일지선사 일지선사 손가락 하나 선사 그러거든? 그걸 우리가 좋아하는 이유가 있어. 우리들도 모르게 선의 정신은 저런 것이다. 그 손가락 하나 얼마나 간결해? 얼마나 간단명료해?
그러면서 거기에 아주 엄숙한 것이 있고, 유현한 깊이가 있고, 또 거기에는 아주 높고 높은 위엄이 또 그 속에 포함되어 있다고. 이런 게 선이야. 선의 뭐 그게 모두가 선이라고 하기는 그렇지만 어쨌든 선의 한 맛이라.
선의 분위기를 우리가 이해하려면은 이제 그런 거라.
그런데 이제 좀 우리가 선을 좀 대중들에게 좀 이해시키고 느끼게 하고 맛을 보게 하려면은 좀 이제 그런 것을 연구를 하고 그래야 되는데 의욕만 앞서고 선이 뭔지 전혀 감이 안 잡히는 사람이 선을 이제 연출하려고 하니까 그런 일이 생기는 거야. 그러니까 앞으로 여러분들은 그런 행사를 하더라도 좀 이제 생각을 해서 하는 게 바람직한 거죠.
여기 이제 그런 잡다한 학문 많이 아는 것이 전부 이렇게 수타진보라. 또 풍진객을 짓는 일이다.
풍진객, 풍진객(風塵客)이라는 표현이 아주 그럴 듯 하네요. 여기저기 칠랑팔랑 이리 다니고 저리 다니면서 이리 바람 쏘이고 저리 바람쏘이면서 그렇게 바깥으로 쫓아다니는 어떤 그런 것.
아주 간단명료한 거죠 사실은, 그런데 이제 이렇게 살았다.
種性邪 錯知解여
(종성사 착지해여)
종성이 삿되고 그릇 알고 있었음이며
종성사 착지해(種性邪 錯知解) 부달여래원돈제(不達如來圓頓制) 성품에 삿된 것이 심고 이런 식으로 이제 해석을 하더라고요. 종성(種性)이 삿되고 이렇게도 해석을 해.
종자성품이 삿되고 그릇 알며 이렇게도 해석을 해오는데 반대로 성품에 삿된 것을 심고 알음알이를 그르치며 아는 것을 그르치며 어쨌든 뭐 새기는 순서는 이래 새겨도 맞고 저래 새겨도 맞는데 그 성품이 잘못 되고 알음알이가 우리 아는 것이 지혜가 잘 못 되어 있다.
不達如來圓頓制로다
(부달여래원돈제로다)
여래의 원만한 법을 통달하지 못했더라.
그래서 여래의 원돈제(圓頓制)를 통달하지 못했음이로다 그 말이예요. 여래의 원돈제라고 하는 것은 원돈교 원돈제 원돈이라는 말을 자주 쓰지만은 교학상의 원교 돈교가 아니라고 하는 말을 이제 드렸죠.
아주 원만하고 한꺼번에 되는 일시적으로 되는, 일거에 다 되는 그런 어떤 법을 통달하지 못했다.
관심일법 총섭제행 마음하나 제대로 관찰하면은 모든 수행이 그 속에 포함된다 그거거든. 그게 원돈제라 여래의 원돈제. 그래서
二乘精進勿道心이요
(이승정진물도심이요)
이승들의 정진은 도의 마음이 아니요
이승정진(二乘精進)은 물도심(勿道心)이요 외도총명(外道聰明)은 무지혜(無智慧)라
이승들 성문 연각들의 정진은 도심이 아니다. 도심이 아니다, 그러니까 영가스님이 말씀하고 있는 그런 어떤 경지가 못 되는 것을 이제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이승들은 예를 들어서 무슨 연기법이라든지 그다음에 무슨 기껏해야 어떤 공성(空性) 공(空) 무상(無常) 무작(無作) 그런 경지에 이르지 그 이상의 것은 모르는 상태니까.
이런 것을 가지고 우리가 조금 이끌어내려 가지고 생각 한다면은 세속 사람들이 불교에서 무얼 바라겠어요?
뭐든지 얻어가려고 하는 거야. 얻어가려고 하는 것이 속인들의 불교에 바라는 거야.
그런데 불교는 뭐냐? 불교는 버리는 것이야. 또 비우는 거라고. 그런데 속인들은 불교에 와서 채워가려 하고 얻어가려고 하는 거라.
내- 목탁 그냥 죽어라고 쳐쌌고 그냥 목이 쉬어라고 관세음보살 불러쌌고 하는게 얻으려고 하는 거야. 비우려고 하는게 아니라고.
그런데 부처님은 우리가 그동안 공부해 온 짧은 지식만 가지고도 가만히 들여다보면 뭐라? 비우는 거고 버리는 거지 얻는 게 아니라. 정반대의 길을 가고 있더라고.
그래서 이승정진은 물도심이라는 것도 그런 뜻이라. 이승들의 잘못된 소견은 도심이 아니다 이거지.
전부 얻으려고 하고 가져가려고 채우려고 하고 하는데 사실은 부처님은 비워라 비워라 버려라 버려라 버리고 비워라 버리고 비워라 이거지. 버리고 비움으로써 행복을 찾으려고 하라는 거지 얻어서 채워서 하려고 하는게 아닌데 신도들은 뭐예요? 전부 와서 얻으려고 하고 채우려고 한다고.
이거 얼토당토 않게 우리 살아가고 있어 사실은. 또 그걸 충동질하고 우리 스님들은, 스님들이 그거 계속 충동질하는 거야. 하라고 하면 된다고, 하면 얻는다고. 그게 어디 불교인가? 불교는 그게 아니잖아.
우리 그동안 공부해온 것만 가지고도 충분히 분별할 수 있잖아. 이참 그거 우리가 알고 보면은 참 난감한거야 이게. 보통 갈등이 아니라고.
계속 얻으러 오는데 우리들은 그거 따라가서 충동질을 해야 옳은지 아니면은 진실을 말해야 옳은지.
부처님은 비우라 하고 버려라 하고 그런데 얻으러 오는 사람 뻔히 눈에 보이는데 그거 어떻게 비우라 하겠어, 어쩌겠어. 그러니까 근기 따라서 하다보니까 계속 이제 충동질 하는 거야. 그래갖고 많이 얻으라 하고 많이 채우라 하고 같이 이제 밀어붙이는 거지.
우리는 어차피 프로니까. 불교 안에서 승려는 프로기 때문에 프로는 프로정신을 가지고 있어야 되고, 프로는 정확하게 알고 있어야 돼. 정확하게는 알고 있어야 된다고.
그걸 내 마음에 맞아서 그대로 우리가 실천하느냐 안하느냐는 하는 것은 그거는 그다음 문제고 프로는 알고는 있어야 돼.
속인들은 채우러 왔는데 부처님은 줄 게 없어. 사실은 줄게 없어. 부처님은 그 얻으려고 하는 거 버려라, 얻으려고 하는 마음 버려라. 여기는 채우는 데가 아니고 비우는 데다. 여기는 비우는 데다.
우리 『초발심자경문』에도 그거 있지.
‘기인(幾人)이 득도공문(得道空門裏)이어늘’ 텅빈 문에서 도를 얻었다 그랬잖아. 득도공문이라.
여기는 비우는 데지 채우는 데가 아니라고요 그런데 채우러 온다고요 전부. 야 그 참 보통 문제가 아니예요 우리가.
그거 바른 소리를 해주려고 하면은 그 사람들은 이해를 못하니까 섭섭해 하고, 그래서 이제 아휴 그 사람 생각하고 그래 채우세요 채우세요. 가서 기도하면 채워집니다. 채우세요 채우세요. 지금 우리가 이러고 있어요.
사실은 부처님 마음은 비우는 건데, 버리는 것이고 비우는 것인데.
이승이니 여기 외도니 하는 것이 다 이제 우리가 불법의 본령에서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
그래서 이제 이승정진(二乘精進)은 물도심(勿道心)이요
外道聰明無智慧라
(외도총명무지혜라)
외도는 아무리 총명해도 지혜가 없는지라
외도총명(外道聰明)은 무지혜(無智慧)라 그래요.
외도들이 총명한 것은 지혜가 없는 것이다, 지혜가 아니다 이거야. 아무리 총명해야 그거는 지혜가 아니다. 이럴 때는 지혜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지혜가 아니다 도심이 아니다 지혜가 아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亦愚癡 亦小騃니
(역우치 역소애니)
어리석고 어리석고 또 어리석으니
역우치역소애(亦愚癡 亦小騃) 공권지상생실해(空拳指上生實解) 역우치역소애(亦愚癡 亦小騃) 또한 우치한 것이고 어리석은 것이고. 또한 소애(小騃) 놀랄 애(騃)자라.
어리고 그저 말하자면은 놀라운 그런 그 작은 것에도 놀라는 그런 아주 마음이 좁아서 작은 것에도 이제 놀라는 그런 상태다.
空拳指上生實解로다
(공권지상생실해로다)
빈주먹에 안에 무엇을 가지고 있다고 잘 못 알았네.
공권지상(空拳指上)에 생실해(生實解)라, 우리가 하는 일이 빈주먹, 어린 아이들 우리가 속일 때 그러지, 짤짤이라고 하나 그거 하다가 아무것도 없으면서 ‘몇 개?’ 이런다고.
손에 아무것도 없으면서 ‘몇 개?’ 그러면 몇 개냐고 하는 거기에 함정이라. 그러면 ‘두개다, 짝이다 홀이다’ 이렇게 하잖아, 손에는 아무것도 없으면서.
그래 여기는 공권지상에 빈 주먹에서 실(實) 안에 차있다고 찰 실(實)자야. 안에 뭐가 있다고 하는 이해를 낸다.
‘실다운’ 그렇게 해석을 하는데 그건 잘못된 해석이야. 차 있다는 이해를 낸다.
빈주먹에서 안에 뭐가 있다고 하는, 있다고 하는 이해를 낸다 그러면 돼. 실(實)자가 있다는 뜻이니까.
빈주먹에서 있다고 하는 이해를 낸다, 그렇잖아.
사실은 없는 이치에 순종하는 것이 불교인데 자꾸 얻으려고 하고 채우려고 하고 그러지.
『서장』에도 ‘단원공제소유 절물실제소무(但願空諸所有 切勿實諸所無)라 ’ 단원공제, 그것도 이제 없는 것을 가지고 채우려고 하지 말라 그렇게 해석을 하는 거죠.
執指爲月枉施功하고
(집지위월왕시공하고)
손가락을 집착하여 달을 삼으니 그릇 노력을 하고
집지위월왕시공(執指爲月枉施功)이라, 손가락을 가지고 달을 가리키는데 손가락을 집착해 가지고 저게 달인가 보다 이래 생각을 해가지고는 그릇 공을 베푸는 것이다.
손가락이라고 하는 말은 방편이라는 말입니다. 방편과 실법 그렇게 알아야 돼요.
방편과 실법 이렇게 해야 되는데, 요즘 수좌들이 어떻게 되어가지고 손가락 달, 손가락의 입장 달의 입장 그 말만 쓰지 방편이다 실법이다 이런 말을 안 쓰더라고? 어떻게 되어가지고? 손가락의 입장이고 뭐 달의 입장이고 내 그 말만 쓰는 거야.
저게 언제 실법이라는 소리와 방편이라는 소리가 나올까 이렇게 기다려봐도 도대체가 안 나와.
손가락이라는 말은 방편이라는 뜻이고 달이라는 말은 실법이라는 뜻이야.
그러니까 방편을 가지고 실법으로 삼아가지고서 그릇 공을 베푸는 거라. 공 베푸는 일이 무슨 육바라밀, 솔직하게 이야기 하면 육바라밀 닦는 일이 그렇게 공부가 아니야. 그건 방편이라고. 하는 수 없어서 하는 방편이라. 좌선도 마찬가지고 일체법이 다 그래.
그러면 실법이 뭐냐?
실법은 우리가 스스로 증득했을 때 그게 정확한 답이 나오는 거야. 자기가 증득하기 이전에는 뭐라고 뭐라고 실법을 이야기 하고 설명을 하고 해도 그것은 수박겉핥기예요. 그렇게 알아야 돼.
실법 뭐라고 뭐라고 설명해도 아무리 설명을 잘 해도 그것은 방편이지 실법은 아니야. 실법은 자기가 체험한 거예요. 다시 말해서 사과맛을 본거지.
사과맛을 아무리 설명해 봐야 그것은 방편이라.
실법은 자기가 사과맛 본 그 맛, 그 사실이예요.
맛을 본 그 사실이 실법이고 그 외에 건 전부 방편이라고요.
집지위월왕시공(執指爲月枉施功)이라 사과 설명을 아무리 해봤자 그것은 소용없는 일이다. 왕시공(枉施功) 그릇 공을 베푸는 것이고
根境法中虛捏怪로다
(근경법중허날괴로다)
육근과 육경의 법 가운데서 헛되이 눈을 비비도다.
근경법중(根境法中)에 허날괴(虛捏怪)라.
근경진중(根境塵法中)에라고 이렇게 성철스님 본에는 그렇게 이제 진(塵)자로 되어 있는데 그건 경(境)과 진(塵)이 같은 뜻이기 때문에 법(法)자가 오히려 더 가까워요.
육근과 육경의 법 가운데서 그것을 이제 어떤 하나의 이치로 이제 보고 육근과 육경의 이치 가운데서 헛되이 괴이한 짓을 한다.
날괴(捏怪) 날(捏)자는 눈을 눌러가지고 허공에 없는 꽃을 보는 것을 날이라 그러고 그것을 이제 어떤 괴이한 사실로 보기 때문에 그거를 합해가지고 헛되이 괴이한 짓을 한다.
그러니까 실법을 보려고 안하고, 눈에 보이는 어떤 대상과 보는 것과, 이런 그 육경과 육근의 이치에서 거기에서 모든 것을 해결하려고 한다.
수행을 그렇게 이해하고, 그렇게 이해하고 수행을 하니 그것이 그릇 공을 베푸는 것이다 그 말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빈주먹에서 뭔가 있다고 어린아이들 속일 때 하는 식으로 그런 식이다.
참 불법의 이치를요, 우리가 좋아서 공부는 하지만 참 이게 아무나 이해할 수 있는 게 아니예요 이건.
아무나 맛 들일 수 있는 공부가 이게 아니라고요 불교가.
없는 이치에 재미를 느껴야 되는데 없는 이치.
하나하나 이렇게 쌓아가고 발전하고 이렇게 정진하고 하는 것, 거기에 재미를 느끼는 것이 아니라.
아예 없는 데서 재미를 느끼는 그런 공부라. 그래서 이제 그 참 쉬운 일이 아니라고.
세속적인 일은 하나하나 하면은 그게 쌓여가고 발전하고 늘고 그러는데 이 무위법이라고 하는 것은 전혀 그거하고 다르기 때문에 제대로 맛을 느끼기가 참 그 쉬운 게 아니라고.
不見一法卽如來니
(불견일법즉여래니)
한 법도 보지 않는 것이 곧 여래이니
불견일법(不見一法)이 즉여래(卽如來)니 방득명위 관자재(方得名爲觀自在)라 참 기가 막힌 말 아니야?
어느 것 하나도 눈에 들어오는 게 없어야 돼.
우리 몸과 마음 기개 종자 근경 뭐 말할 것도 없이 일체, 일체 것 중에서 하나도 눈에 들어오는 것이 없어야 돼.
불견일법이야. 한 법도 보지 아니한 것이 곧 여래야, 그런 경지가 곧 여래의 경지다 이거야.
方得名爲觀自在라
(방득명위관자재라)
바야흐로 이름을 관자재라고 한다.
그것을 방득명위관자재(方得名爲觀自在)라. 이름을 관자재라고 한다. 바야흐로 이름을 관자재라고 한다.
관자재보살이라고 해도 좋고 관이 자재한다.
있는데 없는 것으로 볼 줄 알면 그거 관이 자재한 거지.
그래 관자재보살이니까 무안이비설신의 우리가 안이비설신의는 가지고 있으면서 무안이비설신의라고 하자, 무색성향미촉법이라고 하고, 그게 불견일법이야.
입을 가지고 말 하면서도 입이 없다고 하는 이치라.
세속인 논리로는 그렇게 이율배반적일 수가 없지 사실은.
세속적인 논리로서 아주 이율배반적이지.
그런데 불교를 이해할 때는 그런 이율배반적인, 세속적인 논리로써는 이율배반적일 수밖에 없어. 이거는 그런 차원이 아니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입을 가지고 말하면서 입이 없다고 하니 말이 안 되잖아. 말을 안 되는 걸로 표현하는 거야, 하는 수 없이.
무안이비설신의라고 하면서 그 소리는 그런 말을 하는 그 당체는 뭔데? 그거는 유안이비설신의니까 무안이비설신의라고 말하는 거야 사실은.
그러면서도 뜻은 무안이비설신의라고 한다 이거지.
불견일법(不見一法)이 즉여래(卽如來)니 방득명위관자재(方得名爲觀自在)라, 요게 이제 차원이 한 차원 달라지면은 이렇게 꽉 차게 귀에 꽉 차고 눈에 꽉 차게 세상이 존재하는데 불견일법이 된다 이거지. 그런 경지를 여래라고 한다.
그쯤되면 보는 게 자유자재하지. 아무리 눈 앞에 가득이 차 있어도 그게 가득이 차 있는 것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 거지.
그러니까 관(觀)이 관찰하는 것이 자유자재하다.
了卽業障本來空이나
(요즉업장본래공이나)
깨달으면 업장이 본래로 공하지만
요즉업장본래공(了卽業障本來空) 미요환수상숙채(未了還須償宿債)라, 깨달은 즉은 업장이 본래 공하고 깨닫지 못한 사람에게는 온 세상이 다 있고, 또 내 업장이 다 있고, 윤회도 다 있고, 자기 과보도 다 있어.
그런데 깨달은 사람에게는 그게 없어, 업장본래공이야, 왜냐? 불견일법이 즉여래니까, 한 법도 눈에 들어오지 않으니까.
이런 이치는 말로 여기서 설명하는 수밖에 없지만은 스스로 맛봐야지. 그러나 이제 맛 본 사람이, 맛 본 영가스님은 당당하게 이렇게 우리에게 일러주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것은 ‘어찌 그럴 수 있겠는가?’ 이렇게 우리가 의심을 갖는데 그건 이제 우리 입장이고, 사실은 좀 더 다른 지혜의 눈을 뜨면은 이게 이해가 된다고.
요즉업장 본래공 업장이 본래로 공이라고 하는 사실, 업장본래공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좀 지나치게 생각을 하면은 이건 이제 함부로 행동 할 수 있는 그런 그 근거가 된다고.
‘아 뭐 업이 본래 공인데 그까짓거 뭐 무슨 짓을 한들 어떠냐.’ 또 이렇게 오해할 소지가 충분히 있는 거라 이게, 요즉업장본래공이.
깨달았을 때 한해서 가능한 일이지. 우리에게는 모든 게 있는 거야. 눈에 보이는 게 있고, 귀에 들리는 게 있고, 전부 가 있는 입장에는 업장이 왜 없겠어? 윤회가 왜 없겠어? 있지.
未了還須償宿債라
(미요환수상숙채라)
깨닫지 못하면 모름지기 묵은 빚을 갚아야 한다.
미요(未了)에 환수상숙채(還須償宿債)라, 미요하고 요하고 이제 반대말이죠. 그래 우리가 모르면은 환수상숙채라, 도리어 모름지기 숙채를 갚아야 한다. 묵은 빚을 갚아야 한다
적수(滴水)도 야난소(也難消)라 한 방울의 물도 우리가 소화하기 어려워, 다 갚아야지. 만냥황금(萬兩黃金)도 역소득(亦銷得)이지. 일만냥의 황금도 하루에 충분히 녹일 수 있지만은 깨닫지 못한 입장에서는 한방울의 물도 그까짓거 흘러가는 많은 물중에 한 방울을 우리가 갚고 자시고 할 게 뭐있어? 그렇지만 그것도 빚이다 이거야. 그것도 업이 되고 그것도 빚이 되는 그런 도리가 있어.
그러니까 이제 가능하다면은 빚을 적게 지고, 업을 적게 짓고 가능하면은 그렇게 해야 되는 거지. 그래서 어느 날 요즉업장본래공이 되면 뭐 더 말할 나위도 없고.
飢逢王饍不能飡하니
(기봉왕선불능손하니)
배는 고픈데 왕의 음식을 만났으나 먹지를 않으니
기봉왕선불능손(飢逢王饍不能飡)하니 병우의왕쟁득차(病遇醫王爭得差) 주려서 배가 고픈데 왕의 음식을 만났어, 그런데도 능히 먹지를 아니해.
아 배고픈데 왕이 먹는 좋은 음식을 만났으면 실컷 먹을 일이지 그걸 안 먹는 거야. 왜냐? 그거 자기 분이 아니라서 못 먹겠지. 자기 분이 아니라서 못 먹는거야.
病遇醫王爭得差아
(병우의왕쟁득차아)
병든 사람이 의왕을 만난들 어찌 나을 수 있으랴
병우의왕쟁득차(病遇醫王爭得差) 그런 마음이라면 그런 좁은 마음이라면은 병이 들어서 의왕을 만났는데 아주 유명한 의사를 만났는데 어찌 나을 수가 있겠는가? 나을 수가 없지.
배 고플 때 왕 음식 얼마나 좋아? 실컷 먹어야지.
우리 부처님의 가르침, 또 최상승의 가르침, 여기서 말하는 영가 『증도가』의 그런 경지의 가르침 이것을 이제 왕선이다 왕의 음식이다 이렇게 볼 수가 있고, 또 의왕이다. 아주 훌륭한 의사의 처방이다 이렇게 이제 이해해도 좋습니다.
영가 『증도가』가 최소한도 왕의 음식, 배고픈 사람에게 왕의 음식이요, 병든 사람에게 아주 명의라.
그런 가르침이라고요 이게 『증도가』가.
그런 뜻으로 여기서 표현하고 있습니다.
在欲行禪知見力하니
(재욕행선지견력하니)
욕심의 상태에 있으면서 선정을 닦는 것은 지견의 힘이니
재욕행선(在欲行禪)은 지견력(知見力)하니 화중생련종불괴(火中生蓮終不壞)라, 욕심의 상태에 있으면서 선을 행하는 것은 지견의 힘이다, 이거 아주 의미심장한 말이예요.
우리가 확철대오 하기 전까지는 계속 욕심 속에서 공부합니다. 욕심이 이게 뭐 던다고 덜어지는 게 아니예요.
조금 이제 자꾸 우리가 마음 관리에 의해서 가벼워질 수는 있어. 그런데 욕심의 뿌리는 그거는 뽑히지가 않는다고.
잠깐 이제 뭐 이렇게 눌러나서 밖으로 안 나타나게는 할 수가 있지. 어느 정도. 그렇지만 뿌리는 안 뽑혀. 그게 재욕행선이야.
그런 상태에서 선을 행하는 거야. 그런 상태에서 마음 공부를 하는 거지. 그것이 마치 화중생련종불괴로다, 지견, 지견의 힘이라, 우리가 이러한 공부를 함으로 해서 아 그게 가능하구나.
그래 ‘욕심이 저렇게 덕지덕지 있어가지고서 무슨 공부되겠노?’ 그건 틀린 소리야. 욕심위에서 공부하는 거야. 욕심 그냥 두고 공부하는 것이지 욕심 제거하고 따로 공부하는 게 아니라는 거야.
욕심 그대로 두고 공부하는 거 이게 안목이야. 이게 안목이야, 재욕행선지견력이라는 말이 욕심 위에서 그대로 공부하는 것이 안목이다 이 뜻이라 해석을 하면. 이게 지견이야.
욕심을 우리가 제거하려고 아니면은 탐진치 삼독을 제거하려고 특별히 그 방법만 가지고 우리가 연구해 가지고 무슨 또 성과가 있겠어?
그건 그대로 두고 우리 공부하는 거야. 그대로 두고.
망상을 두고 화두를 챙기지, 망상 제거 해놓고 아, 오늘 부터 화두 챙긴다, 이건 아냐. 그건 틀린소리라. 망상 위에서 공부하는 거야. 망상 그냥 두고 화두만 챙기지, 망상 제거하고 화두 챙기는 것은 없어. 그건 있을 수가 없는 일이야.
욕심을 그냥 두고 거기서 공부하는 거야. 선을 행하는 거라.
그래 재욕행선(在欲行禪)이라 이게 아주 유명한 말이라.
재욕행선지견력((在欲行禪知見力)이라는 말.
대개 우리는 욕심을 제거하고 깨끗한 마음에서 공부하는 걸로 그렇게 이야기하잖아. 그런 불교 많아요.
불교를 그렇게 이야기 하는 데가 아주 많습니다 사실은.
아마 대개 그렇게 이야기 할껄? 그런데 그게 아니야. 그건 잘못 알고 그런거야.
욕심제거하고 나서 공부하라 천만에, 망상제거하고 나서 화두 들라 그것도 잘못 가르치는 거야.
망상 위에서 공부하는 것이고 재욕행선(在欲行禪)이라 욕심 위에서 공부하는 거야.
공부만 하는 거야. 욕심 생각하지 말고, 망상 생각하지 말고 화두만 드는 것이지.
그래 이제 망상 제거하고 화두 들고 욕심 없애고 공부하고 욕심이 덕지덕지 있는 거기에서 공부하는 거지 덕지덕지 있는 욕심 그래가지고 무슨 공부하겠나, 이건 우리 상식이야. 보통 우리끼리 이야기 할 때 그래 많이 하잖아. 그건 우리 상식이지. 보통 사람들의 상식인 것이지.
그러면 깨달은 사람의 가르침이 우리가 공부하지 않는 우리 상식하고 같으면은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 아무 의미가 없는 거지. 달라야지, 깨달은 사람의 안목은 달라야 되는 겁니다.
우리는 욕심 없이 공부하는게 옳다고 생각하는데 아니야 깨달은 사람은 욕심 그대로 두고 공부해라, 재욕행선(在欲行禪)하라 이거야. 그게 안목이라 그게 지견이다.
이거는 유명한 말이예요. 잘 기억해 둬야 돼.
火中生蓮終不壞로다
(화중생련종불괴로다)
비유컨대 불속에서 연꽃이 피는 것과 같아서 마침내 파괴되지 않도다.
화중생련종불괴(火中生蓮終不壞)로다 비유하면은 마치 뭐와 같은고 하니 불이 활활 타고 있는 가운데서 연꽃이 피는 거예요. 불속에서 핀 연꽃은 시들지가 안해. 불 속에서 피는 연꽃은 시들지가 않는다고. 저기 연못에 핀 연꽃이 시들지.
아예 처음부터 근본이 그렇다 이거지. 그러니까 차원이 영 다른 이야기죠.
이런데서 뭔가 이렇게 느낌을 받고 좀 맛을 느끼고 이래야 그 어떤 선의 분위기, 선의 어떤 정신, 또 불교 궁극의 어떤 분위기에 어느 정도 접어들 수 있다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勇施犯重悟無生하니
(용시범중오무생하니)
용시비구는 중죄를 범하고도 생사가 없는 도리를 깨달았으니
용시(勇施)는 범중오무생(犯重悟無生) 조시성불우금재(早時成佛于今在)라, 한 예로써 용시비구라고 하는 경전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용시비구라는 이가 중죄를 범하고 아주 뭐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최상의 그런 그 무거운 죄를 범하고도 무생의 도리를 깨달았다. 무생의 도리를 깨달았다 이거예요.
早時成佛于今在로다
(조시성불우금재로다)
일찍이 성불하여 지금까지 그 이름이 전해지고 있다.
조시성불우금재(早時成佛于今在)라, 그래가지고 경전에 설해지기를 일찌기 성불해가지고서 지금까지 계신다 라고 이렇게 이제 경에서 설하고 있다 이거지.
뒤에 또 유위비구범음살 이야기도 나오지만은 이런 견해가 참 중요한 견해입니다.
오늘 『증도가』 공부 여기까지 다 하고.
첫댓글 不見一法卽如來니 方得名爲觀自在라.... 한 법도 보지 않는 것이 곧 여래이니 바야흐로 이름을 관자재라고 하니라...꽃물들다님 수고하셨습니다.._()()()_
在欲行禪知見力하니...욕심의 상태에 있으면서 선정을 닦는 것은 지견의 힘이니..(깨달은 사람은 욕심 그대로 두고 공부해라. 그게 안목이고 지견이다.).._()_
執指爲月枉施功하고 (집지위월왕시공) : 손가락을 집착하여 달을 삼으니 그릇 노력을 하고 不見一法卽如來니 (불견일법즉여래) : 한법도 보지 않는 것이 곧 여래이니 方得名爲觀自在라 (방득명위관자재) : 바야흐로 이름이 관자재라...
了卽業障本來空이나 (요즉업장본래공) : 깨달으면 업장이 본래로 공하지만 未了還須償宿債라 (미요환수상숙채) : 깨닫지 못하면 모름지기 묵은 빚을 갚아야 한다.
在欲行禪知見力하니 (재욕행선지견력) : 욕심의 상태에 있으면서 선정을 닦는 것은 지견의 힘이니 火中生蓮終不壞로다 (화중생련종불괴) : 비유컨대 불속에서 연꽃이 피는 것과 같아서 마침내 파괴되지 않도다..... 꽃물들다님 감사드립니다! _()()()_
감사합니다._()_
삼배 올립니다
삼배 올립니다
불견일법(不見一法)이 즉여래(卽如來)니 방득명위 관자재(方得名爲觀自在)라.ㅡ한 법도 보지 않는 것이 곧 여래이니 바야흐로 이름을 관자재라고 한다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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在欲行禪知見力 ...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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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