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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의 말
유마경과 대소승 불법의 바른 이해를 위한 서언
인생은 무엇을 위해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보리심을 일으키고 세세생생 ‘위로는 보리를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교화한다’는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의 대승보살행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인생철학이요 인생길이 아닐까요? 그러기에 6바라밀을 실천하면서 그런 자리리타(自利利他)의 삶의 길을 걸어가라는 뜻에서, 오늘날 특히 한국의 여성 불자들을 일반적으로 보살이라고 부를 것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한국의 전통 불교는 대승불교에 속하며 지금도 여전히 그렇게 표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승보살행을 역사상 얼마나 진정으로 구현하고 실천했을까요? 지금은 또 어떨까요?
지금 불교계 일부에서는, 대승은 불교가 아니다, 대승은 부처님이 설한 것이 아니다, 3세인과나 6도윤회는 없다, 무엇이 깨달음인가? 등등에 관하여 공개적인 발언 담론이나 글쓰기나 설법이 행해지고 있는데, 이런 주장들은 정지정견(正知正見)일까요?
독자들에게 대승보살도의 유마경과 대소승 불법을 바르게 이해하도록 하기 위하여, 현대의 유마거사였던 남회근 선생의 강의 중에서 관련 법어를 가려 뽑아 부득이 긴 서언으로 엮을 필요를 느꼈습니다. 소승과 대승이 둘 아닌 불이법문(不二法門)이라고 설하는 유마경은 파사현정(破邪顯正)의 거울이며, 어떤 것이야말로 진정한 보살행인지를 알게 하여 줄 것입니다.
재가 부처님이 설한 불가사의해탈법문
유마거사는 한 분의 재가 부처님입니다. 그는 금속(金粟)여래의 화신(化身)입니다. 즉, 묘희불(妙喜佛)로서 성불한지 오래이십니다. 그는 이미 상방(上方)세계에서 성불한 금속불(金粟佛)인데, 일부러 하방 (下方)세계에 와서 거사의 몸을 나타내어 보여주신 것입니다.
유마경은 재미있는 경전입니다. 재미있다는 말은 옳지 않고 충분히 묘사하기에 부족합니다. 마땅히 이 경전은 진정한 대승불법이요 세간법 중에서 성취하는 불법이라고 말해야 합니다. 두 부의 불경이 중국의 불법에 영향이 가장 컸는데, 한 부는 유마경이요 한 부는 법화경입니다. 뒷날의 선종과 밀종은 모두 이 두 부의 경전 관점을 떠날 수 없었습니다.
천고이래로 줄곧 불법중의 약사경과 유마경과 법화경을 비밀법문으로 여긴 사람이 없었습니다. 단지 이들을 현교의 경문으로 삼아서 독송하고 참학했습니다. 그러니 자연히 수행법의 의의와 관건의 소재를 알지 못했을 것이고, 그래서 조금도 성취가 없었을 것입니다.
유마경의 문자는 보기에는 쉽지만 사실은 대단히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능엄경처럼 문자 번역이 너무나 고명합니다(남회근 선생은 구마라집법사 번역본으로 강의하였습니다. 참고로 현장법사 번역본인 설무구칭경은 하권 부록으로 수록하였습니다/역주).
전체 유마경 내에서의 가장 중점 중의 중점은, 우리들에게 불법은 바로 이 세간에 있으며, 불법은 우리 자신의 심신에서 스스로 마쳐야 한다고 말해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한 가지 중요한 점을 제시하겠습니다. 유마경은 불법 중에서 결과로부터 원인을 설하는 것입니다. 유마거사(금속여래金粟如來의 화신)같은 이미 성취한 부처님이 이 세상에 와서 우리들과 마찬가지로 혈육의 몸으로서, 생로병사의 현상도 있습니다. 유마거사는 병이 난 인연으로 이 한 부의 경전을 이끌어내어 법을 설명합니다. 설법 중에 많은 불가사의한 경계도 있습니다. 예컨대 방장실은 그 안에 몇 만이나 되는 사람을 용납하고 또 그 한 사람마다를 위하여 사자좌를 하나씩 빌렸습니다. 또 천녀가 꽃을 뿌리고 마음대로 남녀의 상(相)으로 바뀌었습니다. 심지어 상방세계에 가서 향적불에게 탁발하여 밥을 먹는 등등이 있습니다. 이 모두는 불법에서 성취한 사람은 이와 같은 불가사의한 공덕과 지혜, 능력이 있다는 것을 설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불과(佛果)상의 일입니다.
유마경에서 말하는 것은 모두 다 제일의(第一義)입니다. 오늘날의 말로하면 형이상 도(道)의 최고점을 얘기한 것입니다. 선종에서 말하는 돈오(頓悟)성불법문과 같습니다. 본 경전에 나오는 부처님의 10대 제자들은 모두 이미 아라한 과위를 성취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누구나 유마거사의 훈계를 받고 꾸지람을 당했습니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견지(見地)에 대한 문제입니다.
유마경이 말한 것은 해탈법문으로서, 그 중점이 견지(見地)에 있습니다. 견지는 경교(經敎)에서는 견도(見道)입니다. 도를 볼 수 있고난 뒤에야 도를 닦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봄[見]과 닦음[修]을 동시에 한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대승의 진정한 수행법, 이른바 무상승(無上乘)의 밀도(密道)는 세 가지 대법인(大法印)이 있습니다. 밀종에서는 대수인(大手印)이라고 부르는데, 견(見: 견지見地)·정(定: 수지修持)·행(行: 행원行願)이 그것입니다. 부처님을 배워 성취하고 싶다면 이것은 필연적인 도리입니다.
유마경의 중점은 불이법문(不二法門)의 해탈입니다. 불이법문은 출세간이든 입세간이든, 도를 닦든 닦지 않든 상관없습니다.
대승과 소승 불법 무엇이 다른가
자기를 대승도라고 일컬으면서 소승도를 말하지 않지 말기 바랍니다. 당신이 만약 소승조차도 해낼 수 없다면 대승을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소승은 대승의 기초요 대승은 소승범위의 확대에 불과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문인(文人)들은 아주 오랜 옛날부터 서로 깔보았습니다[文人千古相輕]. 저는 말합니다. 종교계는 아주 오랜 옛날부터 서로 원수로 여긴다고요. 무슨 종교를 믿던,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서로 간에 원수입니다! 문인들보다 더 심합니다! 종교를 믿는 사람일수록 남을 미워하는 심리는 보통사람보다 더 심합니다. 부처님은 무아상(無我相)ㆍ무인상(無人相)ㆍ무중생상(無衆生相)ㆍ무수자상(無壽者相)을 말씀하셨건만, 결과적으로 종교단체는 나니 너니 시비가 유달리 많습니다. 저는 들으면 짜증납니다. 일반사회[江湖]는 어떨까요? 일반사회는 아주 오랜 옛날부터 서로가 시기합니다. 문인은 천고이래로 서로 경시하고, 종교는 천고이래로 서로 원수로 여기고, 일반사회는 천고이래로 서로 질투합니다. 이 몇 마디로 인정세태를 다 말했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얻기 어려운 것이 해탈입니다. 불법은 우리들에게 일러주기를 ‘제법무아(諸法無我),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고 합니다. 이론은 알지만 해탈은 하지 못합니다. 소승방법은 자아의 해탈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철저하지 않습니다. 대승은 해탈을 철저하게 구합니다. 대승이든 소승이든 모두 다섯 가지 순서가 있습니다. 계(戒)ㆍ정(定)ㆍ혜(慧)ㆍ해탈(解脫)ㆍ해탈지견(解脫知見: 해탈한 뒤에 알고 보는 것임)이 그것입니다. 해탈지견을 발휘하는 이면에 대소승의 차이가 있습니다. 이것은 간단하게 얘기한 것입니다만 엄중하게 얘기하면 5승의 차별이 있습니다. 인승(人乘)ㆍ천승(天乘)ㆍ성문승(聲聞乘)ㆍ연각승(緣覺乘)ㆍ보살승(菩薩乘)의 해탈입니다.
불법의 5승도는 다섯 개의 단계입니다. 절대 주의해야 합니다! 먼저 인도(人道)를 배우는 것이 바로 10선업(十善業)입니다. 다시 천도를 닦는데 지선(至善)으로 선정과 잘 결합시킵니다. 그런 다음에야 비로소 소승의 성문ㆍ연각입니다. 그러면 선정이 더욱 한 걸음 나아가게 되고 해탈지견과 결합하여 닦습니다. 최후에는 비로소 대승보살도를 닦습니다. 중국 불법은 왕왕 자리에 올라가 앉자마자 바로 대승보살도로서, 너무 크게 배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을 배우는 중국 사람은 오로지 크게 허풍 치는 것으로 변했습니다. 인도의 기초조차도 잘 다지지 못했습니다. 이점은 우리가 반드시 진지하게 반성해야 합니다.
제가 늘 말하기를 부처님을 배우는 것은 좀 천천히 하고 먼저 사람됨을 배우라고 합니다. 사람됨조차도 잘 못하면서 대승도를 배워 성불하고 싶어 하다니 그렇게 간단한 것은 없습니다.
무엇이 보살도일까요? 범어는 ‘보리살타(菩提薩埵)’입니다. ‘보리(菩提)’는 바로 깨달음[覺悟]입니다. ‘살타(薩埵)’는 바로 유정(有情)중생입니다. 비록 공(空)을 증득했지만 여전히 대자대비로써 중생을 모두 제도하고자 합니다. 그러므로 불보살은 가장 정(情)이 많은 사람이요 가장 일이 많은 사람입니다. 보살을 정사(正士)나 개사(開士)로 번역한 것도 있습니다. 개명(開明)한 선비라는 뜻입니다.
보살은 대부분 재가자입니다. 출가자들이 날마다 아침저녁으로 예배하는 대상이 모두 재가자입니다. 많은 보살들 중 오직 지장왕보살만이 출가상입니다. 백천만억 보살은 재가상을 나타내며 몸에 지니거나 단 것은 한 무더기 보물들입니다. 나한상은 아주 고지식합니다. 유마경에서 말하는 것은 불이(不二)법문입니다. 진정한 불법은 출세간 입세간을 나누지 않습니다. 그러나 종교계는 도리어 출가와 재가로 나누어 서로 통하지 않는 게 극점에 이르렀습니다. 이것은 6통 밖의 제7통으로서 불통(不通)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불경 주석은 거사들이 쓴 것입니다.
대소승은 바로 불법의 두 개의 팔입니다. 소승이 없으면 불법의 청고(清高)함을 드러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청고하기만 하면 소용이 없습니다. 그것은 산꼭대기에 놓여있는 감상용입니다. 대승보살도는 청고함을 표방하지 않습니다. 대승보살도는 더러움을 간직하고 받아들일 수 있으며 온갖 것을 포용할 수 있습니다. 좋은 것 나쁜 것, 착한 것 악한 것을 용납하지 않음이 없습니다. 보살심은 대자대비를 위주로 하는데, 이것이 ‘보살심(菩薩心)’의 기초입니다. 보리는 범어의 각오(覺悟; 깨달음/역주)의 음역입니다. 중문의 각오는 보리의 의미를 전체적으로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음역으로 보존하고 번역하지 않았습니다. 부처님을 배우는 사람이 도를 깨치지 못하는 것은 바로 깊고 간절한 보리심을 일으키지 않기 때문입니다. 대승보살은 도를 깨달아 성취한 뒤에 다시 대자대비로써 행문(行門)을 삼아 온갖 중생을 아끼고 사랑합니다. 이것이 바로 보살심입니다.
대승보살은 소승의 길을 절대 걸어가지 않습니다. 다들 아는 영가(永嘉)선사는 두 개의 종파를 통(通)한 걸출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천태종의 지관을 닦아 도를 깨닫고 또 육조대사의 직접 인증을 얻었으니 선종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증도가(證道歌)에서 말합니다. ‘큰 코끼리는 토끼가 다니는 길에 노닐지 않고, 큰 깨달음은 소승도에 구애되지 않는다[大象不遊於兔徑, 大悟不拘於小節].’, 어떤 사람은 보고서는 대충해도 되고 계율을 지킬 필요 없다고 여기는데, 이것은 큰 잘못입니다. 여기에서의 ‘소절(小節)’은 소승도를 가리킵니다. 성문도ㆍ연각도(緣覺道)는 소승입니다. 왜 소승이라고 부를까요? 방금 제시했던, 즉 3법인(三法印)에서 보면 첫 번째가 ‘견소(見小)’로서 보는 바가 한계가 있습니다. 선종대사는 소승은 담판한(擔板漢)이라고 형용했는데, 판때기를 하나 짊어지고 걸어가니 오직 앞만 볼 수 있을 뿐이라고 묘사한 겁니다. 두 번째는 ‘행소(行小)’입니다. 행원이 적은 것입니다. 오로지 현실을 도피하고 자기만 성취하며 생사를 마치고 해탈하고 싶어 하고, 감히 세간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견이 작고 행이 작기 때문에 정(定)도 작습니다[定小]. 그러므로 3계를 벗어난 소승의 무루과만을 성취할 뿐입니다.
성문과 연각사이에도 정도(程度) 면에서나 층차 면에서의 차별이 있습니다. 성문승은 연각승에 비하여 더 작습니다. 솔직히 말해 부처님의 제자 중에 성문승과 연각승의 사람(전부는 아닙니다) 대부분은 출가중(出家衆)입니다. 물론 대승보살이 출가중으로 시현(示現)한 경우도 있습니다. 예컨대 지장왕보살(地藏王菩薩)이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성문일까요? 바로 의뢰성(依賴性)인데, 세상에 선지식이 있고 부처님이 세상에 출현했을 때를 의지하여 그들의 교화를 따르지만 자기가 스스로 깨닫고 마칠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화를 들음으로써 자기의 보리종성(菩提種性)을 훈습하여 도를 깨닫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소승의 기본대중입니다. 예컨대 본경 중에서의 사리불과 대가섭이 바로 그렇습니다. 부처님이 세상에 계실 때에 성문중에게 4성제를 설하였고, 그들은 이를 통해 보리에 깨달아 들어간 사람이 숫자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몸소 부처님의 음성을 듣고 도에 들어가기 쉬웠기 때문입니다. 4성제인 고(苦)ㆍ집(集)ㆍ멸(滅)ㆍ도(道)는 다들 귀에 익숙하고 잘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저 이론으로만 삼아서 결과적으로 4성제(四聖諦)가 사잉제(四剩諦)를 이루어 조금도 쓸모가 없습니다.
진정한 4성제는 말하기 쉽지 않습니다. 출가한 여러분이 무엇이 진정한 4성제인지를 이해하기 위하여 발심하고 싶다면 사리불과 목련존자의 경교를 잘 연구해야 합니다. 예컨대 논부(論部)의 비바사론(毘婆沙論)은 어떻게 4성제로부터 빨리 과위를 증득할 수 있는지의 방법을 논술하고 있습니다. 저는 늘 탄식하는데, 불법은 여전히 세간에 있으며 결코 말법시대에 도달하지 않았기에 경교가 아직 있습니다. 단지 우리들이 노력하려 하지 않을 뿐입니다. 만약 노력하려 한다면 사리불과 목련존자를 친견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수행하는 이외에도 사리불과 목련존자의 저작을 연구하는 데 노력하고 그 때문에 늘 감응이 있다는 것을 저도 압니다.
그러나 대승보살의 입장에서 보면 성문중의 법은 원만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심지어 부처님이 설한 큰 법조차도 귀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예컨대 법화경의 시작부분에 부처님이 한참 설법하고 있을 때 소승성문의 비구들은 자리에서 물러나 가버렸습니다. 큰 법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대승보살은 근기가 작은 성문중생을 교화하기 위하여 방편으로 성문의 몸을 나타내 보입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대승의 큰 길을 걸어갑니다. 이는 마치 어떤 훌륭한 대학교수가 직위를 낮춰 유치원교사가 되기를 원하여 어린아이들이 들어본 적이 없는 큰 도리를 가르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모든 대승보살들은 생사를 뛰어넘지 않습니다. 다시 엄중하게 말하면, 모든 불보살들은 다 생사를 뛰어넘지 않으며 모두 환생하는 사람들입니다. 왜 그럴까요? 온갖 중생을 제도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능가경 일 권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열반한 부처도 없고 부처가 열반함도 없다[無有涅槃佛, 無有佛涅槃].’ 부처님은 결코 떠나가시지 않았습니다. 역시 다시 오십니다. 불보살은 모두 환생하는 사람으로서 이 세간에 있습니다. 보살의 원력은 중생을 제도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보살은 중생을 위하는 까닭에 생사에 들어가고 윤회에 들어갑니다. 뛰어넘을 재간이 있으면서도 뛰어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보살은 ‘대자비하기 때문에 열반에 들지 않고, 대지혜를 갖추었기에 3유(三有)에 머물지 않습니다[悲不入涅槃, 智不住三有].’, 그는 이미 반야지혜를 얻어 3계 밖으로 뛰어넘었습니다. 3유(三有)는 바로 3계입니다. 하지만 자비로써 중생을 제도하려는 까닭에 자신은 열반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이것이 대지혜와 대자비를 함께 운용하는[智悲雙運] 경계입니다. 그는 여전히 6도 윤회 속에서 구릅니다. 하지만 꼭 사람으로만 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소로 변하고 말이나 또는 벌레로 변하여 있을지도 모릅니다. 중생을 제도하고자 하기 때문에 이러한 재간이 있으며 이러한 짐을 걸머질 수 있습니다. 개미로 변하여 우리들이 물을 끓일 때 뜨거워서 죽을지도 모릅니다. 그는 개미로 변했기 때문에 뜨거워서 죽는 겁니다. 하지만 왜 개미로 변하고자 할까요? 개미를 제도하기 위해서입니다! 반드시 개미로 변해야 개미의 언어를 말할 수 있습니다.
대승불법은 마음ㆍ부처ㆍ중생 세 가지가 차별이 없으며 자체가 본래 공(空)하다고 주장합니다. 비록 본래에 공하지만 행(行)을 일으킬 때에는 유(有)를 닦고 즉공즉유(即空即有), 즉유즉공(即有即空)입니다. 유(有)가 환화(幻化)이며 진실하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만약 정토를 닦고 정토의 상(相)에 집착한다면 궁극[究竟]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불국토도 공하기 때문입니다. 중생이 자성 공상(空相)에 증득하여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에 유(有)법으로써 중생을 교육합니다. 이게 바로 유마경에서 말하는 대승불법의 최고 경계로서, 출세간과 입세간을 나누지 않습니다.
대승보살도는 세간에 들어가 있는 가운데서 세간을 벗어나는 데 있습니다. 현재 유행하는 말로 말하면, 바로 대종교가의 정신으로써 사회복리사업을 하는 것입니다.
대소승 불법은 모두 계정혜를 기초로 하고 4선8정을 근본으로 합니다. 우리가 보았듯이 근 백 년 동안에 불법은 갈수록 쇠락해갔습니다. 원인은 수행자들 중에 과위를 증득한 사람이 대단히 적고 빈 입으로 이론을 말한 사람들이 갈수록 많은 데에 있습니다. 진정으로 4선8정까지 닦은 사람은 없습니다. 초선정(初禪定)조차도 얻지 못했습니다. 유마거사는 여기서 제시하기를 우리 수행자들은 4선정을 기본 침상과 자리로 삼아야 한다고 합니다.
대승불법은 바로 온갖 선(善)을 닦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문과 연각 대중이 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보세요, 부처님 제자들은 대부분 출가 대중으로서 전문적으로 성문과 연각을 닦았습니다. 물론 악한 일을 할 기회는 적어졌지만 세간을 떠나 수행하는 것은 소승도이지 보살도가 아닙니다. 대승의 도는 적극적으로 온갖 선을 닦는 것이며 도피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미 온갖 선법(善法)을 닦는 바에야 세간에 들어가야 함을 면할 수 없습니다. 더러운 항아리 속에 뛰어들어도 더러워지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어렵습니까? 그러므로 보살이 대승도를 닦는 것은 행하기 어려운데도 행하면서 끊임없이 진보하여 선(善) 위에 선(善)을 더하는 것입니다.
소승은 악한 생각의 오염을 없애고 미혹을 끊어서 진여를 증득하고자 합니다. 대승은 선을 행하여 악한 생각을 없애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최후에는 착한 생각도 공하여 그것을 비워버립니다. 착한 과보는 모든 중생에게 회향하고 자기에게는 한 가지도 남겨두지 않습니다. 선과 악 양쪽을 모두 취하지 않고 미혹을 끊을 필요도 없이 자성은 본래 청정합니다.
당신이 정좌할 때 청정한 경계가 하나 있더라도 그 현상은 생(生)입니다. 다리를 풀어버리고 자리에서 내려온 뒤에는 이전과 마찬가지여서 그 청정한 경계가 사라져버린 것이 바로 멸(滅)입니다. 이것은 여전히 한 번 생하고 한 번 멸하는 가운데 있는 것인데 당신은 수행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자기를 속이고 남을 속이는 말입니다. 진정한 수행자는 무생법인을 얻어야 합니다. 고요해도 청정하고, 움직여도 청정하고, 깨어있을 때나 잠잘 때나 걷거나 머물거나 앉거나 눕거나, 어느 때나 청정한 경계 속에 있어야 대승불법에 입문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생멸은 일종의 현상입니다. 불생불멸은 현상이 아니라 심성 자체인데, 도를 보아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유식학으로 말하면 생멸은 상분(相分)입니다. 불이법문을 보고 불생불멸을 보고 생멸을 일으킬 수 있는 본체는 견분(見分)입니다. 정말로 도를 보면 견분이 도달하고 생멸심은 곧 분별을 일으키지 않게 되고 여여부동(如如不動)하여 무생법인에 들어갑니다. 이게 바로 자증분(自證分)입니다.
우리들의 심리상황인 온갖 생각 감각은, 예컨대 한 연못의 맑은 물이나 파도가 없는 평정한 큰 바다는 본성이요, 큰 바다에 파랑이 일어나면 파랑마다 모두 생멸로서, 한 파랑이 일어났다 사라지면 다음 파랑이 또 일어나듯이, 한 염두가 한 염두에 이어지는 것이 생멸법입니다. 당신은 이것을 동태(動態)라고 느끼지만 동태가 아닙니다. 파랑은 물입니다. 평정하며 파도가 없으면서 파랑을 일으킬 수 있는 것도 물입니다. 물의 자성은 움직인 적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말합니다. ‘파도 전체가 물이요, 물 전체가 파도이다[全波是水, 全水是波]’
소승은 생멸법을 두려워하여 한사코 생각망념을 소멸시키고 싶어 합니다. 아무것도 없는 것을 정(定)을 얻었다고 여깁니다. 그런데 틀렸습니다. 당신의 생각 감각이 사라져버렸더라도 그것은 여전히 파랑입니다. 무슨 파랑일까요? 평조(平潮)입니다. 높았다 낮았다하는 조수(潮水)가 아닙니다. 그러나 평조도 조수입니다! 만약 이런 것이 도(道)요 공(空)이라고 여긴다면, 소승의 편견에 속합니다. 그러므로 소승인은 감히 생각을 움직이지 않습니다. 이와 같은 공정(空定)은 기껏해야 8만4천겁 동안입니다. 우리 범부들이 보기에는 마치 장구한 것 같아서 몹시 부럽게 느껴지지만, 정(定)속에 있는 사람의 감각은 단지 손가락 한 번 튕긴 것이나 마찬가지로 느껴서, 한 잠 자고 일어난 것과 같을 뿐입니다. 잠에서 깨어나면 역시 마음이 움직여 여전히 생멸법입니다. 그러므로 대승의 해탈이 아닙니다.
대승의 해탈은, 생멸(生滅)이 바로 불생멸(不生滅)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들은 지금 말을 하고 있고, 듣고 있고, 보고 있는데 모두 염두가 생멸하고 있습니다. ‘생멸을 일으킬 수 있는 이것’은 움직인 적이 없으며 생도 없고 멸도 없습니다. 분별심을 일으키지 않고, 당신은 생겨나든 소멸하든 여여부동하면, 무생법인을 얻어 불이법문에 들어갑니다. 이것은 다리 틀고 앉았을 때만이 이와 같은 것은 아닙니다. 세속에 들어와 있을 때, 특히 자기를 위하지 않고 남을 위하여 바쁜 중에도 곳곳마다 이점을 체험해야 비로소 진정으로 대승을 닦는 것입니다.
유마경의 대승보살 경계를 철저하게 연구하려면 보살십지경(菩薩十地經)을 연구해서 초지보살은 어떤 경계인지를 살펴보아야 하고, 동시에 화엄경의 10지에 관한 설법도 결합시킨 뒤라야 비로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유마경과 선종
일반인들은 중국의 선종(禪宗)이 달마조사가 온 다음에야 비로소 전해 졌다고 생각할 뿐, 달마조사 이전에 구마라집 법사가 번역한 유마경과 법화경(法華經)이 영향이 가장 컸으며 중국문화인 선종의 근본경전이 되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유마경은 시종 불이(不二)법문 속에서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을 말하고 있는데, 무엇이 ‘불이’일까요? 소승과 대승이 둘이 아닙니다. 소승과 대승이 마찬가지로 하나의 보리도입니다. 세속법과 출세간법이 둘이 아닙니다. 이른바 진속불이(真俗不二)입니다.
유마경은 선종과의 관계가 대단히 큽니다. 선종대사들이 쓴 많은 어구는 유마경에서 나왔습니다. 일본인들이 연구하여 말하기를 중국 선종은 노장(老莊)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데, 노장의 영향은 작은 부분입니다. 사실 영향도 아닙니다. 노장의 기봉(機鋒)과 서로 같을 뿐입니다. 그러나 선종은 진정한 불법을 떠난 적이 없습니다. 진정으로 영향을 받았다고 말하려면 유마경에서 받은 겁니다. 선을 배우거나 내지는 밀교를 배우는 사람들은 모두 유마경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선(禪)을 배우는 사람들은 유마경을 떠나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만약 선을 배우는 사람이 유마경을 대충 읽는다면 큰일 납니다. 왜냐하면 당신의 공부 견지는 이 유마경으로써 대조 검토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유마거사는 진정으로 부처님의 심인(心印)을 전한 것이요 진정한 선종의 전통입니다.
선종을 말하려면 이 경전을 떠날 수 없습니다. 능엄경은 뒷날에야 더해 들어간 것입니다. 부처님을 배우며 참선함에 있어서는 반드시 유마경을 숙독해야 합니다.
‘나’는 도대체 어디에 있을까요? 이것은 찾아야 합니다. 부처님은 49년 동안 설법하면서 사람들에게 무아라고 일러주었지만 그가 떠나기 전에 이르렀을 때는 사람들에게 ‘아’가 있다고 말씀했습니다. 우리들은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 노인께서 어떻게 이렇게 사람을 속였을까요? 그는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이라고 선포했습니다. 도를 깨닫고 난 뒤에 세상에 나와서 교주가 되어서는 가는 곳마다 사람들에게 무아(無我)ㆍ무상(無常)ㆍ고(苦)ㆍ공(空)을 설해오다가, 열반하기 전에야 비로소 ‘상(常)ㆍ락(樂)ㆍ아(我)ㆍ정(淨)’을 설함으로써 완전히 상반되었습니다. 이것은 무슨 말일까요? 사실 그는 우리들을 속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때에 우리들에게 일러주시기를 불생불멸하기 때문에 영원하다는 도리를 말해주었습니다. 이 진아(眞我)를 얻으면 영원히 정토입니다.
진정으로 우리들의 생명은 이 육신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면, 즉 도를 깨달으면, 법신을 보고 공성(空性)을 보고 자성을 보고 실상(實相)을 봅니다. 만약 도를 깨닫지 못했다면, 당신의 모든 부처님을 배우는 공덕은 모두 가행(加行)을 배우고 있는 것입니다. 도를 본 이후에야 도를 닦을 수 있습니다.
예컨대 선종은 대철대오(大徹大悟) 성불을 말하는데, 성불했을까요? 이루었습니다. 단지 대부분 이룬 것은 법신의 부처로서 명심(明心)하여 자성을 본 것일 뿐입니다. 법신이 작용을 일으키는 것을 성취했을까요? 아직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색신이 전환 변화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도를 깨달으면 이 부모가 낳아준 육신을 전환 변화시켜서 비로자나 부처님이 대표하는 색신으로 이루어야 합니다. 그것은 광명입니다. 전해오는 바에 의하면 천여 년 동안 내내 색신을 성취한 사람은 없습니다. 육신이 죽은 뒤에 썩지 않더라도 색신 성취로 여길 수 없습니다. 여전히 법신 성취의 하나의 부대적인 작용입니다. 색신 성취의 수행자는 살았을 때 자연히 6통이 있으며 떠나가려 할 때에 그를 태울 필요가 없습니다. 그가 한 줄기 빛으로 변화하여 떠나버립니다. 도가의 두 마디 말을 빌려서 말하자면 최후에 이르면 ‘흩어져서는 기(氣)가 되고 모아져서는 형체를 이룬다[散而爲氣 聚而成形]’입니다. 색신성취도 자연히 탈태환골(脫胎換骨)할 수 있습니다.
진정으로 도를 깨달은 성취는 3신(三身)의 성취입니다. 그래야 대철대오입니다. 법신은 자성의 체(體)요, 보신은 자성의 상(相)이요, 화신은 자성의 용(用)입니다. 천고이래로 보신 성취까지 닦을 수 있었던 사람은 적고 또 적었습니다.
불학은 도를 얻음에 대하여 근본지라고 말합니다. 명심견성하여 얻은 어린애 같은 순수한 마음이 바로 근본지입니다. 그러나 도를 얻은 뒤는 하나를 통하면 온갖 것을 통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다시말해 정좌하여 도를 깨닫기만 하면 무엇이든지 다 안다는 것이 아닙니다. 전기공사과정도 알거나 원자탄 제조 과정도 안다든지 하여 모든 것을 마치 소금에 절인 오리알을 만들어 내듯이 만들어 낸다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사실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이러한 인간세상의 각 분야 부류들을 아는 것을 차별지라고 합니다. 하지만 근본지를 얻고 나면 차별지를 배울 때 더 빨리 배워 할 줄 알아서 하나를 들으면 천 가지를 깨달을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똑 같은 일에 대하여 보통사람은 일백 마디라야 이해할 수 있지만 근본지를 얻은 사람은 한마디만 들어도 전체을 이해합니다. 만약 한마디조차도 듣지 않고 이해한다면 그건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종교계에는 왕왕 이런 잘못된 관념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특히 부처님을 배우고 도를 배우는 사람은 그런 환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정좌하여 도를 깨달으면 우주 안의 어떤 일도 다 알 수 있는 것으로 말입니다. 사실 모든 것은 여전히 배워야 합니다. 맹자가 말한 ‘박학이상설지(博学而详说之)’, 널리 배워 그것을 자세히 말한다는 것은 바로 차별지를 가리켜 한 말입니다.
당신은 자신이 깨달았는지 않았는지를 알고 싶지 않습니까? 아주 간단하게 한번 시험해 볼 수 있습니다. 당신의 색신은 전환 변화했습니까? 형상과 습기는 고쳤습니까? 계ㆍ정ㆍ혜ㆍ해탈ㆍ해탈지견은 성취했습니까? 부처님의 10력ㆍ4무소외를 모두 갖추었습니까? 18불공법을 압니까 모릅니까? 자비심을 어느 정도까지 일으켰습니까? 위의는 무슨 경계에 도달했습니까? 자신의 수명을 틀어쥘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설법은 변재(辯才)가 무애하여 법에 자재할 수 있습니까? 중생의 청정한 불국토를 성취할 수 있습니까? 이 모두가 자기에 대한 테스트입니다. 당신이 아직 성불하지 못했다고 한다면 부처님이 성취한 억만 분의 일을 가지고서 자기의 수행을 시험해 보는 것도 하나의 좋은 척도입니다. 이렇게 보면 자기는 교만하고 미치지 않을 것이며 자기도 아직 멀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부처님을 배우는 사람은 상상(上上)의 지혜가 있는 사람이 배우는 것입니다. 일반인들은 아무리 닦더라도 이 일생에 약간의 선근을 심고 약간의 잘못을 적게 범하여 내생에 조금 좋을 뿐입니다. 불도를 진정으로 얘기하자면 얘기할 나위가 못됩니다. 어느 사람은 정(定)을 얻었네, 기맥이 통했네 하고 말하지만 함부로 떠들어대지 마십시오. 제 앞에서 두세 걸음만 걸어도 알아낼 수 있습니다. 그 눈빛이 정(定)의 상태일까요? 기맥이 통했을까요? 보자마자 압니다.
우리들은 생사를 마친 사람이 때가 온 것을 알고서 떠나버리면 생사를 마쳐버린 것으로 잘못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생사를 마친 것이 아니라 수행한 정력(定力)이 충분한 것입니다. 이른바 생사를 마쳤다는 것은, 현생에 수행하여 정(定)을 얻어 이 육신으로부터 떠나가면 3계(三界)의 어느 계, 6도(六道)의 어느 도로 가야할지 알고 자기가 뜻대로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부처님을 배워 도를 증득한 사람은 대부분이 법신만을 깨달을 수 있고 중음신에 이르러서, 즉 이 육신을 떠난 뒤에야 비로소 성취합니다. 이 육체인 보신을 원만함에까지 닦아 도달할 방법이 없습니다. 법신ㆍ보신ㆍ화신이 3신(三身)인데, 만약 3신을 성취하지 못했다면 저의 기준으로 볼 때는 깨달았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정좌하여 생각을 좀 비우고 약간의 정(定)의 경계를 얻으면 자기가 오도했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식도(食道)를 깨달았을 뿐입니다. 반드시 3신을 성취해야 인정이 됩니다.
법신과 보신이 모두 성취되면 백천만억 화신을 행할 수 있습니다. 진정으로 도를 깨달은 성취는 3신(三身)의 성취입니다. 그래야 대철대오입니다. 법신은 자성의 체(體)요, 보신은 자성의 상(相)이요, 화신은 자성의 용(用)입니다.
저는 늘 말하기를 ‘진정한 불법의 성취는 지혜의 성취요 반야의 성취’라고 합니다. 해탈은 공부에 의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4선8정ㆍ3명6통은 모두 가행(加行)으로서 가공(加工)의 단계입니다. 그러므로 반야ㆍ법신ㆍ해탈 이 세 가지는 하나도 빠져서는 안 됩니다.
세간과 출세간법을 통해야 불이법문에 들어간다
부처님을 배우는 사람은 늘 생각하기를 청고(淸高)한 노선을 걸어가고 싶어 하지만, 그러나 청고함은 도업을 이룰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보살은 세상에 들어 가야합니다. 번뇌의 범위 안으로 들어가 자기를 단련해야 비로소 불도입니다.
진정으로 수행을 말하려면 세간 출세간의 온갖 학문지식을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됩니다. 이것들은 모두 ‘많이 보고 들어 지혜를 늘리는 것’에 속하며 바로 당신이 도를 깨닫도록 배양하는 법음입니다.
부처님을 배우는 여러분은 자신에게 물어 보십시오. 정말로 3세인과를 믿습니까? 자기를 속이지 마십시오. 때로는 그리 믿지 않겠지요! 당신은 정말로 지옥을 믿습니까? 불법은 대소승을 막론하고 모두 3세인과와 6도윤회의 이론기초 위에 세워집니다. 일반인들은 마지못해 믿지만 실제로 증득을 추구하기란 어렵습니다. 실제로 3선(三禪)이상에 도달해야만 선정 중에서 비로소 또렷이 볼 수 있습니다. 그래야 비로소 거의 진짜 믿을 수 있을 것입니다.
불학(佛學)의 중점은 바로 37개의 보리도품(菩提道品)입니다. 대소승의 기초가 되는데, 우리 학우들은 반드시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갓 시작 단계에서 적어도 그 명사와 숫자를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4념처(四念處)ㆍ4정근(四正勤)ㆍ4여의족(四如意足)ㆍ5근(五根)ㆍ5력(五力)ㆍ7각지(七覺支)ㆍ8정도(八正道)인데, 저는 반복해서 여러 번 얘기했습니다. 그 용어와 숫자를 다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은 아주 심각한 일입니다.
저는 늘 학우들에게 일깨우기를,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지하여 3장12부 경전을 두루 조사해보면, 진정으로 생사를 마치기 위한 유일한 수행법문은 바로 백골관(白骨觀)과 부정관(不淨觀)이라고 합니다.
소승과 대승의 공동 수행법인 백골관(白骨觀)과 부정관(不淨觀)을 저는 몇 년 동안 역설해 왔습니다. 우리들 말법시대에는 부처님의 근본법[本法]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백골관과 부정관을 정말로 잘 닦으면 현교의 각종 지관(止觀)이나 각종 정력삼매(定力三昧), 밀교의 각종 법문도 모두 통합니다. 대단히 대단히 중요합니다. 밀종에서 그리는 많은 불상에는 발아래 죽은 사람의 해골을 밟고 있습니다. 연화생대사(蓮花生大士)가 손에 든 것은 바로 해골 지팡이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보현보살이 손 위에 받치고 있는 것이 두정골[天靈蓋]입니다. 이 모두는 당신더러 먼저 기초인 백골관과 부정관을 잘 닦아야 비로소 한 걸음 더 나아가 전환 변화시키는 법문을 닦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부처님을 배우려면 얼마나 큰 지혜가 필요합니까! 성불하려면 이 경의 도리를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 경에서 말하는 대철대오의 상(相)은 한량이 없습니다. 이 경전의 말을 이해할 수 있다면 그 복보는 대단한 것입니다.
재가든 출가든 세간의 온갖 법을 떠나지 않습니다. 제가 늘 출가 학우들에게 말합니다. ‘세간 법을 모르고 당신은 어떻게 부처님을 배우겠습니까? 우리 본사 석가모니불은 세간법을 완전히 알았으며 태자 출신이었습니다. 그런 다음 출가하여 출세간법을 닦았습니다.’
만약 당신 말이 경률론의 도리와 서로 맞지 않는다면 바로 마구니의 말이지 부처님의 말씀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부처님을 배우는 사람은 경(經)에 정통해야 합니다. 즉, 교리에 정통해야 합니다. 종(宗)에 정통해야 합니다. 즉, 자기가 도를 깨닫는 공부가 수준에 도달해야하고 갖가지를 다 갖추어야 합니다. 다시 더 엄격하게 말하면, 내명(內明)을 통해야 됩니다. 자기가 내면적으로는 도를 얻어야 합니다. 외학(外學)도 통해서, 세간의 온갖 학문을 통해야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부처님을 배운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불법에서는 왜 18층 지옥이 있을까요? 이것은 수리철학의 범위에 속하며 역경(易經)의 숫자와도 관련이 있습니다. 불법에서 말하는 각종의 명사 숫자인 7각지나 8정도 등의 숫자들은 모두 멋대로 정한 것이 아닙니다. 그 가운데는 최고의 깊은 가장 심원한 도리가 있습니다. 이 때문에 수리철학을 배운 사람이 불법을 배운다면 아주 쉽습니다.
어떤 사람이 불경수리(數理)철학 논문을 한 편 쓴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일반인들은 수리철학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불경 속에 그렇게 많은 숫자들인 3계ㆍ4념(四念)ㆍ8정도(正道) 등등에는 모두 그 속에 대 학문이 들어있으며 또한 불법의 수지(修持)의 대 신비를 포함하고 있으며, 역경(易經)의 숫자와도 관계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불학을 연구하는 일반인들은 이 방면에 비교적 부족하여 왕왕 이러한 숫자들을 소홀히 하고 지나갑니다. 역대의 고승 중에 두세 명만이 이해했습니다.
진정으로 불법을 배우려는 사람은 ‘무염족(無厭足)’을 배워야 합니다. 세간이나 출세간의 학문에 알지 못하는 것이 없고 자만(自滿)할 때가 없어야 합니다.
세간의 행위가 바로 출세간법을 닦는 것이요, 출세간법을 닦으려면 세간에 들어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을 것입니다. 제가 오늘도 한 출가 학우의 얘기를 하고 있는데, 그는 출가 수도만 알고 있습니다. 만약 세간법을 알지 못한다면 이 도는 헛 닦는 것으로서, 일어나서 행할 수 없습니다. 단지 공허해서 유(有)의 용(用)을 일으킬 수 없습니다. 석가모니도 성불하여서 역시 세상에 나서서 중생을 교화했습니다. 그는 무엇이든지 다 알았습니다. 예컨대 그는 소를 칠지도 알았으며 심지어는 옷을 재단할지도 알았습니다. 그는 일체지를 얻었습니다. 바로 세간법을 통해야 합니다. 그래야 불이법문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합니다.
성불이 이렇게 어려우니 지름길을 가십시오
유마경은 이미 성취가 있는 사람들에 대하여 견지 면에서 꾸짖고 있다는 점에, 우리는 특별히 주의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이 경을 강의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 부처님을 배우는 사람들이 알듯이 도를 깨달아 성불(成佛)하기가 이렇게 어려우니 한 가닥 지름길을 가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염불 공부를 잘 해 가십시오. 자신이 윤회 가운데서 길을 헤매지 않도록 나무아미타불을 염불하여 극락세계 왕생하십시오. 극락세계에 갔다고 결코 이미 성불한 것은 아닙니다. 유학을 잘 가는 겁니다. 그곳 환경에서는 제불보살이 수시로 설법하십니다. 학비도 낼 필요 없고 비바람도 없습니다. 얼마나 좋고 얼마나 편리합니까, 이 문제를 반드시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유마경 강해를 듣는 것은 단지 나쁜 점만 있지 좋은 점은 없습니다! 선(禪)을 배우는 사람들은 유마경을 떠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1, 2천년 이래로 선(禪)을 배운 많은 사람들이 수지 공부가 높은 경지에 이르지 못하여 결국은 역시 윤회 속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특별히 이 점을 제시하니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유마거사 설법에 하늘 가득 꽃비가 내리다
이 상중하 세 권의 책은 남회근 선생의 저작인 ‘화우만천 유마설법(花雨滿天 維摩說法)’ 상하권을 완역한 것입니다. 2005년 6월 28일부터 매주 1회 서울 종로구 소재 정독도서관 건너편의 문향재(聞香齋) 찻집에서 몇 분의 학우님들(김명섭, 김재성, 우영자, 윤성희, 이정숙, 전상희, 정창숙, 제갈문우, 홍성휘 등)과 강독을 시작하였습니다. 마지막 무렵의 몇 회는 인사동 근처의 아미타사와 어느 연구소를 이용하였고 강독은 제5 문수사리문질품 첫 부분까지 2006년 5월 9일 44회 강독을 끝으로 멈추었습니다. 그 뒷부분부터는 구두번역 녹음하였습니다. 컴퓨터 기록 작업은 서문을 포함하여 제1 불국품부터 제4 보살품까지는 김명섭(金明燮) 님이 강독 즉석에서 하였고, 제5 문수사리문질품부터 제10 향적불품까지는 정창숙(鄭昶淑) 님이, 제11 보살행품부터 최후의 제14 촉루품까지는 정윤식(鄭允植) 님이 각각 번역녹음을 청취하여 하였습니다. 학우님들과 기록 수고를 한 세 분께 여기서 일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수년 동안 눈 영양제를 보내주시는 원각성(圓覺性) 이정숙(李貞淑) 보살님에게도 감사드립니다.
실제 번역 착수라 할 수 있는 강독을 시작했을 때로부터는 어느덧 11년여의 긴 세월이 흘렀으며, 2016년 2월 ‘능엄경 대의 풀이’를 탈고한 뒤 곧바로 이 유마경 강의 원고의 최종 검토 정리 착수로부터 완성까지는 7개월이 걸렸습니다. 번역은 문자적인 대응이 아니라 의미적 대응이며, 정교한 오해의 기술이라고도 합니다. 저의 다른 번역본들이 그랬듯이 이 유마경 강의 한글 번역도 쉽지 않았으며 만족스럽지는 않습니다. 그저 ‘법공양을 모든 공양 중에서 최상이요 가장 뛰어나고 제일로서 견줄 데 없는 것으로 여겨야 한다’는 부처님 말씀으로 위로를 삼을 뿐입니다.
남회근 선생 사세(辭世) 4주년인 2016년 9월 28일
선생을 추모하며 지리산 자락 신평리 심적재에서
송찬문 삼가 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