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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1 강 - 機緣品- 5
盖爲一切衆生이 自蔽光明하고 貪愛塵境하야 外緣內擾하야 甘受驅馳일새 便勞他世尊이 從三昧起하사 種種苦口로 勸令寢息이니 莫向外求하면 與佛無二故로 云開佛知見이라하셨고
吾亦勸一切人하되 於自心中에 常開佛之知見하라하건만 世人이 心邪하야 愚迷造罪하야 口善心惡하야 貪嗔嫉妬와 諂佞我慢으로 侵人害物하야 自開衆生之見하니 若能正心으로 常生智慧하야 觀照自心하야 止惡行善하면 是自開佛之知見이라
汝須念念에 開佛知見하고 勿開衆生之見하여라 開佛知見하면 卽是出世요 開衆生之見하면 卽是世間이니 汝若但勞勞執念으로 以爲功課者인댄 何異犛牛愛尾리요
達이 曰, 若然者-댄 但得解義하면 不勞誦經耶이까 師曰, 經有何過완대 豈障汝念이리오 只爲迷悟在人하고 損益由己니 口誦心行하면 卽是轉經이요 口誦心不行하면 卽是被經轉이니라 聽吾偈하라 曰
心迷法華轉이요 心悟轉法華니 誦經久不明하면
與義作讐家하리라 無念念卽正이요 有念念成邪니
有無俱不計하면 長御白牛車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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盖爲一切衆生(개위일체중생)이 自蔽光明(자폐광명)하고→ 그런데 그렇지 못한 우리는 왜 그러냐? 아직은 이런 소리 아무리 들어도 도대체 뭐가 뭔지 모르겠는데, 왜 그러냐? 이 겁니다. 왜 우리는 그런 말이 그렇게 많이 읽고, 많이 들었어도 도대체가 이해가 안 되느냐? 그것은 개위일체중생들이 자폐광명이라 했어요. 스스로 광명을 차단하고 있어요. 가리고 있어요. 자기의 심광명을, 마음의 광명을 가리고,
貪愛塵境(탐애진경)하야→ 바깥경계를 탐애하는 거예요. 그 內面(내면). 우리 인간의 내면을. 정말 인간의 참 모습을 보려고 하거나, 거기에 눈뜨고 거기에 대한 어떤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니고, 눈앞에 펼쳐져 있는 어떤 경계. 바깥 경계. 그것이 진경이지요. 그런 경계에 그만 애착하고 그것을 탐해서,
外緣內擾(외연내요)라→ 바깥으로 그저 보는 족족 攀緣(반연)하는 것이지요. 아이고 저거 좋다. 저것은 나쁘다. 전부 밖으로 이런 저런 것을 걸치는 것이지요. 이래저래 인연을 걸치는 것입니다. 그것이 외연입니다.
그리고는 그것 때문에 어떻게요? 실컷 돌아다니고, 마음 팔리고 그러다가 집에 돌아오면 어디 마음이 안정이 되겠어요? 내요예요. 안정이 안 된다고요.
흥분해서 잠도 잘 안와요. 한참 시간이... 이리 뒤척 저리 뒤척, 뒤척거려야 겨우 잠이 든다고요. 그것이 내요라고요. 벌써 안으로 흔들려 있어요.
바깥경계에 많이 끄달려 놓으면 금방 잠이 안 와요. 영화 보다가 잠자 봐요. 잠이 오나 그게... 뒤척거리다가 한 시간 다 보내는 것이지요.
外緣內擾라는 말이 너무 아주 정확한 말입니다. 밖으로 攀緣(반연)하고 안으로 요동을 쳐서,
甘受驅馳(감수구치)일새→ 구치 = 밖으로 치닫는 것. 막 그냥 마음이 뒤흔들려 있는 것이지요. 구치라고 하는 것은 말[馬]이, 그것도 말이 한 마리가 아니고 여러 마리가 그냥 경주를 하면서 내 닫는 모습을 구치라고 그래요. 驅 = 몰 구. 馳 = 달릴 치. 말이 막 달리는 것. 우리 마음이 그런 식으로 어디론가 쫓아가고 있는 것이지요. 그런 것을 달게 받고 있다.
구치의 어떤 마음상태를 내가 달게 받고 있을세. 느끼고 있는 것이지요.
감수하고 있는 것이지요. 감수!
便勞他世尊(변로타세존)이 從三昧起(종삼매기)하야→ 그래서 문득 수고로이 저 세존께서, 법화경에 삼매에서부터 일어나지요? 그냥 삼매에 가만히 있으면 좋을 텐데, 수고롭게 하거든요. 중생이 뭘 모르니까 어떻게요? 또 본래 깨닫고 나서 그냥 열반에 들어버릴까? 중생들을 보니까 너무 캄캄하니까 저 캄캄한 중생들을 어떻게, 어떻게 일깨울까? 생각하니 참 너무 아득하거든요. 그래서 그만 열반에 들어버릴까? 하는 생각도 했다잖아요.
법화경에서도 곧 저 세존이, 수고롭게 저 세존께서 삼매에서부터 일어나서,
種種苦口(종종고구)로→ 가지가지 입이 쓰도록, 천지도 모르는 어리석은 중생을 하나하나 가르쳐서, 그 수준을 ‘네가 바로 부처다.’ 라는 그 말을 이해하기까지 끌어 올리려면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해야 되겠습니까?
그 입이 쓰도록... 말을 많이 하면 입이 쓰지요. 저는 그런 것 잘 알지요.
아이고, 오후 되면 입이 씁니다. 종종 그 쓴 입으로서,
勸令寢息(권령침식)이니→ 침식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쉬는 것을
“침식”이라고 그러지요. 취침자리에 들어가서 편히 쉬게 한다. 이 말입니다. 치닫고 있는 = 甘受驅馳)하는 사람들을 쉬게 한다. 이겁니다.
밖으로 끝없이 나부대는 마음을 쉬도록 한다. 권해서 쉬게 하니,
莫向外求(막향외구)하면 與佛無二(여불무이)라→ 밖을 향해서 구하지 아니할 것 같으면, 부처와 더불어 둘이 없다. 부처와 똑 같다. 이겁니다.
똑 같은 부처인데, 중생과 부처의 다른 점은 부처님은 자기부처 잘 수용하고 있고, 우리 중생은 자기부처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그냥 돌아보지 아니하고, 밖을 향해서 무엇을 따로 찾는 것이지요. 행복이든. 부든. 영화든. 권세든. 일체 것을 전부 밖에서 찾는 겁니다. 자기 속에서 다 해결 되는데...
대주 혜해스님도 마조스님한테가 가지고는, 선지식 소릴 듣고 멀리서 왔지요. 인사를 하니까, 묻는 말이 “어디서 왔느냐? 뭐 하러 왔느냐?” 대개 그러잖아요. 먼 지방에서 왔거든요. “그 먼 지방에서 여기까지 뭐 하러 왔느냐?” 고 하니까 “오직 부처가 되기 위해서 왔노라” 그런 소리가 깨달은 선지식이 보기엔 어이없는 소리지요. 그 먼 길을...
정말, 옛날에 중국에 여행이라고 하는 것이 쉬운 것이 아니었지 않습니까? 아니 자신이 빤히 다 가지고 있으면서, 가지고 있는 그것을 여기까지 찾으러 왔다니, 너무 어처구니없는 말인 것이지요. 그래 선지식이 보기엔 참 정말 콧구멍이 둘이니까 다행이지 하나였으면 벌써 아마 숨이 막혀 죽었을 겁니다. 깨달은 사람이 보기엔 너무 어이없는 일이지요.
그러니까 “自家寶藏不顧(자가보장불고)하고 豈家散走作삼麽(기가산주작삼마)오?”그런 말을 했어요. 自己寶藏. 자기에게. 네가 구하려고 하는 것은 이미 네가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돌아보지 아니 하고서 그걸 팽개치고 집을 버리고 이렇게 멀리 돌아다니고 하니, 그래서 무슨 의미가 있느냐? 그것은 너에게 아무런 덕 될 일도 아닌데 여기까지 왔느냐? 이것이지요.
네가 여기 와서 뭘 찾고 얻는다하더라도 결국 네가 갖고 있는 것 찾는 것이지, 다른 것 아니다 이것이지요. 거 알고 보면 참 가슴 칠 일일 것이다.
하는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했지요. 대개 깨달으신 선지식들의 말씀을 보면 그렇습니다.
與佛無二(여불무이)→ 부처와 더불어 둘이 없는 고로,
云開佛知見(운개불지견)이라하셨고→ 부처의 知見을 여는,
開示悟入(개시오입). 열어 보여준다. 그것을 들추어서 설명하는 것이지요. 열어 보여준다는 것이 뭐 이렇게 집처럼 되어 있고 하면, 문이라도 활짝 열어서 보여주면 좋겠는데, 그런 식이 아니고 부처님이나 선지식은 문을 열듯이 활짝 열어 보여줬음에도 그걸 모르는 겁니다.
마조스님이 대주스님에게 이야기하기를 “아 너한테 있는 보물은 놔두고 여기 까지 쓸데없이 뭐 하러 돌아다니느냐?” 그거 참 잘 열어 보인 것이지요. 정말 활짝 문을 열어 보인 것인데도, 거 못 보거든요. 그래서 경전에서 佛知見을 열었다고 하셨고,
吾亦勸一切人(오역권일체인)하되→ 나도, 여기 육조스님이지요.
나자신도 또한 일체사람들에게 권해가지고서,
於自心中(어자심중)에→ 자기 마음 가운데서
常開佛之知見(상개불지지견)하라하건만→ 항상 부처의 知見. 깨달음의 知見을 열어라. 자기 마음속에서 그것을 펼쳐라고 하지만,
世人(세인)이 心邪(심사)하야→ 세상 사람이 마음이 삿되 가지고서,
愚迷造罪(우미조죄)하야→ 너무 어리석고 미혹해. 그래서 죄를 자꾸 지어서,
口善心惡(구선심악)이라→ 말은 좋은 말 하는데, 마음은 악해.
이 “악하다.”는 것이 나쁜 짓을 많이 해서 악 하다기 보다는, 선지식의 입장에서 보니까 가까이에 있는 마음하고는 너무 멀어지니까요. 그러니까 그것을 악한일로 보는 것이지요. 그래서 口善心惡이라. 마음하고는 멀어지니까요. 말은 선량한데 마음은 악해서,
貪嗔嫉妬(탐진질투)와 諂佞我慢(첨녕아만)으로→ 아첨할 諂자. 아첨할 佞자예요. 말잘 할 녕 자. 간사할 녕 자. 아첨할 諂자하고 뜻은 똑 같아요. 첨녕아만. 이것은 남을 속이는 그런 의미가 많지요. 탐진. 탐욕. 진심. 질투. 아첨. 그리고 남을 속이고 때로는 또 자기 잘난 체 아만 부리고, 그리고
侵人害物(침인해물)하야→ 사람을 침해하고 또 어떤 사물을 해치는 것이지요. 사람도 침범하고 사람마음 상하게 하고, 또 뭐 손해 보이고하는 그런 일들이 많지요. 침인해물 해서,
自開衆生之見(자개중생지견)하니→ 중생의 지견을 여니, 열어 제치니,
불지견을 여는 것과는 반대지요. 그러니까 衆生之見을 여니까 탐애.
질투. 첨녕. 아만. 침인. 해물. 이런 일들이지요.
衆生의 之見을 여니,
若能正心(약능정심)으로→ 만약 능히 正心. 바른 마음으로,
常生智慧(상생지혜)하야→ 항상 智慧를 내서,
觀照自心(관조자심)하야→ 자심을 관조해요. 자기마음을 환히 관찰하여 비춰본다는 겁니다. 안으로 자기마음을 찾는 일이지요. 그러며는
止惡行善(지악행선)이라→ 악을 그치고 선을 행할 것 같으면,
是自開佛之知見(시자개불지지견)이라→ 이것은 스스로 부처의 知見을 여는 일이다. 衆生之見여는 일 하고, 부처의 知見을 여는일 하고, 중생은 지견이라 아니하고 그냥 “見”했고, 부처는 “知見”이라고 했고요.
그 차이가 있네요. 부처의 知見을 여는 것이다.
汝須念念(여수염념)에→ 그대는 모름지기 念念에,
開佛知見(개불지견)하고→ 순간순간 부처의 知見을 열고,
勿開衆生之見(물개중생지견)하여라→ 衆生之見을 열지말라 이것입니다. 佛知見을 열고 衆生之見을 열지 말라. 그것이 어떻게 하면 그럴 수 있는가? 여기는 그런 방법은 안 가르쳐놓고,
開佛知見(개불지견)하면→ 佛知見을 열면,
卽是出世(즉시출세)요→ 이것은 세속을 떠나서 出世가 아니라, 세상에 살되 세상을 떠난. 그런 정말 出世지요. 세상을 벗어난 삶이요.
開衆生之見(개중생지견)하면→ 衆生之見을 열면
卽是世間(즉시세간)이다→ 출세와 세간의 차이는 바로 그 점이다.
저는 念念에 佛知見을 열고, 衆生之見을 막는 그 방법은, “모든 사람을 부처님이다.”라고 보는 것. “부처님으로 보는 것.” 그것이 佛知見을 여는 것이다. 그렇게 말씀드리고 싶어요.
그건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부처님으로 보니까, 부처님으로 아니까, 모든 사람을 부처님으로 보고 부처님으로 아니까 상불경보살 처럼요.
법화경에 상불경보살 처럼 모든 사람을 부처님으로 알고, 부처님으로 예배하고 공경하고, 찬탄하니까 그것은 오로지 佛知見일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 상대도 佛知見이라고 보고, 佛知見이라고, 부처님이라고 찬탄하는 것이니까...
그냥 덮어놓고 찬탄. 예배. 공경하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인 줄 확실히 알고 예배. 공경하니까... 이것이 처음엔 안 되더라도 훈련이라도, 흉내라도 그렇게 내면, 자꾸 사람을 부처님이라고 생각을 하고, 그렇게 존경을 하고, 얼른 행동엔 안 옮겨지더라도, ‘아이구, 저 못난 것이 저게 부처라는데...’라고 자꾸 이런 생각을 반복해서 하면, 마음이 상당히 편안해져요.
그리고 사람이 좋게 보여져요. 사람이 좋게 보여져요.
억지로라도 자꾸 그런 훈련을 하게 되면 사람이 부처로 까지는 안 보여도 좋게 보여집니다. 사실 제대로 알면, 우리가 제대로 몰라서 그렇지, 사람이 다 본래로 부처님이니까요. 본래로 부처님이니까 제대로 알면 더 말할 나위가 없지요. 그래서 佛知見을 열면 출세요. 衆生之見을 열면 세간이다.
汝若但勞勞執念(여약단노노집념)으로→ 그대가 만약 다만 노노히 집착하는 마음으로, 이것은 피로가 지극하다고 하는 뜻으로, 피로하고 피로하게 아주 집착하는 그런 마음으로써,
以爲功課者(이위공과자)인댄→ 공과를 삼을진댄, 아! 내가 이거 공부한 결과다. 이것이 내가 복지은 공덕이다. 이렇게 아주 힘들게, 아주 아등바등 애쓰는 것. 이것은 그 속뜻은 양 나라 무제를 두고 하는 그런 의미가 보면 좀 있어요.
양 나라 무제는 역사적으로 왕으로써, 불교를 그렇게 옹호한 왕이 드물지요. 인도의 아쇼카왕 못지않게 양 나라 무제는 그렇게 사찰을 많이 짓고, 또 스님들을 나라 법에 의해서 스님을 많이 만들고, 해서 불교를 크게 흥성하게 했는데, 거기에 대해서 노력을 많이 했지요. 노노집념 이지요.
그야말로 그런 데에 노노집념.
그래 놓고는 거기에 대한 그 功을 늘 생각하는 것이지요.
‘하~! 내가 이렇게 좋은 일을 했다.’ 애착이 가겠지요? 그렇게 해서 그 功德에 대한 칭찬을 한 마디 듣고 싶어서, 달마스님에게다 자랑을 했는데, 달마스님은 “小無功德(소무공덕)이다.”그랬잖아요. “공덕 될 것 아무것도 없어.” 그래버리니까 거 어떻게 돼요? 그 노노집념이라는 것이...
이 육조스님께서 ‘달마’라고 하는 말을, ‘양 무제’ 라고 하는 말을 떠올리지는 않았했지만, 이 말을 우리가 가장 이해하기 쉬운 속뜻은 아마 거기에 있지 않나? 합니다. 그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 하겠지요?
또 우리가 뭘 좀 잘하고는 ‘아이고 내가 잘 했는데...’ 하는 이런 마음 갖기가 대개 일쑤잖아요? 그것이 勞勞執念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공과를 삼을진댄,
何異犛牛愛尾(하이이우애미)리요 그랬어요.→ 여기 이우 라고 하는 검은소 이자인데, 야크라고 하는 소 있지요? 아주 사납게 생기고 중국에도 있고 인도에도 있고, 저기 미국 같은 나라에도 있는 검은 소. 우리나라에는 그런 소가 없습니다. 아주 힘이 세서 밭 갈고 논 갈고 하는 소로도 쓰기도 하는 대개 野生(야생)이지요. 그 소가 꼬리를 애착을 한 대요. 자기 꼬리를...
그래서 그 꼬리를 보호하기 위해서 자기 자신이 죽는 경우가 많답니다. 꼬리 보호하다가 자기 죽으면 뭐 합니까? 무슨 이득이 있어요?
犛牛愛尾라고 하는 말이 그런데서 나온 겁니다. 자기 꼬리에 애착하고 꼬리 보호하다가 자신이 죽어버리는 것. 그러니까 이것이 뭐예요?
절 많이 짓고 스님 많이 만들고, 사찰 많이 도와주고 그렇게 해놓고 거기에 대한 애착. 자기가 한 그런 일에 대해서 그것이 큰 공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에 대한 애착을 잔뜩 하고 있으면 어떻게 되요? 그만 그 쪽으로만 마음 쓰지, 진짜 자기본성. 정말 살아있는 자기부처에는 그만 마음을 쓰지 못하고 거기에 이해가 없게 되는 것이지요. 그럼 자기부처는 死藏(사장)시켜버리는 거예요. 살아있는 자기부처는. 진짜 값진 부처는 사장시켜버리는 거예요. 그 쪽으로만 마음이 팔려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꼬리에 마음이 팔려서 결국 자기 자신의 죽음을 맞이하는 그런 상황. 자기 자신을 사장시켜버리는 경우가 되고 만다. 아주 조금 심한 비유이긴 하지만, 선사스님들은 거침이 없으니까요. 거침없이 표현하니까 그렇게 그런 비유를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법달이라고 하는 스님이 3000讀을, 법화경 3000독 대단하지요. 법화경을 3000독을 했는데 그걸 가지고 我慢(아만)통을 아주 부렸지요. 인사도 잘 하지 않고 그랬잖습니까? 뻣뻣하게 있으니까, 인사라고 하는 것이 머리가 땅에 닿아야 인사인데, 네는 도대체 머리가 땅에 닿지도 않으니 그 따위 예배가 어디 있느냐?
하는 행세를 보아하니까 네가 속에 뭔가 자랑할 만한 꺼리가 있는가 보다. 一見(일견)에 육조스님은 그냥 그것을 꿰뚫어 봅니다. 그러니까 아, 나는 말이지 법화경을 3000부나 읽었노라고... 그런데 뜻은 잘 모른다. 이렇게 해서 이야기가 여기까지 왔는데, 이 대목의 내용이 참 불교의 진수만 담아놓은 그런 내용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達(달)이 曰(왈)→ 법달이라고 하는 이가 말하기를,
若然者(약연자)인댄→ 만약 그렇다면,
但得解義(단득해의)하면→ 다만 해의. 그 의미만을 이해를 한다면
不勞誦經耶(불노송경야)이까→ 수고롭게 경 외우지 않아도 되겠네요? 이런 뜻이지요. 사실이지요? 경은 많이 읽자고 하는데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그 깊은 의미를 우리가 깨닫는데 뜻이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또 많이 읽으니까 그런 것이 그런 기회가 있는 것입니다. 일단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많이 읽는 것이 중요해요. 그렇다고 많이 읽은 것을 가지고 어떤 공덕으로 삼으면 곤란하지요.
그 전에 어떤 거사가 제가 듣는데 자랑했다가, 제가 여러 번 그것을 이야기하게 되는데요. 불교서점에 들어갔다가 아, 내가 그 동안 좌선을 한 것이 뭐 2000시간이라던가? 그때 아무튼 자기 계산에 2000시간이라던가? 제가 기억에 그렇더라고요. 그 몇 시간 앉아서 좌선했다는 것을 일일이 기록을 해가지고는 그것을 자랑하고 있는 거예요. 그것도 장한 일이지요.
2000시간 좌선했다는 것도 장한 일인데, 그거 좀 그렇지요? 그것이...
그렇지만 그런 과정을 통해서 또 진정한 깨달음이 있게 되겠지요. 그러니까 경을 “몇 번 읽었느냐?” “몇 번 읽었느냐?”하는 것이...
우리 강원에서 보면 옛날에 성냥 통 큰 것을 놓고 성냥 통 속에 성냥이 한 100개쯤 들어있어요. 그것을 이쪽으로 한 번 옮겼다가 이쪽으로 한 번 옮기고, 한 번 꺼냈다가 다시 담으면 200번이 된다고요. 이것을 몇 번씩해요. 하루 배운 것을요. 그 정도로 열심히 읽습니다. 그래가지고 “몇 번 읽었다.” 하는 그런 숫자도 자랑 아닌 자랑으로 삼기는 합니다마는, 사실은 수고롭게 경을 안 읽어도 뜻만 제대로 이해한다면 그것은 좋은 일이지요.
師曰, 經有何過(사왈, 경유하과)컨대→ 경에 무슨 허물이 있기에, 무슨 허물이 있어서
豈障汝念(기장여념)이리오→ 어찌 네 마음을 장애 하겠느냐? 경에는 아무런 허물이 없다 이겁니다. 그래서 너를 장애 할만한 그런 일이 아니다.
只爲迷悟在人(지위미오재인)하고→ 다만 알고 모르고, 깨닫고 미혹하고, 미혹하고 깨닫고 하는 것은 사람에게 있는 것이다.
損益由己(손익유기)니→ 손해와 이익은 자기를 말미암는 것이다.
口誦心行(구송심행)하면→ 입으로 외우더라도, 마음으로 그것을 이해해서 실천 하면,
卽是轉經(즉시전경)이요→ 우리가 경전 읽는 것을 “전경”이러거든요.
轉 = 구를 전. 경전을 굴리는 것이고,
口誦心不行(구송심불행)하면→ 입으로 외우고 마음으로 행하지 아니하면,
卽是被經轉(즉시피경전)이니라→ “전경” “경전” 다르지요? 곧 경이 나를 굴린다 이겁니다. 내가 경을 굴리는 것이 아니고, 경이 나를 굴리는 것을 입게 된다. 당하게 된다. “전경”이것이 중생들이 참 문제가 많지요? 일본에는 사십구재할 때, 경을 안 읽어요.
염불 좀 하고는 옆에다 잔뜩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그것은 帖(첩)으로 된 경전인데요. 아예 경전 용을 만들었어요. 그래가지고 아코디온 켜듯이 이렇게 착 펴고, 또 이렇게 해서 착 펴고, 그래 양쪽에 경이 써져 있으니까 영단이나 불전을 향해서 그 경문을 이렇게 보여요. 또 이렇게 해서 착 이렇게 보이고, 하는 식이 있어요. 그래가지고 착 접어가지고 착 놓고, 그 동작이 아주 질서정연하고, 아주 볼만 해요 그것도... 그런 식으로 이쪽에 잔뜩 경을 쌓아 놓으면, 그럴 다 이쪽으로 옮기는 거예요. 사실은 그거 뭐 하는 짓입니까?
그런데 티벳트 사람들은 어떻게 하느냐? 경을 물론 잘 읽어요.
많이 읽기도 하지마는... 천에다 경을 써가지고 걸어놓는 거예요.
바람 날리는데, 바람에 그 경문이 날아가서 만 천하에 퍼지라고 하는 뜻으로요. 의미는 좋지만 그걸 그냥 그것이 진짜 그런 줄 알고, 그것을...
그 어려운 생활에, 천 만들기가 얼마나 힘든 나라입니까? 그런데 그 아까운 천에다가 경을 막 찍고 쓰고 해서 산이고 어디고 들판이고 막 걸어놓는 거예요. 그래 바람에 날려서 경이 날아가라고...
경이 날아가면. 경 쓰는 사람도 모르는데 날아가는 소리 듣고 알 사람이 누가 있어요? 경전이라고 하는 것이 참 좋은 뜻이지마는, 또 그렇게 와전이 돼가지고... 그것도 하나의 인연이라고 보면 또 인연이지요. 그래도 우리나라는 읽기라도 한다고요. 뜻을 몰라도 읽기라도 읽는 겁니다. 소리 내어 읽기는 읽거든요. 경전을 그렇게 사람이 소리 내어 읽으면 좋을 텐데 그 구를 轉자를 해놓으니까 바람에 굴리기도 하고 손으로 굴리기도 하고 그러는지 어쨌든 아무튼 그렇습니다.
여기 육조스님은 그런 차원을 넘어서서 정말 정곡을 찌르는 소리인데요. 입으로 아무리 외워도 그것이 마음이 따라가지 아니하면, 그것이 경이 나를 굴린다 이겁니다. 경이 나를 굴리는데 내가 당하게 된다 이겁니다.
내가 경을 굴려야지요. 그것은 마음이 따라가면 그건 내가 경을 읽는 것이 되는 것이지요. “전경” 내가 경을 읽는. 굴리는 것이 된다. 경이 나를 굴리는 것이 아니고요.
육조스님의 정신세계라고 하는 것은, 정말 明鏡止水(명경지수)와 같은 것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별로 힘들지 않고 하신 말씀이겠지만 참 명확하지요. 聽吾偈(청오게)하라→ 내 게송을 들으라. 曰(왈)
心迷法華轉(심미법화전)이요→ 마음이 어두우면 法華가 나를 굴리고, (나라고 하는 것이 뒤에 없지만) 법화경이 나를 굴리고,
心悟(심오)하면→ 마음이 밝아 있으면,
轉法華(전법화)라→ 내가 법화경을 굴린다.
誦經久不明(송경구불명)하면→ 경을 외우더라도, 경을 아무리 오래 외우더라도 그 뜻을 밝히지 못할 것 같으면,
與義作讐家(여의작수가)니라→ 그 의미로 더불어 원수 집처럼 된다는 겁니다. 그 의미하고는 아무 상관없이 되는 것이지요. 오히려 여기는 더 극적인 표현으로, 의미로 더불어 원수집이 된다. 수가를 지으리라.
無念念卽正(무념념즉정)이요→ “念” “念”하지만 “念”이 있으면 그것은 좋은 것이 아니지요. 無念의 念이 곧 바른 것이고,
有念念成邪(유념념성사)니→ 有念의 念은 성사다. 그랬습니다. 삿된 것을 이룬다. 無念이라고 해서 마음상태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니까요. 有念하면 이것저것 어떤 경계를 쫓아가는 마음이 되니까요. 그러면 벌써 삿된 것이 되고 만다.
有無俱不計(유무구불계)하면→ 有念이다. 無念이다 하는 것에 대해서 거기에 함께 사량하지 않는다. 계교하지 않는다. 마음으로 이렇다 저렇다. 거기에 끄달리지 아니할 것 같으면,
長御白牛車(장어백우거)하리라→ 기리 백우거를 몰고 가리라. 백우거는 법화경 비유품에 나와 있는 화택비유에 있는 말이지요.
이 백우거라는 한 마디 말. 이 한 마디 말만 우리가 깊고 넓게 이해하면 불교 다 이해하는 것이 됩니다. 우리가 사는 이 현실을 불타는 집이다.
그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지요. 어떤 장자가 있는데, 그 장자의 집은 아주 거대한 집이예요. 그런데 그 집이 다 낡아서 허물어져요. 석가래고 기둥이고 막 그냥 허물어지고 형편없어요. 그리고 그 안에는 온갖 짐승이고 벌레고 막 들끓고 있어요. 그런데 불까지 타고 있어요.
어디 한 모퉁이에서 불이 타는 것이 아니고, 전체에서 일어났다 그랬어요. 그래 집이 여러 채지요. 그리고 담으로 둘러쳐져 있고요. 높은 담으로 둘러쳐져 있고, 그 담 안에 집이 여러 채지요. 그 집은 다 쓰러져 가고 있고... 그 안에 온갖 벌레 짐승 할 것 없이 이리뛰고 저리뛰고 놀고, 지저분하기도 이를 수 없고... 그런데 거기에서 불이, 맹렬한 불이 동시에 일어났대요.
그런데 그 안에는 아이들이 500명이나 장난치고 논다.
깨끗한 집 같으면 장난칠 것이 없을 텐데 형편없는 집이니까요.
그것도 불이 일어나니까 불장난도 하고 뭐 온갖 짐승들 뭐 이런 것. 쥐니 벌레니 이런 것들 많이 뛰어다니니까 그것들 하고 장난치고, 뭐 엉망인 것이지요. 그것이 우리가 사는 현실을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산문에는 표현이 조금 점잖고, 그 다음에 게송에는 더 길게 아주 자세하게 그려 놨는데요. 지금 오늘의 우리의 현실을 너무 사실적으로 그려 놨어요. 저는 그것을 읽을 때마다 아주 탄복을 하는데, 너무 사실적으로...
거기가면 온갖 짐승들이 막 그냥 서로 물고 뜯고, 그 한 마리 잡으면 또 딴 놈이 와서 그 잡은 짐승을...
왜 내걸 먹느냐 하고는 또 그 놈하고 으르렁대고 또 그거하고 싸우고,
그러는 사이에 또 딴 놈이 와서 그 잡아놓은 그 짐승을 물고가고, 그러면 또 두 놈이 와르르 쫓아가서 물고, 우리나라 정치판이나 경제계 판이나 아주 그냥 똑 같아요. 그대로 그려놨어요. 어쩌면 그렇게 그대로 그려놨는지 아무튼 읽어보세요. 법화경 게송 부분, 게송 부분이 더 그래요. 더 아주 리얼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너무 아주 적나라하게 그려놔서 아~ 아무튼 볼 수가 없어요.
그것이 우리 살아가는 인간의 현실을 그려놓은 것이거든요.
그런데 거기에 그 불타는 집에서 곧 타 죽을 아이들이 문제인 겁니다.
저희들끼리야 싸우든지 말든지 그것은 놔두고... 그래 아버지가 이 아이들을 바깥으로 유인해 내야 되는데 유인해 내려고 하니까 방법이 없는 거예요. 그 불타는 집에서 장난치기에 너무 정신이 팔려 있어서...
그래서 아이들이 평소에 좋아하는 수레를 만들어 놨다고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저 담 너머에 큰 길이 있는데 거기 가면, 양이 끄는 수레. 사슴이 끄는 수레. 소가 끄는 수레. 세 가지 수레가 있는데 너희들 하나씩 줄 거야. 아주 멋있어. 그렇게 하니까 애들이 장난치던 것을 그만두고, 아 수레, 우리 가서 수레타고 놀 꺼야. 하고 아버지 따라서 바깥으로, 집 밖으로 다 나오게 된다고요.
나오게 되는데 정작 나와 보니까, 羊車(양거). 鹿車(녹거). 牛車(우거).
양이 끄는 수레. 사슴이 끄는 수레. 소가 끄는 수레는 없는 겁니다.
없다고요. 없고 뜻밖에도 白牛車. 大白牛車(대백우거). 큰 대자를 하나 더 붙여야 돼요, 크고 흰 소가 끄는. 설산에서 몰고 온 커다란 소가 끄는 수레인데, 이 수레는 전부가 금은보화로 장식을 하고, 막 그냥 커텐이니 뭐니 그냥 앉을 자리니 이런 것들을 얼마나 호화롭게 금은보화로 장식을 했는지 이루 말할 수가 없어요. 도저히 설명을 다 할 수가 없을 정도로 그렇게 훌륭하고 거대한 수레예요. 그런 것이 있다 이거예요.
그것도 여러 대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그것을 애들한테 다 나눠줬어요. 그런데 왜 처음부터 그 얘기를 안하고, 애들이 좋아하는 양거. 녹거. 우거만 있다고 했느냐? 처음부터 크고 흰 소가 끄는 화려한 수레. 이 지상에서 둘도 없는 그런 훌륭한 수레가 있다고 하면 애들이 그걸 안 믿는다 이겁니다. 안 믿어요. 안 믿으니까 안 믿는 소리 백날 해봐야 되느냐 이겁니다.
그 애들 수준에 맞추어서 유인해 내려고 하다보니까요. 그래서 양거. 녹거. 우거가 있다고 거짓말을 일단 해놓고 나온 뒤에는 大白牛車를 주게 된 것이지요. 그러니까 사실은 聲聞(성문) · 緣覺(연각) · 菩薩(보살)이라고 하는 이 중간 단계는 없는 것입니다.
없고, 오로지 唯有一佛乘(유유일불승)이라. 뒤에도 또 나와요.
無有餘無乘(무유여무승). 若二若三(약이약삼).
乃至無數方便(내지무수방편). 種種因緣(종종인연). 譬喩言詞(비유언사).
그것이 전부 방편이거든요. 그럼 결국은 오직 一佛乘(일불승)이라고 하는 것. 이것 하나뿐이다. 그럼 그것은 뭐냐? “사람이 부처님이다.” 이겁니다.
무슨 그 중간 단계. 아라한이다.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 성문. 연각. 보살 이런 것은 없는 것입니다. 사람은 처음부터 부처입니다. 아예 사람은 처음부터 부처입니다. 그런데 처음부터 부처라고 하면, 이것을 제대로 수용할 사람이 없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나한이 된다. 아라한이 된다. 성문이 된다. 연각이 된다. 기도 잘하면 뭘 성취한다. 물론 성취하는 것도 있지요. 분명히 있지요.
그렇지만 그것이 우리 수준에 맞는 아주 달콤한 유인할만한 꺼리지요.
그 얘기에 전부 귀가 솔깃하다고요. 그래서 부처님이 그런 수많은 방편의 말씀을. 숱한 거짓말을 해가면서 중생을 유인 해내고, 그래서는 결국은 백우거의 일불승! 사람의 근본은 참으로 위대하고 훌륭한 영원한 생명이고, 한량없는 공덕과 무량복덕과 또 무한한 신통묘용이 본래로 인간의 마음속에 갖춰져 있는 그것을 드러내는 것.
이것이 불교의 전체 의미이고, 따라서 법화경의 의미인 것이지요.
그래서 백우거라는 말 한마디는 그런 많은 내용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이 법달이라는 스님이 법화경을 공부한 그 인연으로 육조스님한테 와서 이야기를 하게 되니까, 그래서 육조스님께서 이런 법문을 하게 되었지요. 그래 이 이야기가 뒤로 좀 더 계속 이어집니다.
육조스님같이 부처님이라고 추앙받는 그런 뛰어난 선지식이기 때문에, 불교의 궁극의 가르침인 법화경! 또는 법화경의 사상인 대백우거사상!
또는 일불승사상! 그 일불승은 오직 부처라고 하는 사실. 그것 하나뿐이다. 그것만이 진실이라는 내용인데요. 그것은 곧 사람자체를 가리킨 것이지,
更無別佛(갱무별불)이라.(50강) 따로 다른 부처가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는 그런 내용이 되겠습니다.
오늘 이야기가 법화경이기 때문에도 그렇고 또 이 육조단경의 내용도 그렇기도 해서, 뭐라고 할까요. 제 생각에 불교의 아주 진수가 이속에 담겨있지 않는가? 그런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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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_()_()_()_
법우님들의 도움을 바랍니다. ?? 를 가르쳐주세요. _()_
念念에 佛知見을 열고, 衆生之見을 막는 그 방법은, “모든 사람을 부처님이다.”라고 보는 것. 그것이 佛知見을 여는 것이다...대원성님, 고맙습니다. _()()()_
汝須念念에 開佛知見하고 勿開衆生之見하여라 開佛知見하면 卽是出世요 開衆生之見하면 卽是世間이니...고맙습니다._()()()_
<게송> 心迷法華轉이요 心悟하면 轉法華라. 마음이 어두우면 法華가 나를 굴리고 마음이 밝아 있으면 내가 법화경을 굴린다. 誦經久不明하면 與義作讐家니라. 경을 아무리 오래 외우더라도 그 뜻을 밝히지 못할 것 같으면 그 의미로 더불어 원수집 처럼 된다. 無念念卽正이요 有念念成邪니, 無念의 念이 곧 바른 것이고 有念의 念은 삿된 것을 이룬다. 有無俱不計하면 長御白牛車하리라. 有念이다. 無念이다 하는 거기에 함께 끄달리지 아니할 것 같으면 기리 白牛車를 몰고 가리라... 대원성님! 감사드립니다... _()()()_
唯有一佛乘 _()()()_
莫向外求(막향외구)하면 與佛無二(여불무이)라. 밖을 향해서 구하지 아니할 것 같으면, 부처와 더불어 둘이 없다. 부처와 똑 같다.....대원성님
me to...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_()()()_
莫向外求하면 與佛無二라....대원성님^^ 수고하셨습니다..고맙습니다.._()()()_
대원성님, 어떡해요? 저 역시 잘 못 알아 듣겠네요... 고생많으셨어요... 감사합니다 _()()()_
나도 못 알아 듣겠고, 汝도 못 알아 들으니 우야노...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_()()()_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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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반야바라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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心悟(심오)하면→ 마음이 밝아 있으면, 轉法華(전법화)라→ 내가 법화경을 굴린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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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배 올립니다
중생과 부처의 다른 점은 부처님은 자기부처 잘 수용하고 있고, 우리 중생은 자기부처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그냥 돌아보지 아니하고, 밖을 향해서 무엇을 따로 찾는 것이지요. 행복이든. 부든. 영화든. 권세든. 일체 것을 전부 밖에서 찾는 겁니다. 자기 속에서 다 해결 되는데...
나무마하반야바라밀 나무마하반야바라밀 나무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_()()()_
사람의 근본은 참으로 위대하고 훌륭한 영원한 생명이고, 한량없는 공덕과 무량복덕과 또 무한한 신통묘용이 본래로 인간의 마음속에 갖춰져 있는 그것을 드러내는 것, 이것이 불교의 전체 의미이고, 법화경의 의미.....
心迷法華轉 心悟轉法華 ... _()_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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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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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_()()()_
고맙습니다 _()()()_
감사합니다.()
사람이 부처님이다 _()_ _()_ _()_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_()_ _()_ _()_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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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_()_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_()()()_
감사합니다. ()()()